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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박신영 저
바틀비 | 201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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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은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각 대륙, 국가별로 나뉘어져 가지런히 꽂혀 있는 빨간 책등을 바라보면 가슴이 설렌다.

(p.7 초판 서문)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저자가 봤다는 계몽사판은 아니었지만 아동 필독서와 여러 위인전들, 아문센 탐험기, 히말라야 정복기같은 비문학 작품도 수록된 괜찮은 전집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몇 번씩 읽고 또 읽은 그 책들 덕분에 나는 꽤 똑똑한 어린이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이야기들은 역시 말랑말랑한 동화들, 왕자 공주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동화는 여전히 재밌었지만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동화 속 나라들은 얼마나 작기에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며칠 만에 온 나라의 아가씨들이 신어볼 수 있었을까? 왕자는 왜 말 한마디 안 나눠본 공주와 결혼하는 걸까?

궁금하긴 하지만 어디 물어보긴 애매한 질문들. 그저 나라가 무척 작았나보다. 또는 공주가 엄청 예뻤나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동화 속 왕자와 공주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바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동화 속 왕자와 공주를 잊지 않은 사람이 있다.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의 저자 박신영.

그는 어릴 적, 동화를 보면 이야기 그 자체보다 이야기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나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이 더 궁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책도 썼다. 지금은 후속작인 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까지 냈으니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저자의 첫 책이자 성공적인 덕질의 결과물인 셈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이 알려진 27편의 문학작품을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 세계사의 악당, 조연, 그리고 마녀

2. 잘난 영웅, 억울한 영웅, 이상한 영웅

3. 욕망이라는 이름의 역사

4. 역사는 비슷한 운율로 반복된다.

 

1부 제목부터 심상찮다. ‘악당, 조연, 그리고 마녀라니. 그동안 한 번도 주목받아본 적 없는 엑스트라들이 주인공으로 격상되었다.

첫 이야기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에서 저자는 백마 탄 왕자가 작은 나라의 차남이하 아들이라 물려받을 왕위도, 영지도 없는 사실상 백수라 조건 좋은 공주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거라며 뽀샵된 동화의 환상을 깬다.

1부에서는 악인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진다. 저자는 공주를 괴롭히는 나쁜 왕비를 변호하고,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당으로 그려진 샤일록의 억울함도 풀어준다. 당시의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도 없어서 금융업에 종사했을 뿐인데 세익스피어가 너무 했다고 말이다.

 

그들이 위대한 연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교황과 황제가 지배하는 중세적 질서, 자식의 인생길을 정해주는 가장인 아버지의 질서에 저항하여 개인의 권리를 외친 각성한 인간이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들의 시대가 안고 있는 그릇된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선택한 뒤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p.102)

 

2부 잘난 영웅, 억울한 영웅, 이상한 영웅 편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등장한다.

로빈 후드, 잔 다르크, 돈 키호테, 해리 포터와 함께. 다른 인물들이야 고대의 영웅 신화와 형태는 조금 달라도 영웅으로 볼 수 있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말 의외였다. 이 작품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도 들지 못하는 그저 철부지 10대의 사랑이야기가 아닌가. 이렇게 겉만 보고 판단하는 내게 저자는 사랑 이야기 속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찾아 그들의 행동이 중세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는지 설명한다.

 

미국 독립 혁명이나 남북전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낭만적인 혁명과 자유, 정의의 이미지로만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한 꺼풀 들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국 독립 혁명은 영국의 귀족 및 자본가들과 미국의 신생 엘리트 및 자본가들 간의 이권 대립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어른이 되어 소공자읽기가 재미난다는 말을 맨 앞에 했다. 서로를 죽을 듯이 미워하는 영국 귀족과 미국 잡화상 주인은 바로 미국 독립전쟁이라는 역사의 링에 선 대표 선수들인 셈이다.

(p207)

 

3부 욕망이라는 이름의 역사에서는 빨간 구두’, ‘왕자와 거지’, ‘소공자’, ‘소공녀등을 재해석한다.

이 중에서 가장 반가웠던 작품은 소공자. 오래 되었지만 워낙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아직도 세드릭이 홉스 아저씨 가게의 비스킷 박스 위에 앉아 있던 장면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알지도 못했던 부자 백작 할아버지에게 작위와 재산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왜 세계명작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 읽던 어린이용 세계 명작은 대부분 교훈을 담고 있었고, 읽은 다음에는 배울 점이 뭔지 생각해보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착한 일을 많이 해도 돈 많은 백작 할아버지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다행히 저자는 소공자를 마른 꽃잎처럼 줄거리로만 기억하는 내게 당시 미국과 영국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미국의 잡화상 아저씨와 영국의 백작 할아버지를 미국 자본가와 영국 자본가의 대표이자 독립전쟁의 두 주체로 설정하여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학교 지붕에서는 비둘기가 낮은 소리로 꾸르륵 꾸르륵 울었습니다. 나는 그걸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비둘기까지 독일어로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

그리고 아메르 선생님은 이번에는 프랑스어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확한 말이란 것과, 이 말을 잘 지켜 결코 잊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p.246~248 )

 

4부 역사는 비슷한 운율로 반복된다에 등장하는 마지막 수업의 일부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빼앗겼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이 애틋한 작품에 저자는 의문을 품는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알자스 로렌지방은 오랫동안 독일 영토에 속해있어서 주민들이 독일어와 독일 풍습에 더 익숙하다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란 없고, 모든 모국어는 전부 아름답다고. 그러니 프랑스 극우파 작가의 소설에 더 이상 속지 말라고 강조한다.

마지막 수업뿐이랴. 저자는 독자들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안네의 일기때문에 유대인만 나치 독일에 희생당했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엄마 찾아 삼 만리를 읽을 때는 지금도 어디선가 울고 있을 수많은 마르코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해묵은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고자 저자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책 뒤쪽의 참고문헌만 헤아려도 117권이다! 저자의 이런 치열함 덕분에 명작동화 속 박제된 왕자와 공주들이 각자의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진짜 사람이 되었다.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부제: 명작동화 속에 숨어 있는 반전의 세계사.

제목만 봐도 읽고 싶어지는 책이지만 짧은 동화 속에 얽히고설킨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래도 친숙한 동화를 기본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덕에 파편으로만 기억되던 세계사 퍼즐이 조금은 맞춰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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