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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욕망의 판타지 | 독서일기 2.0 2010-05-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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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은교

박범신 저
문학동네 | 2010년 04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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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범신 - <촐라체>와 <은교>, 욕망의 층위를 다루는 소설들

 

 

2년전 <촐라체>를 읽었을 때다.  배다른 형제인 상민과 영교의 촐라체(히말라야 6000미터 고봉) 등반기를 다룬 소설은 단순한 등반 소설로 읽기엔 아까웠다. 그러나  이 소설을 등반 소설로 읽은 이들이 많았고,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히말라야의 최고봉은 아니지만,  4000 미터의 수직 빙벽을 자랑하는 악명높은 산에 도전하는 두 젊은이의 열망을 담고 있는 소설에서 난 그들의 용기와 형제애를 눈여겨 봤다. 또, 그들 앞에 놓인 고봉의 수직 빙벽은 그들이 삶에 마주한 해소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의 다른 형체를 드러내 놓기도 한다.  나는 2년 전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겨울, 혹한의 설산에서 겨우 구원된 상민과 영교, 그리고 `나'는 무언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 막 깃든 희망의 불씨를 지펴보려하는 노력을 엿보인다.  그들 각자의 삶은 촐라체를 통해, 다시 정리되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작가로서의 길을 갈 것이고,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잘라낸 손과 발을 통해서라도, 이 생을 성실히 살아갈 것이란,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구점은 남아 있다.  그들을 그 엄혹한 촐라체로 내몬, 내면의 공허, 존재의 공허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질 수 없다. 나는 그것이 해결된 듯 하면서도 석연찮이 종결짓고 있는, 이 소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촐라체 리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러나 <촐라체> 이후, 그의 소설에 깃든 중량감이 마음에 들었다.  <촐라체>는 설산을 오르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그건 항상 허망한 것을 좇아 정열을 불사르는 인간의 오류를 드러낸 소설이기도하다.  나의 이런 평가는  종교안에서 궁극의 구원이란 관점을 놓고 볼때,  그들의 노력이 무위하단 생각에서였다.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올랐다.  그보다 30년 앞서 에베레스트 정복에 나섰던 조지 말로니는 비록 정상 부근에서 실종됐지만,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

 

<촐라체>는 욕망에 관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서 드러난 욕망은 목숨을 걸고 설산을 오르는 인간의 수직적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쉽게 드러나지 못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말로니의 답이 싱거운 이유다.  욕망에 형체가 없고, 욕망에 한계가 없다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  설산의 수직  욕망은  목숨을 내건 도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제 작가는 <은교>라는 소설을 들고 나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 미친듯이 한 달 반만에 써" 완성한 작품이다.  무엇이 작가의 펜을 내달리게 했을까?   이 소설은 한 노시인의 섹슈얼리티[성욕,성생활]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작품이다.  풍채높고, 존경받는 노시인은 뭇 사람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것을 감수하고 고매한 예술이 성욕이라는 치부를 통해 벌거벗는 과정을 우린 소설 <은교>를 통해,  체험한다.   결과적으로 <촐라체>와 <은교>에서 내가 본 것은 하나가 아닌가?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이고, 욕망의 층위는 다양하지만, 결국 모든 욕망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예술의 옷을 입거나, 고산에 대한 의지를 담고,  17살 여자 아이에 대한 뜨거운 시선을 품는다.

 

층위의 다양함은 때로 이성 그리고 도덕과 양심에 반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본질이 추한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어떻게 새로운 층위로 변화시키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촐라체>의 수직적 본능은 무한대의 욕망이 형제애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지상 생활로의 복귀라는 긍정적인 결론을 이끈다.  그렇다면,  <은교>의 섹슈얼리티가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아갈 통로를 마련해 주고 인간의 성적 욕망을 판타지로 치환함으로써 독자와 작가가 합의할 지점을 설정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과정이 소설 <은교>를 통해 지켜보고 싶은 대목이다.

 

 

 

2. 젊은 작가의 부정과 노시인의 일탈은 무죄

 

일탈과 부정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노시인 `적요'와 그의 애제자 `서지우'의 연대기는 용기의 드라마다. 아무리 시가 순수와 정직을 뿌리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을 앞에둔 명예로운 노시인이 손녀뻘 되는 17살 여자아이에게 욕망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 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 박범신, <은교>, p.11

 

노시인 적요, 그는 어떤 사람인가?  평생 12권의 시집을 냈다.  내는 시집들은 평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시 이외엔 발표한 글이 없다.  그는 진정 시만 썼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엔 시대를 통찰하는 힘과 시대를 고백하는 양심이 담겨 있었다. 민주화와 개발 독재를 거치며, 그는 시대를 조망했고 하나의 담론으로 언제나 시대를 전망하고 이끌었다.  그의 시는 문단과 정치, 사회운동과 종교계의 지지를 받았다.  일흔에 다다른 그의 명성은 더이상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사후에 Q변호사에게 남긴 비밀노트엔 살인의 고백이 담겨 있다. 그것도 평생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애제자 서지우를 자동차 사고를 위장해 죽였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노트가 사후에 공개되길 희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세웠던 시성(詩聖)의 탑을 무너뜨리길 희망한다.  더군다나, 그 노트에는 그를 `할아부지'하며 따랐던 천진난만한 아이, 은교에 대한 욕망이 그득하다.  그는 은교를 범하진 않지만, 마음속에선 수십번 은교를 품에 안고 욕망한다.

 

서지우,는 스승 적요의 희생냥은 아니다.  스승의 눈에 차라리 `문학을 안게 절망이 된 사람'으로 묘사되는 `멍청한 제자'는 스승과 협잡하여 미스터리 포르노 그라피를 발표한다.  물론 그 작품은 스승 적요의 것이다.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스승의 작품 <심장>을 통해, 서지우는 문학적 명성이 건네는 꿀을 핥는다.  단맛을 알아버린 서지우에게 문학은 명성과 돈을 갖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한 것이다. 서지우는 스승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했고, 스승은 그에게 가짜 재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공정한 게임이 파탄나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스승 적요의 눈에 들어와 단번에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은교'라는 아이를 통해서다.

 

"그렇지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르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p. 91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공생의 관계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관계에는 사랑이 없다.  필요성은 사랑이 아니다.  노시인 적요와 애제자 서지우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다.  그러나 악어인 적요가 이제 악어새인 제자와 경쟁 관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경쟁은 적대의 전 단계이자, 경쟁은 필연적으로 적대로 가게 돼 있다.  은교를 육체와 정신으로 욕망하고 범하는 이들은 공생관계에서 공범관계로 돌입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또 그것은 일탈과 부정이 도달할 마지막 처소이기도 하다.

 

다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은교는 누구인가?  알 수 없다.   작가는 은교를 형상화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와 대사로서 존재할 뿐이다.  욕망의 주체에게 그 대상은 대개 이미지로서만 존재해야 욕망하기 쉽다.  그게 은교의 정체가 흐릿한 이유일까?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끝없이 추락하는 이 두 남자의 세계를 알고 속아주는 포용력과 범할 수 있으나 범하지 않는 인내라는 미덕을 통해 긍정적 의미의 `사랑'인, 아가페로 변화시킨다.   자신을 살해하려는 스승의 은밀한 계획을 따져묻지 않고 죽음이란 운명에 도달하는 서지우는 그 음란함에도 독자의 지지를 받는다.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상상하는 노시인 적요의 모습은 바람이 아니라 로맨스 였다는 주장만큼 재미있지만 대신 은교에 대한 욕망이 사랑으로 변화되었단, 진정성을 품는다.

 

이 소설은 세상의 모든 노망든, 망측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사랑이란 감정에 깊은 공감으로 저항하고, 면죄부를 주려한다.   사실, 서지우나 적요가 품고 있는 욕망은 우리들의 욕망이기도 하니,  함부로 돌 던질 수 없다.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무죄를 선언하는 근거요, 당당함이다.    비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에 약하며, 우리는 쉽게 유혹당한다.   17살, 은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3. 어떤 욕망에 면죄부는 가능한가?

 

이 소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소설이기는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서지우, 부족한 재능을 가진 문학지망생, 그가 가진 상승의 욕망은 스승의 또다른 작품을 훔치는 것으로 지속돼 간다.  노시인 적요,는 마침내 서지우가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고 몰래 숨겨둔 미발표 소설, 희곡, 산문 등을 가져갈 것이라 상상한다. 섬뜩할 일이다. 영혼을 훔쳐 명성을 유지하는 일.  욕망의 층위는 다양하지만, 그 성질은 같다는 것을 그가 보여준다.

 

그러나, 은교의 등장은 이 관계를 전복시킨다. 젊고 힘있고 탱탱한 서지우에게 늙은 시인 적요는, 열등감을 갖는다.  서지우와 은교의 성교 장면은 그의 열등감이 폭발되는 정점이다.   늙고, 병든 몸은 서지우의 재능의 전무함과 대비될 만 하다.  그 둘은 자신이 갖지 못한 대상을 욕망한다.  서지우는 스승의 재능을,  노시인은 서지우의 젊음을, 탐한다.  그러나, 탐낼 수는 있지만 가질 수는 없을 때 인간은 범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서지우가 스승의 작품을 훔치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노시인이 애제자를 계획 살인하려 든다.  상상이 상상으로 흐르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질 때 판타지는 그 모든 긍정적인 요소까지도 잃어버린다.

 

이 소설은 낯뜨거운 문장들로 가득하다.  설정은 우리의 취향과 몸에 맞지 않는다.  17살, 은교를 욕망하는 노인은 아름답지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작가는 나름의 방어장치를 둔다.  마음으로 욕망하지만,  젊은 서지우처럼 은교를 노인의 몸으로 탐하진 않는다.  그러나,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범죄한 것이다. 더구나, 그 빈도에 있어선 은교는 시인의 아내가 되고도 남는다.

 

독자는 하나의 문제에 닿는다.  적요는 왜 이 모든 궁지에 스스로를 밀어 넣을까?   나이 들고 병든 몸은 죽음을 예약하고 있고, 죽음 이후 문단은 그를 기념할 것이다.  평생 시만을 썼고, 발표하는 시마다 세상의 죽비가 되었던 그의 시편들은 위대했다. 그의 명예로운 죽음은 불멸의 명성을 기약했다. 그럼에도, 시인에게 남겨진 지상의 몇달 동안이 뭐 그리 중요할까?  은교라는 처녀에 대한 정욕, 그의 말대로 사랑이란 감정을 풀어놓고 열망하며 생을 송두리째 내맡길 만한 가치가 도대체 은교에겐 있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 겁데기의 영혼을 갖고, 싱싱한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은교에게 말이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다듬고, 높이하고, 추구했던 것은 일평생 시인의 길이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자기실현의 욕망이다.  그러나 독자는 한가지를 정확히 짚을 수 있다.  시인의 길과 싱싱한 육체에로의 길이 결국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다.  시로서 영생하느냐, 육체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이어가느냐, 인간의 욕망이 해체되는 순간을 이 소설은 이적요의 고백을 통해, 드러낸다.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p.398

 

시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인을 통해, 무언가 인간을 떠난 가치를 시와 시인에게 부여하려 든다.  왜냐하면, 범속한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우린 자주 그것을 부정하고 감추려는 기질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정욕은 정신적인게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다.  정신적인 것은 시고, 고매한 것이고 육체적인 것은 더럽고 추한 것이다, 고 우린 흔히 생각한다.  이 고정관념을 벗어나긴 쉽지 않다.  모든 범죄는 향락과 연결된다.  돈과 명성을 앞지르는 건 향락에 대한 욕망,  정욕에 대한 궁극의 의지와 같은 것이다.  돈과 명성은  정욕에 이르기 위한 스폰서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밤에 취하는 것은 결국 육체다. 

 

이 작품은 우리들의 욕망에 가리워진 어두운 장막을 걷어낸다.  서지우의 욕망과 노시인 적요의 욕망을 통해 그 층위의 다양함을 경험하게 된다.  문학이 줄 수 있는 건 대안이 아니다.  드러내놓는 것, 펼쳐 놓는 것, 몰래 다듬고 사랑했던 욕망을 대중앞에 떳떳히 고백하는 것, 함께 고민하는 것, 이것을 이 소설은 시도한다.  문득, 우리들의 이성과 양심을 파고들고 흔들게 하는 설명될 수 없는 정열, 욕망, 그 모든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 소설은 하나의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것은 섹슈얼리티를 염두에 둔 말이다. 사실, 그건 낯뜨겁다.  그러나 욕망의 층위 모두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낮에 읽어도 상관 없을 듯 하다.

 

 

 

4. 삶, 욕망의 판타지

 

 

사막의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 머리칼에 찬 바람이 스치고

짙은 콜리타스 향기

찬 바람에 실려오는데

저 멀리 앞으로 희미한 불꽃이 보이네

머리는 무거워지고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있어

하룻밤 쉬어가야겠는데

 

               - 이글스Eagles,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상상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다.  영화가 끝나면 말끔한 현실이 나온다.  현실에 충실한 도덕적인 사람일수록 상상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섹슈얼리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정욕은 때로 실제의 행위보다 상상력에 더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는 상상력이 가진 힘을 만끽할 것이다.  정욕이 상상력의 원동력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저마다 마음속에 `은교'라는 판타지를 품고 살아가는 `동물'들임을 이 소설은 들춰낸다.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본능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이모저모 살펴보는 건, 긍정적인 일이다.  문학이 주는 최대의 혜택은 누군가를 피해 입히지 않고, 극한으로까지 나를 몰고 가보는 일이다. 

 

적요가 은교에 대한 판타지를 묘사할 때 인용한,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란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You can check out any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당신은 언제든 원할 때 방을 뺄 수는 있지만, 결코 떠날 수는 없을걸요. " 우리는 판타지의 세계를 벗어날 순 있지만, 욕망의 방안에서 영원히 탈출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진 않을까? 

 

원숙한 작가가 독자앞에 용기있게 먼저 `은교를 사랑했다'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들의 숨겨진 판타지와 상상력은 범죄와 추함의 나락에서 구원된다.  이 소설은 우리들의 익숙한 욕망에 면죄부를 주는 소설이며, 그 모범적 답안까지 준다.  자신의 솟아나는 욕망을 부정하면 할수록 그 욕망은 비틀게 나아간다.  상상이 상상으로 흐르도록 놔둘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 `은교를 사랑하고 있다'는 내면의 소리를 허락하자.   다만, 그건 "내 마음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p.394)가 되어야 한다.

 

 

                 

 

                                                                                   20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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