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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의 교환-티모시 메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과정 | Memento 2020-12-2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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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저/권용철 역
사계절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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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의 업적인 저평가 되어 있다. 그들은 단순한 파괴자가 아닌 시대의 전환자였다. 우리는 그들의 유산 속에 살고 있고, 특히나 한반도는 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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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복자로 유명한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그는 망치와 모루 전략을 통해 강대국을 무너뜨리고, 유럽은 넘어 세계제국으로 성장했다. 비록 사후에 제국은 분열되어 단명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헬레니즘 문화로 이어져 간다라 양식 등 오늘날 불상의 기원이 되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예술을 사랑하고 여러 신화와 일화를 남겨서일까. 정복자의 무서운 이미지보다는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해낸 선구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서양의 위대한 정복자여서 그런걸까. 여기서도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하는 건 아닐까.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정복자인 칭기스칸에 대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강력하고 위대했던 몽골제국은 침략과 파괴, 나아가 문화적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알렉산더는 그 사후에 국가가 분열되었음에도 헬레니즘 문화를 촉발했다지만 몽골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칭기스의 교환>은 여기에 대한 진지한 연구 결과를 안내한다. 진정한 세계화의 시작은 몽골제국에서부터 시작한지도 모른다. 몽골의 정복은 콜럼버스의 이동을 촉발시켰다. 결국 직접적인지는 않지만 칭기스 칸의 유산들이 진정한 세계사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칭기스의 교환은 이러한 의미에서 콜럼버스의 교환이라는 의미의 원초적인 표현인 셈이다.

비교적 소수인 몽골족으로서 대제국을 통치하려면 조직력을 강화하고 외부의 유능한 인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했을 듯 하다.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은 땅보다는 사람을 조직했다.” 대표적인 예로 망간(천호)(p.393)”가 있다. 천명단위로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으로 인력을 관리함으로써 효율적을 극대화 했다. 또한 잘 알려진대로 색목인이라 부르는 아랍과 유럽인까지 등용해서 제국을 안정화 시켰다. 종교적 포용성 역시 유명하다. 자신을 개종시키러 온 수도사에게 뭉케 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이 여러 개의 손가락을 주신 것처럼 인류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다”(p.468)“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인식은 몽골제국이 가졌던 유연성을 짐작케 한다. 정복한 지역에서 좋은 제도가 있다면 즉시 수용해서 활용하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포용성을 유지하는데는 교역이 중요했다. 유목민 입장에서는 전쟁과 교역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역은 전쟁을 수반하는데, 군사적 행동이 교역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p.260)” 했다. 하지만 몽골제국은 이를 변화시켰다. 몽골족은 교역이 자기들을 찾아오게 하는 시나리오를 창출했다.(p.262)” “ 교역을 촉진하면서 공정한 가격을 요구했다.” 몽골제국은 수 많은 국가 간 장애물을 일소했고, 이를 통해 안전 문제가 개선되고 교역로의 다른 끝에도 대량의 물건과 사치품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 장거리에 걸친 대량 교역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업이 되었다.(p.268)” 카라코룸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수 많은 물자와 더불어 사람들까지 넘쳐나게 되었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 끼친 몽골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분명하게 남아있다.(p.371)” 예를 들면 몽골의 유산이 강할수록 여성의 지위가 높다. 칭기스 가문의 공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유하고 관리에 관여했다.(p.564)”던 영향이 아닐까. 또한 예술 및 이탈리아 상인들이 몽골과의 교역에서 얻은 부를 통해 몽골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친 것(p.580)” 역시 무시할 수 없을 테다. 더욱이 몽골의 수차례 침략을 받았던 한반도는 그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다. 한국사람의 필수품인(?) 소주나 저마다 가지고 있는 몽고반점은 명확한 그 증거다. 어쩌면 몽골의 침략은 한반도가 은자의 왕국으로 변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몽골의 지배 때문에 명이 외국을 꺼리게 된 것처럼, 동시대의 한반도 사람들도 더욱 고립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p.226)” 이처럼 몽골제국의 영향력아래에 있던 한반도의 입장에서 세계사적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도 새로운 흥밋거리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몽골이 강대국 사이에서 비교적 약소국의 위치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느낌도 있다. 확실한 점은 칭기스칸과 그들은 동시대의 다른 어떤 조직보다 혁신적이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군사적인 이점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를 지탱한 것은 군사적 능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국의 진정한 강점은 포용성과 교역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들의 업적은 단순히 파괴와 침략의 대명사, 자연재해나 신의 징벌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승자와 패자의 역사를 떠나, 공과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평가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생각, 방향이 필요하다. 그러한 탐험을 떠나는 이러한 책들이 흥미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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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연구에서 위대한 인물이라는 개념을 고려하는 것은 최근 경향과 거리가 있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남성 혹은 여성이 때때로 나타나 세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최소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p.47)한 길로 역사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개개인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을 초월하는 비전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p.48

몽골족이 세계주의를 선도했다고 언급도지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p.48)이 필요하다. 실제로 몽골족이 그러한 조건들을 마련했고 촉진자 역할을 수행했지만, ‘칭기스의 교환의 대부분은 몽골족에 복속한 사람들과 외부에 있던 사람들의 노력으로 생겨난 결과였다. p.49

어쩌면 몽골의 침략은 한반도가 은자의 왕국으로 변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몽골의 지배 때문에 명이 외국을 꺼리게 된 것처럼, 동시대의 한반도 사람들도 더욱 고립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p.226

제국은 사라졌고 다양한 범주의 계승자들이 드나들었지만 몽골 제국의 영향력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p.231

몽골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로 파괴의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있다. 여러 세기가 흘렀지만 몽골은 자신들이 마주친, 특히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일에 열중했던 통제 불가능한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p.243) ... 20세기의 대중매체에 이러한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며, 21세기까지도 지속될 것이고 그 대부분은 야만인’(정주 문화에 살지 않는 모든 사람), 오리엔탈리즘, 황화라는 개념, 그리고 여기에 당연히 몽골인의 행동까지 포함한 서양과 동양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관계가 있다. p.245

오늘날 몽골에서는 누구도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의 유산을 피해갈 수 없다. 몽골인에게 그는 국가의 시조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몽골의 역사에서 가장 확실하게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p.248

몽골 제국이 교역 증진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동해까지 뻗은 하나의 통합된 제국은 안전한 교역로를 제공했고, 상인들이 다양한 유라시아 교역로를 지나갈 때 납부해야 했던 통행료와 세금을 줄여주었다. 실제로 보석이 가득한 황금 항아리를 운반하는 처녀도 제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위협당하는 일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약간 과장된 말이겠지만 유라시아 교역로가 이전보다 더 안전해졌고 전통적인 실크로드뿐 아니라 (p.258) 새로운 교역로 또한 번영을 누렸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몽골족이 이를 어떻게 달성했는가 하는 점이다. p.259

유목민 입장에서는 전쟁과 교역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역은 전쟁을 수반하는데, 군사적 행동이 교역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p.260

유목민과 정주민의 교역 관계에서 상품을 획득하는 세 가지 기본 범주가 있었다. 첫 번째 범주는 유목민들이 중국과 은밀하게 교역을 행하는 것으로, 이는 곧 제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유목민은 이 방법을 사용했다. 두 번째 범주는 공식적인 채널을 통하는 것으로, 유모민들이 황제의 권위에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복종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승인받은 장소에서 교역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형태는 유목민 지도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조공을 바치고 얻은 선물을 지도자가 직접 입수하면 이를 취하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범주는 유목민들이 경계지대를 침범하여 상품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유목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갔지만, 위험한 방식이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p.260). p.261

몽골 제국의 등장은 교역로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했던 국가들을 절멸시키고, 사고방식에 변화를 일으켜 유목민과 정주민의 전통적인 교역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p.261) ... 몽골족은 교역이 자기들을 찾아오게 하는 시나리오를 창출했다. p.262

전쟁은 칭기스 칸의 기본적인 교역 정책을 보여주었다. 그는 교역을 촉진하면서 공정한 가격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과 정주민 사이의 오래된 교역 관습을 뒤집어놓았다. (p.267) ... 안전 문제가 개선되고 교역로의 다른 끝에도 대량의 물건과 사치품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올슨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러한 상황에서는 장거리에 걸친 대량 교역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업이 되었다.” p.268

우구데이의 행동이 어리석고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징기스 칸과는 아주 다르다.) 여기에는 영리한 전략이 숨어 있다. 우구데이는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그의 과도한 소비는 카라코룸에 국제 교역을 가져왔다. 가져가는 물건이 무엇이든 운송비를 결제한 이후 그 가치의 2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앗을 때, 어떤 상인이 카라코룸으로 가는 모험을 마다하겠는가? 우구데이의 영리함은 제국 안에 교역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카라코룸을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p.282

몽골이 무역을 중시하여 세계사에 기여한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족은 무역을 장려하고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이기는 해도 새로운 생산품과 상품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했다. p.305

칭기스 칸의 등장은 엄격한 규율과 새로운 전략의 도입, 군사학교의 설립, 십전제 조직의 채택을 통해 초원의 전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p.308

많은 사람들에게 몽골족은 그저 또 하나의 다른 군대(p.321)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의 힘이었고, 신이 보낸 징벌이었으며, 세상의 종말을 먼저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p.322

십자군전쟁 시기에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다른 문화 사이의 교류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 이것이 몽골족의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은 또 다른 변수가 추가되어 교류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모든 교류가 그러하듯이 일방적인 교류는 드물었다. 이슬람과 기독교 사회는 몽골족에게서 사상을 전달받기도 했고 변화를 위한 자극을 받기도 했다. 몽골 제국도 레반트로부터 새로운 군사적 지식을 비롯해 여러 물자를 획득했다. p.322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 끼친 몽골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분명하게 남아있다. p.371

몽골 행정의 유동적인 특성이 제국의 분열을 촉진했다. 오르도는 각자의 행정 기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권위가 약해(p.386)진 동안에는 더욱 큰 자치권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p.387

몽골 통치 체계의 상위에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오르도와 인주 제도였다. 오르도는 칸의 궁정 막사였다. ... 각 오르도는 집안인을 돌보는 사람들을 소유했다. 노예, 하인, 호위병은 물론이고 인제(이는 몽골어 발음) 혹은 인주(이는 페르시아어 발음)의 일부를 구성하는 행정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p.386

중앙 행정의 궁국적 원천은 케식(칸의 친위대와 집안의 하인들)으로부터 나왔다. 이는 전근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군사 지도자의 동료들이 행정 관청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다. p.387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은 땅보다는 사람을 조직했다. 물론 땅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일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몽골이 조직의 도구로 처음 사용한 것은 망간(천호)이었다. p.393

정복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칸국, 오르도, 군사 구역, 문관 행정구역으로 나눈 것처럼, 제국의 재정 자원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칸들은 정주지대를 재정 행정 구역으로 점차 분할 했다. 구육의 통치 시기에 제국은 북중국, 투르키스탄, 후라산-마잔다란, 이렇게 3개의 조세 징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p.404

본질적으로 몽골족은 자기 혁신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정복한 사람들의 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고, 몽골의 계승자들은 선택적으로 제도를 모방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면은 몽골 제국의 지배 영역이었던 곳들에서 수 세기 동안 대부분 유지되었다. p.410

몽골 제국의 종교 정책은 전근대, 아마 현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관용적이었다. p.411

몽골족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관습과 의례든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p.413

몽골은 제국 전반에 걸쳐 종교 공동체와 관계를 맺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중요한 이유는 전략적이면서도 실용적이었는데, 종교 지도자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 피정복민들의 적개심과 반란의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p.413

몽골족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했을 뿐 교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정책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종교를 숭배할 자유를 가진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만약 어떤 종교가 제국의 안정성이나 몽골의 패권을 위협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어떤 종교든 전체 세계에 대한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p.415) ... 이는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의 등장, 그리고 종교에 기초한 정복 이데올로기인 텡게리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칭기스 칸과 그의 계승자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임을 하늘(텡게리)이 승인해준 것이 되었다. 칭기스 칸과 후손들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하늘의 의지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 텡게리즘은 종교적 이데올리기이기는 했지만 몽골족을 위한 것이었고, 누군가가 이것으로 개종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국에 복속하고 몽골족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 텡게리즘은 다른 종교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었다. p.416

몽골 제국이 와해되기 전까지 몽골족이 세계 종교로서의 개종을 거부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은 하늘로부터 세계를 정복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믿었다. 텡게리즘의 개념은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신, 무슬림의 알라, 하늘 혹은 신성한 영혼 등 다른 모든 개념은 텡게리로 교묘하게 흡수될 수 있었다. 신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대한 설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뭉케 칸이 그러나 신이 여러 개의 손가락을 주신 것처럼 인류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다라고 말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 이것이 두 번째 논점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같은 신을 숭배했기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누군가를 박해할 이유가(p.468) 없었다. 종교적 관용이 드물었던 시기에 몽골이 모든 종교에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셋째, 이슬람교와 기독교로는 굳이 개종할 이유가 없었다. 몽골 군대는 자신들에게 적대하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러한 종교들이 전략적인 이점을 제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몽골을 개종시키는 데에 실패한 이유는 문화적인 문제였다. 이는 이슬람교와도 관련된 부분인데, 바로 알코올을 금지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p.469

종교는 몽골의 통합성이 줄어든 이후에야 각각의 칸이 자신의 적수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할 때 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p.471) ... 초기의 개종은 대부분 신앙심이 동반되었다기보다는 전략적이면서 정치적인 개종이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은 역효과를 일으켰다. 세계 종교로 개종하자 몽골은 자신들이 정복한 복속민들과 매우 유사해졌고, 통치자는 피지배자처럼 되었으며, 이전의 몽골 제국 중 많은 곳에서 동화가 일어났다. p.472

몽골의 독특한 정체성은 텡게리즘의 출현, 예케 몽골 울루스의 창설, 칭기스 칸의 야사 활용, 몽골 제국의 군사적 지배와 함께 등장했다. 다른 종교를 채택하는 것은 적어도 몽골족 관점에서는 종종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래서 외래의종교들은 개종자를 별로 얻지 못했다. ... 이슬람교든 불교든 몽골이 개종한 이유는 그 종교가 샤머니즘과 유사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의 특정한 형태가 포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종교 이외의 다른 문화적 요소들까지 허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474) ... 이슬람교와 불교 모두 상업 활동을 후원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p.475

몽골족은 잔인하다는 명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공포와 선전의 가치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잔인하다는 명성이 그들의 진군보다 먼저 퍼져 나가는 것을 선호했다. p.511

몽골은 또한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로 더 많은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여 그들의 시대와 미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511

몽골은 정치에서, 그리고 예술과 과학 및 종교 건축의 후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에도 영향을 끼쳤다. ... 국가를 경영하고 쿠릴타이에 참여하는 몽골 여성들의 역할을 많은 여행자들을 놀라게 했다. ... 칭기스 가문의 공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유하고 관리에 관여했다. 카툰(왕비)들은 남편에게(p.564) 공개적으로 조언을 했지만,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게서는 통치의 역할을 맡은 여성이 공개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하렘에서 조언을 했다. 몽골 제국이 몰락하면서 여성의 정치와 정부에 관여하는 일은 분명 줄어들었지만, 몽골 제국이 지배했던 여러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이 유산이 지속되었다. 실제로 몽골이 물려준 유산이 강고할수록 여성들은 더욱 큰 자유를 누렸다. p.565

원 제국 시기 중국 지식인들과의 지속적인 접촉 및 몽골 정부의 후원으로 신유학은 고려와 여러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원 제국 시기에 정부는 외국인들도 중국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고려인들이 공부를 해서 중국에 가서 시험을 치렀다. 일부는 원의 수도인 대도에 남기도 했지만, 고려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 이를 통해 많은 고려 지식인들이 정부, 사회, 심지어 개인적인 행동까지 재검토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이 여운이 오늘날에도 느껴지는데, 이것이 고려 사회를 변화시킨 혁명을 야기하여 21세기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화적 규범, 윤리적 기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념의 기초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p.572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낸 것이 몽골의 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술 및 이탈리아 상인들이 몽골과의 교역에서 얻은 부를 통해 몽골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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