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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cafe in Europe / 삼례 책마을 방문기 | 일상 2019-06-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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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북카페 인 유럽(BOOKCAFE IN EUROPE)

- 저자 : 구현정 / 프리랜서 작가

- 출판사 : (주)위즈덤하우스

- 출판일 : 2011년 3월 2일


2. 리뷰와 일상


  "아침 일찍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비텐베르크 플라츠역에서 나와 5분 정도 걷는다. 서점까지 가는 동안, 나무에서 떨어진 조그만 열매를 툭 맞은 것처럼 늘 반갑고 번뜩거리는 아이디어가 머리에 툭 하고 내려앉는다. 그렇게 2층 북카페의 내 자리에 앉아 메모하는 순간을 기대하며 걸어가는 아침의 기분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늘 같은 바닐라 시럽을 추가한 카페라떼의 달콤함을 느끼면서, 이곳 문구코너에서 심혈을 기울여 산 금박 테두리에 레드벨벳 표지의 노트를 펼친다. 들어오기 전, 내 머리로 떨어진 조그만 열매의 맛에 대해 써 내려간다. 손에 힘을 뺸다. 펜은 날개를 달고 다음 페이지로 향한다." - 본문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 가운데는 책과 커피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나도 그런 인구 중 한명이다. 한적한 아침, 산보하듯 나와, 여유롭게 햇볕 드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하면서, 조금은 가벼운 에세이를 읽으며, 그런 휴일을 보내는 것이 나의 오랜 로망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나의 로망을 삶 속에서 이루며 사시는 분이다. 그저 배경이 유럽(특히 독일)일 뿐이다. 사실 책을 읽으며 많이 부러웠다. 유럽의 멋진 풍경 속에서 사는 것 보다는, 프리랜서 작가라는 직업 특성으로 인해 북적이는 휴일이 아니라 한적한 평일에 북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며 아늑한 분위기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물론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자면 저자의 삶 또한 그야말로 '삶'이겠으나, 로망은 그저 로망으로 남겨두자.


  많은 여행기를 보지만, 북카페만을 눈 번뜩이며 찾아 가보고 책으로 엮은 것은 또 드문 콘텐츠가 아닌가 싶다. 유려한 문체와 약간은 거친 인쇄종이로 만들어진 책은 그 자체로 북카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에, 북카페의 매력은 고즈넉한 분위기, 실내를 채우는 커피향, 그리고 손때 묻은 책들의 향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때로 어떤 북카페는 오래된 책들과 얼마 지나지 않은 깨끗한 책들이 섞여 종이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종이향과 커피향의 조화는 어찌 그리도 그윽한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저자가 다녀온 북카페들도 하나같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들이다. 어떤 곳은 창 밖으로 탁 트인 넓은 호숫가가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광장이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곳은 마치 대작가의 서재를 본따 만든 듯 고풍스럽지만, 또 어떤 곳은 원두 포대에 책을 담아 자유롭게 쌓아두기도 했다. 사소한 형식과 모습은 모두 다르지만 어떤 곳이든 책과 커피가 주는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북카페라는 곳을 처음 가본 적이 언제였을까. 전문적인 북카페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집 근처 대학로에 있었던 '민들레 영토'가 아마 내 첫 북카페의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어찌되었건 자유롭게 비치된 책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만해도 커피맛을 몰랐던지라(카페인 따위 없어도 밤새워 공부할 수 있는 창창한 시절이었다.) 무얼 마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손님이 들어오면 첫 응대와 함께 내주었던 소위 '민토차'의 맛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구수한 첫 맛과 달콤한 끝 맛. 그동안 집에서 녹차나 둥굴레차만 마시던 내게 차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차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수국차였다.) 무튼 친구와 야간자율학습을 부모님 몰래 빠지고는 그곳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보다가, 수다도 떨다가, 차도 마시다가,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북카페와는 좀처럼 연을 맺지 못했다. 종합대학이 있는데도 큰 서점이 몇 없었던 탓이다. 청계천을 따라 늘어서있던 헌 책방들과 교보문고, 종로서적, 반디앤루니스, 그리고 영풍문고. 너무 크고 북적여서 조금은 정신없는 분위기라 생각했던 서점들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도서관은 왠지 모르게 서점과는 다른 분위기라 지나친 고요함에 주눅이 들었다. 편하게 이리저리 책을 둘러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더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돈도 없고, 시간 여유도 없던 때라 책에 대한 갈증은 인터넷 서점이나 E-book을 통해 채울 수 밖에 없었다.


  또 시간이 흘러 첫 직장에 입사를 했다. 차로 30분 혹은 버스로 1시간 거리라고는 해도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출근길이다. 무료하게 창밖을 보며 지나다니던 어느날, 버스가 지나는 길가에 '삼례 책마을'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의 거리도 아니고, 책의 마을이라. 호기심에 잠깐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매일 지나다니던 그 길의 그 건물이 커다란 헌책방을 겸한 북카페였다니! 이름하야 '삼례 헌책방'이다. 주말이 되자마자 아침 일찍 출근 버스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늘 지나던 길에서 내렸다. 세상에.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이런 곳이 있는지를 몰랐다니. 얼마나 나는 무심한 사람인가. 오래된 쌀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건물의 한 쪽에는 그야말로 청계천을 방불케하는 헌 책방이 자리했고, 다른 한 쪽에는 구매한(구매를 해야 책을 카페로 반입할 수 있다. 오래된 책이 많아 책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책을 가지고가서 읽으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널찍한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헌 책방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들떴다. 80년대 국한문 혼용의 세로쓰기 서적부터 2000년대 책까지, 연식이 오랜 책들이 꽂힌 서가가 바닥부터 저 높은 천장까지 닿아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예전에는 쌀을 보관했었고, 이제는 책을 보관하고 있는 이 창고는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곳을 찾은 것은 인생의 발견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서가에서 보물찾기를 했다. 교수님 서가에 있었던 오래된 한학(漢學) 서적도 보였고, 읽고 싶었지만 미처 읽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지나갔던 베스트셀러 소설들, 심지어는 박물관이나 미술대전의 전시도록들도 있었다. 좀 낡기는 했지만,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서적들인지라 오히려 콘텐츠의 질이 지금보다 더 충실하고 높았다. 지금 이런 도록을 사자면 설명은 별로 없고 그림만 많은 도록을, 그것도 돈 깨나 주어야 했을텐데 세세한 설명과 그림을 곁들인 세계 박물관 전시품 도록 모음이 권당 15,000원, 전질 15만원이었다.


  보고 싶은 책을 저렴한 가격에 몇 권 구매하여 카페에 앉았다. 널찍한 폴딩도어로 만들어진 창가 밖으로 책방 앞에 자리한 잔디밭과 길 건너편 오래된 성당이 보였다. 낮이면 햇빛이 잘 들어 환했고, 밤이면 잔디밭의 조명이 은은한 감성을 뽐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책을 읽기 편한 높이와 안락함을 갖춘 테이블과 의자였다. 종종 회전율을 높일 목적으로 좌석을 불편하게 해두는 카페가 종종 있는데, 여기는 몇 시간이고 앉아서 책을 봐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곳에 오래 있을 때는 적어도 음료를 두 잔 이상 시켜먹는다. 좋은 장소와 음료를 제공해주시는 주인장께 대한 나름의 예의다.) 카운터에서는 간단한 베이커리와 음료 주문을 받고 있었다. 몇 번의 방문 끝에 이 곳의 베스트 메뉴를 알아냈다. 뱅쇼에이드다. 뱅쇼에 물과 얼음을 붓고 레몬을 넣은 뒤 계피가루를 살짝 뿌린 이곳의 뱅쇼에이드는 많이 시지도 않고, 달달하면서도 깔끔하니 맛이 좋았다.


  내친 김에 이쪽 거리 전체를 돌아보기로 했다. 책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니 건너편에는 '삼례문화예술촌'이라는 곳이 있었다. 몇몇 공방이 자리하는 듯 했다. 잠시 설명하자면, 이쪽 지방의 특징은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평평하고 넓은 대지가 펼쳐져있다는 점이다. 건물 사이 공간이 널찍했다.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널찍한 공간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보니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헌책방이 주는 묘미만은 못했던지라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헌책방에 다시 갈까 고민하는 차에 성당을 조금 지나쳐 걸어가니 또 다른 카페가 보여 들어가 보았다. 아, 정말 운이 좋은 날이다. 여기는 그야말로 북카페였다. 자유롭게 놓여진 책을 보면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곳. 이름하야 '휴앤안' 카페. 둘러보니 근처 우석대학교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이 주 고객층인듯 했다. 한쪽에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앉아 농사짓는 이야기, 마을 신문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고, 한쪽에서는 대학생들이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맘에 든 것은 큰 서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편하게 쌓여 읽히기를 기다리는 무수한 책더미들이었다. 편하게 집어와서 보고,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공간. 헌 책방이 말쑥한 도서관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청계천의 헌 책방 느낌이다. 게다가 직접 만든 베이커리와 밀크티, 딸기우유 등 먹을 거리도 아주 수준급이었다.


  이 곳을 찾아낸 후로 동선이 조금 바뀌었다. 책은 헌 책방에서 사고, 나와서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 책과 음료는 북카페에서 즐기는 것으로. 자주 가다보니 주인 어르신과 안면도 조금 트였고, 늘 앉는 자리도 생겼다. 나만 이 곳이 좋았던 것은 아닌지, 퇴근길에 들르면 늘 벽쪽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분이 보였다. 아마도 '북카페 인 유럽' 책의 저자처럼 프리랜서 작가이실지도 모르겠다. 그 앞자리, 창가 볕이 잘 드는 자리가 내 자리다. 미니식빵과 밀크티를 시키고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헌 책방에서 사서 읽은 책의 리뷰를 한참 적어내려갔다. 그 어느 때보다 손이 가볍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편안한 공간이 주는 은총이다. '에디톨로지'의 저자 김정운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이 나의 '슈필라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리뷰를 쓰고 카페를 나서니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버스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가만히 하루를 돌아본다. 헌 책방에서의 보물찾기, 그리고 북카페에서의 글쓰기 시간. 근래 보낸 휴일 중 최고의 휴일이었다. 로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의 감격은 의외로 덤덤했다. 마음이 확연히 들뜨기보다 편안하고, 느긋하고, 여유롭고, 그런 중에 잔잔한 즐거움이 있었다.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즐거움, 한 주 내내 지금 이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지. 일주일간 열심히 일해야 할 의미가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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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_모비 딕 | 구매리뷰 2019-06-1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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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모비 딕

허먼 멜빌 저/김석희 역
작가정신 | 2011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읽기 쉽지 않은 문장을 읽게 하는 훌륭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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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모비딕

- 저자 : 허먼 멜빌

- 역자 : 김숙희

- 출판사 : 작가정신

- 출판일 : 2013625

 

2. 리뷰

 

# <모비 딕>을 이해하는 키워드, 이중성

 

  언제 읽어도 <모비 딕>(사실 내게는 <백경>이라는 제목이 더 친숙하기는 하다.)은 참으로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매번 도대체 멜빌은 왜 이 소설을 썼을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동반한다. 사실 아직도 나는 멜빌이 왜 이 소설을, 아니, 이런 소설을 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나마 몇 페이지 읽지도 못했던 처음의 도전에 비해 지금은 완독이라도 해내고 있다는 것에 얄팍한 의의를 두고 싶기도 하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포경업에 관한 사실적 르포라고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도 같다. 도대체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 마지막 장을 겨우 읽어낸 졸렬한 독자의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소설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이중성이 아닐까 싶다.

 

# 이슈메일의 관찰자적 시선이 보여주는 인간의 이중성

 

  그 유명한 첫 구절 나를 이슈메일이라 부르라.’는 말로 서술을 시작하는 이 이슈메일은 주인공이 아니라 관찰자다. 그것도 아주 시니컬한 관찰자. 허무주의에 빠져 괜히 세상을 등지고 바다로 나가고 싶어하고, 그래서 상선에 몇 번 타본 경험을 믿고 아주 담대하게도 3년의 항해가 예정된 포경선에 덥썩 올라탄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도대체 왜 그는 바다로 나갔을까. 이슈메일의 행동은 우울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보이는 충동적 감정과, 그에 따른 예측 밖의 행동과 유사해 보인다. 무기력과 무의욕이 지배하는 허무하고도 우울한 감정 속에서 불현듯 솟구치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감정은 이슈메일을 바다로 몰아간다.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 특히 심기증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 본문 중에서


  무척 아이러니한 것은,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 의한 타의적 선택인 동시에 또한 그 충동에 휩쓸리기 원하는 이슈메일의 자의적 선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배를 타다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묘한 활력을 얻는 이중적인 모습. 그 이중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슈메일의 철저한 방관자적 태도다. 그는 현실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면서도 현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려 든다. 글 초반부의 에이해브 선장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에 가까운 관심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겠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의 허무와 거기서 비롯되는 우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붙어있는 한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기독교도인 그에게 있어 자살은 죄악이기 때문에, 허무와 우울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 가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어쩌면 이슈메일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가 보여주는 인간의 이중성

 

  한편,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인 에이해브 선장은 흰 고래 모비 딕에 대한 광기에 휩쓸린 인물이다. 그의 광기는 독특하다. 바다에서 가만히 잘 살고 있던 고래에게 먼저 사냥하려 달려든 것은 인간이다. 고래는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보이며 창으로 찔러대는 인간에 대항해 싸운다. 그러한 싸움의 과정 중에서 고래는 지느러미에 3개의 작살이 꽂혔고, 에이해브 선장은 다리를 잃었다. 서로 카운터를 주고받은 1:1의 무승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모비 딕에 대해 엄청난 증오와 집착, 광기를 뿜어낸다. 이는 모비 딕을 경험한 다른 인물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감정이다.

 

  한 예로 에이해브 선장의 지난 항해에 함께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항해사 스타벅, 그는 모비 딕에 대해 섬뜩한 광기를 토해내는 선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 못 하는 짐승한테 복수라니!” 스타벅이 외쳤다. “그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이에요!” - 본문 중에서

 

  또한 에이해브와 같이 모비 딕에게 팔을 잃은 새뮤얼 엔더비호의 영국인 선장은 흰 고래를 두 번이나 다시 만나고도 왜 잡지 못하였냐?’는 에이해브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잡고 싶지도 않았소. 팔 하나로 충분하잖소? 남은 이 팔마저 잃어버리면 어쩌란 말이오? ... 그놈이 삼켜버린 그 팔은 내가 알 바 아니야. 그건 녀석이 마음대로 해도 좋아. 이제는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 이제 흰 고래는 딱 질색이야. 한번은 그놈을 잡으려고 보트를 내렸지만, 나는 그걸로 만족했어. 놈을 죽이면 대단한 영광이겠지. 그건 나도 알아. ... 하지만 그놈은 가만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야.” - 본문 중에서

 

  잃은 것이 없는 스타벅에 비해 영국인 선장은 한 팔을 잃음으로써 에이해브와 가장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내보이며 에이해브의 광기와 더욱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왜 에이해브는 유달리 모비 딕에 대한 광기를 품게 된 것일까.

 

  고래는 보통 색이 어둡다. 흰 고래는 아마도 알비노증에 해당하는 돌연변이 개체였을 것이다. 흰 색이 주는 신비로운 이미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 수 없는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다 모비 딕은 거대하고 영리하기까지 하다. 영국인 선장의 말처럼 사냥꾼에게 최고의 영예를 가져다 줄 사냥감, 그것이 모비 딕인 것이다. 뛰어난 선장이었던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엄청난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을 것이다. 포경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잡기를 꿈꾸는 이상이자 목표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는 이 이상에 도전하여 이미 한 번 처절한 패배를 경험한 바 있다. 문제는 이 패배에 대한 반응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가이다. 영국인 선장은 이상에의 좌절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잃어버린 팔이 뼈아프기는 하지만 다른 고래를 잡다가 실패한 것과 그리 다를 바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에이해브는 이상에의 좌절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실패의 경험은 그에게 엄청난 실망과 충격과 분노를 안겼고, 마침내 그의 분노는 집착으로, 광기로 발전해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야. ...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 본문 중에서

 

  놀라운 것은 영국인 선장이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소?’라 했던 질문의 답을 에이해브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모비 딕을 잡는다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 끝에 허무만이 남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기를 버리지 않는다. 상처뿐인 승리일지라도 그 결과를 자신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선연한 의지.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중성을 볼 수 있다.

 

  욕망의 화신인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를 갈망하고 취하고자 하는 의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갈망하던 무언가를 얻었을 때, 과연 인간은 행복할 것인가에 있다. 지극한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내었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상을 얻은 듯 뿌듯해 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겨우 이것을 얻어내고자 그 많은 것들을 스스로가 희생하였던가 싶은 허탈감을 느낀다. 그 끝에 있는 것이 허무뿐일지라도, 어떤 수를 써서든 그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 참으로 모순된 태도가 아닌가. 그것이 에이해브의 광기가 보여주는 또 다른 인간의 이중성이다.

 

# 요나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인간의 이중성

 

  이슈메일과 에이해브 선장을 태운 피쿼드호의 항해를 앞두고 한 목사가 와서 축도 예배를 한다. 그는 항해에 대한 축복의 기도와 더불어 선원들에게 구약의 요나서를 주제로 설교를 나눈다. 네 개 장으로 구성된 요나서의 내용은 단순하다. 선지자로 택함 받은 요나는 하나님께 한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그 명령이 싫었다.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한들 사람들이 듣지도 않을 것이며, 그 도시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아 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고민 끝에 요나는 배를 타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간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누구시던가. 온 천지의 주재이시요,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 아니던가. 요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다. 그가 탄 배가 풍랑에 휩쓸려 모두 죽을 지경이 되자 선원들은 그것이 요나의 탓임을 깨닫고 그를 바다에 던져 버린다. 이윽고 요나는 고래에 삼켜지고, 고래 뱃속에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린다. 육지에 도달한 고래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맡기신 바로 그 도시의 해변에 그를 뱉어 놓는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해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난다.

 

  목사가 이러한 내용의 설교를 나눈 것은 요나를 삼킨 것이 고래였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리바이어던이라는 거대한 바다 괴물이 등장한다. 악어라고도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소설의 서두에서 멜빌은 이를 고래로 인식하고 관련된 문장들을 수집해 둔 바 있다. 에이해브에게 본의 아니게 엄청난 좌절과 광기를 안긴 흰 고래, 모비 딕은 그 크기며 악랄함이(에이해브의 시점에서) 리바이어던에 견줄만한 존재다. 그래서 서두에 등장하는 요나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요나는 인간이 만든 배를 타면 하느님의 지배가 미치지 않고 이 지상의 수령들만 지배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요파 부두를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타르시시로 가는 배를 찾지요. ... 대서양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바다였던 그 고대에 요나가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을 것입니다. ... 요나는 물고기의 배 속에서 꺼내달라고 주님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중요한 교훈을 얻으세요. ... 그는 모든 구원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여기에 만족합니다." - 본문 중에서  


  요나는 인간의 이중성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그가 도망가려 탔던 배는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항해하는 배였다. 세상의 끝으로 도망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한 요나의 모습은 신의 뜻을 거역하고 그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독립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지라 결코 창조주인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잠잠케 하시지 않으면 배는 세상의 끝은 커녕 파도에 휩쓸려 가라 앉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게다가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것은 고래로 하여금 그를 삼키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의 결과였다. , 인간은 신의 은총의 없이는 스스로 삶을 부지하지 못한다. 그것이 또한 요나가 보여주는 인간의 연약함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래, 유럽은 계속해서 신성의 지배 아래 존재해왔다. 성경은 중세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이었으며, 그들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교황에게 파문당하여 내세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모든 삶이 신에 의해 주재 되고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 인간은 점차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신이 정해준 운명 따위 거부해 버리고, 자신들의 뛰어난 이성에 따라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마침내 니체는 이렇게 선언하기에 이른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신의 섭리가 아니면 인간은 호흡 한 줌 제대로 부지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신의 은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신을 거부하고 떠나기 원하는 인간의 이중성은 앞서 말한 이슈메일, 그리고 에이해브의 이중성과도 닮아있다.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요나가 보여주는 모순의 한 편린이라 볼 수 있다. 한없이 지혜로운 만물의 영장이면서도 또한 맨 몸뚱아리로는 자기 몸 하나 지켜내지 못하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기에 인간에게 삶은 숙명이면서도 굴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모순이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모순의 확고한 근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삶을 벗어나기 원하면서도 숭고한 삶을 원하는 이중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로 인해 이슈메일과 같은 허무주의, 혹은 에이해브와 같은 광기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모순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때로는 거부하면서, 때로는 순응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순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인간은 이 모순을 해결하고자 과학, 철학, 도덕, 이성, 신앙 등 모든 학문을 탐구해 그 답을 구해왔다. 인간 사유의 역사는 곧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끝없는 탐구를 통해 끝없이 진보할 것이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갈망한다는 또 다른 모순을 낳으면서 말이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본질적 모순의 위대한 의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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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_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구매리뷰 2019-06-0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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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한정주 저
다산초당 | 2015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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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에 담긴 선비들의 삶과 정신. 그 집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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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저자 : 한정주 / 역사평론가

- 출판사 : 다산북스 / 경기도 파주

- 출판일 : 2015년 6월 10일


2. 리뷰


# 선비의 삶과 정신을 담은 이름, 호(號)


  전공 분야의 역사를 배울 때, 호(號)와 관련하여 인상 깊었던 두 가지 기억이 있다. 하나는 해당 과목을 공부하면서 상당히 애를 먹었던 기억이다. 다름 아닌 명(名 ; 이름), 자(字), 호(號) 때문이다. 유난히도 이 분야의 역사적인 인물 중에는 장(張)씨가 많았고, 그들의 명, 자, 호가 제각각인데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주장하는 이론마저 제각각이었으니,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내용을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또 하나는 그 과목을 가르쳤던 교수님의 호(號)에 대한 당신의 설명이었다. 당신도 멋진 호를 갖고 싶어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큰 태양, 큰 빛'의 의미를 담은 호를 지었다고 하셨다. 지을 당시에는 상당히 멋지다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으로 건방진 호가 아니냐며 웃으셨다. 지금은 다른 호를 쓰고 계신다 했다.


  명(名)은 보통 집안 어른들이 지어주시는 이름, 즉 본명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두 자, 혹은 석 자 이름들이 모두 명(名)이다. 자(字)는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웃어른이나 스승께서 지어주시는 이름, 특별히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친밀하게 부르는 호칭이다.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할 때는 자(字)를 불렀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인 호(號)는 보통 자신이 마음의 어떤 뜻을 담아 지은 별칭으로, 여럿이 공공연히 모인 자리에서 이름 대신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자칭한 것도 많으나 종종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의 특징을 보고 붙여준 호도 있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작가들의 필명이 일종의 호(號)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일상에서 잘 와닿지는 않지만 지금도 학계에 계신 많은 교수님들은 자신만의 호(號)를 갖고 계신다. 정년 퇴임 기념 논문집의 출간 즈음에 이르러서야 그 제목에 '00 000교수'라 하여 그때에나 교수님의 호(號)를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해도 호(號)를 쓰는 것은 선비들 사이에서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선비들은 호(號)를 통해 자신이 마음에 품은 뜻과,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취향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즉, 호(號)를 키워드로 하여 그 인물의 삶과 정신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의의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명(名)과 자(字)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생물학적 자아(태생적 자아)에 가깝다면, 호(號)는 선비가 자신의 뜻을 어디에 두고 마음이 어느 곳에 가있는지를 나타내는 이른바 사회적 자아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를 살펴보면 그의 사람됨과 더불어 그 삶의 행적과 철학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더욱이 호는 그 사람의 내면세계(자의식)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뜻과 의지 역시 읽을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우리 각자가 삶의 방식과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좌우명이나 혹은 마음에 새긴 멋진 명언 하나씩을 갖고 있듯,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의 뜻을 담은 문장을 압축해 두 세 자의 호를 씀으로써 '나 이런 사람이요'를 사람들에게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선비들은 자신이 세운 뜻과 방향을 다시금 인식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가다듬었으니 실로 호는 각 사람의 거울이라 하겠다.


# 호(號)의 집대성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의 사상사


  책의 구성에 대해 잠깐 살피자면, 이 책의 분량은 무려 703쪽에 이른다. 명, 자, 호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집필 의도를 밝힌 서문을 지나면 조선의 이름난 선비들의 호와 삶을 조명한다. 그리고 첫번째 부록으로 작호(作號), 즉 호를 짓는 방법에 대해 잠시 논하고(사실 읽다보면 이 부분에 가장 관심이 갈 것이다. 나도 '호' 하나 멋지게 지어볼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두번째 부록으로 본문에 수록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유명 인물들의 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모아 실었다. 그리고 세번째 부록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 정주영 전 현대 회장, 조지훈 시인 등 근현대 인물들의 호에 대한 설명을 실었다. 그야말로 호 대사전이다. 어찌보면 별 것 없는 작은 소재 같지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책을 펴내기까지 한 저자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분야는 좀 다르지만 한때 학문의 길을 꿈꾸었던 한 사람의 후학으로써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바다.


  호(號)에 의미를 담아 쓸 정도면 이미 양반 계층인데다, 그 뜻을 고전에서 갖고오는 경우가 많았으니, 호에 대한 거창한 설명이 붙으려면 벌써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물들이어야 한다.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시대 대표 문인들의 삶과 생각을 집대성한 셈이다. 본문을 읽다보면 그러한 방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록 시대 순서로 인물을 싣지는 않았으나 삼봉 정도전에서부터 사림의 거두였던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퇴계 이황,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 인물 여유당 정약용, 연암 박지원에 이르기까지 한편의 조선 유학사(儒學史)가 그려진다. 거기에 더하여 매월당 김시습,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산 윤선도, 추사 김정희에 이르는 또 한 축이 자리하는데, 이는 조선 미술사(美術史)의 흐름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성급한 일반화가 아닐까 염려하지 마시라. 여기에 빠진 인물들은 부록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호(號)라는 작은 단서를 통해 조선의 흐름과 역사를 어렴풋이 드러내는 저자의 통찰이 놀랍다. 아쉬운 것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시대 순서가 아니기 때문에 흩어진 퍼즐 조각을 제자리로 이어 붙이는데는 독자의 노력이 다소 필요하다는 점이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런 순서를 정하였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대순으로 챕터를 정렬해서 읽는 것이 내용 이해에도 오히려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 거친 인생의 파도를 헤쳐나가는 지혜 '여유당(與猶堂)'


  내용을 쭉 읽어가다 보니 특별히 한 인물의 호(號)가 인상 깊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여유당(與猶堂)' 정약용이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수많은 저작을 남긴 조선의 지식인 정약용. 흔히 알려지기로 그의 호는 '다산(茶山)'이다. 우리나라 차(茶)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답다. 그의 호가 다산이 된 것은 그가 차를 매우 즐겨 마시기도 하였거니와, 유배되어 간 강진 지역의 만덕산의 별칭이 '다산(茶山)'이었다. 예로부터 질 좋은 차가 많이 나서 다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정약용의 입장에서 힘든 유배 생활 가운데 만덕산에서 나는 좋은 차(茶)가 그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지 만덕산의 다른 이름 '다산'을 기꺼이 그의 호로 삼아버린다. 그러고보면 그의 인생에 있어 상당히 후대에 지어진 호가 '다산'인 것이다. 그럼 그 이전에는 어떤 호를 썼을까? 500여 권이 넘는 그의 문집은 또 다른 호인 '여유당(與猶堂)'의 이름을 달았다. 바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호는 '다산'에 비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붙은 것으로 보인다. '여유당'의 유래가 된 문장은 <노자(老子)>에 등장한다.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與兮若冬涉川).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猶兮若畏四隣)" - 본문 중에서


 이 두 구절에서 각각 앞 글자를 따와 만든 것이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호다. (당(堂), 재(齋) 등의 한자는 집을 뜻하는 글자로, 호(號) 뒤에 흔히 붙여 쓰곤 한다.) 정조에게 많은 총애를 받고 능력을 펼쳤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많은 시기와 비난을 받은 이가 정약용이다. 정조 생전에도 천주교로 인해, 실학 사상으로 인해, 노론의 공격을 당했던 이인지라, 정조 사후 노론이 권력을 잡자 그의 인생은 끝없는 유배 생활 속으로 내던져지기에 이른다. 삶을 온통 쥐고 흔드는 인생의 풍상 속에서 그는 신중하고 경계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었을터다. 격렬한 세파 속에서 처절한 인고(忍苦)의 시간을 담아 지은 호, 그것이 바로 '여유당(與猶堂)'이었다.


# 이 시대에 호(號)를 쓴다는 것은


  "호는 권위의 상징도 아니고 과시의 수단도 될 수 없다. 따라서 고상한 뜻과 우아한 멋을 담아 지은 호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결하고 소박하며 평범하더라도 자연스러움과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 호가 더 좋은 호라고 할 수 있다. ... 필자는 가장 훌륭한 작호(作號)란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찾아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저자는 '호(號) 문화'가 다시금 이 시대에 이어져 가기를 바라고 있다. '구태의연하게 요즘 누가 호를 쓴다고.'라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나 필자 또한 저자의 의견에 동감한다. 자유롭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 그것이 호가 갖는 의의라면,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호 문화'는 더욱 필요하다.


  옛 선비들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입지(立志)', 즉 뜻을 세웠다. 서른이면 이미 뜻을 세우고도 수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을 '이립(而立)', 즉 '이미 세웠음'의 의미로 불렀다. 신분 질서가 엄격하여 타고나기를 잘못하면 뜻을 세우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을 시대다. 하물며 그런 시대에도 꿈을 펼 자유를 얻은 이들은 뜻을 세웠을진대,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말이다. 마음에 '뜻'을 세워 품고 사는 이가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꿈을 좇아 살던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젊은 학생들을 붙들고 물어보시라. "학생은 꿈이 뭔가요?"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답한다. "없는데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마음에 품은 '뜻'이 있는가, 그 '뜻'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부록에 실린 근현대 인물들의 호를 보면, 꼭 어려운 한자어만이 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순한글을 쓰기도 하였고, 세례명을 쓰기도 하였다. 저자의 말만따나 형식은 자유다. 그저 솔직하면 그만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용한 밤, 가만히 앉아 자신의 '호'를 조심스레 골라보자. 내 마음에 품은 뜻을 멋지게 세상에 선포하는 그런 '호'를 정성들여 지어보자. 그리고 그 '호'에 당신을 비추어보라. 그 안에 당신의 인생이 담겨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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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_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 구매리뷰 2019-06-0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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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줄리아 카메론 저/조한나 역
이다미디어 | 201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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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모호한 내용과 문체. 저자의 목표는 글쓰기가 아니라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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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 저자 : 줄리아 카메론
- 역자 : 조한나
- 출판사 : 이다미디어 / 서울
- 출판일 : 2013년 4월 18일

2. 리뷰

후배가 자기소개서를 보여주었다. 검토와 첨삭을 부탁받았다. 어느 때부턴가 이 친구는 글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종종 내게 검토를 부탁하곤 했다. 나도 글을 그리 잘 쓰는 편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더 나은 글이 되리라 믿고 신뢰해주는 후배의 마음이 늘 고맙다. 후배의 글을 보았다. 그리 글솜씨가 좋은 친구는 아닌지라 여기저기 수정할 곳들이 눈에 걸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싶었다. 수정을 거친 글을 돌려주니 후배는 무척이나 기꺼워했다. 내가 쓴 글은 늘 고루하기만 한데 무엇이 그리 기꺼운지 도리어 내가 면구스러웠다.

후배가 준 초고를 본다. 초고에는 글을 쓴 후배의 성품과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맞춤법이 틀린 곳도 있고, 문맥이 어그러진 곳, 흐름이 어색한 곳도 있다. 글을 고치고 나니 소위 ‘자소설’이란 말처럼 그의 장점은 뻥튀기처럼 부풀려지고, 그의 단점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자기소개서가 가져야 할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고친 결과물보다 후배가 쓴 초고가 훨씬 좋았다. 그가 건네준 초고는 온전히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비유한다면 인물의 터럭 하나 바꾸어 그리지 않고 그의 성품과 삶을 담아낸 조선시대의 초상화 같달까. 그에 비하면 내가 쓴 글은 여기저기가 부풀리고 쪼그라든 것이 마치 ‘호문쿨루스’ 같았다. ‘틀’에 맞게 수정한 글이니 어디 가서 욕은 안 먹겠지만은 그래도 뒷맛이 씁쓸했다.

“모두들 글쓰기를 ‘완벽하게’ 하려고 한다. 똑똑해 보이려고 애쓴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애를 쓴다. 그런데 글쓰기는 애쓰지 않을 때 훨씬 잘된다. 백지 위에서 그냥 놀면 된다. 내게 글쓰기는 파자마 바지처럼 편안하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글쓰기는 군복을 갖추어 입은 것처럼 불편하다. 무장들이 마치 예의 바른 사립학교 아이들처럼 줄 맞추어서 행진하길 바라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글쓰기가 언제부터 이토록 무겁고 거추장스런 ‘틀’을 갖게 되었을까. 그저 자유로이 쓰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많이 읽히는 글’, ‘잘 팔리는 글’, ‘좋은 글’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 물었고, 수많은 책들이 이러한 질문에 답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좋은 글’이 어떤 글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완벽한 글’이 곧 ‘좋은 글’일까? 저자는 글쓰기에 지워진 무거운 굴레를 벗겨버린다. 글쓰기는 그저 백지 위에서 그냥 노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뛰어난 작가여서, 창조력과 영감이 뛰어난 사람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행복’을 목표로 한다.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억지로 하고, 하고 싶은 일도 참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우리가 글쓰기의 굴레에 짓눌리기보다, 글쓰기를 통해 더 행복하고 자유하길 바랐고, 그 자신도 그런 글쓰기를 해왔다. 챕터마다 수록된 저자의 글쓰기 가이드가 여느 책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이는 이유다.

글쓴이가 제시하는 가이드들은 조금 난해하다. 과연 이런 것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까?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도대체 무얼 원하는거지?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무수한 의혹이 생겼다. 이유는 단순했다. 저자가 바라보는 시야와 내가 바라보는 시야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 가운데서 그 수단을 ‘글쓰기’로 삼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집어 든 내가 원했던 것은 ‘글쓰기’가 목적이되, 그 가운데 자신을 ‘치유’하는 효과가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었다. ‘글쓰기’가 목적인 사람은 이 책을 집어들 이유가 없다. 작가는 글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어서 책을 쓴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듬었는지 가르쳐주고 싶어서 책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저자의 시각에서 책을 읽어본다.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위로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글쓰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작가들이 우울하고 고뇌에 찬 존재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많은 고뇌와 지나친 우울함은 이불을 개거나 설거지, 빨래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글쓰기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우울한 사람의 글쓰기는 집안일이 하나 더 더해질 뿐일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 있는 한 시간을 정하라. ... 의식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떠올려라. ... 이제 가서 글을 써라. 1부터 50까지 숫자를 매기고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 쉰 가지를 목록으로 작성하라.” - 본문 중에서

한 시간이 아니라 10분 만이라도 좋다. 다들 한번 해보시라 권하고 싶다. 1부터 50까지 내가 좋아하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적는 것. 단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상상만으로도 우리 자신의 기분을 가볍게 할 것 같지 않은가. 문제는 50가지가 너무 많다는 거다. 의외로 쉽지 않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50가지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긴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경험과 일들이 채 50가지가 되지 않는다니, 얼마나 우리는 무심한 사람들인가. 물론 어떤 일들은 잊혔을 수도 있고, 어떤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행복한 기억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에, 나를 행복하게 할 방법이 50가지도 되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지금 당장 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더욱 몇 가지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생각만으로도 삭막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우리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한 좋은 방법이 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글쓰기’다. 내면의 감정을 글로 적으면서 표현하고 해소하고, 내면의 생각을 글로 적으면서 정리하고 이해하고, 그렇게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위로하는 것이다. 어떻게 적을까, 무엇을 적을까 고민하지 말자.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적어 내는 것이다. 틀이나 형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 서약은 어쩌면 작가들이 꼭 해야 할 서약일지도 모른다. ... 모든 사람들에게 솔직함은 치유하는 힘이 있고, 가장 먼저 치유되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문장력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보는 것들의 진실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아주 정확한 언어를 발견한다. 이때 나오는 표현들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정확한 내용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때 글은 우리의 생각을 따라 흐물흐물해진다. ... 솔직함은 글을 쓰는데 최선의 방책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오래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사적인 삶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것처럼 거짓말은 글쓰기에도 똑같이 해로운 손상을 입힌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단어들을 알고 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떤 것을 묘사하고 설명하는데 충분할 만큼의 단어를 알고 기억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 내면의 소리를 정직하게, 솔직하게 적기만 한다면 문장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 스스로 가장 정확한 표현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보자. 직장 상사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상사의 가발이 벗겨져 날아가 버렸다. 이 때에 나의 심정은 어떠할까?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미묘한, 엄청 우스운데 지금 웃을 수는 없고, 웃음을 참아야 하는데 참기가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얼굴을 찌푸릴 수도 없고.’ 표현이 훌륭한 것도 아니고 엉성한 문장이지만, 이해하고 공감하기에 어려운 것은 아니다. 솔직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좀 더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 내면은 그 어떤 미묘한 표현이라도 해낼 수 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글쓰기 이론이 아니다. 나를 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한 솔직함과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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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_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 | 구매리뷰 2019-06-0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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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

서미현 저
팜파스 | 201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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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처음 시작해보려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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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

- 저자 : 서미현 / 카피라이터

- 출판사 : 팜파스

- 출판일 : 201862

 

2. 리뷰

 

  제목이 신선했다. ‘열심히쓰면 된다, 혹은 부지런히쓰면 된다도 아니고 그냥쓰면 된단다. 왠지 서가에서 꺼내어 들면 그 참을 수 없는 내용의 가벼움에 필히 후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머리 아픈 책보다는 정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 읽고 싶었다. 종일 두통에 시달렸는데, 굳이 두통을 더할 필요는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한 문체와 달리, 내용은 가벼우면서도 쉬이 흘러넘길 것들은 아니었다.

 

  만인 출판의 시대. 서점에는 늘 신간이 넘쳐난다. 어떤 책들은 빛 한번 보지 못하고 구석에 쌓이고, 어떤 책들은 용하게도 베스트 셀러에 들어 서가에 채워지기가 바쁘게 팔려 나간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베스트 셀러에 든 책이 구석에 든 책보다 항상 질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좋은 책인데 왜 안 알려졌을까싶은 책이 서가에 수두룩하다. 반대로 이런 책이 베스트 셀러라니 말세다싶은 책도 마찬가지로 서가에 수두룩하다. 만인 출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는 이 같은 현상도 한몫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어. 나도 글 한번 써봐?’ 같은 생각을 많은 독자들에게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보려 하면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다. 글쓰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새삼 수많은 작가들이 존경스러워진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글을 쓴다고. 그렇게 우리는 펜을 조용히 내려놓곤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상당히 좋은 동기부여가 된다. 저자의 솔직하고 유쾌한 문장 속에서 글쓰기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엇인가를 쓰고 찍어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아니다. 꾸준함도 재능이고 능력이다. 한 가지를 꾸준히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쌓여 결과물로 얻게 되는 것이 순리다. ...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잘 쓸 수 있지. 어려울 게 뭐 있어?’라는 생각을 이제 실천에 옮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줄이라도 글을 남긴다면 꼭 책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꾸준함 뒤에 찾아오는 행복한 결과와 마주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설렘과,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떼는 처음의 한 걸음을 저자는 독려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 이 책의 모든 챕터의 주제는 , 한 번 써보세요. 어렵지 않아요!’. 글쓰기를 시작해보는 것을 오로지 목표로 한 책 같다. 글쓰기를 처음 마음먹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쉬운 가이드가 단계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글감 찾기, 단문 써보기, 생각 표현하기, 문장 늘려보기 등, 단 몇 분만 생각해보면 아무리 글쓰기 초보자라도 금세 짤막한 글을 써낼 수 있다. 그렇게 자신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지난 일들을 반성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가식의 가면을 쓴 채 사람들을 대하며 웃었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썼다. ...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고 했다. 내가 아닌 나로 사는 듯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은 글을 쓰는 시간이라는 것을. ... 솔직하게 쓰자. 가장 나답게 쓰자. 글은 가면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가면을 씌울 수 없으니까.” - 본문 중에서

 

  소위 요즘 말로 오글거리는문장이 아닐 수 없다. 마음에 가면을 씌울 수 없다는 문장에서 언뜻 싸*월드 감성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무튼, 저자가 제시하는 가이드의 장점은 무리하게 어려운 글감을 찾아 어렵게 글을 쓰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침 출근길에 지나친 사람,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 한가로이 보낸 주말, 내가 경험한 나의 삶의 순간들이 곧 글감이고, 그 순간에 느낀 나의 감정들이 곧 표현이 된다. 어쩌면 결과물이 조금은 유치한 학생들의 일기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이드를 따라 표현을 조금 바꾸고, 단어를 조금 바꾸다 보면 어느새 멋진 에세이의 서두가 될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대단한 작품과 문장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첫걸음마를 잘 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오직 그것을 위한 책이고,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아쉬운 것은 딱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첫걸음을 떼고 나면 무수한 걸음마 연습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걸음마가 익숙해지면 아이는 뛰기를 배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처음 써보고, 또 써보고, 계속 써보고, 무수히 써보면서 글쓰기가 익숙해지면, 내 문장이 유치해 보이고 좀 더 깊이 있는 멋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난다. 이제는 뛰기를 배울 차례가 된 것이다. 그 순간, 이 책은 소임을 다한다. 뛰는 법은 또 다른 글쓰기 책을 통해 익혀야 한다. 물론 기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만 있고 기교를 모르면 내내 그 수준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읽는 이로 하여금 오늘 당장 펜을 들어 글쓰기를 시작해보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지임을 기억하시라. 그것이 이 책을 실망감 없이 즐겁고 유쾌하게 읽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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