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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철학 콘서트] 03. 석가는 왜 겨자씨를 구해오라 했을까? | 연재: 황광우의 철학 콘서트 2017-03-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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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비구니가 된 고타미라는 여인이 있다. 고타미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으나 재산이 많은 사내의 아내가 되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평화로운 가정을 꾸렸다. 자식이 생기자 고타미의 가정은 즐거움을 더하게 되었다. 하지만 복된 가정에 언제나 행운의 바람만 불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귀여운 아들이 겨우 걸음마를 할 무렵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고타미의 슬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고타미는 아들의 식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울부짖었다. 사람마다 붙들고 귀여운 갓난애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미 식어버린 아이의 몸을 되살려낼 방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동정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고타미는 거리를 헤매는 미친 여자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석가의 제자가 그 여자를 불러 세웠다. “누이여, 그 아이의 병은 무겁다. 세간의 의사로는 어림없다. 다만 한 사람, 여기에 그 병을 고치실 분이 계신다. 그는 지금 다행히도 기원정사에 머무르고 계신다.” 고타미는 제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원정사로 냅다 달려가 석가를 만났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애걸했다. 석가는 조용히 여인의 말을 듣고 부드럽게 말했다. “여인이여, 이 아이의 병은 고치기 쉽다. 겨자씨를 대여섯 알 먹이면 된다. 거리로 나가 얻어 오너라.”
 
고타미는 너무나도 쉬운 분부에 급히 거리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때 석가는 여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러나 여인이여, 겨자씨는 아직 한 번도 장례식을 올린 일이 없는 집, 다시 말해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에서 구해 와야 하느니라.” 하고 분부했다.
 
고타미는 자식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석가의 분부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고타미는 거리로 뛰어나가 겨자씨를 구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겨자씨를 청하여 주지 않는 집은 단 한 집도 없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모두 그렇다고 말할 뿐 아니라고 말하는 집은 단 한 집도 없었다. 성안의 구석구석 모든 집을 두드려보았으나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고타미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차츰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죽지 않는 자는 없다. 사별의 슬픔이 찾아오지 않는 집은 없다. 귀여운 내 자식, 소중한 부모, 집안의 중심인 남편, 그 누구라도 죽지 않을 수 없다. 나 또한 죽을 몸이 아닌가?” 순간 고타미는 몸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제는 겨자씨를 구걸할 용기도 사라졌다.
 
그녀의 마음엔 법안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며칠을 품고 다니던 사랑하는 아들의 몸을 땅에 묻고 기원정사로 돌아가 석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갠지스 강의 물결을 보라.

종교란 죽음의 문화다. 생로병사.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 법인데, 죽음에 대한 의식(意識)은 늘 불안을 수반한다. 그 누구도 사후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가볼 수 없으면서 한 번은 갈 수밖에 없는 사후 세계에 대한 무지는 우리에게 불안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고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는 한, 종교는 영원하다.
 
불교야말로 죽음의 종교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집착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있다가 없어지듯, 인간의 생명도 있다가 없어진다. 인간의 몸은 소용돌이, 그 감각은 물방울, 그 표상은 아지랑이, 그 의지는 파초, 그 의식은 환영이라고 불경은 가르친다.
 
“제자들이여, 저 갠지스 강의 물결을 보라. 저기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그러나 잘 보라. 소용돌이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강물의 순간적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 현상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우리의 사고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늘에 주인이 없듯, 바람에 주인이 없듯, 인간의 몸과 마음에도 주인이 없다고 석가는 가르친 것이다. 《금강경》은 이렇게 전한다. “수보리여, 누구든지 자아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직 구도자라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나의 소멸’에 대한 불안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언제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다. 그런 의문에 붙들린 자에게 불교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한다.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읜 열여섯 살의 율곡이 삼년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간 것이나 존경하는 형님 허봉과 사랑하는 누이 허난설헌을 잃은 허균이 관아에 부처를 모시고 염불을 했던 것은 죽음을 이기는 길이 불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세상을 ‘공(空)’으로 본다. 사람들은 너와 나를 가르고 인간과 짐승을 가르고 산 것과 죽은 것을 가른다. 분별의 세계는 ‘색(色)’의 세계다. 그러나 너와 나는 다 같은 사람이요, 인간과 짐승은 다 같은 생명체요,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다 같은 존재다.
 
봄날 찬란하게 피어나는 개나리와 진달래와 영산홍은 서로 분별하지 않는다. 개나리가 진달래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모란이 개나리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어여쁜 꽃잎을 뽐내지도 않고, 꽃잎이 떨어짐에 서운해하지도 않는다. 모란이 피기까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려 서운해하는 것 또한 사람뿐이다. 분별의 세계와 분별의 의식, 이것은 색이다.
 
세계는 본디 하나다. 냇물이나 강물이나 바닷물이나 모두 물이다. 개나리나 진달래나 모란이나 모두 꽃이다. 색은 공이다. 본디 공인 것을 색으로 보는 것은 인간이요, 인간의 분별 의식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면 색은 본디 공이요, 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냇물과 강물과 바닷물은 다 물이다. 개나리와 진달래와 모란은 다 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철학 콘서트 1~3권 세트

황광우 저
생각정원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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