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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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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 작가레터 2011-06-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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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자신이 집필하는 책상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더군요.

 

 나는 예전부터 방 전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떡갈나무 책상을 갖고 싶었다. 트레일러 세탁실의 아동용 책상도 싫었고 셋집에서 사용하던 평범한 책상도 싫었다. 1981년 나는 드디어 마음에 드는 책상을 구해 채광창이 있는 널찍한 서재 '한복판'에 갖다놓았다. 그때부터 그 책상을(튼튼한 떡갈나무에다가 공룡처럼 거대한) 쓰는 6년 동안, 나는 술이나 마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도는 배의 선장과도 같았다.

 

 그 책상 위에서 6년을 악몽처럼 보낸 다음 스티븐 킹은 술을 끊고 거대한 떡갈나무 책상을 조각조각내서 치워버립니다. 대신 작은 나무 책상을 하나 마련하지요. 그리고 방 중앙이 아니라 처마 밑 한구석에 그 작은 나무 책상을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방 전체를 다 잡아먹은 떡갈나무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근사한 터키산 양탄자를 깔아놨는데 덕분에 서재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지요.

 

 아이들은 대개 피자 껍데기가 가득한 상자를 치우지도 않고 나갔지만 나는 그것조차 싫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방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고, 나도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지금도 바로 그 처마 밑에 앉아 있다. 내 나이 쉰세 살, 시력도 안 좋고, 한쪽 다리를 절긴 하지만 숙취 따위는 없다. 나는 내가 할 줄 아는 일을 하고 있으며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선 이것부터 해결하자. 글을 쓰려고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은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스티븐 킹의 책상 이야기가 제 맘을 사로잡았답니다. 마치 망치로 정수리를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랄까요. 그동안 제가 몰랐던 것을 단박에 일깨워준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제가 몰랐던 글쓰기의 비밀은 생각보다 간단하군요. ‘글 쓰는 책상을 방 중앙에 놓지 마라’ 그리고 ‘소설이 내 삶의 중심에 서 있게 하지 마라!’는 것이지요.

 

 삶의 비밀이란 참 이상하고도 반어적이지요. 아주 오랫동안 저는 문학이 제 삶의 전부이기를 바랐습니다. 하루 종일 소설 생각만 할 수 있는 전업 작가의 삶, 넓은 책상과 근사한 서재, 시종일관 울려대는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넣고, 세상의 소음과 사람들의 간섭과 술자리의 유혹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마치 고즈넉하고 높은 정신의 세계를 탐미하겠다는 듯, 마치 예술을 위해 몸이라도 불태우겠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산책을 하고, 밤마다 노트북을 켜고 온몸과 온 정신을 소설에 다 쏟아낼 수 있는 삶 말입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저는 제가 열일곱부터 꿈꾸었던 글쟁이의 모습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 같았답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마련했고, 서재에 복판에 거대한 책상을 놓았고, 핸드폰은 꺼두었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소설만 제대로 쓰면 되는데, 되는데, 그 넓은 책상 위에서 내내 괴로워하고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뭔가 김이 새버린 느낌이랄까요.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2, 3년 전부터 저는 일기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이십대 내내 그리고 삼십대 내내 저는 저 자신도 믿기지 않을 만큼의 방대한 일기를 썼는데 그 글은 대부분 길 위에서 쓴 것이지요.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빚도 갚아야 하고, 자질구레한 약속과 술자리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소설을 쓰려고 책상에만 앉으면 사람들이 불러냈지요. 그런데 올바른 책상 하나, 조용한 방 한 칸 없는 그 시절에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쏟아낸 것이지요.

 

 저는 이제야 방 중간에 거대한 공룡 책상을 놔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소설쟁이에게 소설이 삶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생이, 사람이, 사랑이, 예술보다 백만 배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는 박물관 유리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밥상 위나 설거지통에 있는 것임을 알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제 삶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소설이 제 삶의 전부일 때 저는 너무나 가난하여 빛나는 것을 움켜쥘 수 없었다는 사실을 언제고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많은 분들 그리고 말없이 읽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저는 종종 ‘인터넷 연재소설 사상 최초의 댓글보다 못한 소설’이라고 제 소설에 대해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굉장히 훌륭한 일이군요. 댓글이 소설보다 훌륭하다는 것은 제가 제 소설보다 훨씬 근사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일 테니까요. 이제 큰 책상을 치워버리고, 창문을 열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으로 나가 이 여름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를 다시 써볼 생각입니다. 많은 부분이 사라질 것이고 많은 부분이 새로 들어오겠지요. 저는 이제야 이 소설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아름다운 풍경들은 모두 여러분들과 나눈 대화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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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마지막 회) |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2011-06-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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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고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맑은 밤하늘이었다. 보름을 앞두고 몸을 잔뜩 불린 달이 고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수수깡처럼 바싹 말라 있는 고진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은은했다. 고진도 파란 모자 난쟁이도 모두들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저리도 밝은데. 비가, 올까요?” 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오면 또 기다리면 되지요.” 고진이 말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 그게 강우사님의 유일한 비법이군요.” 장이 웃었다.

 “네, 비법이라고는 달랑 그거 하나밖에 없답니다.” 고진이 웃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요. 평생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고귀한 삶이지요.” 고진이 말했다.

 문득 아주 오랫동안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좋은 일이에요.” 장이 말했다.

 고진이 장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이 들판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군요.” 고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장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지자 마선생과 사강과 빨간 모자 난쟁이가 텐트에서 걸어나와 조용히 고진의 뒤에 앉았다. 고진이 고개를 돌려 마선생과 사강과 빨간 모자 난쟁이의 손을 잡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별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을에서 막걸리도 준비하고 돼지 머리 편육도 준비했는데 비는 대체 언제 오냐고 마선생이 물었고, 그나저나 너무 오래 굶으셔서 먹을 수나 있겠냐며 사강이 걱정했고, 뱀술은 마선생이 벌써 다 처먹었다고 빨간 모자 난쟁이가 투덜댔다. 빨간 모자 난쟁이가, 마선생이, 사강이 떠들 때마다 고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지쳐 있어 몹시 힘이 드는지 고진은 몇 번씩이나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고진이 다시 들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모두들 고진이 바라보는 하늘과 들판을 바라봤다. 달빛이 가득 내린 들판이 복사꽃처럼 환해서 보기 좋았다. 달이 점점 기울어지고 달의 궤도를 따라 들판에 앉은 사람들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그토록 고요한 밤도, 그토록 느리게 움직이는 달도, 그토록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본 적도 처음이라고 장은 생각했다. 그 밤의 깊은 정적을 따라, 달의 궤도를 따라, 덩달아 늘어지는 그림자를 따라, 마른 갈대밭에서 솟아올라 들판을 가로지르는 새들의 우아한 비행을 따라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음 저 한구석에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비가 내렸다. 추억해야 할 것들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과 울어야 할 것들과 기다려야 할 것들이 대기에 충만하게 채워져 있었고 그 충만함 때문에 자신이 아주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작아져서 더이상 외롭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이마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처음에 몇 방울씩 후드득 후드득 내리던 비가 이내 장대비로 바뀌었다. 빗방울이 마른 흙에 떨어질 때마다 비명을 지르듯 먼지들이 날아올랐다. “선생님, 비가 와요.” 장이 고진의 손을 잡았다. 고진의 손이 아주 차가웠다. 고진은 눈을 감은 채 아주 평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듯, 저 빗소리를 아주 멀리서부터 듣고 있었다는 듯, 고진의 얼굴이 흐뭇했다. 고진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어느 순간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파란 모자 난쟁이의 흐느낌이 고진의 몸을 따라 전해져왔다. 뒤에 앉은 빨간 모자 난쟁이도, 사강도 울고 있었다. 하지만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울음소리도 탄식도 들리지 않았다. 빗물들이 모여 들판에 금세 크고 작은 웅덩이가 생겼고 웅덩이들 위로 수없이 많은 동심원들이 일제히 소리를 냈다. 동심원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작은 개울을 만들고 개울이 실핏줄처럼 흘러가 대지의 끝까지 흘러갔다. 빗소리를 들었는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들판으로 걸어나왔다. 누군가는 두 손바닥을 펼쳐 빗방울을 받아 마셨고, 누군가는 얼굴을 젖히고 비를 맞았다. 누군가 빗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고 서로를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아이들이 비를 맞으며 논두렁을 뛰어다녔고 온 동네의 바둑이들이 신이 나서 아이들을 쫓아다녔다. 한 노인은 자신의 논바닥 위에서 어린애처럼 몸을 뒹굴리며 이제 살았어, 이제 살았어,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마른 풀잎들은 금방 제 색깔을 찾아 돌아가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구리들은 이곳저곳에서 뛰쳐나오고, 금세 윗논에서 고인 물이 아랫논으로 흘러내려왔다.

 

 하두리 사람들이 경운기와 트럭을 나눠 타고 들판으로 올 때까지 장과 마선생과 사강과 난쟁이들은 고진의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두리 사람들이 몰고 온 경운기 안에는 돼지 머리 편육과 막걸리와 김치가 잔뜩 들어 있었다. 상두리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술과 고기를 받아 내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들판 한가운데에 돼지 머리 편육과 김치를 펼쳤다. 사발에 막걸리를 받아 내려놓자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막걸리 사발 위로 통통 떨어지며 연신 동심원을 만들어냈다. 상두리 마을 이장과 하두리 마을 이장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는 고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손수건을 빗물에 적셔 고진의 얼굴을 닦았다.

 “우리 고진 선생님 빗물에 씻겨놓으니 참 잘생겼네. 비가 와서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어요. 모두 웃고 있어서 우리 고진 선생님도 참 좋지요.” 마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참 좋다는 듯, 정말로 참 좋다는 듯 고진이 눈을 감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들판에서 사람들이 어서 오시라고, 어서 오시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선생이 너무 많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사강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빨간 모자 난쟁이와 파란 모자 난쟁이와 장에게 어서 들판으로 가자고 손짓을 했다.

 “뭐하냐? 비 내렸으니 술 마시고 춤춰야지. 고진 선생님이 우리가 춤추기를 기다리잖아.” 마선생이 말했다.

 빨간 모자 난쟁이와 파란 모자 난쟁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들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걸어갔다. 빗방울이 들판의 잔치 위로 계속 내렸다. 막걸리 사발에서, 김치 그릇에서, 돼지 머리 편육 접시에서 연방 퐁당퐁당 소리가 났다. 어쩌면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부딪혀서 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장은 생각했다. 빨간 모자 난쟁이와 파란 모자 난쟁이가 빗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난쟁이들의 춤이 우스꽝스러워서 사람들이 질퍽한 들판 위로 엎어지며 자지러졌다. 마선생이 막걸리 잔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비님이 오시니 가만히 있어도 술이 늘어난다고, 이런 횡재가 어디 있냐고 익살을 떨었다. 사강이 돼지 머리 수육과 막걸리를 철철 넘치도록 가득 따라 고진의 앞에 가져다놓았다. 장대비 속에서 꼿꼿하게 앉은 고진이 웃고 떠드는 사람들과 비에 잔뜩 젖은 들판과 멀리서 구름을 가져온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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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97) |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2011-06-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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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되면 장은 바다를 막기 위해 만든 길고 긴 방죽 위를 혼자 걸었다. 방죽 위로 갯내가 밀려왔다. 바람 속에 섞인 소금 냄새가 답답했다. 이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이, 산을 깎아 그 아름다운 바다를 돌과 흙으로 모두 메웠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매년 물로 씻지 않으면 벼 한 포기도 배추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소금밭 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보겠다고 이 들판으로 꾸역꾸역 밀려온 사람들이 답답했다. 바다를 잃은 사람들도, 바다를 메우겠다고 흉물스럽게 깎아 반 토막 난 산들도, 돌과 흙으로 메운 바다 위에 절개지같이 위태한 집을 짓고 봄 가뭄이 올 때마다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아무런 비법도 없이 고집스럽게 마냥 비를 기다리고 있는 늙은 강우사 고진도 답답했다. 모두들 답답한 삶이었다. 이 답답한 시간들을 모두들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장은 신기하고 의아했다.

 

 밥도 안 먹고 23일째였다. 몇 개의 두터운 비구름들이 지나갔지만 간척지 위에는 내리지 않았다. 높은 산이 없어서 그렇다고 지나가는 비구름을 보며 상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가는 빗방울 몇 개가 흩날리는 날도 있었지만 간척지의 땅을 씻기는커녕 채소밭을 적시기도 부족한 양이었다. 장마가 오면 고진도 물러설 것이라고 마선생이 말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모내기 철은 끝날 것이다. 아무것도 심지 못한 텅 빈 들판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은 참담할 거라고 장은 생각했다. 하지만 고진은 여전히 들판에 앉아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염분으로 가득 찬 땅을 씻고, 모내기를 할 시간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장이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파란 모자 난쟁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판에 있는 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고진 선생님 좀 이상하지 않아?” 파란 모자 난쟁이가 물었다.

 “뭐가요?”

 “땅에 얼굴을 대고 바짝 엎드린 게 어쩐지 평소와는 달라 보여서. 주무시는 것 같기도 하고 쓰러지신 것 같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 파란 모자 난쟁이가 말했다.

 “가볼까요?” 장이 물었다.

 “주무시는 거면 겨우 눈 좀 붙이셨는데 깨우는 것 같아서.” 파란 모자 난쟁이가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 모자 난쟁이의 말처럼 평소와 달리 고진은 얼굴을 흙바닥에 댄 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아주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가보죠.” 장이 말했다.

 

 파란 모자 난쟁이와 장이 허겁지겁 들판으로 달려갔다.

 “고진 선생님, 고진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파란 모자 난쟁이가 큰 소리를 지르며 요란을 떨었다. 고진이 무슨 일이 있냐는 듯 고개를 들어 장과 파란 모자 난쟁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머쓱하기도 기쁘기도 한지 파란 모자 난쟁이가 “헤헤” 하고 웃었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어진 고진의 한쪽 볼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니, 두더지도 아니고 선생님은 왜 땅에 얼굴을 박고 그러세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파란 모자 난쟁이가 말했다.

 파란 모자 난쟁이의 말에 고진이 피식 웃었다. 입술이 다 부르트고 터져 있어 고진이 웃을 때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그때 백숙을 먹으러 우르르 몰려간 상두리 마을 이장네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 고진이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웃고 있군요.” 고진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마을 사람들은 고진 선생님이 고생하고 계시니 조용히 지내고 싶어하는데요, 마선생이 마셔도 된다고, 된다고, 기우제 때는 술을 많이 마실수록 비도 잘 온다고, 얼토당토않은 말로 자꾸 착한 마을 사람들을 부추기는 바람에, 아니, 고진 선생님은 여기서 쫄쫄 굶고 있는데, 마선생님은 인삼주에 뱀술에 아주 살판났다니까요. 아니, 그 연세에 뱀술이 웬 말이래요. 얄미워 죽겠어요. 그러니 고진 선생님도 이제 그만하세요.” 파란 모자 난쟁이가 잔뜩 심통이 나서 말했다.

 “선생님. 이제 정말 그만하세요. 몸 다치세요.” 장이 말했다.

 

 고진이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리고 여기에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파란 모자 난쟁이와 장이 고진의 옆에 앉았다. 고진이 밤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비가 올 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비가 오기 전의 소리는 굉장히 아름답답니다. 대지가 온몸을 비틀어 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소리랍니다. 나무와 풀과 꽃들이 닫힌 문을 열고, 새들은 낮게 날고, 벌레들은 부지런히 땅 위를 돌아다니고, 흙과 바람이, 달팽이와 지렁이가 비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요. 대지의 모든 것들이 자신이 가진 모공을 활짝 열고 흠뻑 적셔질 준비를 한답니다. 저는 이 순간이 참 좋아요. 물방울이 뭉게뭉게 하늘로 올라가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온 세상에 평등하게 비를 내릴 준비를 하는 이 순간이요. 아주 아름답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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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96) |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2011-06-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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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두리 마을 이장네에서의 닭죽과 인삼주와 뱀술의 기나긴 밤이 끝난 다음날, 수문 폭행 사건으로 마을 유치장 신세를 졌던 하두리 청년 여섯이 노을 무렵 들판에 와서 기우제를 올렸다. 하두리 이장네 할머니가 닭죽을 참 달게 먹어서 고맙다며 떡을 해서 동네 노인들 몇 명과 같이 왔고, 하두리 마을 부녀회에서는 닭죽 대신 백숙을 끓여와 두 마을의 부녀회 사이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덕택에 모처럼 고진의 기우제에는 서른 명도 넘는 사람이 모였다. 들판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상두리 마을 이장에게 꿀밤을 얻어맞고 어쩔 수 없이 기우제에 참석해야 했으므로 어쩌면 마흔 명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노을이 마른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노을을 등에 지고 마흔 명의 사람들이 고진을 따라 절을 하는 모습은 경건했고 장관이었다.

 

 기우제가 끝나자 하두리 마을 이장이,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조금씩 모았다며 다친 청년들 병원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가 제법 두꺼웠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두어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봉투를 받았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어제 스쿠터를 몰았던 용재 청년을 불러내 봉투를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속삭였다. 용재 청년이 하두리 마을 이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두리 마을 이장이 손사래를 쳤다. 하두리 마을 이장이 수문 폭행 사건에 가담했던 여섯 명의 청년들을 불러 용재 청년 앞에 세웠다. 용재 청년이 민망한지 머리에 감은 붕대를 자꾸 만져댔다. 용재 청년이 앞에 서 있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어색한 하두리 청년 여섯이 제각각 딴 곳을 바라봤다. 사진으로 한 컷 찍어두고 <어색함> 혹은 <민망함> 아니라면 <망측함> 같은 제목으로 사진전에 출품을 해도 될 만한 풍경이었다. 하두리 마을 이장이 중간에 서서 청년들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화해를 시켰다. 머뭇거리던 하두리 마을 청년 중 한 명이 나서더니 용재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청했다. 용재 청년도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받았다.

 

 그때 일전에 슈퍼 앞 평상에서 만났던 사내 둘과 상두리 마을 청년 셋이 두 마을 사이에서 무슨 사달이라도 난 줄 알고 들판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청년들의 손에는 각목과 곡괭이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중 키가 제일 작은 청년은 손에 호미를 쥐고 있기도 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런데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마선생이 몽골리안 장사형이라고 구라를 쳤던 사내가 각목을 흔들며 소리쳤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쳤다. 용재 청년이 몰려온 마을 청년들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고 돈 봉투도 보여줬다. 몰려온 상두리 마을 청년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두리 청년들을 쳐다봤다. 짜증이 심하게 난 상두리 마을 이장이 마을 청년들에게 걸어갔다.

 

 “임진왜란이라도 났냐? 이게 다 뭐고?” 상두리 마을 이장이 청년들이 들고 있던 각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년들이 각목을 등 뒤로 슬그머니 숨겼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혼자 호미를 들고 있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운 니가 설마 이걸로 사람을 찍으려고 했을 리는 없을 거고, 와? 감자 캐려고? 고구마 캐려고? 저어기 가서 땅 파봐라, 감자 나오나, 어여 가봐라. 어잉?” 상두리 마을 이장이 키 작은 청년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말했다.

 키 작은 청년이 손에 들고 있는 호미를 어찌할 바 몰라 바닥에 집어던졌다. 마선생이 갑자기 삐죽 나서며 슈퍼 앞 평상에서 만난 덩치 좋은 사내를 향해 혀를 찼다.

 “몽골리안 장사님 실망입니다. 정말 실망이에요. 장사님은 뼈가 탄실해서 뼈 자체가 무기이신 분인데 쪽팔리게 연장질이라뇨.” 마선생이 말했다.

 몽골리안 장사가 얼굴을 붉히며 “헛, 헛” 헛기침을 하고 먼 산을 향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 하두리 마을 청년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두 마을 청년들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지갑을 열어 수표 두 장을 꺼내더니 청년들끼리 술이나 한잔하라며 용재 청년에게 건넸다. 용재 청년이 한사코 안 받겠다고 뒷걸음을 치자 상두리 마을 이장이 용재 청년의 윗주머니에 억지로 수표를 쑤셔넣었다.

 “부모님을 죽인 철천지원수만 아니면 사내는 술 한잔 마시면서 다 풀 수 있는 거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두 마을의 노인들이, 두 마을의 아낙들이 하두리 마을에서 해온 떡과 백숙을 먹겠다고 상두리 마을 이장네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용재 청년이 머리에 붕대를 매만지며 머뭇거리다가 하두리 청년들을 향해 “공으로 술값도 생겼으니, 갑시다” 하고 말했다. 용재 청년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상두리 마을 청년들이 그 뒤를 따랐고 잠시 후 하두리 마을 청년들이 어물쩍어물쩍 뒤를 따라갔다. 청년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곡괭이 자루 하나와 각목 셋 그리고 하마터면 용맹무쌍할 뻔했던 호미 하나가 바닥에 내버려져 있었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도 않은 마선생이 청년들끼리만 술을 마시면 젊은 혈기에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술자리에 같이 따라가야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상두리 마을 이장과 하두리 마을 이장이 말렸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오늘은 간단하게 자기 친구 집에 들러 머루주나 한잔하자고 말했다. 청년들의 술자리에 못 따라가서 잔뜩 골이 나 있던 마선생이 머루주라는 말에 금세 헤벌레 웃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어두운 들판에 고진은 혼자 앉아 있었다. 난쟁이들과 장이 남아 천막을 지켰다. 파란 모자 난쟁이가 들판으로 걸어가 고진을 살펴보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파란 모자 난쟁이를 향해 고개를 돌린 고진이 웃고 있었다.

 “뭐라고 하시디?” 빨간 모자 난쟁이가 물었다.

 “마선생이 얄미워서 당신도 배고프다고, 내일 아침에는 죽 준비하라고 하시던데?” 파란 모자 난쟁이가 말했다.

 “하여간에 마선생은, 고진 선생이 굶고 있으니 혼자서 더 잘 먹어, 아주 얄미워 죽겠다니까.” 빨간 모자 난쟁이가 툴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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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95) |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2011-06-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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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마선생과 하두리 마을 이장은 몸에 좋은 닭죽과 역시 몸에 좋은 인삼주를 마구 마시고 대취했다. 술 취한 하두리 마을 이장이 이 집 닭죽 맛은 자기가 먹어본 닭죽 중에 최고이며 이 닭죽에 비하면 우리 마누라 닭죽은 거의 꿀꿀이죽 수준이니 사실 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말해서 상두리 마을 이장의 아내는 민망해했고 하두리 마을 이장의 아내는 대노했다. 술 취한 마선생이 대노한 하두리 마을 이장의 아내 손을 꼭 잡고 누가 뭐래도 자신만은 사모님 닭죽을 믿으며 조만간에 먹으로 갈 터이니 너무 화내지 말라고 말해 분노를 더더욱 부채질했다. 석 되짜리 인삼주 두 통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상두리 마을 이장이 고진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서 들판에서 스무나흘을 굶고 있는데 음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술에 취하는 것은 너무 죄송스럽지 않느냐고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취하기는 벌써 두어 시간 전부터 취해 있었다. “고진 선생님은 저러고 계신데, 제 마음이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이제 그만 마십시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선생이 크게 섭섭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가 고진 선생을 30년간 알아왔는데 우리 고진 선생은 자기가 굶는다고 남도 굶기를 바라는 그런 쫀쫀한 분이 결코 아니라고, 우리 고진 선생은 자신은 굶어도 사람들이 화목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더불어 살며 그리고 무엇보다 더불어 마시고 취하는 모습을 보면 그걸로 족하고 흐뭇해할 분이라고 말했다. 연이어 마선생은 갈라졌던 두 마을에 드디어 화해의 기운이 서서히 싹트고 있는데 여기서 술자리를 파한다는 것은 고진 선생의 뜻을 크게 저버리는 일이라고,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우리 고진 선생이 얼마나 슬퍼하겠냐고 주먹까지 불끈 쥐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은 내심 좋아라하며 상두리 마을 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하두리 마을 이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부엌에서 수다를 떨던 아낙들이 기가 막혀 먹고 있던 수박을 “쾍” 하고 뱉어냈다.

 

 “담가놓은 인삼주는 다 마셨는데……” 상두리 마을 이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인삼주만 술인가? 소주, 맥주, 막걸리 하다못해 향수나 스킨도 알코올이 들어갔으니 다 술이지. 천지가 다 술인데 무슨 걱정이야. 암, 천지가 술로 가득 찼지.” 마선생이 무슨 창이라도 한 곡조 뽑듯 길게 말했다.

 “우리 집에 뱀술 있는데 그거라도 가지고 올까요?” 하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뱀술?”

 머리에 전구라도 번쩍 들어온 표정으로 마선생과 상두리 마을 이장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뱀술에 흥분한 마선생이 손까지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뱀술 좋지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뱀술에는 또 일가견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뱀과 술이 만나면 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뱀술은 가정을 지키는 제가의 술이며 또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술이라 이거지요. 왜냐? 뱀술을 마시면 사내가 달라져요. 사내가 달라지면, 에 또, 거 뭐시냐, 붕가붕가의 밤이 달라지는 건 두말할 것도 없지요. 밤이 달라지니 아낙의 눈빛이 달라져,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니 남편이 아내를 존경하고, 가장에게 존경심이 넘쳐나니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니 나라가 바로 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옛 선현들은 바로 이를 두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말씀하신 거지요. 어떻게 기왕에 말 나온 김에 오늘 밤 이 위태로운 나라 한번 구해보시지 않으렵니까?”

 술에 취한 두 이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라 구합시다. 이 위태로운 가정과 나라를 어찌 두고만 보겠습니까.” 상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암요, 구해야지요. 나라가 없는데 어떻게 개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술자리가 끝나기만을 바라며 부엌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던 아낙들이 기가 막혀 먹고 있던 수박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하두리 마을 이장이 뱀술을 가지고 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하두리 마을 이장을 말렸다. “어휴, 이장님도. 거기가 어디라고 걸어서 가신단 말씀입니까. 술도 자셨는데.” 상두리 마을 이장이 건넌방에 있던 중학생 아들을 부르더니 “네가 빨리 뛰어가서 용재 아저씨 오라고 해라” 하고 말했다. 아들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문밖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이장의 옆집에 산다는 죄목으로, 또 스쿠터를 가지고 있다는 죄목으로 불려왔다. 청년의 머리에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수문을 지키다 하두리 마을 청년들에게 각목으로 얻어맞고 다친 머리가 아직 다 낫지 않은 것이었다. 술에 잔뜩 취한 마선생이 “저 청년은 머리에 왜 터번을 둘렀는가? 이슬람교도인가?” 하고 되도 않는 말을 지껄였다. 누가 들어도 말 같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니 스쿠터 있제? 여기 이장님 모시고 이장님 댁에 휘익 다녀오너라.” 갑자기 쓰러진 마을의 기강이라도 바로 세우려는 듯 상두리 마을 이장이 근엄하게 말했다. “하두리 마을에요?” 청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두리 마을 이장이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마지못해 “네” 하고 말했다. 청년이 스쿠터를 몰고 집 앞으로 오자 하두리 마을 이장이 미안한 듯, 머쓱한 듯 뒷자리에 올라탔다. “귀한 분이니 밤길에 오토바이 조심해서 몰거래이.” 상두리 마을 이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꽉 잡으쇼.” 청년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두리 마을 이장이 가져온 술병 속에는 커다란 살모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선생과 상두리 마을 이장이 “우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한 30년은 묵혀놔야 하는데 기껏 20년밖에 안 되었다고 하두리 마을 이장이 겸손하게 말했다. 30년도 좋지만 나라가 이 지경으로 위태로운 마당에 어찌 10년을 더 기다리겠냐고 마선생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하두리 마을 이장이 20년 만에 술병을 따고 마선생 잔에 술을 따르고 상두리 마을 이장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은 청년에게 건넸다.

 “이거 한잔 마시고 지난 일은 고만 잊어버립시다. 다 어른들이 못나서 그런 건데 청년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미안하오. 내가 미안하오.” 하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그래, 니도 그거 한잔 죽 들이키고, 우리랑 같이 나라나 구하자. 아니다. 니는 색시 먼저 구해라.” 상두리 마을 이장이 말했다.

 뱀술이 징그러운지 청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하두리 마을 이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술잔을 죽 들이켰다. 사약이라도 한 사발 원샷한 표정이었다. 뱀술에 스파르가눔이라는 기생충이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건지, 전 세계에서 뱀술을 마시다 스파르가눔에 감염되거나 뱀독에 죽는 사고의 50퍼센트가 한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건지, 뱀술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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