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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5] 장소, 기억이 사는 집 | 藝術/旅行 2021-09-1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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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파리의 장소들

정수복 저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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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非장소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그런 의미와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의 공간들을 ‘장소(lieu)’라고 정의했다. 장소라고 다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주유소, 맥도날드, 24시간 편의점 등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장소’가 아닌 장소를 뜻하는 ‘비(非)장소(non-lieu)’라고 이름 붙였다.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비장소는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의 공간이다. 오래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은 기억의 도시일수록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도시의 장소들은 감동, 기쁨, 안식, 평안을 제공한다. 장소에서는 공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비장소에서 공간은 그저 상투성과 단절감만 느끼게 한다. ‘장소’는 없고 오로지 필요에 의해 생긴 기능적 ‘비장소’들만 즐비한 공간에서 살다 보면, 삶이 삭막해지고 각박해지고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며 쫓기게 된다. 그러니까 어느 도시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 속에는 ‘세렌디퍼티’1)와 ‘장소’의 화학적 결합이 쉽게 일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시의 공적인 ‘장소’가 기억과 상상의 연금술을 통해 나만의 장소, 나의 삶에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pp. 12~13]

 

이처럼 <파리의 장소들>은 24시간 편의점, 마트, 주유소,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을 기능성만 갖춘, ‘장소(place)’ 아닌 장소, 즉 ‘비(非)장소’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한 것일까? ‘장소’는 오래된 기억과 스토리(story)가 있는 공간인 반면 ‘비(非)장소’는 획일적으로 생산된, 생존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 <파리에 장소들>에서 파리의 ‘장소’들을 얘기하고 있다. 잘 알고 있듯이 파리는 오래된 도시이고, 이에 따라 나름의 사연이 서려있는 수많은 장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파리의 장소들을 걷다 보면 지금 여기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상과 각각의 장소에 서려 있는 기억들이 서로 엮여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어떤 곳에 가면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고, 거꾸로 어떤 것을 기억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특정 장소와 결부된다.

~ 중략 ~

장소는 이런 의미에서 기억이 사는 집이다.” [p. 16]

 

따라서 장소에 얽힌 기억은 꼭 공적(公的)인 것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나에게만 의미 있는 사적(私的)인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같은 공간 다른 기억

 

에펠탑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바라보는 주체 또는 바라보는 장소 된다. 에펠탑은 주체와 객체, 능동태와 수동태 양쪽 모두가 될 수 있는 기이한 물체다. 에펠탑은 노트르담 사원,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센터와 함께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장소의 하나다. 그러나 다른 장소들과 달리 에펠탑은 비어 있는 박물관이다. 루브르나 퐁피두센터에는 엄청나게 많은 볼거리들이 전시되어 있다. 노트르담 사원도 미술관은 아니지만 꽤 많은 볼거리를 담고 있다. 철로 만든 에펠탑은 그 안에 보여줄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많은 것을 보여준다.” [p. 49]

 

오랫동안 에펠탑은 파리 시민들의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제1부 잘 알려진 ‘장소’ 다르게 보기]의 첫 번째 글 ‘에펠탑 다르게 보고 오르기’서 30페이지 이상의 지면을 에펠탑에 할애하면서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모든 존재는 각자의 존재이유가 있을 테니까. 혹시 에펠탑과 이를 둘러싼 논란에 더 관심이 있다면 이 문제를 전적으로 다룬 정대인의 <논란의 건축 낭만의 건축>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건물에서 라스파이 대로를 건너면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가 시작된다. 처음에 ‘캉파뉴 프르미에르(campagne premiere)’ 거리의 이름을 듣고서 나는 ‘첫 번째 시골’이라는, 다소 낭만적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파리 길 이름 사전을 찾아보니까 ‘첫 번째 전투’라는 다소 공격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캉파뉴(campagne)는 ‘시골’과 ‘전투’라는 두 가지 뜻을 다 담고 있다). 이 골목은 그냥 지나가면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파리의 골목길이다.

~ 중략 ~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면 화려한 상점 하나 없고 어떻게 보면 건물들의 높이가 들쑥날쑥하고 형태와 소재에도 일관성이 없으며 가로수가 없어 메마른 느낌을 준다. 나에게도 이 골목길은 그저 뤽상부르 공원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골목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주 이 길을 오가게 되면서 이 길과 친해지게 되었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기호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기호들과 들리는 소리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보잘것없는 평범한 골목길이 수많은 기호들로 가득 차 있는 의미의 창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일은 숨은 기호를 찾아내 해석하는 기호학적 산책의 기회를 제공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해 보이는 거리가 두터운 의미의 지층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pp. 237~238]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제3부 ‘장소’에 숨은 뜻 자세히 찾아 읽기]의 첫 번째 글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의 기호학’에서 그저 평범한 거리로 여겼던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가 친숙해지면서 그 곳에 수많은 기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 후 그 길을 걷는 일은 숨어 있는 기호들을 해석하는 일이 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가 일상 속에 걷는 길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에 그저 ‘길’에 불과했지만,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하면 단순한 ‘길’ 이상이 되지 않을까? 문득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제2부 피하고 싶은 ‘장소’ 일부러 찾아다니기]의 첫 번째 글 ‘파리 동북부의 ‘위험한’ 동네를 찾아서’에서 언급한, 메닐몽탕 거리는 또 다른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메닐몽탕 거리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라는 점에서 벨빌 거리와 같다. 그러나 벨빌 거리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상점들이 계속 이어지는 데 비해서 메닐몽탕 거리는 문을 닫은 상점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고 비교적 차분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런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쓴 장-자크 루소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에 메닐몽탕 언덕길을 즐겨 걸었다. 그 책의 두 번째 산책 편을 보면 1776년 10월 24일 목요일 루소는 벨빌과 메닐몽탕을 연결하는 오트-보른 부근을 걷고 있었다. 그날 루소는 엄청나게 큰 덴마크 개를 만나 봉변을 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그때 정신이 희미했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순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었나를 생각해보았다. 누군가가 내가 오트-보른에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아틀라스 산에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루소가 메닐몽탕 언덕길을 산책한 일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몽테뉴도 메닐몽탕 언덕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두 사람 다 메닐몽탕 언덕길을 걷다가 개에게 물리는 봉변을 당했다. 이런 일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역을 ‘위험한 지역’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는지도 모른다.” [pp. 154~155]

 

이 얘기대로라면 메닐몽탕 거리는 진짜 ‘위험한 지역’이었을까, 아니면 위험한 지역이라고 ‘인식’된 지역이었을까? 한국으로 치면, 달동네에 해당되기에 선입견에 사로잡혀 ‘위험한 지역’이라고 여기고 싶은 상태였기에, 몽테뉴나 루소의 일화를 핑계로 그런 낙인을 찍은 것이 아닐까? 왠지 우리가 우범지대라고 여기는 곳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울은 어떤 기억의 도시가 될까

                   

가볍게 여기는 산책길을 저자를 따라 걷다 보면, 공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 보다는 그 주변, 그리고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이 책, <파리의 장소들>은 ‘파리’라는 공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파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책은 장소에 관한 책이지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장소와 얽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기 위해 만든 도시의 장소들에 어찌 사람 사는 이야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파리 연작은 파리라는 공간의 이야기이면서 그와 동시에 파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학자이지만 이 책에서 문학적 글쓰기를 모색했다. 시인의 혼이 되어보기도 했고 소설가의 마음이 되어보기도 했다. 이 책은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시적인 순간도 있고 소설적인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박혀 있다. 시가 어느 순간에 밀려오는 영감의 응축된 언어적 표현이라면, 이 책에는 파리의 특정 장소들에서 느낀 고양된 감정과 미적 체험의 순간들이 군데군데 숨을 쉬고 있다. 소설은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사람들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가 쓴 파리 이야기들이 소설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p. 387]

 

(세계화의 영향으로) “캉파뉴 프로미에르 길에도 웰빙을 내세우며 마사지를 하는 미용실과 중국 발마사지 시술소가 생겼고 빨래방도 하나 생겼다. 막다른 골목 안에는 살을 빼고 날씬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둥근 회전판 위에서 운동하는 기계를 설치한 스포츠세터가 생겼다. ‘두 명의 앙드레’라는 이름으로 실내장식 사무실도 생겼다. 마르크 오제가 말하는 이른바 ‘비장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미용사가 ‘머리 조각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전통적 미용실이 건재하고, 19세기 말에 쓰던 철제 다리미를 전시하고 있는 오래된 세탁소도 건재하며, 몽파르나스 대로 쪽 길이 끝나는 곳에 문방구를 겸한 오래된 잡화상도 그대로 있다.” [pp. 250~251]

 

그러면서 풍납토성(風納土城)의 해자(垓子)에 건축 폐기물 수천 톤을 매립하라고 지시했던 구청 직원2), 아파트 재건축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풍납토성 발굴 현장을 파괴하고 흙으로 덮어버린 재건축조합 관계자3)들을 떠올리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과거를, 우리의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야 할까? 물론 파리라고 해서 과거와 꼭 같은 모습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그들의 뿌리를 남겨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파리를 ‘기억의 도시’라고도 하는 것이 아닐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한다. 아파트 숲에 둘러 쌓인 회색 도시가 우리 자손들이 기억하는 서울의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서울의 기억’을 관찰하고 남겨두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1) 세렌디퍼티(serendipity): 완전하게 우연히, 예상치 않게, 기분 좋은 발견을 하는 재능

2)송파구청 직원 풍납토성에 쓰레기 불법 매립”, <YTN> 2013.02.02

3)풍납토성 발굴현장 무단파괴”, <국민일보>, 200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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