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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엔 | 사색과 감상의 길목 2020-10-2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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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유엔을 말하다

장 지글러 저/이현웅 역
갈라파고스 | 2018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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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에 대해 알게 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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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다. 세계 빈곤 문제를 다룬 책으로 유명한 장 지글러는, 2000년부터 2008년 4월까지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고, 현재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이다. 그가 말하는 유엔에 대해 알고 싶었다. 8대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반기문 전 장관 때문이었을까. 한때 우리 사회에서 유엔 기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적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엔의 구체적인 활동을 잘 모르면서도 이 기구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나 하는 의구심을 가져왔던 게 사실이다.

 

'들어가는 말'에서 장 지글러는 "유엔은 힘을 잃어 창백해졌다. 유엔을 지탱했던 꿈, 세계적인 차원에서 공공질서를 회복한다는 꿈은 부서졌다"고 술회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희망을 말하는데, 그것은 유엔을 회복시키려는 프로젝트에 있다. 이 책은 야만적인 세계 질서와 맞선 유엔의 대응이자 저자 개인의 저항을 담고 있다. 특히 2장은, '무'로 돌아갈 인간이 죽음 앞에서 의미를 찾는 실존에 대한 짧은 글인데, 전체 글과 조금 다른 톤의 느낌이다. 연로한 저자의 인생관, 겸허한 자세도 엿보인다.

 

이 책을 통해, 벌처펀드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등장한 벌처펀드('벌처'는 독수리를 뜻하며 먹이를 맹렬하게 습격하고 약점을 가차 없이 공격하는 습성을 상징함)는 투기적인 투자 자본으로, 조세회피처에 등록해 활동하고 과거에 발행됐던 주식, 채권 등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정상가 이하로 채권을 전문적으로 매입한다. 그런 다음 해당 채무 국가가 그 채권을 정상가로 사들이도록 법정에서 채무 국가를 공격한다.

 

벌처펀드 소유자는 부유한 사람들로, 저자 표현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악랄한 약탈자"다. 부유한 소수자가 국가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사례, 저자의 조사관 활동 결과와 벌처펀드의 방해 공작 등이 나와 있다. 저자는 비록 벌처펀드와의 투쟁에서 패배했으나, 국제 규범을 만들고 실천하는 유엔의 역할을 상기하며 다른 이들의 저항을 기대한다.

 

저자는 세계식량계획(WFP)을 소개하는데, 2015년에는 이 기구 덕분에 전 세계 9,100만 명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 기구는 5대 대륙에서 응급 창고를 관리하고 세계 시장에서 주요 식량 가격이 낮아질 때면 수천 톤의 재고를 비축한다. 또한 5천 대의 화물차를 보유하고 엄격하게 선발된 운전수를 고용하고 있다. 육로나 강으로 접근하기 어려울 경우 항공기를 이용하는데, 상공에서 식량 박스를 투하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는 동안 자랑스럽고 기뻤던 순간도 짧게 소개되어 있다.

 

"아이들이 우리와 만나며 수줍은 미소를 지을 때, 이어서는 음식이 도착하는 걸 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때, 내 가슴은 뜨거워졌다."(77-78쪽)

 

저자는 국제노동기구(ILO),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 인권이사회,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지적소유권기구(WIPO), 세계기상기구(WMO) 등의 역사적 배경, 주요 역할 등을 서술하는데, 특히 인권이사회를 비중 있게 다룬다. 또한 저자는 유엔이 창설된 토대가 무엇이었는지,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이 유엔에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실감할 수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그 영향력이란 지극히 부정적이고 위험한 것이다. 유엔 조직이 구체화하는 다자 외교와 미국의 제국주의 신봉은 상반되지만, 유엔은 미국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구조다. 미국은 유엔을 창립한 회원국이면서 유엔에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배경도 간략하게 언급된다. 미국과 남한의 관계성의 맥락에서 풀어낸 서술이 인상적인데 좀 씁쓸하다.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은 제국주의적 전략으로 유엔 곳곳에 침투하고 유엔을 도구화하며 유엔을 이용한다. 유엔을 도구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이 그 예다.)

 

저자는 유엔의 국제연합군과 국제형사재판소(ICC), 국제연맹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구체적 사례 등을 서술한다. 그중 한국전쟁은 "유엔이 참전한 최초의 전쟁이자 지금까지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는 저자가 스위스연방의 국가의원 자격으로 1978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난 에피소드도 나와 있다.

 

이 책의 9장 '나는 왜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었나'는 앞선 장들과 또다른 서술 방식을 보여주는 글이다. 앞선 글들이 주로 유엔 산하 여러 기구의 역사, 활동을 중심으로 하되, 간간히 개인과 주변인의 일화와 소회를 밝혔다면, 9장에서는 저자의 활동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을 통해, 2003년 유엔 총회와 인권위원회에 회부된 저자의 보고서인 '팔레스타인의 점령당한 영토에서의 식량권'의 내용 일부를 볼 수 있다. 특별조사관으로서 어떤 정치 논리도 담고 있지 않은 시각조차 이스라엘 당국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것일까.

 

단순히 유엔에 대해 알고자 펼친 책이었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1945년 유엔 창설부터 현재에 이르는 긴 역사를 훑어가는 느낌이다. 국가 간의 분쟁과 갈등, 경제 파탄과 빈곤 등, 세계 곳곳의 문제들 가운데 유엔 기구들이 꾸준히 활약해오고 있었다. 본문 가운데 저자가 질문한 다음 내용이 마음에 남는다. 

 

"국가가 힘을 상실하고 신념도 법도 없는 소수 지배집단이 이 세계를 다스릴 때, 그리고 법치국가 대신에 살인적인 질서가 자리 잡을 때, 누가 공공재와 보편적인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54쪽)

 

그리고 계속 맴도는 단어는 하나다. 저항. 이 책은 우리가 무엇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저항해야 하는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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