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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길 위의 소녀 | 다시 읽기 2009-06-2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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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길 위의 소녀

델핀 드 비강 저/이세진 역
김영사 | 2009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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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들이, 
그 책들을 질투하며 베껴 쓴 시간들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
<김탁환의 천년 습작 중에서>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처음으로, 아, 작가가 되어보고 싶어.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책이다. 그만큼 그의 문장과, 그 문장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10대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이 그 어떤 명작들 보다 와닿는 다는 사실. 내가 아직 자라지 못했다는 증거인 듯 싶다.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만큼은 철저하게 10대의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이 책을 원문으로 읽지 못한다는 게 너무너무 아쉬울 만큼, 이 책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빛났고, 탐이 났다.  이 책에는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이 있다. 노와 루. 모든 사람들이 '노'라 부르는 그녀는 노숙자이다. 루는 두 번이나 월반을 하고 책을 두어 번 읽으면 자동으로 외워져 버리는 천재소녀이다. 그렇지만 자기 또래와는 어울리지도 못하고 자기 보다 2살이나 많은 학급 친구들처럼 생각하지도 못한다. 남동생인 티아스가 죽은 이후 자신만의 세계로 틀어박힌 엄마가 있는, 그런 남들이 모르는 아픔을 가진 아이이다. 

 

침대에 누워 신문 파는 아줌마를 떠올린다. 그 아줌마가 한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노는)  너(루)하고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애야.'

난 말이다, 하나의 세상 안에 여러 개의 세상이 있고 각자가 자기 세상에 머물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한다. 내가 속한 세상이 부분 집합 A이고 그 A가 다른 부분집합들 B, C, D 등과 전혀 교집합이 없는 건 싫다. 나의 세상이 완전히 단절된 다이어그램으로, 공집합으로 칠판에 그려지는 건 싫다. 난 말이다 오히려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좋겠다. 쭉 뻗은 직선을 따라서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윤곽선들이 서로 투과되는 곳,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 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 중요한 순간들이 닥칠 때에는 사용설명서와 필수장치도 같이 딸려 나오는 곳으로.
페이지 : 85

 

 루는 '서로와 서로가 마음으로 만나는 세상'을 원한다. 적어도 내가 만난 '루'는 그랬다. 지적 수준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루. 그 때문에 세상을 이해하고, 만나기 더 힘든 것 같다. 책에서 만난 세상, 학교에서 가르쳐 준 세상과 현실은 너무나 다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벽을 쌓고 '넌 다른 세상이니까'라고 외면하는 세상.

 

사람들은 개는 거두어도 노숙자는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노숙자를 맞아들인다면, 한 사람이 한 명만 맡아서 돌보기로 결심한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도와주고 함께 해준다면 아마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사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다. '사물은 존재하는 바로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렇다,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

페이지 : 90


 '루'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 소박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내는 루의 세상.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이 책의 작가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 성토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루'의 나이대에 맞는, 그리고 '루' 뿐만 아니라 정신적 연령이 '루'와 비슷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해답도 같이 제시하고 있다. 간명한 해결책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시행되기 어렵다는 걸 안다. 나는 이런 작가의 말투가 좋다. 소박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말하는.
 몇 가지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을 적어본다.

 

말하기, 난 그게 참 싫다. 말은 항상 내 본의와 달리 튀어나오고, 새어나오고, 흐트러지는 것 같다. 내가 어휘력이 딸리는 편도 아니니, 단어나 정의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면, 말들은 요동치고 흩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나 의견을 서로 나누는 일을 회피하고 그저 남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걸로 만족한다. 지나친 것, 넘치는 것, 나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자꾸자꾸 불려나간 말들을 혼자 속에 묻어둔다. 페이지 : 30


때론 입을 다물고 혼자 침전하고픈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글은 명확하게 증거를 남기지만 말은 휘발성이 있어서 그대로 증발해 버린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말로 인한 논쟁만큼 골치아픈 건 없다. 

 

난 지금 막 '내 일생의 기회'를 날려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버스에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 사람들은 일생의 기회를 잡았는 지 궁금하다. 기회를 기회라고 알려주는 지표도 전혀 없고, 기회를 무를 수도 없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피곤에 찌든 표정을 짓거나 어쩌다 가끔 애매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페이지 : 88

  기회가 '나 기회야'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회가 다가왔을 때는 모르다가 놓쳐버린 이후에 그것이 '기회'였음을 알아채는 순간만큼 안타까운 때가 없는 듯 싶다. 

문법이 규칙과 제약의 집합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실수하는 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법?? 감춰주며 구성요소들을 이어주고 상반되는 것들을 비교한다. 문법은 세상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구성하는 근사한 수단이다.페이지 : 174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가장 고역인 게 문법 공부이다. 이 글을 적어두고 내가 '문법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세뇌시키자고 다짐했다. 

 

불쾌하게 구는 것도 제일 좋아하는 사람, 제일 믿는 사람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거란다.페이지 : 181

 음. 그렇지만 내가  '제일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사람한테서 불쾌한 일을 당할때의 기분이란. 

책에는 주요한 순간들을 구분하는 장(章)들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변화나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때로는 부(部)로 나뉘어 그림에 붙은 제목들처럼 '만남', '희망', '몰락', 식으로 어떤 전망이 실린 제목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런게 없다. 제목도 없고, 플래카드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위험하니 조심하시오', '붕괴사고 자주 일어나는 곳', '실망 임박'을 가르쳐주는 표시는 전혀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옷 한 벌 걸쳤을 뿐이지 완전히 혼자요, 행여 그 옷이 완전히 누너기일지라도 별 수없다.페이지 : 212


공수래 공수거. 우리의 삶을 요약하는 가장 간단한 단어이자 핵심이다. 옷 한 벌 걸치고 살다 갈 뿐인 인생에서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은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 걸까? 

노를 만나기 전에 나는 폭력이 고함, 구타, 싸움, 피와 함께 자행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폭력은 상처를 은폐하는 이 시간, 불가피하게 이어지는 나날들, 결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이 불가능성이다. 폭력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폭력은 입을 다물고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폭력은 설명을 찾을 수 없는 것, 영원히 불투명하게 남는 바로 그것이다. 페이지 : 258


나 또한 여자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해 목숨을 끊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 전까지 폭력은 그런 거라 생각했다. 폭력은, 그 폭력을 방조할 때 더 잔인한 것으로 바뀌어 간다. 책 속에서 물루 아저씨의 죽음을 사람들이 '방조'했었던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책 표지에 나열되어 있는 ~상들의 이름들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이 책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성인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나는 특히 성인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삶이 너무나 힘들어 마음이 메말라 가는 요즘, 청소년 시기의 촉촉한 감성을 건들어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것과, 청소년 때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마음에 와 닿는 정도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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