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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단상 공간
윤동주의 시(詩)를 품은 집 (후배 정병옥 가옥) | 기록과 단상 공간 2022-07-1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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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삶의 동반자 윤동주. 정병욱 광양서 만난다.

 

(광양 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윤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유고 복사본 정병욱 생가에 전시

 

문학과 삶의 동반자인 윤동주 시인과 후배이며 국문학자였던 정병욱 선생이 광양에서 다시 만난다. 광양시는 오는 13일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동주 시인의 유고 복사본을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에 있는 정병욱 선생 생가에 전시한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윤동주 시인의 장조카인 윤인석 교수가 개인적으로 보관 중인 복사본을 다시 복사해 전시하는 것이다. 전시 행사에는 윤 교수와 동주사랑 별밤모임 동호회, 종로문화재단 관계자, 광양시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한다. 광양시는 전시 장면의 사진과 영상을 촬영해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자료로 활용하는 등 윤동주 기념사업과 연계해 나갈 계획이다. 종로문화재단과 협력해 오는 13일 정병욱 선생 가옥과 시집 관람, 망덕포구 낭만 산책, 버스문학 콘서트, 시 낭송회, 영화 '동주'관람, 서울 윤동주문학관 관람, 시인의 언덕 야간산책 등 여행코스도 운영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1941년 시집 간행을 기획하면서 자신의 작품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라는 표제로 3부를 필사해 스승인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마지막 한 부를 자신이 보관했다. 이 중 정병욱 생가에 보존된 유고 원본이 남아 현재 서울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광양시 관계자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종로문화재단과 협력해 정병욱 생가와 윤동주문학관과 연계하는 '청년시인 윤동주 테마투어'를 정기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새로운 문화관광 코스 개발과 정병욱 생가 주변 환경 정비로 많은 문학인과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여행작가 연재 시리즈)

 

                                         윤동주의 시(詩)를 품은 집

     광양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

 

(글/사진 유영미 여행작가)

 

  계절을 넘어가는 바람이 코끝에 머물렀다. 푸른 밤 하늘은 고요함을 넘어 적막했다. 그 외로움을 달래듯 하늘엔 별이 친구가 됐다. 맑은 하늘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많은 별을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늘이 비로소 완성한 별빛의 향연이었다. 일제 강점기 별을 노래한 윤동주 시인 역시 그랬다. 후배 정병욱이 없었다면 그는 세상에 빛을 밝히지 못한 채 암울한 역사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윤동주의 시를 고스란히 품었던 소중한 공간, 전남 광양 망덕포구에 위치한 '정병욱 가옥', 그곳엔 시인 윤동주와 그를 빛낸 정병욱의 각별한 우정이 함께 서려 있었다.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제341호)은 1925년에 지은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점포형 주택으로,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 유고 시집의 친필 원고가 보존됐던 곳이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후배인 정병욱에게 친필 원고를 건네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44년 정병욱은 강제 징병으로 끌려가기 전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시집 원고를 소중히 보관해줄 것을 유언처럼 당부했다. 해방과 함께 다행히 정병욱은 살아 돌아왔지만, 윤동주가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복역하던 중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윤동주는 떠났지만, 그의 유고 시집은 정병욱 가옥 마룻바닥 아래 무사히 보존됐다. 정병욱은 1948년 마침내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내가 평생에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병욱의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중에서)

 

 올해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까지 그의 후배이자 마음이 통하는 글벗이었던 정병욱의 힘이 컸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창작에 몰두하던 시절 함께 하숙하며 조언을 주기도 했는데,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등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쓰였다.

 

 정병욱은 유고 시집 발간 이후에도 윤동주와 그의 문학을 널리 소개하며 '윤동주 시비'건립 등 기념사업에도 앞장섰다. 550리를 내달린 섬진강이 남해와 만나는 광양 망덕포구, 윤동주의 시를 품었던 정병욱 가옥엔 여전히 그의 시혼(詩魂)이 떠다니는 듯했다. 그곳에서 밤하늘을 보며 '별 하나에 추억'을 담아보는 건 어떨까.

 


 

* 윤동주 탄생 100주년의 연도는 2017년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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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의 회고담(1975) | 기록과 단상 공간 2022-07-0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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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정병욱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 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늘날 신촌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으레 나섰던 그의 산책길에 풀벌레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그가 사색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외인묘지(外人墓地)는 계절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지만, 동주에 대한 나의 추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였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교복의 단추를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결백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보다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주었고,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생활의 대중을 그로 말미암아 잡아갔고, 촌뜨기의 때도 그로 말미암아 벗을 수 있었다. 책방에 가서도 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책을 샀고, 시골 동생들의 선물도 그가 골라주는 것을 사서 보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 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윤동주와 정병욱

 

 그는 날이 밝으면 곧잘 내 방문을 두드려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이끌어내어, 연희의 숲을 누비고, 서강의 뜰을 꿰뚫는 두어 시간의 산책을 즐기고 들어오곤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입을 여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가끔은 "정 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뚜렷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겁니다."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그 책은 대강 읽어서는 안 돼요. 무척 고심하면서 읽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을 했다. 이럴 때, 입을 꼭 다문 그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했다. 어떤 때에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나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공책에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그는 결벽성이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혹독한 식량 정책이 더욱 악랄해졌다. 기숙사의 식탁은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다. 학생들이 맹렬히 항의를 해보았으나, 일본 당국의 감시가 워낙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1941년, 동주가 4학년으로, 내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봄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나의 한 반 친구의 알선이 있어서, 조용하고 조촐한 하숙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매우 즐겁고 유쾌한 하숙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숙집 사정으로 한 달 후에 그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해 5월 그믐께,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기 위해, 아쉬움이 가득 찬 마음으로 누상동 하숙집을 나섰다.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우리는 김송 씨의 식구로 끼여들어 새로운 하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알차고 보람이 있었다.

 

 동주의 시집 제 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그 해 5월과 6월 사이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었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있었고, 암울한 세태 속에서도 환대해주는 주인 내외분이 있었기에, 즐거운 가운데서 마음껏 시를 쓸 수 있었으리라.

 

 동주의 주변에도 내 주변에도 별반 술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술자리에 어울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 들렀다가 저녁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때 더러는 술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가 없었다. 평소보다 약간 말이 많은 정도였다. 그러나 비록 취중이라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의 성격 중에서 본받을 점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본받아야 할 것의 하나는 결코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으레 남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이 오르내리게 마련이지만, 그가 남을 헐뜯는 말을 나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 <십자가>, <눈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적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 또 다른 고향> 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 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 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엮은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자필 시고(詩稿)는 모두 3부였다. 그 하나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 선생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내게 주었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 5일로 적혀 있고, 『서시』를 쓴 것이 11월 20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고를 받아보신 이양하 선생께서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하였다. 『십자가』 『슬픈족속』 『또 다른 고향』과 같은 작품들이 일본 관현의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망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선생의 충고는 당연한 것이었고, 또 시집 출간을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집 출판을 단념한 동주는 1941년 11월 29일에 <간(肝)>을 썼다. 작품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빼앗긴 지성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리라. 그러는 그는 스스로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여움이 가라앉으면서 1942년 1월 24일에 차분히 <참회록>을 썼다. 어쩌면 이것이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1942년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이듬해인 1943년 7월에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조국 광복을 불과 반 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감옥 안에서 28세의 나이로 원통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 동주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즐겨 외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의 끝 넉 줄은, 단순히 시구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 있는 동산 마루턱에 묻힌 그의 무덤 위에는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자랑처럼 돋아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멀리 북간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 속에 배어 있는 겨레 사랑의 정신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출처: 다음 블로그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문학과 영화와 음악)

<blog.daum.net/poetlsh/694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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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정병욱 (후배)의 이야기 | 기록과 단상 공간 2022-07-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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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정병욱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
 


 지난 번 꼬꼬무에서 윤동주 시인과 백영 정병욱 (후배)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평소 꼬꼬무를 잘 보지 않던 남편도 같이 보게 되었다. 다른 채널로 옮기려고 하는 남편에게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는 방송을 보지 않는다면 친일파랑 뭐가 다르냐고 쏘아붙였더니 자신도 겸연쩍었는지 그렇게해서 같이 보게 되었다. 

 

 만약, 정병욱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은 우리의 문학사적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방송을 보면서 남편은 뜬금없이 한마디를 했다. 일반 사람같았다면 정병욱이 윤동주의 작품을 자기가 쓴 작품이라고 했을텐데라는 남편의 말에서 더욱더 정병욱의 인품과 곧은 성정에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얼과 정신이 깃든 "한글"로 지은 문학 작품은 일제침략기에는 전혀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황국신민화)하에 있어서 한글을 사용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기라고 했다. 그렇게 정병욱은 목숨을 걸고 윤동주 시인의 육필 시집을 지켜냈던 것이다.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정병욱은 윤동주 시인과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2년 후배였고, 윤동주 시인보다 다섯 살이 어렸다. 윤동주는 신입생이었던 정병욱을 아우처럼 귀여워해주었고, 정병욱 역시 그를 형처럼 따랐다고 그의 회고담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보다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주었고,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다. (...)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 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병욱의 회고담 中 1975)

 

황국신민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황국)의 백성(신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침략을 당한 나라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의 방식으로 피지배 민족을 2등 일본인 취급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다. (나무위키 발췌) 일제가 우리민족의 얼과 정신을 빼앗기 위해 실시한 조치로서, 그 당시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고,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개명하도록 했으며,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다. 

 

 윤동주 역시 창씨개명은 피할 수 없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이어 민족의 정신까지 빼앗기고 나라의 말과 글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던 그 당시 윤동주는 부모가 지어주신 고귀한 이름을 뺏기고 일본이름으로 이름을 바꿔야만 했던 마음이 어떠했을까.....아마 그때부터 그의 마음 한켠에는 부끄러움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방송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응당 사람이라면 느껴야 할 수치심을 갖지 못해서 일것이다.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그의 시집을 발간하려고 했으나 일본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끝내 시집을 발간하지 못하고 일본 유학행에 오른다. 그러나 일제는 그에게 말도 안되는 죄목을 붙여, 징역 2년 형을 내리고 형무소에 가둔다. 형무소에 갇힌지 1년만에 윤동주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사망 원인이 뇌일혈이라 한다. 윤동주는 만약 가족들이 그를 바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규수대학에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꼬꼬모로 이 이야기를 듣는데 열이 받아 미칠 뻔했다. "뇌일혈"은 생체실험에 희생되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일명 마루타(통나무)로 생체실험에 희생당한 것도 모자라 죽어서까지 그들에게 농락당할 뻔했던 이 엄청난 사실을 꼬꼬무를 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기서 윤동주가 뇌일혈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던 이유중 하나로 생체실험에서 맞았던 주사가 바닷물이었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일제에 잡힌지 1년만에 뼈만 앙상한 채로 일제의 마루타가 되어서 그렇게 처참히 죽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수많은 증거와 증인과 상황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자신들의 만행에 속죄할 생각은 전혀 없이, 그런 일이 없다고 뻔뻔하게 손사래를 치고 있다.

 

 여기서, 윤동주가 일제에 붙잡혀 형무소에 수감된 이유 자체를 밝힘이 마땅할 것이다. 일제는 그에게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키우려 했다고 그를 몰아붙였다. 사실, 여기서 이러한 죄목에 증거가 있을리 만무였고,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수감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인정했다. 아마도 창씨개명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이 더이상 일제에 굴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인한 의지표명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는 그렇게 서시처럼 그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 것이리라.....

 

원래 서시를 시의 제목으로 지었던 이유는 모든 책에는 서문이 있듯이, 그의 시집에도 서시로 그의 전체적인 생각과 마음이 압축되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병욱은 그의 호를 백영(白影)이라고 지었다. 그 이유는 윤동주가 지은 시 중에서 "흰 그림자"라는 작품을 보고 흰 그림자란 뜻으로 백영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는 한번도 윤동주를 거론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를 알리는 세미나를 주최하면서도 기자들이 윤동주에 대해 물으면 웃음으로 물음에 답할 정도로 그는 그렇게 결연함으로 윤동주의 시를 끝까지 지켜왔고, 지금의 우리들에게 그의 작품을 널리 알려 왔던 것이다. 

 

꼬꼬무를 시청하면서 이렇게 고마웠던 순간은 없었다. 일제에 맞서 우리민족의 얼과 정신을 지켜온 민족저항 시인이었던 윤동주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방송했던 프로그램은 여태껏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하게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생체실험의 희생자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게 된 경위까지 자세하게 밝힌 프로그램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기에 그만큼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꼬꼬무를 보면서 윤동주와 정병욱에 대한 이야기를 내 블로그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가슴 뭉클했던 윤동주와 정병욱의 돈독한 관계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한 탓이었을까, 윤동주는 자신이 그동안 쓴 시집 3권을 본인과 그의 스승과 병욱에게 맡겼는데, 유독 정병욱한테 맡긴 1권의 시집만이 남아서 오늘날 윤동주를 세상에 널리 알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그들의 노예로 만들려고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었던 순간에도 우리의 얼과 정신을 지켜나간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명맥을 지켜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민족을 위한 진정한 독립운동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민족 투사들도 독립군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검과 창이 아닌 책과 펜으로 우리나라의 민족 정신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라의 본을 이루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정신이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나간 이들의 숭고한 정신에 늘 깊은 존경을 표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기록을 위해 정병욱에 관한 검색을 해보니, 1975년 정병욱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지은 그의 유고집이 있었다. 그 유고집을 보면서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선생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졌고, 왜 윤동주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나라 잃은  한 맺힌 설움과 그의 절규가 꼬꼬무를 시청하고, 정병욱 선생의 회고담을 읽으니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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