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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8 개설

2008년에 쓴 리뷰들
진짜 한 수를 가르쳐 주는 사람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12-29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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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

브루스 토마스 저/류현 역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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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쿵후>, 일본의 <가라데>, 그리고 한국의 <태권도>는 각 국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전통무예를 지칭한다. 그러나 그 역사가 불과 100년 남짓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엔 못해도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데 말이다.
 
 이유인 즉슨, 쿵후나 가라데, 태권도를 서양이 배운 시점이 그 정도라는 것이고, 사실 이 때가 되서야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통무예>로써의 무술이라는 점 때문이다. 분명 한 세기 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달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동양 3국에서는 각각 추구하던 바도 달랐는데, 그 차이점은 명칭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중국에선 <무술(術)>, 일본에선 <무도(道)>, 그리고 한국에선 <무예(藝)>라 불렀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에선 <기술>을, 일본에선 <정신>을, 한국에선 <예술>적인 가치를 우위에 두고 각각 발달 시켰던 셈이다.
 
 이는 쉽게 비교해 볼 수 있다.
 
 중국무술의 본산이라는 <소림사>에서 쿵후를 수련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쫙쫙 찢어 올린 발차기, 힘과 파괴력을 기르기 위한 과도한 수련법 등을 말이다. 물론 태극권처럼 부드러움을 내세운 권법도 상존하고 있지만 <기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한편 일본은 <기술>보단 <정신>을 앞세운다. 그래서 무도는 혹독한 훈련, 즉, 극한(極限)훈련을 통한 정신수양법을 강조한다. 이는 일본이 내놓으라 하는 무도관(유도, 검도, 공수도 등)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수련법이다.
 
 반면에 한국은 한 세기 전만 해도 <택견>이라고 하는 <무예>를 가꿨다. 사실 <태권도>는 박정희 정부 시절에 <군대 문화>가 만든 소산이다. 뭐, 그렇게 나쁘게 볼 필요는 없겠지만 수천 년 내려온 전통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선 씁쓸할 따름이다. 다시 택견을 살펴본다면, 중국의 기술과 일본의 정신 <강조>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쉽게 비교할 수 있다. 빠르고 파괴적인 손짓, 발짓, 몸짓 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강한 정신력을 뿜어내어서 일도양단 시킬 것 같은 무서움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자연과 한 몸이 된 듯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면 한마디로 아름다움(예술), 그 자체다.
 
 그러나 이소룡은 이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의 무술, 혹은 쿵후를 <절권도>라 부르지만 그는 전통 중국무술의 방식을 거부했고, 일본의 정신력만 내세운 수련법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의 무예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의 쿵후는 한마디로 <실용>이다. 굳이 영어로 번역한다면 <스트리트 파이트>, <실전>이라고나 할까.
 
 또한 그로 인해 서양에서도 동양의 전통(무술, 무도, 무예)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동양의 전통무술이 서양에 소개된 건 그 이전이었고 태평양 전쟁 이후에 관심을 끌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것 뿐 아니라 동양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도 <이소룡>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난 예전에 그의 <절권도>를 폄하했었다. 사실 뜬소문만 듣고서 <절권도>는 가라데를 배낀 것이며, 한국의 <태권도>에서도 쬐끔 배낀 흔적(콩콩 뛰는 모습에서)을 풍긴다고 폄하했다. 그리고서 그가 '쿵후는 중국 전통의 것이며 다른 나라의 무술은 모두 중국의 것을 배낀 것'이라며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는 그저 그런 영화 배우일 거라고 오해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의 색다른, 아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발견하고서 '뜬소문'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100% 완벽한 진실만을 말한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무술인으로서, 또 영화를 사랑한 예술인으로서 그는 완벽할 수 없지만 완벽한 이상을 꿈꾸며 노력했던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겨우 서른두 살의 짦은 생애를 살다간 사람이었지만 그는 죽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많은 것을 동시에 담아 전달할 수 없는 문제점만 살짝 걷어낸다면, 이 책이 유일하게 <이소룡>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책이 아닐까 한다.
 
 그가 죽은지 3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에 대한 <오마주>는 끝나질 않는다. 그건 그가 <열정>적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덮으며 그에게서 <열정>을 한 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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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너 꼭 참고해~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11-1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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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

이옥순 등저
삼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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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세계사를 [한국사]를 제외한 모든 역사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역사를 좀 공부하신 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한국사는 너무나도 한국적인 관점으로, 세계사는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세계사적 관점이란 것이 도대체 어디를 중심으로 해야 하는가? 또 하나는 이런 평범한 오류가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학창 시절에는 교과서는 곧 진리라고 배우지 않는가.

 

 이 책을 보면 이 두 가지 문제점의 해결방법도 제시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조목조목 자세하게 열거하였다.(이 때문에 살짝 지루하기도) 특히 서구중심의 관점으로 해석된 기존의 세계사를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한 부분은 아주 인상적이다. 그래서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라는 시대적 요구에 딱 맞아 떨어진 책이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학생들에게 읽히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바로 객관화된 시험문제로 출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직접적으로 시험에 나오지 않는 지식을 습득하는데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시험에서 다루는 범위만도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딴에는 요즘 학생들이 불쌍한 이유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책의 주제는 <서구중심적 사고를 더이상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또 우리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로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가가 저마다 너무나도 다양한(!) 관점으로 각 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바람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통일성>을 잃어버렸다. 이래서는 객관화된 시험문제는 출제하기 힘들다.

 

 단순한 예를 들면, 지명이나 이름을 어떻게 통일 시킬 것이냐는 문제다. <스페인>, <에스파냐>, <에스빠냐>는 각각의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하나의 나라를 지칭한다. 또한 <아즈텍>, <아즈테크>, <아즈떼끄> 등등은 어쩔 것인가? 여기엔 이미 해결책이 나와 있긴 하다. 즉, 각 나라의 발음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스페인 역사를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역사가와 프랑스, 스페인, 일본에서 배운 역사가가 익힌 지명이나 이름의 발음이 각각 다를 것이 아닌가? 이런 분들이 우리 학계에 와서 각각 저술활동을 하고 책을 출간하게 된다면 명칭의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는 작은 혼동이고, 여기서 발단된 <견해>, 곧 <관점>의 차이는 학계의 <권위주의>와 맞물려서 쉽게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를 종종 일으키는 형편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다양한 관점(저자)의 책을 통달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학생들은 어떤가? 달랑 교과서 한 권이 전부이고 진리처럼 배우는데, 정작 교과서가 참고로 채택해야할 문헌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말이다. 가뜩이나 좌편향 교과서니, 우익 교과서니 말들이 많은 판국에 이런 오류의 문제까지 고려해서 집필해야할 처지니, 집필자들의 수고를 상상만 해도 혀를 내두를만 하다.

 

 이럴 바에야 이 참에 [교과서]를 없애고 역사선생님들이 다양한 책을 지정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치시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굳이 이런 쉬운 방법 말고, 꼭 교과서를 집필해야 겠다면, 이 책에서 지적한 부분들을 꼭 참고하시라고 당부드리고 싶다. 학생들에게 적어도 거짓이 아닌 역사를 가르칠 요량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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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하나, 걱정 열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11-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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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당신에게 노벨상을 수여합니다

노벨 재단 편/우경자,이연희 공역
바다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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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며, <학문의 첨단>을 걸어온 이들의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지난 100년 동안 무슨 공부를 한거야?"
 
 노벨상을 시상한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수상자(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상> 수상)도 배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매년 수학과 과학분야 <올림피아드>에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영재>들을 배출하는 나라인데 말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100편이 조금 못된 수상자들의 시상이유를 들어보니 그 까닭이 엿보였다.
 
 먼저 우리는 (탐구방법적인 면에서)서양식 학문을 답습한 시기가 짧았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방을 한 시기부터 따져도 불과 100여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고, 그나마 쌓은 상아탑도 해방 직후에 치른 한국전쟁 때문에 유지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그리고 배고픈 시절엔 먹고 살기에 바빴을 테니 제대로 된 <학문>을 공부했다기 보다 악에 바쳐 이를 악물고 <가난>을 벗어나려는 학문에 매달리는 경향이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학계가 먹는 것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응용학문>이 발달하는 풍토가 만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 대학생들은 오로지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써 대학공부를 할 뿐, 공부다운 공부는 경시하고 있다. 그 결과, <기초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바보취급 당하고 폐강 위기까지 거론되는 형국이다. <인문학 위기>라는 말은 벌써 20년 전부터 들려와서 이젠 위기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반면에 서양은 이미 천년 전에 <대학>이라는 불리는 학문의 장(볼로냐대학, 1088년 설립)을 마련하고, 유수한 학생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또,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철학>이란 학문은 마치 서양에만 존재했던 것인양 온통 <유럽 사람들>로 도배를 한 지 오래다. 들은 얘기지만 한때 <동양철학>이란 학문을 경시했던 때도 있었단다.
 
 이런 현실에선 서양 사람들이 <세계 모든 인류에게 공헌한 과학자에게 수여한다>는 취지의 상을 휩쓰는 건 당연지사가 아닐까? 그럼 <노벨상>은 서양사람들만 받았을까? 아니다. 동양 사람들도 많이 받았다. 대표적으로 중국, 인도, 일본이 있다. 그 중에 <화학상>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4번(2006년까지)이나 받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와 다르기에 그들은 받고 우리는 받지 못했을까? 이 질문의 까닭도 이 책의 내용에서 짐작해보았다.
 
 우리네 교육환경은 <창의적인 사고>를 장려하는 환경이 아니라 <지식전달적 사고>, 즉, 암기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가늠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바로 <공정성>의 때문이다.
 
 우리가 <객관식 문제풀이>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공정성> 때문이다. 그렇지만 객관식 문제의 폐해성이 보고되고...그래서 객관식 문제는 줄이고 주관식(서술식) 문제는 늘리는 추세라고는 하나, 익숙치 않은 방식에 애들만 죽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물리화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정의하는 문제를 냈다고 치자. 답은 다음과 같다.
 
 <상호작용하는 두 계에서 에너지의 흐름은 전체 계가 가질 수 있는 상태수가 최대가 되도록 흐른다.> 
 
 이게 뭔 이야긴지 이해가 되시는가? 아시는 분은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이해하신 훌륭한 분이시다. 여기서 <엔트로피>를 설명할 수는 없다. 복잡한 관계로 그냥 간단하게 <반응열>이라고 판단하셔도 무방하다. 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을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열은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움직인다.>이다. 열이 어떻게 움직이는 데? 라고 물으신다면 그게 <엔트로피>이기 때문이라고 답을 할 수 있겠다.
 
 정리하면, 우리는 객관식 문제 하나 풀어놓고 <열역학 제2법칙>을 이해했다고 평가하는 실정이란 말이다. 초중생이면 <열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에요>라고 대답을 하면 될 것을, 우리 학생들에게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하라고 하면 묵묵부답,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요. 당췌 설명을 시도할 수조차 없는 교육을 시키는 형편인데요.
 
 초중고생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정작 대학에 들어와서는 공부다운 공부는 뒷전이고 오직 취업전선(먹고 살기)에만 관심을 기울이니 <노벨상>을 받는 행운이 찾아올 턱이 없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황우석 사태를 맞이했고, 국제적 해프닝(?)을 벌이면서 <노벨상> 주문을 주저없이 외쳤다... 그땐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웠다.
 
 이제 이 책을 읽으니, 다시 그 때 부끄러웠던 경험이 떠오르며 우리는 참 부단히 노력하고 개선해야만 <노벨상> 따위를 탈 수 있겠구나 싶다. 물론 <노벨상> 나부랭이를 타든지 말든지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역대 수상자들이 모두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공영을 위하다보니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도 인류공영을 위해 이바지하면 <노벨상> 따위를 탈 수도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가까운 시일 내에는 그러지 못하겠나 싶어 부끄럽다는 게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몹시 따분하고 지루한 내용의 책이다. 그런데도 혹여나 이 책을 아이들에게 권해주면서 무조건 <암기>해야만 노벨상 탈 수 있고, 그래야 대학에도 갈 수 있다고 강요할 선생과 학부모가 있을려나? 그렇다면 참 좋은 기획으로 내놓은 책이 원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왜곡되고 말 것이다. 그저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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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한 책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10-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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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위험한 행성 지구

브린 버나드 글,그림/임지원 역
주니어김영사 | 2008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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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온난화>라는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역사상 기록에 남을 만큼 커다란 규모인 동시에 인류에 큰 파급을 미친 <재앙>을 자세한 삽화와 함께 실은 책이다. 딴에는 과학적 지식을 쌓을 수도 있는 책이긴 하지만 <과학적 호기심>보다는 <세계 7대 불가사의>처럼 <미스테리적 호기심>만 부각시키는 책으로 전락될 단점이 엿보인다.

 

 또한 이 책을 읽고 단순히 <자연재앙>이 인류의 잘못(지구온난화를 일으킨 책임) 때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2억 년 전에 일어난 <대멸종>과 소행성 충돌이 어떻게 인류의 잘못일 수 있는가? 또 화산폭발과 지진은 어떤가? 이러한 자연재앙이 인류가 마음만 먹으면 일으키거나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엘리뇨나 태풍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때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그렇지만 <재앙>이 불러온 <희망>, 즉 <인류의 위기 극복 의지>를 역사적으로 실증한 점은 <과학>에 호기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과학공부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서 교훈적이다. 특히 일부 과학자들이 정치의 시녀가 되어 <양심>을 팔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상황에서 <과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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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에게 빠지다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10-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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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우구스투스

앤서니 에버렛 저/조윤정 역
다른세상 | 200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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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사를 공부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만나게 됩니다. 알다시피 헬레니즘은 그리스 문화가 아시아 문화를 만나서 융합된 문화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이 전 유럽에 카톨릭이란 이름으로 퍼진 문화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사는 그리스의 다신교(인본) 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거쳐 르네상스(복고)를 거쳐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릅니다. 이렇게 문화적, 철학사상적으로 서양을 바라보면 그닥 <로마>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몇 줄, 스토아 학파,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전부 <로마군단>으로 일컫는 군사적인 위대함을 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로마는 별 볼 일 없는 걸까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지요. 로마를 모르고서 서양을 논할 수 없습니다. 조그만 <로마>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 전역을 넘어 지중해를 장악하고서 <팍스 로마나(로마의 의한 평화)>를 건설한 뒤,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고도 <비잔틴 제국>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는 1000년에 걸친 대하드라마는 <웅장함>, 그 자체입니다. 감히 말하자면 <로마>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런 로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지요. 한 명은 <공화정 로마>가 처한 위기를 <제정 로마>로 재건하려 하였고, 다른 한 명은 <제정 로마>를 완성하여 위기의 로마를 건져낸 영웅이었습니다. 사실 누가 더 위대한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지요. 토대를 닦은 사람이 위대합니까? 그 토대 위에 잘 건설한 사람이 위대합니까? 둘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경우에 무너지기는 마찬가진데요.
 
 그러나 축구의 예를 들자면, <어시스트>를 아무리 잘해도 <골>로 만들어서 점수를 내지 못하면 말짱 꽝인 점에서 저자는 어시스트를 한 <카이사르>보다 골을 넣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사실 이 책은 설명이 필요없는 책입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길게도 썼는데도 손에 잡자마자 술술 잘 넘어가는 책이거든요. 책이 좀 두껍긴 하지만 문체가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아서 잘 읽히고, 역사에 문외한이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 없을 정도로 잘 풀어썼기 때문에 그냥 <장편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책입니다.  마치 <옥타비아누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이 점은 <역사서>로써 적당하지 않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대사> 영역은 참고자료나 문헌이 빈약하거나 왜곡된 것이 많기 때문에 저자나 역사가의 <주관적 개입>이 불가피 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왕왕 <윤색>되기 십상이죠. 이 책도 이런 단점을 벗어날 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이 순전히 뻥을 친다거나 저자의 상상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즉, <관점>을 조금 달리볼 수도 있다는 정도란 말이지요. 이런 정도만 감안하고 책을 접하신다면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독서가 될 것입니다.
 
 딱딱하고 어려운 <역사서>에 실망하셨다가 다시 도전하는 분에게 권하면 딱일 것 같네요. 물론 역사에 흥미를 느끼신 초보자에게도 무난한 책입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에겐 새로운 <시각>을, 처음 접하시는 분에겐 <흥미>를 만끽할 수 있는 책입니다.
 
 책의 내용 좀 소개해 달라고요? 전 스포일러가 되고 싶진 않아요^-^ 쉽고 재미있는 책일수록 더더욱...카이사르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일대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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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었으면 말을 마세요^-^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10-0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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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이권우 저
그린비 | 200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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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이권우는 책읽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음을 강조하려고 이 책을 썼다. 적어도 난 그리 읽었다. <책 읽는 사회>를 꿈꾸는 나이기에...

 

 이 책은 읽는 목적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집어 던질 수도 있는 책이다. 앞에 것처럼 한 독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서 무언가 얻은 분이실테고, 뒤에 것처럼 한 독자는 그동안 책과는 담을 쌓은 분이실 가능성이 크다. 이유인 즉슨, 책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이 책을 읽으면 당신도 책읽기의 달인이 될 수 있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좀 읽는다는 분들은 이미 다 안다. 책 한 권 읽고 인생이 바뀐다거나 달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당연한 진리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꿈꾼다. 알약 하나로 배가 부른 세상을.

 

 이 책을 읽고 대부분 공감하고(그래요. 전 책 좀 읽었어요) 있지만, 제도권이 주도하는 책읽기에 찬성한다는 저자의 견해엔 반론을 던지고 싶다. 왜냐면 책읽기는 자발적으로 해야 효과가 나타나지 누군가에 이끌려서 억지로 읽은 책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으면 다행...대다수 평생 책읽기를 안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에 딱 걸맞는 격언이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마시게 할 수는 없다>이지 않은가.

 

 물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걸 충분히 공감한다. 저자도 우려하지 않았던가.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회도 문제지만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도 마찬가지 문제라고. 후자의 경우엔, 책의 유용함을 깨달았는데 이를 쉽게 풀어주고 책에 접근하기 용이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절대로 부족하다는 걸. 이걸 해결하기 위해선 널리 <책 읽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애당초 책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말짱도루묵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니 책 한두 권 읽고 세상을 모두 얻은 것 마냥 행복해하는 애송이(?)들에게 당근용 칭찬을 해줘야 할지, 채찍질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당근을 주자니 거기서 멈춰버릴 것 같고, 채찍질을 하자니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것 같으니, 어찌 하오리까?

 

 그렇더라도 제도권에서 책읽기를 강요하는 방법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의 폐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시험>. 이것으로 해결하려 들 것이고, <시험> 때문에 억지로 읽은 책에선 <지식> 이외에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책을 안 읽어도 책 내용을 아는 아이들로 만들 참인가?

 

 우리들은 <서유기>를 읽지 않았음에도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천축국으로 떠나는 여정을 알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는 어떤가? 읽지 않아도 도로시와 토토,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가 나오고 대마법사 오즈를 만난 다음 고향 캔자스로 돌아가는 여정을 알고 있다. <노인과 바다>에선 노인이 큰 물고기를 잡고 돌아오다가 상어때를 만나 뼈만 건져 올랐다는 것을 안다. 더 예를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내용은 알지만 <감동>은 모른다는 것이다. 손오공 일행이 겪은 일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하고, 이 무엇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또 도로시 일행이 얻은 무엇, 노인이 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며 얻은 무엇이 무엇인 줄 이해할 때 진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학생들에게 억지로 읽혀놓고 시험을 치른다고 해보자. 다음은 <님의 침묵>의 일부분이다. 다음 중 <님>이 상징하는 것들 중 반영론적 관점에서 올바른 것을 찾아라. 답은 익히 잘 알 듯 <조국>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놓고 한용훈의 <님의 침묵>을 음미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저자의 생각에 대부분 공감하지만 <제도권 주도의 책읽기>만은 반대한다. 그래선 안 된다. 절대로. 차라리 안 읽느니만 못하다. <어린왕자>를 코끼리와 보아뱀만으로 읽히고 싶은가?

 

 말이 많았는데, 이런 식으로 자기 견해를 말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진정한 <호모 부커스>란 "책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책벌레가 되어서 좋은 점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나불나불 거릴 뿐인데 그 속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진정 <책읽기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읽어 보셨어요? 안 읽었으면 말을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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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으로써 철학이 필요한 시대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09-29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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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강영계 저
멘토프레스 | 200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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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책 한 권에 <철학사>를 다 담을 수 없고, 담았다손 치더라도 내용이 빈약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도 빈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참 아쉬운 책이었다.
 
 그러나 <철학>은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학문이다. 마치 <낚시>의 손맛을 아는 사람만이나 <바둑>의 재미를 아는 사람만이 즐겁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학문>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화>되고, <특권화>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낚시>나 <바둑>은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 <철학>을 쉽게 풀어쓴 책이 절실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저자들이 생겨나는 현실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반가운 책이다.
 
 이 책에는 <맑스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는 동시에 그들이 책을 저술하기까지 성장과정과 주위환경을 배경지식으로 설명하여 그들의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도와준 점이 장점이랄 수 있다. 물론 이로 인해서 <깊이> 있는 설명이 아닌 수박 겉핥기 같은 해설집이 된 경향이 없지 않으나, 철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철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은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은 쉬우면서 허섭하지 않다. 비록 철학의 진수를 느낄 수 없어 아쉽지만...또 하나...철학이란 것이 모범답안이 있는 건 아니다,라는 견해를 보여주듯 이렇게 이해해야만 한다,고 서술하지 않아서 편하게 읽힌다. 여기서 스포일러 마냥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되려 책읽기를 방해하는 것 같아 하지 않을란다.
 
 이 책에서 언급한 세 <철학자> 혹은 <사상가>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길래 책 한 권으로 엮었는지만 나름대로 언급할란다.
 
 그것은 <관념철학>이 아닌 <실존철학>을 한 철학자이기 때문이 아닐런지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실존철학>하면 하이데거나 야스퍼스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그런 의미의 <실존>이 아닌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준 <20세기 철학자들>이기 때문이 아닐런지...
 
 <맑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소외받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다면, <니체>는 누구나 원하면 위버멘쉬(초인)가 될 수 있다,며 스스로 의지를 불태우는 것만이 참된 삶이라고 역설했으며, 프로이트는 육체를 지배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꿈(욕구)>을 해석함으로써 원인 모를 고통(히스테리, 노이로제 등)에서 해방시켰다.
 
 한때는 우리 나라에서 철학하는 사람을 동경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현재 찬밥 신세인 것만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지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그렇지만 내놓으라 하는 선진국들은 모두 대단한 철학적 성과를 이미 이뤘으며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철학>은 필요하다고 뚝딱 짜깁기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는 철학적 사고를 즐길 교양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명품으로 몸치장하는 것이나 클래식하고 고급스런 그림과 음악으로 눈과 귀에만 <교양>을 쌓을 것이 아니라 고급스런 <생각>과 <마음>의 양식을 갖춰보는 것은 어떨까. 교양으로써 <철학 읽기>. 이 책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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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가 불쾌하긴 하지만...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08-2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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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후 커넥션

로이 W. 스펜서 저/이순희 역
비아북 | 200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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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는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를 저질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적혀 있다.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진위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었다고 적여 있단다. 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단독으로 저지른 죄인가? 정말 그럴까? 이 책을 읽는다면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다. 난 무언가 거대한 <속임수>에 빠져든 것인가?
 
 저자는 스스로를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라 불렀다. 풀이하면, <지구온난화>를 한 번쯤 의심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자와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지구온난화 위기론자>라고 지칭했다. 풀이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의심한다? 그렇다면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재 뜨거워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걱정할 지경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단다. 무슨 근거로? 지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기후는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만으로는 워낙 미미한 영향밖에 줄 수 없단다. 또 지구는 뜨거워지는 만큼 스스로 차가워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인간이 저지른 <지구온난화>가 지구멸망(사실은 인류멸망)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단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 걱정할 것 지금처럼 <화석연료>를 쓰고 또 쓰면서 <온실가스>를 마음껏 배출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건 또 다른 문제(예: 대기, 토질오염, 소음공해, 열섬효과 등)를 야기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재 인간이 내뿜는 <온실가스>가 우려할 만큼의 <지구온난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위기론자>들이 말하는 것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회의론자>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모종의 <관계>를 살펴봐야겠다. 바로 <과학자>와 <정치가>, 그리고 <경제적 효과>와 <특정 종교계의 이익>말이다.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지구온난화 위기론자>들이 말하는 저의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논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도 순전히 지구를 구하려는 마음에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경제적 선진국들은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살면서 <환경주의>를 앞세워서 후진국들의 경제성장 발목을 잡고 있다. 사실 자기네들이 만든 <환경파괴>를 후진국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물론 떠넘기면서 선진국은 후진국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물론 자국민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정치가들이 가로챘지만서도.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서 읽어보시길, 여하튼 <지구온난화>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뒤바꿀만한 책이다. 그런데 저자는 <지구온난화 위기론>를 여러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지만 <환경주의자>를 <비효율>적이라는 면에서 <위기론자>들과 싸잡아서 비판하였다.
 
 이 점에선 살짝 반감이 들었다. 물론 저자의 지적대로 현재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거나 <원시시대>로 되돌아가서 살아갈 수는 없다.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끔찍할 것이다. 인정한다.
 
 그러나 <전원생활> 정도를 꿈꾸는 것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아침에 새 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햇살로 아침을 맞으며, 한낮에는 야생동물(사자나 늑대같은 맹수 말고)과 함께 하는 피크닉, 청정한 개울물을 마시며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이불삼아 잠이 드는 생활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저자는 생활의 편리함을 <전기>라는 에너지에 의지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화력발전소를 없애라는 <환경주의자>들은 모순덩어리라고 비판하였다. <문명의 혜택>과 <자연친화>를 동시에 꿈꾸지 말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왠지 얄미워진다.
 
 저자 역시 <지구온난화>가 현재진행형이라는 데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을 것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지구온난화>가 부각되고 누가 위기감을 조성하는가? 저자는 대담하게도 <종말론>을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원죄(엘 고어<불편한 진실>가 앞장서는 듯)를 꼬집었으며 <대체연료>와 이를 이용한 기기(엘 고어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라고 했다)를 팔아먹을 자들이 그렇다고 말했다.
 
 난 저자의 주장에 생각을 고쳤다. 비판할 점이 없진 않지만. 당신은 어떤가? 여전한가?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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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라. 부드럽게 때론 격하게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08-0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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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감정을 드러내는(특히 솔직하게) 사람을 아직 미숙한 사람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만큼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순진하거나 야만스런 사람으로 보고,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감정은 <표현>하면 안 좋은 걸까? 우리는 다양한 교육을 통해서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 무례한 사람이 되거나 몰상식한 사람 취급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람을 사귈 수 있을까? 물론 감정 중에서 좋은 감정만을 골라서 표현하면 긍정적인 효과만 나타나겠으나, 그게 사람 살면서 어디 쉬운 일인가. 결국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하고,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방법은 간단하다.
 
 첫째, <감정을 표현하라>
 당연히 초상집에서 웃고 경삿집에서 울면 안 될 것이다. 적절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감정을 꽁꽁 감추면 안 된다. 적절히 표출해야 <감정 표현법>이 세련되기 마련이다.
 
 둘째,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라>.
 즉, 내 감정에만 충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십상이다.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현실에서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늦추고 상황을 살펴볼 여유가 있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적혀 있으니 살펴보시길...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감정>을 서양적 관점에서 고찰한 부분은 자세한 데 반해 동양적 관점에서 고찰한 부분은 적었다는 점이다. 물론 서양인이 쓴 책이다보니 어쩔 수는 없다고치더라도 저자가 <감정>을 서술한 예들이 자신들의 내담자(저자는 심리치료사이다)를 비롯해서 문학과 영화에서 수많은 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도 거의 대부분 서양의 것에서만 적용시키다보니 <감정>을 해석한 내용이 낯설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예시된 내용들이 전문적인 혹은 조금은 오래된 것들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았는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란 영화를 보고 남녀주인공의 행동에 공감해 보았는가? 이런 것들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더욱 잘 들어올 것이고, 아닌 분이라도 큰 불편 없이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조금 어색했고 약간은 지루했던 점이었다.
 
 때론 감정을 너무 드러내서, 때론 감정을 너무 감춰서 탈이 난다. 직접적인 접촉이 점점 줄어들고 인터넷 등을 통한 온라인 상에서의 만남이 늘어가는 요즘에 감정 조절에 실패해서 더 탈이 나는 듯하다. 이를 단지 <익명성> 때문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은 말이나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얼굴표정, 몸짓, 때와 장소에 따라 복합적인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엔 더욱 상대방의 감정을 읽기 힘들고 그래서 더욱 표현하는 것을 꺼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감정>은 인류가 특별히 발달시킨 표현법 중에 하나이고 이 책에 언급한 바와 같이 어쩌면 <감정>의 작용에 의해서 오늘날 <인류>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어떤 동물보다 풍부한 <감정>이야말로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감정>이 있어 좋은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은가? 때론 <사랑해>라는 한 마디가 다른 백마디 말보다 더 좋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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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매사에 늘 그렇게... | 2008년에 쓴 리뷰들 2008-07-2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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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대지여 꿈을 노래하라 1

밀드레드 테일러 저/위문선 역
내인생의책 | 200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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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주인마님이라고 불렀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재능을 시기받는 것도 모자라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는 당시 조선시대의 <적서차별>이라는 관습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홍길동은 이 때문에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이 책의 주인공 <폴 에드워드>는 남북전쟁을 치른 직후의 미국사회에서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흰 깜둥이>인 탓에 사회적 모순을 온 몸으로 겪고 이를 이겨낸 인물이다.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변명이라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이런 식의 차별이 심각하구나>라고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과 같은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계층은 조선시대 <중인>, 즉 <서인출신>이 있었다. 흔히 <서출>이라 부르며 아버지는 버젓한 양반 계층인데도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종 아닌 종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 오늘날에는 어떤가.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는 <신분제>는 무너졌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새로운 계층구분법이 생겨나 애써 귀천을 따지는 풍토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근래는 <외모>도 한 몫하는 경향이 강해진 듯 하다.

 

 이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차별>은 왜 뿌리 뽑히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접한 책에서 말하길, 한 미국흑인이 자신의 몸에 얼마만큼 아프리카 선조들의 피를 물려 받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해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자신의 겉모습은 비록 흑인지언정 유전자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미국 흑인은 자신들의 선조인 아프리카인보다 유럽 백인들의 유전자를 가진 셈이다. 그렇다면 피부색이나 외형적인 조건만으로 차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재산이 많은 정도에 따라서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나눌 수는 있을지언정 재산의 많고 적음이 특정 권력이나 지위를 세습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외모의 미추는 물론이려니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따져 개인의 꿈을 이룰 가능성마저 강탈하는 일이 벌어져도 안 될 것이다. 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터이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A가 옳고 B가 그르니 A를 따르는 게 합당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B일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적 모순에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작가는 분하지만 <주먹>이 아닌 <머리>로 대처하라고 지적한다. 폭력으론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진정한 해결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순응하라고, 부조리에 편승에 스스로 모순에 빠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힘의 억압을 힘의 논리로 해결할 때는 해결될 문제마저 더 큰 문제에 빠지게 마련이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촛불이 그걸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대학생 시절에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컬러피플>이란 영화를 보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미국에서 흑인(유색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단지 고달픈에 흐느끼는 그들의 고통과 아픔 때문에 흘린 것은 아니었다. 우피의 아들이 자기 주장이 강한 아내, 곧 우피의 며느리가 세상의 부조리를 힘으로만 해결하려나 동료 흑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돌아온 뒤에도 상처가 치유되자마자 또 다시 힘으로 해결하려들자(이 때 아내는 남편의 무능함을 질타한다) 남편이 말리며 어머니(우피)에게 도움을 청하자. 우피 왈, <때려 줘!> 그리고 며느리의 따귀를 때린다.

 

 때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고민했는데도 영화는 계속 이어졌고, 3시간여가 지난 뒤 영화가 끝나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건 사회 부조리에 맞서며 나 역시 부조리한 방법으로 해결하려할 때 그건 단지 복수일 뿐, <진정한 해결>이 아니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세상은 공정하거나 공평치 못하다고. 그러면서 왕왕 본때를 보여줘야 해결이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정치 못한 방법으로 본때를 보여준들 공정한 세상은 오지 않고, 공평치 못한 방법을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신분차별이 심할 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흥분하며 <혁명>으로 본때를 보여주었지만, 그뿐. 대부분 <혁명>이전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본때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결국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이 훗날 도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또 다른 <차별>이 생겼다. 이 차별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계속 피를 흘리는 수고를 해야할까?

 

 아니 별로 현명치 못한 방법인 듯하다. 부조리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은 설령 처음엔 몰랐더라도 <공명정대>한 것에 맞닥뜨렸을 때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건 <공명정대>의 가장 훌륭한 무기가 <떳떳함>이기 때문이다. 이 <떳떳함>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마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강력한 무기가 된다. 세상 어떤 부조리도 이 <떳떳함> 앞에서 당당함을 느낄 수 없고 이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진리>다.

 

 비록 거대한 사회 부조리에 불편을 겪고 억울함에 분노가 치올라도 내가 <떳떳하>면 잠시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못된 세상에 살고 있는 덕에 목숨을 구걸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결국 못된 세상은 가고 좋은 세상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뿐이라도 좋다.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떳떳함>을 고집하다 죽음을 맞이해도 억울할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떳떳함>이 그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할 것이기에. 하지만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이 때 갈릴레이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명언이다.

 

 이 책을 읽을 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항상 매사에 늘 <떳떳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깡패나 조폭같은 무리들 앞에서 <무모해>지라는 것은 아니다. 적절할 때 혹은 피치 못 할 때 <비굴해>질 수도 있다. 날 아프게 하고 죽이려 하려는 데 나 아프게 해줘, 날 죽여주라고 것은 <진정한 떳떳함>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이 아니듯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듯 상황에 따라 <떳떳함>의 방법이 다를 수도 있지만 마음만은 변치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떳떳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글이 길어졌는지는 몰라도 필요없는 말을 쓴 것 같지는 않아 위로가 된다. 요즘 살기 힘들다. 마구 욕지기라도 하고 싶다. 꼭 누구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 때문이리라. 그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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