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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야밤 독서
Challenge 199. [6/12 야밤독서] 지식인마을 1_진화론도 진화한다 | 새벽/야밤 독서 2020-06-12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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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02 ~ 22:05 , 읽은 쪽수 : 24쪽 ~ 57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다윈 & 페일리

장대익 저
김영사 | 2006년 11월

 

3) 책 읽은 뒤 느낌

  [ 1권 2장 지식인과의 만남 : 1. 시계를 설계한 사람과 자연을 설계한 신 / 2. 갈라파고스의 핀치가 알려준 생명의 비밀 ]

  <진화론>이 탄생하기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면 당시 지식인들을 이해시키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윈, 스스로도 '결심'을 하기까지 무려 20여년 이라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지적설계'라는 패러다임에 더 익숙했다. 이런 패러다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모델이 바로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의 '진화론 비판'이다.

 

  이를테면, 고철 더미 위로 무시무시한 토네이도가 지나갔을 때, 이 토네이도 때문에 고철들이 서로 조립되어 보잉 747비행기가 될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고 주장하며 간단한 세포 하나라도 우연히 생겨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명료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지적인 설계자'가 생명체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하지만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핀치의 생김새'를 관찰한 결과는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든다. 똑같은 핀치인데도 그 좁은 지역에서 그토록 큰 차이를 보이는 까닭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선택'이라는 설명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16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군도는 섬과 섬 사이를 가르는 바다로 인해 '서식 환경'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환경에 놓인 '핀치'는 각각의 환경에 알맞게 '부리'를 바꿔가게 되었고, 이를 '자연선택(도태)'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과거에는 번성했다가 지금은 멸종한 동물들에 대한 설명도 쉬워지고, 또한 지질학적인 변화에 따른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동식물도 나름대로 진화해 나간다는 설명도 깔끔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윈은 이를 쉽사리 발표하지 못한다.

 

  그러나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라는 가난한 학자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받고 다윈은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20여년 동안 발표하지 못하고 완벽한 증거 모으기만 하고 있는 동안에 '월리스'가 <진화론>의 완벽한 논문을 작성해서 편지로 보내왔기 때문이다. 다윈은 서둘러 <진화론> 초판본을 내놓았고, 월리스에게는 '동시발견자'라는 영예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평소에 다윈을 존경하던 월리스는 두 말하지 않고 다윈과 뜻을 같이 했고 말이다. 하지만 <진화론>의 논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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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8. [6/9 야밤독서] 지식인마을 1_진화론도 진화한다 | 새벽/야밤 독서 2020-06-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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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캠페인 참여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30 ~ 22:20 , 읽은 쪽수 : 4쪽 ~ 23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다윈 & 페일리

장대익 저
김영사 | 2006년 11월

 

3) 책 읽은 뒤 느낌

  [ 1권 1장 지식인마을로의 초대 : 누가 이 정교한 자연을 만들었나? ]

  이 책의 시리즈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로 참석할 수 있었던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저) 강연회에서 받은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당시 강연회에서 강의를 한 분의 책이었는데, '장대익'이라는 분이었다. 이 분은 우리 나라에서 몇 안 되는 '다윈의 후예'이며 이 분이 집필한 <진화론 서적>도 꽤나 많으므로 대단히 유명한 분이었다. 물론 난 그것도 모르고 참석하였던 터라 그분과 마주 앉아 술 잔을 기울일 수 있는 5명을 뽑는 기회에도 손을 들지 않았었다. 솔직히 그 당시(2007년)에는 '진화론'에 그닥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질문할 것도 별로 없었고, 단지 <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 도킨스가 직접 강연할 것으로 예상하고 참석했는데, 다른 분이 강연을 해서 실망만 했더랬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나고 받아들고온 책 한 권을 읽고 바로 그 순간부터 <지식인마을 시리즈>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십 몇 권이 출간된 상황이었고, 완간까지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완간'을 기다리지 않고 사모으기 시작한 것은 그만큼 이 시리즈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리커버'가 되고, 애초에 50권이 목표였는데, 그보다 적은 39권으로 완간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사모은 유일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리커버'로 구매 중간에 '표지'가 바뀌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판본'이 바뀌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그런데도 이 책을 구매한 것은 오직 '지식인마을'이라는 매력 때문이었다.

 

  헌데 그토록 매력적인 시리즈였는데도 굉장히 띄엄띄엄 읽고 말았다. 이는 나의 '지적 수준'이 아직 성장하기 전이었던 탓이다. 관심있는 분야의 책은 재미나게 읽었지만 비관심 분야의 책은 그냥 사서 책꽂이를 장식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다시 '완독'하려고 한다. 이제는 나의 '지적 수준'이 매우 광범위했다는 오만만 믿고서 말이다. 자, 그 첫 번째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이 무려 15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 지금의 상황과 조금은 달라진 것들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해졌다. 첫 번째 책은 <다윈 & 페일리> 인데, 각각 <진화론>과 <자연신학>이라는 대표적 저서를 쓴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둘은 각각 '자연선택'과 '지적 설계'라는 관점으로 [누가 이 정교한 자연을 만들었나?]라고 하는 질문에 '다른 답'을 내놓았다. 이때가 무려 200여년 전인데,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논란중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리차드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쓰여있다. 오늘날 과학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에서 초중등 교과서에 '진화론'을 실어놓은 것을 비판하며 신학에서나 가르칠 법한 '창조론'이나 종교와 과학을 섞어놓은 듯한 '지적 설계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50개의 주 가운데 무려 31개의 주에서 말이다. 다시 말해, 과학시간에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이다. 이유는 [누가 이 정교한 자연을 만들었나?]에 대한 답을 '빅뱅'으로부터 지구의 생명체가 '진화'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이토록 정교한 자연'이라면 대단히 지적 설계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종교적 접근'으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신학자들의 주장 때문이다.

 

  아직도 '법전'이 아닌 '성서'에 맹세를 하는 미국인다운 주장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재에는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이 태어난 영국에서도 인구의 절반 정도가 '지적설계론'을 신봉하고 있으며, 기독교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도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종파들이 속속 세를 불려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못 믿겠다면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지인에게 살짝 물어보길 바란다.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하느님'이라고 얘기하며, 인간이 어떻게 '진화'했냐고 물어도 '하느님'이 창조한 존재라고 답하는 교인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분들에게 '지구과학' 시간은 꽤나 양심적인 문제였노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간혹 있는 것을 확인했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빅꽝!! 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하는 '과학교과서'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지인도 있었다.

 

  이들에게 '과학'과 '종교'는 구분하기 힘든 일이었을까? 오늘날의 과학은 종교와는 사뭇 다른 '분야'로 인식될 법한데도 여전히 '종교적인 신앙'이 '과학적 이해'를 힘들게 하는 모양이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는 '신성모독'에 해당하기 때문인지 여전히 거부감이 대단하다. 이런 거부감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 바로 이 책 <다윈 & 페일리 : 진화론도 진화한다>이며,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에 대한 각각의 유래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책이기도 하다. 다음 장부터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이 나올 것이다.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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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7. [6/8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완) | 새벽/야밤 독서 2020-06-0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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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20 ~ 23:00 , 읽은 쪽수 : 270쪽 ~ 완독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6장 : 왕조는 무너졌으나 ]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마당에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완강하게 반대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동조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고종의 태도는 분명히 '이중적'이다. 딴에는 '모순적'이라고도 보이지만 고종의 스타일이 '상대'가 강할 때는 숨죽였다가 '기회'를 엿보아서 다시 권력을 잡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었기 때문에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도 한 발 물러섰다가 '기회'를 엿보는 고종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엿보이기 때문에 딱히 '모순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중적인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허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가 설치된 뒤에는 두 번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고종의 노력은 끊임없었다. 가히 똑똑한 임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고종은 틈만 나면 '항일의병'을 도왔고[<미스터션샤인>에서도 잘 드러났다],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히는 친서를 영국 <트리뷴>과 <대한매일신보>에 실었으며,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특사를 파견해서 열강들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도록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국으로 '고종의 강제 퇴위'가 잽싸게 강행되었고,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사건이 촉매제가 되어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강등되며 일제에게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허나 국권피탈이 벌어지고 난 뒤에 격렬한 반대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애국지사들이 일본이 준 작위까지 내던지고 자결을 하기도 했고, 지식인들은 망국의 한을 풀 길이 없다며 불귀의 객을 자처하긴 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동안 '강력한 일제의 그늘'에 몸을 피하려는 듯이 잠잠하기만 했다. 아닌게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보호국'이 된 것을 환영하는 성명를 발표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나라도 이기고, 러시아도 이긴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현실론'에 입각해 망발을 일삼는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항일의병'은 계속되었다. 일제의 끔찍하고 잔인한 토벌작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시작으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면서 '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었으며, 그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무장투쟁으로 실력을 보여주며 독립운동은 더욱더 가열차게 불타올랐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일제는 해방직전까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고, 기어이 독립을 하고 난 뒤에도 '친일파'는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살았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가난과 굶주림을 겪다가 굶어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본 또한 '패전국'과 '가해국'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세계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반해서 우리는 '냉전'의 산물인 '분단국가'로 남아 지금껏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의 귀결의 일차적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냉정하고 야멸찬 국제경쟁에서 힘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해버린 탓을 다른 나라들 탓으로 넘겨 우리의 책임을 회피한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내부의 적'을 우리 스스로 솎아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려버린 것도 일차적으로 '내탓'을 먼저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이러한 잘못은 '자정 노력'한 뒤에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먼저 일본의 책임 있는 사죄와 합당한 배상을 따져 물어 관철시켜야 한다. 또한 이권 다툼을 하며 우리 나라를 일제에 팔아넘기는 것을 방관했던 서구열강들에게도 잘잘못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당사국에 '냉전의 이념갈등'을 심어놓고 끝내 '분단과 전쟁'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에 책임 있는 해결방안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간 평화적인 통일을 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움을 약조 받아야 한다. 이는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원래대로' 되돌리는 우선과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이런 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대한민국은 대단한 강대국이 되어야만 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를 만들어 자신들의 지난 과오로 인해 대한민국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안절부절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도덕적 우위를 가졌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고, 세계를 정복할 참된 힘을 갖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도 하지 않을 참인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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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6. [6/7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새벽/야밤 독서 2020-06-0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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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2:40 , 읽은 쪽수 : 234쪽 ~ 268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5장 : 스러지는 자주국의 꿈 ]

  드디어 '러일전쟁'이 시작되려 한다. '대한제국 선포'를 하고서 황제로 우뚝 선 고종은 대내외에 '황실의 위엄'을 보이며 번듯한 나라를 만들려 했으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번번히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독립협회'를 해산 하며 '전제군주'로 다시 회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광무개혁' 등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학교를 세워 '계몽사업'에도 열을 올리며, 3만에 다다르는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등 '부국강병'한 나라로 거듭나려고 꽤나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육군만 100만 군대를 양성한 때였기에 다른 서구열강과 비교할 처지가 못되는 형편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종은 '러시아'에 매달리다시피 했으며,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러시아'를 붙잡아두려고 꽤나 노력했다. 비단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이권 사업'을 넘기며 러브콜을 보냈고, '대한제국'이 굉장히 탐나는 나라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며 일본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뉘앙스를 자꾸 풍겼다.

 

  허나 러시아는 '대한제국'보다는 '만주'에 더 관심이 컸다.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은 러시아는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해서 '시베리아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직선 개통되는 데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화단 사건' 벌어지자 러시아는 열강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들였고,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고 난 뒤에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는 등 노골적으로 '만주'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각각 일본과 조약을 맺었고, 이에 '한 판 승부'를 벌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이 서자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방법인 '선빵부터 날리고 선전포고하기'로 뤼순항에 집결한 러시아의 함대와 봉천으로 집결한 러시아 육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면서 '러일전쟁'의 승리에 한 발 나선다. 이후 흑해에서 출발해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동해로 가던 러시아 함대를 쥐어짜서 만든 일본 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전멸시켜버리자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거대한 러시아가 조그만 일본에게 패배한 사실이 믿기 힘들지만, 마침맞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더는 전쟁을 할 여력이 없게 되자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서둘러 전쟁을 종식시켰다. 사실 일본은 '진짜' 전쟁을 더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뒤를 도와주던 영국과 미국도 사실 러시아가 미워서 일본을 후원했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일본이 급부상하는 것도 마뜩찮았기 때문에 간당간당하게 도와줬을 뿐이다. 암튼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간다. 이는 영국과 맺은 '제2차 영일동맹'과 미국과 맺은 '가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답받고 밀어붙인 결과다.

 

  이로써 고종은 일본의 보호를 강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해버렸고, 고작 '을사늑약'의 문구를 고쳐서 '황실 보호'만 약조받은 셈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국권피탈 이후 급격하게 '대한제국 황실'은 무너져 갔다. 또한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에 두루뭉술한 발언으로 일관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은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혀 두고두고 우리 국민들의 '처단대상 1호'가 되었지만, 정말이지 더럽게 살아남아 하나같이 천수를 누렸다. 반면에 '민영환'을 필두로 '이한응',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로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했으며,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은 항일의병으로 격하게 반대를 이어갔다.

 

  허나 '을사오적' 등은 뻔뻔스럽게도 '을사늑약 체결'은 이미 이전부터 일본과 체결한 조약과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며, '외교권'만 잠시 일본에게 빌려주었다가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다시 되찾아 오면 되는 일일 뿐인데, 많은 이들이 이를 오해하고 무조건 '일본을 미워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며 자신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는 성명을 내놓는다.

 

  당시의 현실로 보아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고종부터 대놓고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없던 터였다. '을사늑약' 직후에 고종이 의병활동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형세를 바로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항일의병'이 실패로 끝맺자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자강운동'을 펼치게 된다. 실력적으로 일본을 앞설 수 없다면 '우리 실력'을 키워 이겨내자는 주장이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주장인데, 이를 일본은 '동양평화론'이라고 포장하면서 "서구열강에 앞서 싸울 수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청이 이미 멸망했고, 조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마저 서양에 패배하게 된다면 아시아는 서구열강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황인종은 단결해서 백인 침략자와 대항해야 한다. 동양평화를 위해서 말이다"라는 교묘한 말로 지식인들을 포섭해나갔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를 공공연히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체가 '일진회'다.

 

  '일진회'는 송병준이 이끌었는데 '일본군'의 후원을 받아 정치활동을 개시한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에도 물신양면으로 일본을 돕던 단체가 바로 '일진회'였다. 여기에 '진보회'가 합세한다. '진보회'는 3대 동학교주 손병희가 이용구를 통해 만든 조직이었는데, 원래 동학교도가 많았던 탓에 금새 거대조직으로 세를 불리게 된다. 이들은 '개화의지'를 불태우며 지식인 대열에 합류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용구가 회동을 하더니 합세해버렸다. 이에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일진회'와 선을 긋고 '천도교'를 만드니 항일의병의 기치를 다시금 올리게 된다.

 

  이때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 바로 '신식학교'였다. 안창호의 대성학교, 이승훈의 오산학교, 이용익의 보성학교(난 '보성고'를 졸업했다. 고교시절에 숱하게 독립운동의 활약상을 들었음) 등이 잇달아 생겨나 1910년에는 2000개가 넘을 정도로 '교육열'이 엄청났다. 특히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배우는 것을 역점으로 두었다. 그리고 '신문 발행(대한매일신보 등)'과 '사회단체(신민회 등)'도 만들어지고, '대중운동'도 활발해졌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을 '보안회'가 막아냈고, 일본에 차관이 들어오자 '국채보상운동'도 펼쳐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이간책으로 '자강운동의 한계'가 오래지 않아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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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5. [6/6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새벽/야밤 독서 2020-06-06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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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캠페인 참여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30 ~ 22:15 , 읽은 쪽수 : 172쪽 ~ 223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4장 :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

  '아관파천' 다음은 '대한제국 선포'다. 고종은 외국 공사관에서 몸을 의탁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편안함을 느끼긴 했지만 내심 쪽팔렸던 모양이다. 한 나라의 임금인데 그렇지 않으면 임금이랄 수도 없으니 '인지상정'이긴 한데, 정작 '황제국'으로 거듭나고 난 뒤에 한 행보를 보면 옹졸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니 망국을 피할 수 없었지...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종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임금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되었다고 타박하기에는 '국제정세'가 크게 요동을 치던 시절이었고, 고종보다 못난 임금도 버젓이 임금 노릇을 해먹기도 했던 조선이었기에 '고종'을 불운한 임금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 싶다. 물론 '책임'이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최종결정권'을 가진 임금이 나라가 망하는데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을 '불운했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아관파천' 1년 후에 고종은 궁궐로 환궁을 하면서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며 연호를 '광무'라 밝히고 황제라 칭하였다. 드디어 독립국의 위상에 걸맞는 '황제국'이 된 것이다. 새롭게 나라를 열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했던 바, '서재필'이 낙점을 받았다. 허나 그 사이에 '미국인'이 된 '필립 제이슨(서재필)'는 조선 관리가 될 수는 없었기에 '고문 역할'을 맡으며, 옛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일을 시작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하는 등 '대한제국'에 '입헌군주국'에 걸맞는 '의회정치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이렇게 시작한 '독립협회'는 백성들이 모여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장이 되었다. '만민공동회'는 개최를 할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마디로 인기급상승을 하는 모임이 된 것이다. 백성들은 누구라도 '발언대'에 올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정치적 발언도 서슴없이 말하고 찬성하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호응했다. 하지만 이런 '만민공동회'의 인기는 고종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민공동회'가 가장 먼저 추진한 주장이 '외세배격'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열망은 '당당한 자주국가'였다. 그렇기에 러시아가 정치에 개입해 간섭을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고문'도 돌아가라 외치고, '한러은행'도, '절영도 조차'도 모두 거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뜻밖에도 러시아가 순순히 물러가겠다면서 러시아로 철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고종을 불편하게 했다. 고종은 은근히 러시아에 기대어 일본을 견제할 속셈이었는데, '만민공동회'가 러시아를 쫓아내고 일본을 견제할 방법을 막아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독립협회'의 활동은 은근히 막으려는 수단으로 '황국협회'를 만들어 방해공작을 하기 시작했다. '황국협회'는 보부상 단체로 고종의 입김이 작용하는 '어용단체'였던 셈이다. 보부상들은 국가의 '허가'가 있어야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고종의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었던 터였다. 허나 '만민공동회'는 더욱더 인기를 얻어 정부의 관리들까지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3대 회장'을 맡은 '윤치호'가 최초의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도록 '중추원'을 바꾸어 독립협회 회원 25명을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마치 영국과 미국의 '상, 하원'과 같이 '양당제'의 성격을 띤 '중추원'의 구성원은 '관리와 백성'이 한 자리에서 의견을 나누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독립협회의 활동을 막아서기 급급했다. 왜냐면 자신이 황제인데도, 황제가 임명한 대신들을 '만민공동회'에서 끌어내리거나, 황제가 벌 준 인물을 '만민공동회'에서 석방하도록 하는 등 '백성의 입김'에 번번히 따라야 하는 모양새가 씁쓸했기 때문이다. 만약, 고종에게 '백성의 역량'이 이만큼 성장하였으니 더욱더 백성을 교육시키고 똑똑하게 만들어 인재를 발굴해 '대한제국'을 더욱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활약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면 좋았으련만, 고종은 '전제군주'의 모습으로 돌아가 '왕권 강화', 아니 '황제권 강화'에만 역점을 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황국협회'로 하여금 '만민공동회'를 공격해 깽판을 놓으라고 지시를 내리고 말았다.

 

  불시의 공격에 해산했던 백성들은 손에 손에 짱돌을 들고서 '보부상'들을 공격하며 반격을 했더랬다. 그리고 자신들을 '강제해산' 시킨 장본인(고종이었지만)인 대신들의 집을 무너뜨리고 감옥에 갇힌 '독립협회 대표들'을 석방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때는 고종도 한 발 물러서야 했지만, 그후로도 '만민공동회'는 개최하지 못하게 하는 등 억압을 하여 결국 '독립협회'를 해산시켜버리고 말았다. 그후로 '만민공동회'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일단은 고종이 자신의 입맛대로 백성을 요리한 것 같아 만족했는지는 몰라도, 세상은 고종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에 걸맞는 구색만 맞추려고 무리하게 국고를 낭비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국가재정'을 파탄나게 했으며, '자본주의'가 뭔지도 몰랐기에 외국과 상권 경쟁이 벌어지면 번번히 밀려서 '국내 경제'만 더욱 안 좋아졌으며, 각종 이권사업을 외국에 퍼준 결과로 '황제'는 리베이트를 받아 돈을 벌었을지 몰라도 백성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협력하는 일이 벌어지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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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4. [6/5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새벽/야밤 독서 2020-06-0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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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캠페인 참여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30 ~ 22:10 , 읽은 쪽수 : 104쪽 ~ 171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3장 : 인아거일(引俄拒日) ]

  '인아거일'이란 아라사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는다는 뜻이다. 이는 '명성황후'의 책략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뜻이기도 했다.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조선은 백성들의 봉기를 맞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끌어들인 외국군대로 인해 '남의 나라 전쟁'에 전쟁터가 되어 짓밟히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조선의 모든 것이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판이 되자 일본을 막아내고 '친일세력' 또한 일거에 내쫓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와중에 '러시아의 힘'이 만만찮은 것을 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막는 일을 모색한다.

 

  다시 말하자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승리한 일본은 패배한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며 다음과 같은 조항을 요구한다.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요동, 대만, 팽호열도(대만 서쪽 섬들)를 일본에 할양하며, 일본에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에서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며, 청으로부터 할양 받은 땅과 배상금으로 엄청난 '전쟁 이득'을 얻으며 '또 다른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주도로 독일과 프랑스가 가세해 일본을 압박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삼국간섭'이다. 러시아는 아편전쟁 이후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만주'까지 넘보고 있었는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요동반도'까지 차지하려고 드니 러시아가 '실력행사'를 한 것이다. 이에 일본은 '청일전쟁'에 총력을 기울인 직후라 러시아와 상대하기에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꼬랑지를 바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 '문제'를 서구열강들과 함께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려 했으나 열강들의 속셈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서자 '삼국의 요구'를 수용해서 '요동반도'를 내놓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사실 일본으로서는 요동을 토해내더라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허나 '자존심'이 깎기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이를 감지한 '명성황후'는 곧바로 친일세력과 일본을 한꺼번에 내칠 상대로 '러시아'를 꼽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움직였다. 그러자 일본은 문인 출신인 이노우에 공사에서 군 장성 출신인 미우라 공사로 전격 교체를 한다. 그리고서 일본공사관을 중심으로 '일본 낭인들'이 집결하는 등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서는 대원군까지 포섭하여 일명 '여우사냥'을 감행한다. 여기서 '여우'는 다름 아닌 '명성황후'다. 그리고 궁궐에 침입해서 저항하는 조선 시위대와 궁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왕비를 찾았다. 그 과정중에서 고종과 왕세자까지 겁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일본 낭인들에게 거처를 들킨 왕비는 비명에 횡사하고 온몸이 칼로 난자되고 불에 태워져서 훗날 훈련대 장교 윤석우에 의해 발견되어 궁궐 옆에 묻히게 되었지만, 불에 태워지고 갈갈이 찢긴 상태여서 정작 누구의 시신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발뺌을 하며 조선과 열강들의 추궁에 변명으로 일삼다가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으로 인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미우라 공사와 범인으로 몰인 낭인들을 일본으로 송환한 뒤에 재판을 하는 척하다가 '전원 석방'을 하며 사건을 일단락시켜 버렸다. 그러면서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던 '사건'을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진 탓에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으로 결론을 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과정이 벌어지고 나서야 고종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지 3달 뒤였다.

 

  그런데 미우라 공사와 일본 낭인들의 '계획'과 '범행현장'에 흥선대원군은 왜 있었던 걸까? 10년 동안 '권력의 맛'을 보고 난 뒤에 정치적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며느리'를 미워하게 된 듯 싶다. 차마 아들을 미워할 수는 없으니 모든 원인을 '며느리 탓'으로 하며 틈만 나면 '권력'을 되찾아 잘난 며느리를 혼내줄 생각만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임오군란' 때도, '청일전쟁' 때도, '동학농민혁명' 때도, 대원군은 자신을 권력의 자리로 돌려주겠다는 꼬임에 모두 홀랑 넘어가 실컷 이용만 당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인정하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더 존경스런 어른으로 숭상 받을 수 있었으련만 '을미사변' 때에도 대원군은 미우라 공사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다 반 년도 못되어 며느리와 같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궐내에서 왕비가 처참히 죽은 일이 벌어지자 궁궐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감시'가 더 심해진 탓이다. 유일한 해방구는 '외국 공사'와 만나는 자리였다. 그래서 고종은 '춘생문 사건'을 벌여 미국공사관이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발각이 되는 바람에 실패로 끝장나고 말았다. 일본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러시아 공사'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낸 결과,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바로 '아관파천'이다. 러시아는 처음엔 거부하는 모양새였다가 '전쟁'도 하지 않고 조선 안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큰 이점을 깨닫고는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일국의 왕이 '외국의 힘'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초라함'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황제국'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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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3. [6/4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새벽/야밤 독서 2020-06-0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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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30 ~ 22:10 , 읽은 쪽수 : 50쪽 ~ 102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2장 : 1894, 갑오년 ]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으레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로 시작한다고 알려졌다. 허나 조병갑은 단순한 횡포가 아니라 아주 악랄한 '수탈의 달인'이었다. 흔히 탐관오리들의 명대사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로 꼽지만, 조병갑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네 죄는 정해졌고 너는 살고 싶으면 갖다 바쳐라"일 정도로 마른 오징어를 쥐어 짜서 물항아리를 가득 채우고야 마는 악질 중에 악질이었던 것이다. 이에 백성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면서 하나같이 전봉준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를 하니 결국 전봉준은 들고 일어섰다.

 

  전봉준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농민군을 이끌고 전주 감영으로 진격을 하려 했으나 멈칫 하고 말았다. 왜냐면 인근 고을에서 아무도 호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병갑은 이미 도망을 쳐버린 상태고 농민군이 더는 호응을 하지 않으면 고립이 될 지경에 이르자, 전봉준은 손화중을 찾아가 호응해주길 바랐다. 때가 무르익었다는 전봉준의 말에 같이 봉기하자고 약속한 손화중이 봉기를 하고, 뒤이어 김개남도 봉기를 하니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은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처음 관군과 맞닥뜨렸지만 '수적 우세'를 앞세워 대승을 거두고 더욱 사기충천하였고, 그 기세로 밀어붙여서 '전주 감영'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농민군의 봉기로 '전주 감영'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청군 파병'을 요청한다. 리홍장과 위안스카이는 농민군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파병 요청에 응했다. 그래서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했는데, 이틀 뒤에는 일본군이 '공관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우며 '인천항'에 상륙했다. 원래 '텐진조약'의 내용이 조선에 상대국의 군대를 파견하면 자동으로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지만, 일본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날'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리고 곧장 '경복궁'을 향한다.

 

  이에 '전주 감영'에서 대치중이던 '청, 관군 연합군'과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합의하며 서둘러 농민들을 해산하는데 주력했다. 왜냐면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왜놈들이 조선에서 다시 설치는 꼴을 봐야했기에 일본군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정은 당연한 수순으로 '농민군 해산' 직후에 '일본군 철수'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이에 조정은 청군에 부탁을 했고, 청군은 일본군에게 '공동 철수'를 주장했지만, 이 역시 거부했다. 다급해진 조정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일본은 번번히 거부하면서 일본군 철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 청에 "두 나라가 같이 조선의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개혁에 착수하자"고 요청했다. 이에 청은 "조선의 내전은 이미 평정되었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스스로 할 것이며 내정 간섭을 할 권한이 없다"고 분명히 했는데도, 일본은 조선에 "청국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을 철수시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증명하라. 3일 안에!!"라며 최후통첩을 날리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해 궁궐을 겨냥하고 궁궐 앞에서 무력시위를 일삼았다. 조선이 대답이 없자, 3일 뒤, 새벽에 경복궁을 습격했는데, 일본은 고종을 협박해서 '청과 맺은 조약 파기'와 '청군 철수'를 문서로 받아내고서는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기습 공격을 받은 청은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우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며 '김홍집 내각'을 움직여 '갑오개혁(갑오경장)'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갑오개혁'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면서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농민군'의 폐정개혁안까지 일부 수용하는 등 근대화에 한 발을 내딛는 중요한 사안이건만, 일본군의 협박에 의해 강제로 설치된 '군국기무처'가 개혁을 주도하면서 상당히 '일본스러움'에 물들 수밖에 없는 개혁안이기도 했다. 허나 이런 일련의 소문들이 민간에 퍼지면서 '반일'과 '항일'에 대한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가기만 했다.

 

  이러한 일본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 농민군은 재봉기를 준비하였고, 평양성에 집결한 청군도 '2차전'을 준비했다. 여기에 일본군과 잠시 손을 잡았던 대원군이 일본에 의해 '들러리' 역할만 했다는 것을 깨닫고 남쪽으로 내려와 '농민군'과 손을 잡고 평양의 청군과 협력해 일본군을 상대하자고 협상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1차전'에서 패배한 청군이 북상하며 평양에서 합류하려고 했으나 '평택 부근'에서 일본군과 만나 크게 패배하고, 남은 병력이 평양에 도착하고, 응원군도 속속 평양에 집결했다. 남쪽에선 전봉준을 중심으로 다시 농민군이 재집결을 하며 일본군과 한 판 승부를 보려 했으나, 전봉준은 초기에 조심스런 행보를 한다. 왜냐면 농민군은 20만이라고 하는 '수적 우세'는 갖췄으나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화력에서 열세'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봉준은 자신만을 '희망'으로 삼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모여든 수많은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봉기를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관군과 일본 연합군'이 '농민군'과 우금치에서 한 판 붙었지만, 전투는 '대량학살' 수준이었던 것이다. 대포와 기관총까지 갖춘 일본군에게 죽창과 사거리가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화승총으로 맞붙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맞붙은 '2차 청일전쟁'도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농민군은 '해산'을 결정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 '황해도'에서 소년장수 '김구'가 용맹하게 싸웠다는 일화만 남긴 채,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추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이었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차례로 잡혀 처형을 당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2대 교주였던 최시중도 붙잡혀 처형을 당했기에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대통을 이어갔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엇보다 '반봉건', '반외세'를 주목해야 한다. 비록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동학교도'와 '농민군'의 공동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 시작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조선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든든한 배경이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허나 이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분명한 노선을 갖추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며, 조선민중의 성원과 염원에 비해 열악한 준비도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정리하면, 반봉건을 외쳤으나 '왕조국가'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국가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반외세를 외쳤으나 외세의 무력을 극복할 힘을 갖추지 못한 점이 '실패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양반과 유생 들'이 '농민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것도 꼽을 수 있겠다. 조선을 지배했던 '계층'이 외세의 침략(일본군)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외세'보다 더 큰 위험이 '농민군'이라며 차별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에 항거해 일어난 의병에 합류하고자 했던 '농민군 일부'를 동학교도에 가담했던 자들은 '천한 신분'이자 '위험인물'이라면서 의병 합류에 반대를 한 이들도 바로 이런 '양반 부류들'이었다. 아니 왜놈들과 싸우자면서 왜놈과 싸운 경험을 가진 이들을 환영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싸우기에는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내처버리니 한껏 오른 '항일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미련한 행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망국의 길'에 접어든 때에 합심하지 못하는 부류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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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2. [6/3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새벽/야밤 독서 2020-06-03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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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2:50 , 읽은 쪽수 : 14쪽 ~ 49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1장 : 동학의 확산과 농민의 각성 ]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급속히 개화의 물결을 맞이한다. 청국군과 일본군이 잠시 주둔했다 '텐진조약'을 맺고 물러나긴 했지만, 청은 '위안스카이'를 앞세워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고, 일본은 일본 유학생과 급진개화파를 중심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새롭게 러시아가 등장해 '만주'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펼쳐보이며 청과 일본의 견제를 막아줄 '완충지대'로써 조선을 이용하기에 딱이었으며, 여차하면 '부동항'까지 얻을 수 있으니 러시아 역시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물론 독일과 미국 또한 멀찍이나마 조선을 넘보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형국이 되어서야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관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밖을 다녀온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서 '왕실' 역시 개화정책을 쏟아내곤 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개혁의 '주체세력'이 없다는 점과 '내정고갈'로 인해 개혁을 지속할 힘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10년은 서구열강의 영향력이 그닥 미치지 않는 시기였기에 조선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 시기를 활용해서 '근대화'를 멋지게 이룰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서구열강 또한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교역'의 대상으로 보아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고종'은 왕실 챙기는데에만 능력을 발휘할 뿐이었고, 대신과 지식인 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재산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니 조선은 '위'에서부터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게 되었고, 이제 남은 건 '아래'에서 부는 천지개벽의 폭풍우가 불어 닥칠 운명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는 와중에 처형이 되었다. 하지만 동학의 교세는 꺾이지 않았고 탐관오리의 학정이 심해지면 질수록 백성들이 의지할 곳은 동학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고종이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해 수용하는 입장을 밝히자 '동학'도 자신들의 교조를 신원회복 시켜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허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충남 보은에 대거 집결하며 교세를 떨쳤고, 고종은 부랴부랴 해산을 명령하며 여차하면 청에 '군대'를 요청할 거라는 액션을 취하기도 했다. 이에 2대 교주 최시형은 자발적 해산을 약속하며 교도들을 다시 되돌려 보냈는데, 전라도 쪽에서 별도의 집회를 열었던 '전봉준'은 좀더 강경한 모양새를 보였다. 이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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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1. [6/2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 새벽/야밤 독서 2020-06-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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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캠페인 참여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40 ~ 22:30 , 읽은 쪽수 : 224쪽 ~ 267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19권 제6장 : 갑신정변 ]

  고종의 개화개혁은 계속 된다. 그리고 서툴지만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다. 만약 조선이 좀더 일찍 개화를 시작하여 '자주권'과 '주도권'을 확보한 다음에 차근차근 개화를 추진했더라면 아주 그럴 듯한 '근대화'에 일찍 성공했을 것이다. 물론 서구열강의 침탈을 막아냈을 때 할 이야기지만 말이다. 암튼 조선의 개화는 '친청 온건개화파(민씨 세력)'와 '친일 급진개화파(박영효, 김옥균 등)'가 주도해 이끌어나갔다. 여기에 왕비는 '친청' 쪽으로, 고종은 '친청'과 '친일' 양쪽을 지지하며 개화가 진척이 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런 와중에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서 조선을 하루빨리 개화시켜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선 열혈 애국운동이기도 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신의 안일에 안주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정변을 일으킬 작정을 하였으며,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유교/중화 주의 탈피, 사민평등, 입헌군주제 등 '근대적 개혁'을 착실하게 준비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일으킨 정변은 고작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으며 청군의 신속한 개입과 일본의 미온적인 대처로 인해 졸속한 정변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엘리트 중심'으로 지도부를 결성한 것까지는 훌륭했으나 오랜 시일을 두고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일본군대에 '보호요청'을 하는 등 외세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들을 지킬 힘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김옥균 등이 '조선 백성들의 입헌군주제 지지'와 '조선군은 물론이려니와 청군과 일본군 등 외국 군대의 간섭과 개입'을 이겨낼 만한 '자주적인 힘(군사력)'을 갖추고 있기만 했어도 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모두 '명문가의 자재들'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우발적으로 일으킨 정변이 아니라 매우 뜻 깊게 시작한 정변임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의 간섭이 더욱 심해졌고,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높이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과 일본이 '텐진조약'을 맺으며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되지만, 언제든 다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은 애초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태였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김옥균은 "조선을 동양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힐 정도로 우국지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갑신정변의 주역들'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갑신정변'은 '애국운동'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조선을 밝게 빛나게 만들고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일으킨 운동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나 순진했다. 왜냐면 '일본'에 너무나도 의지했기 때문이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상당수의 주역들이 '일본에서 공부했다'기로서니 일본이 순수한 마음으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고 도와주기 위해 근대화를 하고, 군사력을 키웠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엘리트'인 자신들이 하는 일이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말았으니 칭찬을 하기에도 뭣하고, 욕을 하기에도 뭣한 것이 [갑신정변]이다.

 

  다만, 확실해진 것은 이제 조선은 '청과 일본'의 간섭과 영향력 아래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된, 한 마디로 '눈치'만 보고 있어야 할 무능력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후로 '고종'은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고도의 전략(?)인지, 무능력의 증거(?)인지 모를 행보의 연속일 뿐이다. 왕비는 일본 깡패들에게 능욕을 당하게 되고, 고종은 외국공사관으로 도망가 '자리'를 비우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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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lenge 190. [6/1 야밤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 새벽/야밤 독서 2020-06-0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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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2:55 , 읽은 쪽수 : 176쪽 ~ 221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19권 제5장 : 개화에 대한 저항 ]

  일본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된 조선은 여러 나라와 '근대적 조약'을 맺게 된다. 잇달아서 말이다. 허나 국제정세에 어두운 것은 임금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신하들도 태반이 국제정세에 까막눈인 것은 마찬가지였던지라 초기에는 '일본'과 '청'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기수를 필두로 해서 '신사유람단'를 파견하였으나 '쇄국정책'과 마찬가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사 시찰단'으로 말이다. 암튼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된 조선은 일본 공사로 파견해 있던 황쭌셴을 만나 책 한 권을 받아온다. 바로 <조선책략>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하라'였다.

 

  하지만 청의 개혁을 도맡아 했던 이홍장은 조금 의견이 달랐다. 청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는 일본과 러시아였던 것이다. 조선을 둘러싼 나라 중에서 '조선'을 걸고 한 판 승부를 걸 나라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놓은 계책이 바로 '이이제이'였다. 다시 말해,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열강과 수교를 맺고 러시아는 몰라도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면 청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조선은 '개항'을 하긴 했으나 어느 나라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서구열강 뿐 아니라 주변국(청, 러시아, 일본) 마저 조선을 침탈할 생각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탓에 조선의 사대부와 유생 들 대부붙은 '위정척사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개항의 시대'를 맞아 대책없는 비판일 뿐이었고, '개항'을 서둘러야 한다는 쪽에서는 <조선책략>을 기본 메뉴얼로 삼아야 한다는 막연한 '기대'만 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조선은 급박한 상황에서 몽롱한 꿈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임오군란]이 벌어졌다. 흔히 '신식군대'를 우대하고, '구식군대'를 홀대한 탓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이 '개항'을 한 탓에 벌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냐면 '개항'을 하는데에도 돈이 들고, '척사'를 하는데에도 돈이 필요했던 탓에 이래저래 '국고'가 말라갔던 것이다. 그래서 세금은 점점 올라가고 일본으로 수출하는 '생필품(쌀 등)'의 양이 늘어난 탓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팍팍해지는데도 궁궐에서는 연일 잔치다, 굿판이다..라면서 돈을 헤프게 쓴다고 비난이 늘어나면서 '명성황후'을 향한 시선이 점점 곱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가 일본 개항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이 명성황후를 미워하는 여론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마치 '프랑스 혁명' 전에 앙뜨와네트 왕비에게 쏠리던 비난처럼 말이다.

 

  이렇게 국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구식군대'에게 13개월치 급료가 밀렸고, 그나마 '한 달치'를 내어준다는 이야기에 한달음에 모였던 이들에게 '모래와 썩은 곡식'이 든 급료를 주자 불만이 터져나왔고, 급료를 내주던 창고지기가 그마저도 싫음 말라는 식으로 대꾸를 했다가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일이 임금에게 보고되자 잘 달래서 불만을 누그려뜨리라고 했건만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주동자 4명을 구속하여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어 끝내 군인들이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구식군인들은 그 길로 평소에 쌓였던 불만을 터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포도청과 의금부를 때려부수고, 일본공사관과 일본인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니 하나부타 요시모토 공사는 가까스로 일본으로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일반백성들까지 합세해서 난이 더욱 커지게 되니 도성은 온통 시위꾼으로 넘쳐났고,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때 '대원군'이 등장한다. 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난리통에 불만을 터뜨리긴 했으나 난리가 끝나면 '살길'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이 이들에게 '살길'을 알려주었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을 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신식군대'를 밀어내고 '구식군대'가 다시 인정 받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복권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이미 바뀌었고, '개항'에 따른 '조약'까지 맺어버렸기에 '임오군란' 뒤에는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자국민 보호를 앞세워 조선에 파견되었고, 곧바로 '주둔'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와중에 '청군'에 의해 대원군이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일본은 조속히 움직인 청에 의해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으나, 곧바로 '제물포 조약'을 맺어 이득을 취했다. 청은 대원군을 납치하고서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해 '조선의 종주국 역할'을 단단히 받아내니, 일단은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한 것은 청나라인 듯 싶었다. 곧이어 터진 '갑신정변'으로 또 다른 정국이 펼쳐질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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