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라는 아이돌의 등장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이하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이하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음악은 어떻게 보면 음악가가 국왕, 귀족, 성직자에게 예속된 상태로 그들의 요구에 따라 생산된 결과물이다. 즉, 음악가가 넓은 의미의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er)방식으로 작품을 생산해서 고객에게 납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은 불가능했다.
예를 들면, 하이든은 거의 30년 동안 에스테르하지 공작 가문으로부터 후원 받는 관현악단에서 “집사 정도의 대우를 받는 궁정악장” [p. 60]으로 근무했고, ‘신동(神童)’이라고 불렸던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로 근무하다가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음악가의 길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시장보다 반보 앞서면 시장을 선도하지만, 한발 앞서면 불우한 선구자가 된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자유음악가의 길은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보다 한발 앞선 선택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이하 ‘베토벤’)의 경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전환되는 시기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 이 무렵, 즉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빈에서는 상공업으로 돈을 번 신흥 자본가들이 득세하면서 귀족들의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귀족들은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던 음악 후원의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저택에 오케스트라를 소유해 연주회를 열던 시대는 지나갔다. 빈의 최상류층 귀족들은 소수의 비범한 비르투오소[巨匠] 연주가들을 집중 후원해 중산층 후원자들과 차별화되는 품격을 나타내고자 했다.” [p. 12]
널리 알려져 있듯이 “대단히 혁신적이며 거친 불협화음이 섞인 베토벤의 음악은 ‘귀족적’이라는 단어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럼에도 빈의 귀족들은 일반적인 음악 취향과 타협하지 않는 베토벤의 음악에 열광했다. ” [pp. 125~126]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베토벤의 음악은 최상류층 귀족들의 차별화 욕구에 부합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베토벤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중적인 성공도 거둘 수가 있었다.
베토벤의 주요 후원자이자 <영웅>의 자필악보가 보관된 로브코비츠 공작의 저택
출처: <베토벤>, p. 161
물론 베토벤이 이런 독립적인 자유 음악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에는 소년 가장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베토벤의 삶도 한 몫 했다.
“10대 초반부터 경험한 직업 음악가의 삶은 베토벤을 더욱 자립심 강한 음악가로 만들었다. 만일 베토벤이 어린 시절부터 직업 음악가로서 갖가지 다양한 경험을 쌓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음악을 자신감 있게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만약 베토벤이 모차르트처럼 일찍부터 신동으로 주목 받아 귀족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더라면, 그처럼 강인한 정신을 소유한 독립적인 음악가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p. 60]
어쨌든 이런 시대적인 상황 변화덕분에 베토벤은 서른 살을 조금 넘긴 1803년 즈음에 ‘베토벤’이라는 브랜드는 이미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베토벤의 제자 리스(Ferdinand Ries, 1784~1838)는 당시 상황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베토벤, 그 이름 하나면 충분했다. 작품이 아름답고 완벽하든 혹은 평범하거나 좋지 않든 간에 그 이름이면 충분했다”라고 증언했다.” [p. 22]
그렇다. 그 시절 베토벤은 최정상의 아이돌이었다.
절망 속에 환희를 노래하다.
베토벤이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쓴 일종의 유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 놓여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사람들은 내가 못되고, 고집스럽고, 혹은 사람을 싫어한다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내 가슴과 정신은 선한 의지에 대한 부드러운 감정에 이끌렸고 대단한 일을 이루고자 열망했지. 그러나 지난 6년간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고 무능한 의사들 때문에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열정적이고 활기찬 기질을 타고난 데다 사교계의 흥밋거리에 끌리던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외롭게 지내야 했다.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잊으려 애썼다. 이중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몰라. 잘 안 들리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사람들에게 내 귀가 먹었으니 좀 더 크게 말해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는 사실도 괴롭다. 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완벽해야 할 청각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지도 못하고, 세련된 대화를 나누거나 생각을 교환하기도 어려워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하지. 최소한의 의사소통만 가능할 뿐이야. 나는 추방당한 사람처럼 외로이 있어야 한단다.
이런 일이 좀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진즉에 삶을 끝냈을 거다. 오직 예술만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아, 내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다 만들 때까지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래서 나는 이 비참한 삶을 견디고 있다.” [pp. 29~30]
음악가 베토벤의 전환점이 된 하일리겐슈타트
출처: <베토벤>, p. 171
이렇게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에 가까운 편지를 쓴 뒤 죽기로 결심하지만,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던 절망은 새로운 창작을 위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유서를 작성한 이후 그는 피아노소나타를 비롯한 기악곡 작곡에 몰두하는데, 그 웅대한 악상과 격정적인 표현과 거침없는 역동성은 일찍이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p. 172]
오늘날 ‘베토벤’하면 교향곡 3번 ‘영웅’이나 교향곡 5번 ‘운명’처럼 위풍당당하고 힘찬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런 스타일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그가 자살 위기를 극복한 이후 1808년까지의 6년 동안이었다.
베토벤이 10년간 머물면서 주요작품을 작곡한 파스콸라티 하우스
출처: <베토벤>, p. 192
어떻게 보면, 베토벤의 진정한 성공은 이렇게 운명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자살 등으로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혔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저자도 “베토벤은 귀족 살롱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출판부터 연주 여행, 공공 연주회에 이르기까지 빈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명성을 쌓아나갔다.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대중들에게도 각인되면서 그의 연주회와 악보들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것이 베토벤이 이룬 성공의 전부일까?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성공은 귓병이 발병하고 난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유음악가로서 경제적인 독립을 성취하고 귀족들의 도움으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지만, 음악가로서의 생명을 끝낼 수도 있는 치명적인 귓병을 앓았다. 베토벤에게 사회적인 위치와 경제적 독립을 차지하기 위한 외부와의 싸움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 싸움보다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더 강력했던 것은 귓병을 극복하고 음악가로서의 사명을 완수해야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pp. 236~237]라고 한 것이 아닐까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출판사 arte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p.s. 20.03.06 '하일리겐슈트'로 오기한 부분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