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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우쓰미 아이코] 전범이라는 사실, 조선인이라는 진실 | Memento 2021-01-1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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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우쓰미 아이코 저/이호경 역
동아시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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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 친일부역자라는 사실 앞에 숙연해 진다. 식민지인으로서 고통받았을 그들의 삶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 진실에 이르기를. 그길이 우리가 운명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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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식민지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독립을 위한 투쟁에도, 신탁통치 결정부터 6.25 전쟁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청거려 왔다. 근대화의 지연과 국권 상실의 과정은 역사 무대에서 우리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과정이었다. 해방을 맞이한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잃어버린 주도권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를 얘기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 사회의 유산 속에 살고 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로 인해 여전히 지난날의 위기를 안고 살아간다. 국가와 민족은 그렇게 휩쓸려 오늘까지 왔다.

개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과 식민지 모국,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개인을 그리고 있다. 조선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어떠했든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전범으로 단죄되었다. 삶의 궤적이 어떠했는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식민지 모국에서 태어나 그나마 나은 조건이라 믿었던 선택이 그들을 전범으로 만들었다. 식민지 모국은 그들을 전범으로 만들었고, 조국은 친일 부역자로 기억한다. 그렇게 전범이라는 사실은 남고, ‘이라는 진실을 잊혀졌다. 과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는 사실만이 전부인가.

책은 조선인 BC급 전범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식민지인으로서 식민지 모국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제국군의 전진훈을 기초로 한 포로 경시 문화나 우월성에 대한 집착은 식민지 조선, 대만 사람들에게 스며 들었다. 식민지 국민으로서 최하층 대우를 받던 그들에게 전쟁포로라는 더 아래의 존재가 생겨난다면 과연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결국 전범으로 취급되어야 할 일본인들은 풀려났다. 포로 학대를 사실상 결정한 지휘부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지원도 받지 못한 위험한 상태에서 강요받은 현장 근무자들은 전범으로 재판 받았다.

여기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고향을 떠난 이역만리. 모든 곳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곳에서 조선인, 대만인이라는 이방인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을 테다. 게다가 본인들이 일본인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본인들 역시 억울하게 끌려온 피해자들일 뿐이다. 하지만 연합군에게 일본인과 일본식민지인은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일본인으로 적이자, 잔혹한 학대의 실행자이며, 단죄해야 할 죄인이었다. 조선인 BC급 전범은 필요할 때는 제국의 위대한 신민, 버려질 때는 사라진 나라, 조선인으로 취급받아야 했다.

모든 조선인이 선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모든 일본인이 악하지 않음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인이 선하지 않다고, 일본인 역시 피해자라고 해서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고 판단할 권리는 없다. 다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렸던 삶의 궤적은 온전히 판단 받을 기회는 있어야 한다. 졸속으로, 죽음의 순간까지 차별받았던, 식민지인들의 억울함은 공정한 평가위에 세워질 수 있다. 위해를 가했다면 처벌을 받고, 용서를 구하고, 받은 피해가 있다면 보상과 위로를 받아야 한다. 특히나 자신들의 운명과 관련 있는 중대한 문제는 항상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결정되었다(p.225)”면 더더욱 그렇다.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차별하고 처벌할 수는 없다.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강제 징용의 위협 속에서 더 나아 보이는 선택지를 강요받았다.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일을 했다면, 그 행위를 악으로만 규정하고 단죄만으로 끝을 낼 수 있을까. 전범과 친일부역자로 명명하면 끝일까. 분명히 그것을 사실일 수 있지만,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영웅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네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다. 시대의 한계, 시대의 악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그 앞에 좌절하고 만다. 그렇다고 시대의 악을, 개인의 악으로만 치환해서 처벌하는 게 합당할까.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전부 운명이라 생각하고.(김귀호씨 유언)” 떠날 수밖에 없는 걸까.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걸까. 여전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청거리는 현실 앞에서 과거의 미해결 과제를 돌이켜 본다. 운명의 처분 앞에 운명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함께 할 때 만들어질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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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죽음은 단지 포로수용소만이 책임질 문제는 아니었지만, 책임 문제는 현장에 집중되었다. 그 말단에 있던 조선인(지역에 따라서는 대만인) 군속에게 전쟁 책임이 집중되었다. p.12

BC급 전범자 중 유기형의 27%, 사형자의 11%가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을 포함한 포로수용소 관계자라고 한다. 일본 국내뿐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전역에 설치되었던 포로수용소의 전체상과 그 실정을 밝히지 않고서는, 그 끔찍한 전쟁의 실태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전범재판이 무엇을 심판했는지 그 재판의 정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17

천황의 전쟁 책임이 불문에 붙여진 것과 옛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에게 전쟁 책임이 과해졌다는 것은 전쟁범죄재판의 정당성에 큰 의문을 남긴다. 그 재판에서 심판되었던 전쟁범죄란 무엇이었던가? 전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어느 수준까지 전쟁 지도자들을 심판했고, 전쟁에 가담한 스스로를 질책했을까? 전후 조선인 전범 출신자들의 고독한 투쟁은 전쟁 책임에 무관심했던 일본인을 향한 고발이기도 했다. p.19

일본 군대에서 억압은 보다 낮은 사람, 약자를 향해 아래로 전가되어 간다. 조선인 군속은 그 억압 기구의 말단에 서 있었다. 그 밑에 황군이 목숨을 걸고 포획한 포로가 있었다. p.44

수많은 포로들의 죽음에 대해 패망 후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장교와 하사관, 조선인 군속들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몇 월 며칠까지 완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작업 현장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명령이 우선이었다. 쓰지도 못할 비행장과 철도를 만들어서 많은 포로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대본영의 작전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장수업 씨가 포로 몇 사람을 때렸을 수도 있다. 허나 작전상 오류로 많은 사람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본영의 책임에 비하면 장 씨의 잘못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장 씨는 창기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같은 재판을 받았던 유동조 씨와 정은석 씨도 목숨은 건졌지만, 전범으로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 명령을 내린 사람들의 전쟁 책임을 과연 철저히 평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p.83

전범재판에서는 얼굴이 팔린 사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큰 손해를 입었다. p.136

포로수용소는 당초부터 전진훈과 제네바 조야사이에서 태어난, 일본 군대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조직이었다. / 서러운존재였던 포로수용소가 실전 부대에게 걸핏하면 무시를 받았던 것도, ‘불필요한 것, 방해가 되는 것은 처분하라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일본 군대 문화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군에게 포로는 본래 처분해야 하는 존재였다. p.171

시대는 완전히 폐쇄된 상황이었다. 스스로 인생을 선택할 수 없었던 청년들이 다른 길보다 좀 낫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 감시원이었다. 이를 지원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시대가 너무나 험악했다. 물리적으로 강제되어 끌려간 셈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강제적으로 끌려간 것이다. ... 포로수용소의 감시원 모집은 지원이라는 이름표를 단 강제 징용이었다. p.200

조선인들은 설마 전범 문제에 관해서만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운명과 관련 있는 중대한 문제는 항상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결정되었다.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비단 이때 뿐 만이 아니었다. p.225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시점까지도 차별받는 자의 서러움이 뼈에 사무쳤다. 부려먹을 때는 천황 폐하의 아들이라며 치켜세우고 쓸모없자 전서구 이하의 존재로 멸시한다. p.259

우리들은 말이지, 식민지에서 태어나 식민지에서 자라나 식민지 교육을 받고 노예 같은 취급을 당하면서 살아 왔어. 그러니까 네덜란드 사람이 인도네시아 사람을, 영국 사람이 인도 사람과 싱가포르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 영국 사람은 신사적이라든가 기품 있다고 말하는 놈이 있는데, 실제로 영국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신사가 아냐. 아시아인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 있는 거야.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일을 하지 않으니까 수프를 먹을 때 이렇게 먹어야 한다, 저렇게 먹어야 한다 따지는 거지. 매일 생활에 쫓겨 바쁘게 일하는 인간은 수프를 어떻게 먹든 상관없어! 인간이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게 신사인가?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고생(p.263)하고 똑같이 즐기면서 사회를 만들어 가야 인간인 건지. 나는 그 점을 지적하고 싶소! - 유동조 p.264

개인적으로 때렸느냐 때리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식량 사정이 나쁘고, 의약품은 부조하며,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억류소에 근무했다는 사실, 거기에다 일본군의 관습이 되어 버린 구타를 가한 점이 전쟁범죄에 해당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p.273

포로 학대에 연합국 측이 해 온 항의에 대해 학대 행위를 하는 것은 조선인이며, 일본인이 아니라고 회답한 일본군. 조선인 감시원에게 처음부터 포로 학대의 책임 추궁에 대한 방패막이로서의 역할을 떠맡길 요량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p.285

항명권이 없는 일본 군대에서 명령의 실행자로서 전범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A급의 조기 석방에 격한 분노를 느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레드 퍼지(Red Purge, 공산주의자 축출 운동)가 시작되고 경찰예비대가 발족하자, 전쟁 지도자와 협력자들에게 공직 추방 해제를 차례로 발표하였다. p.302

(평화) 조약 발효와 동시에 제11조를 실시하기 위한 법률 <평화조약 11조에 의한 형 집행 및 사면 등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였다. 일반적으로 법률 제103호로 불린다. 부칙을 포함하여 전문 40조로 이루어진 이 법률 맨 밑에는 천황 이름과 함께 도장이 찍혀 있다.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 정부가 전범의 형 집행(p.317)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천황의 전쟁 책임이 불문에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천황의 이름으로 침략 전쟁에 끌려간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이 이번에는 천황의 이름으로 침략 전쟁의 책임을 떠안았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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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의 교환-티모시 메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과정 | Memento 2020-12-2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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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저/권용철 역
사계절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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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의 업적인 저평가 되어 있다. 그들은 단순한 파괴자가 아닌 시대의 전환자였다. 우리는 그들의 유산 속에 살고 있고, 특히나 한반도는 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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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복자로 유명한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그는 망치와 모루 전략을 통해 강대국을 무너뜨리고, 유럽은 넘어 세계제국으로 성장했다. 비록 사후에 제국은 분열되어 단명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헬레니즘 문화로 이어져 간다라 양식 등 오늘날 불상의 기원이 되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예술을 사랑하고 여러 신화와 일화를 남겨서일까. 정복자의 무서운 이미지보다는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해낸 선구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서양의 위대한 정복자여서 그런걸까. 여기서도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하는 건 아닐까.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정복자인 칭기스칸에 대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강력하고 위대했던 몽골제국은 침략과 파괴, 나아가 문화적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알렉산더는 그 사후에 국가가 분열되었음에도 헬레니즘 문화를 촉발했다지만 몽골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칭기스의 교환>은 여기에 대한 진지한 연구 결과를 안내한다. 진정한 세계화의 시작은 몽골제국에서부터 시작한지도 모른다. 몽골의 정복은 콜럼버스의 이동을 촉발시켰다. 결국 직접적인지는 않지만 칭기스 칸의 유산들이 진정한 세계사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칭기스의 교환은 이러한 의미에서 콜럼버스의 교환이라는 의미의 원초적인 표현인 셈이다.

비교적 소수인 몽골족으로서 대제국을 통치하려면 조직력을 강화하고 외부의 유능한 인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했을 듯 하다.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은 땅보다는 사람을 조직했다.” 대표적인 예로 망간(천호)(p.393)”가 있다. 천명단위로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으로 인력을 관리함으로써 효율적을 극대화 했다. 또한 잘 알려진대로 색목인이라 부르는 아랍과 유럽인까지 등용해서 제국을 안정화 시켰다. 종교적 포용성 역시 유명하다. 자신을 개종시키러 온 수도사에게 뭉케 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이 여러 개의 손가락을 주신 것처럼 인류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다”(p.468)“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인식은 몽골제국이 가졌던 유연성을 짐작케 한다. 정복한 지역에서 좋은 제도가 있다면 즉시 수용해서 활용하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포용성을 유지하는데는 교역이 중요했다. 유목민 입장에서는 전쟁과 교역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역은 전쟁을 수반하는데, 군사적 행동이 교역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p.260)” 했다. 하지만 몽골제국은 이를 변화시켰다. 몽골족은 교역이 자기들을 찾아오게 하는 시나리오를 창출했다.(p.262)” “ 교역을 촉진하면서 공정한 가격을 요구했다.” 몽골제국은 수 많은 국가 간 장애물을 일소했고, 이를 통해 안전 문제가 개선되고 교역로의 다른 끝에도 대량의 물건과 사치품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 장거리에 걸친 대량 교역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업이 되었다.(p.268)” 카라코룸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수 많은 물자와 더불어 사람들까지 넘쳐나게 되었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 끼친 몽골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분명하게 남아있다.(p.371)” 예를 들면 몽골의 유산이 강할수록 여성의 지위가 높다. 칭기스 가문의 공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유하고 관리에 관여했다.(p.564)”던 영향이 아닐까. 또한 예술 및 이탈리아 상인들이 몽골과의 교역에서 얻은 부를 통해 몽골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친 것(p.580)” 역시 무시할 수 없을 테다. 더욱이 몽골의 수차례 침략을 받았던 한반도는 그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다. 한국사람의 필수품인(?) 소주나 저마다 가지고 있는 몽고반점은 명확한 그 증거다. 어쩌면 몽골의 침략은 한반도가 은자의 왕국으로 변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몽골의 지배 때문에 명이 외국을 꺼리게 된 것처럼, 동시대의 한반도 사람들도 더욱 고립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p.226)” 이처럼 몽골제국의 영향력아래에 있던 한반도의 입장에서 세계사적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도 새로운 흥밋거리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몽골이 강대국 사이에서 비교적 약소국의 위치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느낌도 있다. 확실한 점은 칭기스칸과 그들은 동시대의 다른 어떤 조직보다 혁신적이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군사적인 이점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를 지탱한 것은 군사적 능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국의 진정한 강점은 포용성과 교역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들의 업적은 단순히 파괴와 침략의 대명사, 자연재해나 신의 징벌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승자와 패자의 역사를 떠나, 공과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평가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생각, 방향이 필요하다. 그러한 탐험을 떠나는 이러한 책들이 흥미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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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연구에서 위대한 인물이라는 개념을 고려하는 것은 최근 경향과 거리가 있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남성 혹은 여성이 때때로 나타나 세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최소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p.47)한 길로 역사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개개인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을 초월하는 비전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p.48

몽골족이 세계주의를 선도했다고 언급도지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p.48)이 필요하다. 실제로 몽골족이 그러한 조건들을 마련했고 촉진자 역할을 수행했지만, ‘칭기스의 교환의 대부분은 몽골족에 복속한 사람들과 외부에 있던 사람들의 노력으로 생겨난 결과였다. p.49

어쩌면 몽골의 침략은 한반도가 은자의 왕국으로 변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몽골의 지배 때문에 명이 외국을 꺼리게 된 것처럼, 동시대의 한반도 사람들도 더욱 고립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p.226

제국은 사라졌고 다양한 범주의 계승자들이 드나들었지만 몽골 제국의 영향력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p.231

몽골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로 파괴의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있다. 여러 세기가 흘렀지만 몽골은 자신들이 마주친, 특히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일에 열중했던 통제 불가능한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p.243) ... 20세기의 대중매체에 이러한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며, 21세기까지도 지속될 것이고 그 대부분은 야만인’(정주 문화에 살지 않는 모든 사람), 오리엔탈리즘, 황화라는 개념, 그리고 여기에 당연히 몽골인의 행동까지 포함한 서양과 동양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관계가 있다. p.245

오늘날 몽골에서는 누구도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의 유산을 피해갈 수 없다. 몽골인에게 그는 국가의 시조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몽골의 역사에서 가장 확실하게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p.248

몽골 제국이 교역 증진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동해까지 뻗은 하나의 통합된 제국은 안전한 교역로를 제공했고, 상인들이 다양한 유라시아 교역로를 지나갈 때 납부해야 했던 통행료와 세금을 줄여주었다. 실제로 보석이 가득한 황금 항아리를 운반하는 처녀도 제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위협당하는 일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약간 과장된 말이겠지만 유라시아 교역로가 이전보다 더 안전해졌고 전통적인 실크로드뿐 아니라 (p.258) 새로운 교역로 또한 번영을 누렸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몽골족이 이를 어떻게 달성했는가 하는 점이다. p.259

유목민 입장에서는 전쟁과 교역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역은 전쟁을 수반하는데, 군사적 행동이 교역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p.260

유목민과 정주민의 교역 관계에서 상품을 획득하는 세 가지 기본 범주가 있었다. 첫 번째 범주는 유목민들이 중국과 은밀하게 교역을 행하는 것으로, 이는 곧 제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유목민은 이 방법을 사용했다. 두 번째 범주는 공식적인 채널을 통하는 것으로, 유모민들이 황제의 권위에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복종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승인받은 장소에서 교역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형태는 유목민 지도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조공을 바치고 얻은 선물을 지도자가 직접 입수하면 이를 취하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범주는 유목민들이 경계지대를 침범하여 상품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유목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갔지만, 위험한 방식이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p.260). p.261

몽골 제국의 등장은 교역로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했던 국가들을 절멸시키고, 사고방식에 변화를 일으켜 유목민과 정주민의 전통적인 교역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p.261) ... 몽골족은 교역이 자기들을 찾아오게 하는 시나리오를 창출했다. p.262

전쟁은 칭기스 칸의 기본적인 교역 정책을 보여주었다. 그는 교역을 촉진하면서 공정한 가격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과 정주민 사이의 오래된 교역 관습을 뒤집어놓았다. (p.267) ... 안전 문제가 개선되고 교역로의 다른 끝에도 대량의 물건과 사치품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올슨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러한 상황에서는 장거리에 걸친 대량 교역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업이 되었다.” p.268

우구데이의 행동이 어리석고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징기스 칸과는 아주 다르다.) 여기에는 영리한 전략이 숨어 있다. 우구데이는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그의 과도한 소비는 카라코룸에 국제 교역을 가져왔다. 가져가는 물건이 무엇이든 운송비를 결제한 이후 그 가치의 2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앗을 때, 어떤 상인이 카라코룸으로 가는 모험을 마다하겠는가? 우구데이의 영리함은 제국 안에 교역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카라코룸을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p.282

몽골이 무역을 중시하여 세계사에 기여한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족은 무역을 장려하고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이기는 해도 새로운 생산품과 상품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했다. p.305

칭기스 칸의 등장은 엄격한 규율과 새로운 전략의 도입, 군사학교의 설립, 십전제 조직의 채택을 통해 초원의 전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p.308

많은 사람들에게 몽골족은 그저 또 하나의 다른 군대(p.321)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의 힘이었고, 신이 보낸 징벌이었으며, 세상의 종말을 먼저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p.322

십자군전쟁 시기에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다른 문화 사이의 교류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 이것이 몽골족의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은 또 다른 변수가 추가되어 교류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모든 교류가 그러하듯이 일방적인 교류는 드물었다. 이슬람과 기독교 사회는 몽골족에게서 사상을 전달받기도 했고 변화를 위한 자극을 받기도 했다. 몽골 제국도 레반트로부터 새로운 군사적 지식을 비롯해 여러 물자를 획득했다. p.322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 끼친 몽골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분명하게 남아있다. p.371

몽골 행정의 유동적인 특성이 제국의 분열을 촉진했다. 오르도는 각자의 행정 기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권위가 약해(p.386)진 동안에는 더욱 큰 자치권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p.387

몽골 통치 체계의 상위에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오르도와 인주 제도였다. 오르도는 칸의 궁정 막사였다. ... 각 오르도는 집안인을 돌보는 사람들을 소유했다. 노예, 하인, 호위병은 물론이고 인제(이는 몽골어 발음) 혹은 인주(이는 페르시아어 발음)의 일부를 구성하는 행정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p.386

중앙 행정의 궁국적 원천은 케식(칸의 친위대와 집안의 하인들)으로부터 나왔다. 이는 전근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군사 지도자의 동료들이 행정 관청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다. p.387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은 땅보다는 사람을 조직했다. 물론 땅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일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몽골이 조직의 도구로 처음 사용한 것은 망간(천호)이었다. p.393

정복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칸국, 오르도, 군사 구역, 문관 행정구역으로 나눈 것처럼, 제국의 재정 자원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칸들은 정주지대를 재정 행정 구역으로 점차 분할 했다. 구육의 통치 시기에 제국은 북중국, 투르키스탄, 후라산-마잔다란, 이렇게 3개의 조세 징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p.404

본질적으로 몽골족은 자기 혁신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정복한 사람들의 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고, 몽골의 계승자들은 선택적으로 제도를 모방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면은 몽골 제국의 지배 영역이었던 곳들에서 수 세기 동안 대부분 유지되었다. p.410

몽골 제국의 종교 정책은 전근대, 아마 현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관용적이었다. p.411

몽골족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관습과 의례든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p.413

몽골은 제국 전반에 걸쳐 종교 공동체와 관계를 맺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중요한 이유는 전략적이면서도 실용적이었는데, 종교 지도자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 피정복민들의 적개심과 반란의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p.413

몽골족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했을 뿐 교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정책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종교를 숭배할 자유를 가진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만약 어떤 종교가 제국의 안정성이나 몽골의 패권을 위협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어떤 종교든 전체 세계에 대한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p.415) ... 이는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의 등장, 그리고 종교에 기초한 정복 이데올로기인 텡게리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칭기스 칸과 그의 계승자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임을 하늘(텡게리)이 승인해준 것이 되었다. 칭기스 칸과 후손들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하늘의 의지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 텡게리즘은 종교적 이데올리기이기는 했지만 몽골족을 위한 것이었고, 누군가가 이것으로 개종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국에 복속하고 몽골족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 텡게리즘은 다른 종교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었다. p.416

몽골 제국이 와해되기 전까지 몽골족이 세계 종교로서의 개종을 거부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은 하늘로부터 세계를 정복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믿었다. 텡게리즘의 개념은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신, 무슬림의 알라, 하늘 혹은 신성한 영혼 등 다른 모든 개념은 텡게리로 교묘하게 흡수될 수 있었다. 신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대한 설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뭉케 칸이 그러나 신이 여러 개의 손가락을 주신 것처럼 인류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다라고 말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 이것이 두 번째 논점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같은 신을 숭배했기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누군가를 박해할 이유가(p.468) 없었다. 종교적 관용이 드물었던 시기에 몽골이 모든 종교에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셋째, 이슬람교와 기독교로는 굳이 개종할 이유가 없었다. 몽골 군대는 자신들에게 적대하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러한 종교들이 전략적인 이점을 제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몽골을 개종시키는 데에 실패한 이유는 문화적인 문제였다. 이는 이슬람교와도 관련된 부분인데, 바로 알코올을 금지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p.469

종교는 몽골의 통합성이 줄어든 이후에야 각각의 칸이 자신의 적수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할 때 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p.471) ... 초기의 개종은 대부분 신앙심이 동반되었다기보다는 전략적이면서 정치적인 개종이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은 역효과를 일으켰다. 세계 종교로 개종하자 몽골은 자신들이 정복한 복속민들과 매우 유사해졌고, 통치자는 피지배자처럼 되었으며, 이전의 몽골 제국 중 많은 곳에서 동화가 일어났다. p.472

몽골의 독특한 정체성은 텡게리즘의 출현, 예케 몽골 울루스의 창설, 칭기스 칸의 야사 활용, 몽골 제국의 군사적 지배와 함께 등장했다. 다른 종교를 채택하는 것은 적어도 몽골족 관점에서는 종종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래서 외래의종교들은 개종자를 별로 얻지 못했다. ... 이슬람교든 불교든 몽골이 개종한 이유는 그 종교가 샤머니즘과 유사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의 특정한 형태가 포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종교 이외의 다른 문화적 요소들까지 허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474) ... 이슬람교와 불교 모두 상업 활동을 후원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p.475

몽골족은 잔인하다는 명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공포와 선전의 가치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잔인하다는 명성이 그들의 진군보다 먼저 퍼져 나가는 것을 선호했다. p.511

몽골은 또한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로 더 많은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여 그들의 시대와 미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511

몽골은 정치에서, 그리고 예술과 과학 및 종교 건축의 후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에도 영향을 끼쳤다. ... 국가를 경영하고 쿠릴타이에 참여하는 몽골 여성들의 역할을 많은 여행자들을 놀라게 했다. ... 칭기스 가문의 공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유하고 관리에 관여했다. 카툰(왕비)들은 남편에게(p.564) 공개적으로 조언을 했지만,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게서는 통치의 역할을 맡은 여성이 공개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하렘에서 조언을 했다. 몽골 제국이 몰락하면서 여성의 정치와 정부에 관여하는 일은 분명 줄어들었지만, 몽골 제국이 지배했던 여러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이 유산이 지속되었다. 실제로 몽골이 물려준 유산이 강고할수록 여성들은 더욱 큰 자유를 누렸다. p.565

원 제국 시기 중국 지식인들과의 지속적인 접촉 및 몽골 정부의 후원으로 신유학은 고려와 여러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원 제국 시기에 정부는 외국인들도 중국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고려인들이 공부를 해서 중국에 가서 시험을 치렀다. 일부는 원의 수도인 대도에 남기도 했지만, 고려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 이를 통해 많은 고려 지식인들이 정부, 사회, 심지어 개인적인 행동까지 재검토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이 여운이 오늘날에도 느껴지는데, 이것이 고려 사회를 변화시킨 혁명을 야기하여 21세기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화적 규범, 윤리적 기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념의 기초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p.572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낸 것이 몽골의 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술 및 이탈리아 상인들이 몽골과의 교역에서 얻은 부를 통해 몽골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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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바트 어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 | Memento 2020-12-1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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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

바트 어만 저/허형은 역
갈라파고스 | 2020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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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전도성향과 배타성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관용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보고, 기독교가 남긴 상처에 대해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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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신의 권위와 권능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종교는 늘 위기였다. 신과 종교는 박해 받는 근거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박해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사랑과 포용을 주장하는 종교임에도 사람을 통해, 사람에 의해 전파되는 신의 말씀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종교는 전 지구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세계 3대 종교로 통칭되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가 그렇다. 이들 종교 중에서 기독교는 자신들의 경전에 나온 말씀을 스스로 증명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만, 십수명의 신도에서 세계 3대 종교로 성장한 기독교에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듯하다.

버트 어만의 <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는 기독교가 중세를 거쳐 전 세계 1/3을 지배할 수 있었던 시작에 대해 분석한다. 다양한 자료와 다른 전문가들의 주장을 논박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요점은 기독교가 역사의 승자가 되었던 데는 신의 권능이나 기적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비과학적인 부분에 대한 논쟁은 거부한 채 과거의 기록과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기독교의 성장을 분석한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9)”고 한 말에 대해 저자는(역사학자들은) 복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적에 대해서 역사학자가 명확하고 단호하며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말은,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어왔다는 정도다.(p.154)”라며 명확히 선을 긋는다.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 사상은 별세계의 이야기임은 저자가 누누이 말한다. 당시 로마 사회는 다신교 사회이며, 종교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이 포용적인 사회였다. 다신교 사상은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현재 우리가 일신교 사상에 익숙하듯, 그들은 다신교 사상에 익숙했다. 기독교는 여기에 역행하는 종교다. 배타적이다. 게다가 종교는 통치 체제와 사회 질서, 매일의 삶과 통합되고 촘촘히 엮인, 삶의 일부였다. (p.220)” “신들이 제국을, 도시를, 가족을, 그리고 개개인을 떠받쳐주었다. (p.221)” 그런데 어떻게 이런 토양에서 배타적인 기독교가 주도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 걸까.

저자는 전도 성향과 배타성의 조합은 결국 기독교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작용(p.267)”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일신주의다. 하나님외에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기존의 컬트 종교(다신교주의, 이교)는 각자의 신들이 공존했지만, 기독교는 공존하지 않는다. 개종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전도를 통해 개종자가 늘어날수록 기독교도는 늘어나지만, 이교도의 수는 점차 줄어 든다. 기독교도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장악하는 데는 신의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다.(p.373~374)” 꾸준히 자신들의 성서와 교리에 따라 강권하기만 하면 되었다. 신도가 가족, 친구, 친척, 이웃 등 한 영혼만 구원해도 충분했다. 기독교는 그렇게 로마를 지배했다. 서양을 지배했고, 서양은 전지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양 세계의 승리는 결국 기독교 문화의 승리다. 기독교 문화는 전지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영향력 아래에 꽃피운 현대문명은 기독교의 배타성이 남긴 상처를 공유한다. 저자의 말대로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면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방대하고 풍성한 종교적 표현의 다양성(p,608)” 즉 관용이다. 우리 역시 근대화, 합리성이라는 명목하에 우리의 전통은 미신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잊을 것을 강요 받았다. 때때로 기독교는 여전히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음 역시 마찬가지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보기에 달렸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들의 다양성과 관용은 영원히 기억하지 못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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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가 보기에 현대의 배운 자들은 더 이상 종교가 주는 위안을, 전능하고 사랑 넘치는 신의 존재와 길 잃은 자들을 구하고자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 주는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 기독교 신앙이 물러가고 생긴 빈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혼란스럽고 질서 없는 공허함뿐이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다른 사람들, 생의 불확실과 고통과 불안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존재로 간신히 일부만 메워질 뿐이다. p.8

다른 어떤 위대한 종교도 로마 제국을 장악하고 서구의 지배적 종교가 되지 못했다. 지배적인 종교가 된 것은 기독교였고, 일단 그렇게 된 다음에도 지배 이데올로기 대신 사랑과 봉사 이데올로기를 설파한 것도 기독교였다. 이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구 세계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p.16

모든 승리는 패배이기도 하며, 패한 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이긴 자들이 느끼는 환희와 맞먹는다. p.28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고귀하신 황제(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핍박받은 궁핍한 노동자(사도 바울), 두 사람이다. 이들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개종자들이다. 하지만 후자가 없었더라면 이 역사는 결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p.87

넓은 의미로 말해서, 같은 종교를 믿는 무리를 향한 종교적 폭력이 가장 끔찍한 법이다. p.98

예수는 구세주는 구세주이되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구세주였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림으로써, 그의 죽음이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훨씬 큰 구원을 가져다줬음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외세의 탄압에 시달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해주려고 온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초창기의 기독교도들이 주장한 메시지다. p.107

어떤 용어를 사용하건 바울이 한 경험은 고도의 자각을 불러왔다는 면에서 더없이 경이로운, 아주 획기적인 변화였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울에게 이는 조금 남다른 직업 선택의 수준이 아니었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바울의 사명은 먼 옛날 선지자들이 다가올 하나님의 왕국을 고대하며 예언한 것이었다. 이제 바울은 세상의 역사를 예정된 정점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은 셈이었다. p.125

역사 연구의 원칙과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도구의 성질을 봤을 때, 어떤 역사학자라도 결코 위에 나열한 사건들이 어쩌면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믿을 테고,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그 논쟁에 끼어들 수 없다.(신학자라면 시도는 해볼 수 있다.) 역사학자가 명확하고 단호하며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말은,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어왔다는 정도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기적을 직접 봐서가 아니라 기적에 대해 얘기를 듣고서 믿었다. p.154

바울은 그저 기독교사 초기 몇 년, 혹은 기원 후 첫 번째 세기, 혹은 초대 교회의 역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기독교 개종자라는 주장 말이다. 심지어 바울이 없었으면 우리가 아는 기독교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수(p.156) 있다. p.157

() 그리고 신을 숭배하기 위해 행하는 정해진 의식들에 관하여 다른 것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일단의 신학적 관점들이 반영된, 통일성을 갖는 일련의 사고방식과 신념, 관행(p.168)체계를 종교라 정의한다면, 이른바 이교 종교라 하는 것들 중 어느 것도 그 범주에 들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진 종교적 관습의 총체를 하나의 통일된 객체로 묶어 종교라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p.167

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정리하는 데 신화가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의 종교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보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전통적인 신화들은 대부분의 고대 종교 관습에서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위대한 문학작품 속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그냥 대단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졌다.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은 그런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조했다. 신화는 과거에 일어난 일의 기록이 아니라 유쾌하고 항상 재미를 주는 이야기, 잘해봐야 아주 교훈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신화는 상당수의 고대 문학이나 연극, 미술 작품의 바탕이 됐지만 유(p.170)대교 성경이나 신약의 복음서처럼 고대 종교의 신학적 기본이 되지는 않았다. p.171

이교 종교들은 거의 전적으로 재의를 중심으로 한 종교, 즉 신도들의 행위, 신들에게 응당 바칠 것을 바치는 행위가 가장 중요한 종교였다. 신들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를 머릿속에서 믿는 대신, 경외와 헌신을 겉으로 드러내는 의식 행위가 주를 이루는 종교였다. p.171

다신주의의 이런 개방성 때문에, 사실상 개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신을 숭배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됐고, 지금까지 해온 숭배를 그만둬야 한다거나 새로운 신에게만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기대도 없었다. 유대교의 세계 밖에서는, 종교적 배타성(오직 하나의 신만 섬겨야 한다는 신조)은 사실상 아무도 모르는 개념이었다. p.175

모든 이도교는 여러 명의 신을 섬겼고, 그 신들은 가진 권능이 절대적이건 상대적이건 각자의 위대함으로 숭앙받았다. p.178

컬트cult’라는 단어 자체가 신들에게의 보살핌을 뜻하는 라틴어구 쿨루스 데오룸 cultus deorum에서 왔다. 컬트 의식이란 신을 경외해서 혹은 신을 숭상하려고 행하는 모든 제식화된 관행이다. 이교 종교들은 그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교리와 윤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p.179

대략적으로 이교 종교에서 세 종류의 활동이 있었다. 제물 희생 의식, 기도 의식 그리고 점치였다. p.180

고대 로마인들도 그 비슷한, 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의미심장한 축약문을 사용했다. ‘n.f.f.n.s.n.c.’ 풀어쓰면 non fui; fui; non sum; non curo인데 나는 없다가, 있었고, 이제 없으며,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미는 분명하다. 태어나(p.184)기 전에는 존재가 없었다.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존재한다. 그러다 죽음 후에는 다시 존재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 사람은 슬퍼할 수조차 없다. 그 대신 두려워할 것도 없다. 태어나기 전에도 괴로워하지 않았듯, 죽은 뒤에도 괴로워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다. p.185

신의 분노는 거의 항상 인간이 책임을 등한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들(아니면 적어도 그중 한 명)이 제대로 혹은 충분히 경외 받거나 숭배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핵심 논리였다. 이 신앙심 없는 무리가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한 대가로 모두가 지옥을 맛보게 되리라고 본 것이다. p.186

모라 제국이 몹시 관용적이었지만 무한히 그러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만약 어떤 종교 의식이 물리적 해를 끼치거나 전염성 강한 사회적 문젯거리를 만들어내는 등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판단 될 경우 당국은 제재에 나서기도 했다. p.193

현대의 기준으로 아무리 고대 로마의 종교가 놀랍도록 다양하고 관용적이었다 해도 아무 제한도 없이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계선은 분명 있었다. 그 선은 용납 가능한 사회 규범으로 정해졌다. 타락과 범죄행위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극단의 처벌이 따를 수 있었다. p.196

비교적 구시대적 시각은 마법이 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겸허하게 탄원하는 것이라(p.197)는 식이었다. 또한 마법은 더움의 힘들을 조종하는 반면 종교는 빛의 힘에 순종한다고 봤다. 그러나 20세기 하반기에 학자들은 마법적이라고 할 만한 행위와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행위 사이에 명확하고 확정적인 선을 긋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법도 많은 경우 종교와 똑같은 기법을 사용하며, 종교와 똑같은 목적을 추구한다. p.198

종교는 국가의 곳곳에 스며 있었고, 삶의 구석구석에도 스며 있었다. 사실상 어디에나 있는 존재였다. p.204

종교는 통치 체제와 사회 질서, 매일의 삶과 통합되고 촘촘히 엮인, 삶의 일부였다. p.220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방식에 따라 신들을 올바로 숭배하는 것이 국가의 순조로운 운영에, 그리고 그 국가에서 사는 백성들의 성공과 번영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제국 전역에 걸쳐 암묵적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신들이 제국을, 도시를, 가족을, 그리고 개개인을 떠받쳐주었다. p.221

그런 환경에서 기독교가 부상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 연구자들이 해답을 찾으려 애쓴 주요 의문점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그토록 색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싹트고, 자라고, 번성할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은 국가와 도시와 가정이 섬기는 신들에 반대했다. 그들은 다수의 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황제가 신이라는 주장도 거부했다. 자기들과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는 숭배의 타당성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신들이 인간에게 이득을 준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신들이 인간이 아는 세계의 사실상 모두를 속인 사탄이라고 믿었다. p.222

초기 기독교에게 승인받았다고 봐도 좋을 형태의 기독교에서, 개종은 이것도 저곳도 다가 아닌 이것 아니면 저것의 종교였다. 기독교도(적어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부류의 기독교도)들은 자기네 종교가 추가적인 종교가 아니라 제한적 종교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기독교의 전파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건 바로 이 차이였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지론을 받아들였고, 이는 결국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지배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p.232

새로운 종교적 신념과 제의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 잠재적 개종자라면 신의 영역에 대해, 그리고 신과 어떻게 교류할 것인지에 대해 이미 여러 가지 추정을 하고 있을 텐데, 새 종교는 그런 추정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추지 않고서는 상대를 개종시킬 가망이 없다. 만약 기독교가 철저히 생소한 종교였다면 아무도 그것을 개념화할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매력이 없는 종교 정도가 아니라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로 비쳤을 것이다. 이교도를 개종시키기 위해 기독교도들은 그들과 공통의 기반을 다져야 했다. 나아가 유의미한 접촉이 이루어진 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보여줘야 했다. p.233

로마 제국에서 점점 커진 택일신주의의 인기가 사실 신은 하나뿐이며 그분만 숭배해야 한다는 기독교 선언의 길을 닦아줬다고 본다. p.236

기독교가 널리 퍼진 한 가지 이유는 기독교가 이런 식의 활동이 이루어진 유일한 종교여서였다. 이 말은 곧 다른 종교들은 전도를 하지 않았고 배타적이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p.255) ... 기독교는 성장하는 동시에 이교주의를 말살해갔다. p.256

기독교는 달랐다. 기독교의 신은 보통 숭배할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선택되지 않았다. 이 경우 선택은 배타적이었다. 하나를 특별히 택하는 것은 다른 모두를 저버리는 선택이었다. 농어를 먹기로 했으면 농어만 먹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이교도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딱 그만큼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p.257

전도 성향과 배타성의 조합은 결국 기독교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p.267

기독교는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다른 종교들을 파괴했고 로마 제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종교였다. p.270

기독교를 로마 제국을 통틀어 모든 이교 종교와 구분 지어준 또 다른 특징은, 그전까지는 항상 종교와 별개로 치부되었던 삶의 모든 면을 아울러 지배했다는 것이다. ... 이교의 종교들의 경우 숭배 의식 자체가 곧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에는 ...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관계되는 종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교였다는 말이다. / 그 결과 기독교도들은 자기네 종교를 하나의 응집된 시스템으로 개념화하는 바람에 기독교 밖에 있는 모든 것을 기독교와 경쟁하는 응집된 시스템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p.271

기독교도들이 전통적인 이교 종교를 따른 이들과 구분되는 부분은 남들을 자기네 하나님을 섬기도록 개종시키려는 의지와, 적어도 그들 중 일부에 한해서는 그리고자(p.277) 하는 열정, 일단 개종했으면 그전에 숭배하던 신들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는 고집, 또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에는 종교 의식 말고도 윤리적 행동과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에 대한 교리에 따른 올바른 이해까지 포함된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이교도에게 최초로 알려진 선교사인 사도 바울이 내세운 형태의 기독교였다. p.278

역사학자라면 늘 자신의 명백한 편향성을 인식해야 하는 법이다. p.294

개종자가 제 가족과 친구와 이웃, 지인들에게 자신이 믿게 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식으로, 다양한 개인 인간관계망 안에서 구전으로 기독교를 전파했다. 정작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기독교도들이 내세운 새로운 교리도, 기독교의 숭배 의식에 관한 소문도, 심지어 기독교 공동체에서 누릴 수 있다는 수많은 미덕도 아니었다. 효력을 발휘한 건 기독교의 메시지를 실증해준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p.338) 자신의 범상치 않은 생애와 선교 활동에서는 물론 그의 사도들, 또 그 제자들의 활동에서까지, 실제적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은 분명 역사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기적적인 행위를 선보여 그것을 증명했다. / 물론 이렇게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신앙의 기적을 실제로 목격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꼭 목격할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건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그리고 어쩌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믿음뿐이었다. 그들은 전문적인 웅변가가 아니었고, 그저 자신이 듣고 믿게 된 것을 전달한 평범한 이들이었다. 이야기를 반복할수록, 그것도 확신을 가지고 반복할수록 듣는 이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p.339

각각의 기독교도가 한 번에 가족의 일원 한 명, 친구 한 명, 이웃 한 명만 전도하면 충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성과는 축적되었다. 누구든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이교주의를 완전히 떠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p.340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장악하는 데는 신의 기적이 필요하(p.373)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기적이었다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역사가는 그 주장의 진위를 가릴 길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승리하는 데는 초자연적 힘의 개입이 굳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가 앞의 장들에서 설명한 이유들로 점점 개종하면서, 그저 꾸준한 속도로 성장하기만 하면 됐을 것이다. p.374

기독교가 불법적인 종교여서 정부 기관에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고 신도 수천 명을 순교시켜 결국 교회가 로마 카타콤(지하 묘지)으로 숨어들기에 이르렀다는 관념은 전부 객관적 역사라기보다는 할리우드의 영화적 상상에 더 가깝다. p.379

기독교도들이 (어이없게도) 자기네 신 말고 다른 어떤 신도 숭배하지 않으려 한 것이 박해의 이유였다. p.419

영생이 걸린 경주에 자의적으로 뛰어드는 것과 그것을 승인 권한으로 강제하는 것은 다르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 p.475

종교적 신념이 사법적 형벌을 특히 더 과격하고,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램지 맥멀런 p.505

맥멀런은 우리도 이미 살펴본 기독교와 전통 이교 종교들 간의 핵심적 차이를 한 가지를 더불어 강조한다. 바로 종교적 윤리의 구심성이다. 이교도가 일반적으로 기독교도보다 딱히 더 윤리적이거나 덜 윤리적이지 않았던 건 맞다. 하지만 이교 집단에서 윤리적 가르침은 존속살해 같은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종교가 아닌 철학의 영역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이교 컬트들은 일상의 바른 행동이나 나쁜 행실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달랐다. p.505

온 세상이 이교이기를 멈추고 기독교가 된 단 한 순간, 이를테면 하나의 전환점 같은 건 없었다. 로마 제국의 주민 대부분은 자신이 중대한 변화의 한가운데 있다든가 주변에서 생사를(p.520) 가르는 싸움(이교주의의 혼을 끝장내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주민 대부분은 4세기 말까지 이교도로 살아갔다. 인구의 대다수에게는 신학적 질문과 종교적 헌신의 문제가 그렇게 압도적으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까지 쭉 거슬러 올라가 권력 집단 사이에서는 무척 중요했을지라도 말이다. p.521

배타성은 오직 하나의 특정한 종교적 신념과 숭배 의식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택한 길만이 진실에 닿는 유일한 길이라고 우기지 않으면서 배타적 관점과 믿음을 취해왔다. 고대 로마에서도 유대인 대부분은 자신들 일에 한해서는 배타적인 동시에 자기네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p.546

불관용은 다른 문제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믿으뫄 숭배 관행은 무조건 잘못되었거나 위험한 것, 혹은 둘 다로 규정하는 원칙적 거부다. 언뜻 생각하면 불관용이 엄격한 배타성의 유독 신랄한 파생가지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다. 단순히 로마의 이교주의 같은 비교적 포용적인 전통을 따르는 신자들도 때로는 불관용적이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p,546

기독교도들이 신성시하는 경전은 그들에게 다른 모든 종교 전통과 풍습에 반대하라고,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비신도들을 개종시키라고 명하고 있었다. 일부 기독교도는 이런 지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명확했다. p,568

또 다른 기독교의 고유한 특성도 불관용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참된 진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다. p,568

영생을 얻기 위한 올바른 믿음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까닭에, 이 배타주의 종교에 잠재돼 있던 불관용성은 일찌감치 맹목적인 열정으로 불타올라, 광범위하지만 분명 일반적이지 않은 불관용 정신으로 발전했다. 잘못된 믿음은 너무나 위험해서 참아줄 수 없다는 태도였다. p,569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역사가 목격(p,588)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제도가 될 터였다. p,589

기독교의 승리에서 소실된 것 한 가지는, 한때 이교 세계 어디에서든 발견되었던 방대하고 풍성한 종교적 표현의 다양성이었다. p,608

관용은 권장해야 하는 것이었다. 종교의 자유는 포용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조명해봤을 때 고대 이교주의의 가장 위대한 면 중 하나는 기꺼이 다양성을 수용하고 나아가 그것을 최대한 누리겠다는, 광범위하게 공유된 태도였다. 그것이 기독교가 승리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 그런데 그와 함께 종교와 윤리, 철학, 신화를 인간의 사고와 삶이라는 현실의 영역과 분리해서 취급하던 세상도 변해버렸다. 기독교가 승리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인생 전체를 몇 마디 말로 압축해버리는, 종교에 관한 전체주의화담론이 등장했다. 그 담론은 기독교의 제식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따르는 도덕적 계율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들이 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도, 그들이 하나님만이 아니라 현실과 관련해서 받아들이는 관점에까지 모든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극단적으로 바꿔놓았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들이 받아 마땅한 보살핌을 제공할 공공정책과(p,610) 제도를 마련하는 길을 활짝 터주었다. 정부의 관행과 입법 경향, 미술과 문학, 음악, 철학, 나아가 (훨씬 근본적인 수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수십억 사람들의 이해 자체에 영향을 준 대변혁이었다. 이 변화의 가치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든, 즉 서구 세계의 기독교화가 인류가 소중히 여길 만한 승리였든 아니면 애석해할 패배였든, 우리 세계가 경험한 가장 기념비적인 문화적 변모였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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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컨택트-김용섭] 우린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 Memento 2020-12-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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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언컨택트

김용섭 저
퍼블리온 | 2020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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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이제 시작이니까.(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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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은 중세를 뒤흔들었다. 근대 이전의 세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전 지구적이었다. 무역을 통해 모두가 연결되었고, 그 경로를 따라 흑사병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쥐가 시작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람이 병을 퍼뜨렸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급격한 빈자리로 사회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이 줄었다. 사람이 귀해졌다. 기독교는 더 이상 절대적일 수 없었다. 믿음은 내세는 몰라도 현세에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 중세시대의 종말은 그렇게 다가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마녀사냥의 혼란을 거쳐 새로운 시대로 움직였다. 흑사병의 충격은 역사를 과거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했다. 변화는 불가피하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다.

코로나19 역시 우리에게 같은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전망들이 쏟아져 나온다. 현대사회는 불확실성이 큰 시대다. 미래에 대해 탐구하고 대비해야 했음에도, 늘 그렇듯 위기는 강도와 같이 급작스레 다가왔다.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가 바로 책의 제목이자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된 <언컨택트>. 언컨택트는 2020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노동은 재택근무로, 종교는 온라인으로, 물류는 비대면 새벽배송으로, 식음료는 배달로 주문하는 일상은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언컨택트는 전염병이 만든 트렌드가 아니라, 이미 확장되려는 트렌드(p.15)”. 이러한 추세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다. 비대면 문화는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거부감도 많았다. 실물을 보고, 사람과 접촉하고 신뢰를 쌓는 것이 어쩌면 우리 문화에서 중요한 기제였다. 특히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고령층이나 취약계층은 불가피하게 아날로그 문화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코로나가 이를 강제했다. “합리성보다 불안감이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될 때가 있다. (p.214)” 언컨택트가 딱 그렇다. 언컨택트는 불안하고 편리한시대에 우리가 가진 욕망이자, 미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메가 트렌드다. (p.5~6)”

언컨택트는 변화를 상징하지만, 반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중요성 역시 부각한다. 언컨택트의 욕망은 컨택트의 본능이자 문화를 지속하려는 관성에서 비롯된다.(p.44)” 전쟁과 같은 고통의 시기에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사항은 변할 수 없다. 결국 접촉은 불가피하고, 접촉의 방법이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접촉의 흔적 역시 변한다. 바로 데이터다. 언컨택트 시대는 데이터의 중요성 부각된다. 사람 간 직접적인 접촉은 줄어들지만, 그만큼 비대면 접촉이 늘어난다. 언컨택트 사회에서는 데이터의 실시간 연결은 크게 늘어(p.475)”나고,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은 이를 가속화한다. 이는 다시 변화를 촉진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비하는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노동력의 급감이 사람의 중요성을 강화했다. 언컨택트 시대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변화는 필연적으로 격차를 낳는다. 언컨택트는 이를 가속화 할 것이다. 기존의 취약계층에서 디지털, 정보 취약계층(‘디지털 디바이드’)이라는 새로운 사각지대가 탄생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언컨택트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p.179)”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기존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새로운 고민이다.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p.214)”는다. 흑사병과 중세의 종말이 그러했듯,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언컨택트>는 여기에 작은 실마리를 준다. 우리 사회가 현재 어디쯤 와있고, 변화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다양한 소재를 통해 개략해 준다. 새로운 변화 앞에 우리는 겸손해져야한다. 기본으로 돌아가 물어야 한다. 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이제 시작이니까.(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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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컨택트는 불안하고 편리한시대에 우리가 가진 욕망이자, 미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p.5) 메가 트렌드다. 언컨택트는 우리의 소비 방식만 바꾸는 게 아니라 유통 산업을 비롯, 기업들의 일하는 방식, 종교와 정치, 연애도, 우리의 의식주와 사회적 관계, 공동체까지도 바꾸고 있다. 우린 지금 언컨택트의 시대를 맞이했다. p.6

언컨택트는 전염병이 만든 트렌드가 아니라, 이미 확장되려는 트렌드였다는 것이다. p.15

언컨택트가 가장 어려운 것이 남녀 간의 애정 관계다. 사랑과 결혼은 스킨십과 키스 등 긴밀한 컨택트와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것 자체가 변화다. 본능적 욕구나 인류가 쌓아온 남녀 간 애정 표현과 교감의 문화 자체를 바꾸는 게 아니라,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본능(p.27)과 문화를 계속 지키려는 것이다. 컨택트의 욕망을 위해 언컨택트의 방법을 구사하는 셈이다. p.28

언컨택트의 욕망은 컨택트의 본능이자 문화를 지속하려는 관성에서 비롯된다. 전면적 언컨택트가 아닌, 컨택트의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으로의 부분적 언컨택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 있다. p.44

욕망은 결국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비즈니스 기회도 바꾼다. p.64

우린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초연결 시대에 단절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과의 연결에서 오는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 감정 소모, 피로에 대한 거부다. p.132

무조건적인 단절이 아니라, 피하고 줄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언컨택트 기술이자 서비스의 방향이다. p.140

기술적 진화의 목적은 위험 회피와 안전 지향과도 연관이 있다. ... 비대면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욕망의 문제다. 사회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것도 결국 우리가 가진 욕망이 바뀌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로 변화하는 것이다. 언컨택트는 욕망의 진화인 셈이다. p.140

코로나19는 누굴 만나고, 어떤 모임에 나가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등 평판 관리와 투명성에 대한 자각에 좀 더 눈뜨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 접대 없이는 비즈니스가 안 된다는(p.142) 한국적 마인드를 깨는 데 사회적 투명성과 함께 언컨택트 트렌드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직접 대면하면서 몰래 하던 것과 달리, 언컨택트의 방식으로 하게 되면 근거가 다 남는다. p.143

언컨택트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p.179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단지 사무실에서 하느냐, 집에서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기술을 활용해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것인지가 핵심이지 공간이 핵심은 아니다. p.181

원격근무는 성과를 가지고 평가를 받고, 직원에게 주어진 자율만큼 회사와 직원 간의 신뢰가 중요하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회사에서 대면하며 일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과로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원격근무가 통제하지 않고 자율로 하다 보니 느슨해져서 일을 더 못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의 관점과 반대인데, 이 또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p.186

합리성보다 불안감이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될 때가 있다. 한 번 바뀐 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p.214

대비된 위기는 결코 위기가 아니다. 처음 겪는 위기에는 속수무책이어도 변명이 된다. 하지만 한 번 겪은 위기가 반복되었을 때도 위기를 맞는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 변화에 대한 대응은 늘 극단적 상황까지도 대비될 필요가 있다. p.222

일자리를 둘러싼 이해관계에서의 갈등이자 변화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데, 여기에 산업적 진화 말고도 언컨택트가 가지는 새로운 명분도 추가된 셈이다. p.324

언컨택트 사회에서의 인간관계 방식이 과거 세대와 요즘 세대의 차이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엄밀히 세대 차이보단 변화한 시대에 적응한 사람들과 익숙한 과거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가 더 맞겠지만 말이다. p.425

정보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이자 디지털 시대의 격차라는 의미의 디지털 디바이드라는 말은 <뉴욕타임즈>의 개리 앤드루 풀이 1995년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LA타임즈>의 기사가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 용어가 공식화된 건 1999년부터이고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p.432

정치권이 가장 우려하는 건 전자투표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한 정치 방식의 변화일 수 있. 기존 정치권이 가진 기득권이 사라질 수 있고, 정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불편해할 수 있다. p.472

언컨택트 사회에선 사람 간의 직접적 접촉은 줄어도 데이터의 실시간 연결은 크게 늘어난다. 오프라인의 접촉과 대면이 줄어든 것이지, 온라인의 연결, 교류, 데이터의 연결은 훨씬 많아지는 것이 언컨택트 사회다. p.475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이 미래 산업의 근간이라고 얘기하는 말 속엔 사생활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함을 담고 있다. 언컨택트는 사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도 사람이 직접 대면했을 때만큼, 때론 그보다 더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편의를 누리는 게 핵심이다. 비대면인데 대면보다 불안하고 불편하다면 그걸 해야 할 이유는 없다. p.486

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이제 시작이니까.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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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노승대] 종교의 절대성 | Memento 2020-12-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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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

노승대 저
불광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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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절대적이겠지만, 종교는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의 일, 사람이 하는일이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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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모든 부산물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자연발생 하더라도 그 시발점은 무언가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종교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저마다의 신이 실존하더라도 종교는 결국 사람의 일이고, 사람이 하는 일이다. 필연적으로 상호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동학(천도교)이나 대종교 역시 우리의 토착 종교지만 결국 서학(천주교)이나 다른 외국의 종교에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종교의 토착화 역시 같은 맥락이다. 종교가 아무리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전도가 이뤄지고 전파가 되려면 상대를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언어로, 문화로 설득해야 하는데 종교의 토착화는 불가피하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순수한’ ‘고유의 종교는 존재하기 어렵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익숙함으로부터 고유함을 뽑아낼 수밖에 없다. 얼마나 토착화를 잘 하는가가 외래 종교의 성패를 가늠한다. 특정 종교의 기원을 따지고 가다보면 필연적으로 원종교와는 상이한 이교의 문화가 포함되는 일은 불가피하다.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머니도 산다>는 불교가 토착화를 하면서 어떤 모습을 띄었는지 살펴 볼 수 있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고려시대 국교로서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존재해온 종교다. 그만큼 다양한 모습을 띌 수밖에 없다. 불교의 도입은 전제왕권 강화와 관련해서 상당히 반발을 샀다. 이차돈의 순교 등의 전설이 이를 대변한다. 우여곡절 끝에 공식 종교로 채택이 되었지만, 분명히 대중적이기 위해서는 이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방법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과 융합하는 게 가장 좋았을 테다. 이 과정에서 도깨비도, 삼신할머니도, 산신령도 기타 다양한 동식물들이 자연스레 불교와 융합했을 테다. 그리고 그 결과들이 전국 각지에 남아서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그때의 불교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불교를 넘어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흔히들 종교는 절대적이라고 믿고 이를 신봉한다. 인간은 토론과 이성으로 많은 것을 해결 할 수 있지만, 종교 분야는 유독 어렵다. 믿음의 영역은 이성이나 감성을 뛰어넘어서야 하는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혹은 그렇다고 믿는) 종교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화의 폭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봐야할까. 종교라는 게 결국은 사람의 일인 만큼, 절대적이고 목숨 걸 일인가 싶기도 하다. 우리 역사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불교의 토착화를 바라보며, 종교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근본적인 욕망이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그 욕망을 어떻게 담아내느냐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변화할 것이고, 그게 종교의 대중화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종교는 사라질 테고, 그 신은 잊혀 지거나 숭배자를 잃을 테다. 벼락 맞을 소린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시대, 모든 게 급변하고 있다. 일상에서 당연했던, 차 마시는 모임조차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종교도 다르지 않다. 당연했던 모임(예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모임을 강행했다가 집중포화를 맞았다. 신의 뜻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펼치는 악마가 되기도 했다. 종교는 만남과 모임에서 근원적인 힘이 창출된다. 서로의 의지를 다지고, 공동의 행위를 통해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닿아있다. 하지만 지금은 일상적인 종교 행위가 불가능해졌다. 변화는 불가피하다. 온라인을 통해서 간신히 유지하지만 대면보다는 아무래도 약할 수밖에 없다. 종교를 믿는 세대의 고령층은 특히나 대면 문화에 익숙하다.

신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종교는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변한다. 종교도 변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다면 종교 역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흑사병이 기독교의 쇠퇴와 중세 시대의 몰락에 기폭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코로나는 우리 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종교는 또 한 번 큰 기로에 섰다. 어떤 길을 찾아갈지, 어떤 기록을 남길지. 코로나 시대의 종교는 또 다른 토착화가 필요하다. 옛날의 불교가 도깨비와 삼신할머니를 포용했듯.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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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찰 불사를 전담하던 스님들의 맥이 많이 끊어지고 건축부터 불상 조성, 불화 작업 등이 거의 다 민간의 전문가에게 넘어갔다. 그래도 절집에서 민화를 자구책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서민들의 소망이 담긴 벽(p.198)화들이 고찰마다 남아 있어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p.199

연을 표시하는 간지를 세차, 월을 표시하는 간지를 월건, 일을 표시하는 것을 일진, 시간을 표시하는 것을 시진이라 한다. 곧 간지로 연월일시를(p.215) 다 표시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간지를 사주라 하고 모두 합치면 여덟 자이기 때문에 팔자라고 한다. p.216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은 아주 아득한 옛날 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담배는 임진왜란 무렵에 처음 일본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 먼 시절도 아니다. p.231

불행하게도 1980년 이후 사찰에서 비불교적 요소의 그림들을 지워 버리는 운동이 전개되는 바람에 대다수 대중들의 정서를 담았던 벽화들이 사라지는 아픔이 있었다. 순수불교를 주장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포용했던 불교(p.233)의 융통성이 없어진 것이기도 하다. p.234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행원은 승속을 떠나 모든 불자들이 반드시 행해야 할 구도의 지침이며 목적이다. p.295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보살은 행원을 상징하고 있듯이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서의 지혜와 용맹을, 코끼리는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정진과 원력을 상징한다. p.314

어느 나라가 되었든 그 나라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들의 민간신앙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느 민족이나 고대로 올라 갈수록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있다. p.333

원래 귀신이란 글자에서 귀는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초인적 존재이고, 신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초인적 존재였다. ... 유일신 신앙이 들어오면서 귀신이라 하면 모두 미신의 대상이 되어 싸잡아 나쁜 의미로 변하게 되었다. p.333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오욕에 물든 세상이지만 중생의 마음이 청정해지면 이 세상이 바로 정토요 극락세계라는 것이다. 곧 번뇌와 망상이 다 떨어진 자리,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이다. ‘일체유심조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마음을 어(p.397)떻게 쓰느냐에 따라 행복도 만들어 내고 불행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p.398

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을 함께하는 새이기 때문에 머리는 둘이지만 몸은 하나로 되어 있다. (p.488) ... 모든 중생은 공명조의 운명과 같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저것이 멸하면 이것이 멸하는 법이다. 지구 환경이 나빠지면 모든 중생이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마음만 비우면 고생의 삶을 살 수 있다. p.494

조선은 국가 운영 이념으로 유교를 선택하였지만 도덕과 윤리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곧 중생들의 원초적 희망인 무병장수와 질병퇴치, 사후명복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불교라고 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기도할 수 있는 공간과 의식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불교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대 사회부터 인류는 하늘에 빌든, 산천에 빌든, 바위에 빌든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빌어 왔다. 그렇게 비는 문화는 인지가 발달하면서 고등종교인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로 옮겨갔지만 인간의 소망을 비는 풍습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도 국가의 이념은 유교였지만 안녕과 장수, 선왕의 명복을 비는 것은 절집에 의존했고, 그렇게 해서 생긴 원당사찰이 도처에 있다. p.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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