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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 기본 카테고리 2023-11-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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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겨울을 지나가다

조해진 저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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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어머니가 됐다. 세상의 길로 자식들이 떠나는 걸 보는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한구석 너무 오랫동안 포기하고 지내야만 했던 그 세월, 꿈 많은 스무 살 여인의 처녀 적 세월. 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손등의 수많은 주름의 길들이 이제 얼굴로 눈가로, 그리고 힘없어진 눈빛까지 자글자글 주름 같은 길들이 쏟아져 들어가고 당신의 허리는 굽어 세월을 짊어지고 가신다.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주인공 '정연과 남은 가족들은 어머니를 췌장암으로 잃은 후 큰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들과 만나는 고요의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따뜻한 마음으로 정연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게 된다.

"한 사람의 부재로 쌓여가는 마음이 집이 된다면 그 집의 내부는 너무도 많은 밤과 복잡한 복도와 수많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수납공간마다 물건들이 가득하고 물건들 사이 거울은 폐허의 땅을 형상화한 것 같은 먼지로 얼룩진 곳, 암담하도록 캄캄한 곳과 폭력적일 만큼 환한 곳이 섞여 있고 창밖의 풍경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그런 집...." p19~20

누군가를 떠나보냈던 기억은 겨우 찾아온 행복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게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변함없는 진실을 받아들이며, 있었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전제가 된다. 잘 지내다가도 잘 지내지 못하겠는 이유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약속한 적 한 번 없이 오는 일방적인 성질의 슬픔은 오고 싶으면 오고, 왔으면 가고 싶을 때까지 머무는, 배려 없는 사람처럼.

소설은 주인공의 슬픔의 크기를 나타내 듯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와 가장 추운 날인 '대한' 곧 봄이 다가옴을 알리는 '우수'에 이르며 절기의 변화에 따라 이어진다. 어제보다 더 슬프든 덜 슬프든 견뎌야만 하는 날의 연속일지라도, 그리고 견딜 만할 때 더 큰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운 차려서 다행이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슬픔을 견디며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그것은 슬픔 다음의 더 큰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이다.

"사실 옷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의 양말과 머플러, 엄마가 직접 겨자색의 굵은 실로 뜬 털 모자에도 내 손은 뻗어갔다. 엄마의 물건에서 구불거리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한 날이면 핀셋으로 조심조심 떼어내 빈 유리병에 모으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그건 그 나름대로 즐거운 취미가 됐다. 엄마가 쓰던 비누,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을 나도 썼고 엄마에게는 애장품이던 금목걸이라든지 팔찌를 하고 산택을 나간 적도 있었다. 내 몸에서 엄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만져지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엄마에게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고, 때로는 눈앞에 엄마가 있다는 듯 허공에 대고 어리광을 부리고도 싶었다." p75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이 삶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를 가늠해 주는 척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아픈 경험 때문에 오히려 시선이 굴절되어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게 울어본 사람으로서, 자기 삶의 어느 귀퉁이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해진 작가의 글이 큰 위로가 되어 삶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기 위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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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 기본 카테고리 2023-11-0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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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저
작가정신 | 2023년 1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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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던 마음이 이제는 멀리 떠나보냈던 연을 감아들이듯 안쪽으로 다가온다. 햇빛은 이제 눈이 부시거나 따스하다는 말들보다 권태롭다는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오래된 숲속 어딘가에서 혼자 고요하게 있고 싶고 번거로운 일들을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이제 삶은 적당히 두렵고 적당히 기분 좋은 이중적 감정의 연속이다. 두렵다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고, 기분 좋다는 것은 아직도 변화와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재희 작가는 서른세 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이라는 치사율 높은 병에 걸렸었다.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에서는 그녀의 삶의 커다란 변곡점이 되어버린 사건 이후로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삶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본 이라면 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작고 소박한 일상의 길 위에서 발견하는 감사가 또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언젠가 한순간의 방심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갈 뻔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자연 시간에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에 대해 배웠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집에 오자마자 깡통을 들고 동네 어귀에 있는 못으로 향했다. 그 못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꽤 큰못이었고 가장자리 한쪽에는 웅덩이가 몇 개 있었다. 나는 올챙이를 잡기 위해 웅덩이 주위를 맴돌다 그만 다리가 미끄러져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꽤 깊은 곳이었고 물속에서 한두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있었고 옆에 아버지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또 한 번의 인생을 사는 셈이다. 물속에서 쑥 올랐다 내려올 때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찰나의 짧은 순간에서 느낀 미지의 감정에는 두려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죽음은 항상 우리와 마주하고 있어 그 순간이 오면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이게 내 인생일까? 그러곤 한참 후에 스스로 대답한다. 맞아. 이게 내 인생이지. 그런 자문자답을 하다 보면 사실은 내가 어떻게 살든 무엇을 하든 그게 전부 다 내 인생이었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된다. 내가 꿈꾸기만 했던 어떤 일, 내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행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괴상한 일, 무수히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게 바로 나 자신의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건과 사고들. 그런 일들이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하지도 못한 채로 그런 일들을 맞게 된다. 닥치면 어떤 식으로든 나는 살아낸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이 된다. 진짜 내 인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 있었다." p87

한순간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우리 삶에서 명성을 좇는 것은 인간의 속성일 테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행동인가. 그러나 각각 꿈꾸는 성공은 조금씩 다르리라. 번드레한 직함을 늘어놓고자 무리수를 두며, 인생의 자랑으로 취하고자 했던 사람도 결국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허무하다. 허명을 앞세우다 그 속에 갇혀 버린다. 얻으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기 삶이 오롯이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기 일에 충실했으며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지 우리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값어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진정한 이름은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묵묵한 삶 뒤에 따라올 때 빛난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재능은 나에게 없다. 넓디넓은 천사 같은 큰마음도 내겐 없어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이다. 오래도록 기억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무명으로 살 일이다. 작자 미상이라 적힌 옛 그림에서 더 진한 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름 있는 화려한 꽃보다는 이름을 알지 못해 풀꽃이라 부르는 은은한 꽃잎이 더 오래 가슴에 남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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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 기본 카테고리 2023-10-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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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룸

이선희,천희란 저
작가정신 | 2023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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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여성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남녀평등의 시대가 왔다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다. 여성들은 이 평등하다는 세상에서 오히려 일상에서 겪는 불안과 고통들을 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마무리해가는 여성들은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다. 나보다는 가족과 아이, 타인에게 맞추는 삶이 더 익숙했고, 그게 여자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통적 가치가 중시되던 시대에 자라며 아이다움, 여성성과 같은 자연스러운 내면의 특성을 억압했기에 더욱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웠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내어 두 여성 작가의 소설이 하나의 가능성과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획된 잇다의 화려한 첫 막을 연 <백신애 최진영의 천천히 오래오래>를 인상 깊게 읽어서인지 <이선희와 천희란 작가의 '백룸'> 또한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책에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절단되어 불구가 된 주인공은 남편의 애정이 감소되자 신경병적인 증세를 보이며 불안의 나날을 보내며 결혼으로 인한 인생의 상처에 대한 보상으로 남편의 목숨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선희 작가의 대표작 <계산서>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시대에 한 여성의 몰락을 그려나간 <여인 명령>, 그리고 이 책의 표제이자 천희란 작가의 소설인 <백룸>은 게임 스트리머인 그녀가 성소수자로서, 여성으로서의 불쾌하고 막막한 일상을 그려낸 이야기가 실려있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아래서 더욱 강화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강간, 강제 결혼, 여성 매매, 강제 성매매, 여성에 대한 고문, 소녀 매매, 여성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 등은 가부장적 폭력의 형태들이다. 상징적 폭력과 매체, 인터넷, 컴퓨터게임, 광고, 패션 산업 등에서 여성 몸을 상품화하는 것은 이윤을 위한 경쟁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왔다.

무작위로 생성된 방들이 끝없이 나열된 미로를 묘사하는 백룸을 표제로 삼은 건 남성중심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가지는 공포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을 압박해오는 사회적 편견으로 숨죽여야 했던 그녀들의 입장이 되어 보면 마치 백룸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과 겹쳐진다.

"변호사의 정체가 확인되자 피의자가 올바른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소식에 대한 축하보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여성의 퀴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정의로운 변호사에 대한 말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p439

소설에서 언급하던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여주인공의 레즈비언 논란으로 떠들썩하던 시기를 기억한다. 나 역시 주인공 엘리만큼은 모두가 상상하던 평범한 행복을 찾아 살아간다는 엔딩을 기대하고 있었다. 여기서 평범한 행복, 보통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성이 아닌 이성과의 만남이 당연하다고 단정 짓던 내 안에 깊게 뿌리박혀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질적인 존재라고 레즈비언을 본질화, 규범화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분위기 역시 따져볼 문제다. 나는 동성애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동성애자를 만나거나 함께 지낸다면, 분명히 동성애를 떠올려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배려, 소통, 공감, 연대, 정의 등은 말해질 수 있고 활자로도 적힐 수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언급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일상적 실천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천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내밀한 삶이 녹아 있다. 여성의 삶을 안팎으로 규정짓는 시선과 사회적 압박,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들이 중첩되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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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읅 한 입 베어 물었더니 | 기본 카테고리 2023-09-0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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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이꽃님 저
문학동네 | 202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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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부시게 찬란할, 우리의 열일곱 번째 여름"

강렬한 태양의 퇴약빛.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그 위를 지나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는 계곡의 휘파람 소리로 돌아와 흐르는 땀을 씻어주고, 파고드는 산바람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날마다 조금씩 방향을 달리하며 붉은빛 고운 자태로 빛나던 저녁노을과 멀리 경부선 열차가 지나가며 남기던 아련한 기적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잔잔하다. 가슴 설레는 추억이 녹아있는 여름을 좋아한다. 이꽃님 작가의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에도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여름의 푸르름이 담겨 있었다.

시골의 푸르름과 활기가 담겨 있는 정주군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듣고 싶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이 들리는 유찬과 평생 엄마와 둘이서 살아오며 유도를 하고 있는 지오. 이 두 사람의 시선으로 번갈아 전개된다.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유찬과 어머니와 자신은 아버지에게 버려진 거라며 스스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지오는 운명처럼 서로를 만나면서 각자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아픔을 꺼내놓는다.

같은 반이 된 지오와의 만남에 유찬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주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가 찾아오게 된다.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의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지오에게 호기심을 느낀 유찬은 지오 역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호기심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바뀌게 됨을 느끼게 된다.

"고요가 찾아온다. 갑작스러운 고요에 멈칫, 곧이어 귀에서 삐- 이명이 울려온다. 온갖 소음들로 섞여 있던 공간은 침묵 속에 "미안."이라는 그 아이의 선명한 목소리만 남는다. 그 짧은 순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영원같이 느껴져 그 아이가 내 옆을 스쳐 가고, 다시 소음이 들려오기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p24

서울에서 정주의 번영읍으로 전학 온 지오는 평생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 만나게 되지만 무려 경찰의 모습으로 마중 나온 아버지의 모습에 더욱 증오하게 된다. 같은 반 유찬과의 첫 만남에 유찬이 떨어뜨린 에어팟을 밟아 부러뜨리게 되면서 유찬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깟 마음 좀 들린다고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마. 마음? 네가 들린다는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알아?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어. 하루는 조금 괜찮았다가, 그래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또 하루는 미칠 것처럼 화가 나 죽겠다고."p57

유찬의 화재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숨겨진 진실과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로 각자의 아픔과 마주하며 극복하게 되는 그들. 길을 잃지 않는 것, 방황하지 않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긴 하지만 길을 잃는 것 또한 길을 찾는 방법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서로를 닮아 가고, 서로를 투영하고, 그런 서로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 불행의 어느 순간 앞에서도 괜찮아지기 위해 용기를 내고 오늘의 불행을 견딘다.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 '니가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최선의 말을 하게 하는 그 존재로부터 위로받고 보호받는 것이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아픔을 마주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작은 위로들. 작가는 그런 따뜻함을 써 내려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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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상실 | 기본 카테고리 2023-09-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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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모호한 상실

폴린 보스 저/임재희 역
작가정신 | 202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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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는 상실과 대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2년 전 갑자기 전 직장의 선배가 세상을 떠났다. 불과 며칠 전에도 함께 잔을 기울이던 선배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와의 술자리에서도 극단적 선택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를 아는 많은 지인들, 친구들, 그리고 그의 아내까지 그의 죽음으로 얻은 크나큰 상실감으로 장례식장은 우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잔인한 배움이다. 상실감이 짙으면 짙을수록 다음 상실감이 찾아왔을 때는 덤덤해하는 자신을 보게 될 테니까.

선배를 떠나보내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젊은 시절부터 불행에 가까웠던 그의 환경과 함께 보낸 우울한 시간들, 평탄치 못했던 우여곡절의 가족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엮어냈던 삶의 여러 애환들이 작은 물방울처럼 내 가슴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 작은 슬픔들이 모여서 어느 순간 가슴 복받쳐 올라 참지 못해 눈물을 보였던 그날은 상실감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은 몸을 눈으로 직접 봐야 상실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실종자 가족들은 죽음에 대한 그러한 검증을 통과한 적이 없으므로 부재나 존재에 대한 그들의 인식 변화 과정에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p62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상실이라는 개념은 누군가, 어떤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 저자가 말하는 모호한 상실이란 죽음과 실종 등의 이유로 곁에 없지만 여전히 함께 있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거나 분명히 실체가 보이는데 곁에 없는 것 같은, 말 그대로 모호한 상실감을 뜻한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입양아가 느끼는 단절과 고립, 알츠하이머, 정신질환, 디아스포라가 느끼는 문화의 차이 등 모두 모호한 상실에 속한다. 우리의 삶 바로 옆에 존재하는 이 슬픔들은 어쩌면 너무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침묵해왔다.

보통의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상태가 분명한데도 정상이라 고집하고 자신의 논리를 믿는 것이 상실감을 동반한 고유한 특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정상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며 어쩌면 그것은 괴상함보다 더 개인적인 관념인지 모른다. 자신의 조금이라도 초기 증상을 눈치채고 있다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상실은 슬픔을 내포한다. 결국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각자 육체의 고독 속에 갇혀 있으며,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간 날들은 다시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상실은 무력한 세상의 첫 경험이며 평생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랜 연구와 여러 임상 경험을 통해 저자는 우리의 일상과 공존하는 상실을 자신의 경험과 환자와의 상담, 문학작품 등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상실과 마주하며 대처하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호한 상실은 다양한 이름들과 모습들로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들로 어디에나 존재해 왔다. 이 책 <모호한 상실>은 상실감의 대표적인 범위를 모두 담으려 애썼다. 인간이 겪는 상실감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책은 없지만 대표적인 예와 대처법을 보여 줌으로써 모호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이들의 해방을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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