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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만찬회 | 기본 카테고리 2023-06-2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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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호러만찬회

신진오,전건우 저
텍스티(TXTY) | 202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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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여름이면 더위를 식혀줄 TV 프로그램으로 '전설의 고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식상한 스토리에 유치할 정도의 CG로 웃음을 자아내지만 당시에는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여름의 더위쯤은 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괴담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흥미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나 역시 괴담이라면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한 여름이 다가올수록 무더위를 잠재울 괴담을 찾게 된다. 묘한 미신 또는 귀신이 붙어 있다는 귀물에 얽혀있는 괴담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중 일상생활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단편 소설 여덟 편이 수록된 이번 작품집은 신진오 작가와 전건우 작가가 엄선한 이야기들이다. 특히나 이 책에서 펼쳐놓은 이야기 속의 배경은 우리 주변이다. 평범한 가정집, 하숙집, 동네 선산, 아파트 등 일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거쳐 가야 하는 곳이며, 누군가는 지금도 그 장소에 있을 것이다. 익숙한 공간일수록 공포감은 배가 되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형의 저주의 내용을 담은 <헤이, 마몬스>, 불우한 환경으로 소외된 불행한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얼룩>, 최근 유행하고 있는 해괴한 챌린지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담은 <딩동, 챌린지>, 우등생인 언니와 비교 당하던 동생이 성적 때문에 저주술을 사용한다는 <네발 달린 짐승>, 하숙집의 건물주가 젊은 무당으로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이야기를 담은 <신딸>, 일확천금을 얻으려 주식 투자로 전 재산을 날리고 친구에게 빌린 돈마저 잃게 되고 친구와 동반 자살을 계획하지만 로또 1등의 당첨으로 친구만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추락>, 경찰을 직업으로 둔 워킹맘의 고뇌가 담겨 있던 <만성 활력>, 대대로 내려오던 귀신불이 날아다니던 선산을 지키던 일가의 내용을 다룬 <반딧불이의 산>까지 현실감 있는 다양한 소재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공포 소설 팬이라면 알겠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공포 소설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영상과 달리 활자로 인간에게 두려움을 선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호러 만찬회의 소설들은 지금까지의 식상한 소설들과는 다른 재미를 보여줬다. 특히나 가난, 소외, 도태, 시기 등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문제들이 소재가 되어 완성된 괴담들이 무척이나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읽고 나서 사라질 휘발성 가득한 공포소설이 아닌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의미 있는 공포 소설이었다.

도서 뒷면의 QR코드로 들을 수 있는 북음은 독자가 <호러 만찬회>를 읽는 동안 온전히 그 시간에 집중해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최희영 작곡가가 작곡한 북음은 텍스티가 정성껏 준비한 <호러 만찬회>의 매력과 더해지며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올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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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린 레이철 | 기본 카테고리 2023-06-2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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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랑에 빠진 레이철

팻 머피 저/유소영 역
허블 | 202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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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무너져버릴 것이다"라는 한 페미니스트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음지에서 숨죽여야 했던 여성들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는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삶을 걸어야 한다. 일반적인 폭력 사건과 달리 유독 성폭력 사건은 피해와 가해라는 말이 여전히 애매하게 다루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 짓기도 힘들뿐더러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상황을 누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까?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드러내는 것, 성폭력은 누구 혹은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많은 여성들이 소리 높여 말하고 있는 페미니즘인 것이다.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섹스>로 이미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던 페미니즘 SF 소설가인 팻 머피의 단편집 <사랑에 빠진 레이첼>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죽은 딸의 전기장 패턴을 어린 침팬지의 뇌에 덮어 씌워 의사소통이 가능한 암컷 침팬지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사랑에 빠진 레이첼>,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오가며 시간 여행을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오렌지 꽃이 피는 시간>, 식물처럼 심기만 하면 자라나는 한 여성이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을 살해한다는 이야기인<채소 마누라>, 자신에게 무관심하던 영화배우 아버지에게 상처받으며 자란 한 여성이 아버지를 상징하던 TV를 버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룬 <TV 속의 죽은 남자들> 등 오랜 시간 여성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어온 그녀의 작품들에는 상처받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종국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사회 속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인류 역사상 사회적 약자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피해와 가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는 인정 투쟁, 집단행동, 사회 운동, 여성주의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실천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가부장적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는 존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 되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위치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런 그녀는 여성들의 입장에 서서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며, 불완전한 여성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과 고통을 여러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해왔다. 적어도 나에게는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직간접적으로 겪어나 듣거나 보았을 이야기보다는 SF라는 상상력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작품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 문학을 이해하기에 가장 부담이 적었던 작품이었고 이 책을 접하게 될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거라 생각한다.

 

#사랑에빠진레이철 #허블 #동아시아서포터즈7기 #세계문학 #SF소설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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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뼈 드러난 뼈 | 기본 카테고리 2023-06-1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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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숨겨진 뼈, 드러난 뼈

로이 밀스 저/양병찬 역
해나무 | 202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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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에는 206개의 뼈가 있다. 각각의 뼈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눈의 결정처럼 하나하나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어서 이를 통해 수천 년 전의 DNA와 영양 상태, 습관, 질병의 이력, 은폐되었던 학대와 고문, 살인의 증거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뼈는 우리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 뼈가 작용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뛰는 심장처럼 뼈도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는 살아있는 조직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과 늘 함께하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뼈에 소중함을 간절히 느낀 것은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반달 연골 파열이 계기가 되었다. 반달 연골은 무릎관절에 가는 하중을 분산시켜 주고 넓적다리에서 정강뼈로 힘을 전달해 준다. 또한 무릎관절을 움직일 때 삐걱대지 않도록 안정성을 주며, 움직이거나 운동할 때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고유 위치감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 몸에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이 작은 구조물인 반달 연골로 인해 마음껏 달릴 수 없게 된 나에게 뼈에 소중함은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 책은 40년 동안 정형외과 의사로 일해온 로이 밀스의 저서로 그의 일생의 연구가 담겨 있는 방대한 자료집이다. 뼈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문화적, 역사적 측면에서 뼈를 바라보며 오랜 기간 연구를 이어나간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딱딱하게 저술된 책이 아닌 그의 재치와 유머가 담겨 있어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숨겨진 뼈, 드러난 뼈>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숨겨진 뼈>에서는 진화학 적으로 바라본 뼈의 구조 및 뼈의 역사와 인간이라면 겪게 되는 다양한 뼈 질환의 소개와 치료 등 인간 신체 안에서의 뼈를 소개하고 있다. 2부에서는 <드러난 뼈>에서는 뼈의 주인인 생물이 죽은 후 뼈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살펴본다. 살아온 고유의 기억이란 뇌에만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몸속뼈 하나하나에 고유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동물의 몸 거의 모든 부위의 연조직과 경조직에는 한 인물의 경험, 습관 및 활동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도 인간과 동물의 삶의 기록들 중 많은 부분이 골격 안에 간직되어 있어 수백만 년 전의 지구에 대해서 말해주며,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는 놀라운 기록물이기도 하고,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뼈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정보들

뼈란 무엇인가? 뼈는 동물들에게 왜 그토록 중요해졌을까. 어떤 원리와 무슨 이점이 그런 골격의 진화로 이어졌을까 우리 몸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뼈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나간다. 뼈의 다양한 구조와 생애, 다양한 뼈 질환과 치료법과 정형 외과계의 혁신같이 일반적인 환경에도 적용될 수 있는 정보들을 알가 쉽게 설명하며 정형외과 의사로서의 견해와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이해를 돕는 다양한 이미지 자료

이해하기 쉽게 친절한 주석이 더해진 다양한 사진과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 독자들이 책을 보는 시각적 즐거움을 더한다.

 

 

단순 지식 전달만이 아닌 뼈에 대한 독특한 주제로 관련된 문화와 역사의 딱딱하지 않은 이야기들

우리 몸속에서 한 사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뼈, 죽은 다음에도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 지구 생명체의 신비를 밝히는 뼈. 뼈는 이렇게 인간을 가장 깊숙이 이해하는 열쇠이나 생명 탄생의 근원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모든 뼈 이야기들이 고리처럼 엮여 있어 서로 다른 대륙의 사회상과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가 어느 역사책 못지않게 생생하게 다가온다. 뼈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간직해온 오랜 역사와 문화 전반적인 이야기를 저자의 재치 있는 위트를 더해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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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질문 | 기본 카테고리 2023-06-1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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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책의 질문

우찬제 저
열림원 | 202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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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발전할수록 책의 소중함은 더 절실해진다. 어려서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지식을 얻지만 깊은 사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서뿐이다. 책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고 글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의 매력은 여전히 실재하는 가치라고 믿고 있다. 음악이나 미술이 시대 또는 양식에 구애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반면, 언어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의미를 전달한다.

우리 문단의 가장 활발한 비평가이자, 탁월한 문학 평론가인 우찬제 교수의 신작 <책의 질문>은 그의 숨 가쁜 행보의 집적체로 그의 문학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그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지식과 성찰, 특유의 사유가 담긴 문장과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이라는 주제로 수록되어 있는 명화들은 <책의 질문>을 읽는 즐거움이다.

그가 꺼내 든 책들은 모두 한 사회를 대표하고 한 시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위대한 책들이다. 그것은 책에 대해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의 시기를 보냈던 우찬제라는 한 사람의 삶에 새겨진 깊고 뚜렷한 흔적이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랄까, 레온 크라이츠먼과 괴테,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날카롭고 세밀한 기록들은 문학을 만들고 살아가는 인간이 공유하는 본질과 가치와 방향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일까? - 레온 크라이츠먼 <24시간 사회>

얼핏 보기에 개인의 선호를 반영하는 탄력적 시간 시스템으로 효율적인 측면도 많아 보였지만, 그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회사도, 상점도, 교실도, 병원도 24시간 문 닫지 않고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지속되는 것 아닌가. 결국 문한 경쟁만이 더 가속화될 것 아닌가. 민족, 도시, 국가, 지역 단위에서 파워 엘리트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의 간극을 더욱 심화하지 않을까. 경쟁 이데올로기와 세계화 추세를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각국의 파워 엘리트 집단의 기득권 확장에만 기여하지 않을까. 24시간 사회가 오히려 '불안한 현대사회'를 가속화하지 않을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일까? - 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를 거듭 읽어도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 하게 마련이라고 했던 대목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괴테의 삶의 궤적과 파우스트의 편력에서 우리의 최종적 관심에 값하는 것은, 바로 상승적 발전을 위한 항상적 노력이다. 대립적인 것들을 껴안고 방황하면서도 지혜롭게 노력할 때 자기 삶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항상적 노력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인간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 영훈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잘 조화시켜 나가면서 지혜롭게 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하고 극복하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살찌울 수 있다는 것."

 

 

호모 사피엔스, 그 얼마나 기기묘묘한가? - 박경리 <토지>

<토지>를 읽다 보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류가 하나의 종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종차를 보이는 인간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월선이처럼 가장 선한 인간에서, 조준구나 김두수처럼 가장 약한 인간까지 아주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길상이처럼 노비의 신분에서 상전이었던 서희와 결혼해 몰락한 최씨 가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나중에는 관음탱화를 그리는 예술가로 역동적인 존재 전환을 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임이네처럼 시종일관 추악한 탐욕의 화신으로 나오는 인물도 있다. 작가 박경리는 최참판가를 중심으로 하여 주요 인물들이 성격도 잘 그렸지만, 방계의 부정적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도 웅숭깊은 장기를 보였다.

 

 

행복을 기다려야만 하는 지겨움을 어쩌면 좋을까? - 김애란 <호텔 니약따>

서리라고도 불리는 갈매나무는 비교적 추위를 잘 견딘다. 북부지방 사람들에게는 세한 시절의 벼리가 될 만한 나무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석의 화자는 "굳고 정한" 영혼의 푯대처럼 보이는 갈매나무와 그렇지 못한 자신의 차이를 반성하면서, 갈매나무의 영혼으로 자신을 단련시켜 세한의 시절을 견디려 했다. 그러나 김애란이 응시한 젊은 영혼에게는 "갈매나무"라는 장치마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갈매나무마저 품을 수 없는 처지에서 행복을 마냥 욕망해야 하는데, 그에 반비례하여 비행운만 가중되는 형국이라면, 정녕 문제가 아닐 수 없겠다.

 

 

우리, 용서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 이청준 <벌레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느닷없이 괴한에게 유괴되어 살해된다. 당연하게도 아이의 어머니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다. 상처는 깊어지고 삶의 정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기독교 신앙에 감화되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면서 범인을 용서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교도소에서 범인을 면회한 다음 더 절망하여 파국의 길로 치닫게 된다. 도대체 그 면회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녀는 어렵게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찾아갔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만나고 보니, 그는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였다. 교도소에는 주님을 영접하고 용서받은 범인은 놀랍도록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창동 감독이 <밀양>으로 제목을 바꿔 영화화하기도 했던 이청준의 소설<벌레 이야기>의 줄거리다. 이 소설에서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이미 용서받고 있었기에 자신은 용서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 소설은 인간의 윤리와 용서의 문제를 신앙과 실존의 측면에서 심원하게 숙고한 작품이어서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어쨌든 용서의 문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복잡한 난제임을 거듭 환기한다. 용서의 종교적 맥락만 강조되면 인간관계에서의 비인간화 및 인간적 가능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고뇌한다.

 

지식이나 정보의 축적보다 창의적 질문 하나가 시대를 바꾸기도 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삶 속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질문들로 문학이라 불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 그 작가의 존재를 여미어 기리는 일, 이는 어쩌면 책을 읽는 이들뿐만 아니라 문학을 통해 삶의 진리와 인간의 가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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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뿐인 반짝임을 찾아서' / 여행의 쓸모 | 기본 카테고리 2023-06-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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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여행의 쓸모

정여울 저/이승원 사진
스튜디오오드리 | 202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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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찍어야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아이는 비누 거품 풍선을 바라보며 마치 단 한 번뿐인 생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질주한다.

저 비누 거품 풍선은 5초 내로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소년의 저 눈빛, 저 달음박질도.

오직 한 번뿐인 반짝임을 찾아

오직 한 번뿐인 몸짓과 미소와 환희를 찾아

나는 오늘도 배낭을 꾸린다."

-정여울

마흔을 넘으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고, 타협은 인생을 편하게 해주지만 나중에 반드시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하며, 능력보다 중요한 건 운이지만 운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절대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멀어 보여도 달리다 보면 결국 도착한다는 것. 물론 그 도착 지점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 그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런 것도 알게 된다. 아무리 좋고 멋진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내가 사랑하는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

여행은 현실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일상에서 탈출해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결혼 전에 내가 원했던 여행은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휴식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란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나눌 수 있는 여행, 나와 그들 모두가 동등하게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만나는 여행, 의미 있는 소비가 가능한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유튜브와 각종 매체 덕분에 다른 나라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 듣는 시대라지만,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던 나에게 정여울 작가의 신작 에세이 <여행의 쓸모>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정여울 작가의 글이 처음인 나에게 그녀의 첫 이미지란 무척이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프랑스 파리와 뉴욕,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뉴욕, 영국의 런던을 거쳐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아름다운 여행에서의 사진과 그녀의 따뜻한 글은 나 자신이 직접 여행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곁에 있던 누군가와의 다툼이 사라지고 아무런 고통이 없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무엇인가에 집중하거나, 한껏 놀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을 피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없다는 건 아주 가학적인 일이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있는 여행이었을테니까.

 

 

"낯선 장소의 아름다움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에서 정작 찾아낸 것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장소의 수집 욕구'를 뛰어넘는 더 깊은 욕망의 차원과 만날 수 있다. 나는 장소를 수집하고 싶지 않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다. 인증 숏을 전혀 남기지 않아도 좋다. 그때 그곳에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감성의 근육'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깨달음, 지극히 사소한 미소, 어쩌면 단 한 번뿐일 안타까운 스쳐감만으로도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선물한다는 것을."- 정여울

 

우리는 여행이라는 낯선 길 한가운데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간다. 여행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의 순간,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들이 자신에게 많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스스로가 온몸으로 겪어낸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찾고 싶어 하는 것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기까지는 저마다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마도 그건 신의 선물일 것이다. 정답을 너무 쉽게 알아버린다면, 언제 우리가 스스로와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을 갖겠는가. 우리는 결국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정답을 위해, 멀리 여행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더 많이 만나고, 겪고, 사랑해야 겨우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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