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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기본 카테고리 2023-07-3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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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원자 스파이

샘킨 저/이충호 역
해나무 | 202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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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월요일 오전 8시경. 미국의 B-29 전투기가 일본 히로시마 시에 원자 폭탄 하나를 투하했다. 길이 3m, 무게 약 4t의 이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8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도시는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8월 9일, 또 다른 B-29 미국 전투기가 이번에는 나가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약 4만 명이 즉사했다. 이후 두 도시에서 방사능 노출과 관련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의 항복 요구에 끝까지 버티던 일본 왕 히로히토는 결국 나가사키 공격 6일 만인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써 약 6년간의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 최초로 원자 폭탄이 전쟁에 사용됐고,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만약 미국인 아닌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가 먼저 개발해 전쟁에 사용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의 판도는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베스트셀러 작가 샘 킨의 다섯 번째 책인 <원자 스파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학자와 스파이로 구성된 인원들이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이다.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2차 세계 대전의 뒷이야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첫 등장인물로는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 출신에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 스파이가 된 모 버그와 독일의 원자폭탄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자폭한 조 케네디 주니어, 부역자로 위장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마리 퀴리의 사이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알소스 부대의 수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했던 보리스 패시 등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영웅들의 활약을 그려내고 있다.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수를 둘러싼 사건들, 원자폭탄의 정보를 얻으려고 적진에서 활약하는 첩보원들의 모험담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독일 원자 폭탄의 주역이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우라늄 클럽의 중심인물이었다. 도덕적인 문제로 논쟁했던 연합군 과학자들과 나아가 나치의 원자폭탄 프로젝트에서 애국심과 인류애 사이의 갈등으로 괴로워했던 하이젠베르크와 독일 과학자들의 고민 등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느끼게 될 도덕적 딜레마를 생각할 수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연루된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이 만들게 될 살상 무기의 파괴력을 심각하게 따져보지 못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도리어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에 대한 호기심을 풀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히틀러는 저지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면죄부를 애초부터 가능하게 했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크리스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가 곧 개봉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역사에 대한 전기 영화로 원자 스파이를 읽은 독자라면 반가워할 만한 소식이다. 개봉 전 샘킨의 <원자 스파이>를 읽고 관람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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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인간 | 기본 카테고리 2023-07-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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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환승 인간

한정현 저
작가정신 | 202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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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저 그런 지루한 삶을 살았다고 불평해대도 모든 순간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이는 없을 것이다. 기대와 어긋난 순간의 마주침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못내 불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나기가 항상 미운 것은 아닌 것처럼, 그 당혹스러운 마주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은 낯선 환경으로의 끊임없는 환승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환경에 발을 딛고 선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익숙한 모든 풍경을 등져야 하는 일이고, 낯선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하는 일이다. 겨우 그 위에 발을 딛고 선다 해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처음 보는 건물과 거리, 사람과 시선, 모든 것이 한 사람 외부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낯선 환경에 발을 딛는 일을 꿈꿀 때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왜 낯선 곳에 가는 일에 가슴이 뛰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하루는 같아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일상이라는 이름에 가려졌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낯선 플랫폼을 밟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다 매일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는 여행자인 것. 낯선 환경으로의 환승은 운명이고 본능이다.

 

 

 

"환승하는 삶.

환승할 수밖에 없는 삶.

좋아하는 것에서 좋아하는 것으로 환승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좋아해야만 하는 것을 만들고 좋아하게 만들어야 살아지는 삶도 있다. 마음과 사랑이라는 것을 손쉽게 쓰지만 사실 요즘은 그런 것마저 만들어내야만 견딜 수 있는 삶도 많다고 느낀다. 그런 삶의 환승의 수가 빈번하게 높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무수한 환승을 경험하면서도 순간 나 자신의 바깥에 놓인 삶에는 또 한 번 무감했던 것 같다." - 프롤로그

 

 

 

그동안 효율적인 삶을 교육받아왔고, 때론 강요당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가능한 더 빠르게, 가능한 더 많이, 질이 안 되면 양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효율적인 삶과 속도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방향을 쉽게 잃었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그래서 속이 비어버린 사람. 깊이가 없는 껍데기를 부여잡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정현 작가의 <환승 인간>에서는 오롯이 자신으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왔던 수많은 환승들을 통해 삶에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사랑에 대한 단상도, 생각지도 못한 유학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느낀 삶에 대해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문학, 영화를 통해 작가 한정현으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진정 원하는 삶을 위하여 무수한 환승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모든 진심이자 진실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그건 내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자꾸만 자주 휘발되는 가치에 관한 것,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가는 시간에 의해 가치 없음이 되어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설 속에서 지켜보고자 했던 나. 여전히 내 아에서 가치로 남겨져 있지만 타인들에 의해 무가치해지는 무언가에 대해 써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쓴 "이제 가자, 아키코"라는 문장은 내 인생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려는 마음이었다." - 이제 가자 아키코 중에서

 

 

수많은 인생의 환승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단언한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각각 살아온 인생에 따라, 각자 다른 눈으로 목격한 세상에 따라, 그리고 각자 온몸으로 느꼈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발현된다.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내 삶의 형편에 따라, 또 누구와 함께했으며,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는가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삶의 희로애락, 온전히 나만이 느낄 수 있고,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생을 찬탄하고 긍정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하루를 버티고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가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고, 많이 불편하지만 수심을 알 수 없는 검은 밤바다가 있고, 태양을 품은 뜨거운 아침의 금빛 바다가 있듯 각자의 삶이 수시로 변화는 일들로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남들은 발견할 수 없는 커다란 돌비석 하나를 가슴에 묻고 생의 끝까지 그것을 지표 삼아 걷는 일. 그 끝이 희망이 되는 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희망이 야박하더라도 우리는 힘을 내어 끊임없이 환승하며 돌비석으로 나아가는 일. 만약 벼랑 끝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웃을 수 있는 삶으로.

 

 

모든 것이 변화고 새로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환승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꿈이라던가 작은 희망 같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 한구석에 세워 놓고 살아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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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 | 기본 카테고리 2023-07-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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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웃들

진하리 저
아시아 | 202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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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심리묘사가 일품인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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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게 지내며 정이 들어 사촌과 다를 바 없는 가까운 이웃을 '이웃사촌'이라 한다. 이 말속에는 이웃은 사촌처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규범적, 윤리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한곳에 머물러 토지를 경작하며 생활하던 농경사회에서는 이웃 간의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이러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오늘날은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주거형태도 이동성이 높은 사회로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곳에만 평생 살지 않는다. 유목민은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생활을 하듯 오늘날 사람들도 일과 직장 재산 증식 등 주가가치, 교통, 문화 환경 등의 다양한 이유에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 살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해왔던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진하리 소설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이웃들>은 가깝게 지내는 친구, 이웃, 가족 간의 내비치는 심리를 섬세하게 소설로 심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6편의 단편은 <휴가> 제외하고는 모두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을 생각하면 모두 같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소수자를 질시하고 배척하는 자신의 편협함을 정의감으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해관계로 얽혀 서로에게 예의는 갖추지만 정있는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냉정한 관계.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이름뿐인 다정한 이웃들은 동일한 세계관 안에서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서정인 작가의 '원무'와도 닮아 있다.

어쩌면 이해관계로 묶인 타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피로 연결된 가족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휴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주의 시선에서 본 가족들은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준왕이 두 살이던 해에 단체 가족 휴가에서 준왕의 누나 준희의 죽음을 중심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모른 척 살아가는 가족들 역시 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신인 작가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탄탄하면서 섬세한 심리묘사는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손홍규 소설가의 말처럼 이토록 무시무시해도 되는 걸까. 나 역시 진하리라는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사회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며 이것은 소설 속의 중산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지금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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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악녀 이야기 | 기본 카테고리 2023-07-1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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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세계의 악녀 이야기

시부사와 다쓰히코 저/김수희 역
AK(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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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떠올리며 신약성서 마가복음 6장 17~29절에 기록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가 떠오른다.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요한은 이를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비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선지자로 추앙받던 요한을 두려워한 헤롯의 반대로 죽이지 못한다. 요한의 죽임만을 생각하던 어느 날, 헤롯의 생일이 되어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가 어린 딸 살로메를 불러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였고, 같이 크게 기뻐했던 헤롯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다.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원했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던 헤롯은 결국 요한을 참수하고 만다.

성경에서의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고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과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는 요한에게 반해 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헤롯을 유혹하는 팜 파탈로 묘사되고 있다.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악녀란 어떤 존재들일까? 시부사와 다쓰히코가 정의한 문고판 후기를 보면 악녀란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악의 극한까지 간 여성, 혹은 애욕과 범죄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이라고 칭하고 있다. 악녀를 칭하는 기준 정확히 구분 짓기는 힘들지만 후세에 오래 전해질 만큼의 강한 인상을 남기며 남성의 운명을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여성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동, 서양을 합쳐 12명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엘리자베스 여왕, 메리 스튜어트, 마리 앙투아네트, 클레오파트라, 측천무후 등 다양한 시대와 국가의 여성의 삶을 그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고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는 매리 스튜어트를 둘러싼 얽힌 비극적인 비운의 삶과 폭군 네로의 어머니로서 그의 인생 전반부를 공포로 지배했던 아그리피나와 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 일개 여성이 지존의 자리에 올라 모든 남자들의 무릎을 굻게 만들었던 측천무후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극단적인 로맨티시스트 기질을 지닌 메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과연 '악녀'라고 불러야 할지 무척이나 의문스럽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순교자로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를 남편을 살해한 음탕한 여성이라고 비난한다. 많은 역사가나 시인에게 이토록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인도 드물 것이다. p78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그리피나 역시 자신의 지위가 언제든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신음했다. 황제에게는 메살리나가 낳은 브리타니쿠스라는 적자가 존재했다. 아그리피나의 친아들 네로는 황제에게는 남의 자식이나 매한가지였다. 장래에 대한 그녀의 불안감이 싹을 틔우고 있었던 이유다. p136

무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강인한 의지력과 정치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신에 대한 맹신이 존재하던 시대에 미륵의 화신이라느니, 주 왕실의 자손이라느니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감쪽같이 미혹시켰기 때문이다. 화려한 의식이나 사원 건립도 보기에 따라서는 백성을 홀리는 선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예상을 뛰어넘은 효력을 발휘해 결국 그녀는 전대미문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p198

때로는 개혁의 주체로 때로는 정의의 집행자로 번번이 자행돼온 극단적인 행동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간이 문명을 이룬 이래 계속해서 나타난 수많은 폭정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지금까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행해야 했던 수많은 정치적 행위들의 밑바탕에는 자신들 이외의 사람은 새로운 세상과 함께할 수 없는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저자가 풀어내고 있는 악녀들은 찬미와 증오를 동시에 받고 있으며 저자 또한 여전히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단순 선과 악의 개념을 초월해 한 시대를 뒤흔든 여성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졌던 건 권력이 갖는 양면성인 것인가? 인간에게 권력욕이 있는 한 폭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자는 잠재적인 폭군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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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 기본 카테고리 2023-07-1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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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저
창비교육 | 202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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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짧지 않은 거리를 가다 보면 필통의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났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최근, 레트로 열풍으로 인해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 뜨면 가족들을 위해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워 공책에 삐뚤삐뚤 써 내려가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며칠 전, 동호회에서 볼펜도, 샤프도 아닌 몇 자루의 연필을 지인분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어떤 뜻으로 연필을 주셨을까. 철학적 안목으로 하얀 종이에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엮어내라는 의미일까. 생의 행로를 한 글자 한 글자 까만 속심 닳아 없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쓰라는 의미일까.

선물로 받은 연필을 깎아본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앉아 칼로 연필을 깎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연필을 깎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연필을 깎는 것은 먹을가는 것처럼 들떴던 마음을 다스리며 한곳으로 모으는 훈련이다. 적당한 힘들고 칼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사르륵사르륵 육각형의 나무를 깎아내고, 뾰족하게 까만 심을 갈아내는 일은 마음에 굳게 박힌 아집을 갈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연하게 그려내는 연필은 수수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연필로 적는다면 선물 받은 네 자루 면 가능할까.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마음 가는 대로 다시 써도 된다. 볼펜처럼 한번 써 놓으면 절대 지울 수 없는 고집이 아니다. 잘못 쓰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써도 절대로 화내는 일이 없다. 나에게만큼은 연필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포용과 배려의 상징인 것이다.

이향규 작가의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에서는 사물에 담긴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감정들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킨슨병을 알리는 남편의 파란색 팔찌와 영국으로 처음 이주하고 힘들고 외로웠던 가족들에게 따뜻함을 나눠주웠던 교회와 펍,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 안의 공동묘지 등 일상에서 평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여러 사물과 장소를 통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느꼈던 삶의 온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토니 몸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떨린다.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지난가을부터 고무 팔찌를 오른 손목에 끼고 다닌다.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된 팔찌에는 파킨슨병 지원 단체 연락처와 함께 이런 문구가 있었다.

"저는 파킨슨병 환자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사람이 있으면 이걸 보여 주면 되겠다며 좋아했다. 토니는 몇 달간 팔찌를 벗은 적이 없다. 샤워할 때는 물론이고 잘 때도 끼고 있다." p24

"펍은 진짜 동네 '허브' 같아. 중요한 일을 하네." 에이드리언은 펍이 동네 네트워크의 중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계산대 아래 선반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코팅까지 해서 제법 잘 간수하고 있었던 오래된 신문 기사 제목은 이랬다.

"커뮤니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학교, 교회, 그리고 펍이다."

맞다 한국에서 이주해 온 우리를 반겨 준(굳이 반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딘가 속할 수 있게 해 준) 곳도 딱 그 세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나는 교회, 남편은 펍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p134

"여기에서는 누군가가 죽은 이를 생각하며 남긴 기억 조각을 만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거리에 벤치를 만들고 공원에 나무를 심는다 마을 곳곳에 있는 나무 의자의 등받이에는 보통 '사랑하는 기억을 담아'로 시작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생몰 일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나는 그런 벤치를 보면 천천히 걷게 된다. p189

일상의 익숙한 물건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느꼈던 소소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장애인, 돌봄 노동, 전쟁, 남북 분단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저자의 생각 또한 드러나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사회 전체적인 부를 상승시키는 방식을 우리 사회에 집중해왔다. 그나마 사회 발전의 성과로 전반적인 복지수준도 함께 높아졌지만 "앞으로도 사회가 지속 가능한가?"라는 포용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희생과 실천들이 세상을 바꿔왔음을 말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공동체의 따뜻한 손길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이 책을 읽게 될, 읽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될 사회의 변화에 장애, 나이, 경재 능력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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