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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6회 | 비너스에게 2010-09-3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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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로 받는 날

 

  비너스에게.

  수요일이 되어 ‘애미’에 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어.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하마터면 앨리스의 뿔에 받힐 뻔한 거야. 나는 앨리스가 콧김을 뿜어대며 내게 돌진을 하는데도 설마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기만 했고, 양나 씨가 맨발로 뛰어나오며 “소년! 뛰어! 얼른!”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몸을 돌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어. 나는 뛰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 두 발로 뛰는 것과 네 발로 뛰는 건 비교가 되지를 않았어. 앨리스의 뾰족한 뿔이 바로 내 엉덩이를 겨냥한 채 바싹 가까이 다가와 있었지. 나는 그제야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속도를 올려 전력질주로 도망을 쳤고 앨리스는 그런 내 뒤를 쫓았으며 그 뒤를 양나 씨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쫓았어. 우리 셋은 꼬리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어. 하나는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지.

 

“앨리스!”

 

  양나 씨가 손뼉을 치며 날카롭게 외치자 앨리스는 날 쫓던 걸 멈추고 방향을 바꾸었어. 양나 씨는 우리를 향해 나는 듯 달렸어. 앨리스의 뿔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 달리던 양나 씨가 우리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앨리스가 쫓아들어갔어.

 

  “소년! 문 닫아!”

 

  양나 씨가 반대편 담을 훌쩍 뛰어넘으며 소리쳤어. 나는 허겁지겁 우리 문을 닫아걸었어.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앨리스가 사납게 뒷발질을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내가 묻자 양나 씨도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어.

 

  “앨리스는 지금 발정기야. 발정기가 되면 사나워지거든.”

 

  “제기랄. 엉덩이에 구멍 날 뻔했어요.”

 

  양나 씨가 웃음을 터뜨렸어.

 

  “미안. 진즉 우리에 가뒀어야 했는데. 앨리스가 답답해하는 게 불쌍해서 그만.”

 

  사실 나는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거라 양나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녀는 지나치는 말로라도 남 탓을 한 적이 없어. 나는 양나 씨에게 이런저런 많은 말들을 듣고 있었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녀를 점점 더 신뢰하게 되는 걸 테지. 나도 누군가의 신뢰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보다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더 많을 거야.

양나 씨는 내 팔에 팔짱을 끼었어.

 

  “미남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걸. 오맙또는 재미있었니?”

 

  “생각보다 힘들긴 했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놀이공원에서 네 친구들을 만났다고?”

 

  “네.”

 

  “당황했겠구나.”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혼자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걸 ‘우연’이 대신 처리해준 느낌이에요.”

 

  양나 씨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어.

 

  “그래. 그런 식이면 앞으로 다 잘될 거야.”

 

  놀이공원에서 영무와 우연히 만난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가 고민을 했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영무, 그러니까 정상적인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건가 하고. 엄마는 아직도 보란 듯이 내 책상 위에 뉴질랜드 유학 가이드북을 올려놓았고 학원소개 책자를 거실 테이블에 비치해두었어. 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엄마로서는 최대한의 양보였겠지. 나는 그녀가 단지 나를 자신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 내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해본 결과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인지 혼란스러웠어. 하지만 이제 이유야 어떻든 그만 쉽게 쉽게 흘러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버렸어. 미지의 나라, 미지의 사람들. 어쩌면 거기에서 나는 예전처럼 사소한 일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아무 생각 없는 아이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아무런 상처도 없는 듯, 무거운 부담감도 가지고 살지 않는다는 듯 말이야.

 

  “유학원에 등록했어요.”

 

  “흠. 충분히 생각해본 거니?”

 

  “네. 엄마가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고 약간 울었어. 그녀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지. 그냥 이걸로 된 거다, 라고.

 

  “소년. 유학을 가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정말 가고 싶은 건지 아닌지가 중요해.”

 

  “가고 싶어요.”

 

  “그게 현실도피인지, 아니면 현실대응인지 잘 구분하고 있는 거니?”

 

  “뭐가 다르죠? 결국 하는 일은 같은데.”

 

  “완전히 달라. 단지 도피일 뿐이라면 거기에는 전혀 다른 현실이 있다고 믿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할 거지? 또다시 짐을 꾸려 다른 나라로 떠날 거니?” 양나 씨가 너무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나는 할 말이 없었어. 그녀도 나의 결정을 기뻐해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양나 씨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어.

 

  “그럼 다행이야. 다행한 일이지.”

 

  우리는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어. 양나 씨가 치즈 케이크와 커피를 내오는 동안 씨아는 단잠을 깨운 나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씨아는 사랑을 위해 몸단장을 하는 시간 이외에는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 같았어.

 

  “넌 행복한 놈이구나.”

 

  내가 부드러운 등을 살짝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씨아의 몸이 움찔했지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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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5회 | 비너스에게 2010-09-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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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무. 그리고 온갖 농담을 지껄이며 함께 몰려다니던 학교 친구들. 그애들 틈에는 흰 팬티가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애도 없었고 눈가리개를 한 듯 멍해 보이는 애도 없었어. 계속 롤러코스터를 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도 없었고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외진 곳으로 도망 온 어른 게이도 물론 없었지. 하여간에 어떤 문제가 있어 낙오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영무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자 곧 다른 녀석들도 나를 보았어. 나는 이맘때쯤이 개교기념일이라는 걸 기억해냈어. 게다 내일은 토요일. 롤러코스터를 토할 때까지 타는 것만으로는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였어, 비너스.

  영무가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듯 보였어. 다른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옆구리를 찔러가며 무언가를 속삭였지. 나는 그동안 ‘애미’를 들락거리며 무언가 달라졌을까? 천만에. 나는 몸을 돌려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어. 당황한 현신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그래. 나는 겨우 그 정도의 인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영원히 변화하지 못할지도 몰라. 숨이 턱에 닿자 나는 뛰던 것을 멈추었어. 그러고는 몸을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지.

 

  “성훈아!”

 

  영무가 소리도 없이 내 뒤를 쫓아와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 그 녀석도 달리느라 숨이 찼는지 호흡이 무척 거칠었지. 나는 뭐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펄쩍 뛰며 그 녀석의 손길에서 벗어났어. 이제 뭘 어째야 하는 거지?

 

  “어, 영무야, 반갑다.”

 

  제기랄!

  영무는 막상 나를 붙잡아놓고는 어색하게 서서 말 한마디 없었어. 나는 우리 사이에 흐르는 그 낯선 공기 때문에 울고 싶어졌어.

 

  “……잘 지냈냐?”

 

  영무가 간신히 내놓은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어.

 

  “전화가…… 몇 번이나 했는데 안 되더라.”

 

  난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놓았고 집 전화는 울리든지 말든지 상관도 하지 않았어. 어쩌면 영무가 집으로 직접 찾아와주었다면 나는 곤란한 척하면서도 내심 기뻤을지 몰라. 하지만 그 녀석도 끝내 날 찾아오지는 않았어.

 

  “그렇지, 뭐.”

 

  “친구들이냐?”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목에 돌덩이라도 걸린 듯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어. 나는 영무 앞에서 그애들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거야. 심지어는 현신까지도. 어째서 나는 이것밖에는 안 되는 인간인거지.

 

   “……아줌마도 잘 계시지?”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보았어. 지금 이 순간 영무와 우리 엄마 안부 따위나 주고받고 싶지 않았어. 나는 그애에게 내 수많은 잘못을 사과하고 싶었고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고 싶었어. 나를 이해해달라고 영무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영무는 시시한 말이나 내뱉으면서 나를 더욱 절망시키고 있었지.

 

  “네가 조금 더…… 괜찮아지면…….”

 

  영무는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쉬었어.

 

  “아니야. 모처럼 친구들하고 놀러 온 거니까 재미있게 놀다 가라. 나도 그만 가볼게.”

 

  뭔가를 말해야만 했어. 그래야 영무를 잃지 않게 될 테니.

 

  “저기, 영무야.”

 

  영무는 가버리는 대신 내 말을 기다려주었어.

 

  “내가…….”

 

  “그래.”

 

  “……내가 좀…… 괜찮아지면…….”

 

  “그래.”

 

  “……미안.”

 

  영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어. 그 녀석은 여전히 따듯한 손을 가지고 있었고, 날 포기하지도 않았어. 이제 내가 그 녀석을 찾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말 괜찮아지는 걸까. 시간과 인연의 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영무는 조심스레 내 어깨를 토닥였고 잠시 내 곁에 머물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어. 나는 숨을 가다듬은 후 내 세계로 돌아갔지.

 

  대충 상황을 눈치챈 현신이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어. 필은 내가 멋대로 행동한다며 투덜댔고 잡은 그런 필에게 눈치도 없다고 면박을 주었으며 도라는 롤러코스터를 한 번 더 탈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멍하니 음악을 들었고 누룽지는 내 곁에 찰싹 달라붙었어. 그때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어.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문 채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을 구경했어. 불꽃이 터지는 동안 다행히 도라는 배가 무척 고프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롤러코스터에 대한 열망을 접었어. 우리는 노천카페로 몰려가 치킨과 콜라를 산더미처럼 주문했어. 현신이 구운 감자와 옥수수, 과일 샐러드를 먹는 동안 우리 여섯 명은 마치 대마초를 실컷 피워대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닭다리를 뜯었어.

  그건,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맛이었어, 비너스. 밤새도록 폭풍 설사에 시달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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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4회 | 비너스에게 2010-09-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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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나와는 달리 줄곧 시시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표를 끊고 출입문을 통과하자 모두들 들뜨는 것 같았어. 현신도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어. 원래 학생 같은 느낌이어서인지, 그는 아는 동생들을 데리고 놀러 온 대학생처럼 보였어. 우리는 약속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했어. 다른 건 아무것도 타지 않고, 도라가 만족할 때까지 오로지 롤러코스터만. 그동안 놀이공원을 꽤 들락거렸어도, 그렇게 무한정으로 롤러코스터만 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도라가 질린다는 듯 말했어. 평일 오후인데도 롤러코스터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어. 나는 도라에게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어.

 

  “끈질기게 버티다보면 결국 우리밖에 남지 않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지는 않아.”

 

  우리는 줄의 맨 끄트머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필과 잡은 계속 수다를 떨었지. 현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도라를 달래주느라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어. 나는 이제 누룽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받아들인 터라 그애에게 이런저런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마음껏 웃겨주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외롭고 답답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누룽지와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제법 즐거웠다고. 그리고 누룽지의 굉장한 차림새 역시 그애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누룽지도 세련돼져서 이때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날이 올까? 아니면 누룽지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퍼포먼스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이러한 차림새를 고수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 되어도 굉장한 일이지 않아, 비너스? 사람은 계속 변화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말이야.

  사십여 분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어. 이제 도라는 너무 긴장을 해서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고 있었어. 현신은 그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뒤 자리에 앉혀주었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말았어. 내가 현신을 정말 사랑하기라도 하는 걸까, 라고 잠깐 고민해보았지만, 비너스. 사실 나는 여전히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 그것 때문에 이렇게나 된통 혼이 나고도.

  단단히 벨트가 채워지고, 열차가 서서히 출발을 하자 옆에 앉은 누룽지는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했어. 나는 반사적으로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해주었지. 마도 이어폰을 뺀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잡과 필은 벌써부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어. 열차가 태산이라도 올라가려는 듯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동안,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은 도라와 현신의 뒤통수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어. 그러고는 마침내 중력의 장난이 시작되었어. 일제히 터지는 비명, 지구를 뚫고 핵으로까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탈락감, 내 몸이 거대한 장난꾸러기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 옆을 슬쩍 보니 누룽지는 “내릴 거야! 내려주세요!”라고 외치며 벨트를 끌러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 나는 눈을 감았지.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칼처럼 꽂히는 열차의 굉음에 묻혀버렸어. 모든 게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홀가분해진 마음 때문인지 조금 눈물이 나왔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롤러코스터는 여전히 흥분되고 즐거웠기 때문이야.

 

  “대단해!”

 

  도라가 창백한 얼굴로 외쳤어.

 

  “정말이지, 굉장해. 장난 아냐, 이거.”

 

  도라가 팽이처럼 빙빙 돌며 계속 중얼거렸어. 딱하게도 누룽지는 너무 우는 바람에 마스카라까지 검게 번져서 이제는 권투선수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은 판다곰처럼 보였어. 마는 이어폰을 낄 생각도 하지 않고 필과 잡에게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감상을 코너별로 토해내고 있었어. 현신은 핏기 없는 얼굴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했지. 그는 이런 것에 무척 약한 사람임에 틀림없었어. 하지만 우리는 도라가 지칠 때까지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약속했으므로 또 사십여 분을 기다렸고, 차례가 돌아와 다시 롤러코스터를 탔어. 두 번을 타고 나니 탈락자가 생겼어. 누룽지는 흰 팬티를 훤히 보이며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고 저걸 계속 탄다면 누군가가 자기를 업고 다녀야 할 거라고 했어.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군말 없이 그애가 쉬도록 놔두었어. 사실 제일 안 된 건 현신이었어. 그는 책임감 때문인지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거든. 그는 도라 때문에 계속해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야 했어.

 

  “내가 도라와 함께 탈게요. 앞자리에 타는 걸 좋아하거든요.”

 

  현신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고맙다는 뜻의 미소를 보이자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말았어. 세 번째의 롤러코스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어. 해가 져서 사방이 푸르스름했고 놀이공원의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어.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나는 도라에게 아래를 내려다보라고 외쳤어. 도라의 환호성은 열차가 급강하를 시작하자 비명으로 변했지. 네 번째에는 필과 잡과 현신이 포기를 했어. 마는 토할 것 같다면서도 한 번을 더 탔고 다섯 번째는 도라와 나만 남았어.

 

  “도라, 이제 불꽃놀이가 시작될 거야. 어때? 이번만 타고 가서 그걸 볼래?”

 

  도라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어. 비너스.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그만 포기하고 싶었어. 머리가 흔들려서 아팠고 속이 울렁거리는데다, 다리에도 힘이 없어 걷는데 몸이 비틀거렸단 말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도라는 혼자서 놀이공원에 오는 것은 뻘쭘하다고 했어. 그 말은 롤러코스터를 꼭 타보고 싶은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타고 싶다는 뜻이었을 거야. 나는 그애가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었어. 그애가 아니라 날 위해. 그것만이 힘겨운 내 일상, 다른 아이들의 일상, 그러므로 모두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서였어.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도 얼마 없었어. 도라와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어. 한동안의 비행 끝에 열차가 도착하자 결국 나는 토하고 말았어. 도라가 당황해서 내 등을 두드려주었고,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신과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왔어. 낮에 먹은 벌건 토마토를 게워내고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믿기지 않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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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3회 | 비너스에게 2010-09-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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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신은 우리를 위해 8인승 승합차를 렌트해왔어. 아이들이 차례로 승차를 하는 동안 양나 씨는 옆에 서 있다가 한 명 한 명 일일이 껴안아주었어. 맨 마지막에 타는 나를 다정히 껴안으면서 양나 씨가 속삭였어. 아이들을 잘 부탁해. 나는 그녀가 나를 믿어준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어. 그녀는 적어도 내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거든. 차 안에 앉아 창을 통해 마당에 있는 하나와 앨리스와 양나 씨와 아이들을 보았어. 부탄과 습자지가 호스로 물을 뿜다가 서로를 향해 발사를 시작했고, 결국은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물을 마구 흩뿌려 마당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어. 하나와 앨리스는 마침 이때다 싶었는지 포플러나무 밑으로 황급히 도망을 쳤지. 부탄이 우리가 탄 차에까지 물을 뿌려대기 시작하자 현신은 황급히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어. 양나 씨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물을 뒤집어쓰며 비명을 질렀어. ‘애미’의 마당을 지나 열려진 문을 나와 길로 들어서도록 아이들과 양나 씨의 높은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왔어.

내 옆자리에는 누룽지가 앉아 있었어. 나는 그애가 불편했으므로 될 수 있으면 떨어져 앉고 싶었지만, 과연 그애는 누룽지라는 별칭답게 좀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어.

 

  “저, 누룽지.”

 

  “응? 왜?”

 

  “춥지 않아?”

 

  나는 차가 흔들릴 때마다 누룽지의 훤히 드러난 넓적다리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것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 그래서 내 재킷을 벗어 덮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

 

  “아니? 하나도 안 추운데?”

 

  이런 제길.

 

  “추울 거야. 여자는 저……, 음, 넓적다리가 추우면 안 된다고 엄마한테 들었던 거 같은데.”

나는 재킷을 벗어 누룽지에게 덮어주며 중얼거렸어.

 

  “넌 정말 친절하구나. 난 너처럼 좋은 애는 만나본 적이 없어.”

 

  나는 어색한 기분에 일주일 동안 잘 지냈느냐고 물어보았어. 그러고는 아차 싶었지. 대체 그따위 걸 물어서 뭘 어쩌자는 거람.

 

  “토마토 때문에 조금 힘들었어. 내가 또 다이어트를 하는 줄 알고 토마토를 먹을 때마다 아빠가 소리를 질러대서.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미안하니까.”

 

  “다이어트를 자주 하는 거야?”

 

  “그렇게 자주는 아닌데…… 가족들은 내가 하는 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렇구나.”

 

  누룽지는 잠시 후에 변명하듯 덧붙였어.

 

  “내가 사고를 많이 쳐서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웃으며 말하자 누룽지의 표정이 겨우 밝아졌어.

  나는 누룽지와 계속 이야기를 했어. 그애의 가족은 그애까지 네 명이었고 아래로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었어. 누룽지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돼. 내가 뭔가를 하면 다들 화를 내고 비웃어.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랬어.

하지만 비너스. 누룽지가 더 열심히 화장을 하고, 더 열심히 멋 내는 걸 상상해봐. 문제는 노력이 아닌 거 아닌가…… 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그럴 거야, 라고 말해주었어.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누룽지는 정말 목소리가 좋아. 작고 나직하고, 곱고, 다정하고, 따듯한 느낌의 목소리. 그래서인지 그애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다감하게 들려왔고 나는 그애의 기괴한 화장을 그럭저럭 잊어버릴 수 있었어.

  ‘애미’에서 에버랜드까지는 사십 분 정도의 거리. 평일 오후여서 진입로도 원활했고 주차장에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어. 현신은 우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각자 하고 싶은 게 있겠지만 오늘은 조금만 참자. 다 함께 왔으니 다 함께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했어.

 

  “촌스러.”

 

  필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어.

 

  “기왕 왔으면서 넌 대체 왜 그러니?”

 

  잡이 참견을 하는 사이 아이들은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동물원에서 풍겨오는 동물들의 냄새가 맡아졌어. 곱게 물들고 있는 붉은 노을 때문인지 나는 오랜만에 와 보는 놀이공원에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외출을 한 게 4개월 만이었고, 그 때문인지 학교를 다니던 평범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 ……물론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누룽지만 아니라면. 나와 누룽지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그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아서 나중에는 그들의 무례함에 염증이 날 지경이었어.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날이 떠오르고 말았어. 그들의 따가운 시선은 따가운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테지. 따듯한 시선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따듯한 생각뿐일지도 모르겠어, 비너스.

  아이들은 나와는 달리 줄곧 시시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표를 끊고 출입문을 통과하자 모두들 들뜨는 것 같았어. 현신도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어. 원래 학생 같은 느낌이어서인지, 그는 아는 동생들을 데리고 놀러 온 대학생처럼 보였어. 우리는 약속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했어. 다른 건 아무것도 타지 않고, 도라가 만족할 때까지 오로지 롤러코스터만. 그동안 놀이공원을 꽤 들락거렸어도, 그렇게 무한정으로 롤러코스터만 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도라가 질린다는 듯 말했어. 평일 오후인데도 롤러코스터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어. 나는 도라에게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어.

 

  “끈질기게 버티다보면 결국 우리밖에 남지 않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지는 않아.”

 

  우리는 줄의 맨 끄트머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필과 잡은 계속 수다를 떨었지. 현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도라를 달래주느라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어. 나는 이제 누룽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받아들인 터라 그애에게 이런저런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마음껏 웃겨주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외롭고 답답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누룽지와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제법 즐거웠다고. 그리고 누룽지의 굉장한 차림새 역시 그애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누룽지도 세련돼져서 이때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날이 올까? 아니면 누룽지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퍼포먼스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이러한 차림새를 고수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 되어도 굉장한 일이지 않아, 비너스? 사람은 계속 변화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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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 32회 | 비너스에게 2010-09-2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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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맙소사 또 금요일이다. 오맙또 프라이데이. ‘애미’를 들락거린 지 한 달이 되어가니 나도 애들이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알 것 같았어. ‘애미’를 오가다 보면 모든 것이 그곳에 맞춰지게 돼. 바로 어제가 수요일인 것 같은데 또 수요일이 되어 있고 금요일이 엊그제였는데 또다시 금요일 아침이 되어 있거든. 즉 ‘애미’에 가지 않은 다른 날들은 모조리 기억에서 소거되고 있는 셈.

  그래서 나는 또다시 금요일을 맞이하여 ‘애미’에 와 있었고, 필과 잡, 누룽지, 마, 그리고 도라를 만나게 된 거야. 이제 날씨는 제법 쌀쌀해서 마당의 포플러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조금 있으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오맙또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평균 열두 명 정도. 개인사정에 의해 빠지는 아이들도 있고, 그룹 활동을 할 만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아이들은 아예 참가를 시키지 않아. 그러니 나와 함께 움직일 다섯 명은 바깥세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거의 끝난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양나 씨는 우리들의 단체 외출을 많이 염려스러워했고, 그럴 때면 우리의 보호자이자 상담자라는 그녀 본래의 역할이 실감 돼. 현신은 약속대로 ‘애미’에 와 있었어. 그의 무릎에 얌전히 올라가 있는 씨아처럼, 아이들은 그의 주위에 잔뜩 모여 있었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 가슴이 두근거렸어. 제길. 이게 뭐지?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한다고 완전히 인정한 게 아니란 말이다. 대체 내 심장은 왜 이리 방정맞은 거냐!

  양나 씨와 ‘애미’에 남는 아이들은 모두 다섯 명. 그들은 하나와 앨리스를 씻겨준다고 부산을 떨었어. 그애들은 내게 자기소개를 했는데, 부탄(성격이 불같아서), 검댕(눈썹을 보면 왜 그런 닉네임이 붙었는지 절로 알게 됨), 오궁(남자녀석인데, 엉덩이가……), 습자지(이 녀석은 긴장하면 오줌을 지린다는 거야. 그래서 습, 자지, 가 된 거지), 이와이(아하, 바로 이 녀석이 하나와 앨리스의 이름을 붙인 거였어). 그렇게 봐서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통 알 수 없는 평범하고 명랑한 아이들. 그애들 모두 벌어진 틈새에 자기도 모르게 떨어져버린 걸까?

 

  “에버랜드에 가는 거야?”

 

  이와이가 물었어. 작고 통통한 그애는 누가 봐도 귀여운 느낌의 여자아이. 하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넌 알 필요 없어.”

 

  필이 쌀쌀맞게 대답했어.

 

  “우리는 오늘 거기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거야.”

 

  “야, 가르쳐주지 마.”

 

  필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쏘아붙였어.

 

  “그게 뭐 어때서?”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야. 누가 내 희망사항을 알게 되는 건 싫단 말이야.”

 

  “넌 아직 말하지도 않았잖아?”

 

  “어쨌든!”

 

  필은 몹시 예민한 성격인 것 같았고, 다른 아이들은 그애를 잘 아는 모양인지 아예 상관을 하지 않았어. 나는 곤란함을 느끼며 그대로 물러섰어. 그애들과 다투게 되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거든.

 

  “필은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누룽지가 슬그머니 내 곁으로 와 속삭였어. 생각해보면 나는 별로 화를 내본 적이 없어. 누구와도 잘 지내는 게 내 장점이었고 누구에게나 잘 맞출 자신도 있어. 성격이 좋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듣다 보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 건지도 몰라.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게 아무 소용이 없었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여서, 상대가 모난 행동을 보여도 크게 신경 쓰지를 않았어. 그런 만큼 자신도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지. 나는 아이들의 그런 태도가 몹시 낯설었고,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어.

 

  “나는 정말 토마토만 먹었어. 그래서 이제는 ‘토’자만 나와도 토할 지경이야. 그래서 오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내일 토하게 될 거야. 토요일이니까.”

 

  잡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앞으로 토마토케첩도 못 먹을 것 같아.”

 

  마가 불쑥 내뱉었어.

 

  “도라는?”

 

  잡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어.

 

  “내 피부를 봐라. 일주일 내내 토마토만 먹으면 이렇게 피부가 예술이 되는지 누가 알았겠냐?”

 

  확실히 도라의 안색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어. 대체 그전에는 무얼 먹었기에?

 

  “누룽지는 단지 살을 빼려고 이 짓을 했었단 말이야?”

 

  도라가 몸을 부르르 떨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어.

 

  비너스. 여기에서 나는 누룽지의 외모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여자애들의 외모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 일반적으로 예쁜 애를 보면, 물론 나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냥 예쁜 거지, 정말 예쁜 건 아냐. 마찬가지로, 나 역시 추녀를 보면 못생겼다고 생각은 해. 하지만 그냥 못생긴 거지, 정말 못생겼다고 느낀 적은 없어. 그건 여자의 미추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야. 하지만 그런 나도 누룽지의 얼굴은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었어. 우선, 시선을 떼기가 너무 힘들어. 극치의 조화가 사람의 시선을 모으듯, 극치의 부조화도 시선을 모으게 되는 법이거든. 요즘은 ‘원판불변의 법칙’이

깨지는 시대라고들 하지. 하지만 누룽지의 얼굴은 단순히 턱이나 광대를 깎고 콧대를 높이고 눈을 찢는다 해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 물론 일주일 동안 토마토만 먹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 안타깝게도, 누룽지는 목, 어깨, 팔, 다리, 손, 발, 엉덩이, 종아리, 허리 등등 부위별로 떼놓고 봐도 어디 하나 건질 곳이 없었어. 대체 거무죽죽한 피부에 얼룩까지 진 건 무슨 까닭일까?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누룽지의 외모에 대해 이렇듯 시시콜콜 늘어놓은 건 바로 그녀의 굉장한 차림새 때문이야, 비너스.

  누룽지의 눈은 굉장히 커. 하지만 툭 튀어나온 데다 눈 사이의 간격이 마치 벌판처럼 넓게 느껴져. 그 거대한 눈두덩에 새파란 아이섀도를 권투선수에게 제대로 얻어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칠한 데다, 원래 눈썹이 나 있는 자리의 2센티미터 정도 위에 검은 펜슬로 굵은 눈썹을 또 하나 그렸어(아마 눈과 눈썹 사이의 간격이 너무 가깝다고 느꼈나봐). 결이 굵고 거친 머리카락은 여러 번 탈색을 한 상태라 손상이 너무 심해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고. 누룽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짧아서 그애가 굳이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흰색 팬티가 다 보이고 있었어. 게다가, 적어도 12센티는 되어 보이는 통굽 구두에 올라타 있었지. 지난주에는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옷차림도 수수했거든. 놀이공원에 간다고 나름 신경을 쓰고 나온 모양이었어.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쩔쩔맸지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아 했어. 그건 그냥 누룽지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듯,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토마토만 먹어댄 고역에 대해 투덜댈 뿐이었지.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어, 비너스. 아이들의 무덤덤한 태도가 계속되자 나 역시 누룽지의 차림새가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으며, 나중에는 그저 이 즐거운 모임에 대해 한껏 부푼 기대감을 극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던 거야. ……잘 생각해보면,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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