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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거점을 밝혀 주는 지도를 손에 넣다 | 기본 카테고리 2023-08-26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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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생각의 요새

고명섭 저
교양인 | 202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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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거점을 밝혀 주는 지도를 손에 넣다

- 생각의 요새를 읽고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

 

내가 읽은 생각의 요새는 작전 지도와 같았다. 작가에게 이 책은 오랜 시간 여러 책을 읽고 사유하며 구축해 놓은 생각의 요새라면, 독자에게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지도가 되어준다. 이 요새를 독자와 함께 나누면서 독자는 이 요새를 출발점 삼아 새로운 책읽기의 고지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작가는 독자의 생각을 일일이 대신 해줄 수는 없다. 이 작업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을 전진시킬 수 있도록 길을 밝혀놓은 작업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은 한 권 한 권이 읽기 만만치 않은 사유의 결과물들이다. 다만 저자는 독자 보다 먼저 지적 모험을 경험하며 여러 거점들을 찾아 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개별적이고 지속적인 책읽기작전에서 중요한 고지를 독자를 위해 밝혀 놓은 것이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의 특징은, 저자가 각 저작의 핵심 개념을 명료하게 요약해놓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요약 잘하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책의 핵심적인 내용에 작가가 파악한 책의 가치와 맥락을 더하여 책읽기 작전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도서들의 위상을 제시하여 독자가 이 책을 지도삼아 따라가다 방향 감각을 잃었을 때,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개별적인 도서의 이해뿐만 아니라, 해당 작가의 사상, 또는 사상의 변화에 대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은 생각의 요새에 보관되어 있는 일급비밀의 작전 계획서 같다고 느꼈다.

 

특히 이 책은 철학, 정치 및 사회, 종교, 문화, 동양 사상, 과학, 문학 및 비평 등 폭넓은 사유의 고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작전 지도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독자가 요새로 삼고 싶은 사유의 거점을 먼저 정하면 좋을 것이다. 이 작전 계획서를 기반으로 독자가 사유의 거점을 정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 이를 제 것으로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본문에서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하기 시작했다’(29)실존의 의미를 소개하고 있듯이, 결국 독자는 저자가 마련해놓은 요새를 언젠가는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자신이 선정한 거점을 찾아 익숙한 요새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생각의 요새는 독자의 책읽기 작전을 도와주는 작전 지도이면서, 이 탐험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든든한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한다.

 

1장에 소개된 철학서들을 보면, 내가 이 책들을 읽고 이해하려면 족히 몇 년을 걸릴만한 책들이다. 하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해당 철학서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모르는 철학자들의 저작도 많지만, 이름을 들어보았더라도 막연히 이 철학서들이 어려울 것이라 여겼던 책들도 있다. 여기서 저자의 소개를 듣다보면 왠지 도전해볼 수 있겠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철학서 읽기에 실제로 도전한다면, 현실은 다를 것이다. 곧바로 가수면 혹은 혼수상태에 빠져들 테다. 그러므로 생각의 요새을 읽을 때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이 철학서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유지하되, 저자가 마련해 놓은 생각의 요새를 출발점삼아, 다른 사유의 거점들을 향해 과감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철학서들에 대한 저자의 소개를 따라가며 몇 권의 거점을 발견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철학적 사유의 거점들에 도전해보고 싶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악어, 수학 예찬, 그리고 신유물론 입문, 폭력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들이다. 언젠가 이런 사유의 거점들을 탐험하게 될 때, 나는 저자가 공들인 독서 및 사유의 시간과 글쓰기의 시간에 힘입어 그가 밝혀 놓은 길을 따라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또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꾸준히 묻고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밝혀 놓은 다양한 사유의 거점들 가운데, 우선 나의 관심을 끄는 분야는 과학이다. 그래서 5마음과 우주라는 사유의 거점을 먼저 탐색해보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관심을 가진 작가는 D. H. 로런스와 괴테, 뉴턴, 그리고 일본에서 존경받는 지식인이자 물리학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다. 뉴턴의 경우, 올해 새로 완역 출간된 프린키피아가 소개되고 있어 반가웠다.

 

이 장에서 이 책의 전반적인 특징 하나를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가 책을 소개할 때, 유명 작가의 저작과 해당 작가의 면모를 다룬 저서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D. H. 로런스의 저작 아포칼립스를 소개한 후, 이어서 로런스의 면모와 그의 사상을 연구한 백낙청 교수의 저작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을 함께 소개하는 식이다. 이렇게 관련 있는 주제아래 함께 읽기를 하면 로런스의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질 것이다. 나아가 저자가 보여준 것처럼 해당 주제에 대한 나름의 맥락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볼 수 있다.

 

같은 장에서 이렇게 동일 작가나 작품을 짝을 지어 다룬 방식은 관련 주제나 작가에 대해 특정한 맥락 속에서 이해를 깊게 해줄 수 있는 읽기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독자가 괴테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해 종합적으로 알 수 있도록, 관련 도서를 짝지어 놓은 느낌이다. 괴테는 일생의 역작 파우스트60년 가까이 쓰고 고쳤다. 저자는 이 작품에 대한 광범위한 해설서 불멸의 파우스트를 소개한다. 이어서 이 작품과 관련하여 괴테의 면모를 좀 더 파악할 수 있는 괴테와 융이란 저작을 또 다른 사유의 거점으로 제시한다.

 

생각의 요새가 지니는 장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전에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트헨은 과오 많은 파우스트를 인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파우스트가 구원을 얻었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많은 남자를 무슨 근거로 구원했는지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독문학자 전영애의 견해를 소개한다. 파우스트자체가 대문호의 방대한 사상이 응집된 작품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부분에서도 전문 연구자들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하는 저자의 예민한 안목이 놀랍다. 이처럼 생각의 요새는 독자가 이미 읽었더라도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 놓기도 한다. 나는 조만간 이 책을 출발점 삼아, 파우스트라는 높고 중요한 고지를 향해 다시 탐험에 나설 예정이다.

 

이 책에 재인용된 D. H. 로런스의 말 중에서 마음에 든 한 문장이 있다. 소설 읽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소설이란 감정의 모험의 기록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사유의 모험이기도 해야 한다.”(391) 이전에 로런스의 고백적인 에세이와 소설 일부를 읽고 놀란 적이 있다. 처음부터 로런스의 문장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작가의 지성적인 측면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책에 인용된 로런스의 말은 생각의 요새가 표방하는 사유의 모험이란 취지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로런스는 당대에 외설 작가라는 비난과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계급적이고 기득권적인 제약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병적인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있었다. 나는 저자가 설명해준 것처럼, 로런스가 자기다움의 실현을 추구했다는 점에 공감했다. 로런스 소설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사유의 모험이라는, 지적인 면모를 분명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사유의 거점은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는 작가와 그 저서였다. 저자 고명섭은 이 놀라운 작가의 여러 저작물 중에서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이라는 제목의 과학사 서적 1·2권을 소개한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일전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던 역작 과학의 탄생을 우연히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저자 고명섭은 소개하는 도서와 작가에 대한 이해를 마찬가지로 저자 나름의 맥락에서 알려준다. 역시나 그는 요시타카의 다른 저서인 과학의 탄생16세기 문화혁명, 그리고 나의 1960년대일본 과학기술 총력전후쿠시마, 일본 핵 발전의 진실까지 묶어서 독자에게 소개해주는 꼼꼼함을 잃지 않는다. 이제 여기에 최근 출간된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3권까지 포함하면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근대 과학사 3부작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과학 분야에서 탐험할 사유의 거점은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로 정했다.

 

생각의 요새을 읽는 독자마다 이 책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나는 내 책읽기 여정에서 하나의 거점을 발견하여 모험해보고 싶은 분야를 먼저 골랐다. 이후 관심이 가는 저자나 책을 선정하면, 이를 내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 방식으로 삼았다. 우리는 인생에서 저자가 소개한 인물 사마천, 마키아벨리, 단테처럼 언제든 궁핍해지거나 실존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 이 책은 궁핍한 시기에 잠시 머물며 숨을 고를 수 있는 견고한 생각의 요새가 될 수도 있겠다. 내게는 내가 직접 만들어가는 사유의 거점과 가는 길을 밝혀주는 작전 지도와 같다. 그러므로 한 번 읽고 덮어 두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언제든 새로운 사유의 거점을 탐험할 때 참고가 되고 새로운 모험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책 속으로]

[1] “집을 떠나는 것은 바깥에 서기, 곧 실존하기를 가로막는 기존의 자기적응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탈합치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관성대로 살지 않고 진정으로 실존하는 삶을 사는 길이다.”(29)

- 탈합치 (프랑수아 줄리앙) 소개 글 중에서

 

[2] 억지로 고안해낸 언어는 대가의 말을 바보처럼 반복하거나 멍청하게 모방하는 광신적 신봉자들을 양산하게 된다. 예술에서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철학에도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의 시기, 따라서 철학을 위한 철학의 시기가 있는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텍스트 종교가 나타나는 시기이며 이 시기에 글쓰기는 기도가 되고 사고는 주문이 되며 방법은 비이성이 된다.(45)

- 아리스토텔레스의 악어(미셸 옹프레) 소개 글 중에서

 

[3] 인종은 백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색인종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지 백인 자신들을 향해 쓰이지 않는다. 백인은 인종의 하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그 자체다. “다른 사람은 인종이고 우리는 그냥 인간이다.” 이것이 백인들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백인은 언제나 특수성을 넘어선 보편성 자체로 자신을 드러낸다.(167)

- 화이트 (리처드 다이어) 소개 글 중에서

 

[4] “자연 현상에서 신의 존재를 유추하는 것도 분명히 자연철학의 일부다뉴턴이 중력의 배후에 신이 있다고 믿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야마모토의 책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자연철학의 신학적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데, 뉴턴의 고백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459)

- 프린키피아 (아이작 뉴턴) 소개 글 중에서

 

[5] “훌륭한 책은 독자의 뇌를 흔들어 깨운다. 뉴런에 충격을 가해 깜짝 놀라게 한다. 새로운 생각이 담긴 훌륭한 책은 독자를 사유의 새 길로 이끈다. 책을 읽다가 독자는 문득 자기가 낯선 길로 들어섰음을 깨닫게 된다. 훌륭한 책은 문장들을 외우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책을 통째로 외우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한다면 그 책은 틀림없이 훌륭한 책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훌륭한 책은 독자의 대결의식을 불러일으킨다.”(531)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고병권) 소개 글 중에서

 

 

 

#생각의요새 #고명섭 #교양인 #gyoyangin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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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원자를 쪼갬으로써 세상을 분열시켰다 - 《원자 스파이》 | 기본 카테고리 2023-08-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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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원자 스파이

샘킨 저/이충호 역
해나무 | 202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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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원자를 쪼갬으로써 세상을 분열시켰다

- 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

 

 

 

원자 스파이에서 보리스 패시가 이끌던 알소스 부대의 활약(?)이 자세히 소개된다.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 전역과 미국의 긴장을 야기했다. 이를 막기 위해 얼마나 미국과 영국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투입했는지 엿볼 수 있다. 보리스 패시 대령은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를 비롯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의 정보를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인물을 집요하게 뒷조사하는 인물로 나온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그로브스 장군도 군부 내에서도 아웃사이더에 속했던 패시를 성가셔하고, 지나친 뒷조사를 막고 패시가 잘 할 수 있는 첩보 임무를 맡겨 유럽으로 보내버린다. 패시가 유럽에 가서 한 일이 바로 알소스 부대로 이름 붙은 첩보 부대를 이끌며 나치 과학자들을 납치하여 데려오거나, 소련에 두뇌가 유출되는 일을 막는 임무였다.

 

 “발터 보테가 실험을 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는지 몰라도, 졸리오(그리고 파리에서 다시 만난 이렌)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파리는 시간이 갈수록 물자 부족 사태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우울한 곳으로 변해갔다. 세상에서 손꼽히는 이 식도락 도시에서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길고양이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먹은 설취류 때문에 전염병에 걸릴 위험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을 막지 못했다. 나치는 또한 군수 공장 가동을 위해 모든 연료를 징발해갔다.”(188면)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 파리 하에서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독일 과학자 발터 보테의 시도와 이를 고통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마리 퀴리의 딸 이렌 및 사위 졸리오에 관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실험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해져, 길고양이까지 잡아먹던 시기였다. 이렌-졸리오 퀴리의 연구팀이 독일 과학자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시도를 몰래 방해했던 정황도 나온다. 졸리오는 이 즈음 레지스탕스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관련) 긴급 속보가 끝나갈 때, (양자 스핀을 처음 발견한 물리학자) 가우드스밋에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몇 달 전에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이 한참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안 뒤, 가우드스밋은 그로브스의 한 부관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아주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원자폭탄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552면)

 

부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 우리에게 그런 무기가 있다면, 우린 그걸 사용할 거요.” 그 예언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원자폭탄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 핵무기를 보유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 무기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단순히 방어 무기로 사용한다는 개념도 사라졌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하지만 불가피하게 원자폭탄은 다른 성격의 무기 ?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무기 ? 로 변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리란 것을 가우드스밋은 직감했다.” (552면)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고, 일주일 후에 독일은 항복을 하게 된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이 상황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나치의 핵개발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우월한 카드를 손에 넣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독일에 대항하여 무기를 사용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아직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으나, 당시 정세를 파악하던 정치 및 군부 인사들은 대부분 일본의 항복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독일이 항복하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은 기뻐했으나, 오펜하이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실제 핵무기의 사용 여부가 그 나름의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트리니티 테스트로 시연을 하는 것으로 일본의 항복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상당수의 군부 및 정계에서는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입장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이미 패색이 짙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데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며는 생전에 UN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핵무기 사용 협약을 통해 전쟁에서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먼 연기)이 오펜하이머에게 실망한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쟁 전에 물리학자들은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 큰 세계의 일에는 아무 관심 없이 온순하게 연구실에서 빈둥거리며 살아갔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크게는 원지폭탄 때문에) 물리학은 너무나도 중요한 분야가 되어 물리학자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장군과 정치인이 물리학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연간 예산은 수백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570면)

 

가우드스밋의 표현을 빌리면, 값싸고 부실한 재료로 실험을 하던 실과 봉랍시절, 그리고 두 엉뚱한 대학원생이 양자 스핀과 같은 기본적인 발견을 우연히 하던 시절은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가우드스밋의 한 동료는 샘은 전쟁 전에 재미있고 편안하게 하던 일로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말했는데, 졸리오-퀴리 부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모 버그, 케네디가 사람 등을 비롯해 원자 첩보전에 휘말린 사람들은 거의 다 그랬다.” (570면)

 

핵분열은 20세기 물리학의 획기적인 발견 중 하나였지만, 그것은 단지 중요한 과학 현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회 현상으로 떠올랐다. 미치광이의 수중에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절박한 노력에서 연합국 과학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광기를 뿜어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말할 것도 없고, 중수 공장 습격, 지질 조사를 위한 특공대, 암살과 방사능 치약에 이르기까지 그 광기가 온갖 것으로 뻗어나갔다. 모든 단계에서 관련 당사자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원자를 쪼갬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분열시켰다.” (571면)

 

원자 스파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모 버그가 나치 과학자들을 만나 미국으로 데려오거나 최소한 소련으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막는 첩보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치의 핵개발을 책임지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만나 암살을 시도할지 고민하던 에피소드였다. 만약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던 인물이 앞서 언급했던 보리스 패시(오펜하이머와 주변 인물들을 집요하게 뒷조사 했던 정보장교)이었다면, 인정사정없이 하이젠베르크를 암살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패시 같은 인물에겐 노벨상 수상 경력은 무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에 관한 에피소드도 소설 못지않다. 부모님은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 학살당했고, 전쟁으로 다른 편에 서게 되었던 그는 하이젠베르크와의 우정도 끝나 더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다. 물리학자가 참여한 나치 과학자 납치 임무에 가우드스밋 같은 물리학자가 함께 참여하여 적진을 뚫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원자 스파이는 여타의 역사서에 나오지 않는 배경과 인물들에 관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와 함께 미국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항하여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료다.

 

흥미 있게 책을 읽었지만 특히 마지막 문장 "원자를 쪼갬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분열시켰다."(571)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양자 스핀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

 

나치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첩보 활동에 참여했다.

 

한 때 가우드스밋(왼쪽)과 우정을 나누던 독일의 핵개발 책임자 베르터 하이젠베르크(가운데),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활약한 엔리코 페르미(오른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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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되던 역사 속 장면들 - 《카운트다운 1945》 | 기본 카테고리 2023-08-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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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카운트다운 1945

크리스 월리스,미치 와이스 공저/이재황 역
책과함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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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되던 역사 속 장면들

- 카운트다운 1945

 

: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

크리스 월리스(Chris Wallace) & 미치 와이스(Mitch Weiss)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0)

 

 

최근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개봉되었다. 이 책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더불어 영화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카운트다운 1945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이 책은 네 번째 미국 대통령을 지내고 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갑자기 사망한 1945412일부터 시작한다. 이 날은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로부터 116일 전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첫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 장치의 사용을 승인하기까지의 뒷이야기가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서의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정치계와 군부의 움직임과 고려사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량학살이 불가피할 이 장치의 사용을 두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를 급박하게 돌아가던 정계와 군부, 과학계 사이를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사망하여, 부통령으로 루스벨트와 일하기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던 트루먼은 곧바로 대통령의 직을 이어받는다. 이날 트루먼은 이렇게 기록했다. ‘온 세상이 내게로 떨어진 날이라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사항을 알고 경악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사용되기까지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주제와 소재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카운트다운하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들이 책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지난 며칠 간 이 책을 읽느라 늦잠을 자기도 했는데, 역사책을 읽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다시 확인해본 시간이기도 했다.

 

 


 

 

한 가지 떠오르는 예는, 원자폭탄을 개발했던 목적과 그 핵무기가 지닌 잠재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 그리고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정당성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사람마다 판이하게 달랐던 점이다. 어느 누구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발생한 참상에 대해 같은 인간으로서 애도와 두려움을 갖지 않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수십 만 명의 젊은이를 잃은 미국인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원자폭탄 투하 며칠 후 갤럽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의 85%가 이 결정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첫 폭발실험(트리니티 테스트)에 성공한 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구성원들(소수의 참여자들은 크게 죄책감을 느꼈고, 훗날 많은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느꼈다)이 환호하며 그동안의 성취에 기뻐했던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는 국가가 전쟁의 주체였으니 말이다. 물론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핵무기 사용에 대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국제 협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핵무기 사용에 따른 공멸의 가능성과 두려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죄책감은 점점 많은 이들이 실감하게 될 현실이었다.

 

여기서 주목해볼만한 점은 최초의 원자폭탄이 사용된 후, 60년이 지난 2005년에 또 다시 여론 조사가 시행되었는데, 그 결과가 놀랍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한 사실에 38%는 반대했으나, 여전히 57%는 여기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은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까지 논의된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이미 패색이 짙어진 일본에 대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더글러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였다. 트루먼도 당시에 참가한 독일의 포츠담 회담 당시에는 원자폭탄 실험 성공 여부에 의구심을 지녔기에, 우선은 일본에 대한 육상 침공을 염두에 있었던 정황이 보인다.

 

반면 상당수의 군사 전문가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지지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지지했던 이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육상 침공을 할 경우, ‘수십 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원자폭탄은 한 방에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미국의 아들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대신 일본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에는 탐탁지 않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다음 진술을 보면 실감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빠른 (전쟁의) 종결을 보장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토머스 패럴 장군, 223)

 

20-30만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일본의 도시 몇 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트루먼 대통령, 227)

 

국가의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끌어와 전쟁에 쏟아 붓고 있던 전쟁의 주체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빨리 끝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 일본인(여기에는 강제 동원되거나 생계를 위해 살고 있던 조선인, 여러 국적의 외국인도 있었다)의 목숨과 미국인의 목숨이 비교되고, 이것이 불가피한 행위로 시행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던 미국인들과, 그럼에도 미국의 아들이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전쟁 주체 국가의 국민들의 지녔던 양가적 감정도 찾아볼 수 있다.

 

인류에게 대량 학살 무기를 사용한 행위에 대한 역사가들의 반성적 평가는 이후 중요한 논쟁 주제였다. 카운트다운 1945에 따르면, 1958<내셔널 리뷰>의 한 기사에서 폭탄의 진짜 목표는 일본이 아니었다’, 라는 주장이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불에 탄 일본인 수만 명은 전쟁을 끝내거나 미국인 및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354)라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1960-70년대에 알페로비츠와 같은 역사가들의 견해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

 

원자폭탄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을 향한 초기 경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트루먼은 그 카드를 쓸 태세가 돼있었다.”(354)

 

이미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19457월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복 타진 메시지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여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일본의 표면적으로 군벌세력을 중심으로 끝까지 저항하라는 의지를 보이긴 했지만, 천황 중심으로는 항복을 소련에 타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포츠담 회담을 통해 스탈린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재확인한 트루먼은 동아시아에도 눈길을 주던 스탈린에 대한 경고도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따라서 트루먼의 원자폭탄 사용이 전쟁을 빨리 종결한다는 보기 좋은 명분이외에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에 대해 경고할 수 있는 좋은 카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원자폭탄 사용 결정에 대해 보다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 무기의 위력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일본인의 희생을 대가로 극적인 를 만들어버렸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라면 원자폭탄을 사용할 뚜렷한 명분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트루먼이 원자폭탄의 작동 여부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트리니티 실험을 재촉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당시 세계의 정황을 보여주는 기록은 포츠담 회담 이후 트루먼의 참모총장이었던 레이히 제독의 결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포츠담은 두 거대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날카로운 주목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앵글로색슨의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이고, 또 하나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 전략이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261)

 

트루먼의 앵글로 색슨 민주주의 정부는 소련만큼이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였지만, 레이히 제독의 평가는 냉전의 성격을 파악하고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원자폭탄 사용과 관련한 뒷이야기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사항은 그 결정 과정이다. 군부와 정치권 내에서 트루먼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사용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의견도 두루 듣고 논의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정치권도 이런 논쟁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현재 우리의 경우는 보다 심각하다고 여겨진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일이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필요한 과정, 이를테면 다른 의견을 함께 들어보고 고려하는 절차가 현재 우리에게는 부재하다고 느낀다. 그것이 여기에 투입된 재정 및 인적·물적 자원의 낭비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이후 오랜 시간 이 과정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관여한 여러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모순 속에서, 모순과 함께 이를 견디는 관용도와 문제를 조율하며 해결해나가는 절차가 부재하다는 것이 큰 문제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서술하는 역사가의 입장에 따라 도달하는 방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 역사책 읽기의 중요성이기도 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그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싶기도 하다. 특히나 아픈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피하려면, 후손들은 역사를 더 잘 살펴야 할 일이다.

 


1944년 로스 앨러모스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운데)와 핵물리학자 빅터 바이스코프(오른쪽)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리틀보이)을 싣고 투하했던 폭격기 '에놀라 게이'(B-29)의 조종사 티베츠 대령. '에놀라 게이'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책 속으로]

[1] “온 세상이 내게로 떨어진 날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집으로 가서 가능한 한 많은 휴식을 취한 뒤 당해야 할 일을 마주하는 것이라고.”(14)

-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쓴 트루먼의 기록.

 

[2] “세계는 그 기술 발전과 대비한 도덕적 진보의 현재 수준으로 볼 때 결국 그러한 무기 앞에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문명이 완전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59)

- 국방부 장관 로버트 스팀슨이 트루먼에게 전한 문서 내용.

 

이 폭탄은 단순한 새로운 무기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관계에서 혁명적인 변화라고 그는 경고했다. 그것은 문명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119)

- 국방부 장관 스팀슨의 말 재인용.

 

[3] “원자 에너지는 주요 평화 애호국이 통제하면 앞으로 수년 동안 세계 평화를 보장할 것입니다. 만약 잘못 사용되면 그것은 우리 문명을 절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71)

-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말.

 

[4] “모든 사람은 첫 번째 원자포탄 투하가 세계에 이 무기의 중요성을 완전하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극적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연합국의 폭격을 받지 않은 곳들을 살펴보았다. 일본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여전히 번화한 도시들이다. 그들은 목표물이 될 수 있는 다섯 곳을 골랐다.”(91)

- 목표물선정위원회(오펜하이머의 사무실에 모인 폭격 조종사들을 비롯한 군부인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1945510-11일에 결정한 사항. 히로시마의 운명은 이날 결정되었다.

 

[5] “우리는 이제 빠른 종결을 보장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됐습니다.”(223)

- 토머스 패럴 장군의 말.

 

스팀슨, 화약이 뭐요? 하찮은 것이오. 전기가 뭐요? 무의미해요. 원자폭탄은 분노의 재림이오.”(223)

- 처칠이 미국 국방부 장관 스팀슨에게 한 말.

 

[6]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폭탄을 찾아냈다. 그것은 노아와 그의 전설적인 방주 이후, 유프라테스강 유역 시대에 예언된 불의 파괴일 것이다.”(225)

- 트루먼의 725일자 일기.

 

“20-30만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일본의 도시 몇 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28)

- 트루먼의 기록.

 

[7] “20세기의 핵무장 경쟁은 1945724일 오후 730분 체칠리엔호프 궁전에서 시작됐다.”(230)

-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사용을 최종 승인한 시점.

 

[8] “포츠담은 두 거대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날카로운 주목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앵글로색슨의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이고, 또 하나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 전략이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261)

- 트루먼의 참모총장 레이히 제독이 포츠담 회담에 대해 내린 결론.

 

[9] “프리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축하한다는 게 엽기적이라고 생각했다. (...) 그들은 여전히 자기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338)

-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오토 프리시(Otto Frisch)에 대한 기록.

 

[10] “우리는 첫 번째 섬광이 지나간 뒤 안경을 벗었지만 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온 하늘을 두루 비추는 청록색의 빛이었다. (...) 그것은 더 이상 연기나 먼지나 심지어 불의 구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였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게도 태어난 새로운 종의 생명체였다.”(340)

-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실은 B-29폭격기에 동승하여 취재했던 <뉴욕 타임스>기자 윌리엄 로런스가 묘사한 폭발 모습.

 

[11] “미국인은 파괴와 동의어가 되었다. (...) 그것은 우리에게 승리를 보다 빨리 가져다주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증오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347)

- <뉴요커>의 군사 분야 편집자 핸슨 볼드윈의 우려 메시지.

 

[12] “나는 내 인생에서 커다란 잘못 하나를 저질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고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한 일입니다.”(349)

- 아인슈타인이 1954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한 말.

 

[13] “그곳은 거대한 증기 롤러가 지나가 짜부라뜨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듯했다. (...) 이 원자폭탄의 첫 시험장에서 나는 4년간의 전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폐허를 보았다.”(351)

-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월프레드 버쳇이 미국의 언론 통제를 피해 모스부호로 런던에 기사를 내보내 95일 발표된 신문 기사의 한 대목.

 

[1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불에 탄 일본인 수만 명은 전쟁을 끝내거나 미국인 및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354)

- MohanTreeJournal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라는 학술지에 게재한 원폭 사용에 대한 평가.

 

[15]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에서, 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들이 핵무기를 새로운 무기의 하나로 추가한다면 그때 인류는 로스 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할 것입니다.”(371)

- 오펜하이머의 말.

 

[16] “우리 군대에게 화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일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접근법이며 처음부터 써온 방법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에 대한 폭격이 좋은 사례입니다. 일본을 상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그저 이런 접근법의 최종 단계였을 뿐입니다. (...) 나는 어떠한 후회도 없으며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결코 변명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전쟁은 모순입니다. 전쟁은 당연히 야만적입니다. 죽이는 방법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유감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전쟁의 명분과 전쟁 자체의 근절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 억제는 지금까지는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383)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가는 폭격기에 모두 탑승했던 레이저 전문가 제이컵 비저의 말.

 

[17] “나는 이 무기 덕분에 미국과 연합국이 일본을 침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침공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확신합니다. 얼마나 많은 수였을지는 감히 추측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전쟁을 빨리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 폭발의 결과로 잃은 생명들은 전쟁 사상자이며, 그것은 전쟁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384)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해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385)

-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싣고 날아간 B-29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폴 티베츠 대령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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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이지상 저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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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뒤늦은 부고를 들은 날 저녁)

 

 

오직 변방으로

-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이지상 지음 | [RHK] | (2015)

 

 

그저께(2023815) 내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의 부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의 읽기와 쓰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셨던 분, 세상을 보는 눈과 글쓰기의 모범이 되어주셨던 분이었다. 내가 무심한 사이 그동안 병마와 싸우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싶었다. 선생님이 병상에 누워 지친 몸을 보여주기 싫어하셨다는 것을... 가족분이 선생님의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으나 연락을 잊고 있던 것은 나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2년이 다 되도록 전화를 드리지 못했던 게 이제 와서 후회스럽다. 언제나 가난과 당당하게 맞섰던 분이었고, 그만큼 떳떳하셨던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한번 씩 전하하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더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선생님께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리게 되었던 것도 온라인 서점에서 선생님의 신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신간 소식을 보고 선생님께 축하와 함께 안부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오전에는 아마도 한창 집필중일 듯하여 문자만 넣었던 것인데, 반나절이 지나 가족분이 선생님의 번호로 답장을 해주셨다. “선생님이 한 달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뜻밖의 답변이라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존재가 그 자리를 비우고, 이처럼 공허하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생명체라면 결국 겪게 될 이 사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말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시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결코 삶을 구걸하시는 분은 아니었으나, 하고자 하셨던 삶의 목표에 대한 체념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사였다.

 

늦은 오후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밖으로 나가 거리를 잠시 걸었다. 저녁 하늘이 활활 타고 줄어드는 장작불처럼 붉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의 짧았던 삶은, 오늘 저녁 하늘 같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의 문장은 언제나 냉철했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항상 뜨거운 투쟁이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다. 당신은 오직 변방에서, 변방에 발을 딛고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조망하셨던 분이었다. 사회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나 스스로가 얼마나 많이 뜨끔했었던가...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분. 무뚝뚝하셨으나, 제자에게는 언제나 자상했던 분이었다. 선생님이 쓰셨던 책 몇 권을 다시 들쳐보다가 내게 써주셨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변방으로

 

언제나 기득권에 기대지 말고, 변방에서 떳떳하게 세계를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라는 말씀같이 다가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편이 쉬시기를...

 

 

한동안 들었다 놓았다 했던 타이완 여행기를 마저 읽었다. 여행작가 이지상의 나는 지금부터 행복해질 것이다(2011)였다. 이 책은 출판사가 바뀌어 나온 개정판이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2015)이다. 저자가 어머니를 병수발하다 돌아가신 후 지치고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홀로 떠난 곳이 바로 타이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외여행으로 간 타이완을 다시 찾아 타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써내려간 여행기이다.

 

책의 끝 무렵에 저자가 신화학자 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 나온 문장을 재인용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살아 있음의 경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상기하게 해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다. 수행 중에 잠시 잠들 때 내리치는 죽비처럼, 혹은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며 사용하는 향의 연기처럼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명상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죽음과 부재만이 명상의 주재가 아니다. 경계의 반대쪽, 바로 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삶의 여행자가 아닌가. 아마도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묵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도 여행을 떠나 기록을 남겨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이 문장을 읽고, ‘자기 발아래를 살펴야한다’, 고 무뚝뚝하게 당부하곤 하셨던 선생님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책 속으로]

[1] “타이완의 매력은 그 작은 (낯섦과 호기심에서 오는) 긴장과 편안함 사이를 오가는 데 있었다.”(396)

 

[2] “그러나 삶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생로병사의 고뇌와 사회적·경제적 고민은 끊이질 않는다.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여행은 단지 불쏘시개다. 그 불쏘시개를 장작불로 훨훨 일구는 것은 일상의 노력이다.”(396)

 

[3]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서 재인용, 397)

 

[4] “젊을 대는 거창한 이념, 볼거리들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작은 것들에 매혹된다. 파편 같은 작은 것들과의 소통을 통해 우주적 황홀함을 맛본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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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혜를 기억하고, 문명의 죽음을 직관하라 -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기본 카테고리 2023-08-0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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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로이 스크랜턴 저/안규남 역
시프 | 202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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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혜를 기억하고, 문명의 죽음을 직관하라

-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 지음 | [시프] | (2023)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30년 이상 추적 기록된 자료를 기반으로 198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진 주제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지질학적 힘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인류는 이전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는 우리의 실존을 크게 흔들 정도로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단지 온도가 1-2°C 올라가는 현상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모한활동으로 인하여 모든 동·식물 종의 생존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식량과 에너지 환경의 혼돈을 필연적으로 예비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과일이 식탁에서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자.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럼 기후변화로 우리가 자주 먹는 채소를 구하기 힘들어 졌다고 생각해보자. 대신 육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에너지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동물은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에너지 소비자는 에너지 생산자를 찾아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를 섭취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공짜란 없다. 식물이 바로 에너지 생산자다. 식물은 태양의 에너지와 대기 및 토양 속의 성분을 매개로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저장한다. 식물과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 균류는 어떨까. 균류 역시 동물처럼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외부의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야만 양분을 얻을 수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균류 역시 에너지 생산자에 의존해야 한다. 동물이나 균류가 에너지 생산자를 섭취하지 못하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식물과 동물이 사라지고 죽어갈 때, 인간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식량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한다. 식량이 자판기처럼 돈을 낸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상, 돈을 가진 이들이라고 가난한 이들보다 상황이 조금 더 나을지 모르나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지구온난화 문제는 빈부나 계급의 차이가 무색함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려할 때,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이 전 지구적 기후변화가 어떤 위협보다도 강력한 위협이라고 경종을 울리며 시작하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기후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극지 주변 바다 혹은 내륙의 빙하나 빙상이 녹아내리는 양상은 앞으로 계속 녹아내리는 일 외에 되돌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주목하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대처 방안을 고민해왔지만, 지금까지 얻은 답은 답이 없음뿐이다. 그 이유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63)하다는 데 있다. 기업과 정부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는 탈탄소에 대한 노력과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탄소(석탄과 석유)에 기반 한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러 청정에너지기술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기반하고 있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하는 일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을 대체해야하는 일이다.

 

어느 정치가도 현재 작동하는 전 세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석탄과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저렴한 탄소에 대한 의존을 끊으면서까지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상황을 감수할 이는 없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8%를 차지하는 미국, 러시아, 중국은 탄소세 도입마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엄혹한 무한 경쟁 구도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이렇게 국가의 근간을 흔들면서 무리하게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있다. 우리는 기후 정책에 있어서 언제나 경제 성장 논리가 승리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지구 전체의 환경적 위기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다수는 이미 안락한 소비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 전화기나 노트북, 대형 TV등을 모두 없애고, 여름에 에어컨을 폐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현대의 정보 사회 역시 탄소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처럼 기후 변화 문제는 너무나 방대하고 우리의 생활양식과 깊숙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한 사람만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만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시점에서 탈탄소를 외치는 일은 그저 순진한 구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은 모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일뿐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울한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심지어 저자는 이 모든 문제의 문제는 바로 우리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럼 우리는 이 허무하고 공허하게 예비 된 미래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한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묵시록적 의미로 개인의 죽음에 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문명의 죽음을 숙고해야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탄소에 기반 한 문명의 종말이라는 운명과 마주하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배움으로써 이를 더 잘 맞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죽음이란 현상은 전대미문의 사태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배우고 성찰하고자 대화체로 철학서 파이돈을 썼다. 뿐만 아니라 미셸 몽테뉴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격언에 주목했다. 몽테뉴가 자신의 수상록 에세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154)이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언제나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던 현상이며,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 현상이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할지 모른다. 죽는 법을 배우고자 하더라도 실제로 겪지 않는 한, 그 때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배우라고 해놓고 이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저자는 죽음을 배우고자 하는 부단한 실천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지혜라고 말한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스토아 철학자의 말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까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죽음이라는, 이 불가항력의 사태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이 필멸의 현상을 정면으로 직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탄소에 기반 한 현대 문명은 종말을 구할 수밖에 없고, 이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문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자기기만과 거짓된 욕망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문제임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출발한다. 이때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의 여부나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대신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문명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해나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암담하고 충격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인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죽음을 숙고하기는커녕,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이련 논의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물론, “인류는 화석 연료 문명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폐허 속에서 어떤 폭정, 어떤 야만 상태가 출현하든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다. (...) 아마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의 나머지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이고 찌는 듯한 밀림이 되더라도 북극해의 해안에 새 도시를 건설할 것.”(183)이라고. 대멸종이라고 해도 인류의 일부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문제로부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고 해도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숙고해야만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현실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저자는 인류세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으로 기억을 제시한다. 먼저 살다 간 인류의 지혜가 담긴 기록들, 죽은 자의 유산을 기억하는 일이 죽음을 고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어떤 기술적인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내자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은 다시 말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오히려 저자는 죽음을 배우기위해 인류가 남긴 유산, 인문학적인 전통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인용문으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인상 깊어 인용해 본다.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한나 아렌트, 혁명론)(168)

 

다시 말해, 우리가 받은 유산을 단순히 기억 장치나 도구에 저장해놓는다고 끝이 아니다. 이 유산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이를 기억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혜의 유산은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저자는 이러한 기억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이를 가공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명의 죽음과 마주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적인 방주를 건설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한다. 앞서 죽은 이들의 지혜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던 것처럼, 여기에 우리의 지혜를 더하여 미래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어지는 저자의 말에 계속 주목해보자.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한나 아렌트의 말과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소설이 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 내의 장서관은 전 세계의 지혜를 모두 담고 있는 지식의 보고였고, 장서관이 바로 세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인류의 지혜를 품은 책들은 비밀스러운 공간에 은폐되어 있었고, 접근도 제한되었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수도원의 책들은 여러 필경사들에 의해 필사되고 복제되었지만, 이는 소수의 관심사를 위한 기계적인 기억 저장용 활동이었을 뿐이다. 인류의 방대한 지식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저장되기만 하고 공유되지 못했다. 사람들에 의해 거듭 이야기 되거나 기억되지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류의 지식은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미약한 촛불에 거침없이 불타올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은폐되었던 인류의 과거는 구원되지 못하고, 하나의 세계 전체가 덧없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는 80대인 화자가 10대 소년 수도사 시절 겪었던 사건을 회고한 기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소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났던 이유는 소설의 마지막에 있다. 화자는 수도원의 장서관이 화마에 사라져버리고 수도원이 폐허로 된 사건을 기억해내면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삶과 죽음을 성찰한 것과 관련이 있다. 존재가 사라질 때, 이름도 함께 사라질 수는 있다. 단 우리가 존재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남기 마련이다. 다만 명예는 덧없는 것일 뿐이다. ‘장미의 이름이 덧없게 여겨지는 이유는 장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배우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는 시도하고 실패해도 또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장미는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적 진리를 일깨워주는 존재이자 생명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장미의 이름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에서 하는 이야기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모두 죽음혹은 존재의 필멸을 진지하게 고찰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 본인은 실천의 하나로서, ‘죽음을 배우기 위해 스토아 철학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호명하고, 다시 이야기하며, 우리의 현재에 맞게 이 철학을 가공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저자는 죽음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념을 붙들고 있다. 그러므로 문명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문명의 거듭나기를 상상하는 시도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책 속으로]

[1] “지구온난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많은 정책 전문가, 기후학자, 국가 안보 관료의 견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지구온난화가 사실인가 혹은 지구온난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뜨겁고 급변하는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다.”(18)

 

[2] “인간의 세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나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변함없이 영원히 그대로다.”(20)

- 윌리엄 블레이크의 글 재인용.

 

[3] “문제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63)

- 저자는 대체 에너지원 없이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한다는 것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4] “자국의 경제에서 대놓고 석유와 석탄을 몰아내려는 정치가는 어떤 종류의 민주 정부나 과두 정부에서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더욱이 값싼 탄소에 대한 의존을 종식시키기 위해 긴축과 재분배를 강요한 지도자는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약하고 고립된 처지로 내몰게 될 것이다.”(83)

 

“(문제는)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긴밀하게 통합된 하나의 경제로 연결되어 있는 거이 석탄과 석유 덕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84)

 

[5] “누구도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강력한 영향력과 개념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위험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만한 계획을 떠올리지 조차 못하고 있다. 문명을 위한 어떠한 리셋단추도 없고, 향후 10, 20년 안에 전 지구적 인프라, 농업, 에너지 네트워크를 바꿔놓을 실행 가능한 계획도 없다.”(108)

 

[6] “전 지구적 정보·소통 생태계는 석탄에 의지하고 있다. 당신이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당신은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있다. (...)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109)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 문제는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110)

 

[7] “석탄 및 석유회사와 그들의 정부 내 대리인은 자신들을 지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군사력도 기꺼이 사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노동 전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전쟁은 셸과 셰브론의 노골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126)

 

[8] “적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우리 자신이 적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우리, 시스템, 벌집이.”(141)

 

[9] “우리는 어떤 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정말로 알지는 못하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끊임없이 실천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천 자체가 지혜다. 도겐 선사의 말로 하면, ‘그 길을 올곧게 실천하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156)

 

[10] “인간이 살아 있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고, 실체는 흐름 속에 있으며, 인식은 무디고, 육신은 썩게 마련이며, 영혼은 혼란 속에 있고, 운은 예측하기 힘들고, 명예는 덧없다. 한마디로 말해 신체에 속한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고, 영혼에 속하는 모든 것은 꿈과 공상이며, 삶은 전쟁이고 잠시간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157)

-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11] “(우리는) 최고의 보물이자 가장 강력한 적응 기술을 가져왔다.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에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을 가져왔다. 바로 기억이다.”(161)

 

[12]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168)

- 한나 아렌트, On Revolution에서 재인용

 

[13] “인문학 연구의 오랜 전통을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자극의 스트레스를 중지시켜야 하고, 과거를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아카이브의 정보를 가꾸고,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읽고 해석하고 분류하고 돌보고 특히 재가공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집착을 중단해야 한다. (...) 디테일에 대한 관심, 논증에서의 엄밀성, 주의를 기울여 읽기, 깊이 있는 성찰 등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사색의 진동을 주입시켜야 한다. 죽은 자들과의 교감을 지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는 죽은 자들이듯 그들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182)

 

[14]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15] “우리는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멸종 위기에 놓인 유전적 데이터를 실어 나를 생물학적 방주만이 아니라 절멸의 위기에 놓인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언어로 된 사유의 구체적 기록은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지적 성장을 위한 씨앗이자 토양, 원천, 자궁이다. 현대 문명의 종말을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인문학의 운명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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