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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 철학 공부 2012-09-3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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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변증법 (그리스어: διαλεκτική)은 정명제와 반명제를 사용하여 이들 모순되는 주장의 합명제를 찾거나 최소한 대화가 지향하는 방향의 질적 변화를 일구어내는 논법이다. 이는 서양 문명에 있어서 문법이나 수사법과 더불어 자유 인문 최초 삼개인문 중 하나이다.

고대와 중세 시대 동안 수사법과 변증법은 둘 다 (대화를 매개로 한) 설득을 목적으로 하였다. 변증법적 접근의 목표는 이견을 합리적인 토론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들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 방법은 하나의 전제가 모순에 도달한다는 것을 보여 전제를 제거하는 것이 진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견을 해결하는 다른 방법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정명제와 반명제의 전제를 부정하여 제삼의 길인 (합)명제에 도달하는 것이다.

 역사 및 변천

고대 그리스에서는 문답법으로 통했으며, 엘레아의 제논이나 소크라테스에게는 철학적 방법 그 자체였다.

소피스트가 부정(不正)을 정의(正義)라고 우기는 기변술(奇辨術)로 사용한 이후, 변증법을 적극적인 철학적 방법으로 삼는 용법과 기변술로서 부정적으로 다루는 용법이 대립한다.

플라톤은 내면화(內面化)된 이데아에 이르는 적극적 방법으로 삼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박(論駁)의 기술 또는 명제의 귀납적 탐구술이라 하여 부정적이었다.

중세에 와서는 흔히 논리학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근대에 와서 칸트는 순수이성이 그 원리를 그르쳐 형이상학적 문제에 적용했을 때에 생겨나는 가상(假象)의 논리를 변증법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하여 이성이 범하는 모순의 적극적인 의의를 포착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고정적 견해인 형이상학에 대립되는 인식의 방법이며 동시에 사유(思惟)의 자기운동과 자연·역사(歷史)의 모든 현실적 자기운동에 대한 보편적인 합법칙성 이법(合法則性理法)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순에 의해 대립을 낳고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이 운동을 관념론적 입장에서 개념의 자기 전개로 정착시켰다.

헤겔의 합리적인 핵심을 유물론의 입장에서 계승한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변증법은 자연ㆍ사회ㆍ사유의 일반적 운동법칙(의 과학)으로서 확립되었다.

 용어(헤겔 변증법의 경우)

  • 테제(These), 정립(定立)ㆍ명제(命題)
원래부터 정리된 하나의 주장. 변증법적 전개의 제1단계(추상적·오성적 규정).
  • 안티테제(Antithese), 반정립(反定立)
정립이 내적 모순으로 낳은 대립명제(對立命題). 변증법적 전개의 제2단계(변증법적 부정적 이성적 규정).
  • 진테제(Synthese), 합(合)ㆍ총합(總合)
정립·반정립의 모순의 통일. 변증법적 전개의 제3단계(사변적·긍정적·이성적 규정).
  • 정(正)ㆍ반(反)ㆍ합(合)
헤겔의 변증법의 도식. 정립-반정립-총합, 또는 즉자적(卽自的) 단계-대자적(對自的)단계-즉자 및 대자적 단계라는 것과 같으며 그 자체의 운동의 과정.
  • 즉자(卽自, an sich)
그 자체에 따른다는 것. 아직 분열 대립에 이르지 못한 변증법적 전개의 제1단계. 따라서 '즉자적(卽自的)'이란 원래 그 자체는 타와 관계 없다라는 것이나, 잠재적·무자각적인 것이 된다.
  • 대자(對自, für sich)
자신에 대립하고 있는 것. 자기가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는 변증법적 전개의 제2단계. '즉자'의 단계에서 이미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모순이 노정된 단계로서, 즉자에 비하면 한층 자각적이다. 이 대립은 또한 '즉자 및 대자'의 단계에 이르러 통일되나, 그것은 즉자 때의 일체성(一體性)과는 달라서 자기 자신의 내용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자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지양(止揚, aufheben)
양기(揚棄)라고도 한다. 독일어의 아우프헤벤(aufheben)에는 '보존하다. 보관하다'란 뜻과 '폐지하다. 폐기하다'라는 상반된 뜻이 있으며, 헤겔은 이를 독일어가 지니는 사변적 성격이라 하여 변증법 용어로 사용. 정립·반정립의 대립이 총합 단계에서 통일될 때에는 정립·반정립의 규정 존립이 부정되면서도 그 내용은 보다 고차적인 차원에서 보존되며, 개념이 더욱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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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 생각해 봅시다 2012-09-3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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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맨더빌, 꿀벌의 우화

 

 by woodstock | 2012/05/14 12:57

18세기 초에 출간된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는 당대 영국사회를 본뜬 풍요로운 벌집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사회의 이면에는 곳곳에서 악이 번성하고 있지만 사회 전체는 이웃국가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그러나 꿀벌들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공정하고 정직한 사회가 된다면 더욱 잘 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꿀벌의 신 주피터는 이들의 요청대로 꿀벌들을 정직하고 도덕적인 성품으로 바꿔놓았으나, 벌집은 더 잘 살게 되기는커녕 점점 쇠락해간다. 꿀벌들이 정직해지고 사치와 식탐이 사라지면서 갖가지 물건과 직업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맨더빌은 우화에 덧붙인 주석을 통해 개인의 악덕이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자신의 견해를 한결 명확하게 밝히는데, 이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마키아벨리가 연상된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했듯이 맨더빌은 경제와 사회에서 도덕을 분리함으로써 당대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고,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며 악덕으로 비난받는 탐욕과 사치, 오만이 번영을 위한 기본 조건임을 드러냈다.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바꿔놓는다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사상은 알고 보면 버나드 맨더빌이 원조였다.

더 나아가 중상주의자였던 맨더빌은 철저히 기업가 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 게을러져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힘든 일을 할 아이들에게는 교육이 필요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복지정책이 근로의욕을 감퇴시킨다는 주장을 비롯해 최근 세계적 추세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 논지의 대부분은 맨더빌의 사상을 계승한 것에 다름 아니다. 반면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되 그 해악을 막기 위해 도덕감정에 바탕을 둔 정의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기업가가 아닌 노동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중시했다.

역자 최윤재 교수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과 칸트의 도덕원칙은 맨더빌이 허문 낡은 도덕체계를 딛고 등장했다. 버나드 맨더빌의 이름은 오늘날 애덤 스미스에 묻혀버렸지만, 신자유주의에 물든 현대 사회의 주류사상은 맨더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애덤 스미스와 칸트는 상아탑에 갇힌 학문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맨더빌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혜안을 발휘했던 셈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책은 최근 본 번역서 가운데 가장 정성이 많이 들어간 책이다. 경제학 전공자인 역자의 상세한 해설에다 원문과 대조를 원하는 독자를 위한 원문 수록 및 용어 설명까지 뭐 하나 허투루 손댄 곳이 없다. 가히 고전 역서의 모범이라 할 만 하다. 역자는 맨더빌 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며, 우리가 그를 딛고 새롭게 수립된 애덤 스미스와 칸트의 사상은 도외시한 채 300년전 맨더빌의 폐허에만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보수 언론은 맨더빌을 들어 복지정책을 비판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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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stock | 2012/05/14 12:57 | 음악/영화/책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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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 생각해 봅시다 2012-09-30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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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 책읽기


어떤 사상의 원류에 해당하는 책들이 있는 법인데, <꿀벌의 우화>도 마찬가지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엿보려면, 이 책을 집어들 일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잔뜩 심각한 경제학적 내용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다간 낭패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정작 책에서 중요한 ‘우화’는 풍자시이기 때문이다.

맨더빌은 당시에 유행하던 기독교적인 이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1705년에 <꿀벌의 우화>라는 시를 써서 발표했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옛날 옛적에 꿀벌 나라가 있었는데, 모두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과학과 산업이 발전했지만 정부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폭정도 없었고 사나운 민주주의도 없었다.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법치주의가 잘 정립되어 있어서 권력 남용도 없었다.

꿀벌의 나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도덕적으로 이기주의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나라를 정직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도덕한 것들을 척결해 정직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남을 속이고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행위들을 금지했다. 나라가 도덕적으로 바뀌었으니 훨씬 나아져야 할 텐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부유했던 꿀벌의 나라는 갑자기 가난해졌고 급기야 적국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꿀벌들이 죽임을 당했다. 결국 살아남은 꿀벌들도 더 이상 그 나라에 살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버렸다.

풍자시의 속성상 내용은 단선적이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꿀벌에 빗댄 인간의 본성이 원래 이기적이고 부도덕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억지로 이 본성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순간, 본성은 왜곡되고 사회는 엉망으로 변해버릴 것이라는 경고를 맨더빌은 던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때, 맨더빌의 시를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처음 시가 출판되었을 때는 반응이 신통찮았지만, 1714년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18세기 영국 독자들은 맨더빌의 책을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대한 조롱으로 읽었다. 이타주의적인 삶이 도덕적인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대에 맨더빌의 주장은 일정한 자연과학적 발견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꿀벌’이라는 자연의 개체를 인간 사회에 빗댄 것은 명백하게 진화론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신뢰가 맨더빌의 우화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맨더빌의 주장은 기독교적 공동체주의를 미덕으로 생각했던 18세기 영국 사회의 도덕을 비판하고, 개인의 욕망에서 사회 발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맨더빌의 주장은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으로 거듭 등장한다. 맨더빌에 대한 스미스의 공감을 지적한 사람은 후대의 경제학자 케인즈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은 <도덕감성론>과 <국부론>에 모두 등장하는데, 후자에 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욕망과 경제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차용되고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의도할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공익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사회공익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경제활동을 할 때 훨씬 공익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이다.

이런 논리는 맨더빌이 <꿀벌의 우화>에서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위정자들이 부패를 척결하고 도덕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공익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 맨더빌의 주장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맨더빌과 스미스의 유사성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겠다. 스미스가 창안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이야말로 맨더빌이 우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적인 악덕’이 어떻게 공익적인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이런 효과를 시장의 조정기능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맨더빌의 생각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더욱 발전시킨 셈이다.

맨더빌은 당대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우화를 썼지만, 스미스는 그 ‘문학작품’에 근거해서 시장자유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경제학이론을 정초했다. 이처럼 특정 이론을 숙성시키는 계기는 대체로 ‘미학적인 차원’에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왕>이라는 고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론을 지탱할 기초를 발견했던 것처럼, 스미스 역시 마찬가지로 <꿀벌의 우화>에서 독점을 비판하고 시장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맨더빌의 풍자시만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시에 대한 해제와 다른 작품들도 함께 수록하고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쉽게 접근해갈 수 있는 장점을 구비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시장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론들이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자연과학적인 발견과 일정하게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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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에 게재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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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 | 생각해 봅시다 2012-09-3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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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개인의 악덕'은 '사회의 이익'?

[프레시안 books]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

박순성 동국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0-12-10 오후 7:17:45

    

버나드 맨더빌과 최윤재의 한국어판 <꿀벌의 우화>(문예출판사 펴냄)를 읽는 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먼저, 원서로는 도저히 읽기 어려운 책을 우리말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세상을 보는 신랄함과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를 그대로 맛볼 수 있다. 더구나, 긴 해제는 원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인 맨더빌에 못지않게, 역자인 최윤재는 자신의 해제를 통해 독자를 자신의 생각 속으로 곧바로 끌어들인다.

저자와 역자는 같은 곳에서 출발하지만,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꿈꾼다. 사실 번역 자체가 그러한 작업이지 않은가. 훌륭한 번역서를 즐겁게 읽으면서도, 독자들은 두 개의 사상을 비교하는 지적 도전을 하게 된다. 최윤재는 거대한 상업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꿀벌의 세상인지 아닌지를, 우리 스스로 꿀벌처럼 살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맨더빌은 자신이 꿀벌의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까발리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밝힌다고 주장한다.

"힘들고 더러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고, 거친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요구를 가난한 아이들보다 더 잘 채워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무도 이들보다 더 가깝고 더 적합하지 못하다. 그 밖에도, 내가 고생이라 부른 것은, 그렇게 커왔고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고생으로 생각되지도 않고 고생도 아니다. 가장 열심히 일하면서 세상의 화려함과 섬세함을 가장 모르는 그들보다 더 만족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다." (205~6쪽)

▲ <꿀벌의 우화 :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버나드 맨더빌 지음, 최윤재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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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을 앞에 놓고 맨더빌은 조금도 불편해 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진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작은 존경심을 별생각 없이 갖는 기분 때문이다. 이런 기분이 대중들에게 흐르고 있으며 특히 이 나라에서 그러한데, 이는 연민과 어리석음과 미신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이다."(206쪽)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작은 존경심', 요사이는 인권이라고 부르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맨더빌에 따르면 '별생각 없이 갖는 기분'이며, '연민과 어리석음, 미신의 혼합물'일 뿐이다.

그러나 맨더빌이 드러낸 비밀은 우리 시대에는 이미 비밀이 아니다. 길지만 한 문단만 더 인용해 보자.

"꾸준히 손을 써서 게으름을 줄여주면 강제하지 않고서도 가난한 이들을 일하게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무식하게 키우면 고생을 고생으로 느끼지 않도록 단련시킬 수 있다. 그들을 무식하게 키운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의 지식이 그들 하는 일 언저리를 넘어서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며, 적어도 그 한계를 넘도록 일부러 애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단으로 채비하여 노동을 싸게 만들면, 틀림없이 다른 나라보다 싸게 팔 수 있으며, 우리 인구를 늘릴 수 있다. 이것이 무역에서 상대에 맞서는 멋지고 당당한 길이며, 다른 나라 시장에서 우리가 실력으로 이기는 길이다." (207쪽)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맨더빌은 자신이 밝힌 '진실'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고 고발되고 자신의 책이 불타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 그의 주장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육자들이, 정치인들이 학교에서, 언론에서 공공연히 가르치고 주장하는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맨더빌은 '자선과 자선 학교'라는 글에서 "주제넘게 끼어들고 있는 자선 학교 간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했지만, 이제 우리 시대에는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하고 관리하는, 더욱이 배우는 사람들 스스로가 상당한 돈을 갖다 바치는, 교육 기관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악당이어도 좋다. 돈만 많이 벌게 해다오"라고 외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윤재를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맨더빌을 정반대 방향에서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13쪽)

맨더빌의 한국어판 역자는 맨더빌의 태도를 '차가운 머리'는 가지고 있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맨더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다. 그럴듯한 겉꾸밈에 속지 않을 만큼 그에게는 차가운 머리가 있었다."(82쪽) 그래서 그는 당시의 위선적인 도덕 운동,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분수, 곧 신분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치려는 것"(26쪽)을 비판했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남의 속마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남의 어려운 처지에는 좀처럼 공감하지 않았다."(82쪽)

바로 이 지점에서 최윤재 교수는 애덤 스미스를 데리고 온다.

"스미스는 있는 그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제 일이든 남의 일이든―적절한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적절성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지 물었다. 적절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 함께 화를 내는 것이고 이것이 정의를 세우는 바탕이 된다.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는 있는 그대로 보되 적절성을 판단하는 관찰자다." (82쪽)

우리는 맨더빌에서 출발하더라도 스미스를 따라서 더 나아가야 한다. "맨더빌은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스미스의 도덕 감정이고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 원칙이다. 공정한 사회는 그 위에 세워진다."(7쪽) 바로 이 도덕 감정에, 도덕 원칙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스미스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 역자 자신도 언급하고 있듯이, 스미스는 인간에 대해 더 깊이, 더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 저자(맨더빌) 생각은 거의 모든 점에서 잘못되었지만,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본다면 사람 본성에는 얼핏 그의 생각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있다. 맨더빌 박사는 이 겉모습을 조잡하고 거칠긴 해도 생생하고 재미나는 말솜씨로 그려냄으로써 그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했는데, 서툰 사람은 여기에 쉽게 빠져든다." (48~49쪽, <도덕감정론> 7부 2편 4장)

스미스는 맨더빌 자신(183~5쪽)이 노상강도나 도둑이나 살인범조차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 연민(pity) 또는 동정심(compassion), 동료의식(fellow-feeling)으로부터 도덕의 원리를 찾아내고 도덕 체계를 세운다. <도덕감정론>(1부 1편 1장)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스미스는 이런 감정들을 동감(sympathy)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감정'에서 출발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업 사회에 대해서도 맨더빌과는 전혀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다. 맨더빌은 사회를 '나라/정치체제(body politick)'라고 하면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제 몫을 얻으려면 남을 위해 일해야 할 줄은 알 만큼 힘이나 설득으로 깨우치게 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며, 한 사람 밑에서 또는 다른 형태의 정부 밑에서 각자는 전체를 따르고 전체는 능숙한 통제로 하나처럼 움직이는 집단이다"(238쪽)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의 결합체인 '신자유주의'의 '18세기 판'을 보는 것 같다. 반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평등, 자유, 정의의 자연적 체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에서는 개인을 장기판의 말처럼 다루려고 하는 '체제의 인간(man of system)'을 비판한다.

그런데 최윤재는 맨더빌의 인간관에 대해 비판하고 분노하면서도 '개인의 악덕'과 '사회의 이익'을 연결하는 그의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맨더빌은 '사회의 본질을 찾아서'에서 "개인의 악덕은, 솜씨 좋은 정치인이 잘 다룬다면, 사회의 이득이 될 수 있다"(264쪽)고 말한다.

최윤재는 이를 받아서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기심이 그저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적절한 제도와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스미스를 비롯하여 지난 200여 년간 경제학이 찾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한다.(81쪽) 그리고 더 나아가 맨더빌의 "솜씨 좋은 정치인의 능란한 경영"(46쪽) 또는 "악덕을 베어내고 동여맬 정의"(120쪽)를 "하이에크가 말한 의도하지 않은 제도 발전보다는 현대 제도 경제학이 강조하는 주의 깊은 제도 설계에 더 가까운 생각"(46쪽)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최윤재의 이러한 평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맨더빌의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정의와 법, 훌륭한 정치인은 맨더빌의 체계 자체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이라는 논리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스미스의 '개인의 이익, 사회의 이익'이라는 논리 속에는 쉼표(반점)가 하나 있다. 우리는 이 쉼표(반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여전히 많은 논쟁을 해야만 한다. 당연히 "스미스는 맨더빌의 논증이 특별한 형태로 표현된 스미스 자신의 순수한 자연적 자유를 위한 논증임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슘페터의 주장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박순성 동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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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 생각해 봅시다 2012-09-3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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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이 시를 쓴 작가는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시인인 맨더빌(Mandeville, 1670~1733)이다. 맨더빌은 네덜란드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영국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17세기 당시 영국 사회를 한편의 시로써 풍자해

나중에 케인즈 경제학의 핵심이 되는 ‘유효수효’에 대한 개념을 제공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 옛적에 번성한 꿀벌왕국이 있었다. 여왕벌과 귀족벌들은 주지육림에 빠져 연일 연회를 열고 사치를 일삼아, 연회를 열기 위해 빚까지 내서 물건을 사들이며 흥청망청 살았다.

어느 날 대단한 고승 꿀벌이 나타나 왕국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고승 꿀벌의 꾸짖음이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는지라 모든 꿀벌들은 잘못을 회개하고 검소하고 바르게 살겠다고 맹세했다. 왕족과 귀족 꿀벌은 당장 궁전 안에 있는 호화로운 사치품을 모두 팔아 빚을 갚고 소박하게 살기 시작했다.

이후 꿀벌왕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검소하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꿀벌왕국은 오히려 불경기가 닥치면서 실업 꿀벌이 늘고 생활이 더 비참해졌다.

결국 이 시에서 맨더빌은 이기심이야 말로 국가의 부를 만들어내며 경제에 활력을 주는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정교한 이론이 아니고 당시의 도덕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것이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불꽃 튀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이 우화는 어떤 이유가 되었든 민간 소비가 부진하고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경기침체 상황에서는 경기를 살리기 위한 유효수효를 창출해야 한다는 유명한 경제이론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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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박정희 입장에서 장준하는 존재론적 위기" | 나라 돌아가는 모습 2012-09-2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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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밤 대전시민아카데미와 대전충남인권연대, 대전충청오마이뉴스가 공동 주최한 '장준하-박정희, 살아있는 싸움' 특강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한홍구 교수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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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입장에서 장준하는 존재론적인 위기였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처럼, 삶의 대목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존재론적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지난 27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장준하 박정희의 살아있는 싸움' 강연은 올바른 역사를 찾아가는 '죽비소리'였다. 대전시민아카데미·대전충남<오마이뉴스>·대전충남인권연대 주최로 진행된 이번 강연에서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정치인 장준하와 박정희를 조명했다. 이 과정에서 한홍구 교수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 '(수사권을 가지고) 재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고 장준하 선생은 1975년 유신 정권 하에서 등산하는 중에 운명했다. 당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실족사로 처리됐지만, 최근 유골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는 등 의혹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소신을 밝혔다.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볼 때) 숨이 딱 막혔습니다. 법의학자들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고 공통된 의견을 냈습니다. 추락하기 이전에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 이상 억측이 없기 위해 (수사권을 가진)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광복군 핵심 장준하 VS 일본 육군사관학교 우등생 박정희

이날 강연에서 한홍구 교수는 장준하와 박정희, 두 인물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해 눈길을 끌었다. 장준하에 대해서는 "(광복군 출신으로) 태극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반면 박정희에 대해서는 "(만주군 출신의) 불행한 친일파"라고 평가했다.

한홍구 교수는 이야기보따리를 풀 듯, 장준하 선생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강제 징용 중 탈출해,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 장준하의 삶은 조선청년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1944년7월) 일제 징용에서 탈출 상해 임시 정부 합류한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조선 청년들의 모습에 백범 김구 선생은 감격해 했습니다. 백범 선생님은 한 연설에서 '20, 30세 조선 청년들은 죄다 (일제의) 노예가 되었다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다 있다'며 놀랐습니다. 그때 장준하가 답사에 나섰는데, 당시 장준하는 물론 연설을 듣던 이들 모두 울어 상해임시정부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교수는 장준하의 호기를 엿볼 수 있는 한가지 일화도 전했다.

"장준하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를 폭파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 정부 내에 파벌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 못마땅했던 장준하 선생의 한마디였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힘을 하나로 모아도 될까말까인데, 파벌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백범(김구) 선생은 그런 장준하를 좋게 봤고, 나중에 자신의 비서 일을 시킵니다."

백범의 눈에 장준하가 '조선 청년들의 귀감'이었을 것이라 말하는 한홍구 교수. 그는 박정희 역시 일제가 원했던 '조선 청년들의 귀감'이었다고 말했다.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일제가 바라는 조선 청년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홍구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해방 전, 광복군(장준하)과 만주군(박정희)으로 엇갈린 두 사람의 삶을 조망했다. 1917년(장준하), 1918년생(박정희)생인 두 사람의 청춘은 '독립운동과 친일'로 엇갈렸다.

그런 역사 속에 8·15 광복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준하 선생과 김구 선생의 일화 하나를 전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50명을 키워, (한반도) 한 지역(도)에 5∼6명씩 투입하는 작전을 세웁니다. 생존확률은 0% 가까운 작전이었습니다. 그때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9대 고려대총장) 선생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백범 김구선생은 두 사람이 비상한 일꾼이라 생각해, 이 작전에서 이들을 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도 투입 젊은이의 책임자인 장준하 선생은, '나를 빼면 대오가 무너진다'고 하며 작전준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해방은 광복군의 작전 예정일보다 빨리 이뤄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었건만, 백범 선생은 '일본이 너무 빨리 항복했다'며 한탄했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 그토록 바라던 승전국 지위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광복군이 있었기에, 독립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기에 자존심은 지켰다. 한 교수가 전한 역사의 진실은, 작은 위로가 될 법한 말이었다.

"8월 18일 장준하, 이범석, 김준엽 등은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일본군 대좌는 무릎을 꿇고 이들에게 술을 따랐습니다."

 27일 밤 대전 중구 문화동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열린 한홍구 교수의 '장준하-박정희, 살아있는 싸움' 특강 장면.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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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보수성과 삶의 진정성 가진 장준하! 그런 그가...!

해방 이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그런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존재론적 위기'라고 강연했다. 삶의 대목, 대목마다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과 친일, 민주와 독재의 싸움에서 전자의 장준하는 후자의 박정희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또 보수파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가 위기의식을 느낄법했다.

"장준하가 보수파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중략) 우리나라의 베트남 전쟁 참여에 대해, 정치인 장준하 선생은 '조선 청년들의  피의 값을 얼마나 더 받아야 하나'며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참여가 결정되자 자신의 아들을 베트남 전선에 보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장준하 선생을 극우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 교수가 말한 장준하의 극우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무늬만 극우가 아니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보수주의였다. 한 교수는 장준하 선생이 '정치적 보수성을 삶의 진정성을 통해 극복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장준하 선생은 여·야가 손 놓았던 군인의 처우개선에도 힘썼습니다. 베트남전에 파병됐던 장병들의 월급은 징병 된 베트남 군인 월급과 같았는데, 장준하 선생이 월급을 인상하는데 힘썼습니다.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장준하 같은 분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 할 정도로 보수 쪽에서도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장준하가, 1975년 8월 17일 향년 5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등산 도중, 실족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2년 8월 16일,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지름 6㎝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돼 있다는 사실이 37년 만에 확인됐다.

타살의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자연히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의혹은 2012 대선 정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야당(민주통합당)에서는 당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의혹 규명에 나선 상태다.

"(수사권을 가진) 재조사 필요"... 장준하, 박정희 정권 평가 바뀌지 않아!

"(중략) 장준하 선생은 성격적으로는 과격했지만, 행동은 조심스러우셨습니다. 추락사한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낭떠러지는 전문 산악인도 어려워하는 곳입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장비 없이 내려 오실 리 없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이날 강의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어,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해 재조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유골이 37년 동안 저렇게 온전한 상태라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기막힌 일을 밝혀내야 합니다. 유골을 보며 차라리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사 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만약 타살이 맞다면)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말이 오가지 않도록, 재조사가 필요합니다."

한홍구 교수는 강연의 말미에, (장준하 선생 의문사) 결과가 어떻든 역사적으로 내려진 장준하와 박정희의 평가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 내다봤다. 장준하가 지켜온 삶의 의미,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과오, 살인 정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장준하 삶의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박정희 정권이 가진 살인정권의 본질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홍구 교수가 던진 한마디에는 힘이 있었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청중에게 뜨거운 교훈을 던졌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것이다. 1975년 장준하 박정희의 싸움은, 장준하 죽음으로 끝이 났다. 박정희가 이겼다. 독립운동과 친일, 민주와 독재의 싸움에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끝은 아니다. 2012년 그들의 이름은 살아남아 새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는 죽지 않았다. 역사는 힘있는 자의 것이지만, 동시에 진실을 알리려는 이들의 산물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근현대사의 과오, '인혁당 사건 조작'이 살아남은 자들의 피와 땀의 노력으로 바로 잡아졌던 기억을 상기해 보자.

'장준하 선생 의문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한홍구 교수의 강연은 진실 추구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심어줬다. 37년을 끌어 온 의혹의 진실, '장준한 선생 의문사'라는 역사의 숙제가 정부차원, 혹은 국회 차원의 재조사를 통해 제대로 풀어지길 바란다. 이 숙제를 제대로 풀어야,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한민국이 더 나은 미래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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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기 | - 주역 2012-09-2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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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태극기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태극기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FIAV 111110.svg 태극기
FIAV 000001.svg 해군 선수기(船首旗)(선미기(船尾旗)는 태극기 사용)
게양된 모습, 깃봉은 무궁화이다

태극기(太極旗)는 대한민국의 국기로 흰 바탕의 기 위에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다.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이자 수신사박영효가 옥색 바탕에 파란 원을 집어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유래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조약의 사후 처리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船上)에서 도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왔다.[1] 하지만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또한 박영효 이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도 쓰였다. 게다가 이미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음이 밝혀졌다.[2]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가 아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마건충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조선의 국기인 ‘청룡기’는 청의 국기인 ‘황룡기’의 도안에 착안하여 동쪽을 의미하는 색인 청색과 황룡기보다 적은 용의 발의 수를 제시함으로써, 마건충이 말한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고, 청의 속국임을 나타내게 하려 했다. 고종이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게 하여 군민일체를 나타내려 하였으나[2]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이후, 1883년 3월 6일 (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에 당시 ‘조선국기’라 불린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되었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의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정식 채택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져 태극기의 제작, 게양[3],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2007년 1월, ‘대한민국 국기법’이 제정되어 국기의 게양·관리법이 나왔고, 2007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도안과 상징

태극기는 《주역》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2]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사괘

구분 이름(卦名) 자연(卦象) 계절(季節) 방위(方位) 사덕(四德) 가정(家庭) 오행(五行) 의미
Palgwae Geon.svg 건(乾) 천(天, 하늘) 동(冬, 겨울) 북(北) 지(智) 부(父) 수(水) 지혜
Palgwae Gam.svg 감(坎) 일(日, 해) 춘(春, 봄) 동(東) 의(義) 중남[子] 목(木) 정의
Palgwae Gon.svg 곤(坤) 지(地, 땅) 하(夏, 여름) 남(南) 인(仁) 모(母) 화(火) 생명력
Palgwae Ri.svg 리(離) 월(月, 달) 추(秋, 가을) 서(西) 예(禮) 중녀[女] 금(金) 결실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

 규격

Flag of South Korea (construction sheet).svg

 색상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4]

색표시방법 먼셀 색 체계[5] CIE 1931 색 공간[5] Pantone[6] 웹 색상[7]
빨간색 6.0R 4.5/14 0.5640, 0.3194, 15.3 186 Coated #C60C30
파란색 5.0PB 3.0/12 0.1556, 0.1354, 6.5 294 Coated #003478
검은색 N 0.5 N/A N/A #000000
흰색 N 9.5 N/A N/A #FFFFFF

 올리는 날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3]한다.[8]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국기 게양 시간

국기는 24 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 해야한다.

국기 게양과 강하시각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기 간 게양 시각 강하 시각
3월 – 10월 07:00 18:00
11월 – 이듬해 2월 07:00 17:00

 주석과 인용

  1. 글로벌세계대백과》, 〈개화파의 개혁운동〉, 태극기의 사용.
  2. 이태진 (2000년 8월 30일). 《고종시대의 재조명》. 서울: 태학사. ISBN 89-7626-546-7 04910 “(7쪽) 1882-1883년 사이에 있었던 국기(태극기) 제정과정에서 고종이 자신이 계승하고자 애쓰고 있는 정조대왕(재위; 1776~1800)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정치사상을 그 도안에 담기 위해 이 과제를 주도한 사실 / (245쪽 6~10줄) 4개월여 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시에 사용했다는 … 규장각도서 중의 '어기'가 바로 그것이다.”
  3. 게양(揭揚)은 명사로 기(旗) 따위를 높이 매달아 놓는 것을 의미한다. 닮, 올림으로 순화해 칭하기도 한다.
  4. 대한민국국기법시행령, 제8조, 별표2
  5. 깃면. 행정안전부 (2009). 2010년 2월 16일에 확인.
  6. http://www.infokorea.ru/flag/
  7. http://www.edigita.com/pantone.php
  8. 대한민국전자정부 - 국기의 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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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구아(童蒙 求我) | - 몽구(蒙求) 2012-09-2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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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구(蒙求

 

  '몽구'는 당(唐)나라 중기(8세기)에 이한(李瀚)이 지은 책으로서,

책 이름은《주역(周易)》 몽괘(蒙卦)의   <동몽구아(童蒙求我)>에서 딴 것으로 한자로, '어리석다, 어리다'라는 뜻의 몽(蒙)자와 '구하다, 찾다'라  는 뜻의 구(求)자가 더해져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자의 뜻을 연결해 보면, '몽구'란 '어리석은 어린 사람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한다'라는 뜻이 된다.

3권.

 

책 이름은 《주역(周易)》몽괘(蒙卦)의 <동몽구아(童蒙  求我)>에서 딴것으로, 아동용 교과서로 의도하였음을 알수 있다.

 

체재는 ‘손강영설(孫康映雪), 차윤취형  (車胤聚螢)’(손강은 눈빛, 차윤은 반딧불로 책을 읽었다는 고사)의 경우처럼 한 사항을 4자 1구로 요약하 여, 비슷한 내용의 2구로 한 대구(對句)를 만들고, 1구 걸러 운을 달며, 또 8구마다 운자를 바꿈으로써 음  조도 좋고 기억 하기도 좋게 고안되어 있다.

596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요순(堯舜) 시대부터 남북조  (南北朝)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저명한 인물들에 관한 일들이 널리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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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구(蒙求)를 읽고 | - 몽구(蒙求) 2012-09-2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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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구(蒙求)를 읽고

이한(李澣) 지음, 유동환(劉東桓) 엮음

익 출판사 보급판 1쇄 2011. 2. 20

 

 

     이름이 낯설다. 이런 책이 있었던가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을 쓰신 이한 선생이나 엮음을 수고해 주신 유동환 선생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몽구』란 어릴 蒙자에 구할 求자로 어린 사람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한다는 뜻이라 한다. 어리고 무지몽매한 어린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배움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책이며, 옛날 중국의 천자에 의해 일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훈육서로 사용된 책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젊은이들을 위한 도덕 교과서로 활용되어 온 책이다.

 

    선과 악, 미와 추, 공과 죄, 진실과 거짓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어, 삶을 옳게 바라보게하는 훈육서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읽혀진 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 이후 유교적 관습과 교육환경 때문에 철저히 배척 당해 600년 가까이 아예 학문의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책이라 한다.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책이 『사자소학(四字小學)』이라 하여 서당에서 초급단계로 가르치고 있었으나 그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몽구』도 사자 형식으로 된 책이니 그 형식이나 내용이 얼추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왜 그리 되었는지는 나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윤리도덕에 치중하다보니 그리되지 않았나 하는 소감이다.

 

   엮은 이도 이 책을 처음 접할 때 매우 놀랐다는 소회를 올리고 잇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가르치던 『천자문』이나 『소학』처럼 단순한 도덕책인줄 알았는데, 사자 형식을 빌려 옛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그 자체로 아무런 가식없이 씌여져 읽는 이가 판단하도록 하는 책이라 말하고 있다. 이 책 『몽구』가 실용성만 따지는 한자 외우기가 아닌 얄팍한 처세술이나 고답적인 윤리책과는 한참 다른 매력을 발휘하고 있어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옮기게 되었다 한다. 옛날 배우는 학생들이 흔히 공부하는 책은 『사기』나, 『사서삼경』, 그리고 역사서인 『후한서, 전한서, 진서』 등 한자로 된 책이 대다수인데 어린 사람이나 일반 백성들이 이를 다 공부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한문을 공부하기도 어렵고, 설령 공부를 한다해도, 일반인들이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동몽선습』이나, 『사자소학』 등의 기초학문을 마치고, 『대학이나 논어. 맹자, 그리고 사서삼경』 등의 고급공부를 하려면 15년 여의 세월이 흘러야 가능하다니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래서 저자 이한 선생은 여러가지 책들 중에서 중요하고, 알아둘 만한 상식적이며, 백성들의 귀감이 될만한 내용들을 뽑아 넉 자씩 시 형식을 빌어 몽구를 저술하게 되었다 한다. 마치 『천자문』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라는 식이라 생각하면 다소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보통의 다른 한문 책은 철학, 역사, 설화집 등과 같이 옛 사람의 저서들은 거의 기전체나 설명문으로 되어있어 일반인들이 읽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 각 이야기 마다 네 글자씩 성어를 만들어 이것을 '표제(標題)'라 하며, 내용이 유사하거나, 비교할 만한 것을 두 개씩 나열해서 어린이가 읽고 쉽게 암송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몽구』란 책이다. 표제는 모두 592개 구절로 되어 있고, 네 글자 씩 뜻을 가진 시나 노래 형식의 운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어린 사람이나 일반인들도 읽고 외울 수 있지 아니한가?

 

   아무래도 네 글자로 하나의 고사를 나타내고자 하면, 어쩔 수 없이 상징적인 표현을 취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앞 연에는 사람의 호칭, 뒷 연은 이야기로 되어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듣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은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주석문이 필요했고, 주석문이 있음으로 해서 운문도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경우는 차라리 주석이 더 많을 지경이라 하니 역시 한자로 된 책은 알송달송한 내용이 많아 공부하기 매우 지겨운 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옛날에는 그 어려운 한자를 공부하며 그 고사를 외우고, 이를 시문화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면 20년 이상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니 학문의 길은 멀고도 먼 것이라 할 것인지...실학이 아닌 도덕적 윤리관을 주로하는 고사나, 역사적 사실을 당시 집권세력의 구미에 맞게 공부하려면 상투 끝이 닳아 떨어지도록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던 책 중에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이란 책이 있는 데 이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은 박제가,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율곡 이이가 지었다 한다. 이 책들도 蒙자가 들어 있는 것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하는 초급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책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격몽요결과 동몽선습』이 유학, 특히 성리학에서 주입하고자 하는 윤리 도덕을 위주로 편집되어 있다. 더욱이 아주 짧은 유교 덕목, 예를 들면 삼강오륜 같은 것을 외우기 편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반해 『몽구』는 저작시기가 중국에서 성리학이 나오기 이전이였으며, 그 안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개성적인 모습으로 담겨저 있는 점이 다르다. 『몽구』가 조선시대에 별로 대접 받지 못하고 찬밥 신세가 된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성리학에서 지향하고 있는 도덕적이고 이상저인 인간상을 보면, 『몽구』에 나오는 인간들은 너무나 파격적이고 저급하며, 위험하기까지한 인물들이 많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봉건시대 어린이들의 교과서로 애용되었으며, 특히 명치유신 이후로는 서구문물의 전폭적인 수입과정에서 『몽구』는 전통적인 교과서로 대접받으면서 수많은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한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중심을 고전에서 찾았고, 어린이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주체를 확립하고 외래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그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몽선습이나 격몽요결』처럼 중국의 『몽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고유의 어린이 교과서가 편찬되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나,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윤리의식만을 고양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 나중에는 역동적인 현실적응에 실패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아무래도 이런 정책들로 인해 근대화에 뒤떨어지고, 급기야는 일본에게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등신같이 나라를 빼앗기는 불운을 맛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 『몽구』는 어떤 입장을 고수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생생한 고사를 삶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어떤 삶이 옳은 삶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읽는자의 몫이라는 것이 엮은이의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이라는 도덕지상주의가 나오기 전의 동양인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윤리도덕이 덧칠해지기 전의 동양인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은 이 『몽구』를 읽음으로서 다소라도 알 수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지은이 이한 선생은 별로 유명한 사상가이거나 대학자는 아니다. 중국 당나라 때 '개원의 치세'로 유명한 현종 밑에서 조세창고와 시장관리를 맡은 '사마창참군'이라는 하급관리였다. 현종말기에 양귀비와 안록산 등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요주 땅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낸 사람이다. 그가 이 책을 짓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주 음미할만 하다.

 

  "나 이한은 말한다. 사기에서 진나라 송나라 시대까지 제자백가와 역사책은 천여 권에 가깝다. 더구나 수신기나 열이전 등 기이한 일을 적은 수많은 잡서에 이르면 그 때마다 다시 보거나 기억하는 일은 아주 어렵다. 또 옛날 사람들은 하나의 경전을 끝까지 그 뜻을 밝히고 깨우치는데 백발이 되 때까지 노력하기를 사양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글들을 골라서 읽더라도 완전히 갖추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제 한계가 있는 능력으로 끝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억지로 암송해서 넓은 지식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끝내 입술이 상하고 이빨이 빠지는 쓸데없는 노력만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번거롭고 필요하지 않는 것은 없애고, 정수만을 선택했다. 부디 너희들이 이책을 펼쳐 탐구해 보면 어쩌면 조금이나마 이로움을 얻을 것이다.

(끝없이 아득한 과거를 모두 상세하게 밝힐 수 없어 번거로움을 없애고, 정수만을 뽑았으니 너희는 열심히 공부해라. / 호호만고 불가비견 삼번척화 이조면전  浩浩萬古 不可備甄 芟煩華 爾曹勉

)" ※ 摭 주을 척, 旃 깃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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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이한(李翰)에 대한 두가지 이야기 | - 몽구(蒙求) 2012-09-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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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이한(李翰)에 대한 두가지 이야기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FREE_BOARD&y_number=160

몽구의 저자(著者) 이한(李翰) 대해서는 당(唐)나라의 이한(李翰)과 진(晉)나라의 이한(李瀚) 등 두가지설이 있다고 하는데 중국인명대사전에는 이한(李翰)이 마치 당(唐)나라 사람인것 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한(李翰)은 신라인 이고  진(晉)나라의 이한(李瀚)이 몽구의 저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노성매님께서 중국인명대사전을 한번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농서이씨 자료는 수입서적을 찾아봐야 겠네요. 어렵겠습니다. 이곳으로 가셔서 한번 찾아보십시요.   법인문화원

 

아래글은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주웠습니다. 출처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이한(李翰)에 대한 두가지 이야기


1.완산실록(完山實錄)에서 말하는 이한(李翰)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사공공이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을 싣고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2.정감(鄭鑑)이란 철인(哲人)과 이한(李翰)

「아득한 옛날 정감(鄭鑑)이란 철인(哲人)과 이한(李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뿐 아니라 세상을 내다보는 밝은 도력(道力)을 지녔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산천을 두루 편답하다가 전주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전주의 비옥하고 조용한 산세를 살피며 세상일과 후세를 논하던 중 이 산내의 산맥에 두곳의 명당이 있다고 동시에 생각하여 관산(觀山)하였는데 두곳이 다 기막힌 명당이요 장차 왕이 태어날 명당이니 명당자리를 보기는 했으나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두사람은 다 강산편답을 같이 한터라 후손을 위하여 각기 욕심을 내었으되 말은 못하고 누가 먼저 발복(發福)이 빠른 자리를 쓰느냐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이때 이한이 참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자리 쓰기를 원했다.

서로의 자리가 결정되자 정감이 말하기를 『그대의 후손은 앞으로 오백년 후에 고려국이 망하면 왕조를 이룰 것이나 우리 자손은 천여년이 지나야 빛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후 묘를 썻는데 그 폭우가 며칠을 두고 억수같이 퍼붓더니 묘는 흔적없이 사라져 평지가 되고 이때에 흘러 고인물이 지금의 덕진못(德津池)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전주 이씨는 건지산에 이한을 모시고 오백년 동안이나 전주에 살았으며 이안사(李安杜)에 이르러 전주땅을 떠났는데 그후 이성계(李成桂)가 이씨 조선을 세운 뒤에도 왕운(王運)을 주게된 조상의 묘를 찾지 못하다가 조선왕조 21대 왕인 영조(英祖)때 조상 대대로 전하여 오던 건지산 기슭의 조상묘를 찾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영조 47년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시조(始祖) 이한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광무 2년(1899)에 건지산 기슭에서 나무꾼이 묘소를 발견함에 따라 왕실은 서둘러 봉분을 모시고 곡담을 쌓아 능묘로써 경묘전(慶墓殿)에 있던 신도비(神道碑)를 옮겨 놓고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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