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윤흥길 연재 소설
https://blog.yes24.com/springstar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나의별에도봄이오면
월~금 10시에 업데이트 됩니다 ^^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2월 스타지수 : 별6
작가 블로그
전체보기
알립니다
이벤트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윤흥길 작가 소개
태그
내용이 없습니다.
2011 / 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나의 친구
최근 댓글
wkf qhrh rkqlsek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안타깝습니다. 정말 호흡이 좋은 글이.. 
새로운 글
오늘 1 | 전체 49762
2011-09-08 개설

2011-10 의 전체보기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30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1-10-31 08:24
https://blog.yes24.com/document/537643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님은 보고 잪으지요오…… 똥은 매랍지요오…….”

  하기야 춘풍이는 당초부터 순금에게 버거운 상대이긴 했다. 범보다 무서운 아버지도 매번 속수무책으로 춘풍이한테 당하고만 지내는 판인데, 그 춘풍이 입을 무슨 재주로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결국 보속을 늦추면서 순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호구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때맞춰 구원의 손길을 파송하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춘풍이를 향한 감사의 염이 그니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비록 집안에서 시방 아버지라는 또 다른 호구가 거대한 입을 한껏 벌린 채 기다리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니는 이제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노잣돈은 똑 떨어졌지요오…….”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를 놀려대는 소리를 어린 순금이 듣고 있었다. 부엌어멈 섭섭이네가 목소리에 짓궂은 노랫가락을 실어 어린 아씨를 마구 놀려대는 중이었다.

  알나리깔나리, 순금이는 춘풍이 시악시라네!

  부엌어멈 딸인 섭섭이뿐만 아니라 또래의 다른 조무래기들까지 합세해서 순금의 주위를 뱅뱅 돌며 일제히 목청을 드높이기 시작했다.

  알나리깔나리, 춘풍이가 순금이 신랑 되얐다네!

  어느덧 눈앞으로 다가선 감나무골을 바라보며 순금은 아직도 귓바퀴를 쟁쟁히 맴도는 그 노랫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알나리깔나리’로 시작되는 그것은 세월이 불러주는 노래요 세월이 던져오는 놀림이었다. 구만리장천을 훨훨 날아 어느 겨를에 감나무골 어귀로 되돌아온 과거의 시간이 순금하고 어깨를 나란히 해서 동행하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아스랗게 잊고 지냈던, 먼먼 옛날 일화 한 도막이 하필이면 왜 그 시간에 그런 상황에서 덩두렷이 되살아나는지 당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미 완숙한 여인의 경지에 들어섰는데도 순금은 댕기머리 시절 그 조무래기들 놀림노래를 떠올리며 그 나이 계집애처럼 어둠 속에서 낯꽃을 홧홧이 붉혔다.

  우연한 실수였다. 그 실수가 놀림의 빌미였다.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감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개한테 쫓겨 집안으로 뛰어들다 아무데나 가까운 방으로 피신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겁에 질려 정신없이 허둥대던 나머지 천석꾼 대지주 외동딸만이 신을 수 있는 꽃당혜를 그만 토방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것이었다.

  “오매, 오매, 요게 무신 재변이디야!”

  성난 개를 대문간에서 멀리 내쫓고 돌아온 부엌어멈이 다짜고짜 탄성부터 터뜨렸다. 순금 또래의 딸을 둔 젊은 부엌어멈은 구구구 암비둘기 우는 소리로 괴상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시상에나, 원 시상에나, 우리 순금이 아씨 요 기구망칙헌 팔자를 장차 으찌 혀야 옳을꼬이!”

  연방 호들갑떨면서 섭섭이네는 질자배기 깨지는 소리로 울안에 거처하는 사람 모두를 다급히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방 안에서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가쁜 숨만 색색거리고 있던 순금은 부엌어멈의 호들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문 창호지에 뚫린 구멍으로 바깥을 빠끔히 내다보면서, 저게 웬 굿판일까, 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워메, 워메, 참말로 우리 순금이 아씨 큰일 나 뿌렀구만!”

  부엌어멈 호들갑에 이끌려 널따란 울안 곳곳에서 달려 나온 남녀노소 아랫것들이 행랑채 마당에 그득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을 기다랗게 뽑아 토방께를 기웃거리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끼리끼리 시시덕거렸다.

  “와따매, 저게 뭣이다냐? 우리 순금이 아씨 꽃당혜를 영락없이 빼다박은 저것이 대관절 어느 뉘 꽃신이다냐?”

  “우리 순금이 아씨 꽃당혜가 틀림없네그랴! 그러고 또 거룻배 사촌맨치로 너부데데
허게 생겨먹은 저 물건은 춘풍이놈 흔털뱅이 짚세기가 틀림없고!”

  “시상에나, 시상에나, 금지옥엽 우리 아씨께서 으쩌다가 그 잘난 신랑감들 죄다 제쳐두고 해필이면 춘풍이 같은 벅수를 배필로 골랐을꼬!”

  그제야 순금은 어마지두에 뛰어든 그 방이 하필이면 머슴들 거처임을 깨달았다. 비로소 맡아지는 머슴방 특유의 퀴퀴한 홀아비 냄새가 갑자기 오장을 확 뒤집기 시작했다. 천석꾼 외동딸로서 체모를 잃지 않으려고 제딴은 한껏 음전을 빼면서 순금은 방문을 열고 나이 많은 아랫것들 앞으로 조신하게 납시었다. 꽃신을 찾느라 토방을 두리번거리는 순금을 보고 마당에 모인 모든 입들이 한꺼번에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영문도 모르는 채 졸지에 웃음가마리 신세가 된 순금은 발갛게 홍조 띤 낯꽃으로 오로지 꽃신 찾는 일에만 고부라지는 시늉을 했다. 드디어 찾았다. 앙증스레 자그맣고도 호사스러운 꽃신 한 짝이 엄청나게 큰 짚신짝 안에 옴쏙 들어앉아 있었다.

  “알나리깔나리, 순금이 아씨는 춘풍이 시악시라네!”

  순금이 제각각 따로 동떨어져 있는 꽃신 두 짝을 수습해서 발에 꿰는 동안 구경꾼들 사이에서 수상쩍은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사람들이 왜 자꾸만 춘풍이란 이름에다 제 이름을 비끄러매는 것인지 아직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순금은 가장 임의로운 상대인 부엌어멈을 눈으로 찾았다. 섭섭이네가 실실 웃는 낯꽃으로 다가와 사정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남자 신발과 여자 신발이 한데 포개질 경우, 그것은 하늘이 정해 준 배필을 뜻하기 때문에 신발 임자 되는 남녀는 언젠가 반드시 부부의 연을 맺을 팔자라는 이야기였다.

  “알나리깔나리, 춘풍이가 순금이 아씨 신랑 되얐다네!”

  때마침 바깥일 나갔던 춘풍이가 미련하게 큰 허우대를 들이밀며 대문간에 몰골을 나타냈다. 순금 대신 이번에는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춘풍이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춘풍이 너 이놈, 참말로 수지 맞은지 알거라! 오날서부텀 니놈은 우리 순금이 아씨 신랑이다!”

  “으, 신랑…….”

  어찌 돌아가는 셈판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이 춘풍이는 대뜸 천진스러운 반편이 낯꽃을 활짝 펴면서 해맑게 웃기부터 했다.

  “으떤 놈은 참말로 배가 터지게 복도 많구만. 두엄자리에 앉었다가 꿩 줏딧기 공력 하나 안 들이고 선녀 같은 우리 아씨를 각시로 얻었으니깨!”

  “으, 각시…….”

  뭐가 그리도 좋은지 춘풍이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벌쭉벌쭉 하염없이 웃어대기만 했다. 순금은 그 꼴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예 참고 참았던 울음보를 으앙 터뜨리고 말았다.
 
순금은 자그마치 사흘 밤낮을 꼬박이 울었다.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온갖 별미의 군입정거리도 다 소용없었다. 부모 나이 또래 아랫것들이 번차례로 돌아가며 업어 주고 안아 주고 목말 태워 주는 것도 모조리 다 싫다고 퇴박했다. 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등신인 줄 천하 사람들 죄다 아는 춘풍이한테 꼼짝없이 시집갈 도리밖에 없게 된 제 기구한 팔자가 너무 서럽고 분하고 억울해서 코흘리개 아씨는 마냥 어기찬 울음으로 세월을 삼으며 지내야만 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11)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6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9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1-10-28 08:31
https://blog.yes24.com/document/535940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구리터분한 입내와 함께 불잉걸 같은 숨결이 콧잔등 위로 답삭 쏟아졌다. 기꾸찌의 짧게 기른 코밑수염이 입술 언저리를 따갑게 찔러대는 걸 의식하는 순간, 순금은 잠시 잊고 있던 신앙심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기꾸찌가 조롱조로 들먹이던 에호바 가미사마의 존재였다. 지금 겪는 위난으로부터 저를 구해 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순금은 혼신의 기력을 모아 하나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똥은 매랍지요오…….”

  바로 그때였다. 필사적인 간구의 기도가 제대로 상달된 것일까. 구원의 손길은 뜻밖에도 엉뚱한 경로를 통해서 찾아왔다. 소문난 바보의 몸뚱어리를 빌린 구원의 손길이 물방앗간을 향해 느럭느럭 다가오는 중이었다.

  “님은 보고 잪으지요오…….”

  춘풍이 목소리를 재차 확인하는 순간, 축 늘어졌던 순금의 몸에 새롭게 기운이 샘솟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욧! 사람 살려욧!”

  죽을힘을 다해 사내 가슴팍을 떠박지르면서 순금은 목이 터져라 소래기를 질러댔다. 오로지 잠긴 빗장 벗기기에만 고부라져 있던 기꾸찌도 뒤늦게 무슨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몸놀림을 딱 멈추면서 물방앗간 밖 동정에 잔뜩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쏘내기는 쏟아지지요오…….”

  춘풍이의 걸음발이 한량없이 굼뜨게만 느껴졌다.

  “어서요, 춘복이 아저씨!”

  아닌 밤중에 물방앗간 안에서 뻗쳐 나오는 새된 탄원의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련만, 춘풍이는 도무지 서두르는 기미를 안 보였다. 어느 잔칫집에 가려고 한유하게 밤마을이라도 나온 양 느려터진 걸음발을 가진 풍월 소리가 지척지척 다가오고 있었다.

  “노잣돈은 똑 떨어졌지요오…… 똥은 매랍지요오…….”

  마침내 풍월 소리가 물방앗간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둡던 소리는 이내 밝은 빛으로 바뀌었다. 한쪽 손에 들려 한들한들 앞뒤로 그네를 타는 조족등(照足燈) 불빛을 받아 춘풍이는 마치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괴수와도 같은 거한의 모습으로 비쳤다.

  “송아지는 도망가지요오…….”

  “난다! 도시난다!”

  상황이 다급하게 변하자 기꾸찌 입에서 그제야 비로소 일본말이 튀어나왔다. 그때까지 단단히 덮쳐누르고 있던 여자를 아무렇게나 떠박지르면서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노야로, 난다(이 새끼, 뭐야)?”

  기꾸찌 쪽은 숫제 거들떠도 안 보면서 춘풍이는 젊은 주인아씨를 향해 느럭느럭 다가왔다. 불빛의 접근에 흠칫 놀라 순금은 함부로 풀어헤쳐진 젖가슴을 후딱 손바닥으로 가렸다. 주인아씨 헝클어진 머릿결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보더니만 춘풍이는 느닷없이 헤벌쭉 웃었다.                   

  “감나무골 막 소리 질러. 순금이년 싸게 잡어와.”

  순금은 어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바까야로!”

  춘풍이를 향해 기꾸찌가 냅다 욕지거리를 날렸다. 그러자 춘풍이는 공평하게 기꾸찌에게도 웃음 한 뭉텅이를 헤벌쭉 배급했다.

  “으, 바가야로.”  

  “이얍!”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앙바틈한 기꾸찌 몸이 거구의 춘풍이한테 들러붙었다. 기꾸찌 유도 기술에 걸려 춘풍이는 하마터면 모잡이로 휘우뚱 넘어갈 뻔했다. 춘풍이는 이내 자세를 바루고 나서 아직도 제 턱밑에서 뱌비작거리고 있는 상대방 머리꼭뒤를 소댕 같은 손바닥으로 꽉 짓눌러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혀 놓았다. 춘풍이는 재차 덤벼드는 기꾸찌 멱살을 한 손으로 꺼들어 허공으로 불끈 추어올리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땅바닥에 힘껏 태질을 쳐버렸다. 기꾸찌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내지르는 구슬픈 비명이 물방앗간 안을 몇 바퀴 여울물처럼 세차게 엔굽이쳐 흘러 다녔다. 그러자 춘풍이는 또 한 차례 헤벌쭉 웃어 보였다.

  “순금이년 싸게 잡어와. 감나무골 큰일 나.”

  거푸 감나무골을 들먹이는 점으로 미루어 아버지가 시방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순금은 나갔던 넋을 가까스로 불러들여 엉망으로 흐트러진 몸맨두리를 허둥지둥 수습했다. 마침내 순금은 깍짓동같이 우람한 춘풍이 몸집을 방패삼아 물방앗간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요오씨, 두고 보자!”

  순금은 등 뒤에서 기꾸찌가 북북 이를 가는 소리를 들었다. 춘풍이가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만 기꾸찌를 겨냥하고 콧물 탄알 두 방을 팽팽 연속으로 날리는 솜씨를 선보였다.

  “꼴지게는 넘어지지요오…….”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앞에서 종종걸음 치는 젊은 주인아씨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르면서 춘풍이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던 산서 땅 산천초목들마저 깜짝 놀라 잠을 깨리만큼 기운찬 노랫가락을 뽑아대고 있었다.

  “해는 꼴딱 넘어가지요오…….”

  “앞장서서 먼저 가셔요.”

  순금은 길가로 비켜서면서 춘풍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춘풍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 때라도 주인아씨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그렇게 버틸 심산인 듯 그는 손에 들린 조족등만 연방 앞뒤로 한들한들 흔들어 위태롭게 그네를 태우고 있었다.

  “그럼 제가 앞장설 티니깨 아저씨는 멀찌감치 뒤처져서 입 꾹 다물고 조용허니 따러오셔요.”

  “괴얄띠는 안 끌러지지요오…….”

  봉욕 직전의 수치스러운 현장을 목격한 춘풍이로부터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지고 싶어 순금은 깜깜한 밤길을 거지반 뜀박질하다시피 천방지축 걸었다. 하지만 춘풍이는 등불의 부조까지 받아가며 그다지 힘도 안 들이고 성큼성큼 뒤따라왔다. 도중에 혹 동네 사람 누구라도 마주쳐 처참한 제 꼬락서니를 들킬세라 마음 졸이는 주인아씨 처지를 그는 털끝만큼도 헤아릴 줄 몰랐다. 동네 개들은 물론 사람들까지 한목에 다 깨워 밖으로 불러낼 작정인 듯 그는 노래 축에도 못 드는 그 노래를 입아귀에 방자하게 매단 채 순금의 뒤꽁무니를 부지런히 밟아오고 있었다.

  “갈 질은 멀지요오…….”

  “춘복이 아저씨, 제발 조용히 조깨 허셔요!”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불러야 될 경우, 순금은 소싯적부터 춘풍이를 반드시 춘복이 아저씨라 불러 버릇했다. 소문난 바보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 죄다 춘풍이라 함부로 부를지라도 순금은 그럴 생각이 호리만큼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짓일뿐더러 성경의 가르침에서도 벗어나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8)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7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8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1-10-27 08:30
https://blog.yes24.com/document/535121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최순금은 물방앗간 근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주변 기척을 살폈다. 역시 환청이었을까. 어둠 속을 응시하며 두 귀를 쫑긋 세워 봐도 수상쩍은 발소리는 더 잡히지 않았다. 순금은 한 차례 심호흡 끝에 어둠 복판에 파묻혀 괴기스러운 정적에 싸인 물방앗간 안으로 조심조심 발을 들여놓았다. 아버지 말마따나 야소귀신을 모신 신주단지에 해당하는 성경과 찬송가책을 범보다 무서운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끔 건사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그러기에 물방앗간만큼 안성맞춤의 장소도 드물었다. 이미 폐허로 바뀐 데다가 몇 년 전 이웃 마을 처녀가 목매달아 죽는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는 귀신이 나올 듯싶게 을씨년스러운 풍경으로 변하는 바람에 대낮에도 근처를 얼쩡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지경이었다.

  허울뿐인 방앗간 대접을 받는 그곳의 내부는 참으로 복잡했다. 곡식을 빻던 커다란 돌확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위쪽에서 물줄기 떨어지기 기다리며 언제든 삐거덕삐거덕 돌아갈 채비를 갖춘 낡은 물레바퀴가 있고, 또 절구 쪽으로 동력을 건네주던 우람한 굴통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썩은 통나무나 삭아빠진 널빤지 따위가 지붕에서 무너져 내린 썩은새와 흙더미에 어지러이 뒤섞인 채 나머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샛내교회 신자들 성경과 찬송가책 전부를 숨기고도 남으리만큼 물방앗간 내부는 요지경 속이었다.

  늘 하던 방식대로 최순금은 웅숭깊은 돌확 안에 자신의 신심을 꼭꼭 감추기 위해 숯검정 같은 어둠발로 켜켜이 뒤발한 흙바닥을 더듬더듬 손으로 짚으며 기다시피 나아갔다. 순금의 귀에 또렷한 인기척이 잡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환청도 무엇도 아닌,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움직임이 분명하다고 깨닫는 순간, 그니는 짤막한 비명과 함께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두 권의 책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두꺼운 어둠의 벽을 여닫이문처럼 밀치면서 발소리가 저벅저벅 다가들고 있었다.

  “누, 누구…….”

  저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사품에 순금의 혀는 수하(誰何)의 절차를 끝까지 임의롭게 수행하지 못했다.

  “놀라지 마시오, 사이상.”

  주머니 속 공깃돌 다루듯 암흑 속으로 데굴데굴 굴려 보내는 상대방 말투는 여유만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제는 남들 이목 따위 꺼리며 예의바르게 처신할 필요가 없다는 듯 사내는 거침없는 발소리로 물방앗간 내부를 쿵쿵 울렸다.

  “당장 안 물러가면 소릴 질르겄어요!”

  바투 다가서는 발소리 근처에다 순금은 가까스로 떨리는 목소리 몇 마디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곧바로 건너왔다.

  “어디 한번 맘대로 소리를 질러보시오. 사이상이 믿는 에호바 가미사마께서 그 소리 듣고 자기 딸 원조하러 금방 달려올지도 모르니까.”

  능란한 조선말 이죽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 눈높이로 들어 올린 성냥불 때문에 사내의 얼굴 윤곽이 기형의 불균형한 모습으로 섬뜩하게 드러났다. 기꾸찌였다. 어둠 속에서 사내의 말소리를 최초로 들었을 때 순금은 이미 기꾸찌 같다고, 기꾸찌란 작자가 틀림없다고 짐작은 한 바 있었다.

  “사이상이 모시는 에호바 가미사마를 상대로 유도나 검도 시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만큼은 내가 이길 자신 있소.”

  기탄없는 웃음소리가 물방앗간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상대방 정체가 밝혀졌다 해서, 그리고 그 상대방이 지난날에도 여러 차례 부딪힌 적 있는 인물이라 해서 순금에게 유리한 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유리는커녕 오히려 겁에 질려 순금은 쥐며느리처럼 온몸이 더욱더 동글게 옴츠러들었다. 뜨거움을 전연 못 느끼는 사람처럼 기꾸찌는 손끝에서 성냥개비 하나가 끝까지 다 타 저절로 꺼질 때까지 참을성 좋게 견디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렸는지 사이상도 잘 아시잖소. 며칠 동안 기회를 노리고 사이상 동태를 주목해 왔소. 자아, 당장 오늘 이 자리서 가부간에 결판을 내기로 합시다.”

  성냥불을 삼켜 버린 어둠 속에서 기꾸찌는 서두르는 기색 별로 없이 조용조용히 입을 놀렸다. 선반 아래 까치발을 받치듯 모음 밑에 붙이는 리을 발음만 약간 어색하게 들릴 뿐,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유창한 조선말이었다.

  “내지인이라고 요렇게 반도인을 얕잡어보고 짓밟어도 되는 건가요?”

  순금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반도인이 좋아서, 오랫동안 조선 여성을 흠모해서 구애하는 건 얕잡는 것도, 짓밟는 것도 아니지요. 나는 지금 내지인이 아니고 그냥 한 남자 자격으로 사이상 앞에 서 있는 거요.”

  웃음기 머금은 말소리가 냉큼 다가와 순금이 뒤로 물러선 만큼의 간격을 단숨에 좁혀 버렸다.

  “절대로 받어들일 수 없어요! 절대적으로 안 된다고 첨부터 답을 보냈잖어요! 벌써 오래전에 혼인을 헌 유부녀라고 몇 번이나 더 신상을 밝혀야만 되겄어요?”     

  “호적상으로는 엄연히 미혼이지요.”

  “일본에 일본 풍습이 있딧기 조선에는 조선 풍습이 있어요. 약혼은 성혼이랑 똑같은 것이고, 한번 자기 배필을 정헌 여자는 절대적으로 두 남자를 섬기들 않는 것이 우리 조선 풍습이라는 것쯤 기꾸찌 씨도 잘 아시잖어요!”

  “나는 그런 것 하나도 몰라. 나는 일본 사람이니까 조선 풍습 따위는 하여간에 상관없어.”

  “자꼬만 요런 식으로 애민 사람 괴롭히면, 관에다 고발허겄어요! 아무리 기꾸찌 씨가 내지 출신이라 허드래도 반도 출신 아무 여자나 폭력으로 위압허고 취첩헐 권리는 일본 법령에도 없어요! 만일 읍내 경찰서로 안 된다면 직접 총독부를 찾어가서 진정을 허고 말겄어요!”

  “어디 한번 그렇게 해 보시지. 한 남자가 한 여자 좋아해서 벌어진 일은 아마 우리 총독 각하께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시는 국책 사업일걸?”
  어느 틈엔가 기꾸찌 말투가 깍듯한 존댓말에서 완연한 반말지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기꾸찌 숨결이 갑자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육박하는 사내 숨결을 피하기 위해 순금은 필사적인 몸짓으로 뒷걸음쳤다. 물레바퀴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서로 쫓고 쫓기는 때 아닌 덧게비장난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속에서 한참 계속되었다.

  사내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끝내 머리끄덩이를 거머잡히는 순간, 여자는 숨이 헉 멎어 버렸다. 사내는 일단 제 손아귀에 들어온 여자를 갑자기 험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사내는 우선 여자 귀싸대기부터 한 대 호되게 후려갈겼다. 그런 다음 곧바로 여자 허리에 유도 기술을 걸어 땅바닥에 간단히 쓰러뜨렸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넉장거리로 나가떨어진 여자를 사내가 지체 없이 덮쳐눌렀다. 여자는 옷고름과 함께 저고리 앞섶이 북 뜯겨 나가는 절망적인 소리를 들었다. 사내는 거칠기 짝이 없는 손놀림으로 여자 젖가슴을 헤치고, 여자는 그 손길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연방 비명을 뽑아댔다. 그러자 사내는 양손으로 여자 목줄띠를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꽉 막히는 그 창황 중에도 여자는 본능이 시키는 바에 따라 사내가 쉽사리 들어올 수 없게끔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양쪽 발목이 서로 엇갈리도록 두 다리를 단단히 꼬아 아랫도리에 굳게 빗장을 질렀다. 그 빗장을 뽑으려고 사내는 여자 가랑이 사이에 지렛대를 넣어 이쪽저쪽 함부로 젖히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어! 순순히 내 말을 들어!”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6)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5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7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1-10-26 09:47
https://blog.yes24.com/document/5344364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문 목사야말로 흉용한 신사 참배의 파도를 막아줄 든든한 방파제라고 샛내교회 신자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계 저명 목사들마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그 방파제 역할을 일개 시골 목사한테 기대한다는 게 처음부터 무리였다. 다름 아닌 문 목사이기에 그동안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몸으로 가로막고 그 발걸음을 그나마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 문 목사 덕택에 여태껏 샛내교회가 그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을 신자들은 홍복으로 알아야 할 판이었다.

  심판받어 마땅헌 죄인들은 목사님 아니라도 조선 천지에 얼매든지 쌔고쌨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앞질러서 목사님이 먼저 목사님 자신을 심판허고 정죄허시지 마시어요, 제발.”


 
심판대 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기나 한 듯이 순금은 가슴을 옥죄는 통증을 느꼈다. 문 목사 같은 충직한 종마저 일제의 위세에 눌려 갈팡질팡 헤맬 지경이라면 여타 평신도들은 대관절 무슨 배포로 장차 주님 심판대 앞에 담대히 나아가 설 수 있겠는가.


 
그렇소, 최 선생.”


 
구렁이 형상을 한 침묵의 똬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주님 심판대 앞에 떳떳이 설 자격이 있는 자는 조선 천지에 불과 몇밖에 없소.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계시는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을 제하고는 모두 다 무저갱(
無底坑) 지옥에 떨어질 죄인의 괴수일 뿐이오.”


 
구렁이의 머리와 몸통에 이어 마지막으로 꼬리 부분까지 예배당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문 목사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소. 무엇을 더 감추겠소. 고백하건대, 신사 참배 그것이 두려운 게 아니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신사 참배 다음에 찾아올 그 어떤 것이오. 어느 때부턴가 나는 말씀의 위력보다 총칼의 위력을 더 큰 것으로 보기 시작했소. 여호와 하나님 존재가 요즈막같이 작고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소. 현인신(
現人神)을 자처하는 덴노헤이까 존재는 날이 갈사록 더 크고 가깝게 느껴지는 거였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손수 택하신 당신의 백성이요 자녀들이 왜 이런 고초를 당하도록 방치하고 계시는지 아버지의 뜻을 당최 헤아릴 방도가 없었소. 신사 참배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유곡에 빠진 것이 지금 우리들 처지요. 초대 교회를 빛낸 믿음의 선진들도 지금 우리한테는 전연 격려가 되지 못하오. 참배를 결의한 총회 덕분에 한 가닥 빠져나갈 협로가 생겼다 해서 스사로 위안을 삼을 수도 없는 처지요. 적그리스도 공격으로부터 우리 믿음을 방어할 전신갑주나 엄심갑은 인자 나한테도, 최 선생한테도 없다는 사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잘 아실 거요. 우리들은 지금 막다른 골로 내몰려 있소.”


 
신열에 들떠 문 목사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겁나는 소리를 하는지조차 모르고 도나캐나 마구 지껄이는 것 같았다. 문 목사가 큰 소리로 말하는 동안 예배당과 목사관을 잇는, 강단 옆 작은 통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사모가 들어서는 기미도 못 챌 만큼 문 목사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성전을 폐쇄하는 길 말고 우리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방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고 또 확인했소.”


 
평상시와 전혀 다른 말투로 문 목사가 수많은 말들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순금의 귀에는 그것들이 제대로 의미를 갖추어 들어오지 않았다. 예삿말이 아니라 겁에 질려 질러대는 단말마 비명 같은 것으로 들렸다. 순금은 문 목사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을 발견하고 말았다.


 
문 목사 사모가 남편에게 다가가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문 목사는 임재하시는 심판의 손길이라도 접한 듯 온몸이 별안간 뻣뻣이 굳어져 버렸다. 그는 몹시 힘에 겨운 동작으로 느릿느릿 고개를 외틀었다. 그리고 얼굴 표정이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돌변했다. 어깨에 얹힌 손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그는 사모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사랑과 신앙으로 똘똘 뭉쳐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 나온 부부 사이에도 때로는 알면서 모르는 척 그냥 눈 딱 감고 넘어가 줘야 할 은밀한 대목이 있는 모양이었다. 분노와 적대감을 드러내는 남편을 향해 사모는 조용히 도리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문 목사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렇소. 최 선생은 내 말을 명심하시오! 이 시간부터 최 선생은 가삼 속 구중심처 은밀한 처소에다 어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성전을 세우시오! 제아모리 다리가 긴 사단 마귀라도 넘지 못할 철옹성 같은 제단을 쌓으시오!”


 
마지막 말을 마친 다음 문 목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예배당 밖으로 힁허케 나가 버렸다. 사모의 시선과 순금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방금 전 남편에게 했던 것처럼 사모는 순금을 향해 천천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몸짓인지 정확히 헤아릴 수 없었다. 사모는 한 마디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 남편의 파격을 목격한 사모의 표정치고는 너무도 태연자약했다. 태연자약하다 못해 차라리 평온하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여자 둘만 남은 휑뎅그렁한 예배당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오히려 순금이었다. 한시바삐 이 자리를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피차 난처한 지경에서 다만 한 순간이라도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사모에 대한 예의요 부조라고 생각했다. 순금은 변변한 작별 인사도 못하고 어물어물 등을 돌렸다. 마치 신자를 가장하고 들어와 연봇돈 훔쳐 달아나는 불신자처럼 죄진 발걸음으로 화급히 예배당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어쩌면 내가 잘못 들었는지도 몰라. 혹간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이를테면 시커먼 털북숭이 팔뚝이랄지 봉두난발 따위로 구체적 형상을 갖춘 채 시시각각 다가드는 무섬증을 멀리 쫓아 버릴 심산으로 최순금은 또다시 입 밖에 소리 내어 혼잣말을 시도했다. 그니는 예배당에서 실지로 보고 들었던 모든 그림과 소리도, 그리고 시방 제 뒤를 밟아 끈덕지게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기척도 죄다 귓것의 조화로 말미암은 곡두 현상인 양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외딴 감나무골의 밤을 힘겹게 파수하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잔약한 불빛 몇 점이 먼발치로 보였다. 전시 체제 아래 물동계획(
物動計劃)에 따라 석유 배급이 완전히 끊기면서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들기름 아니면 피마자유로 등잔불을 밝히고 있었다. 손을 휘저어 후두두 훑으면 앵두알처럼 한 움큼 쥐일 것처럼 저만큼 앞에서 앙증맞게 깜박거리는 불빛을 보면서 순금은 적이 안도했다. 이제 물방앗간 내부, 저 혼자만 아는 비밀 장소에 성경과 찬송가책만 감춰 놓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본디 감나무골을 비롯한 인근 삼동네에서 나오는 소출 대부분을 다루던 물방앗간이었다. 집집에서 가져오는 봄보리 가을벼 찧어대느라 사시장철 한눈팔 겨를도 없이 줄곧 돌아가던 물레방아가 어느 날 갑자기 멈추어 섰다. 면소재지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정미소가 세워진 다음부터 기운 좋은 기계 방아한테 일감을 거지반 다 빼앗긴 탓이었다. 엎친 데 덮쳐 일본인 벌목업자가 홀머리산 일대 울창한 숲에서 베어낸 통나무들 실어 나를 산판도로를 닦으면서 물길이 망가지고 물줄기마저 턱없이 졸아붙는 바람에 그나마 애면글면 명맥을 유지하던 물방앗간은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물방앗간은 그 후 돌보는 사람 아무도 없이 감나무골 어귀 한쪽에 덩그렇게 내박쳐졌다. 오며가며 어쩌다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시대의 개명바람에 밀려난 설움과 지난날 화려했던 이력을 동시에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9)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4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6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1-10-25 08:27
https://blog.yes24.com/document/533575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그러면 우리 교회도 결국 신사 참배를…….”

  “아니 그렇소. 목자가 양 떼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스사로 자기 양 떼를 해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소? 그리하야 문 목사는 양 떼를 몰고 스사로 늑대 굴을 찾아가는 위험 대신에 차라리 그 양 떼를 뿔뿔이 흩어서 들판에다 풀어놓는 모험 쪽을 택하게 된 거요.”

  무릎을 통해 온몸의 기력이 한목에 좍 빠져나가는 얄망궂은 순간을 순금은 그때 경험했다. 마치 어떤 불가항력에 의해 두 다리 중동이 꺾이듯 순금은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소. 최 선생은 인자부터 은밀한 처소에다 새 성전을 별도로 세우도록 하시오. 믿음 있는 곳에 성전도 같이 있는 법이오. 구중심처 흉당에다 오즉 최 선생만 아는 비밀한 제단을 쌓으시오. 기왕에 봉인된 성전을 다시 찾을 생각 말고 성도들 각자 각자가 자기 흉당에다 건립한 그 보이지 않는 성전을 끝까지 지키면서 최후심판 날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제아모리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다는 대일본제국이라 할지라도 최 선생 가삼속 깊은 자리 그 성전만은 도모지 허물 수도 없고 폐문할 수도 없을 것이오.”

  문 목사의 손이 느릿느릿 다가오더니만 순금의 들썩이는 어깨를 슬며시 짚었다. 그 손의 떨림이 두툼한 겉옷을 뚫고 살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순금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그 떨리는 손이 떨리는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마즈막 삼일예배 시간에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육신을 조각조각 잔인하게 찢어서 만신창이로 만드는 의식을 거행했소. 그런 연후에 우리 주님 몸 조각을 각자 한 점씩 가삼 속에 챙겨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소. 그 의식에 불참하신 최 선생 몫으로 주님 몸 조각 작은 한 점이나마 남겨뒀으니까 모쪼록 소중하게 간즉하면서 열심을 다하야 믿음을 지키도록 하시오. 주님 심판 임하시는 바로 그날, 성도들 각자 각자가 고이 간즉했던 그 몸 조각들을 한자리에 모두어서 다시 맞출 경우, 만신창이가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몸은 다시 온전하신 형상으로 복원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최후심판의 날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가장 절실히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때라고 순금은 생각했다. 문 목사의 도움이 아니면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금은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문 목사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딴판이었다. 오히려 저보다 훨씬 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문 목사인 듯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눈초리로 문 목사가 도리어 저를 향해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굳건한 반석의 믿음을 지닌 줄만 알았던 평상시 문 목사가 아니었다. 지난날의 그답지 않게 문 목사는 매우 감상적인 비유를 헤프게 구사하는 나약한 면을 드러내고 있었고, 몹시 흥분한 나머지 자포자기 상태에서나 보일 법한 섬뜩한 광기마저 번뜩이고 있었다. 스스로 내린 마지막 결정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라는 확신을 다른 누구보다 우선 문 목사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기색이었다. 흑암 중에 빠져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는 자들이 겪을 법한 혼돈의 자취가 끌로 파고 정으로 쪼은 것처럼 문 목사 얼굴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무신 뜻으로 허시는 말씀인지 잘 알겄어요. 그런디, 즈이들 신자 쪽은 그런다 치드래도, 목사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허실 작정이셔요?”
 
그럴 수만 있다면 순금은 위기에 빠진 문 목사를 감히 구해 주고 싶었다.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문 목사가 놓여나게끔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존경의 대상이던 문 목사를 향한 측은지심이 순금으로 하여금 교회 폐문 소식에 접하는 순간 받았던 엄청난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실을 했다. 뿐만 아니라 길래 곤고한 세월을 살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자신의 박행한 처지를 염두에 둔 암담한 예감마저 잠시 잊도록 만들었다.
 
   “그렇소.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말로가 어떤 것이었는지 최 선생이 여태 모르고 계실 리가 없잖소.”

  한참 만에 나온 문 목사의 대꾸는 마치 질문자의 어리석음과 지각 모자람을 꼬집기라도 하듯 싸늘한 냉소를 품고 있었다.

  “제발 목사님, 제 앞에서 말끝마다 그런 식으로 말씀허시지 말어 주셔요. 목사님 자신을 가룟 유다에다 비유허시는 건 천부당만부당헌 말씀이어요. 신사 참배를 위요허고 벌어진 요번 일이 어떻게 그 배반자가 저지른 범죄허고 같은 거라고 주장허실 수 있어요?”    

  “바로 그렇소, 최 선생. 문 목사는 계명을 어겼소. 계명 중에서도 제일계명하고 제이계명을 한목에 어긴 죄인 중의 중죄인이오. 한 궁창에 태양이 둘일 수는 없는 법이오. 그런데 문 목사는 본시부터 있던 태양 그 반대편에 그보다 더 크고 밝은 다른 태양이 또 하나 있는 것처럼 거즛 증거하고 말았소. 여호와 하나님하고 동렬에다 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天照大神)를 나란히 앉히는 대죄를 범하고 만 거요. 다른 어떤 신보다도 질투가 많으신 만유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차 어떤 벌로 우상 숭배의 대죄를 범한 중죄인을 심판하실 것인지 문 목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오.”

  문 목사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잉걸불 같은 언어들이 예배당 내부에 들어찬 냉습한 공기와 접촉하기 무섭게 소금 모양의 하얀 결정체로 변해서 머리 위로 분분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순금의 귀에는 마치 검사를 제쳐놓고 자신의 유죄를 주장하는, 그리하여 자신을 극형에 처할 것을 재판장에게 극구 강청하는, 정신 나간 피고의 최후 진술과도 같이 문 목사의 말이 참으로 괴이쩍게 들렸다.

  “제발 자중자애허시어요, 목사님!”

  순금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제 심정을 목소리에 몽똥그려 입 밖으로 꾸역꾸역 밀어냈다.

  “그게 어디 목사님 혼자만 짊어지실 허물인가요? 목사님은 인간 아니던가요? 애시당초 목사님 한 사람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 없는 천재지변 같은 것 아니겄어요? 조선팔도 전역에서 수많은 교회, 수많은 목사님 들이 벌써 오래전부터…….”

  문 목사가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순금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바로 그렇소. 최 선생은 지금 교단 총회 결의 사항을 얘기하시려던 참인 것 같은데…….”

  문 목사는 한바탕 또 요란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문 목사가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라 믿었던 그 재료마저 문 목사로부터 부정당했으니, 이제 문 목사를 위무할 만한 수단은 순금의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셈이었다.

  맨 처음 신사 참배를 국가적 의식의 일환으로 인정하고 나선 곳은 기이하게도 조선에서 맨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데다가 신앙의 열기가 제일 뜨겁기로 소문난 평양이었다.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를 통해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자 그 결정을 신호탄 삼아 신사 참배 움직임은 마침내 반도 전체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목사님이 그동안 얼매나 용맹허게 선한 싸움을 싸우셨는지 산서 사람들도 죄다 알고 있어요.”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산간벽지 초라한 개척 교회를 이끌면서 문 목사는 온갖 핍박과 배교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목자로서의 본분을 지켜왔다.

  “인간들도 알고 있는 일을 전지허시고 전능허신 하나님께서 절대로 모르실 리가 없어요.”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7)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5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