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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16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2-29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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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꾸찌란 이름에 대경실색한 나머지 부용은 이부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펄쩍 튀겨 일어앉으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부용의 과격한 반응에 대뜸 주눅이 들면서 진용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부용이 동상이 시방 틀림없이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볼 것 같어서 나도 시방 내 입으로 그런 소리 끄내기가 시방 차마 거시기허다고 나가 내둥 망설망설허잖든가!”

 

  허구헌 이름들 중에서 해필이면 왜 그런 이름을!”

 

  한 번 쏟뜨린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요량으로 허겁지겁 변명을 서두르는 사촌형을 부용은 부릅뜬 두 눈으로 되알지게 꾸짖었다. 누님이 영 마음에 걸려 얼른 윗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몸에 걸친 소복담장만큼이나 새하얗게 표백된 누님의 낯꽃이 부용의 가슴에 서늘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액틀 속 미인도의 주인공처럼 시종일관 음전한 자세로 묵묵히 윗목을 지키던 순금의 처신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치맛자락이 소리 없이 들려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순금은 여전히 백지장 같은 낯꽃으로 위아래 어금니를 꼭 사리문 채 버선볼로 발소리 살며시 눌러가며 가만가만 구석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뭡니까, 이게? 누구보담도 사리가 분명허신 형님이잖습니까! 평상시 형님답잖게 오늘은 참말로 눈치가 되게 없으십니다! 초상집에 색동옷도 유분수지, 우리 순금이 누님 듣는 자리서 어떻게 그런 추잡헌 이름을 함부로 들멕일 수가 있습니까?”

 

  시방 순금이 동상 그 얼골 보니깨 나가 시방 얼매나 큰 실수를 저질러 뿌렀는지 나도 알 만허네.”

 

  그것은 실수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망발이지요, 망발!”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천석꾼 집안에서 암묵리에 지켜오던 금기 중의 금기를 어긴 그것은 망발 중에서도 아주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망발이었다. 그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촌형에게 부용은 목청을 한껏 돋우어 여지없이 낯박살을 주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좀처럼 가누기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다른 누구 아닌, 바로 저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겉으로는 망발의 장본인인 사촌형을 공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기실 그것은 제 손으로 제 궁둥이 까고 스스로 형틀에 엎드려 곤장을 청하는 거나 다름없는 자학적 행위였다. 부용은 망발을 저지른 사촌형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용은 하마터면 똑같은 망발을 저지를 뻔했던 저 자신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참으로 공교로운 노릇이었다. 우연의 일치란 바로 그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자라 콧구멍 들먹이며 진용이 뭔가를 은근슬쩍 암시하려던 바로 그 순간, 실인즉슨 사촌 간에 미리감치 서로 손발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부용 또한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썩는 냄새 잘도 맡고 달라붙는 쉬파리 같은 놈이라고 제 입으로 욕했던 바로 그 기꾸찌란 작자의 화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막다른 골 같고 고립무원의 사면초가 같은 위난지경에서 그나마 집안에 도움이 될 성싶은 인물을 굳이 찾자면, 그것은 어쩌면 악연으로 얽혀 있는 그 동척농장 관리인 정도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면내 일본인 사회에서 유지급에 속하는 유력자인 데다 자기하고 동향 출신 지인이 읍내 경찰서 간부로 있다 하지 않던가. 바로 그런 순간에 진용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기꾸찌 소리에 부용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사촌형 입 아니라 바로 제 주둥이에서 방금 튀어나온 이름처럼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다. 마치 감추고 있던 제 치부를 누가 강제로 홀랑 까발려 놓기라도 한 듯이 부용은 수치심에 치를 떨면서 벌떡 일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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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14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2-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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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도 시방 우아래가 있는 법이고, 일에도 시방 선후가 있는 법이네. 따른 어떤 일보담도 시방 우선적으로 시방 어르신을 호랭이 아가리에서 빼돌리는 것이 시방 제일 화급허고도 절박헌 일인지를 자네 혼자만 몰르고 있을 뿐이지 춘풍이 같은 버꾸도 시방 죄다 알고 있다네. 자네는 시방 그런 줄이나 알고 시방 딴소리 말고 그냥 얌전허니 있으소!”

 

  아버님을 빼낼 무신 묘책이라도 찾어내셨습니까?”

 

  묘책? 이 사람아, 묘책 한 보따리 옆구리에 척 끼고 있다면 나가 시방 뭣 땜시 동상들 면전에서 시방 요로코롬 우아랫 입설에 쩍쩍 금이 가드락 애간장만 바싹바싹 태우고 자빠졌겄는가!”

 

  자신의 말상대가 오랫동안 자리보전하고 누워 지낸 중병환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진용은 버럭버럭 소가지를 부렸다. 천석꾼 살림의 집사요 대지주 광작농사의 도마름 신분으로서 매사에 계산속 빠르고 언제나 행동거지 잽싸기 비길 데 없던 진용도 이번 일만큼은 도무지 뭘 어찌해야 좋을지 전혀 맥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잠자다 끌려나와 동옷바람으로 압송당한 영감을 위해 관촌댁이 나들잇벌 입성을 일습으로 챙겨 꾸려준 보퉁이 받아들고 진용은 새벽바람 맞으며 읍내로 달려갔다. 하지만 까마아득히 높은 경찰서 문턱을 끝내 넘어서지 못한 채 공연히 헛물만 켜고 돌아서야 했다. 워낙 불온사상과 국체문란 사건에 무겁게 연루된 피의자니만큼 단속이 지나치게 엄중해서 돈주머니 열어 놓고 백방으로 순사들 접촉해 봐도 당최 바늘귀만한 구멍조차 안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장조카의 타고난 수완 하나 꽉 믿고 잔뜩 기대를 걸었던 터인지라 관촌댁은 반가운 기별은 고사하고 영감 코쭝배기조차 구경 못 했다는 진용의 처량한 보고에 그만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식전에 일껏 꾸려 보냈던 보퉁이 돌려받기 무섭게 관촌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테메운 채 안방에 벌렁 몸져누워 버렸다.

 

  나 원 참, 드러워서! 원 세상에, 그 좋고도 또 좋은 돈 보따리를 시방 한 짐 그득 짊어지고 발싸심허고 찾어댕겨도 시방 당최 멕혀들 기미가 안 뵈는 경우도 다 있드라니깨!”

 

  진용은 자존심이 몹시 상해 있었다. 일찍이 뛰어난 수완과 변통수 모르는 충직성을 높이 산 상곡 어른이 친자식 다 제쳐놓고 집안 대소사를 거의 일임하다시피 할 정도로 중용해 온 진용이었다. 여자 턱수염 뽑아오는 일 빼고는 뭐든 주문하는 대로 척척 해치우던 진용이 그처럼 낙담할 지경이라면 이미 볼장 다 본 셈이었다.

 

  딱 한 가지, 시방 자라 콧구녁만헌 구녁이 하나 남어 있기는 헌디…….”

 

  진용이 혼잣말 비슷한 가락으로 슬쩍 운을 떼었다. 순금과 부용이 깜짝 반색을 드러내면서 진용의 입을 주목했다. 다음 말을 다그치는 부용의 시선을 슬그머니 회피하면서 진용은 무심한 듯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뭣이냐…… 고것이 시방, 글씨…… 말 끄내기가 시방 쪼깨 거시기헌 것 같어서…….”

 

  지금 이 판국에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개릴 형편입니까? 자라 콧구녁이든 바늘구녁이든 좌우지간 가망성이 뵈는 구녁이라면 무신 수단을 쓰든지 간에 눈 질끈 감고 한 번 부닥쳐봐야지요. 어서 말씀허십쇼, 형님.”

 

  거푸 재촉을 받고 나서야 진용은 오랜 망설거림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는 자칫 윗목의 사촌누이 쪽으로 빗나가는 일 없게끔 자신의 시선을 공들여 단속하면서 오로지 부용의 얼굴만을 상대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산서 바닥에 시방 떠돌아댕기는 소문으로는…… 시방 그 동척농장 기꾸찌라는 작자가 말이여…….”

 

  형님!”

 

  무방비 상태에서 불쑥 허를 찔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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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13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2-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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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범 아니라 시방 오상범, 육상범으로 쫓겨도 나는 시방 그놈들이 눈꼽만침도 불쌍허게 생각되들 않네. 지놈들 사상 지놈들이 알어서 시방 북주고 지심(기음) 매고 가지 쳐서 고이고이 가꾸는 것이사 시방 어느 장사가 나서서 말리고 가로막겄는가. 허지만 말이네, 지놈들 사상에 시방 물 대고 거름 줄 자금 장만허겄다고 시방 자식이 즈그 아버지 팔어먹고 이질이 즈그 이모부 포박허는 경우는 또 어느 나라 무신 경우단가? 그러콤 천인공노허고 신인공분헐 만행을 저질르고도 시방 암시랑토 않게 생각허는 것이 지놈들 사상이다, 그런 말인가, 시방? 경찰서 댕겨온 사람들 편에 시방 그 화적패 진상을 초벌로 들음시나 나는 내 귀를 의심혔다네. 그러고 또 시방 따른 사람들한티서 똑같은 소리 재벌로, 재재벌로 듣고는 시방 함마트라면 기함헐 뻔혔다네. 이놈에 세상이 장차 어찌 될라고 시방 요 모냥 요 지경으로 어질머리 도지게 핑핑 돌아가고 지멋대로 펄펄 날뛰는지, ! 그나저나 참말로 꺽정시럽고만!”

 

  진용이 다따가 분통을 터뜨렸다. 오랜 세월에 걸쳐 상곡 어르신 모시고 복심으로 충성 바쳐 나온 이력 탓인지 진용은 어느새 말투마저 제 주인을 엇비슷하게 닮아가고 있었다. 상곡 어르신이 화적패 수괴로 배낙철을 의심하던 당시만 해도,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낳은 억단이라 치부하며 그 문제에 별로 괘념하지 않던 진용이었다.    

 

  한 파수 또 고빗사위 넘기고 나서 다소나마 기력을 회복했을 때, 부용이 맨 먼저 걱정한 사람은 아버지 아닌 동생이었다. 당장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겠지만, 수사 결과 지은 죄가 없다는 사실이, 죄는커녕 오히려 패륜적 만행의 끔찍한 희생자요 억울한 피해자라는 사실이 이내 밝혀지고 말 테니까 아버지가 풀려날 것은 불문가지이고,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미 잡혀 들어가 고초 겪는 아버지보다 아직 잡히지 않은 채 어디론가 도피 중인 동생 쪽에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그 철없는 것들이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 어느 땅에서 어떤 모양으로 거미줄같이 촘촘한 경찰 검거망을 피해 다니고 있을까. 상해일까, 아니면 간도일까. 사랑채에서 강탈해 간 아버지 재물은 저희들 혁명 놀음에 얼마나 유익한 보탬이 되었을까…….

 

  빌어먹을 놈들, 이왕지사 큰일 저지를 바에는 밤 쥐도 모르고 낮 새도 눈치 못 채게 감쪽같이 저지른단 말이지, 어리석게들…….”

 

  부용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소재가 분명한 아버지보다 부지거처인 귀용과 낙철의 안위에 더 신경 쓰는 부용의 태도가 기어이 사촌형의 지청구를 불러들이고야 말았다.

 

  이 사람아, 마당 터지는 꼴 뻔히 봄시나 시방 솔뿌렁구 다칠깨미 시방 한유허니 솔낭구들 걱정허고 있는가? 상곡 그 어르신으로 말헐 것 같으면은 시방 우리 산서 최문에서 대들보나 진배없는 분이신디 시방 가문 전체를 떠받치는 대들보가 시방 지우뚱지우뚱 흔들리는 이 신대목 고등판에 시방 자네는 게우 덜컹거리는 문짝, 삐그덕거리는 돌쩌구 푼수도 못 되는 귀용이나 낙철이란 놈 걱정에다만 시방 언지까장 목매달고 지낼 작정인가?”

 

  형님 눈에는 귀용이랑 낙철이가 게우 문짝이나 돌쩌구 정도로 하찮어 뵐지 몰라도 저한티는 대들보 못잖게 중요헌 사람들이지요.”

 

  이보게, 부용이 동상!”

 

  진용의 목청이 한층 더 높아지고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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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12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2-2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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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본서까지 끌려가 철야 취조 받은 후 머슴을 비롯한 객식구들은 아침나절에 모두 풀려났다. 그들을 더 붙잡아 둘 만한 혐의도, 그리고 그들로부터 더 캐낼 만한 정보도 거의 없는 까닭이었다.

 

  남정들이 돌아오자 초상마당 같던 집안에 갑자기 활기가 넘치기 시작해서 제법 탈상마당 비슷한 분위기로 풍경이 바뀌었다. 비록 온몸 곳곳 시퍼렇게 멍들고 생채기지고 절름거리는 험한 주제꼴들이긴 할망정 그래도 염라국 명부사자 다름없다던 고등계 형사들 손아귀에서 그 정도 고초만으로 그친 끝에 무고한 남정들이 의외로 빨리 풀려난 것을 마을 전체가 나서서 내남없이 경사로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풀려나지 못한 상곡 어른 때문에 주인댁 가족들이 느낄 상심과 염려를 의식한 탓인지 섭섭이네를 비롯해서 안잠자기와 드난꾼 아낙들은 무죄로 방면된 자기네 남정 맞이하는 기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를 서로 꺼리고 삼가는 눈치였다.

 

  암만 생각혀 봐도 시방 우리 어르신께서 시방 요번 참에 아조 단단허니 걸려드신 모냥이네, 시방.”

 

  풀려난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나 경찰 취조 과정과 내용을 샅샅이 확인하고 돌아온 최진용이 들입다 한숨부터 들이쉬고 내쉬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시방 눈구녁에다 화톳불 피워 놓고는 시방 밑두리콧두리 캐묻는 것이 시방 접때 그 강도사건이라네. 어르신께서 시방 혹시라도 낙철이한티 거사 자금 대주지 않었는가 허고는 시방 잔뜩 의심허는 눈치드라네. 그 강도 사건도 시방 어르신이 역부러 꾸며낸 일장 활극 아니냐고, 낭중에 독립단한티 군자금 대준 것이 들통날 경우를 대비혀서 시방 어르신이 낙철이랑 귀용이랑 모다들 한통속으로 짜고시나 시방 역부러 화적패 소동 벌린 게 아니냐고 시방 얼토당토않은 이론 들이댐시나 시방 밤새드락 매질허고 자백을 강요허드라네, 시방.”

 

  사촌형 이야기를 부용은 이부자리에 드러누운 채로 들었다. 평상시보다 더욱 자주 군더더기 소리를 아무 대목에나 함부로 욱여넣음으로써 자신의 초조한 심리 상태를 은연중에 드러내곤 하는 최진용 특유의 말투가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덩달아 초조감에 휩싸이게 만들고 있었다. 진용은 방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문지방에 간신히 한쪽 엉덩짝만 걸친 어정쩡한 앉음새로 부용을 상대했다. 만에 하나라도 결핵균이 옮을까봐 신체 접촉에 신경 쓰이다 보면 갈수록 대면하기 더욱 꺼림칙해질 테니 애당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먼빛으로 건너다보는 게 피차간에 이롭겠다는 부용의 고집스러운 제안에 따라 생겨난, 사촌지간의 새로운 대면 습관이었다.

 

  인자 한 가지 문제는 분명허니 밝혀졌고만요.”

 

  말허자면 시방 그런 심이지. 저놈들이 시방 어르신한티 국사범 올개미 덥석 씌울라고 작정을 단단허니 혔는디, 어르신 아니라 시방 육도삼략을 여반장으로 부리는 제갈공명이라도 시방 그 올개미 벗어나기가 솔찮이 심들게 생겼네그랴, 시방.”

 

  아버님 얘기가 아닙니다. 낙철이랑 귀용이가 사상범으로 경찰한티 쫓기고 있다는 게 사실로 굳어졌다는 뜻이지요.”

 

  진용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에게 귀용이나 낙철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 관심사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의 염려 대상은 오로지 상곡 어르신 한 사람뿐이었다. 어르신 안위보다 두 젊은것들 처지를 더 우선시하고 염려하는 듯한 부용의 반응이 마냥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용이 윗목을 건너다보았다. 애당초 그 자리에 아예 없는 존재인 양 다소곳이 윗목을 지키고 앉아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순금이 얼른 시선을 방바닥으로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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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11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2-2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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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나리깔나리, 순금이는 춘풍이 각시라네.

  알나리깔나리, 춘풍이가 순금이 신랑 되얐다네.

 

  어쩌다 실수로 떨어뜨린, 앙증맞게 예쁜 꽃당혜 한 짝이 거룻배만한 춘복이 아저씨 헌 짚신짝 안에 퐁당 빠진 일이 어린 시절 일대 사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룻배만한 춘복이 아저씨가 꽃당혜만 한 자신의 치맛자락 안으로 숨어들어 위기를 모면한 이번 일 또한 순금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을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피장파장이 된 셈이었다. 순금은 지난날 물방앗간에서 졌던 빚을 오늘 베틀공방에서 한목에 모두 갚아 버림으로써 춘복이 아저씨와 저 사이에 처리해야 할 회계는 이제 다 끝마친 셈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울음 뭉텅이가 마을을 향해 공처럼 빠른 속도로 데굴데굴 굴러오고 있었다. 지아비 뒤를 쫓아갔던 지어미들이, 아비 뒤를 쫓아갔던 새끼들이 중도에서 뒤쫓기를 단념한 채 되돌아오는 서러운 기척이었다. 아무런 죄도, 잘못도, 허물도 없는 남정들이 어디론가 억울하게 끌려갈 때마다 매번 그랬듯이 마을 아낙들은 이번 또한 줄초상이라도 난 푼수로 목청들을 한데 합쳐 어기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순금은 울음 뭉텅이가 대문간에 당도하기 전에 얼른 남포등을 들고 미리감치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 울음 뭉텅이한테 너무 큰 죄를 지었다 생각하니 마음자리가 여간 불편해지는 게 아니었다. 저 사람들한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있다면 주인 잘못 만난 죄밖에 없다. 대문간으로 한목에 들이닥치는 아낙과 어린것들의 피맺힌 호곡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다시금 문 목사 사모의 쪽지가 머릿속을 차일처럼 뒤덮어 오는 것이었다.

 

  이거슬 너희게 닐은 나를 힘닙어 평안을 엇게이라 셰샹에 잇을 제 너희가 환란을 밧으나 안심라 내가 셰샹을 이긔엿노라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랬다. 평안은 너무 머나먼 마을에만 머물러 있는 반면 환란은 벌써 집안에 들어와 안방 아랫목에 도사려 앉아 있었다. 환란에서 환란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끔찍스럽고도 징글징글한 나날이었다. 환란으로 날이 밝고 환란으로 날이 저물었다. 그리고 그 환란이란 것들이 생면부지의 서먹서먹한 사이처럼 서로 내외하면서 하나씩 따로따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여럿이 작당해서 겹치고 포개져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옴치고 뛸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사망권세 이기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 발자취 힘입어 환란 많은 현실을 벗어나 평안함을 얻을 수 있는 그날은 대관절 언제쯤 찾아올 것인가. 이렇듯 곤고한 형편일 때 문 목사 사모의 쪽지에 예고된 대로 구원의 복음과도 같은 예배당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제나저제나 하고 아무리 기다려 봐도 문 목사 사모가 예고한 바 있는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구원의 종소리는 끝내 울리지 않은 채 캄캄한 지옥의 나날만이 작정 없이 도도히 흘러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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