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김진철을 기억하는 웹로그
https://blog.yes24.com/volop57
리스트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김진철
김진철의 웹로그
파워 문화 블로그

PowerCultureBlog with YES24 Since 2010

8·9·11·12기 책,경제경영/자기계발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2월 스타지수 : 별491
전체보기
서평
매달 독서 기록
서평이벤트
나의 리뷰
경제경영/자기계발
경제경영/자기계발 II
YES24 파블미션(舊)
YES리뷰어클럽 [나]조
My Reviews & etc
태그
다크머니 미국정치 코크형제 정치자금 서평이벤트 기쁨의발견 데스몬드투투 중국기서 지정학에관한모든것 파스칼보니파스
2016 / 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최근 댓글
우수리뷰에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 
어렸을 적에 읽었던 베르테르는 너무나.. 
이주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어릴.. 
우수리뷰 축하드립니다. 
우수 리뷰로 선정되심을 축하합니다. .. 
나의 친구
출판사들
파워블로그님

2016-10 의 전체보기
The House of the Vampire - George Sylvester Viereck | My Reviews & etc 2016-10-31 21:41
https://blog.yes24.com/document/904594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직수입양서]The House of the Vampire

Viereck, George Sylvester
Book Jungle | 2009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보좌로 호엔촐러른 가문이 제국을 형성한 후 카이저가 된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국왕 자리조차 본래 상속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이런 걸 두고 "추정상속인"이라 부르죠. Heir Presumptive).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가 국왕 자리를 계승하는데, 이 즈음에 아마 어느 여배우(에드비나 피에렉)와 염문이 있었나 봅니다. 카이저와 여배우 사이에 사생아가 하나 태어나고, 그 아이가 커서 어느 미국 여인과 결혼하는데, 이 사이에서 난 아들이 게오르거 질베스터 피에렉, 이 작품의 작가입니다.

게오르거 질베스터 피에렉의 부친(즉 저 사생아)인 루이스 피에렉은 열혈 좌파였고, 투옥도 여러 차례 되었으며, 그와 부인 로라가 결혼식을 올릴 때에는 심지어 프리드리히 엥겔스(물론 우리가 아는 그 사람입니다)가 하객으로 참여까지 했다는군요. 신생 제국에서 설 땅이 없다 생각한 루이스 피에렉은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하며, 독일로 일단 건너왔던 아내는 1년 후에 남편이 자리잡은 곳으로, 어린 12살짜리 아들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옵니다. 아들 게오르거 질베스터 피에렉은 이처럼 어린 나이부터 미국 생활을 한 까닭에, 이후 성인이 되어 내내 독일인을 자처했지만 거의 모든 자신의 창작물을 영어로 일궈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영어로 쓰여진 게 원본입니다.

그 부친이 그처럼이나 진보주의자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사람은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1차 대전 당시에는 빌헬름 2세(자신이 친사촌이라고 여긴)에 지지를 표명했고, 2차 대전 즈음에는 히틀러 측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그래서 미국인들에게 "두 번 반역한 자"로 불립니다). 얄궂은 건 이 사람을 문단에 데뷔시킨 대학 시절의 은사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이 사람의 아들이 하버드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시인, 진보적 정치사상가인 피터 비어렉이라는 점입니다. 이 피터 비어렉은 부친과 절연하여 줄곧 별개 활동을 폈는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90세에 걸친 장수를 마감하고 타계했습니다. 격세유전의 비극상 그 표본이라고 할 가계(家係)이지만 핏줄은 못 속이는지 아버지나 아들이나 대단한 미남들입니다.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정치적 노선과는 별개로, 피에렉이 남긴 소설들은 지금 읽어도 무척 재미있을 만큼 장르적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유행과는 달리, 성적 묘사가 극히 절제되었는데도 독자가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일품이며, 흡혈귀의 사연은 그것대로 흥미진진하면서 막판에 엄청난 반전이 이뤄집니다. 이 작품은 이런 플롯의 매력이 압권이기 때문에, 줄거리 소개를 이 리뷰에서 못 하는 게 아쉽습니다. 한국어로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또 영어 문장이 조금 고풍투인 게 단점이지만(19세기 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이들은 다 이런 스타일로 글을 썼습니다. 비록 장르문학에서라도) 분량이 길지 않으므로 꼭 도전해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킬러 넥스트 도어 | My Reviews & etc 2016-10-30 20:29
https://blog.yes24.com/document/904356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킬러 넥스트 도어

알렉스 마우드 저/이한이 역
레드박스 | 2016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제목의 "킬러 넥스트 도어", 즉 "이웃에 사는 살인자"에 대해선, 사실 이 소설 속에서, 최소한 양적으로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보통 이런 소재를 선택한 장르 소설에선, 이유 없이 희생자들이 죽어나가고, 독자와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에게 아직은 그 정체가 숨겨진 "킬러"가 조용히 자신의 독백과 동선을 이어 가고, 그를 쫓는 경찰이나 탐정이 별개 공간에서 자신만의 탐색을 벌이고, 새로이 희생자가 될 누군가가 등장해서 안타까운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제시되고, 이런 여러 시퀀스가 교차되어 독자의 마음을 졸이는 게 공식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러 인물들, 같은 다세대 주택에 거주하는 각 세대의, 그 처지도 다양한 인물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시퀀스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킬러와 그의 희생자들 중심으로 스토리가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킬러는 물론 여러 "껀"을 해 내고 전리품들을 자신의 집에 잘 간직해 둡니다. 그가 전리품을 간수하는 방식이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여튼 소설 막판에 다다를 때까지 킬러의 동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없습니다. 이 점이 특이하더군요.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은, 살인 사건이나 범죄와 얼핏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아주 평범하고 때로 선량한 데다(선량하지 못할 때가 제법 많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치이고 상처 받고, 당장 내일의 삶도 장담 못하는 절박한 처지에까지 몰립니다. 킬러보다는 이런 평범한 주변 인물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사정 때문에 이런저런 곤란을 당하고, 한 건물에 산다는 점 외에도 여러 국면에서 삶의 색깔이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하소연도 하고 도움(자질구레한)도 받고 상처를 달래는 모습이 부각됩니다. 이런 일상적인(?) 구질구질함 속에, 조용한 킬러가 조용하게 자기만의 열띤 작품을 완성하는 장면이 스리슬쩍 삽입되는데, 대부분의 독자는 이런 끔찍한 범죄자에 시선을 주기보다(작가가 혹 잊을까봐 독자에게 자주 찔러 주는데도) 이들의 수다와 좌절, 좌충우돌 소동에 더 몰입하게 됩니다.

이 건물에 거주하는 이들, 셰릴, 콜레뜨, 할머니, 망명자 호세인만 놓고 보면 3/4가 여성인데다(ㅎㅎ), 잘생긴 남성이긴 하지만 망명자라는 사실부터가 약자임을 드러내는, 뭔가 사회적 취약 구조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해서 그 열악한 위치를 마련한, 일종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니 작가는, 킬러가 소녀들을 죽이고 끔찍한 콜렉션을 만들듯, 영국이라는 웃기는 나라(작중에 실제로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가 마치 저 음산한 킬러처럼, 이들 불쌍하고 비참한 이들을 양산해 내었다는 암시를 하는 셈입니다. 작가의 정치 성향이 대단히 리버럴, 진보 쪽임을 눈치챌 수 있죠.

킬러는 드러나지 않게(정말, 내내 존재감 없다가 마지막에 확 부각될 뿐입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범죄를 저지르는 바는 없으나 추한 모습 못된 마음을 만방에 전시하며 "못난 사회 구조"의 얼굴 노릇을 하는 로이 프리스는 킬러의 범죄 온상, 그리고 저 약한 여성들의 난관에 대해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입니다. 독자는 킬러보다 이 120kg에 육박하는 탐욕스런, 버릇 없는 중년 남성에 대해 더 적의와 경멸을 보낼 만한데요. 이건 다분히 작가의 의도입니다. 드러난 나쁜 짓은 로이 프리스, 안 드러난 진짜 나쁜 짓은 "그 킬러".. 여기에,  작품 중간쯤에 역시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중년 사내가 셰릴의 성을 사려다 지갑을 뺏기고 나중에 셰릴을 폭행하는 에피소드가 끼어드는데, 이 역시 사회의 무능하고 추악한 면을 중년 남성이란 배역을 빌려 표현하려는 작가(여성입니다)의 계산이죠.

영화로 잘 만들기만 하면 꽤나 신선한 충격을 줄 드라마가 될 것도 같습니다. 스티븐 킹이 "지옥과도 같은 무서움, 최고의 캐릭터"라고 평했다는데, 한 챕터에서 어느 캐릭터의 1인칭 시점으로 그의 생각을 독자 앞에 다 드러내고, 다음 챕터에서 철저히 객관화한 그 캐릭터의 행동 결과(대부분은 비참하게 실패한)를 충격적으로 제시하는 기법 등은 스티븐 킹이 애용하는 테크닉이기도 합니다. 저 말 중에 "지옥처럼 무섭다"는 건 좀 생각할 부분이 있는데요. 셰릴이나 콜레트가 이 소설 속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현재 온갖 사회 문제와 경제난에 신음하는 런던 안에서 상당수 시민들이 실제로, 실제로 치러 내고 있는 삶의 모습이며, 이것 때문에 지난해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잘생긴 호세인을 두고 "목구멍에서 h발음을 하는 동양 남자"라는 구절이 있는데,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물론 유럽인과 거의 차이 없는 음가의 h발음을 합니다. 이란과 아랍에선 가래침을 뱉어내듯 조음하는 [kh] 음소가 따로 있는데 이걸 지적한 거고요. "푸주한의 딸(캐릭터 본인의 표현)" 베스타 할머니가 돼지 로이 프리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이 자가 왜 비뚤어진 인성을 갖게 되었는지 배경이 나옵니다만 제 생각엔 느닷 재산을 상속받았다는 설명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의 모순상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영국에서 진보 좌파 진영에 표가 몰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스릴러 장르 특유의 박력이나 짜릿한 재미보다 더 마음 속에 상기시켜 주는 좀 특이한 독서였다고 개인적으론 평가하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장이 따로 마련되었는데 바로 뒤에 다시 "그 후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도 작가의 의도에 대해 곱씹게 하는군요.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피터 드러커로 본 경영의 착각과 함정들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6-10-29 18:34
https://blog.yes24.com/document/904180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피터 드러커로 본 경영의 착각과 함정들

송경모 저
을유문화사 | 2016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피터 드러커는 경영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방대한 저작을 남긴 경영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경영에 "사상"이 개입할 여지나 있을까 의심을 갖는 게 더 흔한 인식일 텐데요. 드러커 박사님은 이런 인식이 오히려 그릇된 속물적 태도임을 분명히 계몽이나 하듯, "혁신"이라든가 "사회적 책임", "동반 성장" 같은 개념을 그 이른 시기부터 명확히 규정하며, 대중과 CEO 모두에게 상생과 건전한 성장에 대한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 타당한 지표를 가르쳐 준 그의 저작이라 해도, 한 권의 분량에 압축된 내용을 독자가 접하거나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의문도 적잖게 들었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나니 "음 이 한 권으로 드러커를 마스터했다"라는 생각보다는, "확실히 오늘날에는 드러커(의 가르침)란 이렇게, 혹은 이런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확실히 오긴 했습니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21세기에 재조명되는 드러커의 교훈에선 이런 지점들을 눈여겨 봐야 한다"라든가, "여태 못 읽고 지나친 드러커의 함의 중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종래 고도성장기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쉬웠고, 마냥 편한 보장이 제공되는 건 아니라도 "평생 직장" 개념이 (일본처럼) 자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은 우리들에게 낯설기만 한 단어이며, 지금도 노동계에선 "모두의 정규직화"라는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기도 합니다. 헌데 그렇게나 예전에, 드러커 박사가 "비정규직의 중요성"을 논한 적이 있었을까요? 서구나 북미에선 그때부터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비중이 컸었기에 (우리 막연한 인식과는 달리) 이 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긴 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고용 환경에서 일상화된 패턴 중 하나이기에 이런 한 마디가 나왔던 게 당연하지만, 그런 사정(비정규직의 보편화)이 아직도 낯설고 적대적인 우리로서는 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드러커는 "비정규직도 분명 소중한 지적 자본 중 하나"라고 규정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사가 당신을 실망시킨다면 과감하게 자유로운 유목민이 되는 길을 택하라."고 권유까지 하시는 저자님이지만, 독자로서 꽤 망설여지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도 4대 보험은 있어야죠.

아무리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주권의 시대라도, 회사에서 민주주의가 절대 보장 안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뿐만 아니라 사장님들은 종종 그 직원들의 "부족한 인성"까지 교정하려 듭니다. 회사는 특히 한국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 모인 파트너쉽이나 2차 집단이라기보다 원칙 없는 학교 같은 느낌도 줍니다(요즘은 학교라고 해도 선생님들 자의가 지배하지는 않죠). 보통 경영 관련 서적에서 가능하면 지배적인 리더십을 따르라고 충고하지 이런 문제적 상황을 지적하는 태도는 보기 힘든데요. 저자께서는 "CEO가 선의의 계몽군주는 아니다.'라며 드러커의 주장을 정면 인용합니다. 사실 이 (드러커의) 한 마디는 올해 초 선거 국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 김종인 씨의 전횡을 지적하며 조국 교수가 꺼낸 표현이기도 합니다. "군주는 선의건 악의건 현대 조직에서는 필요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민주화한 조직에서 개인의 창의가 최대한 발현되고, 조직 소기의 목적을 보다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의 본질은 직원의 연수가 아니라 경영자 개발이다" 드러커의 한 마디 중 이것보다 파격적인 언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소위 "목적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objectives. MbO)"의 관점에서, 당면 과제에 효용을 제공 못 하는 모든 자원은 다 낭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저자께서는 재미있는 비유로, "드러커"라는 이름은 중세 네덜란드어로 인쇄업자라는 뜻인데, 이때만 해도 인쇄업 기능이란 평생 한 번만 배워둬도 그 자손들까지 쓸 수 있는 기능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러커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노동자나 경영자라도 지금처럼 어제의 지식이 오늘의 휴짓조각으로 급속히 변하는 시대는 겪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드러커의 대안은 "지식을 배우지 말고, 배우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드러커는 생전에 일본의 "개선"이라든가, "온 더 잡 트레이닝"에 주목하고 구미의 경영자들에게 적극 도입을 추천했죠. 노동자들, 직원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현장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무엇을 배울지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게 경영자가 아니라 노동자, 직원임은 또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자율권, 참여권을 주고 혁신을 스스로 이뤄나가는 주체로 키우는 기업, 경영자 스스로가 무지를 인정하고 함께 기업을 꾸려 나가는 기업이야말로 이 혁신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뜻이겠습니다.

블룸버그에서 혁신 지수 1위로 한국을 올려 놓았다는 뉴스는 저도 몇 달 전 웹에서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드러커가 파악한 혁신의 개념은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그는 첫째 혁신은 위험하지도 않으며, 둘째 뛰어난 아이디어나 기적적인 행운에 의하지도 않고, 셋째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며, 넷째 내부에서만 일어나지도 않으며 업종의 현황에 반드시 밝아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섯째 (개인적으로 이게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영리 기관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여섯째 공무원이든 학자든 누구라도 일으킬 수 있는 게 혁신이라고 합니다. 혁신은 심지어 어린 청소년의 반짝하는 아이디어에서도 유발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는군요. 혁신의 이런 본질을 꿰뚫지 못한 채, 혁신이 그저 근로자나 사회 다른 섹터 성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욕을 꺾는 데만 구호처럼 동원된다면 우리 나라는 곧 보잘것없는 변방의 활기 없는 소국으로 전락하리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드러커의 가르침이나 혁신에 대한 이런 통념이, 보다 실질적이고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경영 목표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잘 확인할 수 있는 독서였습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항암이 아닌 해암으로 다스려라 | My Reviews & etc 2016-10-28 16:00
테마링
https://blog.yes24.com/document/903967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항암이 아닌 해암으로 다스려라

윤성우 저
와이겔리 | 2016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우리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어디 저 외딴 산골에서 혼자 요양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려 애 쓰고, 자신의 지난 과거와 화해하면서 암이 저절로 나았다는 회고가 자주 나돕니다. 물론 그 중에는 못 믿을 과장이나 허풍도 많지만, 여튼 암이란 질병이 그 암만 집중 상대해서 격파한다고 금방 낫거나, 원상의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는 질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설사 암이 나아도 몸의 다른 기관이 망가지거나, 얼마 안 되어 재발하는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서구식 현대의학이 취한 전략은 "항암" 즉, anti-cancer treatment인데, 이게 기본적으로는 대증(對症) 요법이라 사람의 몸 근본에서 싹트는 어떤 병인을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하긴 그렇게 따지면 거의 모든 현대의학의 치료법이 (외과시술을 비롯해) 대증요법인데, 총체적 불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 드러눕는 게 고작 아닌가, 뭐 이런 반론도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암이란, 뭔가 다른 병들과는 접근을 달리해야 할, 마음가짐이라든가 스트레스 많은 환경, 체질의 근본 요인과 관계 있는 병 같습니다. 제가 1년 몇 개월 전에 읽은 책 중에는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도 담은 게 있는데, 이게 성격이라든가 암을 키우는 체질 따위를 의미하는 걸로 밝혀질지 더 지켜 봐야 하며, 만약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복이 어려운지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겠지요.

이 책은 한국에서 한방의학 분야에선 최고의 권위를 지닌 윤성우 박사님이 지은 책입니다. 그간 통합(통합이라 함은 양방, 한방 학제간 연구) 암학회 등에서 확고한 명성을 남기셨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명의로 소문난 분이시죠. 이번에 대중을 위한 안내서로는 이 책을 처음 펴내신 셈인데, 첫째 체계적인 정보와 자기성찰적(객관적) 관점, 둘째 일반인이 알기 쉬운 설명, 셋째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는 유병 과정 해설과 대응에 대한 충고 등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이 염두에 두는 첫째 전제는 "한방의 과학성에 대한 의심은 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온화하신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과 어투는 책 어디에서건 괜한 대립적 언사를 자제하십니다. 한방은 귀납적으로, 다양한 임상 체험과 구체적 처방의 경과를 보고 오랜 시간 지혜가 축적된 의학이지만, 서양 의학은 자연과학에서의 확고한 성과, 의심할 수 없는 법칙(주로 화학 관련이겠습니만)을 토대로 "연역"되어온 학문 체계라는 겁니다. 귀납과 연역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대체하거나 부정할 수 없고, 상호 보완적으로 진리 탐구에 병용되어야 할 방법론입니다. 의학이란 환자를 위해 적용되고 발전되어야 할 수단이지,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지식과 요법인 양 통용될 수 없다는 거죠.

한방이 본디 성격과 기질, 마음가짐의 요인을 강조하긴 하지만, 서양 의학도 예컨대 막 실려온 환자에게 "절대 안정 요망" 같은 추상적 당부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도 저자께서는 "비록 후천적 요인이 암 발생의 8, 90%를 차지한다고는 하나, 아직 이론적으로 명확히 환경 요소와 병발의 인과과계가 구명된 건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저자께서는 서양 의학계의 최신 동향 중 일부를 소개하며, psycho-neuro- endocrino- immunology라는 신 분파를 거명합니다. 앞의 psycho-라는 접두사가 중요한데, "정신"이 신경, 내분비, 면역을 일괄하여 영향을 끼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분야입니다. 마음가짐의 어떤 상태가 특정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며, 이것들이 인체에 어떤 총체적 영향을 남기는지 밝히는 게 목적입니다. 그렇고 보면 윤 박사님 같은 분들의 업적이 서양 의학에 일정 부분 자극을 준 게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이 더 인체와 의식에 스트레스를 안긴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막연한 스트레스라는 개념에 상당히 적절한 병인 포섭을 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황기(黃芪. 두번째 글자는 "단너삼 기" 자 입니다)란 약재는 이미 서양 의학에서도 채택했다고 합니다. 논문(<Cancer Letters>에 수록)에 의하면 직접 암세포에다 독성 효과(cytotoxic effect)를 내는 게 아니라, 이런 암세포의 확산을 막는 정지 효과(cytostatic)를 보게 하는 처방으로 쓰인다고 하는군요. 다만 이 역시 저체중자에게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데,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효능 중의 하나로, 한방이 취하는 태도가 양방과 어떻게 다른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약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책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죠. 항암은 말 그대로 암과 맞서 싸우며 암의 덩어리를 파괴, 소멸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침투해 온 병원체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가 타당해도, 어쩌면 나의 타고난 체질과 지속적인 습관이 몸 안에서 만들어낸, 내 몸의 일부나 다름 없는 게 어쩌다 혹을 키워 암이 되었다면, 이런 상대를 놓고서는 "잘 달래어 스스로가 무장 해제를 한 후 몸의 원 성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발본색원 처방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암과 싸우지 말고 화해하며 같이 살 생각할 하니 낫더라"는 고백을 하는 것도 많이 들었습니다.

양한방 협진시스템도 많은 권위자들이 환자에게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저자께서 몸 담는 경희대에 잘 마련되었다고 하시는데요. 경희의료원이 이런 통합적 접근을 선구적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잘 발전시켜 온 내력이 있기도 합니다. 반면 "한방 단독 치료"의 유효성 역시 저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방법 중 하나로 권하시는데요. 한방에서는 본디 종기를 "반쯤만 죽여 놓은 후" 나머지는 살려 놓은 채 체질의 강화에 보다 주력하는 방법을 취한다는 겁니다(역시, 항암이 아닌 해암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전략입니다). 적극적으로 암을 공격하는 걸 "공법", 반쯤 죽여 놓은 후 약해진 신체의 기를 살리고 체질을 보강하는 걸 "보법'이라고 붕른다는데, 저자의 결론은 "단독 한방 치료가 더 적용확대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보완의학, 대체의학, 통합의학 등에 대해 저자는 엄격한 준별을 행합니다. 특히 대체의학은 아직 허황하고 위험한 부분이 많으며, 검증 없이 통용되는 각종 약재도 그 복용에 극히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의술은 인술(仁術)이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저자분의 여러 충고, 특히 마음가짐이 바르고 남 탓을 하는 잡된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는 말씀은, 사람 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환자의 몸이 낫는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병이 낫는 건 그게 기적이 아니라, 결국은 당사자 자신이 병을 키우기도 하고 낫우기도 하는 거니까요.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교환살인 - 프레데릭 브라운 | My Reviews & etc 2016-10-27 22:11
https://blog.yes24.com/document/903843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교환살인

프레드릭 브라운 저/김석환 역
해문출판사 | 2002년 03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소설의 주인공이 드러내는 생각, 취향, 세계관에 매번 동조하는 건 독자가 인간이 아니라 그저 "독자이기만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동의를 보낼 수 없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서두, 전개를 접할 때, "여튼 시작했으니 끝은 보아야지."하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읽어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

"교환 살인"은 번역 제목이고, 어쩌면 이 제목이 스포일러 노릇을 할 지도 모르겠다는 찜찜함이 내내 가시지 않았는데요, 다 읽고 나서는 그거 괜한 기우였다 싶었습니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여실히 드러내는 결말의 처리가 인상적이었고, 이런 중편이 아니라 더 압축된 단편이었으면 그 효과가 더 강렬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출판 연도는 1963년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책을 읽으면서 체감한 연대 배경은 1950년대 중후반 정도였습니다. 매카시즘, 비트 제너레이션 등 작가가 애써서 상징적 환기물을 배치한 느낌이었는데요. 이런 장치나 미장센은 아껴 놨다가 다른 작품에 쓰고 이 작품은 분량을 더 확 줄여서 플롯의 밀도를 높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지. 여튼 역자분은 이 작품을 접하고 자신만 읽기 아깝다 싶어 그 이른 시기에 한국어로 번역해서 더 많은 국내 독자들에게 노출하고 싶었겠죠. 해문 시리즈는 이런 소박한 동기에서 번역된 중단편들이 많더라구요.

"교환 살인"은 이런 구미의 장르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저 일본의 추리문학에서 자주 소재로 쓰이는 범죄 패턴입니다. 실제로는 범죄자들 사이에 "신뢰(가장 사악한 형태의)"가 지켜지기 어렵기 때문에 이 역시 "책 속의 범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여튼 이 작품이 여실히 드러내는 건, 평범한 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눈에 안 띄게 은폐하기가 이처럼이나 손쉽겠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과 지금은 두 가지 정도 큰 변화가 가로막고 있죠. 첫째는 강압, 폭력(눈에 안 띄는 고문) 수사가 사라졌고(미국이나 우리나 - 그런데 이건 범죄자 입장에서는 유리해진 상황입니다), 둘째는 곳곳에 CCTV 설치가 촘촘히 되어 있고, 과학 수사 기법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입니다(이건 그네들에게 불리한 점이죠). 여튼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소위 "완전 범죄"를 완수하기 위한 인물들의 시도는 현대에서는 대번에 좌절될 만한 것들이 상당수입니다. 물론 독자는 그런 제약도 다 감안하여, 주어진 룰 안에서 이들이 얼마나 교활하게 수사망을 빠져 나갈지를 지켜 보는 거죠.

"교환 살인"을 모티프로 삼은 시초격 장르물이라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Strangers on a Train>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작품에서라면 인물들의 의도가 실현될 여러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도 하겠으나, 이 소설에서는, 제 생각으로는 사건 전후로 자주 만난 행적이 남들 눈에 뜨였을 것 같고, 직업상 서로 아는 처지인 찰리와 윌리이기도 하니, 꼼꼼한 경찰 당국자라면 의심의 눈초리를 충분히 보냈겠고, 결국은 들통이 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허술한 티가 적잖이 납니다.

주인공 윌리뿐 아니라, 사건의 또다른 축인 도리스도 비난 받아 마땅한 인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윌리보다 더 심각한 악당입니다. "그 남자만 바라보고 앞으로 몇 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니 미칠 것만 같아요!" 마치 삼류 재연드라마에서 보는, 막장 인생의 전형을 대표하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윌리는 또 윌리라고 쳐도, 여자 등장 인물 이름을 "도리스"로 지은 걸 보고 작가가 이들에 전혀 애착을 갖지 않았구나 짐작이 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 독자가 편하게 취해야 할 태도는, 마음껏 풍자의 대상이 될 이들의 슬랩스틱, 운명의 장난에 놀아날 비참한 꼴을 즐기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윌리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온 시턴 사장이 계약을 제안할 때, 윌리가 "대리인을 두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직접 연락하시면 안 되겠습니다."라고 알려 주는 것도, 개별 캐릭터의 도덕성을 일단 떠나 신뢰가 기본 바탕이 된 미국 사회의 탄탄한 성숙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과연 이런 경우, 한국인들은 얼마나 계약서 문면의 조항을 지킬까요? 멀쩡히 준수해야 하는 형사 법규도 감시하는 눈만 없으면 그 유월과 위반에서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하나 재미있게 본 게, 에시가 윌리의 방에서 거금(당시로서는) 600달러를 들고 도망간 후, 일부라도 돌려 주고 나머지는 써 버려서 없다고 고백하는 그녀를 용서해 주는 장면입니다. 법학에서는 이런 걸 두고 중지미수(여기서는 이미 기수입니다만) 이론에서 "황금의 다리"라 부릅니다만, 한국에서는 어차피 돌아가도 더 혼 날 것 아예 탕진하고 계속 회피하자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죠. 이런 소소한 장면을 뭐하러 넣었을까, 제 생각엔, 살인까지 저지를 무도한 인간형은 아니었다는 걸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웃기는 대목 하나 더 소개하자면,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태도를 두고 "만약 사람을 죽이고 나서 죄의식 때문에 자백하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으면 어쩔 생각이에요?"라고 묻자, "그놈 미치광이지, 그놈이 원한 건 자백이 아니라 벌이요, 벌. 정신분석학적으로 매저키스트라 할 수 있지."라고 찰리가 대답하는 대목입니다. 이에 윌리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반가웠다."고 속으로 중얼대는데, 원래 무식한 인간들(배우라고 무식한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제대로 된 배우라면 당연히 독서를 통해 고전 명작을 많이 소화해야죠. 거칠 코스를 안 거쳤으니 그모양 그꼴들인 게 당연합니다)이니 어쩔 수 없는 반응들입니다. 이 작품에서 도리스와 윌리의 성애 묘사는 시대가 시대라서인지 말초적인 색이 없고, 독자에게 떠올리려고 작가가 의도했을 장면은 수위가 높았겠으나 결과로 나타난 그 묘사는 밋밋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실소가 나오던데, "...그들이 벌인 행위는 사도-마조히즘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같은 문장을 보면 말 다했죠.


요 비슷한 구성의, 아이러니한 반전을 보이는 작품이라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농담입니다), 이분보다 한 세대 가까이 후배인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No Comebacks(단편)> 같은 게 있겠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왜 포사이스의 이런저런 작품들은 그렇게나 완성도가 높은 데도 영화화가 이리 더디냐 하는 거죠.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The Damned - Algernon Blackwood | My Reviews & etc 2016-10-26 14:22
https://blog.yes24.com/document/9035527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직수입양서]The Damned by Algernon Blackwood, Fiction, Horror

Blackwood, Algernon
Wildside Press | 2002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1980년대에 대거 제작된 B급 호러물들은 한창 정신 없이 진행되던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면서 악이 완전 퇴치되었다는 건지 아닌지 분명한 결말을 내지 않고 끝나는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이런 모호한 플로팅은 당시 서투른 연출자들의 창의, 각성이나 의도의 산물이었다기보다, 이런 괴담류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입니다. 35주차에 리뷰한 프랜시스 매리온 크로포드의 작품들부터 해서, 거의 모든 문예 포맷의 괴담들은 일도양단의 결말을 피해 갑니다. 필멸의 인간 그 존재 자체가 비밀과 불확실성에 싸여 영원히 방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겠습니다. 만약 어떤 구세주가 나타나, 사후 세계의 비밀, 우주의 구조, 영혼의 무한 윤회 등을 다 규명해 준다면, 인류는 그 순간 모든 고유의 운행 질서를 멈추고 종말(해피 or 새드)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스테리가 풀리지 않고 거기 남아 있기에 삶은 (그리고 문학도 덩달아) 계속됩니다.

앨저넌 헨리 블랙우드도 지난 세기 초 활발하게 괴담류의 창작에 매진했던 작가 중 하나입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하나같이 귀족이거나 유한 계급 출신인데, 최근에 제가 읽은 <마술 가게>에 실린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을 지은 던세이니 남작(로드 던세이니)도 비슷한 유형이죠(단, 던세이니 경은 괴담보다는 판타지 쪽에 기울었습니다). 물론 이런 분들은 그저 괴담, 혹은 픽션의 창작에만 몰두한 게 아니라 대개는 문예비평, 시사 평론, 그 외 다양한 언론 기고 활동을 겸하곤 했습니다. 문필가라는 모호한 범주가 그래서 나온 거죠. 참고로 <마술 가게>는 여러 환상문학 단편을 모은 예쁜 작품집인데,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지은 로버트 스티븐슨, H G 웰즈 등 여러 거장들의 단편을 실었습니다.

프랜시스와 빌은 남매지간입니다. 이들이 예전부터 친구로 지내 온 메이블은 최근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아주 괴팍하고 종교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남자와 결혼했던 메이블은, 물론 남편이 죽어 슬픔에 잠겨 있기는 하나 그 감정은 남편과 사별한 슬픔이라기보다 다른 종류의 공포감인 듯 보입니다. 저택은 대단히 황막하게 방치되었는데, 남매는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며 무심히 말을 던지지만 메이블은 듣고서 벌써 안색이 달라집니다.

Faith was the sine qua non of salvation, and by “faith” he meant belief in his own particular view of things, which faith, except every one do keep whole and undefiled, without doubt he shall perish everlastingly.

여기서 sine qua non이란 라틴어로 "그것 없이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즉 결과를 빚는 필수적인 원인이란 뜻입니다. 죽은 광신자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 이 필수적인 원인이 바로 "믿음"이라고 보았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만큼의, 털끝만큼의 회의도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믿음이 없다면 생전이건 사후이건 지옥불에 떨어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성에 안 차는 사람마다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했던 건데, 사실 이런 답답한 유형의 인간이 비단 종교인 중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나 아집에 빠져 무작정 맞다고 우기는 모든 미숙한 인식의 소유자들이 다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죠. 이 괴담에 다른 실천적 의의를 부여한다면 특정 인간형에 대한 종교를 빗댄 풍자의 시도이겠습니다. 모든 집착과 아집은 다 광신도의 전횡과 통합니다.

이 저택, 부부가 "The Towers"라 불렀던 residence는 남매가 처음 의혹을 가볍게 품었던 대로 정말 죽은 남편의 혼령이 출몰하는 곳이었습니다. 남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마음에 의혹이 있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저 위에 쓰인 대로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지 않는 자 모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할 것"임을 음산하게 고지합니다. 그런데, 영계에도 이른바 "층(layer)"이 있었고, 이 레이어마다 서로 다른 혼령들 사이에 영계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투쟁이 끊이지 않는 사정이었음을 남매는 끔찍한 체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메이블은 어떤 종류의 확신은커녕 너무도 마음이 약해 다른 사람(누구든)에게 휘둘리는 유형인데, 남편에게 생전에 주입된 두려움이 너무도 강하게 그 마음에 자리를 잡아, 두려움의 폭발이 오히려 초자연적 능력까지 불러, 마침내 이 저택과 남편의 무덤 주변에선 믿을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for there was a fear in the girl’s eyes that was a very genuine fear indeed.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포는 다른 어떤 감정이나 힘이 끼어들지 않은, 공포 그 자체로 불러야 할 순도 높은 것이었다....

"But, why do you ask? Did anything, was anything supposed to happen there?”
She looked searchingly into my eyes a moment before she answered:
“Not that I know of,” she said simply.


하지만 왜 묻는 거야? 혹시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니?
프랜시스는 조심스레 내 기색을 살피며 잠시 뒤에 대답했다.
"내가 알기론 아무 일도." 그녀의 답은 얼핏 무심한 듯했다.

초자연적 현상, 본디 인간의 인지 능력을 초월한 사건은, "그저 아무 일도 아닌 것"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My Reviews & etc 2016-10-25 22:33
https://blog.yes24.com/document/903418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아라 노렌자얀 저/홍지수 역
김영사 | 2016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않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이슈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면(아주 어리석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신은 속타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여튼 인간의 시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인간은 이런 번거롭고도 부자연스러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자신도 괴롭히고 안 믿겠다는 다른 동족까지 괴롭혔는지, 그 해답이 그런 이유에서라도 필요는 합니다.

일일이 인간사에 끼어들어 악당을 처단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 냉정하고 초연하며 공감도 안 하면서 전지전능하기만 한 신, 따라서 그 가시적 흔적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저런 신을 왜 인간은 숭배하는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진화해 온 인간치고는 썩이나 안 어울리는 이런 선택("관념론적 신앙")을 왜 거창하게 해 온 건지,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그저 과정의 기술에 그친다거나, 최종적인 해답은 독자가 스스로 내 보라며 무책임하게 발을 빼지도 않습니다. 그 나름 대담한 결론까지 낸다는 점에서 독자는 더욱 혹해서 읽어 갑니다. 그리고 제법 알찬 생각거리까지 건지거나, 더 나아가 저자들의 결론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논쟁적인 주제를 담았으면서도 흥미롭고, 논의의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기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첫째 명제는 유신론/무신론 여부에 관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믿음 체계는, 일일이 마을의 원로나 실력자가 개개인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도덕을 준수할 수고를 덜어 줍니다. 사회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1차 집단의 윤리가 다양한 개성과 선택을 규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만, 일탈 분자의 질서 파괴 행위를 작건 크건 용인하면 공동체 전체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합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이 아니라 확신)시키고, 설령 현장에 감시하는 (사람의)눈길이 없다 해도 저 위에서 전지전능한 이가 지켜 보고 있다고 환기시키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가 강력하다는 겁니다.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우스운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역사 시대 초기 전체가 공존할 지혜가 필요한 단계에선 이게 꽤나 효율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효과를 크게 보았을 터입니다. 우리 종이 지금 이 정도로나 생존을 이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도 저런 어설픈 믿음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소수의 범죄자(어리석기까지 한)가 공동체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아닐까요?

종교의 효과가 개인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의무를 잘 지킨다기보다, 그저그런 껄렁한 신자가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조성되었을 때 이런 의무를 더 확실히 지킨다는 겁니다. 즉 종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일일이 고쳐 먹게 한다기보다, 불특정 다수가 평균적으로 나쁜 마음을 덜 먹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이런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경우 다분히 실용적인 효용을 창출하며, 여기서 강조하는 도덕은, 결국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돕는 공리적 메커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스템 한 구석에 고장이 났을 때 보수 없이도 자발적 봉사에 나서는 건 그게 동기가 종교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은 개인의 행동으로 사회가 건전한 질서로 복귀한다는 그 실용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는 그 결과에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내내 구사하는 "친사회적"이란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천하고 가난하며 사악한 종자들에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도 못 하면 어떻게 교회가 유지되겠소?"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사후 세계에의 엄혹한, 혹은 한없이 희망적인 기제가 개념상으로 구축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 현세적 보상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친사회적(결과적으로는)"으로 재편됩니다. 처벌은 꼭 현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존재의 필멸성, 유한성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머리 속에 인식된 이들에게 "지옥의 위력"은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혹은, 현세의 처지에 큰 만족을 못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신(사실은 이를 빙자한 권력자의 야욕)의 미션을 수행하면 지복(至福)의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끼로 테러리스트의 길을 부추기는 집단(IS 등)도 있습니다. 샤리프와 렘툴라의 실험 보고서가 이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이 역시 "친사회성 증대"의 범주로 판단하면 (테러리스트= 반인륜 이란 이유에서) 다시 타당성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경우에도(흑인이나 [미국에서는 소수파인] 가톨릭이나, 여성이나, 심지어는 모르몬, 동성애자보다 더) 나쁜 취급, 불신을 받는 게 흥미롭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도는 "설사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로 적대한다 해도, 그가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는 종교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주장 같습니다. 한국이라면 오히려 무교라고 밝히는 이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상도 주고, 기독교라 해도 자파에서 이단이라 점찍은 이들에게는 무교인(잠재적 고객)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 드는 예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코코넛을 운반하는 운전수들"입니다. 힌두의 신전까지 코코넛을 그 원산지로부터 옮겨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가로채거나 의무를 태만히하는 이도 없이, 일단 앞 "주자"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은 모든 운전수들이 착실히 이를 (아무 대가 없이) 운반핝다는 겁니다. 인도 사회가 정직하고 이들이 교육을 충분히 받아 명예를 지키는 까닭일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 비결은 오로지 "마 타리니 신이 무슨 응보를 내릴지 몰라서" 같은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경제 질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핵심 팩터이기도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예전에 사회를 선진 질서와 그렇지 못한 혼란으로 양분하는 원인으로 "트러스트"를 꼽은 적이 있죠. 이런 "신뢰"가 종교적(거의 미신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도, 이성적인 형량 과정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질서의 고도화 단게에 차별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등한 개인들의 예를 들며 "이런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데 A의 효용이 대체 무엇이냐?"며 유치하고 미숙한 불평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를 들며, 나 자신이 효과를 못 봤으니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며 일반화의 폭주 그 끝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종교가 없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신이 창조하여 완전무결한 인간이 오늘날 이지경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어디냐며 대견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훨씬 건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 어느 종교가 그르고 옳고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든 뭐든 어떤 제도와 신념의 도움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나은 삶(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을 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공리적 결과가 중요합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코빈 동지 | My Reviews & etc 2016-10-25 22:32
https://blog.yes24.com/document/903418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코빈 동지

로자 프린스 저/홍지수 역
책담 | 2016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 같은 국외자가 주류, 그것도 보수 정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고령의 좌파 아웃사이더가 경선 과정에서 끝까지 유력 지지세를 유지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켰다는 점이 아마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엔 더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질 것 같습니다.

버니 샌더스 노인은 정치에 입문한 지 삼십 년이 되어가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지는 겨우 십여 년 정도지만, 그와 나이 차가 8년 정도 나는 어느 영국의 외골수 진보 성향 정치인은 그의 나이 삼십 대 중반부터 내내 의원 경력을 쌓으며 지금껏 근 사십 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궁을 지켜 왔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낙선 한 번 없이 의원직을 유지한 점도 대단하지만, 도대체 타협을 모르며 입문 당시의 노선과 신조를 거의 원색 그대로 지켜 왔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이분은 이처럼 한사코 순수한 소신을 내세우며,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뽑아 준 지역구민을 정직히 대변하는 데에 있다"라는 원칙만을 최우선으로 강조했고, 지금도 그런 태도에 변함이 없습니다.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이런 원칙파를 언제나 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고집이 너무도 강했던 터라,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당의 주류, 수뇌부는 이분에게 그 연륜에 맞는 당직이나 정부 요직(2차 대전 이후 노동당도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저 동지가 당수 자리를 언젠가 맡을 날이 있을까요?"
"예끼, 농담도 분수가 있어야지."

"왜 그렇게 일반 유권자들과 오래 시간을 끌고 대화를 해? 지금 '제레미 짓' 하고 있냐(donig a Jeremy)?"

이처럼, 소신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고집해도, 같은 진영에 자리한 동지들로부터조차 소외되기가 쉬운 게 세상사의 공통된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치를 시작하고 근 사십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헤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닐 키녹, 존 스미스, 그리고 고든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거물들이 이 거대 진보 정당을 주름잡았지만, 이분은 한직이든 문제아 역할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의석 한 곳을 지키며 동시에 노동당의 오랜 가치와 이념을 수호해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2015) 9월, 이분은 노동당 안에서 최고급 의복을 빼 입고 출신 학교의 세련된 어투를 자랑하고, 평민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미사여구를 입에 올리며, 신사의 우아함으로 좌파의 가치를 수호한다던 위선적 거물들 사이에서 그저 농담거리로만 여겨졌던 일을 드디어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최다 득표를 얻으며 자신이 40년 동안 몸 담았던 당의 대표가 된 것인데요. 그는 지난 달 열렸던 재신임격 투표에서 또다시 재취임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제레미 코빈. 현재 영국의 근로 대중과 양심적 지식인들 상당수의 희망으로 떠오르는 정치인이죠.

이 책은 제레미 코빈의 일대기와 그에 대해 바르게, 혹은 그릇되이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차분하고 공정한 검증을 담습니다만, 반드시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일단 특정 이슈가 거론되면, 어린 시절의 제레미와 현재의 코빈, 혹은 청년 시절의 그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교차해서 조명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뿐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지향하는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그 구체적 이슈에 대해 저 서유럽 선진국의 좌파 정당, 그 정치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을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겠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인물에 대한 책이자 이슈에 대한 책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노동당의 골수 좌파(좌파 중의 좌파) 한 인물을 통해 특히 1980년대(대처 수상 집권기) 노동당 전체의 역사를 둘러보고, 당연하게도 영국 최근세사를 동시에 분석하는 의의도 갖습니다. 책 맨앞에는 역자님이 간단하게 영국 정치 제도에 대한 개념잡기식 설명을 붙인 글이 나오는데, 정치제도나 헌법 사항에 대해 밝은 독자라 해도 최근의 개혁 과정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특히 2010년 이뤄진 법 개정은 영국의 내각제가 독일식의 "건설적 내각불신임제"에 꽤 많이 다가간 흔적이 역력하기에, 어떤 과정으로 이런 혁신이 이뤄졌는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이런 개혁은 상당 부분이, 코빈 같은 소신파 정치인들의 분투와 노력에 빚진 바 큼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레미 코빈은 보통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뜻밖에도 현실 정치에 몸 담은 이들 중 가장 좌파적인 스탠스를 고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코빈 가가 어떻게 중산층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조부모와 부모 대에 윤택한 환경을 형성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노동당 유력 인사 중에는 이튼 스쿨, 옥스브리지 출신도 많고, 그 중에는 가문 대대로 세습 귀족을 지닌 이들조차 상당수입니다. 그러나 제레미 코빈처럼 도대체가 타협을 모르는 원칙을 고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요. 그의 먼 조상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짐작대로 어려운 여건에서 고된 노동, 혹은 기술 발휘로 착실하게 돈을 모은 이들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풍이나 집안 내력이란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저런 환경에서 성장한 이였기에 체제와 시스템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란 태생적으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레미 코빈의 부모는 흥미롭게도 집안, 특히 어머니 쪽 가문의 만만찮은 반대를 무릅쓰고 맺어진 연이더군요. 이 부분 관련 저자의 집요한 취재와 조사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 부부는 특히 금슬이 좋았는지, 제레미의 손윗 형제 이름을 일일이 익혀 두느라 잠시 독서 속도가 느려질 정도였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이분의 형들 역시 정말 성격이 만만찮은 분들이고, 한번 누구한테 원한을 품었다거나 반대로 호의를 가졌다 하면 그 감정을 끝까지 가져가는 타입들이더군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의 넉넉한 지원 덕에 그는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기질은 주위와 융화하는 과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좋지는 않았으나 대신 매사에 열심이고 진지했다." 이런 평가가 말해 주듯 그는 가슴 속에 담아 둔 소신이 새로 습득하는 지식을 무척 까다롭게 필터링하는 내면의 구조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런 까닭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며, 결국 졸업도 못 하고 사회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행로와 선택에 아무 미련도 갖지 않는 그였으며, 우리들도 당연 그라면 그러려니 하고 넉넉한 이해에 도달합니다.

제레미 코빈 같은 타입이 이성을 사귈 때는 어땠을까요? 유복한 집안에서 마련해 준 사회 진입의 발판을 잘 활용하지도 못한 채 불쑥 성년을 맞은 청년을, 그 어떤 여성이 호의적으로 봤을 리 만무할 것 같지만, 그의 첫째 부인 제인 채프먼은 "성실하고 신념에 불타는 남자였으며, 당시에는 외모도 준수하게 보였다." 라고 회고합니다. "첫째 부인"이라는 타이틀에 너무 구애받을 건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원래 이혼과 결별도 쿨하게 이루는 게 오랜 전통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예전에 이희호 여사가 "제가 보기엔 매력적이었어요." 라며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나와 술회하고, 방청객들이 큰 웃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책 표지에 나온 사진, 그리고 유튜브 등에 올라온 영상에서 그의 모습은, 노인치고도 준수하며 위엄이랄까 인생을 알차게 살아온 이들 특유의 건강함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 뭐 어때서 그러시는지 ㅎㅎ

제레미 코빈 하면 그 과격한 소신에 걸맞게 행동거지나 정치 스타일도 꽤나 단선적이고 다변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런 선입견은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에 의해 여지없이 부정됩니다. 그는 심지어 첫째 부인과 헤어질 때에도, 직선적이고 격정 넘치는 상대의 의견 개진에 일절 응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반대"의 뜻만 표시하고 보내 줬다고 하는군요. 의원이 되고 나서 그의 입장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당신 내가 전직 프로 권투 선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며 위협적으로 나오자 "나는 프로 달리기 선수라고 하죠."라며 그 자리를 그냥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토니 벤 같은 좌파 거물을 우상으로 삼았지만, 자신은 말도 서투르고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부족한, "전형적인 지방 의회 의원이나 하면 딱 맞을 타입"이었다고 합니다.

과시형 인물은 다변에다 방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상대를 압도하려 애쓰는 게 보통인데, 이 제레미 코빈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이라 볼 수 있죠. 이 제레미 코빈이 정치를 갓 시작한 하원의원 시절, 대처 수상이 출석한 자리에서 직접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취임하기 전 2700명도 채 안 되던 노숙자가 지금은 27,000명을 헤아리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이즐링턴 같은 곳의 지방의회가 빈집을 활용하는 데 서툴러서 아닐까요?"였는데(이때 노동당 의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고까지 책에 다 나옵니다), 이 말은 중앙정부 측의 반대당 집권 지역 실정에 대한 독설일 뿐 아니라, "지방의원 깜냥밖에 안 되는 자가 의회의 존엄도 모르는 무슨 턱도 없는 원색적 발언이냐"는 대처 수상의 불편한 심사가 드러난 발언이기도 하죠.

제레미 코빈은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노동당 내 주류 인사들에 의해 "출당"이라는 큰 위협적 조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대의정치는 본디 "무기속위임"이기 때문에, 지역구민의 개별 의사 변경(그런 게 측정 가능하다면)에 일일이 구애받을 필요는 원칙적으로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코빈은 그런 태도야말로 정치인의 무책임과 위선을 폭로하는 악폐라고 여겼기에, 언제나 지역구민의 의사를 현지에서 청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실천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런 게 당시 노동당 수뇌부의 눈에 아주 거슬렸던 겁니다. 여튼 자신이 몸 담고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여 종신토록 헌신하고자 하는 당(黨)이 그 충의를 고깝게 본다면 이런 것만큼 당사자에게 서러운 일이 또 없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그런 전횡을 휘두르려 한 "높으신 분들"은 지금 간데없고, 백오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노동당의 지휘와 기치는 지금 그의 몫입니다.

제레미 코빈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소위 패션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인사들의 특징을 보면, 귀족이나 중산층 출신이면서 의식적으로 노동자 말투를 꾸며내어 대화하고 연설하는 타입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레미 코빈은 자신이 중산층 출신인 사실을 타인이 보기엔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애써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참고로 코빈 전 전 대에 노동당 당수를 지낸 고든 브라운 같은 경우 너무 티가 날 만큼 옥스브리지 출신이라 이것 때문에 표가 깎일 것을 우려한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죠.

제레미 코빈의 한계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게, 그가 좌익에 입문할 때 지배적인 분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EU(당시에는 EEC)에 대해 지나치게 적대적인 태도라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그는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이는 주류 진보 진영의 스탠스와 동떨어진 태도일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구태"로 지적되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점은 그의 나이(그가 속한 세대)를 감안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어지간히도 한번 옳다고 마음 먹은 소신을 안 바꾸는 그의 퍼스낼리티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합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낼 무렵이면, 성장의 한계에 직면(특히 광대한 시장과 자원을 보유한 미국과 대조할 때)한 자본가들이 정치인들과 손잡고 저개발국의 잉여 저가 노동력을 흡수하려 고안한 장치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EU를 이렇게 인식하는 측은 거의 아무도 없고, 오히려 진보, 리버럴들이 차별 없고 국경 없는 세상을 이루려 활용(역이용?)하는 마당이 된 게 대세입니다.

한 인간에 대해 그 진실성과 깊이를 가늠하려면, 말로 내뱉은 바를 그의 일상과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을 해 내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가혹할 수는 있어도) 가장 확실한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에서라면 우리의 "코빈 동지"는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중 가장 완성된 인격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동료, 혹은 적대 진영의 인사들이 그를 놓고 평가하는 말 중 일관된 게 있습니다. "그가 이상으로 삼고 내세운 주장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조자가 없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어느새 보편적 공감의 가치들이 되었다." 바로 이런 게 진보(progrssive)의 본래적 정의이며, 도덕적 기반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내세우며 모두의 기대를 모았을 때, 자신의 자녀를 고급 사립 학교(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에 보낸 게 들통나자 많은 이들이 지지를 거두었습니다. 코빈은 반면 정색을 하고 공교육을 옹호하며 자녀에 대해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는데, 심지어 그는 (자녀가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으니(ㅎㅎ) 말 다했죠. 과연 우리 같으면 이런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산다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국내, 심지어 국외에서조차 이런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에게 무한한 갈채를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표지만큼이나 발갛게 상기된 가슴으로 책을 덮을 수 있는, 독자를 부끄럽게, 동시에 뿌듯하게 만들어 주는 독서였습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1)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미래 변화의 물결을 타라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6-10-25 22:31
https://blog.yes24.com/document/9034184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미래 변화의 물결을 타라

스티브 케이스 저/이은주 역
이레미디어 | 2016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AOL하면 한때 메신저의 대명사로 통했습니다. 메신저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그 상품 브랜드이자 동시에 개발사의 명칭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벤처 기업, 혁신의 대명사로 (야후 등과 함께) 널리 존중되었지요. 한동안은 미디어와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다소 벗어난 듯 보였지만, 일선의 전면에 나서기보다 의욕 있고 아이디어가 좋은 신진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소명을 직접 실천하는 "조용한 활약"에 몰두했더군요. 이런 분이 작금의 4차 산업 혁명, 혹은 제3차 인터넷 혁명에 대해 어떤 비전을 품고 계시는지, 미래(라기보다 차라리 현재)의 도전을 예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충고를 들려 줄지가 궁금했습니다. 당장 현재 잘나가는 분들의 감각도 중요하지만, 초창기 모든 가능성이 오픈되었고 동시에 무자비한 정글을 방불케 한 양상에서 승자로 군림했던 분이, 현업 최전선에서 잠시 물러선 후 차분히 관조하는 비전이 오히려 듣고 싶어지는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번째 스타트업(스타트업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때)의 회고담을 들으면 국외자조차 안타깝고 참담해지는 그 기분이 바로 느껴지는 것 같더군요. 그가 아직 서른도 맞이하기 전 꾸려 나갔던 "모뎀 제조"는, 제아무리 첨단 기술을 보유했다 한들 시장에서 뒤처진 기술로 곧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56,000Mbps 규격을 최고라며 전화선에다 꽂고 부러운 눈으로들 보던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러던 게 5년도 안 되어 노트북에 내장형으로 소켓만 보이는 식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아예 전화선 모뎀이 뭔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 자사가 지닌 최고의 기술을 시전해 보이며 대기업과 선을 대려 하지만, 대부분은 "케이스 씨, 당신의 의욕과 재능은 인정합니다만..."으로 어려운 말을 꺼내며 등을 돌렸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거래선도 하루아침에 "이젠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차가운 말 한 마디로 끊기기 일쑤였습니다. 갑을 관계가 한국에서만 치사하게 횡행하는 게 아니라, 미국 실리콘 밸리(젊은 기업인들이 대세인)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AOL을 창업해서 번듯한 트랙에 올려 놓은 후에도, 심지어 투자자들은 스티브 케이스가 너무 젊다며, CEO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의 소회는 책 중에 대단히 정직하게 표현되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구세대의 편견과 고집이 엉뚱하게 끼어들어 의욕을 꺾는 개탄스러운 현상은 미국에서도 흔하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되더군요. AOL이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인터넷 문화의 중심으로 등장했을 때, 저자 스티브 케이스는 폭주하는 항의전화를 받으면서도 "우리(회사)가 이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었나!" 같은 감격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가 회고하는 "제1차 인터넷 혁명"의 순간이며,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우리는 유튜브였고 구글이었으며 동시에 페이스북"이었을 만큼 대단한 성황이었다는군요(인스타도 추가시켜야).

저자의 관점에서 "2차 인터넷 혁명"은 스마트폰이 주도한 모바일의 전면 부상입니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인터넷"이란 공간이나 매체를 강조하기보다 "모바일 온리"로 완전히 개념을 바꾸는 추세가 업계나 미디어를 지배합니다만, 스티브 케이스는 과거 자신의 화려한 성공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나 여전히 "인터넷 중심"의 패러다임을 이 책에서 줄곧 유지합니다. 이런 관점이 저는 더 믿음직하다고 여기는데, 이런 시각이 모바일을 경시하지도 않으면서, 기기가 아닌 사이버 공간과 네트웍의 본연 기능에 더 주목하게 돕는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적하는 3차 인터넷 혁명은, 사물인터넷, 나아가 만물인터넷이 주도하는 산업간의 폭발적 융합상입니다. 그는 이 3차 인터넷 혁명을 통해 특히 의료, 교육, 식품 산업에서 엄청난 성장세가 움트며 미래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합니다.

하버드 경영대 교수 크리스텐슨이 지적했듯, 지금은 파괴적 혁신의 시대입니다. 벌써 페이스북이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고, 트위터는 한때 넷의 총아로 각광받았으나 벌써 몇 차례나 결정적인 매각 협상이 결렬되는 등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야후나 라이코스는 아예 잊혀진 기업에 지나지 않는 작금의 실태를 보면, 저자가 냉철하게 꼬집는 대로 현재에 안주하는 기업은 반드시 내일이라도 그 태만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만 같습니다.

다만 그는 이처럼 변화가 극심한 시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공감대에 주목하라고 충고합니다. 기업은 지역의 거주민들이나 소비자와 소통을 강화하는 게 생존을 위해서도 영리한 선택이며, 자신 역시 청년기의 대성공으로 거둔 과실을 "케이스 재단"의 복지, 기부 활동으로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 앞장선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미국 정부나 미국의 주도적인 기업인들이, 변화하는 추세, "신 경제 환경"에 과연 제대로 적응하는 중인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의 예를 들며 "두려움을 모르는 기업인들의 도전"이 이어진다고도 하고, 중국의 무서운 부상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는군요. 미국이 으뜸가는 퍼스트 무버였던 "1차 인터넷 혁명" 시기와는 달리, 현재는 아프리카, 유럽, 터키, 일본 등 전방위에서 변화를 선도하는 무서운 물결이 몰려온다는 게 그의 진단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앞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를 모방하며 질질 끌려다니는 미래야말로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가 아닌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여전히 혁신을 선도하는 입장인 미국 기업인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우리야 더 분발해서 기량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지요. 책 서문에 나온, 우리 시대 최고의 전기 작가로 이름 높은 월터 아이작슨의 코멘트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데이비드 버커스 - 경영의 이동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6-10-25 22:30
https://blog.yes24.com/document/903418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데이비드 버커스 경영의 이동

데이비드 버커스 저/장진원 역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 2016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어디에서나 4차 산업 혁명이 초미의 화두입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트렌드를 내세우며 이게 미래의 대세라고들 합니다. 예언되는 모든 진보와 발전상이 실현되면 소비자로서 우리의 삶은 훨씬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기업의 위치는 파리목숨처럼 위태로워지며, 현명한 전략이 세워지지 않으면 언제 도태될 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경영자는 한시라도 놓칠 수 없습니다.

경영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건 곧 기존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즉 그간 잘해오던 노하우나 지혜마저 무분별하게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경영자는 대체 어떤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마인드와 조직의 체질을 점검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학자들, 혹은 실무가들의 생각은 갈립니다. 저자의 그것은, 우리 독자들도 한때 일각에서 강조되었던 참신한 아이디어라서 기억하고 있는, "리버스 혁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주장입니다. 즉, 복잡한 것, 번거로운 것을 일일이 유지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과감하게 제거하고 떨어 내어서, 필요한 핵심만 갖춘 채 앞으로 진격하라는 게 그 요지입니다.

직원들에게 이메일 이용을 금지하라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게 보통의 반응이겠습니다. 이메일은 업무상 처리해야 할 많은 용건을 담은 채 수신되거나, 반대로 거래처, 혹은 회사 내부에서 나에게 부여된 사무를 처리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이메일의 과도한, 혹은 분별 없는 접근이 멀티태스킹을 방해하고, 그 자체로 (이메일만이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입니다. 업무 시간에 이메일 사용을 극히 제한하는 정책을 이미 도입한 곳은 폴크스바겐과 벤츠 등 독일 업체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이미 "좋은 내용을 담은 이메일은 그 효과가 미미하거나 식상하고, 나쁜 내용은 하루 내내 컨디션에 악영향을 준다"고 결론이 났다는군요.

한때 고객이 왕이라는 말이 (실천 여부와 무관하게) 유행했죠. 그런데 저자는 "고객은 2순위며, 1순위는 당신이 고용한 직원"이라고 하네요. 이 함의는 간단한 게, 직원을 잘 대우하면 업무 성과의 질이 높아지고, 신이 나고 사기가 오른 직원들은 고객을 잘 대우하며, 조직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생기가 돌며 자연스럽게 창의가 샘솟는다는 논리입니다. 책에서는 스타벅스의 예를 드는데, 저는 한국에서도 이런 모범적인 사례를 이제는 많이 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 여직원들 친절하다고 칭찬 많이 하는데, 그렇게 강요된 분위기에서 나오는 기계인형 같은 매너가 고객 만족, 서비스 품질을 높인다고 보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친절보다, 아 이거는 제가 책임 지고 해결해 드리겠다면서 자발적으로 발휘되는 성의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최근에 SKT 고객센터, 삼성전자 AS 등을 겪으며 실제로 느낀 바입니다. 점장이나 윗선에서 직원들을 존중하니까 이런 분위기가 자연히 조성되는 것 아닐까요? 인적자원관리 면에서 한국이 어떤 면에선 일본을 앞지르는 면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제안도 많이 나오는데요, 예컨대 어차피 일도 못하고 조직에 적응하려 들지도 않고 분위기만 해치는 직원은, 과감하게 보너스를 줘서라도 내 보내라는 겁니다. 이는 법적으로 정리해고가 어려운 한국에는 잘 안 맞는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예전부터 명예퇴직 제도를 따로 두기도 한 거죠. 미국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해고가 이뤄지는데도 저자는 이런 제안을 따로 내놓는군요. 첫째 직원 입장에선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게 정답이지만, 소위 "매몰비용(지금까지 적응하느라, 업무를 익히느라 정 붙이느라 애쓴 게 어딘데)"이 신경 쓰이는 직원들은 서로가 괴로운 동거를 이어나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직원들에게 명분도 주고, 회사는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하고, 둘 다 윈윈하는 길이 "돈 줘서 내 보내라"는 겁니다. 이 예는 자포스와 아마존을 통해 들고 있네요.

휴가는 가고 싶을 때 마음놓고 선택해서 가게 하는 게 직원 만족도를 높이며, 어떤 지침을 만들어서 규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선 이게 성공했고, 반대로 트리뷴 퍼블리싱(시카고 트리뷴의 자회사)에서는 회사가 몇 푼의 이익을 위해 직원들에게 치졸한 거래를 시도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큰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회사는 어디까지나 직원들과 동료애, 신뢰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거죠. 위의 "고객보다 직원이 우선"이라는 원칙과 일맥상통합니다.

경쟁금지란 그 회사를 퇴사한 직원이 향후 경쟁업체에서 동종 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할 때 소송에 걸릴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근로 계약의 일부). 그런데 IBM 등에서는 일찌감치 이 조항을 없애고 보다 편한 분위기에서 근무할 수 있게 했다는데요. 그 이유는 마치 대학교수처럼, 일류 직원들이 근무하는 IBM은 지식과 기술의 허브가 되어, 다른 기업들에게 존경받고 장래에 보다 넓은 pool로 타사의 인력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디어의 출처는 사내와 사외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건데, 제 생각을 좀 추가하자면, 이런 경쟁금지 조항을 폭 넓게 적용하면 (아주 파격적인 개별 성과급을 책정하지 않는 이상)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 저하를 부를 수 있다는 이유도 고려되었다 봅니다(열심히 해 봐야 내 것이 내 것이 안 되고 회사로 귀속). 한국의 소위 공밀레 타령도 여기서 나오는 건데, 다만 기밀 유출까지 가는 지경이면 당연히 어디서건 민사뿐 아니라 형사 소추의 대상이겠죠.

책에는 "과연 개방형 사무실이 (많은 혁신적인 젊은 기업가들이 주장하듯) 능률적일까?" 같은 소소한 질문부터 해서, 자신이 평소 경제와 사업, 인생, 미래상에 대해 가져 온 여러 다양한 견해를 솔직하고 알기 쉽게 털어 놓은 대목이 보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건 "자율성이 강조되고 책임도부여되는 조직, 아예 관리자가 없어도 돌아가는 조직"이 앞으로는 큰 성과를 내리라는 점입니다. 또한 회사 혹은 어느 조직이라도, 끈끈한 1차적 유대가 중시되는 소위 배태성(embeddedness)가 있어야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미국 기업 하면 대뜸 떠올려지는 여러 냉혹한 이미지가 불식되는 언급이기도 한데, 이런 걸 보면 우리도 고유의 장점은 잘 살려가면서 조직의 효율화를 기해야 할 것 같네요.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1 2 3 4
진행중인 이벤트
새로운 글
오늘 195 | 전체 480043
2011-08-2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