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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읽어보고 싶.. 
너무 꼼꼼하게 리뷰를 올려주셔서 .. 
리뷰를 보아하니 책 내용도 너무나 궁.. 
이무것도 안 하는 직업이라는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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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 다오스타 | 서평 2017-10-3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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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세계는 이 소설에서 커버하는 대목에서 큰 격변기를 맞이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잃었고, 이 오랜 로마의 텃밭 통치에 대해 확고한 자신이 아직은 없었던 셀주크 투르크는 킬리지 아르슬란의 통치권을 사실상 허여합니다. 이 소설 p148에도 잠시 언급되는 대로죠. 이 소설에서 클르츠(책에는 클로츠라고 표기되네요) 아르슬란은 꽤 매력적인 청년 군주로 묘사됩니다. 볼모로 끌려와 어려웠던 시절 자신과 친하게 지낸 무흐타디를, 술탄위(位)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격의 없이 대하고, 이런 오빠의 성품을 공유해서인지 여동생(공주) 예나도 꾸밈없이 소박한 매력을 드러내더군요. 늙은 피노카 장군의 충성을 이끌어 낸 것도 결국 젊은 군주 자신의 덕망이 주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일화는 다분히 동양 사서에 나올 법한 것들과 매우 닮았는데, 어차피 투르크인들도 동아시아에서 발원한 족속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별 어색할 것도 없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비야 다오스타"이고, 이 이름을 단 청년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전체 내용을 놓고 볼 때 아주 비중이 크지는 않습니다. 이 장편의 마지막은 청년 비야가 자신의 출생 그 근원과 기어이 마주하게 되는 감개무량한 장면으로 장식되지만, 대강은 그 내력을 짐작하는(혹은, 사연 전개를 통해 명시적으로 알게 된) 독자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당연히) 않습니다. 비야는 용감하고 지혜롭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과 가르침 받은 교리의 타당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고민 많은 청년입니다. 이런 점은 이 스케일 큰 장편 소설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이 대개 공유하는 편이라서, "대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믿음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이웃들과 사생결단을 내어야만 하는가?" 같은 회의와 갈등에 시달립니다. 선량하고 현명한 이들은 공존과 화해를 모색하고,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이들은 피를 끝내 보려 들거나, 터무니없는 횡재를 꿈 꿉니다.

배경이 중세이긴 하나 우리가 대뜸 떠올리는 기사도, 수도원, 숨막힐 듯한 교회 도그마의 독선 따위가 주된 소재는 아니고요(이런 것들도 선명하게 소설 속에서 등장, 제 구실을 합니다만), 리뷰 서두에 적은 대로 동지중해를 둘러싼 인물, 세력, 국가들 사이의 다툼과 음모, 애정, 포용 등이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기나긴 사연입니다. 이 직전 시기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청 질서를 잘 다져 놓아, 그 다음 다음 후임자인 우르바누스 2세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십자군 소집령을 내려 천하에 위세를 떨칩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여기서 편협하고 근시안적이며 광신적인 면모를 지닌, 명백한 안타고니스트로 세팅됩니다.


반면 이런 서유럽 라틴 - 게르만 - 가톨릭 연합 패권에 저항하려는 쪽은 "로마 제국"인데, 물론 우리가 아는 비잔티움 제국입니다. 소설에선 아무 위화감 없이 내내 "로마 제국"이란 명칭이 쓰이는데, 해당 국가 단위가 존속 기간 내내 그리 자신을 부른 게 사실입니다. 제국의 통치자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인데, 노련한 외교술로 외침을 현명히 콘트롤한, 성공한 통치자로 꼽힙니다. 여기서도 권신(원로)들을 어르고 달래는 수완이 돋보이지만, 단 소설 속에서는 율리아노스, 아이노스 등 교활한 원로(세나투스, 혹은 Γερουσία를 가리키는 듯합니다)들이 국익은 아랑곳않고 더러운 정치 게임을 벌이느라 황제의 뒤통수를 치죠. 황제가 지중해 해적 세력, 아르메니아의 허약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여군주와 연합하려 들면, 기민하게 연락망을 가동하여 낌새를 미리 알아챈 후 선수를 놓는 술책이 일품입니다(그런 게 바람직하다는 게 아니라 소설적 재미가 잘 고안되었다는 뜻).

세상이 참 좁은지 아르메니아의 여성 군주와 지중해를 벌벌 떨게 하는 해적 두목 포네로스(아르메니아 인이 왜 헬라식 이름을 지녔는지는, 여전히 국제 공용어 중 하나로 통하던 게 그리스어라는 사정을 감안하여 이해해 주면 되겠죠)는 친동기간이라는 게 결국 드러납니다(스포일러는 아닌 게, 독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리드하는 여러 젊은 남녀 주인공 중 이 사내다운 해적 두목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요소입니다. 단, 문제의 야생(?) 소녀 소피아(혹은 첼로시아)가 이처럼이나 많은 인물들과 혈연, 입양 관계로 얽혔다는 건 좀 작위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이 무렵 서방의 야만인들이 겁도 없이 무연고의 고장을, 제멋대로의 종교 명분을 내세워 침범해 들어온 건, 셀주크의 패권이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기에 "힘의 공백"이 생긴 면도 분명 있습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 또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드러나듯, 한 국가의 위세가 쇠퇴하면 리더십이 흔들리는 지역을 놓고 반드시 "땅따먹기 경쟁"이 촉발되기 마련인데, 우르바누스 2세는 한편으로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강한 견제구를 던지고, 다른 한편으로 정력은 넘치고 먹을 건 부족하던 야수 같은 서유럽의 봉건 제후들에게 좋은 미끼를 던져 세력 재편을 시도한 겁니다. 이 소설에도 잘 묘사되듯 "로마 제국" 역시 만성적인 내홍에 시달리던 터라 이런 건방진 도전에 정면 대응은 자제하고, 대신 (앞서 말한 대로) 노련한 정치 술책을 써서 국력 소모 없이 정치적,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선택을 합니다. 단 이 소설 중에는 직접 언급이 없고, 아이노스의 반란군(제국군)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를 침공한다는 대목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이 무렵 역사가 항상 그러했듯, 점령군의 현지 약탈, 부녀자 강간 등이 끔찍히 벌어지고, 이런 무도함을 징벌하는 건 무공이 뛰어난 프로타고니스트들의 활약입니다.

종교, 외교 등이 주된 화제를 이끌어나가긴 해도, 이 소설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검술과 격투의 달인들로 설정되어, 마치 무협지를 읽어나 가듯 인물들 간의 일합 대결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독자들은 극중 세계에서 과연 누가 무공 랭킹 1위, 2위인지 가려 보는 맛을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야생소녀 소피아가 탑 1, 2를 다툰다는 사실인데, 타고난 혈통도 혈통이거니와 워낙 막강한 실력자들에게 어려서부터 무예를 전수받은 터라, 날고기는 남성 전사들도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판입니다.

누가(루카)의 복음서 14:23에 보면 실제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Coge intrare... 그런데 이 말은 원치도 않는 이들을 강제로 내 집에 납치, 감금하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수에 안 맞는다며 초대를 사양할, 낮고 가난한 이웃들을 강청이라도 해서 배를 채우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는 뜻이지, 양심을 모독하고 신념을 강제하라는 뜻이 아니죠. 사랑과 구원의 명분을 허울 좋게 건 뒤 자행하는 온갖 간악한 범죄에 대해, 작가는 이런 등장인물들의 위선과 우행을 통해 신랄히 풍자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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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는 보았다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7-10-3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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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회계사는 보았다!

마에카와 오사미쓰 저/정혜주 역
도슨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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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는 대개 소심하고 꼼꼼하고 내성적이며 남 앞에 주견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 성격처럼 간주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접하는 "진짜 회계사" 중에는 안 그런 분이 훨씬 많은데도 말입니다. 이 작고 유익한 책 표지 일러스트에도, 그런 우리들의 전형적인 선입견을 모두 충족이라도 하듯, 머리 기장 짧고 안경을 썼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는 캐릭터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단, 뭔가 심상치 않은 광경이라도 목격했는지 표정, 그 중에서도 입매가 비장한 모양새입니다.

예전에는 회계사를 두고 "기업의 판사"라고까지 일컬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높은 평판과 선망이 많이 주춤해진 모습입니다. 이 책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지만 이른바 "적정의견"의 허상이 어느 정도나 심각한지 이제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공감대가 확산된 탓도 있습니다. 장부상에 뻔히 드러나는 사기 행각, 모순된 분개, 뻔뻔스러운 분식 등을 두고도 불의 앞에 눈 감거나, 오히려 적극 가담까지 하는 "비겁한 전문직"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거죠. 그래도 이 책 저자님처럼 정의롭고 예리한 진짜 회계사, "검객"들도 많기에 아직은 기업 비리가 사회 전체를 더립힐 지경까지는 가지 않은 듯합니다.

이 책은 우리 일반 독자들도 교양, 상식으로 익혀 두어, 일부 타락한 기업에서 흔히들 저지르곤 하는 눈속임, 잔재주, 가까운 미래에 닥칠 심각한 부실의 징후를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앞서 간파해 낼 수 있을지 아주 요긴한 팁들을, 예화와 함께 제시합니다. 예로 든 이야기들이거의 전부 실제 일본에서 벌어졌던 큼직큼직한 스캔들이기에,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의 생생한 실증, 케이스 스터디도 시도해 볼 수 있고, 우리가 어차피 직장 생활 하며 익혀 둬야 하는 상식, 교양의 일부인 회계 지식의 activation, 프라이머로도 활용 가능합니다. 요렇게 아주 드라마틱한 사례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봐야, 지식이 그저 머리 속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감과 흥미를 덧입힌 채 다가올 수 있습니다.
 
꼭 비리 같은 사례만 다루는 건 아닙니다. 저자께서 말하고 싶은 건, 대체 기업의 재무제표와 여러 전자공시 자료에서 우리가 무슨 "스토리"를 읽어 낼 수 있는지입니다. 일단 이 책에서는 반 세기가 지나는 동안 가전제조 분야에서 금융으로 주력 업종이 완전히 바뀌다시피한 SONY의 예를 p38에서 듭니다. 여기서 저자께서 주로 활용하시는 자료는 캐시플로 계산서인데, 사실 이건 일본식 용어죠. 우리는 실무에서, 또 교과서나 법규정에서 "현금흐름표"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대체로 비금융과 금융 부문의 액수 크기가 역전된 듯 보입니다. 특히 2013년에는 전년대비 83%가 감소하는 등 가전분야가 쇼킹한 타격을 입습니다만, 이 차이를 금융분야의 26% 상승분이 어느 정도 보전하는 모양새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소니의 이사가 기자회견장에서 당사는 금융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삼습니다 같은 발언을 할 가망은 전혀 없는데, 이는 '일렉트로닉스의 소니'에 아직도 그만큼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p39)" 이처럼, 기업이 대외적으로 전략적 표방을 하는 이미지와, 그 사업의 실속, 내실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날 수 있으며, 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재무제표의 분석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이라고 할까, 시계열 자료의 분석이 의외로 큰 구실을 함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코지마는 요즘 어느 연예인이 CM을 부르며 광고하는 안XX자 때문에 한국에서도 부쩍 인지도가 상승했지만, 일본에서는 가전 전분야를 통틀어 꽤 높은 매출을 올리던 중견 기업이죠. 뜻밖에도 저자는 어느 택시기사에게, "사원을 쓸데없이 울리는 기업"이란 평가를 듣습니다. 이는 비전문가인 개인의 판단에 지나지 않으나, 저자는 이 기사의 예사롭지 않은 한 마디가 어떤 실증 근거를 갗췄는지 따로 알아보기로 합니다. 이처럼, 마치 평범한 이웃 아저씨처럼 소박한 동기를 품고 격의 없는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사실은 꽤 큰 종합 회계 사무소의 대표님입니다만)

요즘 한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는 비정규직 문제, 무분별하게 인건비를 그저 줄이는 데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피용인의 사기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이를 통해 무형의 부작용만 양산한 게 이 기업의 실수였다고 저자는 매출총이익, 급여, 매출액 등의 대조를 통해 주장합니다. 라이벌 업체인 케즈덴키는 사원의 평균 급여가 높은 데도, 또 이런저런 압박을 주지 않고 알아서 잘 하라는 다소 방만한 분위기인데도 여전히 실적이 좋고, 사원을 닦아세우는 어느 곳은 실적이 심각히 떨어졌습니다. 이럴 때, 저자의 언급처럼 마스시타 고노스케의 시대를 앞서 간 혜안이 떠오르기도 하고(불경기에도 해고를 자제), 혹은 독재자이긴 했어도 헨리 포드 같은 이가 취한 "생산직 고급여' 정책이 생각나기조 하죠.

이에는, 문제를 제대로 짚었지만(인건비와 관리비의 상승이 적자 초래), 그 대응을 졸렬하게 했느냐, 아니면 직원의 사기도 고려해 가며 현장의 여론과 분위기를 존중했느냐에서 명암이 갈렸다는 게 저자의 진단입니다. 케즈덴키는 아예 정규직 정책을 더 강화했고, 야마다는 계약직을 늘리되 정규직(이 책에서는 "정사원"이라고 표현됩니다)도 소폭으로 같이 늘려가는 절충책을 택했습니다. 어느 회사 혼자서만 줄곧 고전한 이유를 저자는 여기에서 찾는 것입니다.

코지마는 어떻게 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까? 대안 없는 비판은 무익할 뿐입니다. 저자는 이 회사의 문제가, "종업원 1인당 메출액이 적음"이란 뚜렷한 지표에 집약되었음을 발견합니다. 즉 직무 구조의 합리화, 효율화를 꾀하진 않고, 양적인 비용만 줄이기에 급급했던 게 패착의 본질이었던 셈입니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고 봅니다.

닛산도 경영위기에 직면하여 직원을 줄이되, 인당 급여는 삭감하지 않아 "일단 남은 사람들의 노력만으로 회사를 살려 보자"는 공감대를 확산시킨 게 회생의 비결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사례에서는 재미있는 대목을 또 하나 짚는 게, 코스트다운을 밀어붙이다 보면 납품업체(하청업체, 혹은 협력업체)에 가격 후려치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파가 품질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닛산은 그런 부작용을 대체로 피해갔다고 분석됩니다. 이 비결에 대해서는, 거래선의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일단 계약을 유지하는 업체들은 일감이 늘어나므로 매출액 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아지는 여건입니다. 물론 거래가 끊긴 업체들은 당장 타격을 받겠으나, 이는 앞에서 말한 희망퇴직 정책과도 맥이 닿습니다. "남은 이들에게 최대한 후하게 대접하여 일단 회사를 살려 놓고 보자."

저가항공은 우리보다 조금 앞선 시기 일본에서 활황을 띤 업종입니다. 이 선도업체 중 스카이마크란 곳이 있었는데, 한때 잘나가다가 특정 시점부터 (캐시플로 계산서에 나오듯) 현금 흐름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우리가 기업 분석할 때 그렇게나 현금 실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가장 나쁜 사례가 이 5장에 나오는 셈입니다. 왜 이렇게 캐시플로가 심각한 악화를 겪었냐면, 바로 무리한 투자 때문입니다. 무엇에 투자를 했는가? 바로 에어버스 A380을 여섯 대나, 그것도 엔저가 두드러질 불리한 시기에 환차손이란 역풍까지 안아 가며, 터무니없이높이 매겨진 가격을 아무말않고 지불하는 악수까지 두었기 때문입니다. 저가항공사의 명목과 본질에 맞지 않게, 이런 초호화 자산을 매입하려 든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죠(신분 상승 기도?).

마지막 장 도XX의 사례에서, 기업이 언제 컴컴한 속임수를 부리는지 그 개탄스러운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소개됩니다. 우리가 회계의 ABC를 학교에서 배울 때 중간, 기말고사에서 단골로 출제되는 게 공사진척에 따른 회계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작정 모범 답안을 보고 암기하기보다는, 이치를 따져 가며, 다른 방안도 가능할 텐데 왜 하필 이 원칙에 따르냐는 식으로, 능동적 문제의식 속에 이해를 해야 효과가 높을 겁니다. 다리처럼 유형 자산을 건설할 때는 누구나 동의할 만한 가시적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말씀처럼, 소프트웨어 개발처럼 눈에 잘 안 보이는 활동이 문제인 겁니다(이뿐 아니라 R&D 전반이 다 그렇죠). 있지도 않은 자산을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부풀리거나, 반대로 비용에 과다 계상하기가 일쑤인데, 이 항목이 너무도 많아 회계감사인 입장에서는 전수 조사가 어렵다고 합니다.

무형자산의 평가에서 분식을 일삼고 결과적으로 피해를 사회에 떠넘기는 도덕적 해이는 지탄 받아야 마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느 구석에서 잘못을 저지르는지는, 시민 모두가 감시의 눈을 뜨고 살피는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 주인으로 사는 국민이 되려면 그래서 공부가 중요하고, 그 중에서도 이처럼 살아 있는 섹터와 활동에 바로 응용이 가능한 지식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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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꿈꾼다 | My Reviews & etc 2017-10-3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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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꿈꾼다

황성젠 저/허유영 역
유노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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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사랑하는 이가 내 곁을 떠났을 때입니다. 서양에서 결혼 서약을 할 때 보통 "죽음이 우리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란 어구를 관습처럼 되뇌곤 하죠. 죽음이 아니라 성격 차, 경멸 - 혐오감, 불화 따위가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건 제3자 입장에서 안타깝고 딱하긴 해도, 당사자들 사이에선 가슴을 찢어놓는다 같은 슬픔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해로(偕老)하고 도 여전히 설레는 감정이 살아 있는데 노환, 중병 등으로 상대방이 유명을 달리한다든가 하는 건 참 못 견딜 일입니다. 혹은, 꼭 각별한 효자가 아니라도 해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것도, 그냥 떨어져 산다거나 장기 출타 같은 사정이 아닌, 앞으로 영영 뵐 수 없는 성격의 이별이라면, 웬만한 사람에겐 굉장한 충격이며, 그 상실의 극복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내내 꿈에 등장하시며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을 후회하게 만드실 수도 있죠.

하물며, 난치병이라든가, 교통사고라든가의 후유증으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 가며 생명을 연장하시는 경우라면 사정이 더욱 심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는데, 심폐 소생 등을 위해 인체에 삽관(관을 집어 넣음)하여 임시방편으로 치료받는 게 (말을 못 해서 그렇지) 환자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라는군요. 환자 입장에서는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품위 있게 목숨을 끊고 싶은데, 가족 입장에서야 어디 그렇겠습니까. 아직 0.00001%의 가능성이라도 생존에의 희망이 있다면 무슨 수라도 쓰고 싶어하죠. 가족이 손을 안 쓰거나 조치를 덜 해서 아픈 분이 돌아가셨다면, 그 죄책감을 무슨 수로 달래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기심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만 상식이 있는 이상 그렇게는 또 생각이 안 될 겁니다. "아프신데 그만 떠나게 해 드리자." 당치도 않죠.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죠. 이 사이에 끼어 진퇴양난의 고초를 겪는 건 응급실의 닥터들입니다. 그들은 한두 번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니기에, 무엇이 합리적인 처사인지 이미 알면서도 직업인의 양심, 가족의 독촉 때문에 결과가 뻔한 무의미한 행위(100이면 100 그런 건 아니고, 대단히 신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이 책 저자의 취지를 고려하여 일단 이 표현을 씁니다)를 반복합니다.

이 책은 이런 인간적인 고뇌를 치열하게 겪은, 대만의 어느 의사분이 진솔한 고백을 털어놓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문장을 읽다 보면 내내 벅찬 휴머니즘으로만 일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때로는 지쳐서 내뱉는 솔직한 푸념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푸념을 털어 놓으실 때도, 어디까지나 의사로서 직업인으로서의 소명은 투영되어 있습니다. 광의의 연명치료는 물론,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온 상태에서 이뤄지는 응급처치 역시, 고통만 증강시킬 뿐 환자의 소생, 당장의 안식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경우 사전의 DNR(Do Not Resuscitate) 동의서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드는 노력의 낭비를 막는 효과가 있겠으나, 이 DNR 동의서를 놓고도 별의별 소동이 다 빚어지는 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대만이나 우리나 동아시아에서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 게 많아서, 일부러 작정을 하고 발전시키는 오해, 음모, 혹은 정반대로 애틋한 정 때문에 벌어지는 가슴 아픈 갈등, 하소연 등이, 대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벌어질 법한 사연들의 집약, 회고처럼 느껴졌습니다. 

DNR에 서명할 자격은 꼭 직계비속 장남일 필요는 없고, 배우자나 그 외 혈족이면 충분한 듯합니다. 그런데 일생을 속 썩이다 마지막에 그 부친(뇌간출혈로 넘어져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는 분) 가시는 길을 히 보내 드리는 일에 작은 도움을 준 아들의 사례가 나오더군요. 의사야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니 왜 이렇게 아들을 기다려가며 서명을 미루는지는 그 여동생(딸)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 됩니다. ".... 외아들이라 어려서 엄격하게 기르느라고 매를 많이 맞았어요. 이걸 참지 못해 가출도 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결국 감옥에도 가게 되었지요.. " 사실 아들만 나무랄 게 아니라, 아이에게 맞지 않은 방법으로 훈육한 부모의 잘못도 적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전혀 재능과 적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기대만 터무니없이 부풀려, 자라서는 과대망상 허언증 환자가 되어 나이 육십이 되고서도 정신 못 차리는 한심한 예도 보지 않습니까. 그런 훈육도, 이 책에 나오는 폭력 부모의 방식과 크게 다르다 할 수 없습니다.

"오빠랑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이런 잔인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죠?" 손아래 시누이는 폭언을 퍼붓고, 손위 시누이는 따귀를 때립니다. DNR에 서명하고 연명치료를 중단하자 시월드(....)에서 찾아와 퍼붓는 언행들입니다. 물론 망상의 투영으로 남편을 도구처럼 활용하려다 뜻대로 안 되자 발악과 원한만 남은 졸혼 부부도 세상에는 있겠으나, 보편적인 부부의 삶이 또한 어찌 그렇겠습니까.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이면서 그렇게 비슷한 시기에 한 생을 마쳐 가는 거죠. 결국 저자(의사)는 망자의 딸에게 전화를 걸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용기 있는 결단이기까지 했다며 차분한 설득을 벌입니다. 이후 노부인은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는군요. "평생 쌓인 억울함이 다 씻긴 것 같아요!" 이런 경우, 비록 배우자라고는 하나 자신만의 결정으로 진행할 게 아닌, 시댁 인사들과 충분히 협의를 거쳤더라면, 적어도 사전 통고는 하고 의사의 의견도 듣게 했다면 이런 험한 풍경이 벌어지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때로는 같은 의료진 간에도 의견 차이가 생깁니다. 항암 치료임상 실험 중인 환자가 갑자기 뇌출혈이 생겼는데, 경험 없는 레지던트는 수술을 권하나, 이 저자분은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다는 사실을 들어, 수술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고 성공한다 한들 중증 장애가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합니다. 암병동 레지던트와 그를 지도하는 주치의는 자신들을 무시한다며 불쾌감을 표시하지만, 환자의 복지와 행복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한 저자는 자신의 결정에 후회가 없습니다. 병원 안에서도 "정치"가 필요한 엄연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저자의 행동은 환자 입장에서라면 참으로 고마운 처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DNR 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환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죽음이라는 고요한 골짜기까지 환자를 배웅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p89)

대만 최고의 호스피스 전문의께서 들려 주시는,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각양각색의 슬픈 제스처와 소통을 연출하는 모습들을 보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치러 내어야 할 아픔임을 공감하며 마음이 무척 숙연해졌습니다. "아름답게 죽음을 맞을 권리를 누리고 싶다면, 우리 모두는 준비해야 할 게 무척 많다." 언제나 알기 쉬운 언어로 소통해야 환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이 그나마 덜어질 수 있다고 믿는 저자의 말씀입니다. 또한 저자는, 이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 자신과 가족의 아픔을 최소화하려면, 평소의 식생활 습관이 철저히 절제된 것이라야 한다고도 조언합니다.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전해도, cure가 불가능하고 오로지 care만이 가능한 경우가 아직은 훨씬 많습니다. 이런 호스피스 전문의가 최상의 식견과 인도주의를 발휘하시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살만한 곳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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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 My Reviews & etc 2017-10-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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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대니얼 웨그너,커트 그레이 공저/최호영 역
추수밭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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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진 책입니다. 편제도 우아하고, 예거(例擧)되는 샘플들도 적절 참신하며, 문장도 유려합니다. 결정적으로, 점근해 가는 결론과 주제의식도 보편 공감을 끌어낼 만큼 타당합니다(책을 완독하고 좀 더 생각에 잠기면, 참으로 심오하기까지 했다는 판단입니다). 저자 중 대니엘 웨그너는 아직은 활동을 더 이어가실 연령이었으나 4년 전에 아깝게 타계했다고 하죠. 제자인 커트 그레이의 공헌이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으나, 앞으로 이런 멋진 저술(후속작이 꼭 나왔어야 했는데요. 작금 이 분야 연구가 점점 가속 진행되는 상황을 고려하면)을 또 독자들이 만날 수 있겠을지를 떠올리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목을 보십시오.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극상, 최하, 평균을 가리키는 건가? 글쎄요. 저는 그보다는, 이 책의 원제에 좀 주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마인드 클럽". 클럽이라고 해도 다양한 성격과 구조를 가졌겠습니다만, 이 클럽은 일단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가입 가능합니다. 클럽에 못 끼는 이들이라면, 채소 같은 걸 일단 저자는 듭니다. (ㅎㅎ 그러나 속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갓난아이는? 고양이는? 죽은 자의 영혼은? 회사, 기업은? 세번째 것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확증 못한다뿐, 혹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대번에 가입을 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이라는 게, 생전의 기억도 다 잃었고 관계 일체도 상실했다면, 그래서 그저 부유할 뿐이라면, 과연 "마음"을 가졌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죠. 네번째가 차라리 더 복잡한 문제입니다. 일찍이 기에르케 같은 학자는 "유기체설"을 주장한 바 있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거론한 니부어를 꼭 상기하지 않더라도 기업에 속한 개인은 순수 개인적 가치관과는 또 별개의 논리와 목표로 움직이는 법입니다. 마케팅 학자들은 "기업에는 반드시 독자적인 논리와 개성과 정신이 스며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영속하지 못한다"고도 했으니 어찌어찌 ㅎㅎ 앞뒤가 맞아떨어져 가기도 하는군요! (농담입니다)

동물이 고차 사고 능력을 못 갖췄다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겠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어난 여러 사고나 범죄 등에 대해 "그들"이 책임을 져야 옳을까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재 사고를 일으킨 동물 등에 대해서는 관련 법규가 살처분 따위를 강제하지만, 그게 그 동물들에 책임을 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개는 입법 목적이, 같은 위험을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인간과 사회를 방위할 의도로 그런 조치를 집행하는 거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도, 인간에게만 이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동물은 그럴 자격조차도 없는 겁니다. 아동, 심신상실자, 지적 장애인, 만취자(단, 여기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예외가 적용되나 근래 근본적인 재고가 이뤄지는 편이고, 독일에서는 예전부터 정상인이나 거의 같게 취급합니다[하도 술을 많이 마시니 봐 줄 수가 없음]) 등에 대해 법이 책임 감경을 지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몇 해 전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장애인이 어린 아이를 창 밖으로 던져 숨진 사고가 일어났고, 바로 며칠 전 맹견이 어느 한식당 대표를 물어 사망케 한 끔찍한 일도 있어서 더욱 실감이 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또 엉터리 구실을 지어내는 인간도 이와 같다고나 할까요? 여튼, 어떤 경우에도, 개한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오히려 인간의 품위를 훼손하는 겁니다. 선반 위에서 무거운 다리미 등이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치고, 그 다리미를 마구 때리거나 부품 해체 하는 식으로 "벌"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다만 그 도구가 꽤 보기 싫다거나, 재발 방지를 위해 보관 장소를 바꾸거나 아예 갖다 버리거나 할 뿐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죠. 법에 의해 물건처럼 처분(도살 등)될 뿐이지만, 정말로 "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진짜 개한테 마음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뭐 누가 알겠습니까? 사정이 진짜 그럴 수도 있고, 이 책의 흥미로운 탐구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진짜 압권은 물론 우리 "인간 마음"에 대한 분석입니다. 저자는 행위자(agent)와 수동자(patient. 이 단어를 이런 용법으로 쓰는 게 혹 독자에게 낯설까봐, 책에서는 우리의 당혹을 다 이해한다는 듯 친절한 설명부터 베풀고 시작합니다. 참으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저자들!ㅋ)로 대별하고, 다시 이를 선과 악 두 상황으로 나눠 2x2 매트릭스 프레임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일단 타인(그러니 분명 사람입니다)을 평가할 때, 이 네 가지 범주 안에 일단 편입시킨 후, 경우에 따라 대단히 부당한 평가도 내리곤 한다는 겁니다. 히틀러 같은 악의 행위자를 무작정 단죄(심지어 그가 아주 어린 시절 한 일이라든가, 극히 드물겠지만 부분적 선행을 했다고 쳐도)하는 건 뭐 그러려니 합니다만, 테레사 수녀 같은 "영웅"에게도 우리는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해진 채, 부당하게 의무와 과업을 지우려 듭니다. 이게 너무나 재밌다는 겁니다. 긍정/부정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이런 타입에 대해 감정의 투사를 안 하려 든다는 거죠. 이를 두고 우리의 마음은 "행위능력은 상당하지만 경험 능력은 없다고 판단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또 지각 대상에 따라 각각 어떤 다른 기제가 발동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입니다. 이 용어들은 타 분야 용례와 매우 다른 성격이므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특히 "행위능력"은 법학에서의 쓰임새와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 유명한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의 말을 인용하는군요.

p134에 보면 환각사지통증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걸 두고 전에는 "유령 감각(원어의 직역에 가깝습니다)"이라고 했으나, 요즘 번역서에는 이처럼 더 기술적 정확성을 기한 번역어가 쓰이더군요. 이미 사지(의 일부)가 잘려 나갔는데도, 왜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부위에 대한 아픔을 호소할까? 심리학과 의학이 만나는 기묘한 지점이자 연구 과제이며,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제법 구체적인 해명을 실고 있기도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 노시보 효과 등은 그저 무해하거나 우스운 착각이 아니라, 이런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고통 경감의 수단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최후 통첩 게임은 경제학에서도 다루는 이슈인데, 확실히 근년에는 심리학과의 콜라보가 밀도 높게 이뤄지는 경향이죠. 본디 경제학이란 게 "개인의 합리적인, 또 가장 효용(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이 높아지는 선택"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 말이 왜 나오나 했는데, 저자는 "마음의 부정성 편향"을 논증하며, 왜 우리가 어린아이, 오래 사용한 낡은 기계가 내 뜻대로 말을 안 들을(?) 때 더 마음씀을 강화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학문상 난제를 이처럼 일상의 쉬운 예와 결합해서 풀어 주는 게 이런 대중서의 과제이긴 합니다만, 이런 저자의 놀라운 언변과 연상 능력을 보며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기계(꼭 컴퓨터가 아니라도 됩니다)"의 마음이 무엇인지 무의식적으로나마 헤아리는 우리 자신(바보스럽죠)을 메타인지하게 됩니다. 적절한 예시의 항연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기억은 하는 "다마고치" 열풍이 또 빠질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라는 책(이 책은 "기억의 외주화"라는 개념을 씁니다)을 읽고 리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정통 심리학의 성과와 개념을 통해, 날이 갈수록 심화하는 기억의 미디어 의존 현상을 두고 "교류적 기억(transaction memory)" 같은 확립된 범주화를 더 빈도 높게 시도합니다. 그저 내 머리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두뇌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매체에 연상의 끈만 걸쳐 놓고,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할 때는 더듬어 찾아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연, 인터넷이나 웹이 생기기 전에도 인간은 이런 방법을 썼으며, 부부라든가 친밀한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도 이처럼 기억의 편린을 위탁합니다. "당신 말야. 그 ..... 뭐였더라?" "아 .... 말이지?" "맞아!" 아주 사이가 나쁜 실패한 부부 아니라면야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이죠. 친구 사이의 추억 공유도 이와 같기에 우리는 그 "기억"을 분담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친구를 자주 불러내어 감정적 협업을 이루는 겁니다. 혼자 추억에 잠기는 것과 효용이 차이날 뿐 아니라, 기억 자체가 나눠져 있기에 혼자서는 감흥에 온전히 젖을 수도 없죠.

선전이나 세뇌 과정에서 적으로 삼아야 할 인간을 객체화, 대상화할 때, 우선 "이 자는 감정이 없다. 자비심이나 동정 따위가 없고 우리와 공유하는 바가 전혀 없는 동물과도 같은 존재다" 같은 왜곡된 관점을 주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적에게 사정 없는 공감 결여(그러니, 반대로, 공감 결핍이란, 그런 왜곡을 하거나, 그런 거짓 선전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한 이의 특징이죠)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꼭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만도 아닙니다. 남을 공격하고 싶을 때 딱히 근거가 없으면, 자신의 동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멍청한 인간들도 워밍업이나 하듯 습관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기도 하죠. 대체로 아주 유치한 자충수에 가깝기 때문에 악행과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만. (생각없는 동물도 여튼 살처분은 당합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튜링 테스트, 고대인들이 일찍부터 발견해 낸 "마음, 아니무스", 전두엽 절제술 등 대중서에서 자주 접한 "마음의 전통적인 토픽"들을 다시, 다만 저자의 개성적이고 신선한 관점으로 재핵석된 채로, 만나게 됩니다. "마음"은 꼭 깨어 있고 명징한 의식하고만 연결되는 걸까요? 저자는 수면 중의 마음(?), 뉴런이 어느 정도 활발히 작동하는지는 서술하며 "마음"의 알쏭달쏭한 실체에 한 걸음 더 파고들어갑니다. p222에서도 다른 책들에서 종종 접하던 "최소 의식 상태" 등이 낀 스펙트럼 도식화가 보이는데,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저자의 설명이 워낙 유려하여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자폐아에 대해 우리가 그처럼 관심(물론 저자, 혹은 독자로서 인식적 관심이지 동정이나 공감은 아니겠습니다만....)을 쏟는 이유는, 이 환자, 수동자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역으로 우리 자신의 의식, 마음에 대해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첵 원제가 "마인드 클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진짜 "클럽" 이야기가 나와줘야겠는데, 이 책 7장에서는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레벨에서 어떤 다른 차원의 인식(혹은 왜곡)이 이뤄지는지, 혹은 개인의 능력을 떠나 다소는 신비의 영역에 접근하며 어떤 깨달음에도 이르게 되는지(상당수는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나, 저자의 관심은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규명 쪽입니다)에 대해 흥미진진한 논의가 펼쳐집니다. 마녀사냥, 음모론 등은 아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금만 신경을 집중하면 오류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가담하여 갖가지 광기를 연출하는데, 이런 사람들도 사석에서 만나서 말을 하면 "자신이 가담 안 한 음모론, 집단 광기"에 대해서는 태연히 비판을 한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대개는 참된 자존감이 크게 떨어지는 미숙한 인격이라, 집단 심리에 휘둘려 순간 자신의 에고가 크게 확장되는 양 착각을 하곤 그 맛을 못 잊어 어리석은 충동에 자꾸 빠지는 거죠. 저자는 "링겔만 효과" 등 다양한 개념화를 통해, 집단 속에 빠짐으로서 자신 개인의 (못나고 초라한) 마음을 잃고, 대신 난폭하면서도 거대한 "집단의 마음"을 거짓 이식하는 어리석음을 신랄히 분석합니다.

"신 헬멧은 가장 심오하고 가장 강렬한 종교적 경험이 어쩌면 뉴런의 과잉 자극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신 헬멧이란 마이클 퍼싱어라는 과학자가 고안한 장치로서, 종교적 법열이라는 게 일개 전기적 자극의 유도 결과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합니다(종교를 전혀 안 믿는 이에게도 전기적 조작을 통해 비슷한 환희를 느끼게 할 수 있음). 이 역시 내심으로는(속"마음"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꼭 종교가 아니라도 궁극의 경지 비슷한 게 있다고 기대를 걸어 온 이들에게는 참 맥빠지는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신의 마음이란 결국, 마음에의 침잠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려 발버둥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구를 가상으로 투영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모든 마음 중에, 신에 대한 물음은 아마도 가장 논란의 소지가 클 것이다.... (중략).... 그러나 결국은 두번째로 흥미로운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마음만큼 흥미로운 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연결다리로 삼고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인간 자신의 마음"을 웅대하게 정리합니다. 사후 정당화, 실행 의도, 의무 장치, 몰입 등 역시 전통적인 심리학 개념, 장치 등을 통해, 저자는 이처럼 심오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가진 건 지각뿐이다. (부처님의 말처럼) 사물은 그 보이는 것과 같지도 않고, 또 다르지도 않다."

심리학이 의심의 여지 없는 전통 과학의 본령이면서, 또 왜 우리에게 그토록 유용한 도구인기도 한지 잘 확인시켜 주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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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키퍼스 와이프 | My Reviews & etc 2017-10-2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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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주키퍼스 와이프

다이앤 애커먼 저/강혜정 역
나무옆의자 | 201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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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구약에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이기적인 생존만을 도모한 게 아니라, 식용에 직접 기여도 못 하는 각양각색의 동물들까지 모두 큰 배에 싣고 "종 다양성"이라도 수호하겠다는 양 사명감에 불타는 노아의 모습은 현대인에게까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우리가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를 넘어 "동물에게도 연대 의식을 가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근원적 애착과 존엄을 더욱 다지게 한다"는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폴란드에 본래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의 주인공 얀과 안토니나 부부는 유대 혈통은 아니었습니다. 부유하고 명성 높은 가문 출신이었고, 나이도 아직 젊었던 터라 조국 폴란드가 언제나 외세로부터 든든히 독립해 왔던 양 긍지와 애국심도 대단했죠. 이민족의 탱크와 폭격기가 강토를 짓밟고, "슈, 슈 하는 거친 치찰음과 낯선 말투, 어휘가 내가 살던 고장을 가득 메울 줄은" 전혀 짐작 못 했던, 외국의 침략은 역사 교과서에나 나왔던 일일 뿐 나와 내 이웃에게 실제로 닥칠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그저 선량하고 자신의 일상을 충실히만 살아 오던 이들이었습니다.

얀과 안토니나는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하며, 자신이 돌보던 동물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베풀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일생을 두고 가꾸던 동물원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국제법이란 깡그리 무시하고 폴란드의 국경을 무단히 넘음으로써 처참히 망가졌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동물들 역시, 여태 평화로이 거주하던 터전이 철저히 파괴되고, 생전 겪어 보지 못하던 혼란과 결핍, 굶주림에 시달리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전쟁통에 피난 행렬을 떠나는 난민들에 대해서는 무심히 눈길을 주는 데에 그치지만(지금도 진행형의 현실 아닙니까? 아프리카 각국이나 시리아 같은 데서요), 난데없이 폭격을 받은 동물원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황 상태에 빠진 동물들을 놓고는 그 상상 만으로도 측은함이 솟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을 베푸는 듯하면서, 경멸감과 쾌감까지 드러나며 빈곤과 전쟁의 참상을 비웃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나치나 공산주의 잔당처럼이나 비뚤어지고 타락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자기 감정을 다룰 때는 추한 눈물을 지어가며 자기 연민에 빠지죠. 싸이코패스보다 몇 배는 더 저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얀과 안토니나의 조국은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히틀러는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명시적으로 "폴란드의 문화, 인종, 관습, 이익 등 모든 것을 철저히, 서서히 말살하라."고 명령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자기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부수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설령 그랬다 해도 용서가 안 되지만), "레벤스라움"을 마련하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선 제노사이드를 획책했다니 이런 나쁜 놈이 또 어디 있습니까.

저자는 다분히 풍자적으로, 히틀러가 노린 건 "사람의 레벤스라움"뿐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의 미친 순혈주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종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었는데, 이런 걸 보면 무지하고 비뚤어진 인간의 광신이, 어느 정도까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보르수니오!" 가족 같던 어린 것이 겁에 질려 문 앞에서 애원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팠다.(p74:1) 가업을 동물원 경영으로 삼고 사람보다 더 자주, 더 속 깊게, 동물들과 소통했을 자빈스키 부부가 꼭 아니라도, 우리 독자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고 이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생존을 도모했을 동물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죠. 상상만으로도 너무 불쌍합니다. 혹시 동물들도 궁지에 몰려 다 죽어가는 인간을 보면, 자신의 생존에 어느 정도 여유가 확보된 후라면,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그런 사정을 주판알 굴려 가며 계산한 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불쌍하니까 도와 주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합니다. 자, 그리고, 이제 다시 히틀러가, 유대인, 집시, 불구자 등에게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십시다.

루츠 헤크는 이 논픽션 저작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띤 인물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생각할 여지도 베풀 필요 없는, 또하나의 극악무도한 나치"로 여겨도 무방합니다. 저자도, 또 자빈스키 부부도, 그 판단을 크게 다르지 않게 내립니다. 여튼 이 논픽션은 꽤 공정하기에, 그의 외견상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처신(속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까지도 상세히, 또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아이히만이나 히믈러, 괴링 같은 자들도 취향은 꽤 고상하고, 반려동물을 특히나 아끼고 사랑하는 면모를 보인 이들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헤크란 자의 다분히 모순적인 개성은 그리 놀랍다거나 충격적인 것도 아닙니다. (숨은 동기로는, 이 서평 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만 동물의 레벤스라움"을 마련할 작정이었다는 걸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자의 연구는 참으로 폭 넓어서, 식민주의자들의 공통 습성 중 하나가 새로이 식민한 지역에 기존 거주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식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날카롭게 짚습니다) 자빈스키 부부는 유대인도 아니고, 해당 지역에서 오랜 시간 기반을 다지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계급이기에, 헤크는 "같은 중산 계급의 동질감"으로 이들을 정중하게 대우합니다. 일단은요.

민간어원설에 불과하겠지만 폴란드라는 나라 이름이 히브리어로 "포 린", 즉 여기서 쉬라(이 책 p22 중간쯤)는 뜻과 통해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폴란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히틀러에게는 가뜩이나, 독일인의 거주 공간을 침훼하고 드는 슬라브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에, 유대인들까지 바글바글하니 얼마나 못된 침략 야욕을 합리화하기에 좋은 여건이었겠습니까.

"지엔 도브리!" 폴란드는 제법 떨어진 프랑스의 문물 영향도 폭 넓게 받았지만(유럽에서 안 그랬던 국가가 없긴 하지만요),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민족이기에 러시아 문화와 닮은 점이 꽤나 많습니다. 이 책 저자는 "독일"에 대해 그처럼이나 오랜 기간 동안 침략당하고, 점령되고, 무시, 능멸당한 역사를 언급합니다만, 사실 폴란드를 직접적으로, 더 자주, 더 길게 괴롭힌 건 당연히 러시아입니다. 저 인삿말도, "도브리 지엔(디엔)!"이란 러시아어 인사와 어순만 차이 날 뿐 거의 같은 구성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레지스탕스라고 하면 비시 정부와 나치 직접 통치 지역에서의 프랑스에서 이뤄진 저항 활동만 압니다. 그러나 이 책은, 폴란드인들이 나치에게 야만적인 기습 침략을 당한 후 생활 터전이 초토화한 후에도, 얼마나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사보타지, 소규모 공격, 정보망 가동, 위조 증명서 발급 등으로 후방에서 나치를 괴롭혔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가 이토록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줄 소상히 확인하는 것도 책을 읽는 큰 재미와 보람 중 하나였습니다. 세계 역사가 이런 줄기찬 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 온 듯하고요. 폴란드는 1980년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의 압제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저항을 벌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아니었다면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일은 없었거나, 훨씬 늦게 일어났을 겁니다. 2차 대전사를 읽다 보면 폴란드 망명 정부(김광균 시인의 <추일 서정> 중 어느 구절 때문에 친숙하기도 하죠)의 분투, 영국군에 조력하며 펼친 활약이 지나치게 폄하, 푸대접 받는 대목에서 분개하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사항들이 더 단단한 맥락을 갖추게도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선 지금도 바그너의 곡들을 공개장소에서 연주하는 게 금기시된다고 합니다. 사실 독일은 인류 문명 창달에 기여한 바가 너무도 큰, 뚜렷한 문화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부부가 급박한 상황에서 "독일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p361 중간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독일어로는 슈텐트헨. 도이치넘버 889)"를 연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아주 고품격의 클래식이라기보단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지) 민요처럼 궁상맞은 느낌도 없지 않은데, 여튼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 예술 작품도 이처럼 후손들의 실책과 과오에 따라 흉측한 빛깔이 덧씌워지는 건 참 안타깝죠.

자빈스키 부부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료는 게슈타포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두 열강의 싸움판 가운데에 끼어 피해를 입는가 하면, 마침내 소련군의 진주에 의해 이뤄진 바르샤바 해방은 진정한 해방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자세히 서술된 대로,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너무도 낯설게 들리는 이방의 어휘, 언어를 구사하며 나치 군의 행진에 뒤이어 "살 터전(레벤스라움)"을 찾아 몰려와선, 이곳저곳에서 식민지를 일구고 살려 들었습니다. 강점기에 일인들이 보였던 행태와 비슷하죠. 이러던 게, 소련의 진주와 함께 썰물처럼 휩쓸려 나가고, 구 동프로이센이나 오데르 나이세 동안(東岸) 같은, 전통적인 독일인 거주지 일부에서조차 독일인들이 대거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땅은 폴란드에 고스란히 귀속되었으나, 소련은 대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집어삼켰는데, 소련은 폴란드의 민족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탄압했습니다.

"감히 전쟁(2차 대전 발발, 나치 침략) 전의 독립을 찬양하거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봉기에 참여하여 싸웠던 이들을 영웅시하는 행위는, 반동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위험시되었다(p391에서 재인용)..." 자신의 의지와 주견을 자유롭게 펴면서 살 수 없는 어떠한 개인, 집단, 민족도, 마치 야생의 본능을 억압당하며 동물원에 갇혀 박제된 생을 연명하는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이 책은 예외적이고 온정적이며 정의로웠던 개인들의 실제 삶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왜 우리는 자빈스키 부부의 사연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걸까요? 억압자 소련과 사실상 타협, 공모하여 약소 민족의 명예와 권익을 무시한 미국의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그리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과 만행 때문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처지이기에, 이런 슬픈 역사를 접하고 얻는 감회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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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들 | My Reviews & etc 2017-10-27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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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예쁜 여자들

카린 슬로터 저/전행선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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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아줌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빅 리틀 라이즈)>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조금만 말을 꺼내도 내용 누설이 될 것 같아 리뷰 쓰기가 조심스럽지만, 여튼 뒤로 가면 갈수록 추악하고도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고, 사건의 스케일도 엄청 커지는, 창작에 공을 많이 들인 뛰어난 소설 같았습니다. 재미있기는 한데 소재가 꽤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줌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이야기 바로 직전에 굉장히 충격적인 인트로가 깔리긴 합니다. 갓 보호관찰에서 풀려난 멀쩡한 아주머니, 아직도 웬만한 젊은 남성에게 끈적한 시선을 충분히 모을 만한 미모를 간직한 분이, 바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술 두 잔 마신 후 같이 귀가합니다. 바람직하죠. 바에서 배우자를 만나는 게, 만약 배경이 한국이라면 그 빈도가 얼마나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집에 들어갈 게 아니라 으슥한 곳에서 간만에 기분 좀 내어 보자고 합의까지 보았다면? 역시 권태 때문에 서로의 체취만 멀리서 맡아도 진저리치는 실패한 부부보다야 훨씬 낫습니다. 나무랄 건 아닌데, 조심은 했어야 옳았습니다.

"조심을 안 한 피해자가 잘못이지!" 이게 아니라, 괜찮은 사람들이 공연히 쓰레기 같은 범죄자들의 밥이 된 결과가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지요.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고 드는 후진적인 풍토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일각에서 살아는 있나 봅니다. 조금 뒤로 더 넘어간 후리디아가 동네 아는 분과 테니스 치다가 격분하여 반 고의로 부상을 입힌 에피소드에서 지나가듯 등장합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피해자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합니다)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기에, 그런 반응이 나왔을 법도 합니다.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리디아에게도 쉬이 동감을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너무 상처가 많은 분이고, 그런 못된 일을 겪기 전부터도 이미 그녀는 성격이 좀 불안정한 타입이었으며, 이후의 대처 방식도 그리 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끔찍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자기 파괴가 답이 될 수는 없죠.

"조심을 안 한 게 잘못이야!"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는 정말 이런 말을 들어야 할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남편 폴 스콧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렇게나 똑똑하고, 매사에 사려 깊은(다 읽고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세심히 분위기를 세팅해 가는 작가의 너무도 노련한 솜씨 때문에 이 정도는 독자도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하필 그런 무모(미국은 치안이 불안하잖아요)한 충동에 이끌렸을까요? 평소의 그 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무장 강도, 성폭행범의 공격에 대응하여 그는 용감하게, 아내를 지키려 위험을 무릅쓰고, 놈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고 "죽습니다".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세팅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래도 독자의 마음이 덜 불편(어차피 픽션이니까요)한 결단을 취한 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거는 정말 중간까지 읽어가야 아는 건데) 폴은 그런 행동이 어울리는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위험도 잘 피해다니고(분위기나 기분은 다른 선택을 통해서도 낼 수 있죠), 혹 판단착오로 위험에 빠졌다 해도 자기 목숨을 걸고 아내를 구한다.... 폴에게는 안 어울리죠. 물론 우리는 폴이 진짜 그런 사람(용기 있는 순정파)이길, 혹은 노력을 통해 그런 사람으로 바뀌길 기대하며 책을 내처 읽어 나가게 되지만(이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입니다.

"폴!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사람 타고난 모양새란 게 그리 쉽게 휙휙 편할 대로 고쳐지는 게 아니죠. 이런 분들, 더 어려운 과업도 척척 해내는 능력자(ㅠㅠ)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진짜 숙제는 내내 피해 다닙니다. 그래서 정상인 범주에 못 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 능숙히 조종하면서 왜 자신은 못 바꿉니까? 사이코패스가 비난 받아야 할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거지, 무슨 머리가 좋다느니 매력이 많다느니 이런 게 잘못이 아니죠. 많은 이들은 그저 시샘 때문에 이들을 비난할 뿐, 남을 속이고 중상모략해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못된 심뽀는 거의 공유하다시피합니다. 매력도 없고 무능하면서도 멘탈만큼은 똑같이 타락한 건데, 비난을 할 자격이 없죠.

클레어는 아름다운 여인이고, 내내 허술한 수컷들이 자신의 매력에 홀려 빌빌대는 꼴을 어쩌면 다분히 가학적으로 즐기며 살아왔다고나 할, 그 나름 축복받은 인생이었습니다만, 역시 이기적일 뿐 아니라, 모든 동기가 말끔한 양심에서 우러나오지는 않는, 쉽게 동일시를 이루기는 좀 어려운 타입입니다. 그녀는 "죽은" 남편 폴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속였고, 내내 "훔쳐 보고" 있었으며,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재미로 그토록 오랜 연극을 벌였다는 사실(이라고 일단 그녀는 판단합니다)에 치를 떨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어디로 도피하건 인터폴의 추적도 받을 만한(연방 형법 차원의 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고) 끔찍한 일에 연루(적어도)되었음도 눈치 채게 됩니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와 야동 숨기는 방법이 저런 게 다 있구나. 흠, 통화 추적 안 당하려면 쌧컴 쓰면 된다는 거지?" 같은 나쁜 교훈은 습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별 쓸모도 없고, 이미 그 정도는 파훼법이 다 알려져 있습니다. 괜히 주목이나 끌죠.

클레어와 그 언니 리디아가 그리 건강한 내면이 아니라는 점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이것도 그녀들의 어린 시절, 끔찍한 사건이 터져 집안 분위기가 줄곧 정상이 아니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를 해 줘야 합니다. 이런 논리를 잘못 확장하면, "상처 있는 사람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일종의 낙인 이론으로까지 부당한 일반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여튼 지난 18년 동안은 몰라도, 리디아나 클레어나 지금 이 대단히 불행하고 불쾌하며 당혹스러운 비극을 접하고서는, 매우 성숙한 처신을 하려 애쓰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작가는 분명히,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당신 같으면 못난(여러 이유에서) 언니를 그 오랜 불화의 시간을 딛고 화해하려 들겠는가?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온갖 추악한 진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저 믿고 싶은 대로 편하고 믿고 말지 이제와서 불편한 진상을 수용, 소화할 자신이 생기겠는가? 차라리 루저인 언니를 마음대로 단죄하고 왜곡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클레어는 정말 용감합니다. 또, 그런 클레어를 바로 보고는 이제부터 다시 우애를 회복하여 감싸려 드는 리디아도 일단은 높이 평가를 해 줘야 하겠습니다(그러나 좀 더 읽어 보시고요). 소설은 숨겨진 미스테리의 진상이 하나 둘 밝혀지는 과정도 빼어나게 잘 쓰였습니다만,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심리, 미칠 것 같은 갈등을 세심히, 적나라하게 들춰 내어 독자 앞에 드러내는 기법도 빼어났습니다. 어리석은 타입은 마음이 불편하면 무작정 남탓만 하고 들지,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곪은 상처를 들여다 볼 생각을 않죠. 죄를 내가 뒤집어쓰라는 게 아니라, 남이든 나든 원인 소재를 정확히 알고 치료를 해야 "자신이 앞으로 안 아플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취학전 아동처럼 무작정 눈에 먼저 띄는 타인에게 원인을 전가하며 큰 소리로 빽빽 우기는 이들을 보면, 하등 동물을 보는 양 딱해질 뿐입니다.

이 소설이 특히 재미있는 건("재미"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긴 합니다만), 모든 현재의 비극 그 배후를 캐고 들어가면 반드시 부모 대(代)에 그 원인이 싹트고 있다는 시사입니다. 내용 누설 우려 때문에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폴과 클레어 커플은 알고 보니 "부모 대에서부터" 달갑지 않은 연이 한 자락 얽혀 있더군요. 서브보컬처럼 간헐적으로 다른 톤을 빌려 들려 오는 "어느 분"의 목소리는, 계속 들어 보니 그 청자가 "그의 다른 딸"이었습니다. 이건 이유가 있더군요. 지척에서 달콤한 대화를 빙자하여 접근하고는, 바디 스내처처럼 상대의 내면으로부터 정보를 모조리 빼가는 무서운 인간 스캐너, 그 자의 본명이 후반부에 밝혀지고, 왜 하필 그들 부자(부자였다니!)가 다른 "부녀"를 주시하게(관음하게) 되었는지도 서서히 드러납니다.

[아래 내용은 읽지 마십시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중반쯤부터 낌새를 챘을 겁니다. 범죄의 징후가 보이면 사소한 가능성부터 일일이 의심하고 들어야 마땅한 경찰서장이, 왜 클레어에게만은 과도한 안심을 시키며(그 나름 둘러댄 근거가 치밀하기는 했습니다. 결국 그게 가짜였지만) 덩달아 독자에게까지 사태의 때이른 진정을 시도한 걸까요? 또, 그의 죽음이 페이크였다면 그런 연극의 공권력의 개입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시민의 공적 사망이 뒤집혀지는 전개라면, 작가가 바보거나 작품의 스케일이 엄청 커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 작가는 엄청 똑똑한 분이라서, 소설은 정말 장난 아니게 파장을 불려 가며 독자를 빠져들게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진행을 그리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만 이 스릴러가 워낙 치밀한 준비를 거쳐 이뤄진 작업이라 흠을 잡기도 힘들더군요)

소설 중에도 두어 번 언급되지만(지하실부터 해서) 토머스 해리스의 전설적 장르소설 <양들의 침묵>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큽니다. 특히 전지전능하다 할만큼 객체의 심리를 훤히 꿰고 천리 밖에서 조절하는, 지적이고 섬세한 정신병자 한니발 렉터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실감 나는 캐릭터(들)의 재현은 압권입니다. 뿐 아니라 이 소설은 "피해자" 스탠스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실감과 박력, 독자적인 선명한 위상을 배분해 두어, 장르소설의 진화가 능력 있는 여성 작가의 손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잘 실증한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진짜 취향은 아닌데, 완성도가 높고 재미가 풍부하단 건 분명히 확인해 줄 수 있습니다. 어설픈 피해의식에 가득한 싸이코패스물을 그간 너무 자주 봐 왔던 터라 이 장점은 더 두드러집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리뷰에서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내용 누설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이고 미숙한 민폐가 참 꼴불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까 싶어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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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 장한식 | My Reviews & etc 2017-10-2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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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장한식 저
산수야 | 2015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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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 <남한산성>(김훈 선생 원작)이 개봉 중인데 현재 시국과 관련해서 묘한 시사점을 주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여튼 이 병란의 주된 원흉은 청 태종 홍타이지인데, 임란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달리 이 사람은 원망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못난 지도층을 잘 혼내 주었다며 오히려 칭송까지 듣습니다. 사실 피해를 본 건 사대부 유림, 친명 사대 세력, 못난 군주라기보다, 무자비한 팔기군의 군사 원정 와중에 목숨, 재산, 정조, 자유를 잃은 일반 백성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튼 이웃 나라 사이에 이해의 충돌, 알력이 있으면 건전한 외교 수단을 통해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민간인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 험한 일을 겪어야 합니까? 침략자의 만행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고, 인조가 겪은 개인적 치욕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그럴 이유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치른 시련이 부당하다는점에서, 저들 만주족 침략자를 칭송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같은 뿌리를 지닌 동족 운운은 이 국면에서 가당치도 않고(왜 같은 민족의 강역을 침략해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나요?) 중립 외교라는 미명 하에 결국은 섬기는 대상만을 바꿀 뿐이라면 한심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문제 많았던 서인 정권을 교체하지도 않은 채 그들은 떠났지요.

여튼 이런 사정을 떠나, 동아시아사 전체를 놓고 개관하자면, 누르하치와 그 직계 후손, 혹은 건주위 지도층의 수완은 볼 만한 게 많았습니다. 몽골족이 그저 무식한 용맹과 잔인함으로 세계를 손 안에 넣었다가, 과연 마상에선 천하를 못 다스린다는 격언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는 듯, 세 대륙을 호령했던 기세가 무색하게 근 하루아침에 제국이 붕괴한 내력과 대조하면, 이 여진족의 수완은 매우 세련되고도 경이로운 면이 있습니다. 군사적 정복보다는 효과적인 정치 수완이 훨씬 많은 이익을 얻어다 준다는 건 거의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홍타이지를 비롯한 신흥 건주위 여진 세력이 아무리 치밀하고 건실한 정책으로 판도를 넓혀 나간다 해도, 다른 여진 부족이 그 리더십에 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기반을 유지하겠으며, 여전히 황금씨족의 긍지를 높이 간직한 저 먼 몽골 고원의 다른 부족이, 여진의 권위(그런 게 있을 리도 없죠)를 부인하면 대륙을 넘보기는 고사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침략에 시달리다 명 제국에 다시 복속되기나 일쑤였을 겁니다. 이게 사실은 가망이 거의 없다시피한 과업이었는데, 패기만 가득할 뿐 그 부친과 같은 신중함, 책략, 행정 수완이 없을 법한 홍타이지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이처럼 몽골 같은 기질 드센 이들조차 큰 충돌 없이 후금의 판도 안에 들어왔는데(대등한 연합에 가깝습니다만 여튼 주도권은 여진의 팔기가 장악함), 농경 문화권이자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은 이처럼 강력한 실체를 지닌 여진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죠. 그게 자주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명 제국의 권위에 대한 복속 관성에 불과했고, 상대의 실력과 의도를 살펴 가며 대응하는 게 아니라 눈감고 휘두르는 주먹, 아우성에 불과했으니, 사백 년 전 몽골의 발흥보다 훨씬 야무지고 장기 비전도 갖춘 이들의 형세에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홍타이시가 인조에게 보낸 서한을 읽어 보면, 도대체가 힘도 없는 주제에 의롭지도, 영리하지도 못했던 집권층의 추태에 창피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보다 오백 년 전 중원 일부를 장악한 바 있던 금나라도, 그 개조 아골타가 대단히 신중한 위인이었던 반면 그 후손 중에 정신이상에 가까웠던 난폭자가 많아 체제가 건전히 작동 못했던 역사가 있죠. 후금, 곧 청나라는 그렇지도 않아서, 어떻게 된 게 후대로 내려갈수록 더 현명한 통치자가 속출합니다. 획득형질도 과연 유전이 되기라도 하는 것인지(ㅎㅎ) 놀라움을 금할 수 없고,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우며 훨씬 질 높은 자질을 요구한다는 점 다시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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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 신동준 | My Reviews & etc 2017-10-2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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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신동준 저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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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중국 근대사의 거인 증국번의 생을 다룬 도서를 읽었습니다만 이 격동기를 산 여러 뛰어난 인물들을 한 권에 묶어 소개한 책이 혹시 없을까 해서 찾아보니 마침 신동준 박사님이 쓴 대중서가 한 권 보이더군요. 책에는 여덟 명의 인물이 다뤄졌는데,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 얽혀들거나 치열하게 대립한 국면도 선명하기 때문에 책 한 권에 과연 다 커버될 만하다 싶었습니다. 새삼 책 표지로 돌아가 보니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가 제목입니다. 이 시기는 과연 "인물들의 삶"이 역사 전체로 그대로 수놓아지고 전사, 마이그레이션된 시기가 아닐까, 인물로 읽어야 제대로 읽혀지는 시기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상인들의 파렴치한 물품을 모아 소각한, 강직한 청백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세를 생각 않고 무모한 결단,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아 소탐대실하는 "그릇 작은 원칙주의자"를 비판도 하는데, 임칙서는 오히려 저 사건 때문에 그 원대한 비전과 현명한 통찰력, 박학다식하고 유연한 지성, 인품이 과소평가된 경우입니다. 책은 해당 사건에 대해, 그가 다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한 후, 피치 못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며, 참으로 매력적인 그의 자질과 개성에 대해 논급합니다. 만주족이 퇴조하고 한족 정통 지식인이 부상한 건 그의 현명한 처신이 유발한 결과였습니다. 구한말 이 땅에도 큰 반향을 부른 <해국도지>의 저자 위원도 그의 후배이며, 공양학의 태두 캉유웨이의 제자입니다.

증국번은 며칠 전 리뷰(와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된 주제 인물이고요. 신동준 저자께서는 오늘날 공사("회사"의 중국어)의 형태가, 이 증국번의 관독상판과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증국번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에 대해서는 감탄하나, 물경 백 오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런 반관반민 형태가 지배적인 중국의 신뢰 부재, 자율성 결여의 풍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증국번이 엄청난 지주 가문에서 나고 성장한 것과 달리, 좌종당은 아주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인생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 서세동점에 대항해 유일하게 국위 선양에 성공한 게 이 좌종당의 군사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죠. 야쿱 벡의 위구르 배후에는 특히 러시아가 도사렸는데, 여튼 이런 간접 대결에서 청이 국가 해체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영토의 판도가 유지되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좌종당과 일합을 겨룬 야쿱 벡이 보다 유연한 자세로 동족 피지배층(동 투르키스탄 인들)을 대했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단합을 이뤄, 오늘날처럼 핍박 받는 소수 민족의 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과분의 위기라는 건 마치 오이가 나눠지듯 땅이 쪼개져 나라가 망하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풍자 카툰이 있는데 아래 이미지를 참조하십시오.


이홍장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세계관을 가졌고, 위안스카이 등을 부리며 조선의 내정에도 깊숙이 간섭한 자입니다만, 여튼 중국의 위인은 일단 그의 고국인 중국의 이해를 먼저 염두에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죠. 저자께서는 "99년 조차" 조항을 두고 언젠가는 후손들이 땅을 찾으리라는 원대한 숙고의 산물이라고 평가하십니다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영국이 한심한 국위 쇠퇴를 겪지 않았다면, 또 야무진 등소평이 일처리를 그리 해내지 않았다면, 99년은 그저 현상으로 굳어 영원히 외국에 귀속되었을 겁니다. 또, 이홍장이 설령 영구 할양을 싸인해 줬다 해도, 힘을 갖춘 중국이 그걸 묵과하고 있었겠습니까? 다른 조약에 대해서도, 중국은 "이건 제국주의 시절에나 효력을 지니는 불평등조약"이라며 깡그리 무시합니다. 이홍장이 뭘 생각했건 그 은덕을 입어서 오늘의 재귀속이 이뤄진 건 전혀 아닙니다.

캉유웨이는 공양학파의 태두이며, <춘추공양전>에의 깊은 천착을 통해 중국형 부강론을 제기한 석학입니다. 논자에 따라선 출세지향적 언동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서제는 그와 연합하여 서태후와 맞서려 했으나, 황제나 재상 모두 이 노회한 여걸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의 기량들이었죠. 캉유웨이는 조선에서도 그의 문명이 크게 알려진 정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당대의 명사였으나, 역시 한계도 뚜렷한 인물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캉유웨이의 제자(대략 17년 정도 나이 차가 나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스승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현실 참여나 경세의 수단도 더 노련했고요. 요즘 한국의 특정 정당 몇 군데에서 "자강론"이 자주 나오는데, 자강불식의 도그마를 당대에 크게 퍼뜨린 이가 바로 양계초입니다. 캉유웨이와 달리 민족주의 성향도 두드러졌죠. 그가 말하는 "다변"은 말 많다는 多辯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한 취지입니다.

손문은 위안 스카이보다 몇 살 아래인데, 어린 시절부터 연줄을 잘 잡아 마른자리만 골라 앉은 그와 평생의 숙적으로 대립했죠.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지만 어디까지나 미완의 혁명이었는데, 군벌 실력자 위안 스카이의 무력에 기대었기 때문입니다. 허울뿐인 공화정은 끝내 무너지고 위안 스카이는 분별도 없이 황제정을 다시 부활하는데(이른바 복벽), 마치 후한말에 스스로 천자를 칭한 원술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성씨도 같고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생전에 뭔가 성취를 못 보고 다 실패로 끝난 도전들이었습니다. 엉뚱하게도, 학문적 각성이나 집안 배경도 부족하며 뭔가 인성도 덜 갖춰진 듯한 마오가 결국 천하통일- 외세 배격을 이뤄냈는데, 이는 세계 정세가 그리 돌아가다 우연히 귀착된 지점이 아닐까 봅니다. 인물로 역사를 보는 프레임을 만들지, 아니면 구조적 팩터 분석을 통해 인물을 재규정해야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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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서 | My Reviews & etc 2017-10-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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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저/임미경 역
밝은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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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아주 길고 긴 만큼 사연이 풍성하기도 하지만 두 줄로 요약하면 이럴 것 같습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결국 주인공은 나야 나"

요즘 소설은 작위적으로 불행한 주인공을 만들어 내어, 삶이 순탄치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진통제나 투여하듯 불건전한 처방을 내리는 수가 많습니다. 반면, 우리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그 발랄한 재주의 일면을 이미 맛 본 것처럼, 스위스인 조엘 디케르는 소설의 본령, 본연의 사명에 매우 충실한 작가입니다. 전하는 말들이 밝고 따스하며, 그렇다고 억지로 밝아지려고 발버둥치지 않는, 유쾌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사연을 직조해 냅니다. 사연에 사연이 꼬리를 무는 것도 어쩌면 전통적인 이야기꾼들이 청중을 앞에 두고, 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며 그 예전부터 의존하던 방식에 가깝지요. 주인공들 역시, 세상을 향해 막무가내로 안기려 들거나, 반대로 투쟁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정은 인정대로 받고 싶되(솔직히 좀 속물이 아닐까 싶게), 아니다 싶을 때는 무모한 싸움을 서슴없이 걸죠. 다만 그 과정에 균형감각과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 합니다. 재능이 뛰어나되 이 순간적인 절제, 센스가 결여된 이들은, 바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내 신중하고 관계 속에서의 현명함을 발휘하며 살아 온 이가, 단 한 번 한순간의 실수(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로 모든 것을 잃고 말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가 반 팔자"라고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법칙의 예외를 만드는 생이 너무도 많죠. 반면 성장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거의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고 들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성장기를 불행하게 보냈거나, 불건전한 영향만 가득 받고 자란 사람은 커서도 결국 실패자가 되거나, 망상만 가득한 채 허언과 허세로 가득한 연극(그 연극이 즐겁기나 하면 좋을 텐데) 같은 삶을 살게 되죠. 이런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극과 극입니다. 한순간 악몽("난 모든 관계로부터 버림 받았구나!")을 맞았다가, 자기 의지가 아닌 우연한 요행으로 "가짜 목표"가 손에 들어왔으니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얼마 안 가 자기 생의 실체가 눈 앞에 들어 오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현실 도피가 답이 될 수는 없는데, 여튼 당장 감정의 지옥을 면했으니 억지로 기분을 띄우고 돌아다닙니다. 과거로부터 뭔가 배우는 바가 있으면 그 인생이 이처럼 단순반복의 땜질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주인공 마커스("마키") 골드먼은 현재 베스트셀러 한 편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띄워 놓아, 아직 젊은 나이에 모두의 선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은 7년 전에(11년 후에) 벌어졌(진)다."란 문장이 하도 반복되기에, 이 사람 저 <미저리> 같은 데 나오는 중노년 은거 작가라도 되나 싶었지만 아직 꽤나 젊기에, 옆집에 사는 진짜 은퇴 노인(법학 교수)가 가끔 놀러 와서 체스도 두고 시비도 거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죠(거의 아들뻘이라서 무람없이 대하는 듯한....).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안 해도 젊다는 게 눈치채어지는 대목은, 여자 마음을 너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웃 노인 레오 교수가 혀를 찰 정도죠. 우리 독자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마커스는 이미 셀럽의 위상이라는 겁니다. 누구하고 썸을 타도 그 상대까지 다 셀럽이며, 웃기는 건 세상이 좁다고 어렸을 적 아주 진한 감정을 공유하기까지 했다네요. (나중에 나오지만 아는 누나 겸 과외선생 겸 동아리 겸 이웃 겸 좀 복잡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지만 우리는 1부(총 4부로 나뉘어졌습니다)가 다 끝나갈 때까지, 이 마키를 그저 루저인 줄 압니다. 과거를 회고하며 내내 징징거리고, 심지어 현재에도, 사춘기 시절부터 가장 아끼던 여인을 "막강한 위너"에게 선점당했으며, 대놓고 퇴짜 맞고 푸대접 받는 등 아주 깝깝한 인생이나 된 듯 우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나중에 뒤통수 맞지 마시고(근데 이런 말이 스포일러일까요? 좀 우려되는군요), 마키의 신분과 처지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어떻다고, 과민성 대장증상이 갑자기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눈높이를 잔뜩 낮춘 채, 1)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시샘하지 말고, 그렇다고 2) 터무니없는 헛물을 켜지도 말고, 3) 저처럼 나아져야지 하는 자극만 받고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1)과 2)가 압도적으로 흔할망정, 3)의 예는 좀처럼 보기 드물 겁니다. 1부 내내 어린 소년, 영 애덜트 시기를 보내는 마키가 3)의 자세를 유지하는지는 우리 독자로서 알 수 없습니다. 1)과 2)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태한 줄타기를 하는 듯만 보이는데, 사실 우리는 1인칭 관찰자로 머무는 마키한테 시선도 안 줍니다. 무대를 압도하는 주인공은 힐렐과 우디이기 때문입니다.

힐렐은 그 부친(마키의 백부) 사울 골드만(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천재소년입니다. 우디는 그 힐렐과 서로 긴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골드만 씨의 "또다른 아들"이며, 운동신경이 빼어나고 모든 여성이 선망할 만한 건장한 체구를 지닌 위너입니다. 이런 멋진 아들(들)을 둔 골드만 씨 곁에는, 최고 평판을 얻은 의사인 아니타 여사가 그 아내로 머물며, 서로 순도 높은 교감과 사랑(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을 나눕니다. 골드만 씨는 의료기기 판매업으로 큰 돈을 번 부친 밑에서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으며, 현재는 백전백승의 민완 변호사입니다. 이건 뭐 말도 안되는 사기 인생이죠. 적어도 우리에게 이 얘기를 들려 주는 마키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마키는 이 가족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만 바라보는, 별 재능도 매력도 없고(적어도 스스로의 확신이 매우 부족한) 그저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평범한 아이겠고 말이죠.

비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성장기 내내 화려한 경력으로 자신의 십대를 장식하거나, 반대로 그 빼어난 재능이 타인(어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며 자초한 큰 시련에 부딪힙니다. 힣렐은 여튼 머리가 좋고 복잡한 사태를 간명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으며, 언변이 무척 뛰어납니다. 반면, 체구가 매우 왜소하고 운동신경이 둔합니다. 이 힐렐을 미러링하듯 비슷한 약점을 가진 아이가 이웃 패트릭 씨의 아들 스콧인데, 다만 스콧은 힐렐처럼 빼어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난치병까지 앓고 있습니다. 패트릭 씨는 사울 골드먼 씨보다 더 부유하면서, 외모까지 빼어난 상류층 신사입니다. 아버지의 좋은 점만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는지, 스콧의 누나인 알렉산드라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인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위에서 다섯번째 문단 끝, 마키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누나, 여친이며, 나중에 유명 가수가 되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셀럽이 바로 이 알렉산드라입니다)

우디는 머리가 단순하긴 하지만,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흔히 미국에서 십대시절에는 이런 애가 모두의 스타로 군림하지만, 우디는 주위에서 띄운다고 본분을 잊는 허황된 성품이 전혀 아닙니다. 아주 착하고 의리로 뭉쳤지만, 감정에 이끌려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만다는 게 흠입니다. 하긴 우리 중 누구라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겠습니다까만.... 아, 우디에게는 또 하나 약점이,.. 큰 상처가 있습니다. 순탄치 않은 과거 때문이었는데, 그건 책을 읽으면서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머리가 아주 좋거나, 혹은 만능 스포츠맨이거나, 이 모두가 자라나는 청소년에겐 나도 저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유형들입니다. 이런 압도적인 재능의 자력, 자장 속에서, (우리가 까맣게 잊은) 주인공 마키가 영 엇나가거나 의기소침한 아이로 자라나지나 않아야 할 텐데요. 마키는 소설 속에서 줄곧 이들을 우상화합니다. 우리 독자가 살짝은 피곤해질 만큼요. 마키는 물론 동등한 신분의 "골드만 갱단" 멤버입니다만, 간혹은 멤버십을 잃었는지 다른 멤버(예를 들면 알렉산드라나 스콧)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겉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 없는 마키를, 코어 멤버(우디와 힐렐)은 결코 잊을 수 없는(혈연 이전에) 뭔가의 매력 때문에 붙들어 두고 싶었는지, 떨어질 만하다가도 결국은 도로 결합을 이룹니다. 마키 버전의 설명만 듣는 우리들은 이 점이 사실 좀 납득 안 되기도 합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마키의 시선으로 힐렐은 내내 천재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그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객관적 팩트를 날카롭게 체크한 독자들은 좀 아리송한 대목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입 전형에 대해 "... 과거의 지식을 열심히 토해 놓기만 하는 정신을,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정신 앞에 둔다는 건 너무도 어리석지." 이런 말은, 한번 듣고 보기만 하면 모든 걸 이해한다는 천재의 입에서 나오기에 다분히 자기합리화성 발언(일 뿐 아니라 열등생들의 말버릇)입니다. 어차피 우수한 두뇌는 사회에서 뭘 규칙으로 놓아도 승자가 되기에(창의력이든 지식이든), 저런 불평을 할 필요가 없죠. 창의력이고 지식이고 모든 게 빵점이면서 남의 생각과 말만 베끼는 실직자도 아니고 말이죠. 힐렐은 또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떤 불편한 결과가 닥친다는 걸 예상 할 만큼 머리가 좋지는 못한가 봅니다. 그 중학교 교장 선생 헤닝스 씨(이 사람은 냉혹하고 무정한 게 아니라, 매사에 터무니없이 판에 박힌 관료적 대응 방식이라 오히려 코믹하기까지 하더군요. 인공지능? ㅋ)가 하는 말대로, 정신은 육신에 앞서는 위상이니 니가 그렇게 머리가 좋다면 니 머리를 써서 그 곤경을 탈출할 것이지 왜 맞고 있냐고 비꼬는데, 이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나중에 뭐 옷도 잘 입고 사교계에서 세련된 말빨로 여자들의 시선도 모은다고는 하나, 제 생각에는 마키가 열광해대는 것처럼 탁월한 지성은 아닌 듯합니다. 고교 풋볼 팀에서 힐렐은 자신의 허약한 체력, 체격 때문에 선수로 뛰지 못하는 한풀이를, 뛰어난 전술 수립 능력과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 파악으로 커버하는 코치 노릇을 하며 푼다는 말도 나옵니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아무리 고교 리그라고 해도 현대 풋볼에서 뭐 새로운 전술이 개발될 여지가 남았을까 싶어서 좀 고개가 갸웃해지더군요. 마키, 혹은 작가 디케르 씨가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부분 같습니다. 화자가 아직 젊으니까 독자들이 봐 주고 넘어가는 거죠.

[이 부분은 절대 읽지 마십시오]
마키는 내내 힐렐과 우디를 부러운 눈으로 보지만, 끝에 가서 위너가 되는 건 별 장점도 없이 무난한(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잘생긴)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ㅎㅎ 이 장편 소설은, 내가 그들 모두를 이기고 승자가 되었다는 자기 자랑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결국 그 얘길 할 걸 내내 "난 장점이 없어, 난 평범하고 불행해. 남들은 근데 왜 저렇게 다들 뛰어나지?"로 내내 징징거리던 화자가 꺼내드는 결론이니 독자는 순간 "어, 루저가 위너 되는 이야기네? 감동!"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쩜 이 소설은 내내 서술 트릭을 채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알렉산드라가 왜 그 잘나신 우디와 힐렐을 다 제쳐 두고 마키를 찍은 후 무려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가서 뜨거운 밤을 보내겠습니까. 그저 만만해서? 아니죠. 아니 작중에서 알렉산드라 대사로 "내가 널 택한 게 벌써 니가 승자라는 소리야."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이건 워낙 마키가 징징거리니까 독자들이 그저 흘려 듣고 넘어가죠.

그 백부 사울도 마냥 부러운 인생은 아닙니다. 3, 4부에 집중 폭로되지만, 학생 시절에는 운동권이었고, 그 앞선 시기에는 인생 진로의 갈피를 못 잡고 내내 부친과 충돌한, 눈 밖에 난 아들이었죠. 반면 마키의 부친이야말로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엄친아였습니다. 이랬던 게 가업인 의료기기 판매 회사가 도산하고 집안 전체가 핀치에 몰렸을 때, 말썽쟁이 아들 사울이 유망기업 하나를 눈여겨 봐 뒀다 주식이 대박을 치는 바람에 그때까지의 우열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죠. 마키는 태어나면서부터 내내 이렇게 굳은 모습만 봐 왔기에, 자기 부친은 태생의 루저고 백부는 인생의 승자라고 잘못 여긴 겁니다. 백부가 부친에게 그리 냉랭히 대한 것도, 워낙 동생에게 성장기 내내 쌓인 열등감을 풀기 위해서였고, 조부모가 백부한테 편애하는 듯 보인 것도 일종의 미안풀이라고 봐야죠.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있고)

이 소설의 올바른 진상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겉보기에 완전한 인생의 승자였던 사울 골드먼 씨의 내면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자기 동생에게 열등감을 품었고, 성공하고 나서도 이웃인 패트릭 씨를 내내 질시했으며(이게 큽니다. 제 생각에는 이걸 계기로 이분 인생이 망조로 접어든 겁니다), 자기 아들들을 패트릭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무리수를 두었고, 끝내는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아내를 잃은 것도 자신이 먼저 바람을 피워서인데, 외모도 더 월등한 아내는 정작(끝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아무 외도를 안 했음에도 이 남편이 자격지심에 일을 저지른 거죠. 그 역시 "여전히 자기 분야에서 잘 나가고, 십대 아이들에게까지 성적인 영감을 주는" 아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보육원 고아인 우디를 구태여 양자로 들인 것도, 유일한 직계비속인 힐렐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골드먼 씨가 질시의 눈으로 바라봤던 패트릭은 그럼 어땠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는 오히려 골드먼 씨가 선망의 대상이었죠. 아름답고 유능하며 지혜로운 아내를 두었으며, 그 친아들은 매우 명석하고, 어디서 데려왔는지 떡대 좋은 스포츠 유망주까지 양아들로 들인 잘나가는 변호사, 반면 자신은 돈만 많았지 인생에 정열을 쏟을 만한 낙이 없고, 마누라는 바가지를 긁어 대며,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녀석은 난치병 환자니 신세가 깝깝하게 느껴질 밖에요. 제 생각에 패트릭 씨의 가장 큰 잘못은, 보물 같은 딸인 알렉산드라에게 정성을 안(덜) 쏟은 겁니다. 생에 끼어든 모든 사소한(?) 불운을, 이 딸의 성장이 상쇄해 주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튼 패트릭 씨가 하나 잘 한 건, 설령 기분이 울적해져도 덜컥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경솔함은 피했던 겁니다. 반면 골드먼 형제들(사울과 네이튼)은, 99를 잘 하다가 마지막 1에서 덜컥 감정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망치는데 이건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힐렐은 왜, 고마운 우디의 인생을 망쳤을까요? 우디의 단순한 머리로는 죽을 때까지 생각해 봐야 답을 못 찾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적었습니다. 부친 사울이 아들의 대용품으로 우디를 곁에 두고 모든 정성을 쏟는 그 속내를 영리한 두뇌로 알아채곤, 이를 일생의 상처로 키웠던 겁니다. 사실 이는 우디도 마찬가지인데, 중학생 때 농구로 전향하려 했던 게 순전히 아버지 핀 씨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결국 아이에게 영구적인 상처를 안기거나, 반대로 발전의 동력을 선사하는 건 다 부모입니다. 재능도 없는 아이한테 과도한 부담을 줘 가며 키운 부모는 그 자녀를 망상과 허세와 자존감 부족에서 헤어날 수 없는 실패자로 만드는 거고, 반대로 (이 소설에서 티 안 나지만) 은근 알토란처럼 좋은 영향만 주며 정서를 균형잡히게 가꾼 부모는 마키처럼 진짜 엄친아를 두는 거죠. 행복 속에 엄청난 비극과 운명의 급전직하가 롤러코스터처럼 재주를 피우는, 그 와중에도 인생을 향한 여전히 긍정적인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는,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유쾌한 장편이었습니다. 처음에 별 네 개만 주려고 했는데, 뒷맛이 계속 흐뭇하고 좋아서 한 개를 더 늘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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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성자들의 지혜 | My Reviews & etc 2017-10-23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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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성자들의 지혜

허해구,진실연구회 공저
지식공감 | 2017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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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족의 진보와 발전이 안겨다 준 "빛" 못지 않게, 뒤따라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짙고 깁니다. 故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의 어느 장편 속에서 캐릭터 이언 말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 식기 세척기,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은 물론 주부의 노동과 수고를 덜어 주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인간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진 바가 무엇인가?" 2500년 전 노자, 장자 등이 만약 되살아나기라도 해서, 현대인들이 어머니 대지에 자행하는 작태를 보면 과연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전략)... 인류도 하나이고 지구도 하나이고 우주도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도 사후세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 (중략)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도, 동양철학과 서양철학도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법과 도덕, 진리와 인간의 길도 결국 하나로 통한다.(후략)" 옳으신 말씀이긴 합니다. 다만 그 길이 아직 우리 인류에게 명확히 제시가 안 되어서 아쉬울 뿐이지만요.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이란 보조 제목이 함께 붙은 이 책 <성자들의 지혜>는 일단 장정이 참 예쁩니다^^ 저는 책 덕후라서 일단 외관이 기품 있고 멋진 책들, 두꺼운 책을 참 좋아라 하는데, 이 책은 일생긴 모습이 그 조건들을 모두 갖춰서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도 혹시 가운데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특유의 책 향기도 맡는 중이죠.

이 책 제목에 표기된 "성자"는,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등 인류 역사와 문명에 지대한 기여를 남긴, 말 그대로 만인의 모범이 될 만한 분들입니다. 책 표지에 적힌 대로, 결국 하나의 진리를 말했으나 어리석은 후대인들이 여러 갈래로 오해, 왜곡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기까지 하는 우(愚)를 범했을 뿐이죠. 저자는 이런 소중한 가르침을 다양한 불경 등 권위 있는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저자의 심원한 식견으로 한 줄기로 섞은 후 우리 독자에게 준엄히 가르칩니다. 읽어 보면 다 지당한 가르침들입니다^^

p94에 보면 마이클 샐던의 책으로부터 그 유명한 예화를 인용하십니다. 선로 위에 놓인 1명의 목숨과 5명의 목숨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이야기인데, 사실 이는 샐던이 처음 고안한 것도 아니고 독일어로 Pflichtenkonflikt라고 하는, 대학 강단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논쟁적 이슈로 다뤄지던 과제였습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주제로 자세한 논증을 한 적이 있죠. 저자께서는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협소한 상대론적 관점에서 인위적으로 비틀어 유사 딜레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하시는데, 바로 그 앞 대목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나 이런 이슈들이 다분히 말을 위한 말로 상술처럼 가공된다는 진단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책 전체를 꿰는 저자의 주장은 "자기 입장에서 이거다 저거다 현상과 과제를 왜곡하지 말고, 만물의 진리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에 동의한 후, 모두가 마음을 열고 화합하여 궁극의 진리에 순응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씀이나, 인류의 지난 역사라는 것도 지성이 뛰어난 개인이 돌출하듯 이색적인 주장을 방대한 체계로 펴 나가면, 기존의 체계와 충돌을 빚게 되고, 입장들이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집단 지성에 의해 발전적으로 융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모두가 순응, 승복해야 할 단일 체계의 진리란 게 어느 시대에나 강조되었으나, 역시 인간의 제한된 지혜에서 빚어졌을 뿐이니 그 효용이란 제한될 범위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었죠. 발전과 모색을 위한 불협화음이란, 그래서 혹여 그 과정에 교란, 불화가 빚어지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도 등한히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작태 역시, 그 사람 입장에서야 보람 있고 좋은 일에 열심을 바치는 중이겠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도 망치고 자신 주변의 사회관계망 모두에 폐를 끼치는 헛수고일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공동체 도처에서 빚어지는 갈등, 이익 충돌, 밥그릇 싸움 역시 대승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의를 직시하면 결코 빚어지지 않으리라는 저자의 관점이, 이 사이비 종교 현상을 비판할 때에도 적용된다는 겁니다. 결론은 차이가 없는데, 그 논거 구성 면에서 저자만의 고유성이 드러납니다. 사이비 종교 믿는 사람들이 꼭 되묻는 게 이렇죠. "우리 OO교가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씁니다." 이런 질문에 대개는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하지만(시간과 정력의 낭비), 엄밀히 말해 우리한테 그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단죄하고 무시하려면 그럴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죠. 제가 주목한 건, 저자가 구태여 그런 이슈에 대해서까지 논거를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사실 서양철학(중에서도 대륙의 합리론)의 본질적 방법론과도 통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원용되는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서도, 평범한 이들 생각에는 "대체 그런 문제를 왜 해명해야 하며, 이처럼이나 번거로운 과제를 파고들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같은 회의가 떠날 새가 없습니다. 허나 이런 문제를 짐짓 경시하는 듯 젠체하는 소양 없는 무자격자들도, 어디서 본격 인문 주제가 논쟁의 핵심으로 대두하면 그제서야 인식론, 해석학의 기초 개념을 (벼락치기로 베껴 온 후) 뜻도 모르면서 급조한 수다 속에 허세를 떠느라 정신 없습니다.

저자께서 주장하시는 만물일통의 세계관에서는, 저 사이비 종교에 미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나, 진리의 일면만 보고서는 망령되이 편린적 진실을 전부인 양 우기는 무자격자들이나 결국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뜻입니다. 똑 같은 사이비 신도가 다른 사이비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니 이보다 더한 촌극이 없죠.

저자의 탁견은 특히 Part3에서, 어떻게 하여 담백하고 질박한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 번잡한 말과 말 속에서 본지가 타락하고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현학 공론의 장으로 변했는지 설명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특히, 사도 바울 이후 기독교는 선행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순정한 초기 지침을 잊은 채 유대교처럼 인격신을 전면에 내세우며 형식적 교리가 득세함으로써, 정작 예수의 가르침과 멀어졌다는 통박은, 현재 기독교 교단의 정통파 신앙과는 까마득한 거리를 두겠으나 중립적 독자 입장에서는 경청할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이래 여러 제자나 권위자들의 입장을 거치며, 부처님의 "원음"이 무수한 왜곡과 가필을 거친 채 이제는 무엇이 본지였는지도 혼란에 휩싸일 뿐이라는 저자의 지적 역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이 저자의 논지와는 별개로, 아소카 왕 이래 확립된 엘리트 불교에서 어떻게 대승과 유식론이 갈라져 나왔는지, 또 이후 이 입장들이 어떻게 힌두교 측과 발전적 논쟁을 거치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의 서술이 참으로 명쾌합니다.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든 않든, 이 대목은 보편적 교양 습득을 위해서도 한번 읽어 볼 만합니다.

부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회가 폭력과 범죄에 물들어 극한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출현한 성자들(저자의 관점)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오탁악세"라고 하는데, 이런 성인들이 나타나 인류가 자멸과 종말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게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었듯,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테러와 증오의 악순환이 뭇 백성의 작은 안위도 차마 담보하지 못할 판이며, 이 판에 일부 불순분자들은 폭력을 부추기고 엉뚱한 반사회적 사고를 공유하며 한심한 제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난세를 두고 오히려 저자는 "그나마 이 세상이 아직 법계의 자격을 유지한다는 증거이다. 도덕의 문란과 위법의 수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응보인 혼란상이 빚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는가?" 같은 주장을 합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런 오탁악세에 다시 한 번 성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위대한 가르침으로 누리를 씻어낼 기대도 어느 정도 함축하는 논리입니다.

저자는 모 추기경이 선도한 "내탓이오" 운동 역시, 악행을 저지르고 온갖 탐욕과 비리를 앞장서 부추긴 세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나 결과면에서 다를 바 없다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권선징악, 신상필벌을 내세움이신데, 역시 해당 문단을 읽는 독자 개인이 알아서 잘 새길 일이겠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정치인들이 한데 모여 구국기도나 법회를 열었던 행태도 신랄히 비판하시는데, 행실은 따르지 않으면서 입으로 무슨 기도나 염불을 읊은들, 원인 없이 결과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비는 꼴이라며,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느닷 수면 위로 떠오르길 바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네요.

저자는 후반부에서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을 소개하며, 작금의 한국은 계층과 직역 불문하고 각자의 분수를 알며 현실의 의무에 충실하자는 자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결국 쇠망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반대로 각자가 생업에 충실하며 헛된 망언으로 정신을 더립히지 않고 정직과 진실에 힘쓴다면, 팔천만 인구로도 세계를 이끌 으뜸 민족이 될 수 있다고도 하시네요. 정부가 개입해서 불완전한 시장의 작동 원리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케인지언 스탠스와, 그 대척에 서서 완전한 자유방임만이 일체의 비효율을 제거한다는 시카고 학파의 주장까지 소개하는 등, 저자의 시야가 참으로 넓고 보편의 상식에 부합하는 청론(淸論)이라서 쉽게 잘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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