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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공간과 물질 | My Reviews & etc 2017-11-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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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주, 시공간과 물질

김항배 저
컬처룩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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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종래의 무지와 몽매를 넘어 이성과 계몽의 시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그 시선을 우주로 향해 돌린 놀라운 회심과 각성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속한 좁은 지구 위의 물리계에 대해서조차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물리계는 고사하고, 사람은 자그마한 "자기 자신의 바른 실체"에 대해서조차 온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우주의 바른  모습을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마따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되었다는 건,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한 정확한 소양, 인륜과 도덕에 대한 바람직한 천착, 이 둘이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심도 있게 시사 받는 듯만 합니다.

"교양의 완성은 (자연)과학"이라고도 하죠. 불과 지지난 세기에만 해도 칸트(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됩니다)나 마흐 등 일류 철학자들은 철학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자연과학 연구를 선도한 두뇌들을 겸했습니다. 인문과 자연과학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이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하나가 될 운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인들도, 뉴턴 식 해석의 고전 물리, 천문, 나아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내면화가 이제는 거의 필수라고 하겠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속한 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수면 위에는 자신을 노리는 성정이 난폭한 맹금류들, 평화로이 공중을 유영하는 여타의 생명체들, 여유로운 구름, 작렬하는 태양, 혹 환하게 빛날 때라면 보름달 등이 그 눈(말 그대로 "어안"이죠)에도 비치겠습니다만, 수면 안에서 바라보는 형상들이기에 바깥 세상이 얼마나 아찔한 다층 구조를 지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층(높이)는 고사하고, 물고기의 소박한 눈에는 그 모든 게 수면 위에 반짝이처럼 고정된 2차원 형상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왜곡, 단순화가 어디 어류의 지적 회로 안에서만 벌어지겠습니까? 어리석은 잡초, 거름 같은 벽지의 무지렁이가 갇혀 있는 초라한 우물 안 세계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인간 역시 "천구"라는 단조로운 프레임으로, 감히 계측과 연산의 시도조차 못 할 광대한 우주를 힘들여, (그나마) 부정확하게 간추려 왔습니다. 별들이 천구라는 표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그 각각이 먼 거리, 상상도 못 할 먼 거리를 두고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 지구의 주위를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진리에까지 비로소 착상이 미친 후에야, 인간은 그때까지 설명 안 되던 모든 수수께끼와 모순에까지 과감히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해명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미신, 기만, 환각, 광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예가 아닌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주 물리학(과 그 인접 과학)은 그저 물리계에 대한 기술적 정보, 지식의 집합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해방자 구실을 해 준 프로메테우스였던 셈이죠.

별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편의에 따라 정한 것입니다만, 오래 전부터 "겉보기"에 따라 정해 둔 서열(물론 숫자로 표시됩니다)이 있고, 그 별이 품은 에너지에 따라 실제로 발하는 "밝기"가 따로 있습니다(후자는 "절대 등급"이라고 부르죠). 별이 실제로 얼마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자신의 터전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면 제 주관에 따라 그 별을 희미하다며 낮은 등급을 매기고, 그 반대로 제 눈에 밝으면 덩달아 등급도 높였으니 우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죠. 허나 인간은 또한 위대하기도 한 게, 제 눈에 비치는 현상이 그 실체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기특하게 어느 순간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천문학적 수치"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별과 우리 지구가 떨어진 거리"를 염두에 두고부터, 그 아찔한 수치를 (계산을 해 내기는커녕) 그저 응시하는 단계부터도 머리가 아찔해졌기에, 네이피어라는 천재적인 이가 logarithm이란 유용한 개념체계를 고안해 냈습니다. 모든 수를 10의 거듭제곱으로 표현한 후, 밑에 있는 10은 잠시 잊고 그 거듭제곱 수치만 따 와 대신 활용하기 시작한 거죠. 예를 들어 10,000처럼 길게 쓸 게 아니라 이에 로그를 취해 4(즉, 10,000이 가진 0의 개수)로 간단히 표기하자는 겁니다. 23,145 같은 숫자도, 소수점 아래를 주욱 늘어놓으면 4와 5 사이의 자기 고유의 값으로 대신 쓸 수 있고, 다른 숫자와 겹치지도 않으니(함수 중에서 이런 걸 일대일대응이라 부르죠) 아주 유용한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천체의 겉보기 등급과 절대 등급의 관계식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성 그 위대한 진보를 확인하는 뜻깊은 공식이라 저도 다시  손수 워드로 써 보았습니다. (참고로, 위의 식에서 로그의 밑이 10인데 0으로 잘못 인쇄되었습니다. 다른 곳은 다 맞는데 거기 하나만 틀렸더군요. 로그는 밑에 0이 올 수 없죠. 분모가 0이 못 되는 것처럼)

천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딘가(물론 태양이지만)를 중심으로 부단히 도는 중이라면, 다른 별을 관찰할 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위치가 바뀌므로, 이른바 연주 시차라는 게 생깁니다. 그런데 케플러가 "신처럼 믿고 의지했던" 티코 브라헤는, 가뜩이나 태양 중심 모델이 마뜩지 않았던 차에, 연주 시차마저 제대로 측정되지 않으니 이런 발상의 전환에 대해 내내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를 견지했죠(이뿐 아니라 그는 행성의 원궤도 공전설도 데이터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기각했는데, 케플러가 타원궤도로 수정하여 바른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무지렁이들만 모여 사는 폐쇄적인 공동체였다면, 권위자 티코 브라헤(사실 관측과 자료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 불세출의 인물이었으니요)의 벼락 같은 호통에 다들 다른 생각이나 이견을 접고 말았을 겁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딴 목소리를 내면 이단자, 공감 무능력자로밖에 몰리기밖에 더했겠습니까? 연주 시차가 제대로 측정 못 되었던 이유는 다른 게 없었고, 별이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다는 사정뿐이었습니다. 여건이 열악하니 현상이 바르게 계측되지 않았고, 인지가 부실하니 지혜에의 바른 인식도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죠. 이 책에는 이 외에도, 광행차, 연속 스펙트럼 등을 정확히 캐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집요하고 성실한 노력이 있었는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우주론을 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하다 보면, 현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이 도달한 첨단 지점까지도 천착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주물리학에는 그만큼, 물리학과 그 인접 분야의 최신 성과가 모조리 동원되다시피한 최고 두뇌와 지성의 향연이 벌어지는 셈입니다. 아니, 양자역학은 극미(極微)의 세계이고, 우주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덩치 큰 수치와 차원이 지배하는 공간(약간 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 편의상 이 말을 쓰기로 하죠) 아닌가? 이런 상식적인 의문에 대해 저자는 "... 초기 우주는 고에너지, 고온의 물질들로 가득 차 있었고... (p225)", 팽창 이전의 구조는 우리가 지금 양자역학을 통해 해석하고 예측하는 극히 좁은 공간에서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는 조언을 베풉니다.

p267 이하에서부터는 그 유명한 파동/입자의 딜레마를 다루며, 도대체 왜 "측정 행위" 자체가 물질(혹은 운동)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 고유의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이 시도됩니다. 이어 힐베르트 공간과 이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정식(적분식)이 제시되는데, 특이한 건 이 벡터식에서는 "크기"가 무의미하고, "방향"이 같으면 다 같은 "상태"로 취급된다는 거죠. "상태'라는 말은 이 맥락에서 특유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방향은 무시되어도 크기(절댓값)가 같으면 동류로 취급되는데(그 이전에, 벡터에서 방향과 크기는 개체를 분별하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여기서는 정반대이니 흥미를 돋웁니다.

우리가 학부 때 선형 대수학의 용도가 그리 넓은 줄 모르고 심드렁하게 배웠습니다만, 벌써 이런 과정에서도 기저(베이시스)를 잡아 모든 상태를 선형 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 보십시오. 결국 진리는 아무리 저 아득한 경지에 놓였다 해도, 기초 도구와 프레임으로 (아주 번거롭겠지만) 환원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처럼 수학적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되, 교양인의 직관과 선이해의 틀을 충분히 존중하며 "상식"에 부합하는 친절한 안내를 시도한다는 점이 매우 빼어나고 유익합니다.

pp. 308~309에는 궤도 에너지의 반지름과 양자화를 나타내는 공식, 또 쿨롱 포텐셜과 해밀토니언 방정식을 써서 그 유명한 슈뢰딩거 명제를 수학적으로 풀어 보이는 대목이 나와 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기초만 배우면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해 볼 수 있는 레벨이고, 물리학은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말로만 풀어 쓰면 반드시 놓치는 대목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물론 파인만 같은 천재(어학과 수학 모든 도구를 능란히 쓴)는 이는 물리학을 수학 없이 그저 말로만 해명하려는 시도를 했고, 듣는(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반의 반의 반만 따라가는 수준이었다면 이 시도는 대성공이었을 터였지만, 수학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 게 인간의 언어라는 사실만 확인되고 말았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차피 피해 다닐 수 없는 수학이라는 (정말 유익한) 도구를 텍스트 안에 최대한 정합성, 적실성 있게 편입하여, 현대 우주 물리학 그 성과를 왜곡 없이 가장 근사하게(아무래도 대중서에는 한계가 있고, 정확한 건 교과서로 배워야 하니까요)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안내해 준다는 점이겠습니다.

p555에 보면 초기 우주가 복사 지배 시대라는 점을 착안(혹은 가정)하여, 이를 프리드만 방정식에 대입한 후, 시간- 온도 관계를 구하는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범상한 물리계 체험(그나마 머무는 시간이 길지도 못한)이 그 기반 한계를 이루는 상상력으로는, 엄청난 고압 고온이 배태한 에너지를 짐작도 못 하는 것이고, 인간이 짐작 못하는 경지를 이처럼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서 그 어림이나마 더듬는다는 자체가 이성의 위대함을 간접 증명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각박한 한계의 벽을 매번 넘음으로써(비록 앞에 더 높은 허들이 즐비하게 남았다고는 하나),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가 점점 더 궁극에 수렴해 가는 도상에서 의의를 찾는 것입니다. 바른 인식과 지성의 도야는, 자연 과학의 정수를 공부할(혹은, 그저 엿보기만 할) 때에 비로소 그 실낱 같은 계기를 잡아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양의 완성은 바로 과학"입니다.



#사이언스올 #과학 #우수과학도서 #리더스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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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15: 제 시대 | My Reviews & etc 2017-11-29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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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자치통감 15

사마광 저/권중달 역
삼화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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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남제라 일컬어지는 이 황조는 불과 23년만 지속되었기에, 북위와 대치하며 중화의 정통성을 자칭한 체제가 얼마나 건강성이 취약했는지 잘 보여 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존속 기간이 길지 않아서인지 자치통감(권중달 역본)도 한 권 분량으로만 그 치세를 처리합니다.

소도성은 지략과 배짱이 출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권위를 느끼게 하는 처신과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유송은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기에 앞서, 그 유씨 종실 가문 인사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잔이 너무도 심했습니다. 대부분의 변란과 사변은 그 일족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든 탓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마치 몽골 제국의 말기적 징후를 미리 보는 듯합니다. 몽골은 세계를 제패하고 감히 덤질 적이 없었던 상황에서 힘이 남아돌아 내분에 빠져들었다고나 하지만, 유송이나 이 남제(소제)는 그럴 분수도 못 되면서 자멸적인 내부 항쟁으로 나라를 망쳤으니 더욱 기가 찰 일입니다. 이처럼 종실, 황족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건 먼 예전 서진 팔왕의 난부터 아주 정해진 관습이 되다시피했습니다.

소도성 역시, 유송 종실 유력자의 반란을, 기지의 발휘와 담대한 처신으로 제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세력을 키운 인물입니다. 아무리 엉망인 통치자였다고 하나 지존의 신분을 함부로 시해하는 건 천하의 공적이 되어 마땅한 대죄입니다. 소도성도 감히 그럴 엄두는 내지 못하였으나, 왕경칙이란 자가 황제 유욱의 목숨을 앗은 후, 얼결에 궁궐로 진입하여 최고 실권자 자리를 어부지리처럼 차지했습니다. 이후 유준을 괴뢰로 세웠다가, 그로부터 선양을 받고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검소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린 소도성은 아들 소색에게 권좌를 물려주고, 소색 역시 특별한 장점은 없었으나 수성(守城)의 이름에는 값할 야무진 살림살이 솜씨는 보여 줍니다.

소도성 소색 부자의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는데, 소색의 아들 소장무가 일찍 죽자 손자 소소업이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목됩니다. 이 가계는 계속 적장자로만 이어오는 계보라서 정통성 면에서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습니다. 소소업도 그 용모가 출중했을 뿐 아니라 총명한 자질도 지닌 이였는데, 이상하게도 황음무도의 기행에 빠져 국고를 낭비하고 스스로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 몰아넣었습니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이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싶은 정신적 위기에 빠져 대사를 그르치고 자멸궤도에 진입하는 패턴은 실로 연구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고 보이네요.

이후 그 동생이 잠시 괴뢰 황제 노릇을 하다, 종실의 먼 어른뻘인 소란이 친히 보위에 올라 질서를 잡는 듯했으나, 마치 궁예나 스탈린이나 마오가 의심병에 걸려 주변의 멀쩡한 인재를 모두 도륙하고 시스템을 위태롭게 한 예나 마찬가지인 과오를 또 저지릅니다. 이 남제를 잇는 양 제국도 소씨 가문 일족인데, 먼 핏줄이 제위에 오르고 국호까지 양으로 바꾼 건, 워낙 이 무렵 동족 상잔, 대숙청이 잦아 소씨 가문의 인재가 남아나질 않아서라는 게 통설의 입장입니다. 이어지는 양나라 역시 특이한 행보를 걷는데, 그 사정은 16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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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여행 - 교토의 향기 | My Reviews & etc 2017-11-2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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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일본 도자기 여행 교토의 향기

조용준 저
도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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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이란 말이 있죠. 아무리 천하의 진미라도 한두 술 뜨다 보면 맛이 물리는 게 보통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거스르는 현상과 체험을, 살다 보면 드물게나마 접하게 마련입니다. 잘된 미술품, 고아한 고전 음악의 감상이 그러하며, 반듯하고 정직한 환경에서 자란 혀만이 느끼고 평가할 수 있는 명품 요리의 "맛"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음식 그 자체도 아닌, 이를 담는 도구, 그릇류의 풍미(風味)를 심미(審美)할 수 있는 게, 우리들 교양 있는 인간만의 특권이자 천품이 또한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도자기는 이미 어떤 실용을 초월하여, 그 자체가 완상(玩賞)의 대상(對象)이 되기도 하며, 나아가 숭배와 신앙의 초점으로 자리하기까지 하니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각성과 경지에까지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기이하기도 하며, 유한한 존재가 까마득한 무한을 응시하며 작은 한계를 벗어나고 궁극에 포함되려는 몸부림이 애처롭게도, 위대하게도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어떤 곡절로건, 도자기는 이미 도구나 식기의 위상을 오래 전에 넘어서서, 인류의 간절한 희구를 대변하는 장인들의 예술혼, 그런 장인들을 빚어낸 대지의 그윽한 깨우침까지를 모두 체화한, 아름다움의 근원이자 도(道)의 종착점, 상징이라고나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조용준 선생님의 이번 책은, 여전히 일본에 머물며 그 고장 그 강역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심원한 도자기의 역사와 성취를 천착하되, 특히 열도 동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들이 "황도"로 성역시하는 교토에 뜻 깊은 시선을 주고 있습니다. 뜻이 깊다 함은 두 가지 의미에서입니다. 하나는 교토 인들이 오랜 세월 가꿔 와, 자국 안에서는 물론 세계인들로부터 극찬의 대상이 되는 고유의 도자기 예술품과 그 내력, 문화를 집중 조명함이요, 다른 하나는 이처럼이나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의 아득한 원류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집단의 전폭적이고도 결정적인 기여가 있었음을 명쾌히 근거를 들어가며 지적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때 "도래인"들이 속한 시대라고 하면 물론 일본 역사의 고대를 가리키며, 직전 권 <규슈의 7대 조선 가마>가 추적한, 주로 임란(1592~98) 이후 끌려 온 도공들의 위대한 족적과는 또 크게 구별되는 시대의 맥락 속에서의 의미입니다.

조용준 선생의 이번 저서는 특히 저자 고유의 연구 결과와 수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 구미의 관련 학계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서들을 빼놓지 않고 탐독해 온 오랜 독자들을 더욱 큰 흐뭇함과 감동을 안깁니다. 저자 스스로도 서문에서, 그간 각별한 도자기 사랑과 열정, 학문적 이해와 미학적 천착을 가뜩이나 보여 왔던 자신이, 이번 교토 편을 다루면서는 가진 역량과 정열을 모두 쏟아 부으며 집필과 출간에 임했는지 소상히, 감개 무량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다들 아시겠지만 페이지 곳곳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게 피부로 와 닿을 정도입니다. 전작들도 페이지 곳곳을 꽉꽉 채운 정보와 공력과 정성과 통찰에 독자가 압도당할 정도였는데, 이 책은 그보다도 더합니다. 하루 정도면 독파할 수 있겠지 여겼던 일정이, 일주일을 꼬박 읽고도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밀도가 높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드디어 만나는 교토야말로, 일인들이 신성히 여기는 모든 가치와 질서, 관념이 응축되어 찬란한 유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도 중 고도입니다. 저자는 "京都"라는 명칭부터가 고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도읍을 일컫던 단어임을 지적하며, 현대 한국어 "바다"의 먼 어원이 된 "파다", 또 이의 변용인 "하타" 등의 성씨를 가진 도래인들이 이 고장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일인들의 덴노와 공경귀족이 화려한 고대 문화를 꽃피우며 후손들에게 많은 유적과 유물을 물려줄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했음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정치 스캔들로 자민당이 대 분열을 맞았을 때, 야당과 연립하여 총리직에 잠시 오른 하타 쓰토무 씨, 오랜 정치 명문가 출신 호소카와 모리히로 씨 등이 있었는데, 이들 성씨들이 또 이 책에 고스란히 등장하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묘한 느낌도 들더군요.

교토에 남아 있는 화엄종 본산인 고류지(저자는 이 고찰이, 특히 신라의 불국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국보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의 제작, 탄생에 모두 도래인들의 공헌이 핵심적이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자부심, 한편으로는 (어쩐지 사실 자체가 애써 가려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씁쓸한 느낌이 교차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세계 학계의 주목되는 성과도 여럿 반영하여 정성스럽고도 치밀하게 저술되었는데, 그 중 한 예가 (우리 한국 독자들도 잘 아는) 故 조언 카터 코벨 박사의 파격적인 주장들입니다. 그녀는 잘 알려진 대로, 일본 문화에 고대 이후 줄곧 한반도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하게 작용했음을 여러 실증적 연구와 치밀한 논리로 입증해 보였는데, 물론 그녀의 업적은 친한 성향(?)의 연구 집적에 있는 게 물론 아니고, 여전히 미지의 안개에 싸여 있던 고대사 비밀의 자락을 거두어 낸 순수 학문적 의의가 더 큽니다. 이 책에는 2차 대전 당시 미국 수뇌부가 (비밀리에 군수 생산 역량도 떠맡았던) 교토 일대에 원폭을 투하할 작정도 했었으나, 코벨 박사의 은사인 랭던 워너 교수, 또 당시 군부에 몸 담았던 박사의 남편 등의 노력으로 이 계획이 저지되는 데 일정한 영향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증언도 실렸네요. 

다도의 역사가 다소 극성이다 싶을 만큼, 특히 아시카가 막부 집정기와 전국시대, 이후 직전신장과 풍신수길의 통치 기간을 거치며 거의 종교로까지 격상되던 사연에 대해서, 이 책은 단조로운 통시적 서술을 피하고, 각 장의 주제가 된 도기, 자기들의 항목 곳곳에서 유격전 기법처럼 적실하게 요령껏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끼워넣듯 들려 주고 있습니다. 직전 권에서도 그랬습니다만, 도자기 산업과 유통, 이 중에서도 극히 드문 명기의 소장과 양도, 확보는, 본디 정치적 권력과 엄청난 부(富)가 동원된, 보이지 않는 전쟁터의 책략까지가 동반된 활동이자 극상류층들만의 문화적 고급 향락이었기에, 이 토픽을 꺼내면 역사 전반의 줄기가 따라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반부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다성(茶聖) 센노 리큐, 이와 희한한 애증의 연을 유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두 사람의 기막힌 사연은, 가장 대중적으로는 산강장팔의 대하소설 <덕천가강> 같은 걸 읽어 봐도 비교적 소상히 짐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이 다분히 가미된 것이고, 심지어 이 책에도 일본의 다른 현대 소설가의 해석을 잠시 인용하고도 있습니다. 산강장팔의 해석은 둘 사이의 정치적 알력과 감정적 오해, 대국을 보는 시선의 차이 때문에 리큐가 장렬한 순교를 택했다고 (그 작가답게 다소 어거지로) 정리하는 쪽이나, 저자는 리큐가 자신의 정신적 지향을 오롯이 담았다 할 다기, 다완, 도자기의 본고장에다가, 자국 최고 실권자가 전쟁의 참화를 입히는 결과를 막기 위해 단호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는 쪽으로 새깁니다. 또한 하시바 히데나가가 그 배다른(혹은 씨다른) 형에게, 국제 평화를 어지럽히지 않게 충언과 극간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사연도 같이 전하는군요.

전작에서도 우리 독자들은 같은 결론과 해석에 접하고 (아마도) 거의 전폭적이라 할 지지와 공감을 보냈겠습니다만(한국인이니까요), 이 책에서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왜 우리가 놓치거나 예사로이 간과한 미의식과 정신 세계, 특유의 아름다움(모두, 우리 조상들이 발견하고 가꾸어 이 강산에서 그 시대까지 전해 온 덕목과 성취입니다)을, 일본인들만이 유독 절묘하고도 포괄적으로 파악, 수용, 예찬하며 별세계의 재창조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는가?

조선에서 일개 막사발로 "구르던" 이도다완의 원형이 열도에 건너와 명품 중의 신품으로 칭송받게 되었다는 주장은, 일제 때 활동한 저명한 학자, 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꺼내들다시피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의 전통 다기, 혹은 그 어떤 방향성을 지닌 문화재에 대해 일체의 폄하 의도가 없어 보인다"고 하시지만, 그가 설파하고 감동적인 언사로 표현한 이도다완에 대한 찬미와 열렬한 미학적 규정은, 고려인(조선인)의 후손인 우리들이 듣기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열렬하며, 가히 종교적이라고까지 여길 만합니다. "양손으로 맞잡을 만한 크기이지만 그 안에 우주를 품을 만하고, 그러면서도 권위, 위압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모성의 포용과 자비를 연상케 한다." 같은 평자의 코멘트는 또 어떻습니까?

책 중에서 누누이 강조되듯, 일단 명품 도자기는 재료인 흙이 탁월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조선의 다완은 출생 성분부터의 어드밴티지를 지녔다고 평가될 수도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저들 일인들이건 혹은 어느 국적의 전문가로부터건 간에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으로, 장인의 집중력과 예술혼이 오롯이 투영된, 그리고 오묘한 우연과 신통한 행운이 접목하여 빚어지는 요변(窯變)의 효과가 동시에 개입하여, 불가사의한 색채와 재질(명품은 보기에 무겁고 들기에 놀랄 만큼 가벼워야 한다는군요)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혜안, 손놀림, 성실성, 미의식, 바른 마음가짐이 도공들을 통해 면면히 전수된 결과이겠으며, 그 외에는 "해당 도자기를 누구누구가 소장해 왔는지" 같은, (미술품이나 문화재 일반 유통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provenance의 이슈가 있겠습니다. 이에는, 해당 다완을 오랜 기간 사용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는 변화, 흔적도 포함되는데, 사용한 이의 다도 숙련도나 품격, 습관에 따라 다완 역시 고상하게 "늙은" 흔적이 추가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타고나기도 정성과 예술혼의 놀라운 결합이 있어야 하지만, 진정한 명품은 그를 사용한 이의 품격에서 비롯된다고 하니, 예술품을 빛나게 하는 본질은 결국 사람의 정신과 도덕, 몸가짐, 우주와 통하는 바른 혼임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거죠.


서평 서두에서 "점입가경"이란 말을 썼습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쓰면 쓸수록 맛이 웅숭깊어지는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도래인들이 지울 수 없는 항구적인 기여를 남긴 교토의 문화(도자기 관련 포함 일체)에 저자가 각별히 끌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겠지요. 또한 우리 독자들에게는, 조용준 저자님의 이 시리즈 역시 "점입가경의 감흥과 유익함"을 선사하는, 읽어가면 갈수록 새로운 눈이 트이고 정신의 각성이 깊어지는, 명품 독서의 시간, 보람, 체험을 제공했다고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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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17: 남북조 양시대 2 - 권중달 譯 | My Reviews & etc 2017-11-2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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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자치통감 17

사마광 저/권중달 역
삼화 | 200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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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은 원칙적으로 남조(南朝)를 정통으로 간주하고 서술을 진행합니다만 북조에 대해서도 소상한 기록을 이어나갑니다. 말이 북조일 뿐이고 선비족 탁발씨의 위(魏)가 화북을 통일한 후에는 그저 위나라일 뿐이었습니다. 반면 남조는 우리가 잘 알듯 송-제-양-진으로 황실이 여러 차례 교체되었기에 통칭하여 "남조"라 부를 필요가 따로 있습니다.

그냥 정통을 북조에 두었다면 이 기간을 위(魏) 시대로 불러도 될 텐데, 중화 사관에 철저히 물든 후대의 평자들이 이처럼 짜디짠 기준을 적용하여, 근 150년을 존속한 황조를 두고 마치 반역 분립 할거나 벌인 집단마냥 폄하한 것 아닐지요. 현대인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위 황실은 현지에서 꽤 폭 넓은 위신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무력으로나 종합적 국력으로나 동아시아 최강자로 군림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단 유목민족의 특성상 부자세습의 관행을 그닥 존중하지 않고, 실력이 뛰어난 자에게 합당한 권력과 직함이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관념이 확고히 자리한 터라, 탁발씨(이후 원씨)가 (같은 선비족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성씨를 지닌 무장 집단(부족)을 확고히 통제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씨 황제가 수완이 좋은 권력자일 때는 이런 갈등이 봉합되었어도, 그렇지 않고 중앙에서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노출한다든가, 무리하게 한족 농경 문화권의 고리타분한 행세를 흉내낸다든가 하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반기를 들곤 했습니다.

탁발씨 상당수는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기존 화북 귀족들과 서서히 경계가 사라져 가며 본격 지배층으로 편입을 가속화한 반면, 변경에서 국경 수비에 종사하며 여전히 척박한 생활을 하던 집단은 이런 중앙의 한화 정책에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이는 이런 침투 왕조 시스템에서만 보이던 현상은 아니고,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나 여진의 금나라에서도 고유의 기풍을 유지할지, 아니면 한족의 문화에 동화할지를 놓고 격렬한 내부 투쟁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몽골 제국은 자체 성취가 워낙 두드러졌던 터라, 이런 문제보다는 극성스러운 기질 때문에 누가 무력과 전통적 권위 서열의 우위에 서느냐를 두고 내부 항쟁을 벌였을 뿐, 노선 갈등이나 문화 투쟁 양상은 아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자체 실력을 상실한 채 책략과 술수, 헛된 권위 의식만으로 황조를 지탱하려던 원씨들의 구상이 제대로 실현될 리가 없었고, 변방에서 고유의 검소하고 질박 강건항 기풍을 유지하던 무력 집단이 점차 황실의 정통성을 넘보게 됩니다. 반역이라기보다는 원씨 황조의 수완이 그만큼 졸렬했던 탓이 더 큽니다. 할거 집단 중 이주 씨의 세력이 가장 강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들조차 내분을 겪고, 이 집단은 엉뚱하게도 종래 2인자였던 고환이 최종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주씨는 원씨에 반역하고, 고환은 자기가 섬기던 이주씨를 다시 배반한 겁니다.

마치 (이때로부터 팔백여 년 후)일본에서 아시카가 씨가 자측이 밀던 덴노를 옹립하고 새 막부를 개창하던 시대의 양상처럼, 무력을 장악한 실권자들이 허울뿐인 황족을 내세워 서로 정통성을 겨루던 국면은 여튼 시대가 인정하던 정통성이 원씨 쪽에 있기는 했다는 반증입니다. 이 시기가 동위/서위의 대립 항쟁기이며, 이런 괴뢰극도 싫증이 났는지 고환이 죽고 나서 그 후계자인 고양은 스스로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릅니다(조조의 아들 조비처럼).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도 이로부터 7년 후에 건원칭제하는데, 이때부터 북조는 둘로 쪼개져 화북의 패권을 다투게 되죠. 사실상 삼국 시대가 열린 셈인데, 후한 말의 삼국시대와는 달리 화북에 두 국가가 섰다는 게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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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 My Reviews & etc 2017-11-2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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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더 나은 세상

피터 싱어 저/박세연 역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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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바른 삶을 살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더 나은 누리가 될지는 누구도 그 답을 자신있게 내어 놓기 어렵습니다. <다윈주의 좌파>, <메타 윤리>, <세계화의 윤리>, <무신 예찬>,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등의 명저로 한국에도 폭 넓은 지지층과 독자들을 지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도덕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 저작은, 종전의 책들보다는 한 걸음 더 독자와 대중에 친화적으로 다가간 문장, 화법, 편제를 취했다는 게 특기할 점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편안한 말투와 진솔한 문제 제기로 이 척박한 세상에 새삼 "정의"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촉구했다면, 이 책은 그보다 더 구체적인 이슈 제기를 통해, "윤리, 도덕"이라는 거창한 논점이 사실은 우리의 흔한 일상에 매우 밀착한 주제였음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간 피터 싱어의 책들을 읽어 온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가 새로 시도하는 "파격적인 눈높이 낮춤", "쉽고 간단히 끊어지는 문장", "편안한 문제 제기와 상식적으로 수긍이 가는 타당한 논리" 때문에 과연 그의 책이 맞는지 잠시 표지 앞으로 돌아가 확인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반면 그런 편안한 형식 속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깊이 있고 심오하며, 보편 타당한 결론은 일상인의 상식으로도 흔쾌히 수긍되는 법임을 다시 확인하게 돕습니다.

모두 11장의 구성 속에 83가지 질문을 담았습니다. 이 83가지 질문은 어느 국가, 사회, 공동체에서건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바로 우리 한국에서도 무엇이 맞고 그른지 갑론을박이 치열히 일어나기도 했던 흥미로운 주제들입니다. 83가지 질문이 하나같이 절실한 관심, 혹은 일상사의 절박한 문제와 연관 있는 문제들인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며(뛰어난 사상가는 본디 적실하고 유효한 질문부터를 잘 뽑는 법입니다. 질문이 좋으면 절로 빼어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죠), 그 질문들을 11개의 적합한 카테고리 속에 훌륭히 배치했다는 느낌도 누구에게나 바로 들 것입니다. 우리 독자들은, 단숨에 책을 읽어나가며 윤리적, 도덕적 갈증을 채울 수도 있고, 어쩌면 한 달에 한 장(章. chapter)씩 읽어나가며 중대한 윤리 논점(전통적인 논쟁점도 있고, 현대에 들어와 비로소 대두된 것들도 있습니다)에 대해 차분히 학습, 반추하며 생각을 성숙시켜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

비건인이라고 해서 근래 채식주의를 선호하는 분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육식을 끊으면 건강에도 이롭고 여러 성인병을 막으며, 불필요한 흥분, 욕구의 비등, 집착을 막을 수 있는 기질상의 평형,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논리인데, 개인 차도 있고 하나하나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까지는 않았으나, 자연 친화적 삶을 영위한다거나 동물 애호(어느 정도는 보편적 가치 아니겠습니까) 등의 결과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참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 피터 싱어 교수 같은 분은 예전부터 이 주제로 큰 관심을 모은 여러 저작을 쓰고 발표해 왔으므로, 포괄적 실천적 윤리를 주제로 삼은 이 책에서도 그 얘기를 안 꺼낼 수 없었겠습니다(단, 다른 질문 꼭지에 비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는 않았고요[의외?], 이런 구성상의 절제, 균형 역시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더 높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결론과 근거들, 예컨대 기업형으로 사육되는 고기소들이 메탄 가스를 대거 방출하고(지구 온난화 주범), 어떤 동물성 음식재가 윤리적/비윤리적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 확인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예 채식주의자로 전향하는 게 "윤리적으로"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싱어 교수뿐 아니라 많은 논자들(非비건인 포함)이 일찍부터 해 온 얘기고, 다만 그의 화법이라서 설득력과 친근감(반대로 권위)가 더하긴 합니다.

"인문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효율지상주의를 추구하고 세계화를 앞세워 반사회적인 분업화를 밀어붙이는 추세가 대세를 타는 지금, 한가하게 인문 따위를 떠받들 수 있냐며, 심지어는 진보를 추구한다는 일부에서도 인문, 철학 "따위"를 하찮게 여기는 천박한 풍조가 일기도 합니다(과학이나 공학도 모르고, 인문/철학에 대해서도 아무 이해가 없는 개탄스러운 무지의 산물이죠). 이에 대해서도 싱어 교수는 실천적 인문과 철학의 소양이 얼마나 당사자들의 삶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가꿔 주냐면서 통렬한 개탄, 비판과 열정적인 동참 호소를 펼칩니다. 역시 우리 독자들의 상식(상당량은 싱어 교수 자신이 전작들을 통해 가꿔 주었습니다만)에 지극히 부합하는 내용들입니다. 

벤담 등 전통적 공리주의자들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오히려 이 싱어 교수의 저작들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재미있는 역설적 체험을 겪는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본격 전공 필드라고 할 수 있는 이 분야를 다분히 상징적으로 표현한 "범죄자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그 논의에서, 그는 자신의 체험담과 역사적 사례 몇을 들며 "자비의 본질"에 대한 치밀한 논증과 사색을 전개합니다. 다분히 이 이슈에 대한 결론은 독자를 향해 "열려" 있는 느낌입니다.

이 책에 실린 두번째 질문(순번이 앞이라는 건 그만큼 무게, 가중치가 더하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은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게 진리 일반을 뜻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의 분량을 합친 볼륨과 영겁의 시간을 동원해도 답은 안 나오겠지만, 싱어 교수는 "윤리적 객관주의"에 대한 논의로 범위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객관주의는 어쩌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동시에 싱어 교수의 여러 저작이 끈기 있게 탐구해 온 도전이기도 하고, 나아가 우리 독자들이 "과연 인문, 철학, 윤리에 대한 책을 우리가 읽어 나갈 이유가 있는가?' 같은 질문을, 보다 마음 편하게 해결하게 돕는 실용적 처방이기도 합니다. 생각이 성숙하고 깊이를 확보할수록, 짧은 말 속에 더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데, 모두 네 페이지 분량이지만 읽고 나서 울림이 깊고 오래 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른번째 질문은 "담뱃갑 표면에, 강력한 주의를 촉구하는 이미지(상당히 혐오스러울 수 있는)를 강제로 삽입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 문제는 애연가들의 반대와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한) 혐연 진영의 열렬한 지지가 한국에서도 맞부딪는 지점이기도 하죠. 싱어 교수는 최근 미국과 호주에서 내려진 두 상반된 판결을 소개하며, 표현과 영업의 자유와 공공의 보건권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이 두 권리 중 한쪽이 전적으로 부정되고 다른 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둬야만 하는지, 아니면 어느 중간지대에서 점진적인 타협점이 모색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역시 그만의 치밀하고 자상한 의견을 전개합니다. 온화하지만 열정이 담겼고, 그만의 방향성도 분명히 드러난다는 게 특이합니다. 그의 책을 읽어 온 독자들은 다 알지만 이 저자의 개성은 "주례사 톤"을 매우 거부하는 편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동성애는 비도덕적인가", "인류의 종말은 (과연) 비극인가" 등의 질문은, 보는 이에 따라 "아 이건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문젠데 본인이 해답을 내겠다니 무슨 과대망상인가" 같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읽어 보십시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은, 문제 자체의 스케일과 난점에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야만 한다"는 실용적 욕구에 더 충실합니다. 어떤 질문은, 제목이 부르는 기대와는 달리 화제를 급격히 좁혀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이게 그거하고 뭔 상관?" 읽다 보면, 결국 선명한 지엽적 사례가 의외로 확장성을 넓혀, 난제로만 여겨졌던 질문에 대해 의외의 착안에서 시사점을 마련해 주기도 하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질문 중에는 "투표를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가"도 있습니다. 이런 건 한국의 교수님들과 비교해서, 투정 부리는 듯한 태도와 관점이 그리 다르지도 않구나 같은 생각도 들게 하더군요.

에이미 추아는 여러 도전적인 주장을 담은 책으로 미국 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저자입니다(하긴 한국에서는 추아 이전에도 극성스러운 타이거 맘들이 많기는 했지만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 저자는 타이거 맘보다는 코끼리 엄마, 즉 타인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공유와 연대의 가치를 자식들에게 함양하는 사려 깊은 맘들이 더 늘어나길 기대합니다. 결국 윤리 도덕의 문제도, 종교라는 가면을 쓴 독선(이 주제에 대해서는 책의 다섯번째 질문에 상세한 논의가 담겼는데, 진화생물학자 마크 하우저와 함께 쓴 아티클임이 밝혀져 있습니다)이나 이기심을 멀리하고, 화합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인간 본성(p36)"에 눈을 떠야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던집니다. 책이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건, 이런 자신의 신념 그 실천의 일환으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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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종교개혁 | My Reviews & etc 2017-11-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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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1517 종교개혁

디트마르 피이퍼,에바-마리아 슈누어 공편/박지희 역/박흥식 감수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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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감연히 저항하고 핍박 받는 이들을 위해 신명을 바쳐 투쟁한 인물의 생애는, 세월이 흘러도 그 위대함이 퇴색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그 선구자적 행적이 더욱 빛을 발하는 마르틴 루터의 한평생은, 반추를 하면 할수록 그 원대한 시야와 단호한 결단력, 진리를 향한 일관된 몸짓에 더욱 큰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이 책은 논문집입니다. 논문집이라고 하면 대뜸, 어렵다거나 고답적인 논의, 혹은 다양한 필자들 간의 상충되는 의견 개진으로 책의 맥락을 못 잡겠다거나 하는 당혹감 등이 떠오를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또, 역자 서문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만 "워낙 구성이 충실하게 기획된 덕분에", 필자들의 주장이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느낌이 확실히 옵니다. 단일 필자의 선명한 주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재미있다"고 한 건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독자의 선입견과는 다른 참신한 사실 규명도 있고, 유머러스한 질문에 재치 있는 답변이 조화를 이루는 대담도 있고, 루터와는 직접 관계가 없을 듯한(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시대 상황에 대한 흥미진진한 설명과 논증도 실려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알지만 결코 따분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하면 개혁을 시도하고 추진해 나간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만, "개혁을 당한(?)", 혹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쪽에서는 찜찜하거나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그런 입장까지도 (어느 정도는) 배려하며 쓰여졌습니다. 이상할 건 없습니다. 다른 건 분명히 다르다고 짚어야 하며, 분명한 갈등을 억지 춘향 격으로 서둘러 미봉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신교든 구교든 본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 형제들입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화해하고 한 지붕 아래에서 오순도순 살아야 하겠으며, 이 책에도 나오지만 "칭의 교리"의 일정 사항에 대해 앞으로는 반목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는 공동선언이, 1990년대 후반 로마 가톨릭과 루터 교단 사이에서 이뤄졌습니다. 이런 화해와 포용은 지난시절 양 진영이 얼마나 치열히 싸우고 증오했는지를 돌아보면 실로 역사적이라 할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너무 성대히 기념하면, 구교 측에서 불편히 여길만도 하겠으며 화해 분위기 조성은 더욱 멀어지는 것 아닌가요?" 슈피겔(한국에도 잘 알려진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이자 출판 기업이기도 하죠) 측의 다분히 짖궂은 이 질문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의연하고 성숙한 태도로 답변합니다. 구교 측 역시 지난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 마땅하며, 1517년의 그 사건 역시 구교에서 겸허한 태도로 현장의 문제 제기를 수용했다면 그처럼이나 큰 파장으로 번지지 않았으리라는 의견도 이 책에 나옵니다. 이전에도 구교는 큰 도전과 분열에 직면했으나, 고비를 수 차례 (현명하게) 넘긴 적이 있었고, 이때에는 그렇지를 못했다는 뜻입니다.

신교 신학자들은 구교에 대해 감탄하는 의견도 간간히 개진합니다. 종교 개혁으로부터 무려 500년이 지났지만, 그래서 신교 측으로부터 맹렬한 공격도 받고 위신도 크게 추락했지만, 아직도 단일 교단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놀랍냐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그런 점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니까 "개혁"이 일어났던 거고,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단일 실체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승자는 구교 측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뭐 전혀 근거 없다고는 못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견이 신교 측에서 나온다면, 그건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참으로 관대하고 열린 시각과 마음을 가져서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도 누누이 강조되지만, 신앙이라는 게 특정, 소수, 지도층 인사(사제 계급)의 의견에 철저히 구애되기보다, 각 개인의 사정과 생각과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신구교 중 누가 옳으냐를 가리기보다 외연을 확장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게, 훨씬 더 절대자의 의도와 의지에 부합하는 선택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며, 이런 의미에서도 종교개혁은 획일과 맹신을 거부하며 보다 계몽된 방법으로, 이성(이 역시 신의 선물이자 도구라는 언급이 이 책에 여러 번 나옵니다)에 부합하는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 준 뜻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17 종교개혁의 챔피언은 물론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웅일 뿐 아니라, 로마에 자리한 교황청의 과도한 수탈과 독선, 부패, 착취로부터 독일 민중을 옹호한 게르만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이것 관련 이 책에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스페인이나 다른 기독교 국가로부터 교황청이 거둬 들였던 재물의 양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라에서 저항이나 개혁 움직임이 일지 않고, 독일에서 들불처럼 이 거대한 행진이 벌어진 건 무슨 이유겠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제 생각에는 책이 어느 정도 완결된 해답을 마련해 주는 듯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논문집이긴 하나 구성이 워낙 치밀하여..." 가 바로 그 비결입니다. 잘된 구성과 기획은,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해 어떤 큰 그림의 퍼즐 맞추기를 이미 예비하는 것입니다.

"독일이 가장 가혹한 수탈의 장이었기에 종교개혁의 진원이 되었다"가 일종의 "신화"이듯, 대문에 못을 꽝꽝꽝 망치로 박으며 그 유명한 95개조를 공개한 루터의 제스처도 사실은 가공되었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선언문을 게시할 때는 아교로 붙이는 게 당시의 더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죠. 아교로 붙이는 장면이라니 상상해 보면 왠지 드라마틱한 맛이 떨어지기도 하고, 더중요한 건 루터 개인의 회고로는 그때 상황의 기억이 구체적이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런 문제 제기는 독일의 대학에서 드물게 벌어지지도 않았으며, 루터는 흔히 목격되던 "대자보 붙이기"가 (자신이 주도한 행위라고 해서) 그리 뚜렷이 기억에 남지도 않았으리라는 거죠(본인이 직접 했을지도 의문이고). 이 점에서도, 어리석은 당시 교황청의 대응이 공연히 위기를 자초한 면이 크다는 겁니다.

이 외에도 학자들은 흥미로운 역사상의 if 놀이를 여럿 펼칩니다. 예를 들어, 만약 클레멘스 교황이 황제로 다른 후보(예컨대 루터를 일생 동안 보호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밀었으면 과연 종교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는 논의도 있습니다. 이 시기는 카를 황제와 프랑수아 국왕, 오스만의 술탄 슐레이만 등이 각기 빼어난 수완으로 유럽과 지중해 정세를 좌우할 시절인데, 이들 사이에서 형성된 묘한 파워게임의 균형이 종교개혁의 경로를 좌우한 면도 크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들 영명한 군주들의 정치 놀음은 다 잊혀지고, 기개 높은 전직 수도사의 영웅적인 투쟁만 역사에 뚜렷이 각인되었지만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던 도중 사탄과 결전을 벌이다 잉크병을 던져 그를 일시 퇴치한 이야기도, 그를 존경하고 숭모하는 이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아주 유명한 "전설"이죠. 이에 대해 그 방의 벽에 남은 자국은 잉크 성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서 흥미를 돋웁니다. 물론 루터 자신은 "사탄과의 결전"을 직접 언급한 적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영혼은 삶의 매 순간이 악마와의 투쟁이겠으며, 그런 순수한 정신이어야만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에서 연원한다" 같은 선포, 고백, 확신을 행하고 지닐 수 있는 거죠.

마르틴 루터에 대해 필자들이 내리는 결론 중 가장 뜻깊은 것은, "그는 언제나 같은 시대 같은 공동체에 사는 이들이 타협하고 화해하며 공동선을 모색해 나가게 하려는 쪽이었지, 과격한 변혁과 독선으로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기조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신중한 스탠스였으며, 일부 급진적인 농민세력이나 (영주 때문에 기득권을 억눌린) 기사 계급의 봉기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언제나 암살 등 신변에의 위협을 느껴 오던 그가, 융커라는 가명을 고르고 (성직자나 학자가 아닌) 기사인 양 위장 신분과 외양으로 지낼 때, "기사답지 않은 행동과 처신"으로 여러 번 정체가 들통날 뻔도 했으며, 이때마다 영주가 지정해 준 관리인이 조언과 무마책을 코칭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의 본뜻은 "원형으로의 복원, 회귀"라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복귀하여, 더렵혀지거나 왜곡된 것, 진리 아닌 것을 모두 걷어내려는 움직임이죠. Rückformung이라고도 독일어로 표현하는데, Reformation 역시 정관사 die가 붙은 독일어입니다. 500주년을 맞아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얼마나 초기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했으며 얼마나 루터의 위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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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도시 | My Reviews & etc 2017-11-2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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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미래의 도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편/김일선 역
한림출판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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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괜한 허영이나 탐욕의 공간적 산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너른 대지나 목초지, 농경지에 멀찌감치 간격을 사이에 놓고 자연에 파묻혀 지내는 삶을 원칙과 이상인 줄로만 알지만, 도회지에 모여 문명, 편의 시설, 지혜, 연대의식과 위기에의 대처를 공동으로 이루는 노력 역시 인간적 삶의 본연, 본원적 행태의 하나입니다. 오히려 역사의 진수랄까 참된 국면은 도시의 역사에서 그 대부분을 집약해서 관측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도시의 영광은 인류사 전체의 영광이며, 도시의 위기는 현생 인류 전체가 절감해야 공통의 과제이며, 도시의 미래는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도시"를 예측하고 상상하며 개관하는 작업은 역사의 조망이나 과학 기술의 압축적 향방을 점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큽니다.

도시의 환경,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면, 그 거주민들의 삶 역시 해당 지역에서는 종막으로 치닫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모든 도시가 공통적인 문제를 안았다면, 인류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 전망 속에 조심스럽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도시의 지속 가능성 높이기"를 주요 화제, 이슈로 대뜸 부각합니다. 이에는,

1) 도시 인프라의 활용 효율을 높이는 다세대 주택 수를 늘리기
2) 자원의 재활용, 재가공, 재사용을 위한 시설과 정책 수립, 연구/숙련 인력(전문가)의 확충
3) 자가용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이동수단 확대(자전거 포함)
4) 쓰레기 소각열로 전력 생산을 이룸으로써 인당 에너지 소비량 줄이기 (이상 p17)

등이 포함되는데, 사실 이 대목은 책 전체의 방향성을 독자로 하여금 미리 파악하게 하는,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도시의 성패(盛敗)는, 한정된 공간과 자원을 어떻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아이디어, 이의 현실화를 위한 정책의 고안 집행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4)의 경우 책 저 뒤편 p130 이하에서 세계 여러 도시의 사례를 소개하며 자세히 해명됩니다. 이 이슈 뿐 아니라 책의 모든 논제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1장의 마지막에는 이 SA 시리즈의 평소 태도나 성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의견"이라는 제목 아래 시안적 성격의 단편적 제안이 여럿 나와 있습니다. 이 중에는 전문가의 묵직한 예측이나 아이디어도 있고, 어느 대학생(중국인)의 과감한 발상, 요구도 있으며, SF 작가의 좀 터무니없다 싶은 과격한 "구호"도 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파트가 이례적으로 삽입된 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이 대부분 도시 거주인들이리라는 상정 하에, "당신 역시 얼마든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으며, 기탄 없이 정직한 느낌이나 발상을 표현하는 건 오히려 의무이기까지 하다."는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 아닐까 짐작합니다.

실제로 1)~4)는 인구의 상당수가 농촌 혹은 저인구밀도 지역에 거주하는, 국토가 매우 넓은 미국에서는 어떤 경각심이 생길 만한 이슈일지 모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새삼스럽고 당연한 문제 제기일 뿐입니다. 인구의 절대 다수는 아파트 등 다세대 주택에 삽니다(다세대 주택이라고 하면 저가형 빌라나 원룸만을 대뜸 떠올리지만 본디 용어례의 원칙으로는 단독 주택을 제외한 모든 형태가 다 포함되죠). 3)도 어느 수도권 도시에서나 이것 관련 인프라를 만날 수 있고, 이미 시민 생활 패턴의 일부로서 자리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특히 이 책은 한국 독자에게는 이미 선 이해의 대상으로 머리 속에 자리했거나, 피부로 느끼는 친밀감 덕분에 (시리즈 다른 권에 비해) 이해가 더 빠른 속도로 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의 도시상이라 하면 대뜸 누구나 떠올릴 만한 게 "스마트 도시"입니다. 그런데 필자(해당 아티클)는, 이 주제를 설명하며 대뜸 리비아나 이집트에서의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초두에 꺼냅니다. 일단 이들 나라에서 당시 그 사건이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젊은 층의 소통과 공분의 확산을 통해 이뤄진 건 맞습니다만, 그것과 "스마트 도시"가 서로 무슨 상관일까요? 해당 필자가 떠올리는 미래상의 "스마트함'은, 도시 거주인 전체가 유기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긴밀히 소통하고 친밀감에 기반한 유대를 이루는, 밀도 높은 민주주의가 지배적 원리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똑똑한 도시"입니다.

민주주의는 대개 명분상, 도덕적으로 정당하기는 해도 의사 결정 속도가 느린 것이 취약점이었는데, 이제 모바일 혁명으로 인해 그런 기술적, 구조적 한계까지도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의 합의를 바탕으로 삼기에, 느려도(과거였다면) 일단 한번 체제가 가동만 하기 시작하면 무서운 힘을 냅니다.  잘 뭉쳐진 게 강하고 똑똑해지리라는 기대는 근거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이로부터 밀도 높고 지속적인 혁신이 출현 가능합니다.

"대도시가 효율적이다." 맞습니다. 상식을 갖춘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도시는 경제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뿐 아니라 거주자들의 건강도 개선한다." 건강 이슈에 대해서는 여기(p63)뿐 아니라, 특히 책의 제일 마지막(p222 이하) 같은 대목을 동시에 교차 참조할 만합니다. 아니 도시에서 매일 매연에 찌든 공기만 마시는데 무슨,... 이라고 하실 분이 있다면, 사실 시골의 대기도 (예를 들자면) 중국발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뿐 아니라, 비위생적 요소(천연이라고 다 깨끗한 건 아니죠?)로부터의 위협에도 노출된 게 사실이며, 전염병(人 혹은 獸 어느 편이건 간에) 같은 게 돌 때 전문 인력으로부터의 체계적 지원을 못 받는다면, 결코 "건강 친화적"인 거주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떻습니까? "높은 인구밀도가 오히려 환경 친화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환경에 모여 사니 기본적으로 대사작용 끝에 나오는 부산물이나 생활 쓰레기만 해도 얼마인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일단 1인당 제공되는 인프라의 건설 유지 비용이 낮아지므로, 한정된 재원(물론 세수가 늘어나므로 재원 자체도 크기가 커지죠)을 훨씬 다용도, 고효율, 광범위로 쓸 수 있고, 거주자들이라는 게 남 안 볼 때 환경을 망치려 드는 양심불량만 있는 게 아니죠.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선 환경(뿐 아니라 모든 걸) 걱정하는 의식 있는 시민으로 평가하면서, 다른 시민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 새로운 발상을 해야 하는 동기도 늘어나며, 아이디어나 고안, 발명의 질도 더 높아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해당 필자의 "건설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비전과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농경지가 확대되며 사막화 속도도 늘어나고, 남벌 밀렵 등으로 환경이 더 빨리 파괴된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뉴스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시화가 덜 전진되거나 (역으로) 쇠퇴하면, 사람들은 농촌으로 회귀하여 과거처럼 보편적 빈곤상이 늘어날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 아니겠습니까? 물론 "농촌=빈곤"의 등식은 현대에서도 그저 기계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농촌 간의 거주 비율이 (요즘처럼) 합리적으로 조정되었을 때의 이야기며, 중근세 전근대처럼 절대 다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는 상황이라면 토지의 효율적 이용이 어려워지고, 이는 보편적 빈곤을 초래하는 게 필연입니다.

그 바로 앞대목(p68)을 보면, 해당 필자는 인구가 늘어날수록 도시의 "사회경제적 효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이) "초선형확장"이라 부른다는 언급을 합니다. 이에 반대되게, 소규모 도시일수록 인프라 건설 비중도 적고 단위당 비용도 높아지는 걸 두고 "부선형 확장"이라고 한다는데, 원어는 각각 superlinear, sublinear입니다. 만약 linear라고만 하면, 1이 늘어날 때 덜도 더도 아니고 딱 1만 늘어나거나, 2배면 2배, 3배면 3배, 이렇게 정해진 배수로 밖에 안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superlinear면, 3배, 4배, 혹은 제곱 비율 등으로, 초기보다 더 높은 효율이 추가로 달성된다는 거죠. sublinear는 처음 나오던 효율에도 갈수록 못 미치는 비경제적 패턴이 고착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해당 필자는, 한번 똑똑해진 도시가 그 시민들에게 보장하는 삶의 질이 이처럼이나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도시의 장래에 대해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여) 이만큼이나 낙관적인 미래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지나친 기술 의존형 사고라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조시 보크 기자가 쓴 <환경 도시로 변모하려는 시카고>는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게 쓰여졌으면서도, 환경 보존과 경제적 번영을 동시 달성하려는 동시대 (타)도시 거주자의 관심을 한몸에 모을 만한,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가장 많이 담긴 아티클이겠습니다. 시카고 하면 "아웃핏"으로 유명한 알 카포네 같은 무법자 깡패, 월드시리즈 승부 조작 사건, 업톤 싱클레어의 사회 고발 소설 등이 대번에 연상되는데, 이 도시 주민들도 그 점은 다 의식하는 듯합니다(그래서 더 잘하려 든다는 거죠).

리처드 데일리 시장, 그리고 아직 새파랗게 젊은 환경 담당 총괄 집행역 사두 존스턴은, 과도하게 탄소 에너지를 소비하게 설계된 노후 빌딩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이 잔해를 저렴한 에너지를 뽑아 내는 시설로 재활용할 야심찬 계획까지 마련한 후 이를 실천에 옮기는 중인 "무서운 공무원"들입니다. 타산적이고 얌체 같은 시카고 시민들을 동참시키려면, "이 프로젝트는 돈이 됨"을 충분히 납득시켜야 하는데, 유능한 데일리 시장은 현재까지 성공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카고가 어디입니까. 카포네만 나온 게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 오바마 같은 스타 진보 정치인들도 대거 배출한 지역 아닙니까.

환경 보존이 중요한 만큼, 지능형 전력망을 치밀하고도 기발하게 설계하여, 같은 비용으로 종래의 몇 배에 이르는 산출을 이뤄내는, 생산 구조 자체의 혁신도 무척 중요합니다. 결코 혁신이란, 약탈적 자본의 탐욕만을 만족시키려는 사악한 구호나 독촉 기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LEED인증이라 하여, (앞서 언급한 대로) 건물 구조나 기능 자체를 친환경 포맷으로 바꾸려 듭니다. 초고층 건물 자체가 필요악이라든가 환경의 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환경의 친구로 설계한다는 생각을 예전에는 왜 못했을까요. p148에서는 폐수로부터 얻는 청정 에너지를 설명합니다. 폐수라 하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데, 이로부터 에너지를, 그것도 청정 프로세스로 뽑아낸다니 실로 놀라운 발상과 기술이 아닙니까.

터무니없는 발상인 듯만 해도, 세상은 결국 이런 "미친 도전자, 그러나 착한 시민"들이 모이고 모여 더 나은 곳으로 바뀌늰 겁니다. 저는 책을 마치고서 다시 p35로 돌아가서, 일견 바보스럽고 터무니없어도 보이는 "의견들"을 다시 읽습니다. "불특정 선의의 참여"야말로, 우리 인류가 현재의 번영과 행복을 도시 속에서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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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바뀐 비트코인 쉽게 배우기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7-11-2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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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트코인 쉽게 배우기

이운희,이진희 공저
한스미디어 | 201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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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열풍 때문에, 평소 이런 쪽(가상화폐 관련 한정이 아니라 전체 재테크 일반)에 전혀 관심 없던 분들도 괜히 뒤숭숭해지는 요즘일 겁니다. 어떤 가능성 낮은 돌발 변수의 발생(각국이 갑자기 유통을 금지한다거나, 강력한 대체제의 등장)만 없다면, 비트코인은 결국(이라고 하면 아주 먼 미래엔) 수익을 볼 수밖에 없는 투자 자산의 매력, 자격이 충분합니다. 선입견과는 달리 보안도 든든하고(비트코인 해킹 사건은 거래소 해킹이지 비트코인 구조가 털렸다는 게 아닙니다[특히 이 책 pp. 114~119를 참조하십시오]. 보안의 안정성은 평판 문제가 아니라 수학적으로 증명이 끝났습니다), 기존의 거래 패턴이 만족 못 시키는 부문에서 대단히 요긴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남의 돈을 빌려 투자하는 분들은, 만기에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 기한 안에 수익을 못 내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결국엔 오르지만 단기적으론 등락을 반복할 수 있는데, 대출을 받아 감행한 투자가 하필 저점 근방에서 감행되었다면, 해당 투자자는 자산 자체의 유망함과는 무관하게, 이건 뭐 답이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죠.

법정 화폐나 신용카드에 대해 그 깊은 동작원리를 모르더라도 아무 부담 없이 일상에서 자유로 사용하듯, 비트코인이 일상에 깊이 침투하는 미래에는 아무 위화감 없이 우리는 또 그의 편의를 누리고 있을 겁니다. 화폐나 주식이 본래 용도가 따로 있을 뿐 어떤 투기 이익을 노리고 보유하는 물건(돈도 자기 집 금고에 유독 빡빡 쟁여 두는 분은 그 역시 "무이자 but 안전" 투자 자산으로 인식하고 그러는 겁니다)이 아닌 것처럼, 비트코인도 거기다 투자하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다만 먼 미래에 이게 생활 필수 제도로 자리잡으리라는 기대 하에, "그냥 돈"이라든가 다른 재화들과 언젠가는 교환 비율이 정해질 거고, 그때 비트코인 자체에 높은 가치가 매겨질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챙겨 두겠다는 게 작금의 현상을 낳은 겁니다. 미래 후손들은 비트코인이 뭔지 알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투자 쪽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 원리를 알아야 투자를 할지 말지를 놓고 확신이 서겠고, 혹 실패를 해고 남따라, 묻지마가 아니기 때문에 후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가든 관심 끄든 뭘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긴 있습니다.

원리는 제대로 공부하고 들려면 꽤 어려운데, 고수들에게 실전 팁 위주로 배우면 일단 당장의 의사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팁 위주로 쌓은 지식은 결국 체계를 못 갖추고 단편 상식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데, 사람에 따라 팁을 모으고 모아 자기 쳬계로 만들어버리는 뛰어난 학습 종합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고, 자기가 절실하고 적성 맞고 하면 어느새 다 알아버린 자신을 느닷 발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히 아는 고수가 여러 번 나눠 들려 준 팁들은 문외한에게도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즉 "물고기 자체가 아닌 물고기 잡는 방법")이 될 수 있는데, 제 생각에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 아닐까 싶습니다. "A인 경우에 B를 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A 아닌 경우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그 한 마디를 하며 영양가 있는 다른 여담이나 원리를 구수히 곁들이면, 듣는 사람도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하나를 듣고 셋 넷 정도는 덩달아 감이 오거든요. 어떤 의미에선 거창한 교과서보다 이런 실용서가, 바쁜 일상인들에게는 더 유익하고 고마운 책 같기도 합니다.

책에 나온 대로, 개인간 직거래 아니라(이런 건 비트코인 아니라고 해도 위험해요) 거래소에서 매매하려면 "금융 기관에 준하는" 개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런 걸 보면, 비트코인은 제한적 의미에서 이미 제도권 안에 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하며,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거래에 참여 혹은 관심을 갖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엄연한 현실"입니다. "가상"이란 접두어도 조만간 떼어야 할 듯합니다. 엄밀히 말해, "법정 화폐"도 신뢰와 국가의 보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가상의 가치 표상"이지 실체가 아니죠. "오만원"이란 종이는 오만원만큼의 가치가 투여된 재화가 아닙니다.

비트코인의 창창한 장래에 대해 저자의 가장 강력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pp.12~13에 잘 나옵니다. 신용카드의 경우 카드사로부터 매출업자가 대금을 결제 받으려면 (수수료는 수수료대로 떼이고도) 며칠이 걸려야 하죠. 허나 비트코인은(그것의 통용력, 가치가 충분히 확보되었을 때), 손님에게 결제받은 즉시 내것이 됩니다. 수수료는 당연히 없습니다. 벤더와 상점들이 당연히 반기지 않겠습니까? 단, 이렇게 되려면 사회 전체에 비트코인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 합니다. 예전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발행한 그린백은 legal tender였는데도 다들 꺼려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찍은 당백전은 집정자 당사자가 누린 정치인으로서의 인기와 무관하게, 시장에서 지독한 푸대접을 받았지요. 이 이야기는 조금 뒤로 넘어가서 pp.58~61에 잘 나옵니다.

p52에는 역시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이 나옵니다. "... 그 거래에서, 다른 모든 외부의 결제 체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듭니다..." 저자가 드는 예는, G마켓에서 뭘 사면 그게 그 판매자와 우리가 직거래를 하는 게 아니죠. G마켓이 중간에 끼어 일종의 보증인 노릇을 하고, 셀러로부터 일정 수수료를 떼어가는 방식입니다. 카카오페이나 삼성페이도 마찬가지인데, 쓰는 우리는 잘 의식을 못해도(왜냐하면 이런 회사에서 지불자에게는 부담을 안 지우기 때문입니다), 판매자로서 나중에 대금을 받아야 할 처지에서는 굉장히 신경 쓰입니다. 야식 하나를 시켜도 카드 결제라고 하면 벌써 목소리에 힘이 빠지는 게 다 들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죠.

비트코인은 화폐이기도 하지만, 그걸 주고 받는 자체가 벌써 결제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머니가 아니라 그 이상의, '페이니(pay+money)'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편의가 있으며, 보안 이슈도 그 자체가 이미 해결책을 마련했다면, 사람들이 쓰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법정 화폐라는 것도, 그 정부가 신뢰를 잃거나 레짐 체인지 같은 위기를 겪는다면, 어차피 종이 자체에 무슨 위력이 화체된 건 아닙니다.

허나 비트코인은 어떤 정부, 공적 기관이나 단체의 endorsement 도 없고, 그 자체가 똑똑해서 쓸모를 확보하는 거라, 이제 대중의 인식만 확산되면 모든 거래 수단을 다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게 돈이기도 하고 결제절차이자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장부이기도 하고, 정본 복사본이 동시에 수도 없이 뿌려지는 구조라서 누가 위조를 못 합니다. (이 책에서는 언급이 pp.89~90에 있습니다. 대중서이기 때문에 그 보안 원리까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텐데 정말 최대한으로 쉽게 풀어 주셨네요. 정확하게 알아야 남한테 쉽게 이해시켜 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잘 알아도 성격이 나쁜 사람은 자기만 알고 싶어서 쉬운 설명에 신경 안 씁니다만)

이 책의 깊이와 신뢰도는 챕터3에서 잘 증명되네요. 전자지갑을 만드는 방법이 아주 쉽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 컴퓨터 켜고 해당 설치 파일을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exe류는 언제나 믿을 만한 사이트에서 받으시길요). 모든 PC 프로그램이 다 그렇습니다만 깔고 환경 설정 들어가서 몇 번 조작해 보면 다 익숙해집니다. 단 이 비트코어 코인의 경우, 바로 거래에 쓸 작정이라면 기본 사항이나 설정, 작동법 등은 한번에 함께 배워야 치명적인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이 책 저자분들의 설명처럼) 단일 세션에서 전체를 조감할 필요가 분명 있습니다.

MS윈도10의 이상한 정책 때문에 강제 업데이트 실행으로 비트코인 관련 작업(혹은 다른 뭐라도)에까지 지장이 생기곤 하죠. 저자들이 참 세심하신 게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여 유저 모르는 새 자동으로 껐다 켜지는 일이 없게 배려합니다. p177을 보면, 요즘 또 이런 쪽을 노리는 자들이 있어서, 우리가 코어 코인 전송할 때 (악성 코드나 바이러스를 통해) 가짜 주소가 대신 기입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미지 코드를 (입으로 잠시) 외운 후 눈으로 보고 (가능하면 내 키보드로 직접 써 넣어야겠죠) 주의해서 입력하라고 하십니다. p181애 보면 개인키는 절대 파일로 저장하지 말고 프린트를 따로 해 두라고 합니다. p214에 보면 여러 컷의 사진과 함께 하드웨어 지갑 설정 방법도 나옵니다.

이게 다 고수들이 자신들이 실전에서 애착을 담아 하는 방식 그대로를 실감나게 전수하는 느낌이 전해져서 좋았습니다. 이 책 한 권 갖고 수시로 따라 하며 몸에 익히다 보면 일반인들이야 현 시점에서는 뭐가 막힌다거나 별로 불편할 게 없을 듯합니다. 4부에서는 이더리움이라든가 기타 가상 화폐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어, 저자분들의 꼼꼼하고 한 발 앞서 모든 걸 체크하는 성격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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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미래, 사람이 답이다 | My Reviews & etc 2017-11-22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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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인공지능의 미래 사람이 답이다

선태유 저
리드리드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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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4차 산업혁명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리라는 판단은 기업인, 학자, 저널리스트,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지지를 받는 형편입니다. "인공지능"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폭 넓은 합의가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만, 대체로는 사람의 불완전하고 속도가 느린 연산능력, 못 믿을 감성, 변덕스럽고 편차가 심한 의지 등을 대신해, 오차 없고 빠르며 일관된 기계의 능력이 그를 대신하리라는 예측 쪽으로 수렴하는 듯합니다. 이런 미래라면, 가뜩이나 지금도 자동화 추세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간다는 불안이 모두를 엄습하는 판에, 더군다나 암울하고 비관적인 연상만이 우리들의 마음을 잔뜩 채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비관적인 시선을 두지는 않는 분들이라 해도, 인공지능 주도의 산업상, 사회상이 그리 "인간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에는 거의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흔한 선입견과는 상당히 다른 결론을 내시네요.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이 먼저이며, 오히려 지금보다도 사람은 더 중추적이고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겠으며, 사람의 가치가 우선에 놓이는 사회가 더 질적으로 우수한 번영과 발전을 누린다." 독자인 제 생각대로 책의 결론을 요약해 본다면 이 정도입니다. 우리들 독자들도,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같은 희망은 품어 왔고, 다만 현황이 그리 밝은 전망을 제공은 못 할 듯하기에 쉽사리 동참을 못 했던 것입니다. 책은 선명하고 풍부한 근거를 들어가며 "우리의 건전한 믿음과 진보에 대한 소망은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독자에게 납득 시킵니다. 책을 다 끝내고 나면, 과연 그러리라는, 혹은 그런 당위를 위해 우리가 한층 각성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 소통이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 독자와, 저자 사이에서 말이죠.

"뭔가 다르다, 뭔가가 더 있다." 무슨 뜻일까요? 저자는 얼마 전 <히든 싱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고 김광석의 라이브 무대와 음반(그때쯤이면 이미 CD가 대중화할 무렵입니다)에서의 목소리가 꽤 달랐다는 청중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CD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선명하고 정확한 디지털 음질의 재현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이미 그때도 일부 고급 팬들은 "이게 이상하게도 LP를 못 따라간다"며 전통적인 매체를 고집했습니다만, 그런 고급 귀를 못 가진 다수 대중들은 "레코드의 지직거리는 친숙하고 서투른 잡음의 향수" 정도로 (자기 한계 안에서 자기 편할 대로) 정리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가 더 있다는 겁니다. 폰 노이만이 초석을 놓은 패턴에서 아직은 "질적인 발전"을 못 이루고 있는 컴퓨터가, 일방향 연산 능력의 쾌속 질주만으로 달성 못 하고 현저히 간과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겁니다. CD가 나온지 근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라이브 무대에서 인간이 발성하는 "그 무엇"을 재현하지는 못하는 걸까요?

저자는 아주 단언하다시피 합니다. "알파고가 분명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기기의 능력은 지능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가 수행하는 활활동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차원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아직 학습도 아니다." 저자분뿐 아니라 이미 관련 분야의 학자들은 "강한 의미의 인공지능/ 약한 의미의...." 같은 편의적 구분을 만들어내어, 소모적인 "어의를 둘러싼 논쟁"을 비껴가려 합니다만, 업계에서 그토록 자신 있게 마케팅을 펼쳐 나갈 때의 톤, 어조에 비하면 뭔가 앞뒤가 단단히 맞지 않다는 느낌이네요.

인간의 지능과 학습 활동을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이들은 이런 거품 잔뜩 낀 마케팅이 마냥 신기할지 모르겠으나, 사람만이 행해 온 창의와 도약, 혁신, 고유의 소중한 감성을 중시해온 이들이라면 대뜸 이런 과장된 선전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이죠. 또, 기계가 (거의 반사회적이라 할) 단차원 효율로 사회 곳곳을 침투해 들어온다면, 가뜩이나 신자유주의 흐름에 침식 받고 상처 입은 연대와 공감의 가치가 더욱 훼손되지 않겠습니까? 아날로그 고유의 영역을 지키려는 이들은 이런 진보의 이념에도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또, 예컨대, 현 문재인 정부가 이미 5년 전부터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 같은 슬로건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현상적 의의를 새길 때에 더욱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러다이트 운동을 거론하며, 이런 문명의 기술적 발전상에는 언제나 그 부작용을 우려하거나 현상의 변경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반발이 그저 역사의 필연에 저항하는 이러석은 반동일 수도 있고, 반대로 무분별한 기술적 팽창이 "인간다움, 존엄"의 이념을 훼손하지 않게 하려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견제적 성찰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구별은, 사고의 주체가 얼마나 사려 깊고 이성적인 근거를 토대로 반응, 해석, 통찰한 후 행동에 나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공지능 맹신, 만능론은, 사이비 신앙이나 무작정 저항의 몸부림만큼이나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감정"이란 것의 실체를 모르는데, 딥 러닝의 효율과 성과를 낙관하는 측에서는 이 역시 빅데이터의 개선된(개선되어 가는) 처리와 (그 결과로 실체를 잡아가는) 알고리즘의 작동이, 이 과제 역시 해결하리라는 쪽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폰 노이만 시스템이 아직 극복 못한 "즉흥성"의 결여라는 요소를 근거로 들어 이런 예측에 반대합니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가수 신승훈이 2집 타이틀 곡 작업 과정에서 체험한 "놀라운 영감"이라든가, 전인권과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점 등을 떠올리며, 폰 노이만 시스템은 이런 문제 해결(인식)에 그저 척도적 정확성이라는 양적 접근만 고집할 뿐이며, 그 결과가 극히 비효율적 비경제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허사비스 CEO도 "전력 소모 경감"을 계속 미디어에 어필함으로써 이런 "삽질론"을 어지간히 신경은 쓰는 듯한 불안감을 노출하기는 합니다.

저자는 전산을 전공한 정통파 프로그래머이신데도, 인간이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원하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꽤 높이 평가합니다. 저자는 이어 어렸을 적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경험한 "온돌"이라는 전통 방식의 대안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오로지 사람만이 지닌 소통과 반성, 상호 갈등과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어느 순간 떠오르거나 감지되는(사실은 그 배후에 무수한 노력과 자원 투입이 행해졌지만) 창의적 출구의 발견에 대해, 기계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인간적인, 인간만의" 성취라며, 인공지능이 사람을 능가하려면 이런 자질을 (그 최소 맹아만이라도) 구비하기 전에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지난 인문의 족적을 보면 대개, 우화적 형태이건 명시적인 매뉴얼 포맷(드물지만)로건, 읽는 이의 역량에 따라 답을 얻어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가하게도 인간은 이런 열린 텍스트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비법을 전수했고, 따라서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도 상황과 기분(?), 맥락에 따라 각각 다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 인공지능은 어떨 것 같습니까? 답이 일관되면 그 융통성 없음을 놓고 우리는 경멸감을 표시하며, 답이 왔다갔다이면 우리는 그 신뢰성에 의문을 품습니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아직 우리는 알고리즘화할 수 없는 그 유동성에서 오히려 고차원 해답을 찾기도 하는데, 이 역시 빼어난 지성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입니다. 폰 노이만 시스템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폐인이나 외상 후유증을 앓는 이가 계산 등에 한정하여 놀라운 성과를 내는 걸 보고 전혀 경외감을 품지 않으며, 오히려 저건 정신적 육체적 질환이 낳은 병적 우연에 불과하다며 경멸, 폄하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폰 노이만 시스템의 놀라운 작업 능력을 봅시다. 이게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인공지능이랍시고 과장되이 추켜지는 게 그 실상이 고작 이와 같습니다. 디지털 효율을 무작정 숭배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습니다. 디지털은, 그를 요긴히 쓸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이에게 유용한 도구로 봉사할 뿐이지, 결코 사람과 주종의 위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사람이 위대해지는 건 자기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개체의 한계, 협량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참으로 타당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기계도 클라우딩 방식으로 손에 손을(코드에 코드를) 맞잡으면 훨씬 역량이 강해지긴 하죠.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억 서버를 모두 자원병합한들, 타인의 고통에 눈물 짓는 단 한 사람의 착한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 기적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을 잊을 때, 우리는 우리보다 하등한 기계(혹은 그 무엇이든)의 노예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우리 자신의 (사라져 가는) 존엄이지, 기계의 굉음과 차가워서 경멸스러운 연산 효율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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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2 | My Reviews & etc 2017-11-2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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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리스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저/이경덕 역
살림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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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서양 고전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고 (놀랍게도)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의 초석을 놓았던 그리스 역시, 그 역사와 문화에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모두가 선명히 존재했습니다. 이 2권 역시 시오노 나나미 여사 특유의 열정적이고 치밀한 분석과 추적이 돋보이더군요. 아름답고 우아하며 현대인의 눈에조차 세련되고 현명한 족적을 남긴 고대 그리스인의 성취가 뚜렷이 부각되는 반면, "그 어려운 일들"을 남보란 듯 해내고 나서도 버젓이 저지르는 "인간적인 오류"가 안타깝게 역사의 바른 궤도를 뒤집어 놓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 역시, 초인적인 업적을 달성하고 난 후, "너무도 인간적인" 바보짓의 연발로 비참한 몰락의 내리막 운명을 타는데, 이들 위대한 문명인들 역시 그 운명의 경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오노 여사는 이 시기 지중해 3대 강국으로 아테네, 스파르타, 페르시아를 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권에서 잘 보아 알듯,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둘을 합친다 해도) 인구 수, 강역, 국부(國富) 면에서 대제국 페르시아와 상대가 안 되는 처지였으며, 1권에서 저자의 감동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잘 배웠듯, 골리앗을 꺾은 다윗처럼 믿을 수 없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절멸과 병합의 위기를 면하고 오히려 상대를 제압하는 쾌거, 기적을 이뤄냈던 것입니다. 오리엔트 저편의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3대 강국은커녕 그 밑에서 노예살이나 할 뻔했던 그리스인들은, 절묘한 타협과 전략적 사고, 자존에 대한 확고한 결의로 생존, 번영, 자존 모두를 지켜 냈습니다. 1권을 꼭 먼저 읽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는 지장이 없으나(저자 특유의 스타일로, 책과 주장의 맥락을 독자가 따라오게 하려고 몇 번의 신나는 강조와 되풀이가 이어지기 때문이죠), 1권에 이어지는 독서라야 감동이 몇 배는 더 늘어납니다.

(결과를 뻔히 다 아는 이야기지만)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의 진군이 실패로 이미 귀결되었기에 이 2권은 독자 입장에서 "어휴 우리 잘생기고 착한 그리스가 저 덩치 큰 악당에게 혹시 맞기라도 하면 어쩌나" 같은 조바심은 일찍 접고 편안히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자는 언제나 우리 독자들에게 확실한 감정 이입 대상을 정해 주고 자신만의 신나는 이야기를 따라오게 만들죠. 1권에서도 그랬지만 주인공도 아니고 빌런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이긴 한데, 그래도 미련할망정 정을 완전히 끊을 수 없고 아테네인들 못지 않게 무슨 후속담이 자꾸 궁금해지는 (다른 이유에서 위대한) 스파르타인들 역시, 1권에서처럼 마냥 강력하고 강경하고 무식한 게 아니라, 자기 개성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많이 약한, 또 더 유연해진 모습을 이 2권 전반부에서 드러냅니다. 용기와 지혜의 결과, 포상으로 최상의 번영을 누리는 주인공 아테네, 좀 기가 죽고 유해진, 주인공에 대한 질투 때문에 발목잡기를 일삼던(일단 이렇게 쉽고 유치한 프레임으로 봐야 재미가 나죠) 스파르타, 기가 팍 죽은 악당 페르시아, 이 3자간의 편안한 역할 배분이 이뤄진 덕에 2권 전반부는 확실히 편안하게 읽어갈 수 있습니다.

1권에서 비교적 다양한 얼굴들이 등장해 이야기 뼈대를 잡기가 조금은 귀찮았던 독자(그런데 정말 이렇게 느꼈다면 그런 독자들은 정말 많이 게으른 분들입니다. 줄기가 정말 복잡히 뻗은 고대 그리스사를 그 정도로나마 요령껏 간추려 놓기도 힘들거든요. 로마사와는 또 차원이 다른 분석상의 난해함이 엄존하는 그리스 역사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제서야 시오노 여사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네요)라 해도, 이 2권은 진짜 "이야기"만 쭉쭉 진행되는 구조라서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 1권은 또한 진지한 제도사 분석이 부분적으로 이뤄져서(굉장히 유익하긴 해도) 흐름이 끊기는 면이 있었다면(그렇지도 않았습니다만 정말 "이야기" 하나만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2권은 그나마 그런 애로(아니지만)도 없이 시원한 관람과 질주가 가능합니다.

왜 그리스, 로마 역사가 재미있는가 하면, 구도상 승패가 빤히 정해져 있을 것 같은 싸움도, 영리한(혹은 위대한) 주인공의 기지와 자질 때문에 의외의 방향으로 확 뒤집히는 결과가 빈번히 일어나거든요. 키논 역시 상식대로라면 그 위업과 공적 때문에 영원한 정치적 승자로 위상이 굳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라는 놀라운 정치적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 정치가(키논에게는 후배이자 라이벌 진영의 경쟁자)가 등장하여, 아테네와 전체 그리스의 역사가 지극히 아테네적인(후대인들의 규정대로) 방향으로 흘러가게 키를 틀어 버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시오노 여사의 평가에 의하면 "모든 것을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만들어 버리는, '유도하는' 천재적 능력" 때문이었죠.

이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자측이 수세에 몰렸을 때,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게 도와 줍니다. 혹 싸움에서 져서 침체되었을 때, 재기와 대안과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이른바 아Q식의 정신 승리와 달라서, 발상이 그에 도달한 순간 바로 의욕을 갖고 극복을 위한 실천에 나설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억지로 기뻐 날뛰거나 합리화, 자기 위안, 현실 도피를 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몰랐지?"하며 진지한 각성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특징이죠. 책에는 "키논이 연설하면 청중들은 감동하고 울컥하고 격동되었지만, 페리클레스가 연설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을 멈추고 골똘히 경청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자 충분한 근거 있는 상상이며, 정치가나 지도자가 전자 같은 자질을 갖기도 힘들지만 후자는 정말로 드물며 위대한 자질입니다.

마치 카이사르나 중근세 체사레 보르자에 대해서처럼, 이제 미남 페리클레스를 붙잡고 이 시오노 할머니가 또 덕질 동인질 시작이구나 하는 분들도 있겠는데, 그 정도로 감정적 폭주를 하시지는 않습니다(저도 왕년에 여사의 그런 경향을 엄청 개탄했던 독자로서, 이 점은 제가 보증합니다. 진짜 원숙해지셨어요). 아 물론, p119를 보면 "고대 3대 미남"'이라면서 아휴! 이분 또 시작이네 싶은 대목도 없지는 않은데, 게다가 간지럽게도 그 구체적 규정은 페리클레스=편안한, 알키비아데스=위험한, 옥타비아누스= 냉철한 아름다움 이라니 독자의 오래된 닭살이 또 돋을 밖에요. 근데 좀 다분히 의식을 하셨는지, 페리클레스에 대한 기술은 꽤 차분합니다. 이거 후반부나 3권 위해 뭘 아껴 놓는 것 아냐? 이렇게 드라이하게 진행할 리가 있나? 모르긴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분명 의식을 하시는 겁니다.ㅋ

키논에 대해 저자는 "친 스파르타"로 분명히 포지셔닝을 합니다. 위업은 위업대로 이루고도 제 본향에서 흔쾌히 인정 못 받는 거물들이 꼭 있는데, 그 이유는 인물 개인의 정체성과 지향이 소속, 출신 집단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에 태어나 불세출의 패권 정치가가 되어야 했을 사람이 이 시끄러운 아테네에 태어나 할 말도 채 못 하고 저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물론 스파르타도 전통과 시스템에 의한 독재지 개인의 의지가 체제를 바꿀 수는 없는, 희한한 보수 구조였죠)... 그렇다고 그 위대한 인물이 개인 감정이나 에고 때문에 배신자의 길을 걸을 수는 없고, 동시대인들을 안타까이 여기면서("에휴.. 니들도 참. 답은 저건데 말이야....") 최대한 키를 그쪽에 가깝게 몰고는 갑니다. 그는 분명 스파르타식의 엘리트 과두정치를 꿈꾼 인물 아니었겠습니까? 그의 현명한 선택은, 자신의 시선과 조국의 열망 그 방향이 어긋나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절제를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타협과 조화를 도모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현명했습니다. 싫은 사람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그의 위대한 자질(특히 군사 방면)이 최대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조국과 사회를 위해) 발휘되도록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는 이 시기 특히 하층민들의 반발로 큰 고생을 하는데, 종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대목이 드라마처럼 재생되는 느낌이 신기하더군요. 이런 거 하나만 봐도 확실히 시오노 여사 특유의 맥락화, 팩트의 재정돈 버전으로 읽으니 뭔가 재미랄까 역사 읽는 동기 부여가 확실히 되는 느낌입니다. 다 아는 소린데도 재미있고, 이거 내가 알던 지식을 이렇게 강제(?) 재해석 당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금세 진정될 만큼, 이 2권은 밀도 있게 잘 쓰여졌습니다. (거칠게 요약해서) 전반부가 페리클레스, 후반부가 알키비아데스(의 모에화?)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좋은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위대한 남성들의 행적은 열정적인 여성 찬미자의 시선과 해석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눈에 띄는 뭔가가 있지 않은가 하고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얼씨구!). 알키비아데스 같은 인물은 고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꽤 인상깊게 다뤄지곤 하는데요(페리클레스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이야 또 위상 자체가 다르니), 이처럼 재미있게 낭독되면서도 사료 조사가 치밀히 이뤄진 웰메이드 대중서 덕분에 그 고전의 수요가 좀 줄어드는 건 아닌지, 아주 쓸데없는 걱정도 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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