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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읽어보고 싶.. 
너무 꼼꼼하게 리뷰를 올려주셔서 .. 
리뷰를 보아하니 책 내용도 너무나 궁.. 
이무것도 안 하는 직업이라는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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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se of Abraham Cahan - Seth Lipsky | My Reviews & etc 2017-02-2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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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수입양서]The Rise of Abraham Cahan

Lipsky, Seth
Random House Inc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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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캐헌은 그 자신이 유년기에 겪은 혹독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국수주의, 시오니즘(그 동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에 결코 기울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유명한 말 "우리는 유대인이기 전에 인간, 인류의 한 구성원임을 잊지 말자"처럼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논설, 에세이, 평론의 집필에 경력 대부분을 헌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에서야 가해자의 위치로 돌아서 거의 전세계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습니다만, 캐헌의 활동 시기에만 해도 유대인 밀집 거주지에선 언제나 수적으로 우세한 타 종족으로부터의 질시, 공격, 테러, 학살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929년 벌어진 요르단 강 서안의 헤브론(지금도 말썽이 잦죠)에서는 무슬림들이 대거 난입하여 토착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당시 헤브론의 유대인 인구는 대략 3% 정도였는데, 일부는 천 년 넘게 여기서 살아 온 세파르딤이며, 일부는 19세기에 이주하기 시작한 아슈케나짐이었습니다(꼭 시오니즘이 전적으로 이주 동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은, 한편으로는 뿌리 깊은 적대감과 경계심, 다른 한편으론 이 지역을 신탁 통치하는 영국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간접 항쟁의 수단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유대인들이 장악하려 든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다수 아랍인 세력을 자극했습니다. 사람도 많이 죽었지만 부상자 중에는 잔혹한 린치(사지 절단)를 통해 심각한 불구가 된 이들이 많았기에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에이브러햄 캐헌은 노년에 접어들수록, 고귀한 이상주의 일변도였던 언론인 활동 초기의 노선에서 살짝 이탈해갔던 느낌이 적지 않다고들 합니다. 어느 사상가나 문학가, 정치인, 철학자라 해도 초심이랄까 지조, 신념을 투철히 견지하기란 매우 어렵고 또 드물겠는데, 캐헌은 여튼 종족으로서의 정체성, 고유한 가치를 지나치게 내세우면 (이미 세계에 만연했던) 각종 분쟁과 다툼, 증오의 씨앗이 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기 종족을 다른 모든 외부 집단의 공격 표적으로 떨어뜨릴 뿐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한겨레신문에서 "이스라엘은 결국 망국의 길로 치닫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현재(기사 읽을 당시) 이스라엘이 심각한 국운의 고비를 맞는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고개를 갸웃한 적 있습니다. 기사의 골자는 대략 저 캐헌이 한 세기 전에 지적한 논의들과 결론에서 일치하더군요.

이 책은 "회고록에 대한 회고록", 혹은 어제 리뷰한 캐헌의 소설 <The Rise of David Levinsky>에 바치는, 한 유대계 미국 언론인 후배의 평전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회고록"은 뭘 가리키냐면, <Bleter Fun Mein Leben>이라고 생전에 캐헌 자신이 쓴 책이 있습니다. 가장 유창하고 정확한 영어를 구사한 언어의 천재였으면서도 유독 이 자신의 회고록만큼은 이디시어(그의 모어)로 쓴 채 남겨 뒀다는 점은, 활발한 현실참여주의자였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술하기를 꺼리고 삼간 그의 내성적이고 겸손한 면모를 잘 드러내 보입니다. 그 헤브론 학살 사태가 터지기 3년 전쯤, 미국에서 이디시어로 출판된 캐헌의 회고록을, 캐헌의 타계 십여 년 후에 리언 스타인 등 그의 후배, 추종자들이 영어로 번역해 낸 게 바로 <The Education of Abraham Cahan>입니다.

원제는 "Bleter Fun Mein Leben", '내 인생으로부터의 몇 쪽' 정도로 번역 가능합니다. 이디시어는 중동부 유럽에 집단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편의상 만들어 내고 통용어로 쓴, "독일어의 피진"에 가까운데, 저 בלעטער(복수형)만 해도 독일어의 해당 어휘 Blatt(잎사귀)에서 거의 그대로 유래했습니다. fun(פון)은 독일어의 von, 영어의 from과 같죠. 재미있는 건 왜 이 번역서의 제목이 원문의 문언을 안 따르고 3인칭화하여 "캐헌의 (젊은 시절) 교육"이라고 붙였냐는 점입니다. 물론 인생의 전반기를 주로 다뤘으니, 언론인으로서 입신한 후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독서한 캐헌의 행적이 주로 다뤄져서인 이유도 있습니다만, 아마도 많은 유대계 미국인들에게 펜으로 세상을 바꿔 보려 노력한 모범적인 인생이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제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의 결론은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누구라도 보편적 가치를 지향해야 자신의 발전과 이상도 실현할 수 있고, 타인과의 조화로운 공존도 가능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덕스럽고 천박하며 자기 중심도 못 잡는 어리석은 대중에 부화뇌동하는 게 아니라, 현명하고 조화로운 품성을 갖춘 현인들의 발자취를 좇고 그 가르침을 몸에 배게 하는, 말 그대로의 교육이 필수적이라 하겠죠.

이 책의 저자 셋 립스키는 지금도 생존해 있으며, 한때 꽤 높은 발행부수를 찍었던 일간 <뉴욕 썬>紙의 창립자이자 편집인입니다. 캐헌이 거의 사망할 무렵에 태어난 분이지만, 바람직한 유대계 언론인으로서 캐헌의 모든 행적에 롤모델로서의 애정과 존경을 바치고 산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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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se of David Levinsky - Abraham Cahan | My Reviews & etc 2017-02-2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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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수입양서]The Rise of David Levinsky

Abraham Cahan
Dover Publications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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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유대 혈통 집안 고유의 교육 전통이란 참으로 힘이 큽니다. 자부심으로 찌푸린 표정에 지성과 사색의 흔적이 배어나는 얼굴선 등이 지난 시절 동유럽, 러시아 일대에 거주하던 유대 지성인 용모의 공통점인데요. 이들은 하나같이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지만 현실과 체제의 모순에 대해 날카로운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점도 닮아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체제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미 신대륙으로 건너와 새로운 기반(그 밑천은 대부분 지적 자본)을 다져 입신에 성공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과 언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는 에이브러햄 캐헌입니다.

19세기 후반에는 많은 지식인들, 청년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음은 몇 주 전 리뷰에서도 말한 적 있는데요. 그는 러시아에서 알렉산데르 2세가 암살되자 진보진영의 입지가 크게 위축될 것을 우려하여 미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모국어로 이디시어를 구사했지만 벨라루스, 러시아 일대에서 성장하였기에 러시아어에도 능통했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미국에 정착해서는 바로 영어를 체득하는 등 대단히 머리가 총명하고 특히 언어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대체로 제의되는 일이란 저널리즘, 문예 쪽 직업인데 그는 여기서 두각을 드러내었고, 자신 같은 유대 혈통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는데, 이때 동시에 그는 여성의 자립과 권리 신장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습니다. 이 무렵 사회 개혁 운동이 세부적으로 분파를 형성하지 않고 여러 주장이 한 패키지로 취급되었던 사정도 있겠으나, 여튼 전형적인 계몽 지식인, 활동가의 모습을 갖춘 열린 시야의 위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또한 자신처럼 낯선 환경에 갓 이민자로서 정착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격려와 도움을 주었는데, 현재 포퓰리즘에 편승해 강력한 반(反) 이민 정책을 밀어붙이는 미국의 현실과 대비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죠.

그는 신대륙에 건너와 자신의 능력만으로 자립한 사연에 대해 적지 않은 긍지를 지녔고, 그 체험을 토대로 창작한 게 바로 이 <The Rise of David Levinsky>입니다. rise of ~ 라 하면 슈퍼히어로물 제목에나 어울릴 것 같지만, 이름 없던 존재가 세상에 자기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 혹은 치열한 성장담, 성공 스토리에는 두루 붙어 잘 어울리죠. 이름은 바뀌었지만 주인공의 역정은 너무도 자기 자신을 닮아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인데, 유대교 교육 시설에서 또래 친구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가며 두각을 나타내던 십대 시절, 탈무드 암기 실력으로 자신을 주눅들게 한 폴란드인, 그리고 호르몬 분비가 왕성하던 시절 처음으로 마음을 설레게 한 어느 이성에 대한 회고까지,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인 필체로 한 총명한 유대인 소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어른이 되었는지, 세상과 소통한 방식은 무엇이었는지를 흥미있게 그려냅니다.

레빈스키(캐헌 자신이기도 한)에게 언제나 든든한 자산이 되어 준 건 독서였습니다. 중산층 유대 가문이 보편적으로 자녀에게 확실히 체득시키는 게 지식과 독서, 교육의 중요성인데, 이것이 규칙적인 생활과 금욕적, 절제된 습관을 강조하며 줏대를 지켜 나갈 것을 강조하는 유대식 종교 문화와 결합하여, 큰 부자가 되든 타인에게 영향을 두루 끼치는 지성인이 되든 중요한 추동력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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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①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 My Reviews & etc 2017-02-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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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우지더 등저/자오시웨이 그림/한국학술정보 출판번역팀 역
이담북스(이담Books)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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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2015) 중국에서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국가원수들을 초청하여 전승절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른바 "열병식"도 포함되었는데, 사실 이보다 세인의 눈길을 더 끈 건 시 주석 부부가 정원 가운데에 서서 각국 수반을 맞으며 기념촬영을 하는 행사였습니다. 시 주석 내외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긴 lane을 걸어(올라)간 후 합류하여 사진을 찍고, 펑 여사의 정중한 손짓 안내를 받아 퇴장하는 방식이었는데, 글쎄 여러 복잡한 느낌이 들게 하더군요. 무튼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추축국을 격퇴한 쪽은 소련, 그리고 중국입니다. 이들 두 나라가 입은 인명 피해, 물적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독일과 일본의 악독한 초기 침략 공세(어느 누구라도 바로 항복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기습적이고 파괴적이었던)를 강인한 항전 의지로 막아낸 공이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사를 소련 측 시각, 중국 측 시각으로 고찰하는 작업은, 비록 이들 국가의 학계(관변)가 적잖은 왜곡, 과장, 선전을 끼워넣는 습성이 있다 해도, 일단은 존중하고 의미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큰 몫을 해낸 건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2015년 중국에서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연환화고(連環畵庫)> 시리즈의 첫째 권 한국어 번역판입니다. "연환화"의 기원은 남북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표의문자를 쓰는 중국독서문화의 특성상 대중들에게 널리 지식과 컨텐츠를 보급하기 위해, 신해 혁명 이후 특히 발전을 본 포맷입니다. 한자를 많이 써야 하는 일본 출판 풍토에서 "망가"가 널리 보급된 사실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페이지마다 큰 규격의 삽화가 두 컷 배치되고, 삽화마다 작은 폰트로 사항 설명(역사 서술)이 세 줄 정도 병기된 형식입니다. 모두 14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다 그림이 대부분이니 금방 읽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게 겉보기와 달리 빨리, 간단히 소화되는 내용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1/5쯤 읽고선 바로 다가왔습니다. 도판이 많다고, 쪽수가 적다고 가벼이 볼 게 아니라는 점 처음 실감케 하는 독서였다고나 할까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첫째 2차대전을 그동안 서유럽 승전국 위주의 관점으로 공부한 독자의 한계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주제에 대해 쌓아 두었던 기존의 지식, 그리고 이처럼 새로이 접한 시야를 서로 조화, 통합시키는 작업을 다소 방해한 듯했습니다. 두번째로,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큰 시련을 겪은 중국측 지난 사정을 개관하는 마음이 결코 편할 수가 없는, 한국인으로서의 공통된 심회가 또 작용했겠지요.



책은 "관점"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상세한 팩트를 중심으로 중일전쟁 초기를 조망합니다. 1권 후반부가 중일전쟁 포커스고, 전반부는 유럽에서 히틀러가 주데텐이나 체코 본토를 건드려 가며 망동을 부릴 시절을 짚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황의 디테일을 육하원칙에 맞춰 서술하기 때문에, 도판 비율이 높긴 해도 역사책 읽는 기분이 분명히 납니다(그러니 다시 강조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넘기지 마시길요). 일러스트는 작가의 상상, 창작도 있고, 유명한 기록 사진 푸티지를 그대로 모사한 것도 있습니다(특히 히틀러나 마오를 담을 때). 어느 컷이건 앞의 것과 긴밀한, 혹은 함축적인 내용 연계를 맺기 때문에, 그림의 완성도와는 또 별개로 묵직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팩트의 서술, 벌써 취사선택부터가 "관점"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죠. 대부분의 서술, 요약은 누구나 동의할 만한 무난한 관점을 띱니다만, 예컨대 영국이 일본과 협정을 맺어 양쯔강을 경계로 세력권 인정을 해 줬다는가 하는 사실을 두고, "유화정책의 확장"으로 단정한 부분은 확실히 중국측만의 해석을 내세웠구나 싶었습니다("유화정책의 확장"이란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유화정책은 힘이 없어서 더 강한 상대를 달래는 건데, 상황에 떠밀려 가는 걸 어떻게 "확장"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지들[영국]은 그걸 하고 싶어서 했겠냐는 거죠). 또, 미국이 노구교(루거우차오) 사건 전후로도 계속 일본에 광물, 자원을 수출하여 중국측의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점도 강조하는데, 이들 양국은 여튼 정식 외교를 맺은 사이라, 특별한 법적 조치 없이 대뜸 금수 조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의 소위 ABCD 포위망 형성이, 일제가 무모한 태평양 전쟁 감행의 직접 동기가 되었음은 엄연한 팩트입니다. 중국측의 피해의식이 과장되이 드러난 대목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튼 우리 독자들은, 우리 경제와 정치, 군사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국 측이 역사를 이런 관점으로 본다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네요.


장개석 측의 남경 국민정부가 가장 아파해야 할 대목은, 일제가 1931년 만주(둥베이)를 병탄하고도 모자라 이처럼 중국 본토를 넘볼 단계에서도 소위 "공농홍군"의 토벌에만 주력하여 정권의 안위에만 신경을 기울였다는 사실이죠. 이 점은 같은 중국인 누구에게도 어떤 항변을 할 근거가 없습니다. 책은, 파죽지세로 밀고내려와 화북 거점의 상당수(누구나 강조하듯, 중국처럼 광대한 영토를 선이 아닌 면으로 장악하는 건 지극히 어렵죠)를 점령하고는, 상하이에서 중국측과 일전을 벌입니다. 책의 3장은 상하이 전투를 바로 다루는데, 독자들은 책에서 상세히 기술한 내용을 주의깊게 공부할 필요가 있겠네요. 확실히 이런 내용이 텍스트 위주라면 지루할 수 있는데 그림이 함께하니까 잘 읽히긴 합니다. 그림 위주라고 가벼이 보고 덤빈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울 수 있어도, 반대로 빼곡한 글자 위주의 전쟁사만 보던 독자라면 엄청 고마워질 겁니다.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에게 아주 친숙할, 이른바 (협의의) 사회과학서적(두레, 일월서각 등등)에서 자주 봤던 이름 장즈중(장자충), 펑위샹(풍옥상) 장군 등의 활약이 이 상하이 전투에서 아주 두드러집니다. 흔히 "파시스트 강도"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무렵의 일본 만군 측은 정말 뻔뻔스러울 만큼 억지를 지어내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중국 측의 정당한 이해를 침해했죠. 우리는 중국측이 당시 변변한 항전도 한번 못해보고 일패도지한 줄 알지만, 특히 이 책은 9집단군, 21집단군, 항공 제4대대 등의 영웅적인 항전과 전과를 집중 소개합니다. 일본 측은 엄청 고전하다가 증원병력이 본격 파견된 후에야 승세를 굳히는데요. 이 과정에서 특유의 교활한 술수를 부려 화전 양면 전술을 구사하고 쿵샹시 등을 만나 위장평화공세를 펴기도 합니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간악한 행태지요. 마오는 이 국면에서 따로 세운 공은 없으나 휘하의 세력에게 이러이러하게 대응하라며 먼 데서 지침을 내려준다고 하네요.

책은 연환화라는 그래픽의 역할에 크게 의존할 뿐 아니라, 책 앞에 인물들의 간략한 소개, 전황의 연대기식 정리 등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지도가 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 1권에는 권두에 실린 소략한 세 컷뿐이라 그게 아쉬웠습니다. 중일 전쟁, 나아가 2차 대전 전사에 대해 그간 보이던 면만 주목한 우리 독자들에게 균형 잡힌 시야를 갖게 도와 주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연환화 중 삽입된 텍스트는 당연히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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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세계 중산층의 몰락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7-02-2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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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1세계 중산층의 몰락

폴 크레이그 로버츠 저/남호정 역
초록비책공방 |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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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급측면(중시) 경제학이라고 하면, 자유방임이라든가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에 대한 신뢰(맹신) 같은 조류에 대뜸 연결시키기 쉽습니다. 쉽게 말해 보수우파 경제학의 든든한 한 분파 중 하나죠. 이 책의 저자 폴 크레이그 로버츠 교수는 실제로 저 학파가 세계 초강대국의 정책 기조를 장악했던 레이건 시절 핵심 경제 핵심 브레인 중 한 명으로 활약했고, 그 공으로 각종 영전을 수훈받은 인물입니다. 아무리 파격적인 발상을 일삼으며 기존 해석의 전복을 꾀하는 논자라 해도, 세상에 레이거노믹스를 두고 좌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책은 우파보다는 진보좌파 독자들이 쌍수를 들어 반길 만한 주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슈퍼리치들만 배를 불리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해지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자체 정화 기능을 상실했다, 약탈적인 금융자본가(뱅크스터라는 신조어를 씁니다) 말고 모두가 패자가 되는 게임이다, 생태를 총체적으로 파괴시키는 몰염치한 기업 활동 때문에 "세계화"된(되어가는) 지구는 오염되고, 가난해지고, 끝내 모두가 제3세계로 전락할 것이다(이건 저의 요약이 아니라, 저자의 책 곳곳 주장을 합쳐 보면 논리적으로 자동 도출되는 명제입니다), 어떻습니까? 시민사회단체나 진보정당의 교육 홍보 자료에서나 볼 법한 주장들이라구요? 다시 저자의 약력사항에 눈을 돌이켜 봅시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 연방 정부 재무부 차관보를 지냈으며..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독자 눈에 지금 헛 것이 보이는 중인지 원.

사실 돌이켜보면 서플라이 사이드 진영은 국민경제라는 거시경제 단위의 총체적 활력, 건강성에 보다 주안을 두었다는 점에서, 행여 자국의 거시경제에 위해가 될 상황의 변동, 정책의 전환 따위가 눈에 보이면 당연히 공격적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격한 근본주의 우파 같으면 아예 거시의 미시환원을 주창하지, "낡은" 국민경제, 국가 같은 관념을 아예 도외시하기도 합니다. 그런 공급측면학파의 전성기 시절 중진 중 한 분이, 탈규제 글로벌 트렌드 속에 자기반성 기제가 거의 해체되다시피한 신자유주의(이 책에서 그런 표현이 자주 쓰이지는 않는데, 다만 "신경제"가 거의 호환되는 개념이기도 하고, 이 책의 원제가 레세 푀르, 즉 자유방임의 총체적 실패를 지적하는 문구이므로 그냥 써도 무방할 것 같아요)를 맹렬히(좌파보다 더합니다ㅋ) 공격하는 게 어떤 변절(ㅎㅎ), 회심, 혹은 리캔테이션 같은 범주로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즉, 그로서는 "기존에 밀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는 겁니다. "지금 미국의 국민 경제가 다 죽어간다." 이런 위기의식이 든다면, 그 치유를 위한 처방에 (효과만 있다면) 어떤 내용도 담길 수 있죠. 아 "공급 측면을 강화"하는 게 해당 학파의 사명 아니었습니까.

시민운동가는 뜨거운 가슴으로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학자라면 자신의 입장, 혹은 기존 도그마에 대해 반박을 개진할 때 명확한 근거를 들어야 합니다. 직관이 아무리 뛰어난 학자(예를 들면 케인즈)라도 치밀한 논증과 실례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그건 자격이 없다고 봐야겠죠. 석학의 저서답게 그는 첫 장에서 "왜 자유방임주의(특히 자유무역 만능주의)의 신화가 (이제는) 깨졌는가(혹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가)?"를 차분히, 치밀하게 설득, 입증합니다.

경제학 중 특히 국제무역론을 전개할 때, 경제학의 개조 중 한 명인 리카도의 "비교우위설", 그리고 헥셔-오린 모형의 언급은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이는 마치 애덤 스미스의 분업론이라든가, 알프레드 마셜의 수요-공급 동일가치설이나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무류(無謬)적 절대 도그마에 가까운 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1980년대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 대표라든가, 우루과이라운드라든가, WTO 설립 당시 선진국들이 개도국을 그토록 몰아댈 수 있었던 원동력도, "아니 학문적으로 당위가 확립된 사항에 대해 왜 정치적 핑계를 대며 회피, 부인하려 드는가? 당신은 대학에서 대체 뭘 배웠나?" 이 한 마디에 반박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제 사정이 바뀌고 있다는 소리니 귀를 쫑긋 세우지 않을 수 없죠. 본래 삼라만상에는 근본 질서라는 게 있어, 일시적으로 교란, 요동을 겪어도 결국은 정상(normal)로 회귀할 수밖에 없고, "시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도 그 근본 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걸로 여겨져 왔습니다. 작금의 교란은 그저 일시의 일탈이 아니라는 게 이 책의 시사, 아니 강력한 주장입니다.

저자(뿐 아니라 다양한 학파의 많은 학자들이, 이 책에도 여러 군데에서 인용되듯 이미 제법 오래 전부터 입을 모아 가던 결론이긴 합니다)는 먼저 리카도의 비교우위설이 대전제로 깔고 있던 두 가지 사실을 들춰 냅니다. 첫째(이건 뭐 이론적으로 빼도박도 못할 명쾌한 논증이라 좀 충격적이기까지 한데요) 각국의 상대가격 비율이 달라야 한다, 포르투갈이 (다른 건 다 접고) 와인만 생산하려면, 그 와인이 다른 나라의 사정에 비해 포르투갈 안에서 훨씬 저렴해야 한다. 영국에서 옷:와인=1:2(단위는 일단 무시합시다)이라면, 포르투갈에서 1:1 정도는 되어야 분업화의 이익이 있다(이 경우 영국도 와인은 접고 옷만 생산하는 게 이익인데, 옷이 상대적으로 싼 편이기 때문이죠). 이익이 있다는 건 두 나라 모두, 같은 노력(자본, 노동)을 투입해서 더 많은 양을 생산하고 이를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종전보다 손해를 보지 않는 포지티브 썸 게임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는 어떤가? 물론 편차가 여전히 존재하나, 세계화가 상당히 진척된 지금 어느 나라건 상대가격 구조에 별 차이가 안 나는 게 현실에 가깝다는 겁니다. 옷과 와인의 가격은 어느 나라를 가 봐도 대체로 1:2의 비율이라는 거죠. 저자는 상당히 날카롭게 일반의 착각을 지적하는데, 일본의 자동차 회사가 미국보다 싼 값에 자동차를 생산하는 건 리카도의 이론에서 말하는 그 비교 우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자동차가 흔하게 만들어져야 그게 리카도적 의미에서의 비교우위라는 뜻이죠.

두번째로 진짜 충격은 이 부분인데, 리카도는 특히 생산 요소 중 자본의 국제 이동을 거의 상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자본이 다른 마음을 먹고 생산 기지를 (인건비가 싼, 혹은 토지 임대료가 저렴한) 타국으로 옮긴다면, 리카도의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지금 자본은 아무 한계 없이 국경을 넘나들지 않습니까?(한국 증시에서 외국인 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또 그래서 토빈稅 같은 게 몽상이 아닌 현실 제도 도입이 운위되는 거고요.

이 논증이 매우 명쾌할 뿐 아니라 리카도 원전의 텍스트, 취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간 곡해되고 과장된 자유무역론을 주장해 온 이들의 입지가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속한 학파는 달라도 이런 자유무역론의 허상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견을 같이하는데, 대표적인 분으로는 제임스 K 갤브레이스(한국의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이 모를 수가 없는 故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의 아들입니다), 론 바이먼 같은 이들이 있고, 이중 특히 후자는 리카도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과잉 결정된 것"으로까지 비판합니다. "과잉결정"이란 말은 쉽게 풀자면, 너무나도 많은 제약조건 아래에서나 나오는, 대단히 특수한 상황에서나 타당한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수학적으로 이미 증명이 끝난 줄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수학이 동원되어야 학문적 진리가 되는 곳이 경제학입니다.

저자 본연의 학파적 개성이 드러나는 대목은 "오프쇼어, 아웃소싱"에 대한 사정없는 맹공입니다. 첫째로 아웃소싱을 통해 원가가 내려간 상품이 국내에 소비되는, 이른바 물가하락을 통한 이점이란, 이미 직장을 잃거나 대폭 내려간 실질소득이 안기는 피해 앞에 별 의미가 없다는 지적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게 2013년인데, 지금 미국 정부가 취하는 경제정책 기조를 보면 그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현실적 설명력이 있음이 다시 확인됩니다. 외국에 진출한 기업이 그로 인해 더 획득하는 수익의 추가분은, 그 대부분이 그 현지국 경제를 배불리는 데 쓰일 뿐(일단 이렇게 가정하죠. 나중에 반전이 있습니다), 자국의 소비자들에게는 큰 혜택을 못 주며, 이렇게 해서 한 국가 안의 빈부 격차가 더 커진다는 결론입니다.

다음으로 그럼 기업을 받은 그 다른 나라의 국민 후생은 늘어나지 않겠는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 책 한 권의 논리일관성, 체계성이 유지되겠지만) 일단 타국에 진출한 기업은 주로 개도국이나 후진국 정부를 상대로 유리한 교섭을 시도하는데, 저렴한 인건비나 임대료 메리트도 있겠지만, 환경 관련 규제나 시민들의 따가운 여론 등 방해 요소가 없다는 게 그들로서는 가장 큰 인센티브이며, 이 때문에 마음껏 환경 파괴적, 생태 적대적 경영 행태를 드러낸다는 겁니다. 1차 산업에 종사하던 해당 주민들로서 일단은 손에 쥐는 명목소득이 늘어나 좋겠지만, 이후 파괴된 환경을 안고 살아야 하는 등 "외부 비용(정확하게는 부정적 외부 효과)"을 막대히 치른 후라, 결국은 종전보다 나을 것 없는 형편에 놓인다는 거죠.

미국, 서유럽 등 선진국에선 중산층이 실직하여 차차 "제3세계화(이 책의 표현입니다)"되고, 기존의 제3세계는 환경 지옥으로 인해 애써 번 소득이 상쇄되고, 그럼 이익을 보는 건 누구일까요? 약탈적 금융자본가들과 이들의 조종 하에 놓인 기업 최상층부 극소수 경영자, 그리고 주주들입니다. 이들 빼고는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공급측면 학파가 처음부터 얼마나(그나마) "국민 경제"를 염두에 둔 입장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 짐작이 가능해지는 대목이죠. 사실 이렇게 이론의 본분에만 충실하면 좌도 우도 없어지기 마련이며, 지금 세상이 종래의 낡은 보-혁 프레임으로 보기에 너무 복잡해진 까닭도 있습니다(이 점은 나중에 다시 다른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사소하지만 저자가 다소 착오를 일으킨 부분이 있는데요. 일단 일본이 미국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마련한 걸 두고 "인소싱"의 예로 파악하시는데, "인소싱"의 개념이 학자마다 다르긴 해도 이런 걸 인소싱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건 일본 입장에서 엄연히 아웃소싱이죠. 낮은 생산비를 찾아 외국(미국)으로 왔으니 말입니다. 저자께서는 또한 "이는 국내(일본 내)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분량이 아니라, 미국에 그대로 수출하기 위한 목적이다"라고 하시는데, 맞긴 하나 그건 저자의 주장과 맥락에서 무관한(irrelevant) 지적입니다. 이 생산공장이 올리는 수익이 어디로 어떻게 분배되는가가 포인트이지 않습니까? (같은 이유에서, 미국 수입 쿼터 규제[지금은 아님]를 피하기 위해 이 공장이 설립되었다는 역사적 배경 설명도, 유익한 정보이긴 하나[저자께서 당시 그 행정부 정책 입안자 중 한 분이니] 논의의 설득력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반대 진영의 논거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 기업도 아웃소싱을 하지만 이처럼 일본 기업도 아웃소싱을 하니(그렇다고 미국 입장에서 이게 인소싱이 되는 건 아니죠), 부작용이 서로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주장은, 책 조금 뒤에서 논파됩니다. 우선 저질 일자리만 결국 남게 되며, 기업 입장에선 노동자 풀을 바꿔 가며 협상력을 약화시킨다거나, 노동자의 지위만 취약하게 만들 뿐이란 거죠(책에 이런 표현이 있지는 않고, 독자로서 정리해 보면 그렇다는 것). 다음으로 해외에서 전문인력을 수입해 온다는 기업들의 명분(핑계)에 대해서는, 실제로 취업 비자를 받아 연수(고급 인력이라면 이런 영역에서 연수를 받을 필요가 없죠 일단)를 받는 근로자들이, 실제로는 대부분 단순 반복 노동에나 적합한 저급 인력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비자에 그런 걸 일일이 명기하지는 않으므로 얼마든지 전용 가능).

기존의 중저급 국내 인력은 직장을 잃고, 저급 노동자들만 해외에서 잔뜩 수입해 오거나 아예 해외로 공장을 옮겨 (그곳에서도) 저급 노동자만 고용한다.... 그러면 고급 인력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어디서 기업은 공급을 충당합니까? 그에 대해 이 책은 논의가 없고, 독자는 치밀하게 읽다 보면 이게 자연히 궁금해질 겁니다. 그에 대한 답은, 기업이 업무 자동화라든가 시스템의 힘에 점점 크게 의존하고, 또 부가가치 기여도도 그런 비(非)인력 섹터가 더 크므로, 이 책의 주제와는 무관하게 그런 수요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게 대세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삼성이 신입 사원 공채를 올해 사실상 취소한 것도, 심지어 고급 인력에조차 기대할 바가 거의 없어서 아닐까 추측할 수 있죠(니네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감). 4대 기업 공채는 이미지 제고를 위한 일종의 서비스 같습니다.

이 책 본문보다 서문, 그리고 독일어판 서문에선 특히 충격적인 제언을 저자는 꺼냅니다. 이 책이 쓰일 무렵에는 그리스발 경제위기가 한창 고조되다 서서히 미봉될 때겠는데, EU의 효용은 이제 다했으니 각국은 과감히 허울을 걷어내고 자국의 현실에 맞는 주권적 재정경제정책을 운용하라는 겁니다. 특히 독일을 향해선, "그렇게 그리스의 빚을 대신 떠안아가며 과연 당신들이 얻는 게 무엇인가?"라며 현실을 바로보라고 쓴소리를 하네요. 대안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방대한 자원, 독일의 자본과 투명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 결합하면 또다른 기적이 탄생하며, 동유럽의 불안한 정치 경제도 이 바람에 다 묻혀 번영하는 지역 공동체가 새로 탄생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왜 러시아를 경계하는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군(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무엇인가? 비효율을 제거하려면 현지 사정을 잘 알고 더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주권 정부가 제 할 일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 이거 왠지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 테레사 메이 등의 주장 같지만 어쨌든 그 나라에서 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은 정책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미국의 국민 경제를 무엇보다 걱정하지만, 해외에서 벌인 미국의 군사적 삽질, 환경 파괴, 제국주의적 행태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조이므로 결코 치우친, 이기적인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시스템의 지속을 담보하는 선의의 규제를 강조하고, 계층 상하가 고루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국가 단위의) 거시경제 건전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죠. 세계체제,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허상을 통박하는 이런 관점에 대해 좌우를 떠나서 모두가 지혜를 짜내야 할 시점입니다. 공교롭게도 제레미 코빈 같은 정치인도 오랜 지론으로 EU를 반대하며 비주류로 소외되다 노동당 당수로 화려하게 컴백하지 않았습니까. 생존을 위한 노력에는 어쩌면 결론이 하나뿐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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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 My Reviews & etc 2017-02-2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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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뫼르소, 살인 사건

카멜 다우드 저/조현실 역
문예출판사 | 2017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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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예컨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같은 작품이 트리컨티넨탈리즘의 관점에서, 그간 그저 타자화되기만 했던 "현지인"의 감성과 의식과 의지를 제자리로 어떻게 복권시켰는지는 우리 한국의 독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일방적이고 무책임하게 우상화되었던 "백인 주인님" 로빈슨 크루소의 시점이 아닌, 본의 아니게 충직한 노예로만 철저히 자리매김되었던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는 볼 필요가 있고, 식민자가 아닌 피정복민으로서의 아픈 역사를 공유한 문화권의 독자라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맞대면을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이유없이 죽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규범과 당위에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뫼르소의 사연이 그만큼 충격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감을 주었다면, "그저 뜨거운 태양 때문에" 값없는 죽음을 당한 "그 아랍인"의 시점에선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개 범법자, 일탈자에 불과한 뫼르소가 열광의 대상이 되어 온 데 비해 그야말로 억울한 피해자일 뿐인 "그 아랍인"의 죽음은 과연 뫼르소가 그날 그렇게나 무신경하게 취급한 만큼이나 제3자들로부터 계속 외면당해 마땅한 무가치한 사건인지도 어쩌면 당연히 의문이 제기되었어야 했습니다. 뫼르소는 무자비한, 또 아무 명분 없는 살인 한 번으로, 이방인은커녕 뿌리 없이 떠도는 현대인들 사이에선 아예 우상이 되어버린 판에, 난데없이 (그에게는 진짜 이방인이었을 살인자에게) 목숨을 앗긴 "그 아랍인"은 시대과 공간을 초월하여, 심지어는 그가 속한 동족으로부터까지, 잊혀지고 무시된 "이방인"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그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누가 진짜 이방인인가?"를 우리에게 다시 묻는, 왜 이런 질문을 여태 누구도 하지 않았던지 새삼 각성케 하는 매우 진지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1인칭 화자 하룬의 입으로 여러 번 강조되듯, "해변에서 그때 죽은 그 아랍인"은, 뫼르소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에서 이름도 한 번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용모에 대한 묘사조차 거의 없습니다. 하룬 노인은 "이름을 아는 자는 쉽게 죽일 수 없다"는 말로 뫼르소의 동기,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현란하게 꾸며낸 알리바이"를 설명합니다. 사람 하나를 죽여 놓고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그토록 화려하고 멋있게, 책 한 권을 써 가면서까지(그냥 자랑만 하고 말 것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찬탄과 복수심이 그의 어투에 공존하는 이유는, 바로 하룬 노인 그가 죽은 "그 아랍인"의 친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원을 밝히면서 우리는 근 70년만에 피해자의 이름이 "무싸"인 줄 알게 됩니다.

과장과 왜곡이 끼어들었겠지만(이 이유도 중요한데 나중에 논해 보겠습니다) 어렸을 적 하룬이 바라본 "형 무싸"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키도 크고 강건하고 남자답고, 지금은 노인이 된 하룬이 일생 동안 한 번도 거쳐 본 단계가 아닌, 의젓한 남성, 어른으로서 그 젊은 시절부터 정체성을 확립한, 어머니를 포함 가족 모두의 기둥과도 같은 인물이었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가정에서 자라난 것도 이 형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는 한 계기가 되었겠는데요.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그 어머니 되는 여인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 받은 아들, 또 그럴 자격이 있는 아들이 그처럼 비명에 죽었으니, 남은 가족, 특히나 그녀의 속으로 그를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피폐해졌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허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1인칭 화자인 하룬이었는데요. 어머니가 죽은 장남의 역할, 그에 품었던 기대를 모조리 이 어린 소년에게 투사하는 바람에, 그는 자기 자신으로 올바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전한 성인 남성으로도 정신이 자립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생부의 정체를 알 수도 없었지만, "현실에 발을 디디지도 인간들의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 부친이란 "신" 그 중에서도 이슬람의 신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비유이자 동시에 직서[直敍]). 이렇게 보면 "신과 같았던 형 무싸"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더 넓은 이해가 가능하죠. 하잘것없는 백인 식민자가 그저 짜증난다는 이유로 죽여 버린 형의 죽음은, 가족(종족) 전체에게 (맞는지 그른지 검증의 여지 없이) 주입된 어떤 당위(이슬람적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모욕, 신성 모독으로 이제 의미가 확장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뫼르소가 무싸를 죽인 사건은 그저 정신병자에 의해 저질러진 하찮은 사고가 아니라 이제 역사적 의미까지를 띠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 중엔 심지어 하룬과 무싸의 어머니가, 뫼르쏘의 할머니로 추정되는 어느 노파에게 가서 화풀이하는(복수라고 생각) 장면도 나오는데, "그녀가 과연 친할머니인지 뭔진 모르지만 여튼 같은 roumia 아니겠어?"라는 종족적 구실까지 만드는군요. "루미아"는 프랑스어이긴 하나 마치 Gringo처럼 현지인의 어휘에서 역수입해온 경우죠. 비잔티움 제국을 일러 아랍인들은 "룸"이라 불렀고, 아나톨리아를 셀주크가 뺏어 온 후에도 현지에 세운 정치 단위를 "룸 술탄국"이라 가리킨 역사를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무싸는 뫼르소에게 아무 이름(=의미) 없는 존재였는데,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흑인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멋대로 "금요일"이란 이름을 붙여 줬듯, 살인자에게 그 희생자의 이름이 무싸이면 어떻고 "오후 2시(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각)"면 어떻냐며 하룬 노인은 죽은 형을 일러 "주드"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이 주드는 존 레넌의 아들 줄리언도 아니고 토마스 하디의 "주드 디 옵스큐어"도 아닙니다. 프랑스어 원 텍스트에선 이를 Zoudj라 표기했는데, 아랍어로 쓰면 زواج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철자를 로마자로 그대로 전사했을 뿐인데요, 사실 저 단어 زواج는 아랍어 사전에 등재된 것도 있고 안 나오는 사전도 있습니다. 표준 아랍어가 아니라 마그레브 일대에서만 쓰이는 방언에 가까워서입니다(북아프리카는 표준 아랍어와 방언이 모두 쓰이는 대표적인 이중언어 지대이죠). زواج, 이 말의 뜻은 토박이 알제리인인 작가 카멜 다우드가 너무나 잘 알듯, "숫자 2, 쌍둥이, 결혼" 등 다양한 의미를 품습니다만 의미가 차이 날 때마다 발음이 (주쥐, 좌쥐 등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아랍어 표기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이 زواج는 작품 속에서 아주 다양한 함의로 변조, 응용되는데요. 후반부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처럼, 하룬은 형이 죽은 후 거의 정확히 20년이 되는 알제리 독립 투쟁 과정에서, 현지인 해방 부대에 소속되었다거나 그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 프랑스인 식민자 한 명을 "새벽 두 시"에 죽여 버립니다. 어머니에 의해 강요된 "죽은 형의 삶"을 살며 자신과 주변 모두로부터 소외되었던 하룬은, 이런 영웅적 행위로 "오해"될 만한 사건을 저지르고도 끝내 동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습니다. "왜 하필 '(휴전 협정)이후'였냐? '이전'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 아니냐?" "새벽 두 시라는 (경계성) 시간대인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형의 삶을 외투처럼 뒤집어써야 했던,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하룬에게, زواج는 사실 그의 형이 아니라(쌍둥이가 될 수 없는 게, 성격이나 외모 등 모든 면에서 너무도 다른 형제였기 때문이죠), 오히려 형의 살인범 뫼르소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랍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 "하룬"은, 알고 보면 아랍인도 그렇다고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인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진정한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룬은 (저 위에 쓴 것처럼) 신을 두려워하고 미워합니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거의 암송해야 할 만큼 텍스트와 친숙하지만, 하룬은 오히려 그의 형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기록인 소설 <이방인>을 달달 암기하는 수준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이 죽은 살인사건의 "수사 도구"가 바로 프랑스어였고, 프랑스어는 그에게 세계를 해석하고 탐구하며, 불쌍한 어머니에게 그 세계를 "번역(여기서도 작가의 트리컨티넨탈리즘적 세계관이 드러나죠)"하는 통로였습니다. 원제 "Meursault, contre-enquete"에서 뒷부분은 "재조사"란 뜻인데(작품 중에도 "재수사"란 말이 나옵니다. 추리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케이스 클로즈드"의 반대, "케이스 리 오픈"이죠), 1인칭 화자 하룬은 아무도, 심지어 알제리인 동족들도 망각하고 무시해 버린 억울한 살인에 대해, 혼자 힘으로 가망 없는 "진상 규명"에 일생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이게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다거나, 심지어 형의 원한을 풀기 위한 동기도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어머니에 의해, 동족들에 의해, 프랑스 식민자들에 의해, 마침내 자기 자신에 의해 참된 정체성이 묻혀 버린, 스스로를 찾아 나서는 고독한 여정이라고 보는 게 맞지 싶습니다. 이 점에서도 그는 "실체도 모호한" 무싸(혹은 주드, زواج)라는 형의 쌍둥이가 아니라, 바로 사형수 뫼르쏘의 쌍둥이입니다. "처형당한 자가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가?" 하룬은 이렇게 묻지만 그 근거는 바로 방황하고 뿌리 없는 자신의 행적이죠.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남자로서 자립 못 하고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하룬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 미리엄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저는 그에게 세상의 창을 열어 준 "프랑스어"의 은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살인범의 자랑스런 회고담이 얼마나 우아하고 멋들어진 외관을 하고 있는지에 경악한 그는, 이 프랑스어를 두고 자신의 존재 구원, 혹은 영구 미제를 해결할 매개자(혹은 다른 의미에서 쓰였던 "전령")로 인식합니다. 삶도 자존도 형의 죽음과 어머니의 개입에 의해 빼앗긴 그에게, "투르망(영어의 torment하고는 좀 색깔이 다르죠)"을 상쇄할 유일한 길이 바로 텍스트에의 몰입이었겠습니다. 미리암이 허상이나 비유였다면(사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단단한 실체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일체의 비유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1인칭 하룬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대학원생"은 그럼 누구일까요? 여기서 그 젊은이와의 대화 중 ton peuple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역자 조현실 교수님이 적절히 지적하듯 이는 프랑스 식민자에 대척되는 알제리의 일반 민중일 뿐입니다. 이 학생은 그럼 타자의 위치에서 모든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학생"이긴 하되, 그 출신은 작가 다우드와도 같은 알제리 토착인인지도 모릅니다. 흔한 이름 "하룬"이 알고보면 경계인, 주변인을 대변하듯(실제로 작가 다우드는 이슬람 율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적까지 있다고 하니!), 이 학생 역시 다우드의 자아 한 부분을 대변할 뿐 아닐지. 욕구에 가득찬 실존과, 허깨비 같은 종족의 우상 사이에서 고뇌(투르망)하는 개인은 뫼르소나 카뮈 뿐이 아니라는 작가의 처절한, 그러면서도 쿨한 독백이라고 파악할 수 있겠네요.

책 디자인이 참 예쁜데 리뷰에 사진은 나중에 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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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My Reviews & etc 2017-02-23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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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닉 수재니스 저/배충효 역/송요한 감수
책세상 | 2016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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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flatten이란 말은 영어 정식 어휘 속에 완전히 자리잡던 항목은 아닙니다. 모든 단어에 반대를 뜻하는 접두사 un-만을 붙였다고 일일이 새 의미가 생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말은 (영미권 화자들의) 일상에서 점점 쓰임새가 넓어져가며 여태 없던 지지를 획득해가는 중인 듯 보입니다. 그리고... 혹시 이 멋진 책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고 나태한 습관에서 벗어나며 창의적 도약을 이루다" 같은 뜻으로 새롭게 코인되는 계기를 마련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플랫랜드"라는 가상의 세계, 그 안에 사는 가상의 종족 이야기를 책의 서두에서 꺼냄으로써 발상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프랑스어권 철학자,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에서 종종 시도하듯, 단어나 개념 하나를 주인공 삼아 끝도 없는 담론을 펼치는 모습은 우리가 매우 자주 봐 왔는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책이 만화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건데요, 이처럼 친근한 포맷 속에서 주제가 펼쳐지기 때문에 이질감, 거부감이 덜할 뿐 아니라, (난해하지는 않아도) 추상적인 주제가 독자와 더 생동감 있는 소통을 시도한다는 게 확실한 장점입니다.



"플랫랜드"는 환경이 2차원 평면으로 구성되어, 그 속에 사는 이들까지 모두 납작납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나머지는 우리들과 우리들이 사는 세계와 같습니다...만 우리들은 몸서리치며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들 것입니다. 우린 엄연히 입체적이고 자랑스러운 3차원의 사람들 아니냐, 저런 불쌍한 한계에 갇혀 있는, 편협하고 어리석으며 불우한 이들과 어떻게 나란히 놓일 수 있느냐, 등등의 반응이 예상되죠. 하지만 만약 4, 5, ..n차원 세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이런 말조차 차원의 질곡에 묶인 불쌍한 정신의 습관이자 어법입니다. 아마 +1[혹은 그 이상]차원의 거주자들은, 다른 어휘[이 역시 우리의 상상이 못 미치는]를 써서 연민과 경멸을 표현하겠죠)면? 그들 역시 우리의 느낌과 비슷한(차원이 다를 테니ㅋ 이런 추측밖에 할 수 없습니다) 반응을 보이며, 저차원의 감옥에서 탈출하던 그때의 쾌감을 회고하고, 현재의 자신에 크게 안도할 것입니다...



인간은 돌이켜보면, 지옥 같은 과거로부터 탈출해 온 도약의 체험을, 언제나까지는 아니라도 손으로 꼽을 만큼 겪어 왔습니다. 그 당사자, 개척자, 선구자들은 그 숨이 멎을 듯한 감격을 (자신만 못한) 동료들과 공유하며 존재의 무한 영속 불가능을 다만 한탄했을 터입니다. 문제는 그런 감격적인, 존재의 엘리베이션을 세대는 물론 개체조차도 지속화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그게 가능했으면 그 후손들인 우리는 모두 붓다가 되었을 겁니다). 앞 문단에서 그 고차원의 거주자들이, 우리(저주받은 3차원쟁이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연민이나 안도(특히 이 후자가 나쁜데요) 같은 반응에 머문다면, 결국 무사안일, 퇴행이란 나쁜 트랙에 떠밀린다는 이유에서 우리보다 나을 것도 별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궁극적으론 타락, 소멸)

플랫랜드의 거주자들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위"와 "북쪽"을 구분 못 합니다(하긴 플랫랜드 전체가 저자의 상상이니 특정 표현 하나를 빌리고 어쩌구 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들의 제약 가득한 처지에선 효용도 상상도 필요 없는 경지이지만(아마 거기 이런 걸 꿈꾸는 녀석이 있다면 원로들에게 혼쭐깨나 나겠죠?), 혹 눈을 뜨고 여태 못 보던 그 시야를 넓혀 동족들에게까지 그 심원한 비의를 전달해 주는 개체가 출현한다면, 그들의 삶은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몇 배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신석기 농경 혁명의 성과를 갓 맛본 세대의 어린 자식들이 "농사 안 지을 때는 어떻게 먹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어?"를 몇 번이고 제 부모들에게 물어 보듯 말입니다. 인터넷이 뭔지 모르던 세대와 나면서부터 웹 서핑이 네이티브의 습성이 된 세대가 공존하는 지금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플랫랜드의 장래 전망은 느닷 3차원의 가능성을 지목하고 나온 이단적 개체에게, 나머지 집단 성원들이 이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H G 웰즈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몇 달 전에 나온 <마술가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를 보면, 눈이 먼 이들이 오히려 눈을 뜨고 세상의 참모습(에 그나마 가까운)을 보는 외부인을, 기를 쓰고 자신들의 협소한 질서에 순치시키려 드는 설정이 나옵니다. 뭐 어쩌면 기존의 질서가 급격히 붕괴하는 결과보다는 그 편이 (단기적으론)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안 보이는 눈이 정상이고 도덕적이며, 눈이 보인다는 건 개인에게도 질병이며 불행이다!"를 필사적으로 세뇌하는 끔찍한 몸부림입니다. 눈이 안 보인다는 끔찍한 한계도 이처럼이나 합리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여태 큰 문제도 없던 루틴과 습성"에 대해선 우리가 얼마나 끼고살며 과잉보호하려 들겠습니까? 플랫랜드니 남미의 오지(웰스의 설정)니 하는 게, 결국은 우리가 그토록 헛된 자긍을 느끼며 사는 바로 이 세계입니다. 2차원도 2차원의 눈으로 보면 그게 2차원이 아니며 우주의 전부일 뿐이죠.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우리가 현재의 저차원성을 절감하고 다른 단계로의 도약 가능성이 열리는 건 (유감스럽게도) 어떤 강렬한 충격(대체로는 불쾌한)을 받았을 때이다." 지금 이 세상은 특이점(커즈와일이 쓴 맥락에서의)이 열렸다고도 하고, 4차 산업혁명 덕분에 종전의 사고방식으로는 모두 큰 곤경을 맞을 시점이라고도 합니다. 어딜 가나 창의력, 창의력 하는 게 그만큼 존재 혁신의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자계서의 교훈을 낭독하는 착각도 들겠습니다만, 이 책은 아직 젊은 저자가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과정을 통과한 학위 논문 거의 원본 그대로를 단행본으로 펴낸 내용입니다. 최초로 만화 형식의 디서테이션이 된 영예를 간직한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포맷이 만화이기에 그 자체로 "플랫랜드"이기도 한, 자기지시적(형식과 내용이 일치) 존재태로 독자와 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이한 운명, 혹은 사명을 띠기도 하네요.



우리는 누구나 만화를 읽으면서 자신의 상상력과 독해 능력을 똑같이 2차원에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차원의 한계에 도전하며, 그 밋밋하고 평평한 세계를 우리의 차원에 맞춰 주려 작가만큼이나 재생과 재해석에 애정을 쏟습니다(딴 걸 그렇게 열심히 하지). 김화백(ㅋ)의 온갖 삽질과 과오에다 과대의미부여를 해 가며 성실하게도 놀고 있는 모습이 다 뭐겠습니까? 김화백이 우리에게 알려 준 중요한 메시지가 있죠. "(워딩과는 달리) 병원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마이신만큼이나 한계가 뚜렷하다." 헌데도 현실의 성과(그게 적지 않다 해도)에 안주하는 이들은, 정말로 병원이 모든 상처와 위기를 간편히 넘겨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그리고 죽습니다). 상황에 떠밀려서 다른 차원을 절박한 마음으로 엿보기보다, 만화를 읽는 자발적 쾌감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포텐을 즐거이 끌어내는 편이, 그 객관적 성과나 주관적 희열 양면에서 훨씬 바람직한 결과이지 않을까요. 저자 닉 수재니스는 김화백보다는 좀 더 진지한 모드로 이 자명했으나 낯선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플랫은 곧 추함, 어리석음, 그리고 노예 상태와 죽음이며, "언플랫"은 그와 반대되는 모든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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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 경제경영/자기계발 2017-02-2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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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상현실

오컴,편석준,김선민,우장훈,김광집 공저
미래의창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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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으나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명언으로, 기술 혁신의 일상성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절박한 변화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90년에 제작, 개봉되어 큰 인기를 모은 오락영화 <토털 리콜>은 미래상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 중 하나를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느끼게 하는 오락"으로 꼽아 극의 중추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때 일반에 처음으로 그 가능성이 널리 인식된 이른바 "가상 현실"은, 이의 보편적 상업적 활용을 위한 여러 지엽적 기술이 간헐적으로, 혹은 제법 화제를 모아가며 개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근 이십 년이 지나도록 저 고전 SF에서 제시한 비전에 영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도 그런 진단이 자주 나오지만, 심지어 한때 "가상 현실"은 잊혀진 영역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역시 이 책 중에서 시원하게 지적하듯) 페이스북이 뜻밖에도 오너의 강력한 의지에 바탕하여 이 분야 선도적 사업자로 나섬에 따라 다시 부각되는 요즘입니다.

가상현실은 물론 산업적, 혹은 국가 정책적으로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많은 기업들이나 우리 같은 일반 소비자들이 관심을 두기로는 엔터테인먼트, 여가 선용, 오락 방면에서의 역할 쪽입니다. 사람은 못 먹어 본 것, 못 구경한 것, 못 느껴 본 것을 감각적으로 접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면서부터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종족입니다. 체험을 직접 해 보고 싶지만 여러 사정,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다른 절실한 과제나 업무 때문에 감행하기 꺼려진다거나(이 역시 기회비용의 문제입니다만) 할 때는 계획을 접는 게 보통이죠. 가상현실은 한마디로 말해, 비용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거의 진짜나 마찬가지인 체험"을 겪게 돕는 도구, 환경,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용과 가격입니다. 가짜를 즐기는 데 진짜 체험이나 별 차이도 안 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 아무도 그 상품을 사려 들지 않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혹 판매자 입장에서 가격을 타협할(낮출) 수 없다면, 그 서비스는 구매자에게 "진짜를 차라리 능가하는" 멋진 쾌감을 선사할 수라도 있을 만큼 효과가 좋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생산자들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 못 시켰기에, 여태 업황이 지지부진했던 거죠. "가상 현실"이 인터넷의 보편적 이용이라든가, 모바일 소통보다 더 가능성이 일찍 주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이 정도에 머문 건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왜 다시 가상현실인가? 저커버그 같은 이들도 마냥 개인적 선호를 동기 삼아 모험성 투자를 결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 특히, 머리로는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감각, 특히 시각적 속임수에 자발적으로 넘어가며 "속는 쾌감"을 즐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계화가 진전되고 보편적 대중 문화의 향유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상의 기쁨이 된 지금, 놀이동산 방문이나 기존의 3인칭(이 말의 뜻은 책을 읽어 보면 명확히 다가옵니다) 게임 몰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분명한 욕구가, 여러 채널을 통해 소비자들을 길들이고 나의 원 체질이나 기호인 양 침투를 압박해 옵니다. "이거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지 그래?" 게임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에게조차 뉴스를 통해 "포켓몬 고"가 뭔지는 싫어도 개념 파악이 절로 되는 현실입니다.

virtual이란 말은 참 묘한 어감을 가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실상의" 같은 뜻이 맨 먼저 제시됩니다. 그럼 이건 사실이라는 걸까요, 그 반대라는 걸까요? 우리말 번역 "가상(현실)"을 보면, 아예 가짜라고 단정하는 명명입니다. 빤히 가짜인 줄 알지만 진짜 같고, 진짜보다 더 실감나며 (이게 중요한데) 신나는 효과, 이게 바로 virtual의 본질입니다. p20에는 폴 밀그람 예일대 교수의 규정을 빌려, 현실- 증강현실 - 증강가상(이는 아직 우리, 그리고 산업계, 학계에 낯선 phase입니다)- 가상 처럼, 네 단계가 전 구간을 채우는 개념스펙트럼을 제시합니다. 이 네 단계를 모두 합쳐 "혼합현실"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띠의 양 끝에 위치한 두 단계도 100% 순도는 아닌 셈이죠. 이 스펙트럼이 우리에게 요긴히 가르쳐 주는 한 가지 포인트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 기술적(descriptive) 설명이 아닌, 어렴풋하나마 전체 구조의 그림이 그려진다는 겁니다. 기술적 설명은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도식화하여 자세히 나오는데, 이 역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핵심만 잠시 발췌하자면, 증강현실은 1) 유저의 시야를 완전히는 가리지 않고(=상당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2)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게 보통이고 3) (생산기업 입장에서)위치 처리, 데이터 처리, 카메라 인식 같은 기술 개발에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가상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이며, 3) 관련해서는 인체의 시각, 청각 등 기초 연구에 보다 집중하는 게 큰 차이입니다. 제 생각에는 개발자들이 주안을 두는 방향인 3)이, 이 책을 읽어나간다거나 혹은 벤처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그 조작의 주체가 철석같이 믿는, 생존과 존재의 바탕이 될 기제이자 생리 작용이지만, 그 현실은 불완전함과 착오 투성이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이 인지 메커니즘의 틈을 파고들어 "(객관과 무관한) 주관의 쾌감을 극대화"하자는 상품이자 서비스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 사업영역이므로, 어떻게든 나약한 인간을 최대한 즐겁게 속여 줄 방법을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책에 여러 언급이 나오지만, 이른바 지연속도(그 이하로 화면을 연결하면 단절을 연속으로 착각) 같은 이치의 발견은 벌써 지지난 세기부터 연구를 통해 주목되곤 했습니다. 특히 가상의 세계 하나를 머리속에 자발적으로 생성해 내는 게 VR의 과제이므로, 120도 이상의 시야각을 확보한다거나, 초당 90장 이상의 화면을 처리할 능력을 기기가 보유하게 만드는 게 "시각 기만" 방면에서 업계의 화두였습니다. 나머지 몰입감은 청각 기만이 처리하는데, 이 분야에서도 소위 3D 오디오의 개발 등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체험의 형성은 이제 상용화의 이름값에도 거의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책 뒤 각론에도 나오지만, 화면 중 유저의 시각이 머무르는 그 부분만 해상도를 높인다거나 하는(시선이 머무르는 부분의 해상도로 전체의 선명도를 판단하는 인간 시각의 한계) 선택과 집중의 간단한 아이디어로 큰 호평을 얻은 한국 기업의 예도 나오는데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개별 단말기의 성능이 아직 아주 만족스런 정도가 아닌 만큼, 정해진(시장 가격을 맞출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최대 효용을 낼 수 있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형편입니다. 아직은요. (아니라면 벌써 우리는 VR 기기의 즐거운 홍수 속에 파묻혔을 겁니다)

장기간 육상 대중 교통 수단에 탑승하거나 항해 중엔 왜 멀미가 날까요? 실제 동작과 뇌가 인지하는 내용이 불일치하는 데 그 원인이 있음은 우리가 다 알죠. VR도 마찬가지라서 소위 VR멀미(적절한 번역 같고요. 우원어는 simulation-sickness라고 이 책에 나옵니다. sea-sick[배멀미] 같은 기존 어휘를 잘 비튼 신조어죠) 문제가 오랜 동안 해결이 안 된 게 이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은 큰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 외에도 포컬큐의 혼란(실제 거리와 뇌의 인식 사이의 격차 설정 교란) 때문에 눈의 피로가 가중되는 게 여전한 난제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전세계에서 3D 영화 <아바타>가 가장 큰 호응을 부른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었는데요. 이때 사실 3D TV도 일부 얼리 어댑터에 의해 호응을 얻고 붐이 일기도 했던 걸 저도 기억합니다. 책에서는 안경 착용의 불편함 등 여러 이유로 이 기막힌 호기를 업계가 살리지 못하고 결국 무위로 돌린 아쉬움을 지적합니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같은 게 몇 년 전에 업계 개발자뿐 아니라 유저 섹터에서도 논쟁의 불이 붙는 등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만 또 지금은 지지부진하고, 폴더블 스마트폰 등에 자리를 내 준 형편이죠. 이런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혁신적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장에서 현실적 수요를 창출할 수 있게 얼마나 단가를 낮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는 가상현실뿐 아니라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번역 서비스(일단 질적 측면은 차치하고)를 패킷당 비상식적 요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쓰려 들겠습니까. 부자들은 그냥 책임도 쉽게 따질 수 있고 융통성도 높은 사람을 쓰면 그만입니다. 책 후반부에서는 패기 있는 한국 기업들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데, 읽으면서 이런 현실, 즉 보유한 첨단 기술의 즉각 상용화가 어려운 한계에 대해 절감할 수 있더군요. 카카오는 어느새 법제상으로나 현실의 영향력에서나 "대기업군"에 속하게 되어, 이런 젊은 도전자들의 요긴한 기술을 사들여 벤처 생태계의 바람직한 양상을 구축해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재벌기업 롯데도 자신의 테마파크가 제공하는 오락의 방향성을 다변화하는 데 이 VR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데서 엔터테인먼트 미래상의 분명한 비전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VR은 꼭 오락에만 쓸모가 궁리되지도 않습니다. 현재 한국 TV 정보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내시경 치료술 홍보 영상을 보면, 어느 정도는 VR의 핵심인 그래픽을 최대한 채용한 것들입니다. 책에는 미국 어느 대학에서 VR을 활용한 수술, 동시에 이를 이용한 의대생 교육 현황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다소 궁색한(?) 응용 같기도 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 등을 치료할 때 이 가상의 "환경 구축"은 무엇보다 치료진에 큰 도움을 주는 기술이겠죠. 진통제의 오남용은 결국 환자에게 다른 질환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감각에의 기만"은 이 진통제 처방을 줄이는 데도 크게 도움을 준다는 대목이 특히 공감되었습니다.

VR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이미 바싹 다가온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스크린 골프 연습장"이 VR의 가장 생생한 응용이 아니고 뭘까 싶은데요. 이 외에도 저자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사업화하려다 뜻이 꺾인 섹터가 바로 "플스방" 같은 예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저작권자인 소니가 강력한 제동을 걸었기 때문인데, 권리자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이긴 하나 보편적 소비를 위해 어찌 보면 알아서 채널 하나가 구축된 셈인데 업자 모두가 상생하는 쪽으로 판로 생성, 정규화가 법제를 통해 이뤄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점입니다. 뛰어난 기술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현실에의 안착으로 해피 엔딩이 이뤄지기까지 이처럼 까다로운 고비가 많다는 점 다시 확인되었구요. 책에 소개된 구체적 정보 덕분에 당장 간편히 사용,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아는 기쁨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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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riminal History Of Mankind - Colin Wilson | My Reviews & etc 2017-02-2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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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수입양서]A Criminal History Of Mankind

Wilson, Colin
Mercury Books | 2006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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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장자 카인부터가 제 피붙이를 죽이고도 뻔뻔스레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반문한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인류 역사는 곧 범죄의 역사와 큰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범죄로만 점철되었다면 종의 생존이 불가능했기에, 과오를 저지른 인간은 (신을 빙자한) 규범과 도덕률로부터 사면(구원)을 받아야 했겠으며, 이 까닭에 인류의 역사는 또한 저지른 죄업으로부터 어떻게 용서받고 회개하며 깊고 불결한 그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왔는지에 대한 내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故 콜린 윌슨의 이 방대한 저술은 그런 의미에서,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 온 인간"에 대한 반성과 회고의 기록이라 평가하고 싶네요.

교접과 생식이 가능한 범위를 종(species)으로 획정한다면, 같은 인간으로 정의된다 해도 그 생김새, 성격, 지능, 도덕성 면에서 대단한 편차를 보이는 게 또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현격한 개성입니다. 이런 인간이 이른바 문명이란 걸 짓고 산 이래 얼마나 많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또 그에의 정면 부정이 있었는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겠습니다만, 개별 범죄자의 잔학한 죄상과 그 적발, 처벌에 대한 기록이 아주 소상히 남은 건 아닙니다. 책은 바빌로니아, 유대아, 그리스 고대 문명이 기록으로 남긴 여러 끔찍한 범죄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슨 까닭인지 당대가 정한 규범을 부정한 반사회분자들에 대한 사연이 아닌, 그 문명의 지배계층이 남긴 불미스러운 행각에 보다 초점을 맞춥니다. 이런 행적들이 당시 기준으로도 물론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되었겠지만 그저 위신과 권력의 행사로 무마되고 만 그 부당함, 뭐 이런 걸 지적하려는 의도였는지는 일개 독자로서 잘 알 수는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양적으로 빈약하고 사가들에 의한 심도 있는 분석 연구가 미진할 1차 문헌으로부터 "가장 직접적, 원초적 의미의 범죄자들"에 대한 서술을 뽑아낸다는 게, 잘 알려진 통사로부터 주제에 걸맞을 연관 기록을 추출하여 단평을 가하는 이런 식의 작업보다 (본격 역사학자가 아닌 이 저자 같은 이에게) 힘든 작업이었겠음은 분명합니다. 또 제목의 criminal을 두고 "당대에 공권으로부터 단죄받은"이란 좁은 뜻으로 꼭 새길 필요도 없습니다. 도덕은 언제나 법규보다 광범위한 개념이며, 더군다나 저자 스스로 설정해 둔 편의와 기준에 맞춰 한 권의 논술, 주장, 세계를 직조해 나갈 특권과 자유가 책 속에서야 당연히 그 저자에게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그 책을 안 사고 안 읽으면 그만이죠. 어느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자가 게스트와 싸우면서 부르짖은 한 마디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This is my  show!"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취한 편제, 소재, 서술 양식은 다소 무책임하게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영, 미를 제외한 다른 문명권의 지도자들이나 위인들은, 그들이 일생 동안 남긴 행적이나 과업 중 용케도 범죄 행각만 따로 뽑혀져 나와 치욕의 글씨를 붙인 채 강요된 속죄의 가장 행렬을 벌이는 중이고, 반면 어느 섬과 광대한 식민지의 다른 역사에선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성격이상자, 추방자, 저주받은 아웃캐스트만 선별하여 "최협의 범죄사"를 장식시키는 구성입니다. 영미권의 인간 말종이 타 문화권의 위인들과 서열을 나란히한다고 오해될 여지가 다분한 이런 서술 체계에 대해 얼마든지 작가의 시선, 세계관의 공정성이 의심될 수 있겠고, 아무리 무신경하게 "흥미 위주의 독서, 과도한 흥분과 정서적 편향을 노출하는 작가의 성마른 스타일 감상"에만 몰두하는 독자라도 마냥 느낌이 개운할 수는 없습니다. 관점이야 작가의 전속 영역이라 치더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경우 그 행적을 놓고 상반된 기술이 얼마든지 보이는데도, 항변의 기회도 없이 최악의 해석만 작가에 의해 취합된 채 유사 이래 최악의 괴물로 둔갑하여 매도되기 일쑤입니다. 나폴레옹, 콘스탄티누스, 알렉산데르 6세, 심지어 사도 바울마저 무려 "범죄의 역사"에 이름이 올라야 할 만한 암울한 선례들에 지나지 않을까요?

후반부에 실린 여러 포르노그래피 기록(상당수가 원문부터 영어로 쓰여 있던 것들입니다)은, 비록 이를 개탄한다거나 창작과 감상과 유통에 개입한 개인들의 비천한 본성을 고발하려는 의도로 인용되었다 해도, 과연 이의 상세한 소개가 독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아예 전반부의 (criminal을 제외한 그저 history로만 파악되어야 할) 그 방대한 서술조차, 작가가 이를 쓰면서 어떤 상업적, 선정적 의도가 과연 전혀 없었을지 진지한 의심을 부르기까지 합니다. 콜린 윌슨 특유의 스타일, 신명과 열정이 함께 깃든 문장과 전개가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주제와 제목이 유도하는 어떤 도덕적 각성과 과연 앞뒤가 맞는 선택이었을지 못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번역보다는 원문으로 읽어야 윌슨 본연의 맛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원래 그의 책은 내용의 무게나 정보가 아닌 "맛"으로 읽는 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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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ing Men | My Reviews & etc 2017-02-2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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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수입양서]Marching Men

Anderson, Sherwood
Createspace | 2014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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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유난히 독학으로 일어선 위인들이 많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든가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죠. 예전에 어떤 교수님은 사회학자 로버트 모리슨 맥키버 같은 이름을 '매클버'라고 읽는(대문자 I를 l로 혼동) 어느 독학생의 예를 들며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시던데 그것 역시 맞는 지적이긴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왜 영미에서는 그렇게도 불완전한 표기 방식을 고집해서, 관습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사람 이름 하나를 제대로 못 읽게 하는가(저 위의 예는 그 독학자라는 분이 그저 태만해서 저지른 실수에 지나지 않지만요) 하는 게 납득이 안 될 때가 잦기 때문입니다. 하나 확실한 건 한국 같은 사회에서 소모적인 스펙 치장에 버려지고 마는 많은 사회적 비용을 감안할 때, 과정을 좀 내실화 엄격화해서라도 저 독학사 과정(혹은 방송대 교육이라든가)이 좀 널리 보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멍청한 이들이 그저 돈으로 신분, 직업, 학력을 사려는 풍조가 만연하기에 이번 무슨무슨 사태도 터졌던 게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대표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는 대략 1980년대부터 한국의 이런저런 세계문학 전집에 단골로 끼곤 하던, 그 소개가 늦은 감조차 있는 명작 단편집입니다. 저 콤마는 반드시 찍어야 하는 게, 만약 생략한다면 한국어에서는 두 지명의 순서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죠(특정 세대라면 대학가에서 한창 주목을 끌던 <파리, 텍사스> 같은 게 생각날 겁니다). 저 작품집은 한국의 특정 세대에게 좀 각별한 주목을 받았던지(그 이유는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맥락 어느 상황에서건 자주 인용되곤 했으며, 현재까지도 역자를 달리하여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아무튼 저 작품집의 저자 셔우드 앤더슨이야말로 또 미국에서 흔한(?), 독학으로 성공한 사례 중 하나에 끼어야 할 그런 문학가라고 할 수 있죠.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다층적이고 세련된 표현법을 소화하고 체질화한 티가 팍팍 나야 편집자의 눈에 들 수 있는 그런 풍조고, 아니면 아주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글솜씨나 주제의식을 제시할 수 있어야 데뷔가 가능한 터라, "작간데 뭐 독학이면 어때?" 같은 안이한 분위기가 안 생깁니다.

어디로, 무엇을 위해 행진하는 남자들이란 뜻인가. 저는 이 제목의 뜻을 곱씹으며 과연 평균적인 한국의 독자들이 이 작품 속에 펼쳐진 인물들의 "행진, 갈망, 갈등, 자부심, 탐욕, 만족"에 대해 무슨 평가와 느낌을 가질지 상상해 봤습니다. 미-서 전쟁이 한차례 폭풍처럼 시민들의 일상을 스쳐 지나가고 기존의 안정된 가치관과 지향점에 요동을 남길때, 탄광촌이라든가 공장 밀집 지역, 혹은 빈농들이 문명의 혜택을 못 입으며 드문드문 사는 외진 촌락에선 그 여파로 혼동과 질서 교란 행위가 빈발합니다. 가치관과 공동체의식의 파괴는 개인 단위의 삶에도 불안정과 회의를 부르는데 여튼 무지하고 힘 없는 이들의 일상이라 해도 일단 파괴된 질서는 어떤 식으로든 복구되어야 하죠. 과연 그들의 방황, 노력은 (특히 한국에서 일정 패턴의 시민 의식을 교육받은 이들 눈에) 보람이나 결실을 맺을 듯 기대를 부를 수 있을까요? "못 배웠으니까, 미개한 시대니까 이런 무익한 몸부림만 치다 마는 거다." 확실히 이 작품 속에는 어떤 선명한 비전이나 정돈된 프레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은 주기적 대공황처럼 소시민들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인물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피해와 공허감, 좌절을 남겼는지 근원적 성찰이나 각성을 갖지 못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잠정적이나마 내리는 결론, "정의와 우정으로 뭉친 사내들끼리 이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같은 메시지가, 과연 현대의 눈으로 마냥 매도되거나 낙후된 전근대적 발버둥으로 낙인찍혀야만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미래의 여러 예상치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떤 선험의 룰처럼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문제를 대했고, 오늘의 우리들은 또 우리들이 애써 개발해 낸 지혜로 미흡하나마 오늘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중이지요. 나이 많은 이들은 "그렇게밖에 못했냐?"며 현재의 잣대로 판정되는 그 무수한 평가에 대해 불편해합니다. 우리들은 미래 세대에 대해, 이것만이 답이라며 다른 모든 가능성의 틀을 지레 차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진"은 때로 맹목이 되기 쉬우며, 그게 세대에 따라 시대에 따라 어떤 편파적인 호오의 시선이 마구 적용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확실히 요즘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뭔가 붕 뜬 듯 이질감이 느껴지는 세팅임은 분명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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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JOY 기쁨의 발견 | 서평이벤트 2017-02-2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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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마지막 깨달음
JOY 기쁨의 발견


 

시대를 초월한 의문을 탐구한 두 성인의 역사적인 일주일간의 기록
어려운 시기를 건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치, 기쁨

 

20154, 우리 시대의 정신적 스승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는 달라이 라마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인도 다람살라에서 전 인류를 위한 깊은 통찰이 담긴 일주일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국제 정세와 80세가 넘은 두 사람의 건강 문제로 어렵게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이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기에 그 시간은 더 귀하고 간절했다. 이 소중한 시간을 함께한 두 성인의 화두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기쁨을 찾을 것인가였다.

고국 티베트를 떠나 50년 넘게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 인종 차별이라는 남아프리카의 억압적인 폭력에서 승리한 투투 대주교, 그들이 팔십 평생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JOY, 기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쁠 수 없는 곳에서도 기쁨을 찾아내고 가장 고통스러운 일도 기쁘게 받아들인 두 성인은, 기쁨을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기쁨이야말로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가 꼭 되찾아야 할 가치이며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단 하나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가 전하는 기쁨의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절망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지금 꼭 필요한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우리가 고통의 대부분을 스스로 만들어내듯이, 기쁨 역시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있습니다.”  _ 달라이 라마

 

기쁨은 행복보다 훨씬 큽니다. 행복은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될 때도 있지만,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_데스몬드 투투

 

 

 

우리는 기쁨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어요. 이는 삶이 간단하거나 고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가 바람에 맞설 수 있고, 또 그 태풍을 뚫고 지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에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_데스몬드 투투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가장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사람도 나와 같이 행복한 하루,
행복한 한 달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희망을 현실로 이루어갈 권리가 있어요.” _ 달라이 라마

 

 

 


 

 

여러분 모두에게 기쁨이 함께 하기를 희망한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달라이 라마와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이 좋은 선물을 이 책에서 나누어주고 있다. - 오프라 윈프리
 
어떻게 기쁨을 찾을 것인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질문이지만, 그들의 대답은 어느 때보다 의미 깊다. - 타임지
 
두 정신적 스승이 독자들에게 주는 이 선물은 반짝거리며, 현명하고 즉시 유용하다. 이 선물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환경에 있을지라도 기쁨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주며, 기쁨을 찾기 위한 분명한 길을 제시해준다. - 퍼블리셔즈 위클리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기쁨과 연민이 필요하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투투 대주교와 달라이 라마보다 잘 보여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리처드 브랜슨 경(버진 그룹 회장)

 

 

[이벤트 참여 방법]

1. 이벤트 기간: 2017.2.13 ~ 2.21 / 당첨자 발표 : 2.22

2. 모집인원: 10명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필수)
  - 스크랩 주소,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4. 당첨되신 분은 꼭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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