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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 서평 2022-09-2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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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전통 갓을 만드는 장인(匠人)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갓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골수스러운 성격과 시류를 파악 못 하는 답답한 태도에 몹시 불만이 많습니다. 업종 전환을 해야 생계나 유지할 수 있다며 닦달을 하는데... 이 와중에 전염병까지 도는 통에, 가장은 혼자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해서는 남은 가족들을 구하려 듭니다. 결국 그는 목숨을 잃고, 아직 젊었던 주인공은 부친의 희생 정신을 가슴에 새기지만 그 모친은 여전히 아들의 고집스러운 가업 유지에 불만이 많습니다.

이 집안에서는 안주인 되시는 분이 사려 깊지 못하게 세팅된 듯합니다.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아버지가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그 부인은 대개 순종적이며 아들이 부친에게 반항적인데,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그 모친이 생활력이 강하다거나 현실적이라거나 진취적인 건 또 아니고, 대책 없이 징징거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실 주인공인 아들이 부친보다 더 고집이 세고, 더 융통성이 떨어진다고 봐도 됩니다. 그래도 그 부친을 엄청 따르는데, 마치 케플러가 스승 티코 브라헤를 신이나 되는 양 믿고 따르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부친은 그나마 조선말에 살던 사람이라 타격이 덜했지만, 주인공은 활동 시기가 일제 강점기이다 보니 아무리 품질 뛰어난 갓을 만들어 봐야 이제는 누가 사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24기 35주차에 김용익 소설가의 <꽃신>을 리뷰한 적 있는데 그 작품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신분의 문제가 비교적 적게 부각되며, 다만 결말에서 "서양식(사실은 왜식)"으로 머리를 자르고 지배층의 체신을 못 지키는, 선대부터 단골 고객들이었던 양반들에게 배신감에 주인공이 호통을 치는 장면에서 일정 태도가 드러나기는 합니다. ("그간 대어드린 갓 값 다 물어내쇼!")

이 작품은 KBS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부친 역에 김성겸씨, 주인공 역에 신구 씨가 나옵니다. 외모가 주는 인상과는 달리 사실은 김성겸씨가 신구씨보다 오히려 나이가 아래라는 점이 재미있고, 다만 다들 워낙 연기가 빼어나다 보니 별 위화감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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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한국문학대계 제38권 | 서평 2022-09-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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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지금 이 책처럼 이름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대계(大係)"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은 기획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된 게 과거의 책들이 모두 절판된 건 물론, 비슷한 시리즈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이 책에는 이청준 작가의 유명한 단편 <병o과 머저o>, <이어도>, <화석촌>이라든가, 전남 순천 출신인 서정인 작가의 <가위> 등이 실렸습니다. 이 작품들은 너무도 유명하기에 이 책에서가 아니라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읽어 봤을 단편들입니다. 확실히 장편도 그렇고 단편도 예전 작가들의 작품이 필력이나 주제의식, 행간에 배어나는 공력 등 모든 면에서 요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이동하 작가는 혹 모르는 이들도 있겠는데 1980년대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들을 보면 그 단편이 자주 수록되곤 했던 분이더군요.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 중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손오공>입니다. "손오공"은, 본명이 "손오억"인 주인공 기업인을 풍자한 네이밍인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작품을 잘 읽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손오억씨는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와 능력 하나로 전무직까지 올랐으며 오너의 사위이므로 곧 이 큰 회사의 살림을 도맡아할 신분입니다. 아랫사람들한테는 대단히 고압적인 매너이지만 워낙 능력이 출중하기에 아무도 반발하지 못합니다. 능력은 뛰어난데 인성은 아주 좋지 못하며, 회사 한 여직원과 깊은 관계를 이어오다가 싫증이 나자 이별을 통보합니다. 요즘과는 달라서 1980년대에는 이런 경우 여직원이 그냥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나 봅니다. 모든 상처와 불명예는 여자 쪽에서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손오억은 갑자기, 모든 양심과 상식이 그 영혼에 회복되어, 여직원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합니다. 즉시 회사 건물로 돌아가 여직원을 불러 상황을 수습하려 드는데, 방호원이 그를 가로막습니다. "누구신데 이 건물에 들어오는 거요?" 아니, 방금 전에 내게 호통을 듣더니 이 자가 정신이 나갔나, 어떻게 이 회사에서 나 손 전무를 몰라볼 수 있지? 그런데 방호원(경비)뿐 아니라 아무도 손 전무를 몰라봅니다. 기가 막혔지만 현실이 이러니 일단 인정하고, 자신의 사무실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 전무 면담을 요청합니다.

사무실 안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누군가가 앉아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여튼 손오억은 간만에 돌아온 양심의 힘을 빌려, 여직원에게 몹쓸 짓을 한 자신(?)을 혼내 주자는 생각에 그간 손오억이 저지른 모든 비리를 낱낱이 꾸짖습니다. 손오억의 탈을 쓴 저 누군가는 크게 당황하는데, 아마 자신의 비리를 캐려고 이 자가 장기간 미행이라도 한 줄 알고 거액을 제시하며 입을 막으려 듭니다. 손오억은 자신의 집까지 가서 아내와 어린 아들도 만나는데 이들 역시 손오억을 전혀 몰라 보고 저 남의 탈을 쓴 누군가를 남편, 아빠로 반길 뿐입니다.

한편 손오억(진짜)은 회사를 관둔 여직원의 뒤를 몰래 쫓는데 놀랍게도 여직원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밖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듭니다. 손오억은 잽싸게 그녀를 구해 준 후, 자신의 정체를 밝혀 봐야 아가씨가 안 믿을 게 뻔하므로, 용한 점쟁이라고 신분을 속인 후 그녀가 겪은 모든 불행을 다 짚어내는 척합니다. 아가씨는 놀라면서 점쟁이(사실은 겉모습만 달라지고, 과거의 기억은 그대로 가진 채 착한 마음만 도로 찾은 손오억씨)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진심어린 위로를 받아 기력을 회복하여 고향에 돌아가 늙은 아버지와 함께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립니다. 아버지도 갑자기 젊은 사위(?)가 찾아와 일도 돕고 딸한테 잘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제목이 손오공인 이유는, 마치 손오공이 서유기에서 제 머리털을 뽑아 분신을 만들듯, 악한 손오억의 만행을 견디다 못한 그 내면이 착한 손오억 하나를 뽑아내 세상에 내보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다만 겉모습은 전혀 달라진 채로... 겉모습이 그처럼 달라진 건, 내면이 극도로 타락하면 그를 반영해 겉모습 역시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바뀐다는 일종의 비유, 상징으로 보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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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눈종이 위의 생 - 조선작 | 서평 2022-09-24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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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느 스토킹 살인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이런 사건에서 성별 위치가 바뀔 수도 있긴 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소설가이며 여주는 잡지사 기자입니다. 이 둘은 오래 전 연인이었고 결혼식 직전까지 갔었으나 어떤 여인의 현장 난입으로 인해 엉망이 됩니다. 신랑이 처가 쪽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이 결혼은 없던 일이 돠어 버리는데 여튼 주인공은 시간이 흐른 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새 반려자를 맞습니다.

독자인 제 눈에는 이 부인이 훨씬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보였으며, 반면 여주인공은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이상한 경향마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저는 이 여성의 내러티브로 전달되는 "난장판이 된 결혼식장"이 과연 벌어졌던 일이었는지조차 살짝 의심이 들었습니다. 소설가를 혼자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정신 착란을 일으켜, 없던 일을 실제인 양 망상에 빠진...

물론 그렇다고 보기엔 주인공 소설가가 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진지합니다. 미친 스토커한테 저렇게까지 대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주인공이 점잖은 인격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두 남녀가 젊었던 어느 과거의 한 시점에 저 소동이 벌어졌던 건 사실입니다.

여주인공은 알고 보니 2대에 걸쳐 애정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모친 역시 남편(즉 여주인공의 부친)과 이혼한 상태인데 전남편은 이미 재혼하여 새 가정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이미 완전히 감정적으로 전처와 절연한 상태인 남편과 달리, 이 노부인은 최근 들어 전남편에 대한 집착이 불 같이 살아났다는 점입니다. 남편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아 혼자 기다리다가 귀가합니다. 일종의 정신 착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여주인공은 남주 소설가에 대해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중입니다. 소설가의 회식 자리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자작(自酌)하는가 하면, 소설가 부부가 간만에 함께 휴식을 즐기러 온 별장에 먼저 나타나 몸을 숨기고 엿보기도 합니다. 낌새를 챈 소설가가 아내에게 딴청을 피우며 급히 몸을 피하자고 재촉하는 모습까지 다 훔쳐본 후, 여주인공은 혼자 남아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자학, 자조의 뜻입니다.

모눈종이 위에서 점은 가로세로선의 교차점 위에 놓여야 하며 중간점이란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 남성은 한 여성과만 맺어져야 하며, 제3자가 혼인에 끼어든다거나 혼외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일 따윈 사회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작가가 지적하고자 한 "모눈종이 위의 생" 그 모순인데, 그러나 우리들 상당수는 모눈종이 위의 규격화, 정형화한 삶과 소통, 교류가 차라리 훨씬 편할 수 있습니다. 24기 37주차에 조선작 작가의 <미끼와 고삐>를 리뷰하며 지금 이 작을 제목만 잠시 언급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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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토일 그리고 월화수 - 송영 | 서평 2022-09-23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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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느 아주 작은 회사를 다니는 청년(?)인데, 어느날 사장으로부터 터무니없는 질책을 받습니다. 업무상의 과실로 대금을 분실했으니 회사에 손해를 메꾸어 넣으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오히려 회사와 상급자, 고용주가 처벌을 받을 만한, 얼척없는 무리한 요구이지만 주인공은 워낙 성품이 고지식한 통에 저런 말도안되는 갑질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이제 그는 일주일 동안 3천만원(2만 9천 달러 상당의 원화)을 구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은 금토일 그리고 월화수.

한편 강원도 어느 고급 호텔로 가는 도중 주인공은 묘령의 여인과 조우하며, 그 외모로 보아 이런 여성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법한 자신에게 이상하게도, 마치 스토커처럼 사사건건 부딪히고 엮여드는 게 대단히 수상하다고 여깁니다. 알고 보니 과연 이 여성에게는 뚜렷한 동기와 목적이 있었으며, 자신은 어느 나이 많은 사업가와 불륜의 관계인데, 주인공이 마치 실제 남편인 것처럼 꾸미고 현장(?)을 덮쳐 위자료를 뜯어낸 후 돈을 나눠갖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이 당장 공금을 메꿔야 할 처지이다 보니 이런 나쁜 짓에 마지못해 가담하게 됩니다.

늙은 사업가는 주인공의 험악한 인상과 태도에 바로 주눅이 들어 요구를 들어 주고, 주인공은 이제 여성과 호텔방에서 돈을 나눌 일만 남았습니다. 성공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늙은 사업가한테 하청을 받아 연명하던, 을(乙)의 처지에 놓인 이가 바로 주인공네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이제 사장은 주인공에게 그 검은 돈을 같이 나누자고까지 나오는 판인데, 순간 주인공은 갑자기 제정신이 들어 이 모든 불법과 부조리를 거부하고 그냥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맙니다.

이 소설에는 큰 반전이 있는데 마치 김창동 소설가의 <보석 고르기>(아직 리뷰는 쓰지 않았습니다)에서 엄청난 재산가가 신분을 숨기고 사윗감을 고르는 설정과 닮았습니다. 또 25기 30주차에 리뷰했던 김지연 작 <촌남자>와도 진행이 꽤 비슷한데, 저무렵 젊은이들이 꿈은 크고 현실은 비루한 데서 마주쳤던 갈등과 좌절을 이런 통속 소설들이 반영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이 작품은 1984년 MBC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인상이 무서운 개성파 연기자였던 故 김추련씨가 정의로운 주인공 역입니다. 또 늙은 사업가 역에 정욱씨가 나오는데, 이분은 저때로부터 17년 후인 2001년 11월에 KBS에서 방영된 부부클리닉 어느 에피소드에서도 또 어린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늙은 교수 역을 맡았기에, 아주 이런 캐릭터 전문이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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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타임 | My Reviews & etc 2022-09-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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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딥 타임

크리스티앙 클로 저/이주영 역
웨일북 | 202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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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유행 초기에 미국의 어떤 백만장자가 자신이 아직 감염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p9와 책 뒤표지에 인용된 박한선 서울대 교수님의 추천사를 보면 "컴컴한 동굴처럼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햇빛은 바로 사람이다."라는 아주 멋진 말이 나옵니다.


이 추천사에서는 "(없던) 시간을 만들어낸 게 바로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반대로, 만약 그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인간은 잠시 그 시간을 없앨 수도 있다(p2)고 합니다. 올해 8월 태풍 피해 와중에  지하주차장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기어이 고립상태에서 구조된 분의 실화가 모든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바로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증명되고 확인됩니다.  

"오늘은 2021년 3월 14일, 딥타임이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정확히 40일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난다(p18)." 이 세상에는 참으로 기발한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더 놀라운 건 그런 놀라운 발상을 자신과 동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프로젝트로 구체화한 후 이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가 호사가들의 취미이기만 한 건 아니고, 각종 과학적 의문을 해결하고 여러 연구 성과에 실증을 더하기 위한 목적도 컸습니다. 크루들은 그래서 다들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최고의 전문가들입니다.

"정말로 40일 동안 동굴에서 외부 연락 없이 지낼 건가요? 동굴 안은 항상 추워요.(p40)." 1995년 한국의 삼풍백화점 사고도 생각나고, 영화 <디센트>도 떠올랐습니다. 이런 대담하고 어찌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도전이 지금(2022.9)으로부터 불과 1년 6개월 전에 있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이 힘든 40일을 남과는 다른 길이, 강도, 깊이로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딥 타임"입니다.

"멜뤼진은 내가 아는 최고의 모험가다. 현장 감각도 뛰어나고 어딜 가나 뛰어난 사람과 함께하며 언제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한다(p53)." 이 책에서 재미난 점은, 극한 상황에 일부러 처한 후 온갖 지혜와 인내를 발휘해서 극복해 내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저자이자 프로젝트 리더인 클로 소장이 크루를 모으고 통솔하는 솜씨입니다. 리더부터가 최고이니 밑에 모이는 사람들도 따라서 최고가 되며,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리더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없다면 팀과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습니다.

이런 동굴 극한 체험에서 가장 간절한 건 햇빛입니다. 아무리 진정성 있는 시도라고 해도 정말로 사람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기에 지상 팀이 따로 대기 중이었습니다. 숙소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태양은 가득히"인데 물론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전문지식도 지식이지만 이런 극한체험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손재주 좋은 분이 팀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미앵 주밀고(p10, p41)는 46세였는데 이 팀에서 최고령자였으며 정비사, 소방대원, 목수 등 다양한 커리어를 가진 터라 이 모험에서 특히나 핵심적인 역할을 해 냅니다. 동굴 진입 전 그가 팀원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잠수함 승선원들도 그렇고 이렇게 고립된 공간에서 사는 이들에게 가장 까다로운 게 바로 배설물 처리입니다. 배설물이 세균 등으로 뒤범벅이라 위생상 해롭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건 바로 냄새겠고 이 책에도 아주 직설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이걸 이 팀은 일단 입구에 정기적으로 갖다 놓고 퇴비처럼 건조하여 재활용하기로 했는데, 영화 <백투더퓨처>에도 나오듯이 서양 비료도 성분은 비슷하지만 이처럼 건조 과정을 거친다는 게 다른 듯합니다. 반면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시비법은 습식 그대로인데 그래서인지 1950년대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재배된 채소를 절대 안 먹었다고도 하죠. 기생충이 들끓는 문제가 한국식 시비 패턴에서 끝내 해결 안 된 걸 보면 문제가 확실히 있습니다.

"딥 타임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다. 딥타이머의 시간, 지상팀, 가족들, 일반인들, 그리고 절대불변인 자연의 시간(p127)." 처한 상황에 따라, 그저 심리적으로 그리 느끼는 게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천천히(반대로 빠르게도) 가기도 한다는 걸 발견해 낸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고난의 환경 속에서 시간이 더 깊게 흘러가는 중 다미앵이 결국 부상을 입습니다. 앞에서 "동굴 안은 참으로 춥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의 부상은 동상(凍傷)인 게 드러납니다. p145 이하에서 저자가 잘 정리하듯 뉴턴식 개념, 스위스 시계 기술자식 개념, 호킹의 개념 등은 각기 내포가 다릅니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다양성을 필요로 함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p207)" 저자는 이 뜻깊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팀 같이 불굴의 의지와 체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독자들에게, 이 프로젝트의 진짜 소중한 교훈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연대하는 인간은 강하며, 어떤 시련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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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다 사람들 | 서평 2022-09-2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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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정효씨는 <하얀 전쟁> 등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가이며 그 외에도 영어 번역 등에 관한 여러 좋은 책을 써 낸 걸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주인공인 신 대표는 원래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길 좋아하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현실에 잘 적응한다거나, 회사에 들어가서 남들만큼 수완 좋게 일을 해 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해서 광고 회사에 들어가 군식구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은 하지만 워낙 주변머리가 없다 보니 매번 겉돌고, 상사로부터는 구박 받는 게 일입니다.

여느날처럼 제때 또 일을 못 끝내고 야근을 하던 그는 같은 사무실에 늦게 남아 타자를 치던 미스 정과 대화를 나눕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미스 정한테 먼저 말을 건넨 그는 제법 농도 짙은 수작을 하더니, 노처녀 신세 한탄 중이던 미스 정을 갑자기... 아무튼 이 놀라운 사건 이후로 주인공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내 나이 서른셋. 타락하기 딱 좋은 나이였다."

얼마 후 그는 유사녹용성분 영양제 녹각타민(?) 광고 컨셉을 놓고 상사와 싸우다가 사장의 지지를 얻어 성공한 기획을 만들어 내고 바로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또 사고를 친 사이인 미스 정과도 결혼을 아예 해 버리고, 사장의 신임과 비호를 악용하여 회삿돈을 횡령한 후 볼륨을 키운 후 명의신탁을 통해 아주 회사를 가로채고서는 대표직에 취임합니다. 이 과정에서 경리 미스정(아내)의 불법적인 조력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한때 세상 물정 모르고 원칙만 좇고 살았던 그가 이제는 돈과 이익만을 하이에나처럼 사냥하는 악마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를 맞아 다시 지난날의 순수했던 자신이 그리워진 신 대표는 잠시 현실로부터 도피할 겸 외딴 해변 휴양지로 떠나고, 이곳에서 어느 사업가 부부와 화가를 만나게 됩니다. 과연 그는 자신을 옥죄어 오는 파멸에의 위기를 멋지게 극복할지, 아니면 그간 저질러 온 악행의 회개에 이르기 위해 이쯤에서 모든 걸 멈추고 다시 먼 별에의 응시로 복귀할지... 저 무심한 가을바다의 파도가 잦아들면 아마 가부간에 확정이 나지 싶습니다.

이 사람이 흑화하게 된 건 주변의 나쁜 물이 들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잔인하고 이기적인 본성이 내면에 숨어 있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포텐이 확 터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는 순수했던 적이 없었고, 다만 그런 자신의 본색이 혐오스러웠기에 어떤 위장막 속에서 지내왔을 뿐입니다.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고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타인의 위안을 구할 게 아니라 어여 하이에나 모드로 복귀하여 적성에 잘 맞는 게임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그러다 임자를 제대로 만나 마침내 파멸하더라도, 사실 여태 한 짓을 감안하면 별 억울할 것도 없다는 점 본인이 더 잘 알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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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았던 집 - 은희경 | My Reviews & etc 2022-09-20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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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가 살았던 집

은희경 저
개미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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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자녀를 키운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습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비로소 나 자신의 미숙하고 빈 부분이 눈에 띄며,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건 혹은 그저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자녀가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해서건, 내가 여태 게을리했던 숙제를 비로소 부랴부랴 서두르게 되는 건 대개 비슷하지 싶습니다.

주인공은 혼자 딸 하나를 키우는 워킹맘이며 아직 여자로서의 삶을 놔 버리기엔 젊은 편입니다. 그러나 큰 책임감을 갖고 딸을 대하려 애 쓰는데 오히려 친정엄마, 즉 아이의 외할머니 되는 분이 다소 철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와 더 친해지기 위해 거짓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아마도 주인공이 이처럼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된 데에는 친정엄마의 저런 서투름도 한몫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남자분은 그저 우연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뿐이지만.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딱히 다른 재주도 없으며 외모도 평범하다면 부모 입장에서 자식 키울 맛이 나지 않을까요? 어지간한 사람 아니고선 누가 과연 이 질문에 선뜻 "예"라고 답을 할까 싶습니다. 아무리 못나도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유전자를 반반씩 받아 나온 애가 안쓰럽게 여겨지고, 가능하면 애 숙제를 내가 대신해 주고 싶어하지, 부적응자라면서 그 자녀를 백안시할 부모라니 선뜻 상상이 안 됩니다. 주인공 역시 전혀 그런 엄마가 아니며, 다만 엉뚱하게도 그 딸이 자존감 부족으로 자학을 간혹 하는 편입니다.

"난 왜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을까?" 안그래도 엄마 혼자 경제활동을 해 나가느라 힘든데, 딸이 이모양이니 얼마나 삶이 벅차겠냐며 걱정인지 속뒤집기인지 모를 말을 합니다. 엄마한테 대시하는 남자도 눈에 띄는데, 이런 혹이 달려 있다면 연애라고 어디 쉽겠냐는 식인데... 소설 속에서 자주 나오는 햄스터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며, 다만 햄스터의 그런 행동은 어미가 자기 혼자 살자고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뱃속에 다시 넣은 다음 환경이 유리해질 때 다시 키우기 위한 동기"라고도 하죠. 자연의 섭리는 그리 비정하지만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한테 대시할 때는 그 매너가 저렇게 거칠거나 일방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자는 딸의 존재를 이미 알지만, 저런 사람이 결혼 후 과연 의붓딸에게 잘할지도 의문이고, 자신부터도 저런 정서불안 성향 반려자의 덕을 과연 볼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일본 출장차 향하는 공항으로 달리는 택시, 그 운전수도 묘하게 무례하며 신경을 긁습니다. 

오래전 출간된 송숙영씨 소설집 <애종(愛終)>에 실린 단편 <고깔>과도 살짝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미디어 관련 회사에 다니는 여성이며 약간은 불안정한 신분인 것도 그렇고, 결말에서 교통사고로 아마 목숨을 잃게 되는 것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이 주인공은 성격이 훨씬 내향적이며, 저 <고깔>의 주인공은 톰보이도 그런 톰보이가 또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고깔>의 주인공은 자녀가 없고 남자를 멀리하는 타입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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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야기④ 너 어디로 가니 | My Reviews & etc 2022-09-1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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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너 어디로 가니

이어령 저
파람북 | 202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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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한국인 이야기" 그 네번째 책이자 완결편입니다. 앞에 나온 세 권을 읽고 난 후라면 더욱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앞 세 권처럼 독특한 편집 체제를 취했는데 모두 12장의 챕터[章], 각 장마다 3~5개의 꼬부랑길들, 또 각 꼬부랑길마다 3~4개의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파람북만의 개성 있는 모습이고 시리즈의 일관성이 간직되는 피처라서 더욱 마음에 드네요.

p147을 보면 선생은 날카롭게도 "...우리 나라는 바다와 면한 지명에도 鎭, 浦보다는 山이 붙은 경우가 더 많다.."라고 지적합니다. 읽고 보니 과연 그런데, 그 이유를 여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의 답은 일본에 의해 가로막힌 바다에 대해 우리 민족이 다소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서라고 해석합니다. 지명 중에 진, 포 등이 더 많고 "방방곡곡" 보다는 "진진포포(쓰쓰우라우라)"라 부르길 좋아하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바다에 나가도 "돌아오는 것"을 더 신경썼다고 합니다. 항구로 돌아오는 눈에 바로 보이는(보여야 하는) 랜드마크가 바로 "산"이란 것입니다.


이랬던 한국인들이지만 일단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바다를 알게 된 한국인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무서운 사람들이 된다는 게 선생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선생은, 최남선의 잡지 <소년> 창간호에 유독 바다에 대한 글(번역 혹은 창작)들이 많은 게 이런 이유라고 하네요. "자넨 방구석이 무섭지 않나?"라는 제목의 짧은 글도 인용되는데 재미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좁은 세계에 가두고 눈을 어둡게 만드는, 이러이러한 건 알 필요가 없다며 시대에 뒤떨어진 도그마로 사람을 세뇌하는 어리석은 방구석 마인드만큼 무서운 건 없습니다.

천자문의 첫 구절은 天地玄黃인데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란 뜻이라고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이 책에서는 현(玄)의 뜻이 직설적인 색채를 뜻하는 "검다"가 아니라, 그 뜻을 쉽사리 알 수 없는 "심오한"에 가깝다고 합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으나 사실 아인슈타인도 우주의 90% 가까이를 채우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두고 "암흑물질"이라 부른 적이 있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비웃음을 받았으나, 최근 속속 알려지는 관측 결과들에 의해 오히려 근거가 더 강해지고 있죠. 이 역시 천재의 현묘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알고 보면 발광체를 상정하지 않은 우주 공간은 그 자체로는 검을 수밖에 없으니 이런 이유에서도 하늘이 검다 한 건 틀린 말이 아니겠습니다.

"공부해서 남주냐"란 말이 있는데 공부가 그 정도로 힘든 고역이 되어서야 공부하는 당사자이건 그런 걸 시키는 사람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공부의 어원은 본래가 힘든 노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그게 또 중국, 일본, 한국에서의 쓰임이 다 다르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박사님이 알려 주시는 사항, 특히 일본에서 단어 쓰임이 그러하다는 가르침이 솔직히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박사님 같은 현명하시고 박학다식한 분이 그렇다 하시니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네요.

여튼 박사님의 결론은 이렇게 획일화한 체제 하에서 국제인이 제대로 길러지겠냐는 우려 쪽입니다. 다만 애초에 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인재 유형이 있고(정주영 현대 창업주 같은), 이런 사람은 최소한의 행동 자유만 주면 알아서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니 교육 체제가 구태여 뭘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 체제는 그런 사람이 부품처럼 밑에 두고 부릴 수 있는 인재를 양성만 하면 되죠. 그게 사회에 배출된 게 서울대, 카이스트, 포스텍 같은 소위 명문대 졸업자들이고요. 그래서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이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있었고 말입니다. 결과가 말을 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식민지 36년 세월도 "국민학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선생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른바 국민학교 설립 이후로는 민족 말살 정책이 보다 노골화했는데 이전 세대가 그래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감을 갖고 있었다면 국민학교에서 교육 받은 이후 세대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게 소학교(혹은 서당) 세대와 국민학교 세대의 차이점이라는 건데 무엇보다 박사님 자신이 1933년생, 국민학교 세대의 첫물이었으니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이겠습니다. 이처럼이나 문제가 많은(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적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놀랍게도 1990년대초까지 사용되었으니... 우리도 무슨 X세대 Z세대 이런 걸로 가를 게 아니라 국교/초교 세대로 나눠야 맞을 듯도 합니다. 박사님 주장대로라면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국민학교"에서는 오로지 "천황폐하"를 향한 충성만 강조했고, 책표지에도 나오듯 가르치는 일본어를 잘 따라하지 못하는 열등생들을 그 무서운 훈도, 교사 들이 혼을 내곤 했겠습니다. 박사님 같이 똑똑한 학생은 일본어든 뭐든 못하는 게 없었겠으나 한편으로 그 공부 못하는 어린 낙오자들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겠죠. 실제로 박사님의 천재성은 그 빼어난 일어 실력으로 잘 표현된 저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더 극찬을 받았으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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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바다로 간다면 | My Reviews & etc 2022-09-1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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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주의 바다로 간다면

케빈 피터 핸드 저/조은영 역
해나무 | 202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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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이치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철학에서 가장 근본되는 물음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라고 하는데, 이 질문은 너무도 심오해서인지 우리는 이 질문이 대체 무슨 뜻인지부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연과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은 아직 도약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생명 현상은 믿을 수 없이 드문 현상인가? 아니면 조건만 맞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생명이 발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생물학적 우주인가?(pp.30~31)"

이 질문은 생물학뿐 아니라 모든 자연과학에 공통된, 가장 근본이 되는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이 어느 정도 명확하게 정의된다면, 1)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병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체를 우리가 만들 수 있고, 2) 우주 어느 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거나 혹은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비로소 첫 걸음을 떼는 게 가능하겠습니다. 저자는 주로 2)의 과제에 대해, 이제는 기술적으로 많은 애로가 해소되어 유의미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파악합니다. 책은 바로 이 전제에서 출발하여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아바타>, <타이타닉>, <터미네이터> 등 여러 흥행작을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대작 판타지 <어비스>를 만들어 공개했으나 대중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 감독은 여전히심해 세계를 다룬 아름다운 영화 제작에의 꿈을 버리지 못했었는지, 2003년도에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우주생물학자인 저자에게 참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20년 전의 그 설레는 제안이 지금 이 책을 저술한 계기가 된 셈입니다. 

소련이 망하기는 했으나 그간 축적한 자연과학 지식, 기술의 수준이나 양은 여전히 막강한 경쟁력을 지닙니다. 저자는 책 들어가는 말에서 러시아의 켈디시 호, 그 부속 잠수정인 미르 호 등에 탑승하여 유익한 연구를 수행했던 기억을 털어놓습니다. 책에 보면 "미르"는 러시아어로 "세계, 평화"라는 뜻이라고 나오는데,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도 원제가 "보이나 이 미르"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건, 저자 혹은 (이 책에 언급되는) 동료 과학자들처럼, 이런 우주학자, 생물학자 들은 영위하는 직업도 물론 그 분야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연구 대상에 대해 참으로 비상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지금의 단계보다 한 레벨을 뛰어넘는 성과는, 바로 저런 특별한 열정이 빚는 상상력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과학자가 쓴 책은 커뮤니케이터들이 쓴 책과 달라서, 일반 독자가 바로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내용을 담는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렇지도 않아서, 예를 들어 물은 지구상의 다른 물질과 달리 고체(얼음)가 되면(응고) 오히려 부피가 커지며, 섭씨 4도에서 부피가 가장 작아집니다. 바로 이 성질 덕분에 추운 겨울에도 강이나 바다 밑에 생물들이 얼어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치를 쉽고 재미있게 저자는 설명해 줍니다. 이런 특이한 성질을 물이 갖는 이유는 수소 결합 구조 때문인데, 이런 내용은 늦어도 고2때 배우는 사항이지만, 이 책이 훨씬 이해가 쉽게끔 풀어 주고 있네요. 

우리가 우주에 대해 현재 파악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은, 알고 보면 100% 정확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여태 지구 안에서, 위에서 얻어 낸 물리 법칙이 지구 밖에서도 타당하리라고 가정한 후 그리 추론한 정도죠. 이런 명제들은, 향후 정밀 실측과 연구가 더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p92를 보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여태 과학자들이 추론한 바 상당수가 과연 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저 얼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고 지구에서 측정한 분광 결과가 옳았음을 확인했다." 분광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뒤 p190 같은 곳에서 다시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또한 얼음의 존재에 계속 주목하는데, 책 앞부분에서 물의 온도에 따른 밀도 변화를 지적하고, 겨울에도 얼음 아래에 많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신비를 자꾸 지적한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구의 얼음 밑에 그토록 많은 생명체가 살 수 있다면, 그런 일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우로파) 얼음 바다 맡에서도 있지 말라는 법이 없죠.

우리는 지저(地低)를 수천 km까지 파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핵, 내핵의 구조와 성분이 이러이러하리라고 자세히 추론합니다. p119를 보면 관성모멘트 식을 이용해서, 유로파의 내부 상태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일러스트를 통해 잘 설명해 줍니다.  물리학 개념인 모멘트는 대략 고2 이과 과정에서 배우는데, 역시 이 책은 교과서보다 훨씬 알기 쉽게 독자를 가르칩니다. 갈릴레이가 정리한 관성이라는 개념(중학교 때 배우는 지극히 쉬운 내용)이 얼마나 근본적인지, 또 얼마나 많은 내용을 품었는지 다시 숙고해 보게도 됩니다.


나사는 1969년에 달로 지구인을 보낸 이후 많은 일을 해 왔습니다. 이후 화성, 금성 등에 대고 비슷한 업적을 못 남겼다는 이유로 1969년의 업적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이들(음모론자들)이 많은데, 그런 천체들에 대한 연구와 탐사는 난이도 레벨 자체가 다르므로 시간만 지난다고 단순 비례적으로 성과가 자동으로 나오는 건 아닙니다. 벌써 이런 대중서가 쓰인다는 자체가 그간 엄청난 성과가 쌓였기에 가능한 거죠. 이 책 2부 6장에서 인류, 아니 과학자들이 적어도 유로파에 대한 이해를 반 세기 동안 엄청나게 넓혔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행성계에 존재하는 물의 총 부피는 지구의 20배가 넘을 수도 있다(p181)."  이 책은, 순전히 물 하나의 화두 하나만으로 첫걸음을 떼어 외행성 전체로 논의를 확장합니다. 그만큼 우리 지구 생명체에게 물의 존재는 핵심적입니다. 1996년 시사주간 TIME은 화성에서 물의 흔적을 발견했음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는데, 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물이 일단 있다면, 그곳으로 우리 인간이 이주하여 거주 공간의 기반을 마련할 최소 근거가 생기는 셈이니 말입니다.
 
"행성이든 아니든 명왕성은 정말 놀랍다... 얼음의 천체이나, 한 가지 종류의 얼음이 아니다.(pp.196~197)"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의문을 품을 만합니다. 그렇게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얻어 살 수 있겠는가? 저자는 행성(아니지만) 내부에서 방사성 붕괴가 일어나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암석의 부족함은, 우리 지구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라는 다른 물, 얼음의 여러 성분이 이를 보충해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상상력은 이처럼 한계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 종이 처음 생길 때부터 지금 같은 지능과 손재주를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머리도 따라서 좋아졌고, 척박한 자연의 도전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골디락스라는 말이 암시하듯, 대체 이런 아름답고 온화한 지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살고 번영할 수 있을까 싶기만 하지만, 사실 내내 에덴 동산처럼 낙원이기만 했다면 아직 나무 위 배부른 원숭이 처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그저 포화상태 지구를 탈출할 필요만 갈급한 게 아니라, 다른 행성 다른 위성에 도달하여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습니다. 우주라는 바다를 항해하고, 더 잘 알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도 하나 더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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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이렇게 말할걸 | My Reviews & etc 2022-09-0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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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진작 이렇게 말할걸

모리타 시오무 저/황미숙 역
현대지성 | 202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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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그렇게 딱 만났어야 했을 두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마음에 드는 자녀들만 슬하에 두고 백년을 해로하다가 한날한시에 손잡고 마감하는 것이라면 참 좋을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없다며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만 사랑하고 마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 싶습니다. 

부부 사이에 네 명의 자녀, 그것도 딸로만 네 명을 두었다면 아마도 정말 다복하고, 또 금슬이 좋은 사이라며 주변에서 부러움이 자자했을 듯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리 보일 뿐, 진실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첫째는 알고 보니 여성(이수인)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이미 포태하고선 출산만 혼인 중에 이뤄졌던 것이며, 넷째는 아예 균형이라도 맞추겠다는 듯 업둥이를 남편이 어디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행복한 결합이었다면 어쩌면 첫째 하나로 영원히 만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역시 남자(한주열)이 이미 사정을 다 알고 맞았으며, 심지어 그 모친, 즉 시어머니의 동의 하에 진행된 결합이었기에 더 충격이 큽니다. 알 만한 사람, 속 깊고 많이 배운 남편이 아내 될 이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 감동적인 포용의 제스처를 이미 보였었기에(나중에 배신당하듯 알게 된 게 아니라), 아 이런 종류의 상처는 무슨 노력을 해도 극복이 안 되는 거구나, 이런 씁쓸한 결론만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주열은 기어이 이상한 여자(오홍자)와 잠시 인연을 맺고 거짓으로 둘러대며 자신의 핏줄을 들입니다만 누가 이런 어설픈 수작에 계속 속(아 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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