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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2회 | 비너스에게 2010-08-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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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짓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는 여자애에게 관심이 있는 척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어. 사실 친구 녀석들이 늘 여자 얘기만 하는 건 아니었고, 다들 자기 공부로 바빠 그럴 수 없기도 했지만, 나는 가만있으면 있을수록 내 자신이 투명해지는 것 같아 무서웠어. 부지런히 거짓말을 하고, 과장되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내 모든 관심사가 여자에게 있는 양 가식을 떨다보면 나도 내 정체를 모를 정도로 뿌옇게 흐려져서 안심이 됐지.

내가 어떤 놈인지 나 자신도 모른다면 남들도 그러지 않을까 하고. 영원히 그렇게 희뿌연 존재로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 자신을 전혀 다른 무엇으로 가장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곧 익숙해지기도 해서 내 가장술은 둔갑술의 경지에 이르러 어느새 벌써 몇 명의 여자와 이런 저런 체위를 구사해 본 ‘경험자’ ‘바람둥이’ ‘가벼운 녀석’이 되어있었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하지만 가슴 한쪽이 쿡쿡 쑤셔대더니 모든 것이 무거워졌어. 악의 없는 순진한 친구들이 버거워지고 학교에도 가기 싫어졌지.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던 거야.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어. 하지만 그렇다한들 내가 뭘 어쩔 수 있었겠어.

 

그를 본 건 순식간이었어.

그는 얼굴을 비스듬히 돌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체육대회 중이어서 모두 체육복을 입고 있었지. 비너스.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는 걸까? 한 사람의 몸짓이나, 실루엣, 분위기, 목소리, 심지어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양까지, 언젠가 한번은 꼭 보고 싶으나 가능할 것 같지 않아 아예 포기해버린 완벽한 모습을 실제로 보고 있는 비현실적인 순간. 운동장에서는 반대항의 농구시합이 한창이었고 친구 녀석들은 우리 반을 응원하느라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어.

그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예쁜 여자를 보면서 감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어. 그저 잘생긴 것과 예쁜 것뿐이라면 마음을 움직이게 하거나 몸을 달아오르게 하지도 않아. 그럼 그건 뭘까. 그런 감동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지? 우리 반이 2점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반에서 제일 키가 큰 녀석이 시합을 1초 남겨두고 3점 슛을 집어넣었고, 그래서 내 주위의 녀석들이 방방 뛰며 미친 듯 소리를 질러대고 시합 종료를 알리는 화약총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그와 키스를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라는 망상을 하고 있었어.

저녁밥을 고스란히 남겨 엄마를 놀라게 한 건 물론이고, 열에 들뜬 그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 낮에 보았던 그의 모든 것을 열심히 되감고, 되감고, 되감다 보니 나중에는 기억이 긁혀버렸는지 자꾸만 엉뚱한 망상들이 떠올랐어. 그와 손을 잡는다면, 내가 그를 안는다면, 그가 나를 안아준다면, 그리고 하아……. 나는 아직 아무와도 섹스는커녕 키스도 해보지 못했으니 더 이상의 구체적인 망상은 불가능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조용히 탐문을 시작했어. 그는 나보다 한 학년 선배였고, 몇 반인지까지는 알아냈지만 더 이상은 오리무중. 선배는 지나치게 공부를 잘한다거나, 뛰어나게 운동을 잘한다거나, 알아주는 싸움꾼이라던가 하는, 후배들도 알 수 있을 만한 특별한 점이 없는 사람이어서 특히나 우리 학년 중에는 그를 아는 녀석을 찾을 수 없었던 거지.

별 소득 없이 며칠이 지나자 나는 초조해졌고, 결국은 조심성을 잃어버린 채 닥치는 대로 “이유는 묻지 말고, 3학년 3반에 대해 아는 녀석 없는 거냐?”라고 묻고 돌아다녔어. 그래서 결국 나는 몇 다리를 건너서야 간신히 그와 같은 반에 있는 형을 둔 녀석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막상 그 녀석에게 접근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캐낸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었어. 대체 뭐라고 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야 하는 거야.

 

“나는 알바를 하고 있어.”

 

내가 사준 와퍼를 와구와구 먹으며 그 녀석은 무슨 알바냐고 무관심한 어조로 물었어.

 

“고3 수험생들의 하루 일과를 설문조사하는 거야. 아는 형이 ‘우리나라 입시제도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데, 자료로 필요하댔어. 나는 장당 천 원씩 받기로 하고 이 일을 맡았어.”

“헤에, 굉장하네, 그거. 나도 좀 나눠 하면 안 될까?”

 

이런 제기랄.

 

“음……. 그건 좀 그래. 단순한 설문이 아니라 일대일로 만나 자세한 상담을 해야 해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러니 장당 천 원은 사실 아주 싼값이라고. 나야 아는 사이니까 도와주는 거지 뭐.”

“그렇군.”

 

그 녀석이 콜라를 쪼옥 빨아먹으며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어. 나는 그 녀석에게 형을 통해 3반과 연결을 좀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절대 공부에 방해되지 않게 할게. 쉬는 시간에 잠깐씩 만나 이야기할 테니까.”

“글쎄. 우리 형은 지 멋 대로라.”

“와퍼 하나 더 먹을래?”

“형한테 말이나 한번 해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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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1회 | 비너스에게 2010-08-0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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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디에서 올까

 

 

 

비너스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지.

우선…… 이름은 강성훈이고 열여덟 살이라는 사실. 엄마와 둘이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없어. 단둘뿐이어서 그런지 엄마와 내게는 아주 여러 가지 추억이 있는 것 같아.

그 추억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기억은 주로 엄마가 내게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를 때리거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장면들. 엄마는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이라 별로 참을성이 없고, 나는 끈질기고 고집이 세서 우리 모자는 늘 으르렁거리며 싸우거나 물고 뜯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어.

어렸을 때야 내 힘이 엄마보다 약하니 늘 형편없이 두드려 맞다 끝내는 굴욕적인 울음을 터뜨리며 끝났지만,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쯤엔 내리치는 엄마의 팔뚝을 붙잡고 “이제 그만 하시죠”라고 멋지게 말해줄 수 있게 되었어. 물론 엄마는 옆에 있던 진공청소기를 집어들어 내 머리통을 후려쳤지만.

그 이후로 나는 키가 점점 더 자라났고 힘도 세지게 되었어. 그래서 이제는 엄마가 진공청소기로도 후려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높게 솟아 있어서 엄마는 하이 킥이나 익혀야 내 머리통을 갈길 수 있게 됐지. 내 엄마로 말하자면 기꺼이 하이 킥을 날리고도 남을 여자이니 내 키가 커졌다고 방심할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 모자의 최근은 매우 평온하고 다정하기까지 했어. 그 말은 내가 엄마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하지 않을 정도로는 철이 들었다는 뜻.

 

만사가 이렇게 잘 풀리기만 한다면야 얼마나 좋겠어.

 

친구들이 여자애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시작하고, 또 여자애들이 나나 내 친구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내게도 가끔씩 미팅이며 소개팅 제의가 심심찮게 들어와서 예쁜 여자애, 멋진 여자애, 귀여운 여자애, 명랑한 여자애, 침울한 여자애, 통통한 여자애, 말라깽이 여자애 등등을 모두 만나보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이 가지를 않았어. 아니, 마음이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어. 솔직히 나는 걔네들의 가슴이나 엉덩이, 가느다랗고 높다란 목소리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어. 가슴이 유난히 큰(완전 수박만 했어) 여자애가 내 팔뚝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섬뜩했어. 그러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

 

내가 노력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야. 취미나 기호 같은 것이 비슷하고 성격도 잘 맞는 어떤 여자애와 한동안 교제를 한 적이 있었어.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친구들 말에 의하면 성격이 고약할 것 같은(사실 그 녀석들이 착해 보인다는 건 예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고, 인상이 고약하다는 건 못생겼다는 뜻) 인상의 여자애였지.

날더러 하필 왜 그런 애를 만나냐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나는 적어도 그애랑 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어. 우리는 가끔 만나서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영화를 보거나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어. 어느 날 그애가 슬쩍 내 손을 잡았을 때도 참을 만했고, 발이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안겨왔을 때도 견뎠지. 문제는 우리가 교제한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생겼어.

 

주말에 그애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하필 부모님이 모두 집을 비운다는 거였어. 나는 정말로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는지 몰라.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해보았지만 그 녀석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GO, GO!” 였다고.

 

내 인생 최대의 시련에 부딪쳤으니 나는 사실 엄마에게 조언을 구해야 옳았을 거야. 하지만 내가 어떻게 엄마와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겠어.

 

“저기요, 엄마. 할 말이 있는데요. 여자친구가 덤벼들까봐 겁나요. 어쩌죠?”

그럼 엄마는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아들. 가서 네 할 일을 하거라.”

그랬겠지.

 

그래서 나는 주말에 피자 한 판과 콜라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그애의 집 앞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던 거지. 나는 내 안의 두려움과 혼란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느니 차라리 여자친구와 자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그런 녀석인 거야.

초인종을 누르고(손에서 식은땀이 나고 있었어),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를 통해 숱하게 보아왔던 남녀 간의 낭만적인 장면을 떠올리며 그애와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고(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지), 나는 할 수 있다고 수없이 되뇌며(속이 울렁거렸어) 영원 같던 1분이 지나고 마침내 그애가 나왔어. 함께 있으면 마음이 더 없이 편한 내 여자친구.

 

나는 피자 상자를 그애 앞으로 내밀다가 그 위에 토하고 말았어. 마침 피자를 받아들려고 내밀었던 그애의 손에 내 아침식사의 내용물이 몽글몽글 쏟아져 나왔지.

 

하아…….

 

난 전속력으로 되돌아 나와 자전거 안장에 올라탄 후 야생마를 모는 기세로 페달을 밟아 그곳을 빠져나왔어. 그것으로 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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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8월 9일 오픈! | ┌ 공지 2010-08-03 12:10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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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YES24 블로그 관리자 입니다

 
'바람이 노래한다','발이 닿지 않는 아이' 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권하은이 외로운 청춘에게 보내는 연가

 

'비너스에게'

 

8월 9일 월요일, 연재 시작됩니다!

 

@ 오픈 기념 이벤트 보러가기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바람이 노래한다
권하은 저 | 창비 | 2009년 08월

발이 닿지 않는 아이
권하은 저 | 문학동네 | 201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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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하은에 대해 | ├ 작가소개 2010-07-2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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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청소년 소설 속 정형화된 십 대의 사랑을 전혀  다른 톤으로 접근해사랑을 주제로 한 청소년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바람이 노래한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 『바람이 노래한다』『발이 닿지 않는 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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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 └ 작가 레터 2010-07-2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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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밤하늘을 수놓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수 억 개의 별들이 저마다의 빛을 내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시공을 넘어 존재하고, 우리 역시 그들에게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세계로 인식하며우주라 부른다. 세계와 우주는 하나인 동시에 다른 존재들이며, 다른 존재들인 동시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 불가해한 곳에는 언젠가부터 두 발로 걷는 기이한 존재들이 살고 있어서, 우연한 생을 얻어 별처럼 빛나다 별처럼 허무하게 스러져간다. 우주는 넓고 세계는 다양하되, 두 발로 걷는인간이란 존재는 좀체 땅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작디작은 자기 발만 보고 살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만다.

  

비너스에게는 동성애자(이자 미성년자)가 주인공이지만, 정작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다양성에 대한 것이다. 하늘의 별들처럼 제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결국 하나가 되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인간 안의 다양성 말이다. 조화로운 세계란 모두 같은 모양을 지닌 채 한 가지 빛을 내는 곳이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빛을 내며 그 자리를 묵묵히 견뎌내는 곳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빛이 모이면 환하고 아름다운 불덩이가 되어 어둡고 공허하며 차가운 인간의 삶을 따스하게 비추어줄 것이다.

 

게이이자 미성년인 주인공성훈은 자신의 이야기를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존재에게 향하길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성훈이뿐만 아니라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만큼은 세상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그런 존재인 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의무가 있다. 나는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이라 믿는다.

 

이 소설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운, 혹은 소통에 목마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쓰인 이야기이다. 내게 있어청소년이란 단어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며,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해 무엇으로든 변화(혹은 진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성훈이기도 하며, 비너스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성훈으로서 말하고 비너스로서 듣기를 원한다. 아무리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다 해도, 그런 순간만큼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2010 7 30일 권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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