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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3회 | 비너스에게 2010-10-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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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나리가 여기저기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오맙또의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잦아지게 되었어. 작전명 ‘달려라 달려 달’ 때문이었지. 그 촌스러운 이름을 떡하니 붙인 건 도라. 그 녀석은 이게 아주 재밌는 구경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어. 잡은 우리 집에서 누룽지의 집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의 상세지도를 구해 몇 번이나 메일로 보내주었고(이건 그제 보낸 지도보다 약 십이 분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거야. 물론 그때 도로사정이 어떤지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빠른 길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같은 메일들), 필은 가는 길에 배가 고플지도 모르니 중간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 도시락과 음료를 건네주겠다고 했어. 물론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필이 어떤 식으로든 이 일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 주면 고맙겠다고 대답했어. 마와 도라는 내가 가는 도중에 뒤차에 받힐 수도 있다는 끔찍한 가정을 늘어놓으며 재빠른 조치를 위해 함께 달려야 한다고 주장했어.

 

  “대체 어떻게? 정말 마라톤이라도 하게?”

 

  내 문자에 도라가 답문자를 보냈어.

 

  “삼촌이 트럭을 빌려준대. 식당의 알바 형이 운전을 해주고. 만일 네가 사고를 당하면 우리가 그 트럭에 ‘북경’을 싣고 누룽지에게 가는 거지.”

 

  과연 이 녀석들은 내 안전에 대해 눈곱만큼이라도 걱정하고 있기는 하는 거냐?

 

  “그래. 그게 좋겠다.”

 

  어쨌든 만전을 기해 나쁠 건 없겠지.

 

  결행일로 정해진 건 4월 중순. 우리는 3월 말쯤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누룽지가 그날을 위해 다이어트에 돌입했으니 원하는 체중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기 때문이야.

 

  “괜한 짓이야. 사실 누룽지는 화장만 안 해도 체중이 3킬로그램은 줄어 있을걸.”

 

  이건 마가 보낸 문자.

 

  엄마는 최근 샤넬 핸드백과 구찌 쇼퍼백을 사들였어. 이건 그녀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뜻. 마지막 연애가 끝난 지 3년 만이야.

 

  “이번엔 잘해서 결혼해봐.”

 

  내가 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엄마는 깜짝 놀랐어.

 

  “그게 무슨 소리니?”

 

  “엄마가 결혼하면 좋겠다고.”

 

  “……아버지가 갖고 싶은 거니?”

 

  “설마. 애도 아니고, 난 이대로도 상관없어. 그냥, 엄마가 덜 외로우면 좋겠어.”

 

  “남편이 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야.”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남편 있는 애들이 그러더라.”

 

  “그건 가진 자의 여유고.”

 

  엄마는 젓가락으로 콩나물무침을 뒤적거렸어.

 

  “저기, 성훈아.”

 

  “응?”

 

  “너 있잖아, 남자끼리는……”

 

  “응.”

 

  “진짜 콘돔 끼고 해야 하는 거 알지?”

 

  “어머니!”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노파심이야.”

 

  엄마의 노파심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걱정이 되었어, 비너스. 그녀는 남자들 간의 안전한 섹스가 어떤 것인지 온갖 자료를 다 뒤지고 있을 게 뻔했거든. 검색은 나도 할 수 있으니, 제발!

 

 

 

 

  드디어 ‘달려라 달려 달’의 결행일. 날씨는 쾌청, 낮 기온은 18도, 저녁에는 기온이 급강하해서 5도까지 떨어질 예정, 비올 확률 제로. 나는 갈색의 가죽 라이더재킷을 멋지게 차려입었고, ‘북경’에 연료를 만땅 채웠으며, 잡이 보내준 상세지도들도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었어. 평일 오후여서인지 도로는 그럭저럭. 밀리는 구간은 밀리고, 뚫리는 구간은 시원스레 뚫리고. 고속으로 주행하는 자동차 사이를 달리다보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초조하기도 하고, 작은 스쿠터에 앉아 아무런 보호막 없이 내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꼭 다칠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해. 하지만 대신 정지신호에 걸려 멈춰 서서 쳐다보는 드넓은 푸른 하늘과, 달릴 때 내 곁을 지나치는 바람은 정말 최고라고.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푸른색 트럭에는 마와 도라가 타고 있겠지.

  잡과 필이 기다리고 있는 공원까지 걸린 시간은 삼십여 분. 그애들은 약속대로 김밥과 샌드위치, 커피와 주스 같은 것들을 잔뜩 싸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십여 분 정도 뒤에는 근처의 공영주차장에 트럭을 세우고 마와 도라, 알바 형이 합류했어. 꼭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자리를 깔고 시끌벅적하게 도시락을 먹고 있자니 ‘달려라 달려 달’ 작전 따위야 알 바 없다는 ‘아무려면 뭐 어때’ 작전으로 돌변. 급기야는 알바 형이 근처의 매점에서 맥주를 사 들고 오기까지 하는 돌발상황이 발생. 마와 도라, 알바 형이 거푸 맥주를 따라 마시는 가운데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가던 내가 끝까지 사양할 수 있었던 건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필 때문. 알바 형은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하고, 귀에는 각기 세 개씩의 피어싱을 하고, 손에는 별모양의 작은 문신을 하고 있었어. 좀 더 용기가 생기면 어깨에 호랑이 문신을 새길 예정. 알바 형은 지금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 이때다 싶을 만큼 모으다가 그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버릴 거라고.

 

  “그럼 형도 그게 뭔지 모르는 거예요?”

 

  “그렇기는 한데, 아마 엄청나게 시시한 일이 걸려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시시한 일?”

 

  “지금 살고 있는 원룸의 보증금을 올려줘야 한다든가, 어영부영 술값으로 다 날려버린다든가, 시시한 일이야 어디든 널려 있으니까.”

 

  “에에, 그러지 말고 확 떠나버려여.”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마가 실실 웃으며 말했어. 알바 형도 그러게, 라고 외치며 다시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어.

 

  “달, 넌 지금 떠나는 게 좋겠다.”

 

  필이 시계를 보면서 재촉했어.

 

  “쟤들은 그냥 두고 가. 잡이랑 나도 슬슬 돌아갈 거니까.”

 

  결국 필과 잡, 내가 일어섰을 때 마와 도라, 알바 형은 근처의 노래방으로 의기투합, 신이 나서 사라졌어. 필이 피크닉 바구니에서 자그마한 프리지어 꽃다발을 꺼냈어.

 

  “이건 잡과 내가 같이 산 거야. 남자에게 꽃을 선물 받는 건 여자애의 로망이니까, 누룽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고맙다. 누룽지에게 잘 전해줄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기는 했어. 진성 게이가 서울에서 인천까지 스쿠터를 타고 달려가 여자애에게 꽃을 선물한다니 말이야. 그래도 나는 꽃다발을 배낭에 조심스레 집어넣고 스쿠터에 올라탔어.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나는 필과 잡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길에 올랐어. 공원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길은 이미 퇴근 러시아워.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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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2회 | 비너스에게 2010-10-2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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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지고 있는 롤렉스도 아버지가 성년이 되던 해에 선물해주신 거야. 좀 이르기는 하지만, 내가 너에게 마련해주고 싶었어.”

 

  비너스. 나는 아직 애송이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어. 내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의미? 너는 내 자식 같은 존재라는 의미? 그러니까 맘 접고 떠나라는 의미?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너에게 좋은 걸 주고 싶었다는 의미? 분명한 건 내 가슴에 적란운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 나는 시계를 도로 상자에 넣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어.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현신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어. 나는 당신을 그런 의미로 좋아한 게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날 잘라내지 말란 말이야. 자르려면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넌 연인감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줘.

 

  “네 아버지처럼 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우리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내가 당신보다 어려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현신이 끈기 있게 설명했어.

 

  “가슴이 설레고 끌리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관계가 유지되지 않아. 관계란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나가야 하는 건데, 현재 우리에게는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나 공간이 없어. 그런 관계는 서로를 낭비시킬 뿐이야.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이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야.”

 

  비너스. 어른이란 참 교묘해. 그는 날 잘라내는 듯하면서도 쓸데없는 희망을 주고 있잖아. 이를테면, ‘현재’라든가, ‘지금으로서는’이라는 단어를 적절히 사용해서 말이야.

 

  “난 그런 관계라도 상관없어요.”

 

  “난 안 돼, 성훈. 난……”

 

  “어른이니까?”

 

  “그래.”

 

  현신이 조용히 대답했어. 나는 몸을 돌려 그의 곁을 떠났어. 현신은 나를 붙잡지 않았고, 그래서 다행히 그에게 내가 우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됐어. 하지만 내 나이 열일곱에 벌써 두 번째 실연이라니, 그것도 생일날에. 이건 정말 너무 잔인하지 않아, 비너스?

 

 

 

 

  해가 바뀌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열아홉 살이 되었어. 만으로는 아직 열일곱이긴 했지만 주민등록증도 발급되었고, 원동기 면허시험도 통과. 나는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어. 엄마와의 약속대로 학원에 등록한 뒤 한동안 중단했던 공부도 다시 시작했어. 우선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면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가서…… 학생증을 손에 넣자. 우선은 그것만 생각하기. 그래서 나는 예전과 매우 비슷하게 생활하고 있는 중. 아침부터 밤까지의 모든 시간이 공부를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엄마는 처음에 내 ‘북경’을 보고 위험하다며 걱정을 늘어지게 했지만, 예전처럼 강압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들지는 않았어. 나는 오토바이 수리센터에 가서 이런저런 것들을 손보면서도 노란 깃발은 일부러 떼지 않았어. 달릴 때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 해서 ‘북경’은 내 애마의 상징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어. 내가 ‘북경’을 타고 달리노라면 사람들은 나를 열심히 배달 중인 철가방쯤으로 여기겠지?

  나는 가끔씩 오맙또의 아이들과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고 있어. 그애들 대부분이 나처럼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 마는 이제 적어도 밤에 자다가 오줌을 지리는 일은 없다고 해. 그건 그 아이를 위해 무척 잘된 일이야. ‘고 ㄱ’에게는 안된 일이겠지만. 누룽지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건 봄으로 미뤄둔 상태. 착한 누룽지가 추운 겨울날 서울에서 인천까지 스쿠터를 타고 달려오는 건 환상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배려해주었기 때문.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보니 ‘애미’는 이제 과거의 한구석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야.

  2월에는 마침내 영무를 찾아갔어. 나는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영무 녀석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까봐 무척 걱정스러웠지. 하지만 영무가 날 포기해버리지 않은 것처럼 나도 그 녀석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어. 영무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어. 역시 별다른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는 뜻.

 

  “오랜만이다.”

 

  영무가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어.

 

  “그래. 정말 오랜만이지.”

 

  나는 의외로 편하게 대답할 수 있었어. 영무는 내 스쿠터를 보면서 피식 웃었어.

 

  “이번엔 배달일이라도 하는 거냐?”

 

  “그건 아니고.”

 

  “그래?”

 

  “영무야.”

 

  “응?”

 

  “보고 싶었어.”

 

  “어…… 그게, 음,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피식 웃었어.

 

  “넌 내 친구야. 가장 소중한 친구.”

 

  “그건…… 나도 그래.”

 

  “정말이냐?”

 

  “그럼.”

 

  영무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내게 물었어.

 

  “PC방 갈래?”

 

  “그거 좋지.”

 

  ‘북경’은 영무네 집 앞에 세워두고 우리는 단골 PC방으로 갔어. 우리는 눈이 짓무르도록 게임을 하다가 자장면을 시켜먹었어. 이번에는 내가 쏘기로 했어. 사과의 의미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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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1회 | 비너스에게 2010-10-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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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왕이면 자동차를 스스로 몰고 왔으면 좋겠어.”

 

  “에? 그럼 우리는 안 되겠네. 도와줄 수가 없잖아.”

 

  “현신 쌤께 부탁해보면 어떨까?”

 

  마가 의견을 내놓았어.

 

  “그건 반칙이야. 이건 ‘우리’끼리 해결하기로 한 거잖아.”

 

  필이 반대했어.

 

  “하지만 마라톤 선수라도 그건 무리라고. 그럼 하다못해 오토바이라도 탈 줄 안다면……”

 

  잡이 말을 하던 도중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어.

 

  “저 스쿠터로? 무리야, 그건.”

 

  마가 말했어.

 

  “하긴. 너무 멀어. 고속도로는 탈 수가 없으니 국도로 와야 하는데, 저걸로는 어림도 없을 거야.”

 

  “꼭 부산이어야 해?”

 

  내가 물었어.

 

  “우리 집에서 너희 집까지 정도면 어쩔까?”

 

  “네가 와주는 거야? 날 위해서?”

 

  누룽지의 얼굴이 그야말로 홍당무처럼 붉어졌어.

 

  “그것도 좀 그렇지 않나? 얘는 이제 오맙또의 일원도 아니고, 더 이상 수요일의 아이도 아니야.”

 

  필이 말했어.

 

  “까다롭긴. 누룽지도 좋아하는 것 같고, 애초 이 계획은 모두 얘한테서 나온 거잖아. 뭘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난리냐?”

 

  잡이 면박을 주었어.

 

  “그건 그렇고, 넌 이제부터 ‘수요일의 아이’가 아니니까 다른 닉네임이 필요해. 너는…… ‘달려라’다. 줄여서 달. 어때?”

 

  잡이 엄숙하게 말했어.

 

  “그거 좋은데 그래? 왠지 어울려. 달.”

 

  아이들이 모두 만족스러워했어. 그래서 나는 달이 되었어. 나도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닉네임이었지.

 

  “그럼 결정인 거네. 달이 누룽지를 위해 스쿠터를 타고 달려간다. 누룽지. 너 집이 어디야?”

도라가 물었어.

 

  “인천.”

 

  이런 제길. 서울이 아니었어!

  저녁때가 가까워오자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애미’에는 양나 씨와 나만 남았어. 그녀는 붉은색 포장지에 초록색 리본으로 묶인 커다란 상자를 하나 건네주었어.

 

  “생일선물이야.”

 

  “어, 고맙습니다.”

 

  나는 당황하면서 받아들었어. 그녀가 날 위해 해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따로 선물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는데.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번개모양이 새겨진 붉은색 헬멧이 들어 있었어. 나는 양나 씨를 위해 얼른 써보았어.

 

  “완전 맘에 들어요.”

 

  “신나게 달려봐, 달.”

 

  양나 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어.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든지.”

 

  “애인하고는……”

 

  “그녀하고는 완전히 끝났어.”

 

  “그렇군요.”

 

  “소년.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녀가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한 순간이 분명히 있었어. 그래서 우리는 잘 헤어졌어.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앞날의 행복을 빌어주고, 따듯하게 안아주고, 힘차게 악수까지 했다고.”

 

  “다행이네요.”

 

  “그래. 다행한 일이야.”

 

  양나 씨는 씨아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분명하게 다시 한 번 말했어.

 

  “정말 다행한 일이야.”

 

  어느새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어.

 

  “눈이 오네요.”

 

  내 말에 양나 씨는 창밖을 쳐다보았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아참, 현신이 네게 시간이 되면 잠깐 들러달라고 했어.”

 

  “왜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 하지만 양나 씨는 모르는 척해주었지.

 

  “글쎄. 크리스마스인 데다 네 생일이기도 하니까, 그도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 아닐까? 스쿠터랑 헬멧은 놓고 가라, 소년. 면허가 먼저야.”

 

  “그럼요.”

 

  나는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일어섰어. 그러고는 양나 씨와 다정한 포옹을 했지. 행여 그녀의 목을 건드릴까봐 무척 조심스러웠어.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을 담은 내 말에 양나 씨는 천만에, 라고 대답했어.

  나는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현신에게로 갔어. 침착하게 걷자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져갔지. 결국 나는 거의 뛰다시피 그에게로 가고 있었어. 누룽지가 원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현신의 진료소는 문이 닫혀 있었어. 나는 호출기를 눌렀고, 잠시 후에 현신이 문을 열어주었어. 그의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지. 왔구나, 라고 그가 말했어. 네, 왔어요, 라고 내가 대답했어.

 

  “생일 축하한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어.

 

  “이제 열일곱 살이 된 거니?”

 

  “네.”

 

  기쁨으로 날뛰던 가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어. 그의 입에서 직접 내 나이를 들으니 내가 한참이나 어리게 느껴졌기 때문이야. 11년의 차이. 현신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11년만큼의 경험.

  우리는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어. 현신의 집은 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어.

 

  “내가 네 나이 때 뭘 좋아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봐도 잘 모르겠더라. 난 그저 별 특징 없이 평범하기만 했던 애라. 유일하게 동물을 좋아했지만, 네게 덜컥 동물을 선물해 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현신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작은 상자를 내게 주었어.

 

  “점원에게 물었더니 이게 너만 한 나이의 애들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하더구나.”

 

  “고맙습니다!”

 

  현신이 설사 앨리스 같은 사나운 수소를 선물해줬더라도 나는 정말 기뻤을 거야. 하지만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캐주얼한 디자인의 명품 브랜드 시계가 들어 있었어.

 

  “어! 이건 너무……”

 

  너무 값이 나가는 거라 나는 어안이 벙벙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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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0회 | 비너스에게 2010-10-2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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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와 이야기를 했어.”

 

  “뭐라든가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

 

  “난 그 녀석이 무슨 짓을 당했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가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나요?”

 

  “그래. 하지만 마는 받아들여야만 해. 사람은 언제든 변화할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관계도

  새롭게 정립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의 이마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기는 일 같은 건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말이야. 너는 이번 일로 무엇을 깨달았지?”

 

  “쉽게 이루어지는 소망 같은 건 없다는 거요.”

 

  양나 씨가 미소를 지었어.

 

  “그래. 하지만 너희가 그애를 돕기 위해 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우리가 한 일? 롤러블레이드 타기요?”

 

  “뭐, 예를 들자면. 너희들 결국 꽤 멋지게 타게 됐잖아.”

 

  이렇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 꽤 멋지게 타기는 했어.

  양나 씨는 이제 내가 ‘애미’에 올 필요가 없다고 했어. 넌 이제 괜찮아. 정말? 난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오맙또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건 남아 있는 아이들이 결정할 문제야.”

 

  그녀는 벌써 날 외부인처럼 다루고 있었어.

  비너스. 현신과 처음 만난 날, 그는 영원한 건 없다고 했었어. ‘애미’는 그야말로 양나 씨가 말했던 것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는 대피소 같은 곳. 언제나 맑은 날만 계속될 수는 없으니, 나는 다시 소나기를 맞을 준비가 된 건가?

 

 

 

달려라 달려 달

 

  비너스에게.

  내가 만 17세가 되던 날, 양나 씨는 나를 ‘애미’에 초대해주었어. 그녀는 날 위해 커다란 생일 케이크를 구워주고 필과 잡, 누룽지, 그리고 마와 도라까지 불러주었지. 도라는 ‘뿔로 받는 날’ 마에게 손을 베어서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는 중. 의사는 까딱 잘못했으면 신경이 끊어져서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 뻔했다고 했어. 그런데도 그애들과 함께 있자니 너무 쉽사리 편해져서 깜짝 놀라고 말았어. 그 녀석들은 내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고 선물도 주었어. 비너스. 그게 뭔지 알아?

‘북경.’

그 녀석들이 내게 선물해준 50cc짜리 스쿠터 뒤에 꽂혀 있는 노란 깃발에 그렇게 씌어 있었어.

 

  “이건 도라네 삼촌이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쓰던 배달용 스쿠터야. 너무 낡아서 새 걸로 바꾼다기에 우리가 함께 돈을 내서 사온 거야.”

 

  잡이 자랑스럽게 설명했어.

 

  “낡긴 했지만 아주 잘 굴러가. 얘가 제법이라고 삼촌도 그랬어.”

 

  도라도 신이 나서 말했어.

 

  “어, 이건, 정말, 그래. 멋지다.”

 

  그건 진심이었어, 비너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던 누룽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어.

 

  “정말 고마워.”

 

  “한번 타봐.”

 

  필이 말했어.

 

  “어, 글쎄, 난 아직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타봐야지.”

 

  양나 씨가 명랑하게 말했어. 그녀는 아직도 목과 다리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어. 나는 조심스레 스쿠터 위에 앉아보았어. 오랜만에 마당으로 나온 하나와 앨리스가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어. 나는 시동을 건 뒤 손잡이의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잡아당겼어. 그러고는 말 그대로 붕 날아가 포플러나무 밑에 처박혔지. 이것이 나의 첫 주행. 다행히 양나 씨처럼 깁스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뒤통수에 혹이 난 데다 눈에서 별이 번쩍했다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앉아 오맙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 우리의 ‘소망 이루어주기’는 그대로 중지되는 건가? 필과 잡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소망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어.

 

  “누룽지는?”

 

  내 물음에 그애는 얼굴을 붉혔어.

 

  “나는, 나는 바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이제 됐어.”

 

  “그러지 말고 말이나 한번 해봐.”

 

  도라가 물었어.

 

  “그래.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게.”

 

  마도 선선히 말했지.

 

  “뭔데 그래?”

 

  필과 잡도 이구동성으로 물었어. 누룽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뜸들이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말해! 라고 연호하자 겨우 입을 열었어.

 

  “내 소망은…… 누군가가 날 위해 달려와 주는 거야.”

 

  “에게, 그게 다야?”

 

  필이 시시하다는 듯 외쳤어.

 

  “하지만, 하지만, 이제껏 아무도…… 그래준 적이 없어서……”

 

  “뭐, 그런 거라면 간단하잖아. 그냥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마가 말했어.

 

  “그게, 나는 정말 먼 거리를, 정말 오직 나만을 위해, 달려와 주었으면 하는 거라.”

 

  “먼 거리면 얼마 정도나?”

 

  마가 물었어.

 

  “그, 글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음…… 예를 들면 부산에서?”

 

  “우왓! 이건 간단한 게 아니잖아. 부산에서 서울까지 달려와야 한다는 거야?”

 

  도라가 깜짝 놀라며 물었어.

 

  “꼭 두 발로 달려야 하는 거야?”

 

  필이 물었어.

 

  “말했잖아.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그럼, 자동차 같은 걸로 가는 것도 괜찮은 거네.”

 

  “음……”

 

  누룽지는 자기가 아무 생각 없이 떠올려보곤 하던 몽롱한 환상의 구체적인 모양을 추적해내느라 안간힘을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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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49회 | 비너스에게 2010-10-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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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리지 마. 난 이제 애가 아냐. 엄마와 충분히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컸잖아.”

 

  내가 침착하게 말하자 엄마는 멈칫하더니 진저리를 치며 한숨을 쉬었어.

 

  “……때린 건 미안해. 이놈의 성질 때문에.”

 

  엄마는 일어나더니 글라스와 와인을 꺼내왔어. 그녀는 와인을 한 잔 따라 쭉 들이켰고 다시 한 잔 가득 와인을 따랐어.

 

  “다시 하자. 넌 원하는 게 뭐니?”

 

  “말했잖아. 엄마가 날 좀 더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믿는다 치고, 뭘 원하는데?”

 

  제길. 믿으면 믿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믿는다 치는 건 또 뭐람.

 

  “유학 가기 싫어.”

 

  “뭐?”

 

  “도망가는 건 싫단 말이야.”

 

  “이 자식이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누가 들으면 웃다 뒤로 넘어가겠다. 남들은 못 가서 난리인 유학을……”

 

  “그래도 난 싫다고!”

 

  엄마의 손이 움찔거렸지만 그녀는 내 뒤통수를 갈기는 대신 와인 잔을 움켜쥐고 한 모금을 마셨어.

 

  “엄마도 결국 눈앞에서 날 치워버리고 속 편해지고 싶은 것뿐이잖아.”

 

  “그럼 좀 안 되냐? 널 계속 지켜보다가는 내가 말라죽을 것 같다.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맘 편히 자본 게 언제인지나 알아?”

 

  엄마가 울먹이며 말했어. 나는 고개를 숙였어. 가슴이 너무 아파왔기 때문이야. 제기랄! 나는 왜 게이로 태어나서 엄마와 함께 이 생고생을 하고 지랄인 거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엄마가 식탁 위의 휴지를 뽑아들고 코를 팽, 풀었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요.”

 

  “됐어. 미안은. 네 잘못도 아닌데.”

 

  “엄마 잘못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날 좀 더 믿어줘. 잘할게. 잘하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어차피 내 인생이고, 엄마는 좀 지켜봐주면 안 되냐? 그게 엄마가 하는 일이잖아.”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그래. 나는 여기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날 좀 믿어줘.”

 

  엄마가 잠시 코를 훌쩍였어.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

 

  “고마워요.”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엄마를 안았어. 엄마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팔을 둘러 나를 꼭 안아주었지.

 

  “그래도 검정고시는 꼭 봐.”

 

  엄마가 여전히 훌쩍이면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대학은 꼭 가기야. 알았지?”

 

  엄마는 도무지 분위기를 너무 몰라. 분위기만 좀 맞출 줄 알아도 벌써 내게 새아버지가 생겼을 텐데.

 

  “알았어.”

 

  “약속할 수 있지?”

 

  “알았대두.”

 

  엄마는 티슈로 눈물을 닦아낸 뒤에 배가 고프다고 했어. 그녀는 내가 가출한 뒤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던 거야. 엄마는 특대형 초밥을 주문했고, 텔레비전을 켠 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주말드라마를 틀었어. 우리는 드라마를 보면서 초밥을 배 터지게 먹었어. 엄마는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될 때쯤 소파에서 잠이 들었어. 나는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겨주었어. 엄마는 내게…… 생각보다 무겁더군. 여러모로.

 

 

 

 

  양나 씨는 목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어. 엄마는 그녀의 몰골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어.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다. 마침 성훈이가 거기 가서 다행이었지 뭐니. 너도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살지 말고 같이 살 파트너를 구해. 니들도 그런 거 있을 거 아냐.”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는 거면 너는 왜 아직도 미혼모니?”

 

  “그야…… 그래도 나한텐 성훈이가 있으니까.”

 

  “다 품 안의 자식이야, 운수. 결국엔 너나 나나 외로운 싱글일걸.”

 

  “애도 없는 애가 말은. 하여간에 자식이 있으면 또 다르단 말이야.”

 

  “좋은 방법이 있네. 네가 나랑 연애하면 되잖아. 그럼 성훈이도 내 자식이 되는 거고, 너나 나나 외롭지 않아 좋고. 어때? 생각 있니?”

 

  “넌 좀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면 진지하게 좀 받아라. 왜 만날 시답잖은 농담이니?”

엄마가 화를 벌컥 내며 말했어.

 

  “농담 아닌데.”

 

  양나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의 문제가 뭔지 알 것 같았어. 엄마는 분위기만 못 맞추는 게 아니라 도무지 유머감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거. 양나 씨는 저런 엄마의 어디가 좋았던 거지?

 

  “우리 엄마는 매사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고요.”

 

  엄마가 사온 꽃을 화병에 꽂아넣기 위해 잠깐 밖으로 나간 사이 내가 투덜거렸어.

 

  “소년. 운수가 진지한 사람이기 때문에 널 낳은 거야. 난 그녀가 그래서 좋아.”

 

  비너스. 나는 한 번도 엄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운수는, 진지하게 널 낳아서 진지하게 키웠어.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모두 엄마가 너에게 준 것들이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쁜 것은 전부 엄마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 어쩌면…… 좀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엄마하고 이야기는 잘된 거야?”

 

  “유학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음, 그래. 그리고?”

 

  “날 좀 더 믿어주겠대요.”

 

  “좋아. 너는?”

 

  “뭐가요?”

 

  “너 자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양나 씨는 고개를 끄덕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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