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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82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6-0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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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질척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이연실이 항변을 늘어놓았다. 순금은 잠자코 남의 양산을 제 임의대로 접어버렸다. 아까부터 자꾸만 가로거치던 방해물을 제거하고 나서 순금은 연실의 어깨를 양팔로 욕심껏 얼싸안았다. 잠시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굳어 있던 연실이 느닷없이 자세를 허물어뜨리면서 순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왔다. 순금의 품안에 안긴 채 연실은 어린애처럼 서럽게 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저를 자꾸만 괴롭히시는 것이어요? 왜 자꾸만 제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시는 것이어요?”

 

  순금은 마치 이제 막 곧추앉으려 용을 쓰는 눈자라기 아이 다루는 어미처럼 이연실을 단단히 곁부축했다. 그리고 그 눈자라기로 하여금 가장 기초단계이자 또한 가장 어려운 단계이기도 한, 생후 맨 처음 곧추앉기에 도전하게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쬐끔도 염려헐 것 없어요. 여직 자신도 모르고 있던 비상헌 능력이 시방 연실 양 내부에서 때를 지달리고 있어요. 내 편지 받고 연실 양이 최초로 산서행을 결심허던 바로 그 순간부텀 우리 부용이는 벌써 절반쯤 구원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확신허고 있어요.”

 

  구원이라, 하고 순금은 마음속으로 가만히 읊조렸다. 구원은 대관절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 구원은 대관절 누구로부터 오는 것일까.

 

  두메산골 풍경을 약략스레 비추던 해는 성미도 급하게 어느새 서쪽 나라로 꼴딱 넘어가 있었다. 세상을 온통 벌겋게 물들이던 놀빛도 거침없는 기세로 밀려드는 어둑발 세력한테 이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좀 전의 놀빛 대신 어둑발 한 뭇씩 각자 등짐 지고 이연실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순금의 가슴속에서는 찬양이 그득 넘쳐나고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은 기실 너무도 오묘하고 절기해서 인간의 상식으로는 감히 그 크기와 높이와 너비와 깊이를 측량할 재간이 없음을 새삼스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연실의 강퍅한 마음을 누그러뜨려 궁벽한 산골의 옛 남자 거소까지 구원의 사절로 파송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가이없는 은택에 순금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순금은 발소리를 죽인 채 어두컴컴한 구석방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방문 앞에서 잠시 귀를 기울여 안쪽 기척을 살피고 나서 부용이 시방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이제는 소리 없이 방안에 잠입한 다음 부용의 눈두덩을 불시에 손바닥으로 덮쳐 누르며, 요게 누구게, 하고 소리 칠 차례였다. 잠든 동생을 깨워, 밖에 시방 누가 와 있는지 알아맞혀보라며 방문 쪽을 손가락질한 작정이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 모르는 부용의 자태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문고리를 살그머니 잡아당겼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깜깜한 내부로부터 회오리바람처럼 썰렁한 기운이 덮쳐왔다. 평지로 알고 걷다가 낭떠러지 끝을 만난 푼수로 순금은 대뜸 당혹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도낏날 같은 불길한 예감이 먼저 정수리부터 쪼갠 다음 등골을 타고 직선을 쩍 내리긋는 순간이었다.

 

  없었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눈을 씻고 봐도 부용의 모습은 안 보였다. 부용이 방안에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순금은 몹시 당황했다. 저보다 한층 더 당황해 하는 다른 여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까먹은 채 순금은 허겁지겁 안방으로 달려가면서 어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싸게 나오셔요! 싸게요!”

 

  하지만 안방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내오지 않았다.

 

  섭섭이네! 섭섭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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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81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6-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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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청춘남녀 사이에 승부는 벌써 오래 전에 다 끝났어요. 결국 승자는 연실 양으로 밝혀졌지요.”

 

  승부라고요? 승자라고요? 승부를 겨룬 적도 없는데 승자나 패자가 있을 턱이 있는가요?”

 

  그렇고말고요. 최부용 군이 패자고 이연실 양이 승자랍니다. 패자가 간절헌 목소리로 지금 승자를 부르고 있어요. 과거지사야 어찌 되얐든지 간에 인제는 승자 자격으로 연실 양 쪽에서 불쌍헌 패자한티 아량을 베푸실 때가 되얐답니다. 그 멀고도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모처럼 산서까장 오셨다가 그 비열헌 인간 얼골 한 번도 구경 안 허고 그냥 발길 홱 돌려도 무방헐 정도로 지난날 두 사람 관계가 별무가관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잪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무의무신을 전제헌 잠시간 불장난이나 소꼽질 같은 행동이었을 거라고는 더더군다나 생각허고 잪지 않습니다.”

 

  최부용이란 인간을 만났던 기억을 뇌리에서 백지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서 제가 얼마나 오래오래 몸부림치고 얼마나 처절하게 죽살이쳤는지 누님 되시는 분께서는 짐작이나 하실 수 있으셔요? 흔히들 하는 말로, 뼈를 깎고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이었어요. 이제 그 상처가 대충 아물어서 과거라는 악몽에서 그럭저럭 벗어날 만하니까 별안간에 누님 되시는 분한테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편지가 불쑥 날아든 것이어요.”

 

  이연실이 한 차례 심호흡을 통해 가슴속에 징건히 고여 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방출하고자 하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말씀 드렸는데도 누님 되시는 분께서는 여전히 최부용이란 인간한테 베풀어줄 아량 같은 것이 제 흉중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칭호 문제로 아까부텀 피차 입장이 거북헌 것 같고만요. 마땅헌 칭호가 생각 안 난다면 그냥 짤막허게 순금 씨라 부르셔도 괭기찮어요.”

 

  그러자 얼굴 가린 양산 끝이 위아래로 연방 들썩이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양산을 옆으로 걷어치움과 동시에 이연실을 꽉 보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순금은 소곤소곤 말했다.

 

  같은 여성 입장에서 연실 양 그 심정은 물론 이해허고도 남지요. 그렇지만 연실 양을 요대로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시방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깨요.”

 

  그러자 갑자기 양산이 위로 번쩍 들려 올라갔다. 눈물감탕을 이룬 이연실의 눈에 정으로 쪼은 자리 같은 경악의 빛이 확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부용 씨 상태가 그 정도로 위중한가요?”

 

  위중하다마다요. 현재 폐결핵 삼기를 통과허는 중에 있어요. 죽음을 푯대로 정허고 매일매일 달음박질허는 형국이지요. 육신이 앓는 병도 물론 위중허지만 영혼을 죽이는 병은 그보담 훨씬 더 위중헌 상태지요. 아즉까장은 그럭저럭 육신이 목숨을 부지허고 있는 것 같어도 영혼은 벌써 오래 전에 죽은 거나 매일반이랍니다.”

 

  !”

 

  이연실의 입에서 외마디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주인의 손을 떠난 양산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서 뱅그르르 매암을 돌았다. 마침내 이연실이 땅바닥에 퍽석 퍼벌하고 앉았다. 망연자실해 있는 주인을 대신해서 순금은 허리를 굽혀 굴러가는 양산을 붙잡았다.

 

  인제는 모든 것이 다 연실 양 마음먹기 하나에 달려 있지요. 한 생명 살리고 죽이는 문제가 시방 연실 양 손에 달려 있어요. 연실 양, 내가 이렇게 애원허겄어요. 제발 우리 부용이 조깨 도와줘요! 제발 젊은 생령 하나 살려줘요! 연실 양한티는 얼매든지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나는 ale어요!”

 

  제가 무슨 잘못을 얼마나 범했다고, 제가 무슨 죽을죄를 졌다고 누님 되시는 분께서는 무고한 저를 이다지도 괴롭히시는 건가요? 제가 무슨 능력자나 된다고, 저 같은 것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순금 씨는 저한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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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80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6-0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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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되시는 분께서 눈치를 채셨다는 그 청춘남녀 관계란 것은 대관절 어떤 관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말허자면 요런 관계지요. 최부용과 이연실 두 청춘남녀는 지난날 학창시절에 책이 맺어준 인연으로 만나서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뭔가 피치 못헐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부득이허게 헤어지고 말었다, 헤어지고 나서 오랫동안 서로간에 소식 돈절헌 채로 지냈지만 두 남녀는 여전허니 서로를 사랑허고 있다, 아즉도 서로가 서로를 못 잊기 땜시 양쪽 다 시방 심고나 신고가 우심헌 형편이다…… 대충 이런 관계 아니겄어요?”

 

 전번 것보다 이연실의 한숨소리가 한결 더 커지고 길어졌다.

 

  유감스럽게도 누님 되시는 분께서 틀리셨네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양자 합의하에 헤어졌던 게 아니랍니다. 최부용 씨한테 제가 일방적으로 버림을 받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불문곡직하고 저를 헌신짝같이 버렸어요. 그런데……”

 

  꽉 막혀오는 가슴속에 숨길을 틔우기 위한 안간힘인 듯 이연실이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면서 대짜배기 한숨을 푸지게 쏟아냈다. 요동치는 자기 마음을 향해 숙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치신할 것을 충고하는 육성 발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분은 오히려 버림받은 쪽은 자기라고, 여자가 먼저 자기를 배신하고 배척한 거라고 강변하면서 자기 편리할 대로 진실을 왜곡했어요. 하등의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절교를 선언해 버렸어요. 그것도 자기는 숨어서 끝까지 나타나지도 않고 비겁하게 대리인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통고한 것이지요. 같은 여자 입장이니까 누님 되시는 분께서도 제 심정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세상에 어떤 여자가 제 스사로 남자를 걷어차고서는 바로 그 걷어찼다는 이유로 음독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제 스사로 남자를 걷어찼다는 그 이유로 동맥까지 절단할 수가 있을까요? 그분은 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뒤로 일절 연락을 끊고는 종적을 감춰버렸어요. 최부용이란 사람은 바로 그런 비인간 같은 인간이지요.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그 정도로 지독하고 비열한 비인간을 제가 왜 반다시 만나야 되지요? 그리고 만약에 만난다면 무슨 자격으로 만나고, 또 어떤 형식으로 만나야 되는가요?”

 

  그때 워낭 소리가 딸랑거리며 청랑한 음색으로 다가왔다. 소가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었다. 배지가 터지도록 들에서 실컷 풀을 뜯어먹은 황소가 고삐를 길바닥에 길게 늘어뜨린 채 뚜벅거리는 발걸음에 맞추어 턱밑에 매달린 워낭을 딸랑딸랑 흔들며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처져 꼴지게 짊어진 소년이 콧노래 흥얼거리며 황소 뒤를 한가로이 밟아오는 중이었다. 말못하는 짐승에게조차 얼굴을 숨기고 싶었던지 이연실은 얼른 길가로 외어서면서 양산을 아래로 내려뜨려 몸 전체를 야무지게 가렸다. 피차 어색스러운 자세로 길가에 대치해 있는 두 여자 앞에 다다르자 꼴지게 소년의 걸음걸이가 현저하게 늦추어졌다.

 

  안녕허셨어라우?”

 

  낯익은 마을 소년이 천석꾼 지주 딸에게 머리통 한 번 꾸뻑 쥐어박는 시늉 끝마치기 무섭게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불고염치하고 낯선 양산 그 안쪽 사정을 깐깐히 살피려 들었다. 산서 바닥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화사한 꽃무늬 양산에 옥색 원피스 차림의 주인공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내고 싶어 무척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늦었고나. 어서 그만 가봐라.”

 

  아쉬운 듯 입맛 다시며 소년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순금은 끊겼던 대화의 맥을 얼른 다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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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79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3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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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기 전연 없는 민낯인데도 뽀얀 살결 덕분인지 제법 공들여 가꾼 듯한 인상이었다. 겁먹은 듯 동그랗게 뜬 유순한 눈매에 짙은 음영이 어려 있어 그간 난생 처음 생경한 시골행을 결단하기까지 혼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냈던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금시초면에 생면부지 얼굴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순금은 첫 순간부터 어쩐지 이연실이 자신과 무관한 처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피차 흉허물없는 관계를 줄곧 유지해 나온 사이인 양 왠지 모르게 친숙한 기시감이 앞서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켜 사람들은 천생인연이라고 부르는구나, 하고 순금은 떡 줄 사람한테 물어도 안 보고 멋대로 김칫국부터 양껏 들이켰다.

 

  최부용 씨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연실이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누님 되시는 분 편지 문면만으로는 도무지 사정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굉장히 당혹스러웠어요. 그분은 지금 어떤 모양으로 지내고 계시나요?”

 

  칸막이를 중간에 두고 말을 건네듯 무척 사무적으로 들리는 이연실의 어조에 순금은 비로소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감격과 흥분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이연실의 기분을 터무니없이 앞지르면서 저 혼자 일방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는 사실을 순금은 그제야 밝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연으로 말헐 것 같으면, 참말로 길고도 복잡허답니다. 요 자리서 한꺼번에 털어놓기가 불가능헐 정도지요. 우선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자세헌 얘기는 집에 가서 천천히 나누는 게 좋겄어요.”

 

  순금의 제안에 이연실은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붙잡힌 손을 슬며시 뿌리쳐 남에게 빼앗겼던 팔소매를 되찾으면서 이연실은 연방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분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지금 그 사실 한 가지만 알고 싶어요. 그것만 알아본 연후에 왔던 길을 곧장 되짚어서 전주로 돌아갈 작정으로 집을 나섰던 거랍니다.”

 

  연실 양이 하로바삐 우리 집을 방문헐 수 있게코롬 그 발걸음을 산서 쪽으로 인도허십사, 허고 날이면 날마닥 전능허신 여호와 하나님 전에 간구를 드렸지요. 그랬더니만, 연실 양이 시방 요렇게 내 눈앞에 실지로 나타나셨어요. 나는 시방, 연실 양이 우리 집까장 나허고 동행헐 수 있게코롬 도와주십사, 허고 다시 한 번 여호와 하나님 전에 기도허고 있어요.”

 

  실례되는 말씀 같습니다만, 누님 되시는 분하고는 달리 저는 종교 같은 것을 안 믿고 있어요.”

 

  괭기찮어요. 연실 양이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지금은 상관없어요. 한 가지 분명헌 것은, 결국 이번에도 연실 양은 역시 내 청을 끝까장 외면허지 못허실 거라는 사실이지요.”

 

  기도하는 자세, 기도하는 심정으로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 순금은 진중한 어조로 고집 센 방문객을 공들여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연실의 입에서 들릴락 말락 가느다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분이 자기하고 저 사이를 누님 되시는 분한테 어떤 관계라고 소개하셨는지,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어요.”

 

  순금은 양산 안쪽으로 넌지시 손을 뻗어 이연실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때아닌 가을 추위를 타는 듯 가냘픈 몸피를 둘러싼 원피스의 어깻솔기 부위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편지에다 적었던 그대로지요. 서가에서 똘스또이 부활을 찾어서 책주인한티 돌려주라는 부탁 외에 다른 말은 일절 없었어요. 나를 시켜서 우리 부용이가 연실 양한티 보내고 잪었던 신호는 그것이 전부였지요. 허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 부용이가 입으로 직접 말헌 적은 없어도 나는 그 표면적인 신호 뒤에 숨겨진 다른 신호, 말허자면 진짜 신호를 얼매든지 눈치 챌 수가 있었어요. 부용이 진짜 부탁은 빌린 책을 돌려주라는 게 아니었어요. 자기 진정을 연실 양한티 대신 전달허라는 부탁이었어요. 달랑 그 신호 하나만 갖고도 나는 지난날 두 청춘남녀가 어떤 관계였는지 대충 짐작헐 수가 있었지요. 본시 그 방면에 우리 여자들은 비상헌 육감을 갖고 있고, 그 육감은 대부분 적중허는 법이니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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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78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3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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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저녁놀을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오는 화사한 꽃무늬 양산이 별안간 어떤 설명하기 힘든 예감을 다빡 덮씌우는 바람에 순금의 가슴은 쿵덕쿵덕 널뛰기를 시작했다. 양산의 존재는 늦가을 시골길하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치렛거리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햇덩이를 통째로 눈에 담아도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으리만큼 이미 풀이 팍 죽은 석양볕인지라 굳이 양산의 도움을 빌릴 필요조차 없는 시간대였다. 내리쬐는 햇볕 때문이 아니라 낯선 외지인을 주목하고 경계하는 산골 농투성이들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엄폐할 요량으로 받쳐 든 양산일시 분명했다.

 

  곧잘 걸어오던 양산이 갑자기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마치 시골 불량배가 타관 뜨내기 상대로 텃세 부리듯 앞길 떡 가로막고 있는 웬 사람 때문이었다. 어떤 예감이 몰고 오는 긴장감으로 말미암아 순금은 길 한복판에 우뚝 버티고 선 채 낯선 양산에게 길을 비켜줄 생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어…… 실례지만 말씀 좀……”

 

  길을 막는 상대가 시골 불량배 아닌 젊은 여자임을 언뜻 확인한 양산이 마침내 입을 열어 수줍게 첫말을 보내왔다. 순금은 벌렁벌렁 마구 뛰노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자발머리없이 구는 심장 동계부터 먼저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혹시……”

 

  여기 감나무골이란 동네가……”

 

  연실 양! 맞지요? 이연실 양이 틀림없지요?”

 

  !”

 

  짤막한 부르짖음과 동시에 양산 저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척이 전해져 왔다. 터무니없이 들썩거리고 촐랑대는 감정을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순금은 영락없이 길거리에서 양민 붙잡고 불심검문하는 관헌과도 같은 자세로 양산을 향해 바투 다가들었다.

 

  맞어요! 맞었어요! 이연실 양이 틀림없어요!”

 

  마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완력에 의해 심하게 꺼들림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방패 역할을 수행하던 양산이 휙 젖혀지면서 위로 들려 올라갔다. 동시에 양산을 가리개 삼아 내내 그 뒷전에 꼭꼭 숨어 있던 젊은 여인의 얼굴이 눈앞에 활짝 드러났다.

 

  , 최순금 씨……”

 

  달랑 이연실이란 성명삼자만 놓고 순금이 혼자서 제멋대로 추측했던 생김새와 별반 차하지지 않는, 상상 속에서 자주 그렸던 초상화하고 어금지금한 미태였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정들로 하여금 한 번쯤 뒤를 돌아보게끔 만들 법한 이목구비였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마음이 들썩이기는 이연실 또한 매한가지인 듯했다. 최순금이란 성명삼자 정도만 겨우 알았을 뿐 용모파기에 관해서는 전혀 백지 상태이던 편지 발신인과 노상에서 공교롭게 딱 맞닥뜨린 그 초대면 상황에 이연실은 어지간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기만 하는 얼뜬 거동이나 표정이 마냥 요조해 보이던 첫인상에 상당한 흠집을 내고 있었다.

 

  결국에는 요로콤 와주셨고만요! 요런 날이 반다시 오리라고 믿고 나는 벌써부텀 그때를 학수고대허고 있었지요!”

 

  일단 제 수중에 들어온 새가 다시는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끔 발목에 끈을 달아매는 절차와 수고가 필요했다. 웬만해서는 놓아주지 않을 요량으로 순금은 이연실의 옥색 원피스가 흉하게 구기질러지도록 팔소매 부위를 덥석 훔켜잡은 채 흔들어댔다.

 

  언젠가 때가 되면 연실 양이 반다시 산서로 찾어오실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요. 그러고 지금이 바로 그때지요. 연실 양이 내 간곡헌 소청을 절대로 거절허지 않으실 거라고 믿고 있었지요. 그러고 먼빛으로 요 양산을 보자마자 연실 양이란 걸 나는 한눈에 척 알어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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