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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48회 | 비너스에게 2010-10-1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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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양나 씨. 구급차를 부르겠어요. 그리고 그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몸을 가리도록 해주세요.”

 

  “……글쎄, 그래야겠지.”

 

  양나 씨가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답했어.

 

  “양나 씨! 우린 둘 다 게이니까 여자 몸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구요!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어.

 

  “어흑, 그러니? 나도 레즈비언인데 남자가 내 알몸을 보는 건 싫다구.”

 

  “어쨌든 그쪽으로 갈게요.”

 

  현신의 말에 양나 씨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그러라고 했어.

 

  양나 씨는 계단 아래에 있었어. 그녀는 해부당할 위기에 처한 개구리 같은 포즈로 벌렁 드러누워 있었는데,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어. 씨아가 그녀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어. 현신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나 역시 그녀의 소중한 곳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 현신은 내게 이층의 욕실에서 목욕 타월을 한 장 가져오라고 했어. 현신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어. 거기는 양나 씨가 자신의 주거공간으로 꾸며놓은 곳. 처음 들어가 보았지만 실내 인테리어나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나는 욕실에서 흰색 목욕타월을 꺼내 들고 전속력으로 계단을 내려갔어. 현신은 양나 씨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에게 괜찮을 거라고 계속 말해주고 있었어.

 

  “양나 씨, 이제 몸을 조금 움직여서 수건을 둘러줄게요.”

 

  “음, 그래.”

 

  내가 그녀의 몸 위에 수건을 덮자 현신이 조심스레 그녀의 등에 손을 끼워넣고 살짝 들어 올렸어. 그러자 양나 씨가 신음을 했어. 우리는 부자연스럽게 마주 보는 자세로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어.

 

  “가, 가슴이 멋지네요.”

 

  “그렇지? 자연산이야.”

 

  양나 씨가 신음하듯 이를 악물고 말했어. 현신이 수건을 잡아빼면서 몸이 약간 움직였기 때문. 마침내 수건으로 그녀의 몸 전체를 감싼 뒤 현신은 수건 끝을 그녀의 쇄골 근처에서 야무지게 옭맸어.

 

  “이제 됐어요. 걱정할 것 없어. 다 됐어요.”

 

  현신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어.

 

  “어쩌다가 굴러떨어졌어요?”

 

  “음…… 애인과 다투다가 실수로.”

 

  현신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떠올랐어.

 

  “그녀가 당신을 이대로 둔 채 가버렸단 말인가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으니 내가 다친 건 몰랐겠지.”

 

  “그래도 떨어지는 소리는 들었을 거 아닙니까?”

 

  “그러게. 내 애인도 그냥 또라이였나봐.”

 

  양나 씨가 끙,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어.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급요원들이 양나 씨를 차 안으로 옮겨주었어. 내가 함께 구급차를 타려고 하자 현신은 병원에는 자신이 쫓아갈 테니 집으로 가보라고 했어.

 

  “먼저 엄마와 이야기를 잘 매듭지은 뒤 병원으로 오는 게 좋겠어. 그럴 수 있지?”

 

  나는 현신의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어. 그는 내가 성숙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어.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침착한 모습으로 날 맞아주었어. 나는 그녀가 성격대로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기가 죽고 말았어.

 

  “양나와 전화로 얘기를 했어.”

 

  엄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어.

 

  “양나는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내 아들이라고 지적하더군. 그런데 내가 그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거야. 그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어. 이 세상에서 너를 나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데 말이야. 그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어. 성훈아, 내가 지금껏 했던 모든 것들이 너를 위한 게 아니란 거니?”

 

  나는 그녀의 말에 슬퍼졌어.

 

  “그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엄마 때문에 자꾸 상처를 받게 돼.”

 

  “어째서?”

 

  나는 그녀의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했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이유를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엄마는 한동안 나를 지켜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어.

 

  “엄마도 널 돕고 싶어. 알잖아.”

 

  “알아요.”

 

  “원하는 게 뭐니?”

 

  그 질문은 엄마만이 내게 물을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녀만이 내게 답해줄 수 있는 것이기도 했어.

 

  “날 좀 더 믿어줘요.”

 

  “믿게 해야 말이지.”

 

  하아…… 이야기는 다시 원점.

 

  “잘못이나 실수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요.”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잘하는 게 중요하지.”

 

  “모든 게 뜻대로 잘되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거, 엄마도 알잖아!”

 

  결국 나는 조금씩 언성이 높아져만 가고.

 

  “넌 기본적으로 미안한 게 뭔지 전혀 몰라.”

 

  엄마도 역시 목소리가 사나워지고 있었어. 이런 제기랄.

 

  “엄마가 원하는 건 대체 뭐야?”

 

  결국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어.

 

  “내가 없어져 버리는 거? 내가 이런 녀석이라 미치기 일보 직전이잖아!”

 

  “싸가지 없는 새끼!”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어.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어. 나는 엄마에게 화내는 게 아니라 그녀를 설득시키고 싶었어. 여기에서 같이 화를 내버리면 나는 정말 영원히 어린애로 남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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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47회 | 비너스에게 2010-10-1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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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너스. 나는 현신과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어. 내가 여기에서 그와 함께 있다는 걸 양나 씨나 엄마(물론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가 빤히 다 아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게다 현신이 우리 사이에 그어놓은 선이 너무 명백해서, 나는 그와 트윈베드룸에서 잔다 한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을 거야. 현신이 먼저 샤워를 했고, 내가 그다음으로 욕실에 들어갔어. 따듯한 김이 오르는 욕실에는 현신의 체취가 남아 있어서 나는 조금 서글퍼지고 말았어. 사랑이 허락되는 시간은 대체 언제? 양나 씨는 그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안 되는 게 있다고 했어. 그건 시간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까. 현신은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을 때도 이런 식으로 내 곁에 있어줄까? 그때쯤이면 현신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 아프리카의 바오밥나무 밑에 나란히 누워 있을지도 몰라.

  현신은 피곤했는지 침대의 헤드보드에 기댄 채 얕은 잠이 들어 있었어. 나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면서 내 침대에 걸터앉아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어. 사랑을 해본 이들이라면 그때의 내 심정을 알 수 있을 테지. 안타깝고, 행복하고, 아프고, 설레는 그런 순간. 현신이 잠에서 깨어나며 눈을 떴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어. 그는 내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했으며 그런 나를 외면하지 못했어. 그가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나는 그에게로 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그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어.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다가 입술에 키스해주었어.

  나는 정말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았어, 비너스. 양나 씨의 말대로, 그냥 그런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야.

  다음 날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다시 한 번 바다도 바라보고(그쯤 되자 겨울바다도 한 번쯤 와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택시를 불러 타고 부산역으로 갔어. 현신은 KTX 표까지 미리 예매해놓았거든. 그는 내가 그를 따라 순순히 올라갈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거야.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내 근성 없는 가출에 대해 면목이 없어지는 거지. 기차에서 나는 음식 판매차가 올 때마다 현신에게 응석을 부리며 잔뜩 얻어먹었고, 현신은 내가 잘 먹는 모습이 좋다면서 기꺼이 주머니를 털렸어. 그도 맥주와 땅콩 같은 것을 먹으며 내가 늘어놓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거나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도 털어놓아서, 나는 그에 대해, 그는 나에 대해,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던 일들을 엄청나게 많이 알게 되었어. 만일 현신과 나도 이런 시간이 오래 반복되고 함께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면, 차라리 안 보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게 될까?

  현신은 먼저 ‘애미’에 들러 양나 씨와 만나는 게 좋겠다고 했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울에 도착하자 시외버스를 타고 ‘애미’로 향했어. 엄마와 만나기 전에, 양나 씨에게 현명한 조언을 듣고 싶었어. 물론 그녀에게 사과도 해야 했고. 나는 정말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지만, 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또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누군가가 날 실망시킨다고 해도 그를 포기하지 말아야겠지. 그 누군가에게는 내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니.

  하나와 앨리스는 날이 추워지면서 우리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많아. 뜯어 먹을 풀도 없기 때문에 양나 씨가 일일이 사료를 챙겨줘야 해. 그녀는 인근 농가에서 발효시킨 옥수숫대를 잔뜩 사 쟁여놓아서 ‘애미’에 들어서면 그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차가운 겨울바람과 섞여 있어. 나는 앞으로 겨울이 되면 어디에서건 이 냄새를 떠올리겠지. 시간은 거의 저녁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어.

  ‘애미’의 현관문은 잠겨 있을 때가 없어. 하지만 일요일은 양나 씨도 상담 스케줄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인지라 어쩔까 싶었어.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현신과 나는 자연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어. 그때 어둑한 실내에서 양나 씨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어.

 

  “누구?”

 

  “현신이에요. 성훈이를 데려왔어요.”

 

  현신이 대답을 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어. 힘없이 처진 목소리가 전혀 그녀답지 않았기 때문.

 

  “아! 그렇지.”

 

  “어디 있어요? 우리가 그쪽으로……”

 

  현신이 막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양나 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잠깐! 현신, 잠깐만.”

 

  “무슨 일이죠?”

 

  현신의 목소리에 걱정과 불안이 묻어나왔어.

 

  “성훈이도 거기 있니?”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양나 씨가 물었어.

 

  “네, 양나 씨. 저 여기 있어요.”

 

  나 역시 불안함을 느끼며 얼른 대답했어. 잠시 사이를 두고 양나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음…… 저기, 나한테 도움이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가 좀 발생했는데 말이야.”

 

  “우리가 뭘 도와야 하는 거죠?”

 

  현신이 다급하게 물었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는데, 아무래도 목을 삐끗하고, 오른쪽 다리가 골절이 된 것 같아. 그래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

 

  “저런!”

 

  “어!”

 

  현신과 내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어.

 

  “우선 우리가 그쪽으로 간 뒤 구급차를 부를게요.”

 

  “현신! 안 돼!”

 

  “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서로를 마주 보았어.

 

  “음…… 그러니까 나는 지금…… 완전 벌거숭이거든. 팬티 한 조각 걸치고 있지를 않아. 그래서……”

 

  “아!”

 

  “아!”

 

  다시 동시에 감탄사.

 

  현신이 곤란한 표정으로 날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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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46회 | 비너스에게 2010-10-1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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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바다. 이에 대한 내 감상은 한마디로 “춥다”야. 드넓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자니 후련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더 추워지기만 했다고. 겨울바다에 한 번쯤은 꼭 가 봐야 한다고 침을 튀기던 멍충이들은 대체 누군 거냐? 펭귄 떼들?

  현신이 만나자고 한 조선호텔은 해운대 끝 쪽에 성처럼 불쑥 솟아 있었어. 거기까지 걸어가는데 세찬 바닷바람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 되었어. 나는 현신이 나보나 늦게 도착하기를 바랐어. 화장실에 들어가 스타일을 정리할 시간 정도는 있었으면 했지. 옷도 좀 갈아입고. 하아…… 하지만 역시 현신은 어른. 무슨 수를 쓴 건지 벌써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어. 반갑고, 고맙고, 쑥스럽고, 그러면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나는 엄마와의 말다툼을 견디지 못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애송이고, 그는 그런 애송이를 걱정해 바로 부산으로 달려와 준 멋진 어른이니까. 가출만큼 내가 아직 애라는 걸 분명하게 알려주는 짓이 없다는 걸 깨달은, 만 17세가 되려면 나흘이 남은 겨울. 그래서 나는 현신이 입을 열기도 전부터 집을 뛰쳐나온 걸 후회하고 있었어.

 

  “뭐 마실래?”

 

  “우유”라고 대답한 건 너무 배가 고파 속이 쓰려서이기도 했지만 완전한 자포자기. 미안해요, 내가 어려서. 현신이 슬쩍 미소를 지었고(역시 애군, 이라는 표정. 하아……) 우유를 주문해주었어.(따듯한 걸로 부탁해요) 현신은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고, 우리는 주문한 음료가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겨울바다를 바라보았어. 따듯한 실내에서 보는 겨울바다는, 뭐, 그럭저럭 운치가 있었어. 게다 현신과 함께라니.

 

  “양나 씨에게 대충 사정은 들었어. 성훈아. 그간 애미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어. 물론, 이번처럼 큰 사건은 드문 경우지만. 그래도 양나 씨는 이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고마운 위로.

 

  “……내 잘못이에요.”

 

  “누구나 잘못을 저질러.”

 

  “그래도요.”

 

  “잘못 없는 인생이라니, 그건 그거대로 끔찍하지 않니?”

 

  현신은 자신이 한때 엉망진창으로 살았다고 했어. 그래서 안 좋은 일도 많이 겪었다고. 그는 자신의 지나간 한때를 그런 식으로 납득하고 있는 걸까?

 

  “마는…… 나는 그애의 상처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요. 그러면 안됐는데.”

 

 “그래. 하지만 우리 모두 이런 식으로 배워가는 거야.”

 

  우리는 입을 다물고 한동안 겨울바다를 바라보았어. 현신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너무 편하고 가벼워서 바로 어제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왜 엄마와는 이런 대화가 불가능한 걸까. 나는 그녀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데.

  현신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부모에 대해 털어놓았어.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시골 중학교 교장 선생님. 그는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고, 미국의 형에게로 가서 살고 있는 어머니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했어. 물론 형네 가족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 그저 자신이 지나치게 내성적이라 여자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만 여긴다고.

 

  “나는 우리 가족에게 자신의 한계를 넓혀보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아. 너무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거리감을 내가 견딜 수만 있다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살아가는 것도 괜찮아. 외롭고 쓸쓸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나는 그게…… 어려워요.”

 

  “당연해. 모든 관계는 다 어려우니까.”

 

  비너스. 결국 타인에게 이해받는 건 포기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비록 이해하거나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함께 있어 행복한 시간은 분명히 존재하잖아. 현신도 그의 가족과 함께 있으면 분명 따듯하고 행복한 때가 있을 거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그게 그렇게 가치가 없는 일일까?

  현신은 뭐든 먹고 싶은 것을 사주겠다고 했어. 나는 바닷가 근처에 주욱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에 가 보고 싶다고 했어.

 

  “소주 사줘요. 따듯한 우동이랑, 아, 그리고 닭꼬치도.”

 

  “포장마차 메뉴를 꿰뚫고 있네?”

 

  영무 아버지가 나와 영무를 가끔씩 데려가주었기 때문. 포장마차에 따라가면 소주를 몇 잔 얻어 마시고 술안주도 잔뜩 시켜먹어. 영무 아버지는 남자애들이란 그런 것도 해봐야 된다고 생각하거든. 아버지가 없어서인가, 나는 그런 기억들을 즐겁게 간직하고 있어.

 

  “좋아. 대신 소주는 딱 두 잔만이야.”

 

  “치사하네요.”

 

  “그래. 어른은 원래 치사한 거야.”

 

  우리는 호텔을 나와 짧은 겨울 해를 만끽하며 바닷가를 거닐었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 몇 쌍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현신과 나는 잠깐씩 서서 썰렁한 겨울바다도 바라보고 발끝에 살짝 바닷물도 담가보고 했어. 비너스. 그러니까 이건 내 첫 데이트. 만일 현신도 나처럼 행복했다면 말이야.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는 우동과 닭꼬치와 계란말이 같은 것을 허겁지겁 먹어치웠고, 현신은 우동을 조금 먹고 소주를 몇 잔 마시며 금세 얼굴이 발그레해졌어. 그는 술기운이 오르자 더욱 자주 웃어서 날 기쁘게 했어.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이 정말 좋으니까.

  우리가 포장마차에서 나왔을 때 해가 져 어둑했고 겨울바다는 이제 밤바다로 바뀌어 검은 물결을 일렁이고 있었어. 현신은 시계를 보더니 이제 그만 자러 갈까, 라고 했어. 그는 호텔에 트윈베드룸을 미리 잡아놓았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양나 씨에게 알리면서 하룻밤 묵은 뒤 데려가겠다고 했던 거야. 양나 씨는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물론 현신이 남자이며 게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 그저 ‘애미’의 자원봉사자가 내려가 있다고 했을 뿐. 맞는 말이기는 했어), 결국 내 첫 번째 가출은 양나 씨와 현신, 그리고 엄마에게 억지로 떼를 쓴 철부지 짓으로 결론 나고 말았어. 아마도 나는 다신 가출하지 않겠지. 현신의 말마따나 나는 이런 식으로 배워가고 있는 중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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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45회 | 비너스에게 2010-10-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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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주고받기

 

 

 

 

  비너스에게.

  너는 정말 어떻게 된 거니.

  이건 엄마가 나를 집으로 데려오며 던진 말.

 

  “애미엔 더 이상 가지 마. 거긴 비정상인 애들만 모인 곳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어.

 

  “나도 이미 충분히 비정상이야. 나만큼 거기 어울리는 애가 또 있을라고?”

 

  “그만!”

 

  엄마가 소리를 질렀어.

 

  “제발, 이제 그만!”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엄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출근준비를 했어. 오늘은 토요일이었지만 엄마는 일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늘 병원 문을 열어두었어. 예전엔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 병원 일을 제외한 다른 현실들이 그녀에게는 피하고 싶을 만큼 벅찼던 거였어. 일을 제외한 엄마의 현실은 바로 나. 즉 나는 그녀에게 피하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운 존재인 셈. 나를 감자부대처럼 내던져놓고 엄마는 일을 하러 묵묵히 집을 나섰어. 왜 엄마는 내게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걸까?

  그런 사건을 겪은 뒤 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에 나 역시 무척 피곤하고 지쳐 있었어. 하지만 내 방구석에 기어들어가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잠만 퍼 자고 싶지는 않았어. 내 신경은 이제 닳을 대로 닳아 있어서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똑, 하고 끊어질 것 같았어.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대충 가방을 챙겨 집을 나왔어. 그러고는 자연스레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어. ‘애미’에 간다면 엄마가 득달같이 달려올 테고, 나는 양나 씨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어. 한마디쯤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건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나는 시간이 맞는 아무 버스나 대충 집어타기로 결심했어. 나는 전원을 끄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어. 잡과, 필, 누룽지에게서 수십 통의 전화와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고 현신과 양나 씨에게서도 각각 한 번의 전화와 메시지가 있었어. 비너스. 날 마음 약한 놈이라 여기지는 말아줘. 나는 전화기에 찍힌 숱한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고. 그 내용이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 자체에 위로를 받았단 말이야.

 

  “괜찮은 거니? 괜찮은 거야? 걱정이 돼서 죽을 것 같아. 이거 보는 대로 꼭 좀 연락해 줘.”

 

  이건 필의 문자.

 

  “애초에 너무 무리한 일이었어. 진즉 알았어야 했는데. 우리 모두 다 어떻게 돼버렸던 게 틀림없어. 그건 그렇고 너 괜찮은 거야? 우린 양나 씨가 도착하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갔어. 아슬아슬 위험했지. 집에서 눈치챌까봐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어.”

 

  이건 잡의 문자.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마를 돕자고만 안 했어도. 정말 미안해. 정말정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이건 누룽지의 문자.

 

  그러고는 같은 문자의 반복. 얘들은 어쩜 문자도 딱 지들처럼 보내냐. 나는 양나 씨의 문자를 열어보았어.

 

  “소년. 만일 엄마와 잘 풀리지 않으면 내게로 와. 다른 데 가지 말고, 내게로. 난 아직 네 변명을 듣지 못했어.”

 

  과연 양나 씨. 그런 그녀가 나 때문에 들어야 했던 터무니없는 비난을 생각하자 가슴이 다시 싸늘해졌어. 나는 마지막으로 현신의 문자를 열어보았어.

 

  “성훈. 연락해줘.”

 

  나는 몇 번이나 그 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어. 시간이 맞는 버스는 부산행 버스. 나는 표를 끊으려다 말고 다시 한 번 현신의 문자를 읽어 보았고 그 짧은 문장에서 풍기는 여러 가지 뉘앙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어. 아니, 현신이 뭐라 했든 나는 마음이 흔들렸겠지.

 

  “성훈이니?”

 

  전화를 받자마자 현신은 그렇게 물었어.

 

  “네.”

 

  “지금 어디?”

 

  “버스터미널이요.” “애미로 오는 중?”

 

  “..…아뇨.”

 

  “어딜 갈 건데?”

 

  “저도 잘…… 부산이요.”

 

  “부산?”

 

  “네.”

 

  “이리로 오면 안 되겠니?”

 

  물론 나도 그에게 가고 싶었어. 하지만 그가 하라는 대로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 괜한 고집.

 

  “싫어요.”

 

  현신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어.

 

  “몇 시 버스야?”

 

  “십 분 후에 출발해요.”

 

  “알았어. 해운대 조선호텔 로비에서 보자. 거기 카페에서 기다려.”

 

  “에?”

 

  현신이 전화를 끊었어. 핸드폰을 닫으며 처음으로 든 생각. 제기랄. 샤워라도 하고 나올걸.

  부산으로 내려가는 버스에서 나는 계속 잠을 잤어. 누룽지가 어설프게 만들어온 흰색 복면과 롤러블레이드, 이마에 피로 새겨진 ‘고 ㄱ’이 옅은 잠 속을 계속 둥둥 떠다녔어. 그냥 마가 끝까지 새기게 둘걸. ‘고 ㄱ’ 보다는 그래도 ‘고기’가 낫지 않나? 그 녀석은 이마에 새겨진 ‘고 ㄱ’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려나. 그나저나 나를 만나러 현신이 부산까지 오다니. 산다는 게 힘든 일만 있는 건 아니구나. 그도 나를 조금쯤은 좋아해주는 건가? 생각이 여기에서 맴돌 때쯤 나는 정말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붕붕거리는 엔진소리조차 까마득히 멀어져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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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44회 | 비너스에게 2010-10-1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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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예상했어야 했는지 몰라. 아무 상관없는 도라가 그렇게까지 날뛰는데, 하물며…… 마는 녀석의 머리를 보기 흉하게 밀어놓은 뒤 이마에 글자를 새기고 있는 중이었어. 매직이 아니라 등산용 칼로. 주모자 녀석의 몸이 공포와 고통으로 물결치듯 경련하고 있었어. 나는 소리를 지르며 마를 밀쳐냈고 그 바람에 마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어. 주모자 녀석의 이마엔 새기다 만 글자 ‘고 ㄱ’를 따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

 

  “뭐야!”

 

  마가 복면을 벗으며 내게 소리 질렀어.

 

  “방해하지 마! 이건 복수라고!”

 

  “제기랄! 이건 그냥 미친 짓이야!”

 

  나 역시 답답한 복면을 벗어던지며 맞서 소리를 지르자 마가 내게 달려들었어. 도라가 마를 붙잡으며 그만 두라고 소리쳤어. 그때 핸드폰이 울렸어.

 

  “동조자2가 방금 진입로를 통과했음.”

 

  “작전은 중지야. 이제 그만. 모두 다 끝났어. 네가 다 망쳤어, 마!”

 

  “웃기지 마!”

 

  마가 도라에게 붙잡힌 채 버둥거렸어.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어! 할 일이 남았다고!”

 

  마가 도라의 팔을 뿌리치고 앨리스처럼 내게 돌진했어. 제기랄, 결국 뿔에 받히는 게 나라니! 나는 명치에 그녀석의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뒤로 벌렁 넘어져버렸어. 발에 신고 있는 롤러블레이드 때문에 균형을 잡을 수 없었던 거야. 도라가 괜찮냐고 소리 지르며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어. 도라. 네 롤러블레이드 실력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재주 좀 그만 부려.

 

  “도라! 녀석을 붙잡아!”

 

  내 말에 도라가 허둥지둥 마를 붙들었어.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키고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있는 마를 멍하니 쳐다보았어. 도라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뒤로 물러났어. 손을 칼에 베인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나 마에게 덤벼들었어. 마는 나보다 체격이 작고 힘도 약했지만 필사적이어서 좀체 마음처럼 제압할 수가 없었어. 게다 둘 다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있어 계속 미끄러지는 바람에 꼭 함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았다고. 결국 나는 그 녀석의 배를 무릎치기로 가격한 뒤에야 손에 든 칼을 빼앗을 수 있었어.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강한 남자가 멋진 거야”라고 부르짖으며 온갖 격투기 도장에 보내준 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으아아아!”

 

  무시무시한 비명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뒤흔들었어. 동조자2 녀석이 칼을 들고 씨근덕거리는 나와, 복면을 뒤집어쓴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도라와, 사지를 결박당한 채 누워서 펄떡거리는 주모자 녀석과, 배를 움켜잡고 뒹굴고 있는 마를 보면서 내지르는 소리였어. 우리가 뭘 어쩔 새도 없이 그 녀석은 몸을 돌려 언덕 아래로 뛰기 시작했어. 그러고는 우리가 뭘 어쩌지도 않았는데 혼자 엎어지는 거야.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녀석은 엎어진 채로 꼼짝도 하지를 않았어. 내가 달려가 보니 녀석은 기절 중. 콧대라도 부러진 건지 코피가 터져 나온 데다 이마에서 주먹만 한 혹이 불거져나오고 있었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어. 상황은 이제 내가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 있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어. 나는 양나 씨에게 전화를 걸기 전 우선 필과 잡, 누룽지를 피신시켰어. 그애들만이라도 이 난장판에서 빼내야겠다는 생각.

  내가 말했잖아. ‘거짓말’이라는 놈은 지독히도 능력이 없다고. 덕분에 나는 또다시 잔인한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었어.

 

 

  양나 씨는 부상자 모두를 병원으로 옮겼으며 각자의 부모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어. 그리고 혼란 중에도 어쩌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건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잠을 자다 말고 불려나온 그녀의 변호사와 담당의사들의 소견을 듣고, 부모들에게 일일이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형사 사건으로까지는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모든 힘을 쏟아 부었어. 엄마는 파리한 얼굴로 병원 복도의 의자에 앉아 냉정하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는 양나 씨를 쳐다보았지. 그녀는 한 번도 내 쪽을 보지 않았어. 나도 감히 엄마를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모든 게 마무리된 건 새벽 여섯 시 무렵. 양나 씨의 변호사가 뒷마무리를 하기로 하고 우리는 우선 병원을 빠져나왔어. 도라와 마의 부모들은 서로 못 볼 사람들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허둥지둥 인사만 나누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갔어. 양나 씨는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우리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기운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어.

 

  “운수. 우리는 아직 성훈이의 이야기를 전부 듣지 못했어. 섣불리 판단하지 말길 바라.”

 

  엄마의 얼굴이 더욱 새파래졌어.

 

  “됐어. 널 믿은 내 잘못이야.”

 

  “그건 무슨 뜻이지?”

 

  양나 씨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어.

 

  “너처럼 문제가 있는 애한테 우리 애를 맡긴 게 애초에 잘못이라고.”

 

  “엄마!”

 

  “넌 입 닥치고 차에 들어가 있어!”

 

  엄마가 나를 노려보며 윽박질렀어. 양나 씨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

 

  “양나 씨! 저, 저는……”

 

  “소년. 엄마 말이 맞아. 넌 차에 들어가 있는 게 좋겠다.”

 

  양나 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분노가 서려 있었어.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어. 나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았어. 엄마와 양나 씨의 고함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려올 때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어.

  비너스.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고 저지르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게다, 좀 더 나은 길이라 생각하고 선택했는데 예전과 똑같은 길인 걸 알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 원동기 면허증도 딸 자격이 없는 애송이가 할 일이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었어. 절망에 절망을 거듭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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