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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77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2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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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렇게 느닷없이 찾어뵌 것은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고 영감님께 사죄허고 잪어서랍니다.”

 

  , 아니, 사죄라니요? 이 늙은것한티 젊은 아씨께서 무신 그런 천부당만부당허신 말씸을……”

 

  움푹 꺼진 김 영감 눈자위에 다시 한 번 놀라움과 당혹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즈이 아버님 대신 제가 영감님이랑 며느님한티 사죄를 드리겄어요. 그동안 즈이 집안 사람들이 영감님 댁에다 저질렀던 잘못들을 너그럽게 용서허시기 바랍니다.”

 

  ! 때리는 시엄씨보담도 말리는 시늉 허는 시누년이 휘낀 더 괘씸허다드니만! !”

 

  에미야, 버리장머리없이 너 시방 누구한티 자꼬만 찍자부리고 야단이냐!”

 

  참다 참다 못한 김 영감이 그예 고개를 홱 틀어 며느리를 짯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쌍가매네는 아들 멀리 떠나보냄으로써 이미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전락해 버린 시아버지 어려워할 줄 도통 모르는 며느리처럼 콧방귀 탱탱 뀌어대면서 옆으로 팽그르르 돌아앉아버렸다.

 

  , 저런 쳐쥑일 년이 시방 비렁뱅이맨치로 얻다가 그 흙감태기 손모갱이 갖다 대고 지랄이여, 지랄!”

 

  느닷없이 쌍가매네 입에서 걸쭉한 욕지거리가 뻗쳐 나왔다.

 

  쌍가매 너 이년, 그것 얼렁 도로 못 집어옇겄냐!”

 

  어른들끼리 이야기에 정신 팔린 기회를 틈타 쌍가매가 임자 없는 물건처럼 쪽마루 한구석에 방치돼 있던 쌀자루 속에서 이제 막 생쌀 한 주먹 욕심껏 움켜쥐려는 참이었다. 제 어미 감사나운 고함소리에 귀싸대기 얻어맞으면서도 쌍가매는 일단 거머쥔 것을 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 몫의 먹을거리 챙기기 무섭게 쌍가매는 등에 업힌 젖먹이 동생을 마구 다뤄도 무방한 물건인 양 위아래로 덜렁덜렁 흔들어대면서 다람쥐처럼 잽싸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쫓는 어미보다 훨씬 더 발걸음 재게 놀려 쌍가매는 순식간에 삽짝 밖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다.

 

  당장 요 자리서 제가 장담허고 약조헐 수 있어요. 영감님께서는 틀림없이 내년 봄부텀 다시 농사를 지으실 수 있게 된다고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겄어요. 그럼 일간에 또 찾어뵙겄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단숨에 끝마친 다음 순금은 김 영감에게 대꾸할 겨를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뒤쪽에서 뭐라고 다급히 외치는 쌍가매네 목소리가 들렸지만, 순금은 그냥 못 들은 척하고 김 영감네 삼간두옥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바야흐로 절정을 맞이한 놀빛이 유례없이 곱게만 느껴졌다. 순금은 발걸음도 가뿐하게 꼬불꼬불한 고샅길을 거쳐 큰길로 들어섰다. 봉숭아 꽃물처럼 놀빛이 빨갛게 묻어 있는 흰 저고리 앞섶에서 순금은 그 놀빛을 닮은 소망 한 낱을 마치 검부러기 떼어내듯 엄지와 식지 두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집어 올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홀맺힌 매듭부터 먼저 풀어 화해의 첩경을 걷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하나님과 저 사이의 매듭도 덩달아 풀렸으면 좋겠다는, 죄인임을 자복하는 최순금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바로 그 소망이었다.

 

  순금은 잠시 노을에 덮인 하늘에 두었던 눈길을 무심코 땅으로 끌어내리려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면소재지 방면이었다. 한길 따라 울긋불긋 꽃무늬도 화사한 양산 하나가 한들한들 걸어오는 중이었다. 사람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으리만큼 양산으로 철두철미 앞을 가린 까닭에 양산이 걸어온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상곡리 인근 마을들을 통틀어 양산을 소유한 신여성은 달랑 최순금 한 명뿐이었다. 두메산골에서 그만큼 귀물 대접을 받는 양산이기 때문에 그걸 받친 여인의 출현은 산서 바닥에서 자연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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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76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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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가매네는 가슴팍에 젖먹이가 안 딸린 홀가분한 몸뚱이를 쪽마루에서 발딱 일으킨 다음 침방울 툭툭 튀겨가며 마구 시악을 써댔다. 천석꾼 영감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힌 쌍가매네를 차마 바로 대할 수 없어 순금은 그 딸인 쌍가매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울어 보채는 제 동생 달랠 생각은 않고 쌍가매는 오로지 탐욕에 찬 시선을 손님의 한쪽 손에다 꽂고 있었다. 쌀자루가 들린 손이었다. 순금은 꽤 묵직한 쌀자루를 쪽마루 한구석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자루 속에 담긴 물건이 곡식인지 혹은 모래알인지 알아볼 마음 따위는 숫제 없다는 듯 쌍가매네는 처음부터 순금의 손에 들린 자루에 대해 일절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었다.

 

  누가 찾어오셨다냐, 에미야?”

 

  눈만 한번 질끈 흘겨도 금세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집 아랫방에서 갑자기 쿨룩거리는 기침소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무신 일이간디 요로코롬 왼 집안이 소란시럽다냐?”

 

  방문이 삐거덕 열리고 나서도 한참 더 뜸을 들인 다음에야 김 영감 얼굴이 굴속 같은 방안 그늘 안에서 상당한 시차를 두고 느릿느릿 나타났다. 너무 일찍 든 초저녁잠에서 아직도 덜 깨어난 듯, 아니면 혼절 상태에서 이제 막 정신을 수습하는 중인 듯 어릿어릿한 눈빛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김 영감이 별안간 기급을 했다.

 

  , 아니, 젊은 아씨께서 으짠 일로 즈이 집구석을 다……”

 

  ! 아씨는 무신 얼어죽을 아씨!”

 

  시아버지 말을 받아 쌍가매네가 제꺽 일기죽거렸다.

 

  괜찮어요. 나오시지 마셔요. 그냥 누워 계셔요.”

 

  병색이 완연한 노구 이끌고 쪽마루로 나앉으려 안간힘 쓰는 김 영감을 순금은 급히 손사래 쳐 만류했다. 굶주림에 노환마저 겹친 듯했다. 기력이 형편없이 까라져 보이는 김 영감이 퀭한 눈자위 희번덕거리며 놀라움과 당혹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젊은 아씨께서 혹시 그놈에 뜬소문 땜시……”

 

  김 영감이 쭈뼛쭈뼛 순금의 눈치를 살폈다. 순금은 무턱대고 도리머리부터 세차게 흔들어 보였다.

 

  아녀요. 저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문 따우는 믿지 않어요. 영감님께서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걸 누구보담도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깨요.”

 

  ! 알고 있다고? !”

 

  옆에서 쌍가매네가 제꺼덕 콧방귀로 응수했다.

 

  알고 있다니깨 기특허시기도 혀라! 참말로 눈물이 매라울 만침 고맙고도 유정허신 말씸이고만! !”

 

  주재소 순사들이 야밤중에 천석꾼 집안 덮쳤을 당시, 왜경들 길라잡이 구실 맡아 복면하고 나타났던 작자가 다름 아닌 김 영감이라는 소문이었다. 순금 또한 한동안 마을에 떠돌던 그 소문에 이미 접했던지라 김 영감한테 덮씌워진 누명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날 밤에 저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지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딧기 달랑 보재기 한 장으로 얼골 조깨 가렸다고 설마 허니 제 눈이 영감님인지 아닌지 못 알어볼 리가 있겄어요? 그자는 체구도 영감님보담 덜썩 더 크고 나이도 훨씬 더……”

 

  ! 올빼미맨치로 밤눈 하나는 밝어서 다행이네그랴! !”

 

  에미야, 너 아까부텀 무신 말버릇이 그 모냥이냐?”

 

  영감님보담 젊은 사나희였지요. 그러고 또 영감님께서 즈이 아버님한티 품고 계시는 원한이 지아모리 크다 헌들 설마 허니 쌍가매 아버지를 강제모집으로 끌고 간 일본에 대헌 원한보담도 클 리가 있겄어요?”

 

  ! 알기는 오뉴월 똥파리맨치로 잘도 아는고만! !”

 

  에미야!”

 

  작은 원수 갚을 욕심으로 그보담 훨씬 더 큰 원수허고 손잡는다는 건 도모지 이치에 안 맞는 소리고 어리석은 소견이지요.”

 

  젊은 아씨께서 고로코롬 가리를 타서 말씸을 허시니깨 이 늙은것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고만요. 그놈에 옘병헐 헛소문 땜시 이 늙은것은 그새 벙어리 냉가심 앓딧기 얼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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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75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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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가슴 높이밖에 안 올라오는 삽짝을 마주한 채 순금은 울안으로 조심조심 인기척을 들여보냈다. 실인즉슨 처음부터 그럴 필요조차 없는, 아주 객스러운 행동이었다. 삽짝 너머로 쌍가매네 모습이 빤히 건너다보였다. 삼간두옥 쪽마루에 나앉아 어린것 입에 젖을 물리고 있던 쌍가매네하고 분명히 눈길까지 마주친 바 있었다.

 

쌍가매 어머님한티 쪼깨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쌍가매야! 쌍가매야!”

 

  삽짝 밖의 손님 쪽은 모지락스레 외면한 채 쌍가매네는 냅다 고함을 뽑아 건공중으로 집어던졌다.

 

  쌍가매 너 이년, 거그서 시방 무신 지랄을 허고 자빠졌냐? 너 이년, 또 벼랑박에 흙고물 파먹고 자빠졌지야? 삽짝 배깥에 누가 찾어왔는갑다! 흙 고만 파먹고 싸게 못 나오겄냐, 이년아?”

 

  그러자 때꼽재기 쌍가매 얼굴이 뒤란 쪽에서 비주룩이 내밀어졌다. 어린 소견에도 뜻밖의 손님에 무척 당황스러웠던지 쌍가매는 슬금슬금 뒷걸음쳐 뒤란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밖에 선 채로 계속 지정거리고 있기가 좀 거식해서 순금은 집주인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삽짝을 안쪽으로 밀었다.

 

  안녕허셨어요, 쌍가매 어머님?”

 

  하이고, 요게 시방 뉘시다요? 야마니신지 니시야만지 허는 그 게다짝 소리 때깍때깍 나는 최부자 영감 외동따님 아니시든가요? 금지옥엽 아씨께서 갑째기 무신 바람이 불어서 도야지 우릿간 같은 즈이 집구석까장 행차허셨는지는 몰라도, 보시다시피 요로롬 별로 안녕허지가 못허고만요!”

 

  시작부터 대뜸 노골적인 시비조요 언필칭 비아냥거리기였다. 쌍가매네가 불쑥불쑥 내뱉는 말말이 낱낱이 다 불화살로 변해 순금의 가슴팍에 턱턱 꽂히면서 중화상을 입히고 있었다.

 

  병 줄라고 왔소, 약 줄라고 왔소?”

 

  쌍가매네는 시뻘건 불잉걸을 품은 눈초리로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의 상전이었던 여자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섬뜩한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생각만큼 젖이 잘 나오지 않는지 품안의 어린것이 갑자기 칭얼칭얼 보채기 시작했다. 쌍가매네는 풀어헤친 젖가슴으로부터 어린것을 떼어내려고 손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비록 빈 젖일망정 계속 물고 있을 욕심으로 어린것은 고개가 홱 잦혀지리만큼 뒤로 떼밀리면서도 젖꼭지만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 악착을 떨었다. 그 사품에 젊은 젖어미답지 않게 쪼글쪼글 말라붙은 쌍가매네 젖가슴이 고무줄처럼 기다랗게 늘어나버렸다.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오는 것도 있을 게 아녀, 이 썩을 것아! 죽어라 쪽쪽 빨어봤자 헛바람만 픽픽 새는 헛젖 백날 물고 늘어진들 무신 소용이냐, 이 웬수 덩어리야!”

 

  쌍가매네가 매운 손바닥으로 찰싸닥 볼기를 때려 어린것을 가슴팍에서 그예 뚝 떼어버렸다. 그러자 어린것은 끓는 물에 손이라도 담근 푼수로 자지러지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쌍가매네는 또다시 소리소리 질러 뒤란으로 꼭꼭 숨어버린 딸을 찾았다.

 

  쌍가매 너 이년, 싸게싸게 욜로 나와서 요 애물단지 안 델꼬 갈래?너 이년,  거그서 시방 무신 지랄을 허고 자빠졌냐, 이 주리를 틀 년아!”

 

  입에서 나오는 족족 모조리 다 악에 받친 소리요 살천스럽고도 툽상스러운 욕설이었다. 어미의 그런 말투에도 이미 이력이 붙었는지 쌍가매는 한껏 불량 떨어대는 제 어미 별로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느럭느럭 뒤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마치 함부로 다루어도 무방한 무슨 물건 아니면 짐승 새끼라도 되는 양 아무렇게나 포대기를 둘러 제 젖먹이 동생을 휘뚜루마뚜루 등에 업었다.

 

  저 에린것들 숨쉬는 소리 나는가 안 나는가 들어보고 잪어서 찾어왔소? 그깟녀르 소작권 조깨 끊어졌다고 우리 니 식구 숨줄이 금방 꼴까딱 넘어갈지 알었소? , 천만에 말씸이지! 그깟녀르 소작 조깨 못 부쳐 먹는다고 우리 니 식구가 고로콤 허망허게 죽을 성 부르요? 어느 놈 부자지 꽉 틀어쥐고서라도 그 니시야만지 야마니신지 허는 게다짝 영감보담은 휘낀 더 오래오래 살어뿔라요! 나는 최부자 그 영감탱이가 참말로 청천하눌에 날베락 맞고 벌러덩 죽어 나자빠지는 꼴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어도 못 죽겄소! 그 영감탱이보담도 딱 한 나절만 더 살다가 죽을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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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는가 174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23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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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사랑채의 싸움은 다 끝나 있었다. 섭섭이네가 울안 어느 구석에 숨겨버렸을 흑단나무 개화장 대신 새롭게 꺼내든 다른 지팡막대 휘둘러 마치 애꿎은 막둥이한테 분풀이하는 샌님이듯 무고한 땅바닥을 마구 닦달질하면서 천석꾼 영감이 문밖행차에 나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솟구치는 울화를 집안에서 곱다시 삭일 수 없는 까닭에 고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거동이 임의롭지 못한 몸뚱이를 지팡막대에 의지한 채 무리한 바깥나들이를 결행하는 눈치였다. 대짜배기 가오리연처럼 꼬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관촌댁 울음소리도 어느덧 잦아들어 있었다. 소용돌이 같은 거센 분요 끝에 모처럼 오랜만에 휴지기를 맞은 집안 분위기는 누가 언제 그 난잡들 다 떨었더냐 싶으리만큼 그저 고즈넉하기만 했다.

 

  순금은 소리 없이 구석방으로 다가갔다. 방안에서 부용의 숨소리가 가냘프나마 고르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실낱같이 간댕간댕 붙어 있던 알량한 기력마저 아버지와의 승산 없는 대결에다 몽땅 소진해 버린 뒤끝인지라 부용은 혼곤한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안방에서는 울부짖음하고 자리바꿈을 한 대짜배기 한숨소리가 관촌댁의 처연한 심기를 대변하느라 잇달아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질녘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리고 헐벗은 애옥살이에 찌들고 지친 농투성이들 울적한 심사를 어루만지는 위무의 손길과도 같이 옅은 주홍빛 저녁놀이 올망졸망한 초가지붕들 위로 나붓나붓 내려앉고 있었다. 층층이 지워진 가난의 멍에만 벗겨놓고 볼작시면 제법 정겹고도 곱다랗게 느껴질 법한 시골마을 저녁 풍경이었다. 애옥한 형편에도 그럭저럭 끼니 때울 거리는 마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밥 짓느라 집집마다 굴뚝 위로 하얀 연기들을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먼 곳에서 상객 아니면 귀빈 신분으로 산서를 방문하는 저녁놀을 마중 나가듯 하늘을 향하고 하얀 연기들이 꼬물꼬물 기어오르는 모양은 산골 농투성이 살림의 각박한 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저 평화롭고도 풍성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루 끝에 오도카니 앉아 담장 너머 마을 풍경에 잠시 넋을 빼앗기고 있던 순금의 시선이 갑자기 어느 한 집에 고정되었다. 다른 굴뚝들은 저마다 제가 책임 진 몫만큼의 연기를 피워 올리느라 분주한 판인데 유독 그 집 굴뚝만은 빈둥빈둥 놀면서 주변 굴뚝들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김 영감 집 굴뚝이었다. 김 영감보다는 쌍가매네란 별칭으로 더 잘 통하는 집이었다. 솥에다 안칠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적신(赤身)뿐인 집안이라서 그처럼 아궁이도 굴뚝도 하릴없이 놀고 지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지난번 산서 일대를 휩쓸었던 강제모집 바람으로 말미암아 쌍가매네는 이른바북해도 과부신세가 됐을뿐더러 엎친 데 덮쳐 만좌중에상곡 그 어르신능멸죄까지 몽땅 덤터기 쓰고 말았다. 그 탓으로 오랫동안 소작 부쳐온 몇 뙈기 전답마저 깡그리 놓치고는 늙은 시아버지와 함께 쌍가매네가 이집 저집 허드렛일 다니며 날품 팔아 애면글면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생때같은 서방 멀리 떠나보내고 그만 눈알이 해뜩 뒤집힌 나머지 방자무기하게도 감히 천석꾼 영감한테 바락바락 대들며 행티 부린 대가로 손에 쥐게 된 가외의 애옥살이요 곱빼기 설움이었다.

 

  쌍가매네와 화해하고 싶다는, 반드시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죄 많은 천석꾼 지주 딸로서 아버지 대신 김 영감에게 백배사죄하고 싶었다. 우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홀맺힌 매듭부터 푸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해로 통하는 첩경임을 그니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머리로만 알면서 가슴으로 실감하는 데 인색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물실호기였다. 바야흐로 하나님께 화해를 청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다. 더 지체할 것 없이 그니는 마루 끝에 놓인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쌀가마들이 쟁여져 있는 광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쌍가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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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은 오는가 173회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2012-05-22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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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첨지 이웃집 영감 상대로 마지막 담판을 벌임으로써 떼로 몰려드는 그 모든 사달들에 기어이 아퀴를 짓고야 말 기세로 순금은 마음속에 푸만히 들어차 있던 원망의 말들을 폭포수처럼 좍좍 쏟아냈다.

 

  하나님 아바지께서 시방 뭔가를 혹시 오해허고 계신 것은 아니겄지요? 죄인 최순금이, 그렇게 똑똑허고 강인헌 인간이 못 된답니다. 애시당초 몸도 마음도 연약허기 짝이 없는 여종이고 한갓 초로인생에 불과허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역부러 그러콤 호되게 담금질허시고 뜨거운 연단 내리시지 않드래도 어리석고 부족헌 죄인 최순금이는 처음 때부텀 마즈막 때까장 속절없이 주님 포도나무에 달린 잔가지고 오갈 디 없는 주님 소유물인 것을 다시 한 번 자인허고 자백헙니다. 남은 평생 온전히 주님 목소리만 청종허고 순복허면서 오즉 주님 뜻대로만 살겄다고 일찌감치 서원 드렸던 여종인지 우리 주님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지허시고 전능허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발 부탁 조깨 드리겄어요. 주여, 사랑이 많으신 우리 주여, 사랑의 본체이신 내 주님이시여, 제발 이 죄인 너무 지나치게 박대허지는 말어주셔요. 제발 이 어리석고 부족헌 죄인으로 하야곰 자꼬만 자꼬만 시험에 들게코롬 맨들지 말어주셔요! 제 말 아시겄어요, 주님?”

 

  하나님을 향한 투항의 표시로 순금은 공방 바닥에 무릎을 착 꿇고 도두앉았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훼방하는 바람에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막무가내 떼쓰고 투정하며 포달 부리는 어린애 모습으로 순금은 서럽게 느껴 울면서 계속 지껄거렸다.

 

  죄인 최순금이도 인제는 지쳤고만요. 아조 지칠 대로 홈빡 지쳐서 인제는 참말로 인생만사 죄다 신물이 날라고 허는고만요. 주여, 사랑이 충만허신 내 주님이시여, 제가 만약에 요번 시험을 못 이겨서 끝내 실족허게 된다면, 그때는 누가 더 깝깝헐까요? 누가 더 손해를 보게 될지 주님께서는 한 번이라도 고찰허신 적이 있으셔요? 물론 저도 손해겄지만, 저보담은 우리 주님 손해가 훨씬 더 막심허리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고만요. 어쩌면 우리 주님 섭리허시는 사역에 제법 유용헌 도구로 쓰일지도 모르는, 신실허고 충직헌 여종 하나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몰라요. 주여, 주님이시여, 지금 당장 저한티 뭔가 표적을 보여주셔요. 어리석고 부족헌 죄인일망정 최순금이를 끝까장 과부나 고아맨치로 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실헌 증표 하나쯤 뵈야주실 때도 되얐잖어요? 앞으로 우리 주님 그 광대허시고 엄위허신 권능을, 우리 주님 의로우신 오른손이 행허시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들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허고 제 손으로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제가 시방 저지르는 이 행악을 절대로 주님 앞에 사죄허지 않겄어요! 제 말 아시겄어요, 주님?”

 

  그러나 순금은 항용 그래 나왔듯이 이번에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 빨래 다루듯 아무리 신심을 발끈발끈 쥐어짜가며 절박한 기도를 드려봐야 하늘에서든 땅위나 집안 내부 어디에서든 하나님 음성 엇비슷한 소리 한 마디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절대로, 참말로 요번만은 무신 일이 있드래도 절대적으로 사죄허지 않을랍니다! 앞으로는 기도 드리는 일마저도 다 작파헐랍니다. 그러니깨 주님, 제 마즈막 간구를 들어주시든가 마시든가 인제부텀 주님 스사로 판단허시고 주님 스사로 결정을 내리셔요!”

 

  한번 버그러지기 시작한 틈새에 다시 쐐기를 치듯 순금은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엄포를 놓음으로써 도무지 기도답지 않은 그 기도를 마침내 매조졌다. 꿇었던 무릎을 펴면서 순금은 줄지어 흐르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아무렇게나 훔쳤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이 번히 트이면서 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전까지 제가 저질렀던 짓거리가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지 깨닫기 무섭게 순금은 공방 바닥에 도로 너부죽이 엎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미물의 자세를 얼른 취했다. 오만무례하게도 독신(瀆神)의 대역을 범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절대자 앞에 낱낱이 자복하고 통회하는 절차를 밟기 위해 순금은 방금 전의 것하고는 또 다른 성질의 눈물을 새롭게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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