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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8회 | 비너스에게 2010-10-0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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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나 씨와 나는 그가 죽 한 그릇을 비운 뒤 조용히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집을 나왔어. 한참을 걸어나와서야 그가 단 한 번도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장작처럼 야위어 있었는데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고 평소와 다름없었어. 그는 마치 타인에게 응석부리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어. 그는 사실 마음 편히 응석을 부릴 만한 사람이 한 번도 곁에 없었던 건 아닐까?

 

  “저, 양나 씨. 먼저 가세요. 저기, 저는……”

 

  내가 걸음을 멈추며 그렇게 말하자 양나 씨가 나를 흘긋 보았어. 그리고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어.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마렴. 운수가 걱정할 거야.”

 

  양나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몸을 돌려 현신의 집을 향해 뛰었어.

현신은 다시 찾아온 나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했고 자기는 괜찮으니 돌아가라며 걱정을 했어. 나는 그를 억지로 침대에 누이고 따듯한 물을 받아 수건에 적셔 그의 얼굴과 목, 손과 발을 닦아주었어. 그는 계속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지만 결국에는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겼어.

 

  “개운하네. 고마워.”

 

  현신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어. 나는 그의 열이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따듯한 수건으로 마사지를 해주었어.

  비너스. 적어도 그가 아프고 외로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나였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허황된 것일까? 나는 뜨거운 현신의 손을 잡았고 그는 내 손을 밀쳐내지 않았어. 누군가 내게 손을 맡겨준다는 건 정말이지, 굉장히 행복한 일이었어. 어쩌면 그건 키스보다 행복한 일인지도 몰라.

 

 

 

  “정말 어이없네.”

 

  필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어.

 

  “그건 안 돼. 절대로. 넌 여기에서 대체 뭘 배운 거니?”

 

  “필, 제발. 얘기나 좀 제대로 들어보자. 나는 쟤가 저렇게 진지한 건 처음 본다고.”

 

  잡이 말했어.

 

  우리 그룹은 상담실 안에 있었어. 필이 ‘다른’ 아이들이 ‘우리’ 얘기를 엿듣는 건 몹시 불쾌하다고 양나 씨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국 양나 씨가 상담실을 우리에게 빌려주기로 한 거야. 대체 언제 우리가 ‘우리’가 된 거지?

  얘기를 처음 꺼낸 건 뜻밖에도 마. 그애는 이어폰도 없이, 멍한 표정도 짓지 않고 우리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어. 상담실 안에는 흔들의자가 없었으므로 도라도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소망은 간단해. 날 괴롭혔던 녀석들을 죽도록 패주고 싶어. 너희들이 도와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잖아?”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어. 그러고는 동시에 말했지. 그건 좀……

 

  “어째서? 그 자식들은 내게 더한 짓도 했는데?”

 

  마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어.

 

  “아무리 여기에서 좋은 이야기를 잔뜩 듣고 마음을 다잡는다 해도, 결국 내 손으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게 있어. 이게 바로 그런 거야. 내가 그 자식들보다 훨씬 훌륭한 인간이라고 계속 되뇌면 뭐 해? 난 아직도 밤에 그 녀석들이 날 괴롭히던 꿈을 꾸며 오줌을 지려. 이런 일에 도덕성 운운하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상담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어. 내가 그래도 그건 안 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구석에 앉아 있던 누룽지가 주춤거리며 손을 들었어.

 

  “저기, 난 마의 의견에 찬성해. 난 도와주고 싶어.”

 

  “누룽지. 이건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나 타면 되는 일이 아니야. 잘못되면 일이 아주 심각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양나 씨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 마의 말이 맞아.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있어.”

누룽지가 고집스럽게 말했어.

 

  “안 돼, 난 절대 빠질 거야. 난 이제 거의 정상이야. 가족들한테 다시는 ‘미쳤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어.

 

  “난 찬성.”

 

  도라가 시원스레 말했어.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마가 잡을 쳐다보았어.

 

  “글쎄, 이런 건, 마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야. 정말 두고두고 열받고 겁나는 일이라는 게 그 일일 거라고는 생각해. 하지만 그걸 우리가 꼭 도와주어야 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어. 마가 그대로 참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냥 참았다가 나중에 더 큰 병이 되면 그것도 나름 문제이기도 하고, 하지만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비인간적이지는 않나 그런 생각도 들고……”

 

  “잡설은 필요 없어!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마가 잡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어.

 

  “알았어, 알았다고. 소극적으로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소극적으로 돕는다는 건 또 뭐냐?”

 

  도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어.

 

  “그냥, 적극적으로는 도울 수 없다고.”

 

  “좋아, 그 정도면 됐고, 너. 수요일의 아이. 어떡할 거야? 네가 먼저 우리를 돕고 싶다고 나선 거 아니었어?”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어. 나는 완벽하게 궁지에 몰린 거였어. 나는 지금 여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만일 이곳에서도 실패하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 내가 저 애를 돕는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는 걸까? 그렇다면 양나 씨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라 알고 있었어. 거짓말은 항상 나쁘기만 한 걸까? 예를 들자면 엄마를, 친구들을, 세상을 끝까지 속여 넘길 수만 있었다면 난 내 거짓말에 축배라도 들었을걸. 물론 거짓말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불쑥 내뱉고 말았어.

 

 

  “좋아, 알았어. 하지만 너희들 모두 내 말에 따라줘야 해.”

 

  “안 돼. 난 양나 씨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놓을 거야!”

 

  필이 뾰족한 연필처럼 날카롭게 외쳤어.

 

 “필. 우리가 ‘우리’라며? 그렇다면 적어도 비밀은 지켜줘야지. 널더러 도우라는 말까지는 안 할 테니 걱정 마.”

 

  내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하자 필은 겨우 입을 다물었어.

 

  “고마워.”

 

  마가 말했어. 그러고는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았어.

 

  “모두들 정말, 고마워.”

 

  그 녀석은 진심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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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7회 | 비너스에게 2010-10-0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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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나 씨는 커피를 마시며 오맙또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어.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른 아이들도 재밌었다고 했어. 특히 도라가 무척 좋아했단다. 나 역시 이 정도 선이라면 너희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또래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으니까. 너는 어때?”

 

  “……괜찮을 것 같아요.”

 

  “어쩐지 시들한데?”

 

  양나 씨의 충고가 맞았기 때문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어. 다른 사람의 소박한 소망을 들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왜 그래야 하는 건지 회의가 들었어. 하지만 내가 제안한 이 일에 벌써부터 부담감을 느낀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지. 양나 씨를 실망시킬까봐 무서웠던 거야. 아니면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이 지겨웠던 건지도.

 

  “그렇지 않아요.”

 

  뉴질랜드에 가서도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거짓말을 늘어놓게 될까. 그럼 여기서와 무엇이 달라지는 거지.

 

  “좋아. 그럼, 오맙또는 당분간 네가 맡아주렴. 무언가를 결정한 후에는 반드시 내게 알려주고. 약속할 수 있지?”

 

  “네. 그럴게요.”

 

  “좋아. 현신이 몸살에 걸렸단다. 그는 오늘 하루 진료소를 쉬어야 한다고 했어. 나랑 같이 그에게 가볼래?”

 

  마침 그의 안부가 궁금했던 터라 나는 얼른 양나 씨를 따라나섰어. 그러고 보니 나는 그가 어떤 곳에서 어떤 식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 막연히 상상만 했을 뿐. 양나 씨는 따듯해 보이는 검은색 캐시미어 숄을 둘렀어. 날씨가 제법 쌀쌀했고 마당의 나뭇잎들도 거의 다 떨어져 내렸거든. 곧 첫눈이 오겠지. 그때에도 나는 ‘애미’에 있게 될까.

현신의 집은 ‘애미’에서 도보로 삼십여 분 정도의 거리. 양나 씨와 나는 산책 겸 해서 걸어가기로 했어. 현신에게 줄 음식이 든 피크닉 바구니는 내가 들었고 양나 씨는 내 팔을 붙들었어.

 

  “운수는 좋겠다. 너처럼 멋진 아들이 있어서.”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아니. 틀림없이 그래.”

 

  “……저, 양나 씨의 애인은…….”

 

  “그녀는 잘 지내고 있어. 몇 달 동안 일 때문에 영국에 가 있었거든. 다음 달쯤 돌아올 거야.”

 

  “좋겠네요.”

 

  “그래, 좋아. 몹시 기다려져. 하지만 막상 만나게 되면 얼른 떠나주길 바라겠지.”

 

  “그냥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잖아요?”

 

  “그 말은 살아만 있어도 좋다는 말과 같아. 외로움에 질식해버리기 직전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있기만 해도 좋겠지. 하지만 바로 그 누군가 때문에 숨을 쉴 수 있게 되면 이런저런 다른 고통이 느껴지게 되거든. 그게 바로 사람이야.”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마찬가지란 뜻인가요?”

 

  “적어도 나는 그랬지만……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어. 내 세계와 네 세계는 분명 다를 테니.”

 

  “그럴까요?”

 

  “그렇고말고. 말했잖니. 넌 내 희망이라고.”

 

  “양나 씨도 아직 얼마든지 기회가 있어요.”

 

  “오!”

 

  양나 씨가 걸음을 멈추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어.

 

  “내게 충고를 하려면 아직 백년은 이르다, 소년.”

 

  “그러지 말고, 좋은 말은 좀 들어요.”

 

  양나 씨가 웃음을 터뜨렸어. 그러고는 다시 다정하게 내 팔을 붙들었지.

  현신의 진료소가 세들어 있는 건물은 원래 약국이었다고 해. 이층에는 살림집이 붙어 있는데다 약장 같은 것도 다 되어 있어 약간의 수리를 한 뒤 현신이 들어왔다고.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아늑한 이층 건물에는 ‘현신동물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어. 근처에는 슈퍼나 세탁소 같은, 생활에 필요한 작은 상점들이 있어 별로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어. 하지만 현신처럼 젊은 사람이 혼자 살기에는, 역시 너무 을씨년스럽고 쓸쓸한 느낌이었어. 인근의 축사나 농가에 출장 진료를 자주 나가야 해서 병원 앞에 세워져 있는 현신의 사륜구동 자동차는 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 양나 씨가 병원 출입문 옆에 붙어 있는, 이층의 살림집으로 연결된 호출기를 누르자 잠시 후에 현신이 내려와 출입문을 열어주었어. 현신의 얼굴은 핼쑥했고, 몸은 더 가늘어진 것 같았어.

 

  “저런. 어제보다 더 안 좋아진 거야?”

 

  양나 씨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현신은 억지로 웃었어.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겨워 보이기에 나는 그를 부축해주었어. 그의 몸이 생각보다 너무 가벼워서 깜짝 놀랐어. 이층의 살림집은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 욕실의 구조로 되어 있었어. 현신의 학생다운 느낌답게, 집 안도 반듯하고 청결한 느낌. 쓸모없는 물건은 없었지만 필요한 것은 꼭 있어서 현신이 꽤나 제대로 살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현신의 침실은 제대로 정리를 못했는지 흐트러져 있었어. 양나 씨가 가져온 죽을 덥히기 위해 주방으로 나갔고, 나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며 수건 같은 것들을 대충 정리했어. 현신이 누워 있는 침대도 엉망이어서 나는 그의 몸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 시트의 주름을 펴주려고 했어. 하지만 현신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러워했어.

 

  “미안. 그동안 제대로 씻지를 못하는 바람에 몸에서 냄새가 나.”

 

  현신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어.

 

  “그, 그런 건 괜찮은 것 같은데…….”

 

  나 역시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말았어. 그는 분명히 나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비너스. 그건 달콤하고도 매혹적인 느낌이었어. 나는 현신의 가는 몸과 팔, 다리, 머리를 차례로 들어 올려 시트의 주름을 펴주고 베개를 바로 놓아주었어. 그러다 현신의 흰 목덜미에 작은 점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이 무척 귀엽다는 생각을 했어.

 

  “아주 멜로드라마를 찍어요.”

 

  양나 씨가 죽 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오며 명랑하게 말했어.

 

  “너희 둘이 있으면 왜 이렇게 공기가 에로틱해지는 거야? 현신! 얘 아직 미성년이야.”

 

  “양나 씨는 성년이 된 다음에 연애했어요?”

 

  “미쳤니?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게. 다 그 나이 때 맞는 연애가 있는 거야. 그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못하는 그런 게 있다고.”

 

  “그렇다면…….”

 

  “농담은 그만해, 양나 씨.”

 

  현신이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어. 양나 씨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 발 물러섰지만 나는 약간 상처를 입었어. 그가 나를 완전히 애 취급했기 때문이야. 앞으로 살아가면서 현신처럼 괜찮은 게이를 만나게 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또한 그 게이가 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확률은? 현신이 하필이면 이곳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도 나와의 운명이며 인연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걸까? 하아…… 이런 극적인 망상에 매달리게 되면 결국 그 관계는 끝이 좋지를 않아. 나도 알고는 있지만 현신을 유혹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 나는 적어도 문자를 날려 이별을 통보하는 또라이는 절대로 되지 않을 텐데. 그 역시 나와의 일을 자기 엄마에게 징징거리며 털어놓지도 않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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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6회 | 비너스에게 2010-09-3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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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로 받는 날

 

  비너스에게.

  수요일이 되어 ‘애미’에 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어.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하마터면 앨리스의 뿔에 받힐 뻔한 거야. 나는 앨리스가 콧김을 뿜어대며 내게 돌진을 하는데도 설마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기만 했고, 양나 씨가 맨발로 뛰어나오며 “소년! 뛰어! 얼른!”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몸을 돌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어. 나는 뛰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 두 발로 뛰는 것과 네 발로 뛰는 건 비교가 되지를 않았어. 앨리스의 뾰족한 뿔이 바로 내 엉덩이를 겨냥한 채 바싹 가까이 다가와 있었지. 나는 그제야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속도를 올려 전력질주로 도망을 쳤고 앨리스는 그런 내 뒤를 쫓았으며 그 뒤를 양나 씨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쫓았어. 우리 셋은 꼬리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어. 하나는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지.

 

“앨리스!”

 

  양나 씨가 손뼉을 치며 날카롭게 외치자 앨리스는 날 쫓던 걸 멈추고 방향을 바꾸었어. 양나 씨는 우리를 향해 나는 듯 달렸어. 앨리스의 뿔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 달리던 양나 씨가 우리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앨리스가 쫓아들어갔어.

 

  “소년! 문 닫아!”

 

  양나 씨가 반대편 담을 훌쩍 뛰어넘으며 소리쳤어. 나는 허겁지겁 우리 문을 닫아걸었어.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앨리스가 사납게 뒷발질을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내가 묻자 양나 씨도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어.

 

  “앨리스는 지금 발정기야. 발정기가 되면 사나워지거든.”

 

  “제기랄. 엉덩이에 구멍 날 뻔했어요.”

 

  양나 씨가 웃음을 터뜨렸어.

 

  “미안. 진즉 우리에 가뒀어야 했는데. 앨리스가 답답해하는 게 불쌍해서 그만.”

 

  사실 나는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거라 양나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녀는 지나치는 말로라도 남 탓을 한 적이 없어. 나는 양나 씨에게 이런저런 많은 말들을 듣고 있었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녀를 점점 더 신뢰하게 되는 걸 테지. 나도 누군가의 신뢰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보다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더 많을 거야.

양나 씨는 내 팔에 팔짱을 끼었어.

 

  “미남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걸. 오맙또는 재미있었니?”

 

  “생각보다 힘들긴 했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놀이공원에서 네 친구들을 만났다고?”

 

  “네.”

 

  “당황했겠구나.”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혼자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걸 ‘우연’이 대신 처리해준 느낌이에요.”

 

  양나 씨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어.

 

  “그래. 그런 식이면 앞으로 다 잘될 거야.”

 

  놀이공원에서 영무와 우연히 만난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가 고민을 했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영무, 그러니까 정상적인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건가 하고. 엄마는 아직도 보란 듯이 내 책상 위에 뉴질랜드 유학 가이드북을 올려놓았고 학원소개 책자를 거실 테이블에 비치해두었어. 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엄마로서는 최대한의 양보였겠지. 나는 그녀가 단지 나를 자신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 내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해본 결과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인지 혼란스러웠어. 하지만 이제 이유야 어떻든 그만 쉽게 쉽게 흘러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버렸어. 미지의 나라, 미지의 사람들. 어쩌면 거기에서 나는 예전처럼 사소한 일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아무 생각 없는 아이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아무런 상처도 없는 듯, 무거운 부담감도 가지고 살지 않는다는 듯 말이야.

 

  “유학원에 등록했어요.”

 

  “흠. 충분히 생각해본 거니?”

 

  “네. 엄마가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고 약간 울었어. 그녀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지. 그냥 이걸로 된 거다, 라고.

 

  “소년. 유학을 가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정말 가고 싶은 건지 아닌지가 중요해.”

 

  “가고 싶어요.”

 

  “그게 현실도피인지, 아니면 현실대응인지 잘 구분하고 있는 거니?”

 

  “뭐가 다르죠? 결국 하는 일은 같은데.”

 

  “완전히 달라. 단지 도피일 뿐이라면 거기에는 전혀 다른 현실이 있다고 믿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할 거지? 또다시 짐을 꾸려 다른 나라로 떠날 거니?” 양나 씨가 너무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나는 할 말이 없었어. 그녀도 나의 결정을 기뻐해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양나 씨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어.

 

  “그럼 다행이야. 다행한 일이지.”

 

  우리는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어. 양나 씨가 치즈 케이크와 커피를 내오는 동안 씨아는 단잠을 깨운 나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씨아는 사랑을 위해 몸단장을 하는 시간 이외에는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 같았어.

 

  “넌 행복한 놈이구나.”

 

  내가 부드러운 등을 살짝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씨아의 몸이 움찔했지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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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5회 | 비너스에게 2010-09-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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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무. 그리고 온갖 농담을 지껄이며 함께 몰려다니던 학교 친구들. 그애들 틈에는 흰 팬티가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애도 없었고 눈가리개를 한 듯 멍해 보이는 애도 없었어. 계속 롤러코스터를 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도 없었고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외진 곳으로 도망 온 어른 게이도 물론 없었지. 하여간에 어떤 문제가 있어 낙오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영무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자 곧 다른 녀석들도 나를 보았어. 나는 이맘때쯤이 개교기념일이라는 걸 기억해냈어. 게다 내일은 토요일. 롤러코스터를 토할 때까지 타는 것만으로는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였어, 비너스.

  영무가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듯 보였어. 다른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옆구리를 찔러가며 무언가를 속삭였지. 나는 그동안 ‘애미’를 들락거리며 무언가 달라졌을까? 천만에. 나는 몸을 돌려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어. 당황한 현신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그래. 나는 겨우 그 정도의 인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영원히 변화하지 못할지도 몰라. 숨이 턱에 닿자 나는 뛰던 것을 멈추었어. 그러고는 몸을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지.

 

  “성훈아!”

 

  영무가 소리도 없이 내 뒤를 쫓아와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 그 녀석도 달리느라 숨이 찼는지 호흡이 무척 거칠었지. 나는 뭐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펄쩍 뛰며 그 녀석의 손길에서 벗어났어. 이제 뭘 어째야 하는 거지?

 

  “어, 영무야, 반갑다.”

 

  제기랄!

  영무는 막상 나를 붙잡아놓고는 어색하게 서서 말 한마디 없었어. 나는 우리 사이에 흐르는 그 낯선 공기 때문에 울고 싶어졌어.

 

  “……잘 지냈냐?”

 

  영무가 간신히 내놓은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어.

 

  “전화가…… 몇 번이나 했는데 안 되더라.”

 

  난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놓았고 집 전화는 울리든지 말든지 상관도 하지 않았어. 어쩌면 영무가 집으로 직접 찾아와주었다면 나는 곤란한 척하면서도 내심 기뻤을지 몰라. 하지만 그 녀석도 끝내 날 찾아오지는 않았어.

 

  “그렇지, 뭐.”

 

  “친구들이냐?”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목에 돌덩이라도 걸린 듯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어. 나는 영무 앞에서 그애들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거야. 심지어는 현신까지도. 어째서 나는 이것밖에는 안 되는 인간인거지.

 

   “……아줌마도 잘 계시지?”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보았어. 지금 이 순간 영무와 우리 엄마 안부 따위나 주고받고 싶지 않았어. 나는 그애에게 내 수많은 잘못을 사과하고 싶었고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고 싶었어. 나를 이해해달라고 영무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영무는 시시한 말이나 내뱉으면서 나를 더욱 절망시키고 있었지.

 

  “네가 조금 더…… 괜찮아지면…….”

 

  영무는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쉬었어.

 

  “아니야. 모처럼 친구들하고 놀러 온 거니까 재미있게 놀다 가라. 나도 그만 가볼게.”

 

  뭔가를 말해야만 했어. 그래야 영무를 잃지 않게 될 테니.

 

  “저기, 영무야.”

 

  영무는 가버리는 대신 내 말을 기다려주었어.

 

  “내가…….”

 

  “그래.”

 

  “……내가 좀…… 괜찮아지면…….”

 

  “그래.”

 

  “……미안.”

 

  영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어. 그 녀석은 여전히 따듯한 손을 가지고 있었고, 날 포기하지도 않았어. 이제 내가 그 녀석을 찾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말 괜찮아지는 걸까. 시간과 인연의 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영무는 조심스레 내 어깨를 토닥였고 잠시 내 곁에 머물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어. 나는 숨을 가다듬은 후 내 세계로 돌아갔지.

 

  대충 상황을 눈치챈 현신이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어. 필은 내가 멋대로 행동한다며 투덜댔고 잡은 그런 필에게 눈치도 없다고 면박을 주었으며 도라는 롤러코스터를 한 번 더 탈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멍하니 음악을 들었고 누룽지는 내 곁에 찰싹 달라붙었어. 그때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어.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문 채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을 구경했어. 불꽃이 터지는 동안 다행히 도라는 배가 무척 고프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롤러코스터에 대한 열망을 접었어. 우리는 노천카페로 몰려가 치킨과 콜라를 산더미처럼 주문했어. 현신이 구운 감자와 옥수수, 과일 샐러드를 먹는 동안 우리 여섯 명은 마치 대마초를 실컷 피워대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닭다리를 뜯었어.

  그건,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맛이었어, 비너스. 밤새도록 폭풍 설사에 시달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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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4회 | 비너스에게 2010-09-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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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나와는 달리 줄곧 시시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표를 끊고 출입문을 통과하자 모두들 들뜨는 것 같았어. 현신도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어. 원래 학생 같은 느낌이어서인지, 그는 아는 동생들을 데리고 놀러 온 대학생처럼 보였어. 우리는 약속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했어. 다른 건 아무것도 타지 않고, 도라가 만족할 때까지 오로지 롤러코스터만. 그동안 놀이공원을 꽤 들락거렸어도, 그렇게 무한정으로 롤러코스터만 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도라가 질린다는 듯 말했어. 평일 오후인데도 롤러코스터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어. 나는 도라에게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어.

 

  “끈질기게 버티다보면 결국 우리밖에 남지 않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지는 않아.”

 

  우리는 줄의 맨 끄트머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필과 잡은 계속 수다를 떨었지. 현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도라를 달래주느라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어. 나는 이제 누룽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받아들인 터라 그애에게 이런저런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마음껏 웃겨주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외롭고 답답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누룽지와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제법 즐거웠다고. 그리고 누룽지의 굉장한 차림새 역시 그애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누룽지도 세련돼져서 이때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날이 올까? 아니면 누룽지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퍼포먼스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이러한 차림새를 고수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 되어도 굉장한 일이지 않아, 비너스? 사람은 계속 변화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말이야.

  사십여 분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어. 이제 도라는 너무 긴장을 해서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고 있었어. 현신은 그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뒤 자리에 앉혀주었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말았어. 내가 현신을 정말 사랑하기라도 하는 걸까, 라고 잠깐 고민해보았지만, 비너스. 사실 나는 여전히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 그것 때문에 이렇게나 된통 혼이 나고도.

  단단히 벨트가 채워지고, 열차가 서서히 출발을 하자 옆에 앉은 누룽지는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했어. 나는 반사적으로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해주었지. 마도 이어폰을 뺀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잡과 필은 벌써부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어. 열차가 태산이라도 올라가려는 듯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동안,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은 도라와 현신의 뒤통수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어. 그러고는 마침내 중력의 장난이 시작되었어. 일제히 터지는 비명, 지구를 뚫고 핵으로까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탈락감, 내 몸이 거대한 장난꾸러기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 옆을 슬쩍 보니 누룽지는 “내릴 거야! 내려주세요!”라고 외치며 벨트를 끌러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 나는 눈을 감았지.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칼처럼 꽂히는 열차의 굉음에 묻혀버렸어. 모든 게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홀가분해진 마음 때문인지 조금 눈물이 나왔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롤러코스터는 여전히 흥분되고 즐거웠기 때문이야.

 

  “대단해!”

 

  도라가 창백한 얼굴로 외쳤어.

 

  “정말이지, 굉장해. 장난 아냐, 이거.”

 

  도라가 팽이처럼 빙빙 돌며 계속 중얼거렸어. 딱하게도 누룽지는 너무 우는 바람에 마스카라까지 검게 번져서 이제는 권투선수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은 판다곰처럼 보였어. 마는 이어폰을 낄 생각도 하지 않고 필과 잡에게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감상을 코너별로 토해내고 있었어. 현신은 핏기 없는 얼굴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했지. 그는 이런 것에 무척 약한 사람임에 틀림없었어. 하지만 우리는 도라가 지칠 때까지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약속했으므로 또 사십여 분을 기다렸고, 차례가 돌아와 다시 롤러코스터를 탔어. 두 번을 타고 나니 탈락자가 생겼어. 누룽지는 흰 팬티를 훤히 보이며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고 저걸 계속 탄다면 누군가가 자기를 업고 다녀야 할 거라고 했어.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군말 없이 그애가 쉬도록 놔두었어. 사실 제일 안 된 건 현신이었어. 그는 책임감 때문인지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거든. 그는 도라 때문에 계속해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야 했어.

 

  “내가 도라와 함께 탈게요. 앞자리에 타는 걸 좋아하거든요.”

 

  현신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고맙다는 뜻의 미소를 보이자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말았어. 세 번째의 롤러코스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어. 해가 져서 사방이 푸르스름했고 놀이공원의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어.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나는 도라에게 아래를 내려다보라고 외쳤어. 도라의 환호성은 열차가 급강하를 시작하자 비명으로 변했지. 네 번째에는 필과 잡과 현신이 포기를 했어. 마는 토할 것 같다면서도 한 번을 더 탔고 다섯 번째는 도라와 나만 남았어.

 

  “도라, 이제 불꽃놀이가 시작될 거야. 어때? 이번만 타고 가서 그걸 볼래?”

 

  도라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어. 비너스.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그만 포기하고 싶었어. 머리가 흔들려서 아팠고 속이 울렁거리는데다, 다리에도 힘이 없어 걷는데 몸이 비틀거렸단 말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도라는 혼자서 놀이공원에 오는 것은 뻘쭘하다고 했어. 그 말은 롤러코스터를 꼭 타보고 싶은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타고 싶다는 뜻이었을 거야. 나는 그애가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었어. 그애가 아니라 날 위해. 그것만이 힘겨운 내 일상, 다른 아이들의 일상, 그러므로 모두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서였어.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도 얼마 없었어. 도라와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어. 한동안의 비행 끝에 열차가 도착하자 결국 나는 토하고 말았어. 도라가 당황해서 내 등을 두드려주었고,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신과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왔어. 낮에 먹은 벌건 토마토를 게워내고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믿기지 않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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