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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3회 | 비너스에게 2010-09-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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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신은 우리를 위해 8인승 승합차를 렌트해왔어. 아이들이 차례로 승차를 하는 동안 양나 씨는 옆에 서 있다가 한 명 한 명 일일이 껴안아주었어. 맨 마지막에 타는 나를 다정히 껴안으면서 양나 씨가 속삭였어. 아이들을 잘 부탁해. 나는 그녀가 나를 믿어준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어. 그녀는 적어도 내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거든. 차 안에 앉아 창을 통해 마당에 있는 하나와 앨리스와 양나 씨와 아이들을 보았어. 부탄과 습자지가 호스로 물을 뿜다가 서로를 향해 발사를 시작했고, 결국은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물을 마구 흩뿌려 마당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어. 하나와 앨리스는 마침 이때다 싶었는지 포플러나무 밑으로 황급히 도망을 쳤지. 부탄이 우리가 탄 차에까지 물을 뿌려대기 시작하자 현신은 황급히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어. 양나 씨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물을 뒤집어쓰며 비명을 질렀어. ‘애미’의 마당을 지나 열려진 문을 나와 길로 들어서도록 아이들과 양나 씨의 높은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왔어.

내 옆자리에는 누룽지가 앉아 있었어. 나는 그애가 불편했으므로 될 수 있으면 떨어져 앉고 싶었지만, 과연 그애는 누룽지라는 별칭답게 좀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어.

 

  “저, 누룽지.”

 

  “응? 왜?”

 

  “춥지 않아?”

 

  나는 차가 흔들릴 때마다 누룽지의 훤히 드러난 넓적다리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것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 그래서 내 재킷을 벗어 덮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

 

  “아니? 하나도 안 추운데?”

 

  이런 제길.

 

  “추울 거야. 여자는 저……, 음, 넓적다리가 추우면 안 된다고 엄마한테 들었던 거 같은데.”

나는 재킷을 벗어 누룽지에게 덮어주며 중얼거렸어.

 

  “넌 정말 친절하구나. 난 너처럼 좋은 애는 만나본 적이 없어.”

 

  나는 어색한 기분에 일주일 동안 잘 지냈느냐고 물어보았어. 그러고는 아차 싶었지. 대체 그따위 걸 물어서 뭘 어쩌자는 거람.

 

  “토마토 때문에 조금 힘들었어. 내가 또 다이어트를 하는 줄 알고 토마토를 먹을 때마다 아빠가 소리를 질러대서.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미안하니까.”

 

  “다이어트를 자주 하는 거야?”

 

  “그렇게 자주는 아닌데…… 가족들은 내가 하는 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렇구나.”

 

  누룽지는 잠시 후에 변명하듯 덧붙였어.

 

  “내가 사고를 많이 쳐서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웃으며 말하자 누룽지의 표정이 겨우 밝아졌어.

  나는 누룽지와 계속 이야기를 했어. 그애의 가족은 그애까지 네 명이었고 아래로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었어. 누룽지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돼. 내가 뭔가를 하면 다들 화를 내고 비웃어.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랬어.

하지만 비너스. 누룽지가 더 열심히 화장을 하고, 더 열심히 멋 내는 걸 상상해봐. 문제는 노력이 아닌 거 아닌가…… 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그럴 거야, 라고 말해주었어.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누룽지는 정말 목소리가 좋아. 작고 나직하고, 곱고, 다정하고, 따듯한 느낌의 목소리. 그래서인지 그애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다감하게 들려왔고 나는 그애의 기괴한 화장을 그럭저럭 잊어버릴 수 있었어.

  ‘애미’에서 에버랜드까지는 사십 분 정도의 거리. 평일 오후여서 진입로도 원활했고 주차장에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어. 현신은 우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각자 하고 싶은 게 있겠지만 오늘은 조금만 참자. 다 함께 왔으니 다 함께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했어.

 

  “촌스러.”

 

  필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어.

 

  “기왕 왔으면서 넌 대체 왜 그러니?”

 

  잡이 참견을 하는 사이 아이들은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동물원에서 풍겨오는 동물들의 냄새가 맡아졌어. 곱게 물들고 있는 붉은 노을 때문인지 나는 오랜만에 와 보는 놀이공원에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외출을 한 게 4개월 만이었고, 그 때문인지 학교를 다니던 평범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 ……물론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누룽지만 아니라면. 나와 누룽지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그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아서 나중에는 그들의 무례함에 염증이 날 지경이었어.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날이 떠오르고 말았어. 그들의 따가운 시선은 따가운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테지. 따듯한 시선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따듯한 생각뿐일지도 모르겠어, 비너스.

  아이들은 나와는 달리 줄곧 시시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표를 끊고 출입문을 통과하자 모두들 들뜨는 것 같았어. 현신도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어. 원래 학생 같은 느낌이어서인지, 그는 아는 동생들을 데리고 놀러 온 대학생처럼 보였어. 우리는 약속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했어. 다른 건 아무것도 타지 않고, 도라가 만족할 때까지 오로지 롤러코스터만. 그동안 놀이공원을 꽤 들락거렸어도, 그렇게 무한정으로 롤러코스터만 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도라가 질린다는 듯 말했어. 평일 오후인데도 롤러코스터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어. 나는 도라에게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어.

 

  “끈질기게 버티다보면 결국 우리밖에 남지 않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지는 않아.”

 

  우리는 줄의 맨 끄트머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필과 잡은 계속 수다를 떨었지. 현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도라를 달래주느라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어. 나는 이제 누룽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받아들인 터라 그애에게 이런저런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마음껏 웃겨주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외롭고 답답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누룽지와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제법 즐거웠다고. 그리고 누룽지의 굉장한 차림새 역시 그애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누룽지도 세련돼져서 이때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날이 올까? 아니면 누룽지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퍼포먼스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이러한 차림새를 고수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 되어도 굉장한 일이지 않아, 비너스? 사람은 계속 변화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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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 32회 | 비너스에게 2010-09-2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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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맙소사 또 금요일이다. 오맙또 프라이데이. ‘애미’를 들락거린 지 한 달이 되어가니 나도 애들이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알 것 같았어. ‘애미’를 오가다 보면 모든 것이 그곳에 맞춰지게 돼. 바로 어제가 수요일인 것 같은데 또 수요일이 되어 있고 금요일이 엊그제였는데 또다시 금요일 아침이 되어 있거든. 즉 ‘애미’에 가지 않은 다른 날들은 모조리 기억에서 소거되고 있는 셈.

  그래서 나는 또다시 금요일을 맞이하여 ‘애미’에 와 있었고, 필과 잡, 누룽지, 마, 그리고 도라를 만나게 된 거야. 이제 날씨는 제법 쌀쌀해서 마당의 포플러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조금 있으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오맙또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평균 열두 명 정도. 개인사정에 의해 빠지는 아이들도 있고, 그룹 활동을 할 만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아이들은 아예 참가를 시키지 않아. 그러니 나와 함께 움직일 다섯 명은 바깥세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거의 끝난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양나 씨는 우리들의 단체 외출을 많이 염려스러워했고, 그럴 때면 우리의 보호자이자 상담자라는 그녀 본래의 역할이 실감 돼. 현신은 약속대로 ‘애미’에 와 있었어. 그의 무릎에 얌전히 올라가 있는 씨아처럼, 아이들은 그의 주위에 잔뜩 모여 있었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 가슴이 두근거렸어. 제길. 이게 뭐지?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한다고 완전히 인정한 게 아니란 말이다. 대체 내 심장은 왜 이리 방정맞은 거냐!

  양나 씨와 ‘애미’에 남는 아이들은 모두 다섯 명. 그들은 하나와 앨리스를 씻겨준다고 부산을 떨었어. 그애들은 내게 자기소개를 했는데, 부탄(성격이 불같아서), 검댕(눈썹을 보면 왜 그런 닉네임이 붙었는지 절로 알게 됨), 오궁(남자녀석인데, 엉덩이가……), 습자지(이 녀석은 긴장하면 오줌을 지린다는 거야. 그래서 습, 자지, 가 된 거지), 이와이(아하, 바로 이 녀석이 하나와 앨리스의 이름을 붙인 거였어). 그렇게 봐서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통 알 수 없는 평범하고 명랑한 아이들. 그애들 모두 벌어진 틈새에 자기도 모르게 떨어져버린 걸까?

 

  “에버랜드에 가는 거야?”

 

  이와이가 물었어. 작고 통통한 그애는 누가 봐도 귀여운 느낌의 여자아이. 하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넌 알 필요 없어.”

 

  필이 쌀쌀맞게 대답했어.

 

  “우리는 오늘 거기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거야.”

 

  “야, 가르쳐주지 마.”

 

  필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쏘아붙였어.

 

  “그게 뭐 어때서?”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야. 누가 내 희망사항을 알게 되는 건 싫단 말이야.”

 

  “넌 아직 말하지도 않았잖아?”

 

  “어쨌든!”

 

  필은 몹시 예민한 성격인 것 같았고, 다른 아이들은 그애를 잘 아는 모양인지 아예 상관을 하지 않았어. 나는 곤란함을 느끼며 그대로 물러섰어. 그애들과 다투게 되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거든.

 

  “필은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누룽지가 슬그머니 내 곁으로 와 속삭였어. 생각해보면 나는 별로 화를 내본 적이 없어. 누구와도 잘 지내는 게 내 장점이었고 누구에게나 잘 맞출 자신도 있어. 성격이 좋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듣다 보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 건지도 몰라.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게 아무 소용이 없었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여서, 상대가 모난 행동을 보여도 크게 신경 쓰지를 않았어. 그런 만큼 자신도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지. 나는 아이들의 그런 태도가 몹시 낯설었고,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어.

 

  “나는 정말 토마토만 먹었어. 그래서 이제는 ‘토’자만 나와도 토할 지경이야. 그래서 오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내일 토하게 될 거야. 토요일이니까.”

 

  잡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앞으로 토마토케첩도 못 먹을 것 같아.”

 

  마가 불쑥 내뱉었어.

 

  “도라는?”

 

  잡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어.

 

  “내 피부를 봐라. 일주일 내내 토마토만 먹으면 이렇게 피부가 예술이 되는지 누가 알았겠냐?”

 

  확실히 도라의 안색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어. 대체 그전에는 무얼 먹었기에?

 

  “누룽지는 단지 살을 빼려고 이 짓을 했었단 말이야?”

 

  도라가 몸을 부르르 떨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어.

 

  비너스. 여기에서 나는 누룽지의 외모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여자애들의 외모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 일반적으로 예쁜 애를 보면, 물론 나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냥 예쁜 거지, 정말 예쁜 건 아냐. 마찬가지로, 나 역시 추녀를 보면 못생겼다고 생각은 해. 하지만 그냥 못생긴 거지, 정말 못생겼다고 느낀 적은 없어. 그건 여자의 미추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야. 하지만 그런 나도 누룽지의 얼굴은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었어. 우선, 시선을 떼기가 너무 힘들어. 극치의 조화가 사람의 시선을 모으듯, 극치의 부조화도 시선을 모으게 되는 법이거든. 요즘은 ‘원판불변의 법칙’이

깨지는 시대라고들 하지. 하지만 누룽지의 얼굴은 단순히 턱이나 광대를 깎고 콧대를 높이고 눈을 찢는다 해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 물론 일주일 동안 토마토만 먹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 안타깝게도, 누룽지는 목, 어깨, 팔, 다리, 손, 발, 엉덩이, 종아리, 허리 등등 부위별로 떼놓고 봐도 어디 하나 건질 곳이 없었어. 대체 거무죽죽한 피부에 얼룩까지 진 건 무슨 까닭일까?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누룽지의 외모에 대해 이렇듯 시시콜콜 늘어놓은 건 바로 그녀의 굉장한 차림새 때문이야, 비너스.

  누룽지의 눈은 굉장히 커. 하지만 툭 튀어나온 데다 눈 사이의 간격이 마치 벌판처럼 넓게 느껴져. 그 거대한 눈두덩에 새파란 아이섀도를 권투선수에게 제대로 얻어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칠한 데다, 원래 눈썹이 나 있는 자리의 2센티미터 정도 위에 검은 펜슬로 굵은 눈썹을 또 하나 그렸어(아마 눈과 눈썹 사이의 간격이 너무 가깝다고 느꼈나봐). 결이 굵고 거친 머리카락은 여러 번 탈색을 한 상태라 손상이 너무 심해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고. 누룽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짧아서 그애가 굳이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흰색 팬티가 다 보이고 있었어. 게다가, 적어도 12센티는 되어 보이는 통굽 구두에 올라타 있었지. 지난주에는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옷차림도 수수했거든. 놀이공원에 간다고 나름 신경을 쓰고 나온 모양이었어.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쩔쩔맸지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아 했어. 그건 그냥 누룽지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듯,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토마토만 먹어댄 고역에 대해 투덜댈 뿐이었지.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어, 비너스. 아이들의 무덤덤한 태도가 계속되자 나 역시 누룽지의 차림새가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으며, 나중에는 그저 이 즐거운 모임에 대해 한껏 부푼 기대감을 극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던 거야. ……잘 생각해보면,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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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1회 | 비너스에게 2010-09-2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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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틈새

 

 

 

  비너스에게.

  또다시 수요일이 되자 나는 ‘애미’에 갔어. 양나 씨는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를 물었지만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어. 나는 집에서 아무 할 일이 없었고 설사 외출을 하고 싶다 해도 혼자 갈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어. 결국 할 일이라고는 편지를 쓰는 것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상 앞에 붙어앉아 하루 종일 그 일에 매달렸어.

  비너스.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은 그런대로 괜찮아. 나는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 오히려 자신을 잊을 수도 있고,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며 그것에 대해 성찰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너무 열중하다 지쳐 쓰러져 잠을 자고 일어난 뒤, 도무지 몇 시인지 알 수도 없고 며칠인지도 모호해질 때면 나는 정말 뼛속까지 외로워져. 내가 정말 살아 있기는 한 건지, 시간은 정말로 흐르고 있는 건지, 내 곁에 여전히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러면 나는 그대로 뛰쳐나가 영무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 녀석을 붙잡고 엉엉 울기라도 하고 싶어져.

  만일 내가 모든 자제심을 잃고 영무에게 뛰어가는 날이 온다면 차라리 날

총으로 쏴서 죽여줘, 비너스. 나는 아직 괴로운 것보다는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

 

 

 

 

  “소년. 벌어진 틈새를 메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아.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면서 움츠러들기만 하면 안 되는 거야. 틈새는 더욱 벌어질 뿐이고, 결국에는 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밀려나 있는 거지, 하면서 어리둥절하게 되는 거야.”

 

  “예전의 친구들을 찾아가 보라는 건가요?”

 

  “아니야. 누구도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 그런 건 너 스스로 됐다고 생각될 때까지기다려야만 해.”

 

  “영원히 그런 때가 오지 않는다면?”

 

  “영원히 기다리기만 하다 끝나는 거지. 그런 것도 괜찮아. 네가 아무 상관없다면.”

 

  아무 상관없을 리가 있겠어? 만일 이대로 영무를 잃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 것인데.

 

  “아직은……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이 세상에는 회피하기만 하다가 그대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해. 그건 현실에 맞서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인 거야.”

 

  그날은 가을비가 참 예쁘게도 내리고 있었어. 하나와 앨리스가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가로이 풀을 뜯었고 씨아는 나를 피해 양나 씨의 발치에서 잠을 자고 있었어.

 

  “운수와는 어때? 여전한 거야?”

 

  “그렇죠, 뭐.”

 

  “흠…… 운수는 네게 있어 관계의 기초나 마찬가지야. 주춧돌이 비틀어졌는데 기둥이 세워질 리 없지. 너를 이해시키기 위해 네가 가장 노력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네 엄마야.”

 

  “알고 있어요.”

 

  “아니. 넌 잘 몰라. 부모자식 관계는 언제나 당사자들이 가장 모르게 돼 있어. 나도 그랬거든.”

 

  “모두 돌아가셨죠?”

 

  “그래.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그래서 내게는 갑자기 자유와 돈이 생겼지. 난 늘 제멋대로 살아왔지만 그건 언제나 ‘반항’이라든가, ‘일탈’이라는 무게를 지고 있었어. 부모님은 내 성정체성을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하셨거든. 하지만 부모님의 존재가 사라지자 대신 ‘나 자신’이라는, 더욱 무거운 짐이 나를 짓눌렀어. 모든 것을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그 무서운 무게감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거야. 부모란 자식에게 바로 그런 존재야. 존재의 무게감을 덜어내 주는 존재.”

 

  “양나 씨도 못한 일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소년은 미래에 희망을 걸지만 어른은 바로 그 소년에게 희망을 걸지. 그러니까 네가 나의 희망인 셈이야.”

 

  계속해서 비가 내리자 양나 씨는 따끈한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어. 우리는 올리브그린으로 칠해진 아늑한 주방에서 함께 밀가루를 치대고 멸치국물을 만들고 애호박을 썰고 하면서 칼국수를 만들었고, 만들다보니 자꾸만 양이 많아져버려서(어차피 나는 토마토밖에는 먹을 수 없었으므로) 양나 씨는 전화로 현신을 불러냈어. 삼십 분가량 뒤에 현신이 모는 사륜구동 승용차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리자 양나 씨는 한숨을 쉬었어.

 

  “저런 괜찮은 녀석이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아. 얼른 잡아먹었을 텐데 말이야."

 

  “저기…… 그러니까 저, 양나 씨는 도저히 남자하고는……”

 

  “그래. 난 아쉽게도 바이가 아니야. 바이면 얼마나 좋겠니. 남녀 가릴 것 없이 정말 좋은 인간과 사랑할 수 있잖아. 너는?”

 

  “저, 저도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아쉽게 됐네. 너만 한 인물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바이로 태어나줘야 하는데 말이야.”

 

  그때 현신이 들어서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느냐고 물었어. 양나 씨는 내가 정말 잘생기지 않았느냐고 물었고(게이 눈에는 애가 어느 정도인 거야?) 현신은 눈꼬리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히는 눈웃음을 지으며 “성훈이는 상대가 없어 쩔쩔매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라고 했어. 현신에게 그런 칭찬을 듣고 있자니 나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 되었지.

 

  “너무 우쭐대지 마라, 애송아.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닌 것처럼 인기 많다고 좋은 사랑을 하게 되는 건 아니거든.”

 

  양나 씨가 그렇게 놀려댔어도 나는 여전히 좋은 기분이었어. 고운 비가 지붕을 두드리는 편안한 저녁에, 우리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어. 현신과 양나 씨가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칼국수를 먹는 동안, 나는 토마토를 씹으며 군침을 삼켜야 했지. 현신은 양나 씨에게 ‘오맙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어서 칼국수에서 좀체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처량한 내 모습을 오히려 재미있어했어.

 

  “성훈이는 괜찮을 거야.”

 

  “뭐가요?”

 

  현신의 말에 나는 억지로 토마토를 한 입 삼키며 되물었어.

 

  “그냥, 괜찮을 거라고.”

 

  그는 웃으며 그렇게만 말했어.

 

  비너스.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나는 현신이 건네는 말들에서 그가 나를 제대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해. 우리는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거고, 나는 그에 대해, 그는 나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것도 없는데. 그러고 보면 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었고, 그애매모호한 감정이 내 전부를 먹어치우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어. 그래서 결국은 끔찍한 상처를 입고 말았지만, 상대방을 뼛속까지 이해한 뒤에야 시작되는 사랑이라니, 그런 게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냥 사랑에 빠져버리고 나니 자꾸만 바라보게 되고, 자꾸 바라보게 되니 절로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 그래서 많은 부분을 참아주고, 견뎌주고, 끌어안아 주는 게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아닐까?

  비너스. 나는 현신의 부드러운 음성에서 어떤 멜로디를 들을 수 있어. 그건 무척이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우며 순수해서 내 마음을 흔들어. 어쩌면 나는 다시 사랑에 빠지고 있는 건지도 몰라. 참 이상한 일이야.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것은. 만일 내가 현신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면 아마도 군에 대한 사랑과는 완전히 다를 거야.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거고,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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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30회 | 비너스에게 2010-09-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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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를 게 뭐가 있어? 보아하니 너희들 중,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평일 야간개장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고, 다 같이 가는 거니까 뻘쭘하지도 않을 거고, 무엇보다 위험하지가 않잖아. 합법적인 오락이니까.”

 

“롤러코스터의 벨트가 고장 나면 죽을 수도 있어.”

 

“네가 이번에 또 대마초를 피우다 걸리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

 

도라는 입을 다물고는 다시 의자에 기댔어.

 

“그래도, 그렇게 맛있는 치킨은 절대 못 먹어.”

 

“저기 말이야.”

 

누룽지가 조심스레 손을 들며 말했어.

 

“나도 그렇게 맛있는 치킨을 먹어본 적이 있어.”

 

“치킨회사 광고는 광고지에 하십시오, 사장님.”

 

도라가 빈정거렸어.

 

“그런 게 아니라, 다이어트를 하느라고 일주일 동안 토마토만 먹은 적이 있었거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치킨을 시켜먹었는데, 난 아직도 그 맛이 잊히지가 않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맛이었다고.”

 

“그거 그럴듯하네.”

 

마가 배꼽을 잡고 웃으며 말했어.

 

“그만두자, 그만둬.”

 

도라가 툴툴거렸어.

 

“아니? 그거 꽤 괜찮은 얘기잖아? 도라, 잘 생각해봐. 어두운 구석에서 꽁초 빠는 재미도 좋겠지만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놀이공원에 몰려가서 노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다고.”

 

“넌 그래본 적이라도 있는 거냐?”

 

“당연하지. 설마 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거야?”

 

도라는 기회가 없었다고 중얼거렸고, 다른 아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애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어. 비너스. 그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어. 내게 뭔가 끔찍한 문제라도 있는 양 취급을 받다, 갑자기 가장 정상적인 존재가 돼버리는 것 말이야.

 

“내가 장담할게. 야간개장은 정말 한번 가볼 만해. 불꽃도 터뜨리고, 놀이기구들도 전구를 달아서 반짝반짝 빛나. 얼마나 예쁜데. 특히 롤러코스터를 타면 그게 한눈에 내려다보이거든.”

 

아이들은 모두 도라를 쳐다보았어. 도라는 의자를 흔들면서 망설이고 있었지.

 

“좋아, 뭐, 한번 해본다고 손해날 건 없겠지.”

 

마침내 도라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어.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대마초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절대로.”

 

우리는 양나 씨가 주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쿠키를 산더미처럼 구워가지고 나올 때까지 다음주 ‘오맙또’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토론을 했어.

 

“다음 주까지 우리는 철저하게 토마토만 먹어야 해. 제일 중요한 건 바로 너야, 도라. 설마 우리만 질리도록 토마토 먹게 하고 너는 온갖 것 다 찾아먹은 뒤 치킨이 맛이 있네, 없네, 그러는 건 아니겠지?”

 

잡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어.

 

“넌 왜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냐? 설마 내가 그런 치사한 짓을 하겠어?”

 

“뭐,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어렵더라도 참아보자고. 누가 알겠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죽여주는 치킨을 먹을 수 있게 될지.”

 

다시 헤드폰을 끼며 마가 말했어.

 

 

양나 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나를 보티첼리의 그림이 걸려 있는 상담실로 데려갔어. 씨아는 밖의 소란을 피해 상담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지. 나는 양나 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우리의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어. 뜻밖에도 양나 씨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어. 나는 그녀가 반은 장난으로 받아넘길 줄 알았으므로 조금 놀라고 말았어.

 

“괜찮은 생각이야, 소년. 하지만 생각보다 힘이 들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때 너나 다른 아이들이 심각하게 좌절하거나 실망하게 되는 건 전혀 괜찮지 않지.”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닌데요. 그저 이런 식으로 현실 가능한 소소한 일들을……”

 

나는 양나 씨의 표정을 보면서 입 속으로 말을 삼켰어.

 

“소년. 네 사소한 소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었지? 여기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잠시 피할 수 있는 대피소 같은 곳이야. 답답하다고 지붕을 걷어내면 어떻게 되겠어.”

 

“……반대하시는 건가요?”

 

양나 씨는 깊은 생각에 잠겼고 나는 묵묵히 기다렸어.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함께 결정을 했다니 이번 일은 허락할게. 단, 참가하는 인원은 애초에 이 일을 결정한 너희 여섯 명에 한해서야. 너는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받아들인 거였으니 만일 뜻하는 대로 잘되어간다면 따로 수고비를 지불해주마. 네게 돈이 필요하다는 건 원하는 게 생겼다는 뜻이겠지? 그러니까 상황을 봐가면서 계속 의논하자.”

 

“고맙습니다.”

 

“처음이니까, 믿을 만한 인솔자를 한 명 붙이겠어. 나는 다른 아이들과 있어야 하니 안 되고, 현신에게 부탁할게. 괜찮겠지?”

 

“네, 그럼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양나 씨가 날 부드럽게 불렀지.

 

“비너스에게 편지는 잘 쓰고 있니?”

 

“네.”

 

“그녀가 너를 잘 이해해주고 있어?”

 

“아마도. 우리는 아주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그거 좋구나. 정말 좋아.”

 

양나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는 그녀의 걱정으로 인해 무거웠던 마음이 다시 가벼워지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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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관련 업데이트 일정 알려 드립니다 ^^ | ┌ 공지 2010-09-17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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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YES 24 블로그 관리자입니다.

 

'비너스에게'에 보내주시는 많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추석 연휴입니다. 21일(화), 22(수), 24일(목)은 숨가쁘게 달려가던 연재 소설이 휴식을 취합니다 ^^

 

20일(월)과 24일(금)은 끊임없는 이야기의 사슬이 재밌게 이어질 예정이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덧. 연휴 중에 스토리의 흐름을 잠시 놓쳤다면, '비너스에게'를 다시 읽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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