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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재리뷰(만화)
우유부단했던 인조의 치세를 들여다보다! | 여중재리뷰(만화) 2023-09-0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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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0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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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에 사로잡혀 병란을 부르다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조선의 16대 왕으로 재위했던 인조실록에 해당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을 의식해 집권 내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에서는 바른 것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칭하지만, 광해군과 그의 아들인 세자까지 장성한 상태에서 쿠데타로 등극했다는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멸망해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실시했기에,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청나라와의 대립으로 두 차례에 걸쳐 그들의 침략을 초래하기도 했다. 결국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병자호란(1636)이 발생하자,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다가 한강변의 삼전도에서 항목 의식을 해야만 했던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는 점이 정통성의 한계로 지적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청나라와 우호적이었던 광해군을 신하들의 거센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명분을 중시하던 명나라에서조차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즉위한 지 22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써야만 했고,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행패를 온전히 견뎌야만 했다고 한다. 명나라에 기댄 이러한 처신으로 인해 청나라의 견제에 이은 침략을 초래했고,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고구두(三排九叩頭)’의 예를 시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이전에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부원수 이괄(李适)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려 하자,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피신해야만 했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인조 치세에는 이괄의 난’(1624)이라는 내우(內憂)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등 두 차례나 청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외환(外患)이 이어졌다. 인조의 항복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맞서는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이들과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질로 가있던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그들이 발달된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무능한 인조에 의해서 소현세자가 살해되었다는 추정으로 이어졌고, 소현세자의 비와 그 아들들까지 유배되었다가 죽음으로써 그러한 추론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고, 164926년의 재위를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역시 즉위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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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치세와 외교정책에 대해서 생각하다! | 여중재리뷰(만화) 2023-08-1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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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0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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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에서 아직까지 그 평가가 극으로 갈린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대 임금인 광해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재위 15년 만에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에 처해졌고, 연산군과 더불어 ()’()’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에 사용했던 광해군이라는 호칭으로 기억되고 있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쿠데타에 다름이 아니라고 하겠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것을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라 칭하며, 그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복동생인 세자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나,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 영월로 유배를 보내고 등극한 세조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내세운 것은 그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광해군의 정치적 행위를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권력의 속성으로 보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울러 쿠데타 세력들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이었기에, 광해군에게 배은망덕이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로부터 이미 망한 명나라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른바 친명배청의 북벌론이 판을 치게 된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면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공격해야한다는 명분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주장한 이들은 말만 떠들었지, 국력을 키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청나라의 침략을 초래하여 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한강 가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절차를 밟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고자 했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재평가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광해군이 당대의 국제 정세를 적절히 파악하여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다는 점이 재평가의 초점이라고 하겠다. 우리 근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실상 쿠데타의 명분은 그 주도 세력들에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질 뿐이다. 임진왜란의 현장을 누비며 국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세자 시절의 광해군의 업적을 무사히고, 뒤늦게 새장가를 들어 왕자(영창대군)을 낳아 그에게 세자 자리를 넘기려고 했던 선조도 그 원조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병이 깊어진 선조는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으로서 광해군을 옹립한 북인 세력들에게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욱이 장자임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친형 임해군은 광해군을 비방하였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들 역시 틈만 나면 왕권에 도전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의 배후에는 인목대비와 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버티고 있었다. 서양갑을 비롯한 서자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고 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 역시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식과 아비를 한꺼번에 잃은 인목대비는 사사건건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었고, 결국 서궁에 유폐되는 신세에 처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왈실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승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만약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내쫓기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들은 태종이나 세조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 권력 투쟁을 위한 에피소드의 하나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쿠데타의 명분이 상황에 꿰어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청나라의 침입에 맞서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했지만, 당시 파견되었던 강홍립은 싸우는 체하다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에도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청나라의 동정을 계속해서 보고했고, 이에 따라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분론에 사로잡혔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것을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칭하며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쿠데타로 이해 인조가 즉위하면서 청나라의 침략으로 정묘호란(1636)이 발생하였고,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이 적절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고독한 중립 외교로 칭했고, 나아가 명분론에 휩쌓인 조정 대신들 틈에서 고군분투했던 광해군의 처지를 모래 위의 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 결과 광해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일부 대신들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무능한 인조가 즉위(1623)하였다. 쿠데타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몇 차례 유베지를 옮긴 후에, 귀양살이 19년 만인 1641년에 제주도에서 생을 마쳤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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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과 임진왜란으로 대표되는 선조의 치세를 정리하다! | 여중재리뷰(만화) 2023-08-0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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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07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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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두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명종을 이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명종이 공식적으로 지명한 바는 없으나, 실록등 각종 기록에는 평소에 그를 가까이 대하며 내심 후계자감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선조는 선왕의 적자가 아닌 방계(傍系)의 위치에서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적장자 왕위 계승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원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이 원칙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이는 1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무력을 과시하며 형을 왕위에서 내리고 등극한 태종과 셋째임에도 왕으로 등극한 세종이 이 원칙에 벗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와 반정이라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물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경우도 적장자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1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선조는 즉위 초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첨정과 대신들의 도움으로 받았으나, 인순왕후가 수렴점정을 거두겠다고 공포한 17세부터 친정을 펼칠 수 있었다. 선조의 치세는 이전까지 정치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양상을 펼쳤다면, 훈구파가 몰락하고 본격적인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되는 시기이다. 몇 차례의 사화로 인해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을 사면하고, 귀양을 갔거나 고향에 돌아갔던 사림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명실공히 사람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제세력이 없는 권력은 분열을 자초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듯이, 사림들은 이내 동인과 서인 그리고 다시 남인과 북인 등으로 분열하여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당쟁의 폐해는 그대로 우리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는데, 일본에 의해 무력 침략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인진왜란(1592)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풍신수길에 의해 분열되었던 일본 열도가 통일되었고, 일본 국내 세력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중국대룍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조선에 대륙의 명나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이른바 정명가도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에서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눈치 채고 1590(선조23)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통신사로 파견된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도 이처럼 당파에 따라 다르게 반응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7년 동안 조선의 국토는 전쟁의 현장으로 변했고, 무능하기만 했던 왕과 관리들은 그저 전란을 피해 도망가기에 바빴다. 하지만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더욱이 일본이 강점으로 여겼던 해전(海戰)에서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오랫동안의 전란이 종결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래서 저자 역시 이 시기의 특징을 조선에 이순신이 있었다라는 소제목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주지하듯이 중국으로 망명을 불사할 생각을 했던 선조와 달리, 왕자인 광해군은 일본군과 싸워 적지 않은 공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활약을 토대로 후에 선조의 뒤를 이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그 결과 사림들의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고, 선조를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조정의 권력 다툼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하겠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대처하도록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어린 왕비를 들여 태어난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했지만, 당시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자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선조의 움직임은 그대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반영되어 극심한 정국의 혼란으로 나타났고, 결국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이 죽음에 처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저자 역시 선조의 치세를 평가하면서 소항목의 제목으로 후안무치 선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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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 시대의 역사를 조명하다! | 여중재리뷰(만화) 2023-07-19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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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9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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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짧았던 인물은 인종이며, 더욱이 그의 어머니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직후 세상을 떠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야만 했다. 중종 재위 기간 동안 세자의 위치를 위협하는 움직임이 있는 등 왕위 승계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기도 해, 세자 시절부터 평탄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경빈의 계략이 발각되어 몰락하자, 후에 명종의 생모가 되는 문정왕후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세자가 자고 있던 건물에 화재가 나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는 등의 위기는 이후에도 발생하였고, 부친인 중종이 재위 4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제12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오랜 기간 세자 수업을 받으며 선정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결국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시달리다가,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뜻을 밝히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명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인해, 명종 역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정왕후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문종은 어머니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 역시 이 시기를 문정왕후의 시대, 척신의 시대라는 부제로 소개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다룬 사극에서 이 시기를 흔히 여인천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인종 시절부터 왕실의 외척인 윤씨들이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으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들이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대윤으로 일컬어지던 세력을 축출한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하지만, 흔히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들이 축출당했던 여타의 사화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을사사화로 인해 소윤들의 권력이 공고화되면서, 기세를 탄 문정왕후는 자신의 권세를 다욱 막강하게 펼치게 된다. 문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소윤들의 행위는 지탄을 받았고, 전라도 남서 해안에 왜구들이 침략해 분탕질을 일삼던 을묘왜변(1555)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맞서 황해도에서 백정 출신인 임꺽정 세력이 들고 일어나는 등이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어머니의 그늘에 있었던 문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1565(문종 20)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세자마저 1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명종마저 친정을 펼친 지 2년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조카인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바로 선조이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면 조선 초기부터 권세를 누리던 훈구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성리학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던 사림파(士林派)들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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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다! | 여중재리뷰(만화) 2023-06-0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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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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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 200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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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왕위에 물러나면서, 갑작스럽게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었던 왕이 바로 중종(中宗)이다. 연산군의 모친인 윤씨가 폐서인되어 왕비에서 축출된 후,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나 진성대군이라고 칭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연산군과는 이복형제이며, 실제 연산군 재위 시에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할 정도라고 하겠다. 아마도 연산군과 배다른 형제이고 조금이라도 특별한 행적을 보이면, 곧바로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기에 그만큼 조심스럽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말기의 폭정으로 인해 축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쿠데타를 일으켰던 신하들은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혼란스러운 정치를 바르게 돌린다는 의미로 중종반정이라 칭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인물이 신하들에 의해 등극했기 때문에, 집권 초기에 중종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추대한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을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거사에 찬성 의견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개나 소나 공신으로 책봉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제 반정의 공신록에 올랐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연산군 시절 총애를 받았으며, 정작 소수의 연산군 측근들에게만 정치적 책임을 지웠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신하들에 의해 명분없는 쿠데타가 자행되었기에 당시의 반정 주역들도 또 다른 반정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신하들의 쿠데타로 인해 왕위에 등극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기에, 중종의 치세 기간은 권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유부단함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세력인 사림을 적극적으로 양성했으나, 그들을 대표하는 조광조의 강력한 개혁 정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축출시켜 개혁이 좌초되었던 사실이 중종 치세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전개되었던 조광조의 개혁이 왕권에 도전한다고 여겼던 중종은 마침내 기묘사화’(1519)를 통해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아마도 중종은 조강조의 개혁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 그저 두고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후 남곤과 김안로 등의 권신들에 의해 조정 권력이 장악되었고, 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던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의 세자를 둘러싼 알력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록을 통해서 드러난 중종의 치세를 저자 역시 무력한 세월이라는 타이틀로 정리하고 있으며. 실제 중종 치세를 일관된 정책보다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려 했던 시대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중종의 이러한 성격은 신하들의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으로 인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 역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인자하다는 호평과 더불어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비판적 견해도 공존하고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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