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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기억에 남을 작품집이다! | 소설,시 2023-12-0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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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설 보다 : 겨울 2023

김기태,성해나,예소연 저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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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바뀜과 더불어 찾아오는 소설보다를 읽어왔던 중 세 작품 모두를 홀린 듯 읽었던 기억이 없다. 이번 2023겨울 호에 수록된 김기태 작가와 예소연 작가는 시간상 그리 멀지 않은 2023 봄 호(예소연,사랑과 결함)와 여름 호(김기태,롤링 썬더 러브)에 이은 만남이어서인지 마치 잘 아는 작가의 작품을 만난 기분이었다. 특히 김기태 작가의 체제 내적 언어인 보편이라는 단어와 교양이라는 수상쩍은 단어가 결합한 보편교양은 그 익숙한 문제의식으로 생각의 친근성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성해나 작가의 진실과 거짓이라는 흔해빠진 언어를 피해 진짜와 가짜라는 낡아 버려진 듯한 단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다시금 생각이란 것을 하도록 이끈 혼모노는 관통하는 주제 이전에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졌다.

 

예소연 작가의 우리는 계절마다는 연작으로 기획된 작품인 듯한데, 이 작품에 앞서 현대문학6월호에 발표된 아주 사소한 시절에 이은 성장소설의 한 부분으로 계획된 작품으로 알게 되었다. 억압된 진심, 애증의 감정을 그려냈던 단편 사랑과 결함은 내게 무섭게 돌진하던 로봇 청소기를 안아들던 화자의 행위로 뭉클했던 감각을 지금도 얼얼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예소연 작가의 작품에 대해 나만의 어떤 고정된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데, 타인의 영향력에 대해 냉엄하게 선을 긋고 돌아서지 못하는 여린 마음의 인물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우리는 계절마다의 주인공인 중학교 2학년 희조 또한 또래와 가족 등 주변의 타인들은 물론 이 세계라는 불가해한 힘에 의해 휘말리는,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억압이나 연결의 고리로 묶는 힘과 같은 타자의 탓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존재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내적 단단함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초등학교 친구였던 미정과의 재회가 의미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이 역시 애증(愛憎)이라는 양가감정과 다르지 않은 성분의 것처럼 여겨진다. 아마 소설의 문장을 인용한다면 그 이상한 낙차, 불가해한 타자의 힘과 벌어진 간극이 발산하는 나와의 견디기 힘든 그 무엇일 것이다.

 

성해나 작가의 작품은 내 기억으로는 이 작품 혼모노가 처음인 듯하다. 박수무당인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얼마나 꼼꼼하게 이 인물의 세계를 관찰했는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어느 날 그의 내림 신이었던 장수할멈이 일언의 예고도 없이   빠져나가 신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앞집에 앳된 신애기와 그 가족이 이사 옴으로써 삼십년 넘는 무당으로서의 삶이 가짜가 된 듯한 번민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이 진짜임을 입증하려는 몸부림의 여정으로 읽힌다.

 

신애기가 이사 오던 날 그 아이는 살기어린 눈으로 문수를 바라보며 중얼댄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아마 이 소설의 이야기 여정자체를 읽는 재미도 가득하지만, 진짜와 가짜, 가짜와 진짜가 뒤얽혀 무엇이 진짜인지 혼돈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지막 굿 장면의 박수무당의 붉게 젖어든 장삼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이미지는 흉내만 내며 살아 온 인생에 대한 애틋하고 강렬한 삶의 증명을 위한 몸짓이 내재되어 뭉클한 무엇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작품 제목을 혼모노(本物)’로 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진짜배기 또는 진정한 영혼과 같은 긍정의 뜻을 지닌 혼모노라는 단어가 진짜 의미를 잃어버리고 가짜나 오타쿠같은 변질된 의미가 되어, 마치 이 변질된 가짜가 진실처럼 되어버리는 지금의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하고 있다. 다수 혹은 내가 믿으면 그것이 진짜의미로 둔갑하는 세계의 맹목이 판치는 세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가짜가 되어버린 문수의 이 마지막 외침은 가짜인 진짜의 소리로 와 닿는다. 짧은 단편에 세대의 관점과 욕망에서부터 이 시대를 장악한 거짓 진실의 이야기까지 여러 주제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에 탄탄하게 결합되어 몰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아주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김기태 작가의 보편 교양은 고 3생 자유선택 과목을 맡게 된 교사 곽의 시선을 통해 보편적 가치란 것이 과연 합의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가치의 공유를 위해 개인성의 침해는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의 과정을 담고 있다 하겠다. 요즘 고등학교에 새롭게 도입된 자주적 학습 선택권의 일환으로 개설된 선택과목에 얽힌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인식을 양분(養分)으로 보편성과 교양이란 언어의 윤리적 이성과 도덕적 판단력의 한계를 생각토록 한다. 교사 곽은 처음 개설된 고전 읽기과목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나름 강의의 내용을 구성할 고전작품을 고심하여 선정하고, 강의 준비물을 열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선택과목의 현실은 타 선택과목에 비해 수월한 이수과목일 뿐이며, 아이들은 책상에 머리를 대고 잠에 빠지거나 타 학과 공부를 노골적으로 펼치는 공간으로 이용될 수단이다. 실제 다섯 명 남짓의 아이들만 선생의 강의에 관심을 보인다. 곽은 이 아이들을 위해서 강의를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장이 호출하여 학부모로부터 아이가 자본론을 읽고 있으니 걱정스럽다는 교양(?)’있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교장의 말은 한마디로 전교조 교사가 수업시간에 지본론을 읽혀 빨갱이를 만들고 있다고 소문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곽이 상기하고 있는 보편적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을 형성하며 [...]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고, 읽은 것은 물론 말하기와 글쓰기 등 통합적인....“ 운운하는 선택과목 개설의 취지부터 사실 모순의 언어로 가득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제도 교육, 기성의 질서체제가 요구하는 지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며, 문제해결과 같은 판단력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배반적인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하나일 것이다.

 

학부모의 의혹은 그 집 아이의 학업컨설턴트의 말로 유야무야 되어버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아이는 곽의 표현으로 과제 자체의 의의를 스스로 판단하고 주장하고 설득할 줄 아는 것, 다른 말로 무언가를 읽었고, 의견을 생성했으며, 설득력 있게 표현해 낸. 곽은 아이의 수행평가 난에 이렇게 최고의 평가내용을 기재해주고, 아이는 서울대 일반전형에 합격한다. 이에 선생들은 곽에게 비아냥조의 말들을 건네는 데, 이제 애들 다 공산당선언읽히고, 머리에 빨간 띠도 매줘야 하는 거 아냐?“, 아무튼 이런 현실을 읽게 되면 교사들조차 이렇게 천박하다면 이 사회의 윤리적 건강성은 말해 무엇 할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작품은 이 천하고 편협한 현실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현실 사회 속에서 보편성이란 것이 대체 합의 될 수 있는 것인가의 회의적 물음이고, 이러한 가치가 어떻게 교양이란 것으로 묶일 수 있는가의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사회에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작가는 작품 인터뷰에서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진정성만 조각하는 것이 무슨 힘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작품 속 교사 곽의 고뇌에 놓인 자기 인식의 발전에 침을 한 방 놓는데, 강의 시간에 선생의 시야에서 배제된 대다수의 방치된 학생들에 대한 숙고가 없다는 점에서 분명 보편성이란 것이 고작 제도 내 유연한 적응자만을 위한 것임에 불과한 것으로 그치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독자인 나와 멈춰진 질문,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할 같다. 머리를 싸매고 이 문제를 타개하지 못하는 이상, 어쩌면 이 사회 교육의 미래는 혼돈의 양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답답한 지점에 이른다.

 

사실 현실 교육에 놓인 과제로서의 보편과 교양의 어려움은 성인 사회라고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교육에서 굳어진 개념의 오류는 사회로 이어져 편협과 왜곡, 그리고 갈등이라는 이것들의 연장이다. 지금 현실의 세계를 보면서 이를 보지 못한다면 아마 그것이야말로 맹목(盲目)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무튼 이번 소설보다겨울 판의 세 작품 모두 탁월한 이야기 구성과 더불어 그 재미를 넘어서는 주제들이 내 정신이 양분으로 삼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얄팍한 지성에 사유를 재촉했다. 모처럼 흥미로운 생각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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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體反正 - 하찮디 하찮은 것의 진정함! | 에세이,평론 2023-12-0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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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낭송 이옥

이옥 저/채운 역
북드라망 |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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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정조시대 이옥(李鈺,1760~1815)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수일 전 독서에서 주석에 설명된 스치듯 출처에 표기된 이름으로부터였다. 아마 서울의 이름난 가객(歌客) 송실솔(??;귀뚜라미)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 글 주제의 중심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임에도, 작가의 이름만은 뚜렷이 남아 그를 찾아보게 했다. 주류 문필가가 아니었던 고로 연암과 같이 주목받는 이가 아니었던 까닭일 것이다. 게다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시범 케이스가 되어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충군과 정거라는 이중의 처벌을 받아 10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내 시선을 끌어당긴 요인이었을 것이다. 문체반정이란 정조의 일종의 사상통제 프로젝트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삿된 생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 했지만, 사대주의에 터 잡은 사상의 획일화를 옥죄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1790년 중광시에 합격하여 1792년부터 1795년까지 대과를 위해 성균관에 기숙하며, 급제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정조는 무개념(無槪念) 문체를 계속 지적하며 불합격시켰다. 이옥은 왕이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문체를 고집했는데, 그에게는 신개념(新槪念)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그에게만 가혹하다할 정도로 혹독한 벌을 내렸다. 이옥은 1799년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무관(無官)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고 잊혀졌다.

 

정조가 치명적 단점으로 지적한 것은 음조가 슬프고 빠르고 가볍고 들떠 있으며, 우주의 이치, 우국의 정과 성인의 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찮디 하찮은 것들에 대한 하찮은 쓰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이옥의 글맛이라는 점에 아이러니가 있다. 이 책 낭송 이옥은 이옥의 사후에 그의 벗 김려(金?)가 글을 모아 문집에 실어 전해진 것으로, 이옥전집에 수록된 글 중 일부 발췌된 것이다. 사실 내 관심은 문체반정에 향해 있었기에 이옥이 분명 어떤 형식으로든 항변하는 글을 남겼으리라는 기대였으며, 그것을 보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기대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은 다섯 성격의 글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독서(讀書), 다정다감의 정(), 마음의 풍경, 미물의 관찰에서 비롯된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타자들의 이야기이다. 다섯 장 41편의 이야기들 어느 한 편의 이야기도 서투르게 읽을 것이 없는 꼼꼼하게 다져진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이 웅대한 삶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폄하하는 자들의 말은 벌레와 꽃, 거리 장사치나 건달, 사랑에 울고 아파하는 여인네들, 저마다 사연을 품고 신산한 삶을 살아내는 민초들에 세심한 눈길과 귀 기울인 이옥의 살아 숨 쉬는 글에 비해 오히려 하찮은 헛소리가 되고 만다.

 

이옥은 취하듯 읽고 토하듯 쓴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글을 모아 묵토향(墨吐香)이라 이름 지었다며, 위장에서 술이 넘쳐 위쪽으로 올라와 용솟음쳐 목구멍에서 토하게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왜 쓰냐는 물음에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쓰고 있지만, 조정(朝廷)의 이해관계, 벼슬길, 지방관의 잘잘못, 재물과 이익, 여색등 칠불언(七不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에, 자신은 새를 이야기하고 물고기를 이야기하고 짐승을 이야기 하며, 벌레를, 꽃을, 곡식을 채소를, 과일을, 풀을 이야기한다.“고 쓰고 있다. 그 잘난 중국사상과 중국말을 고집하는 너희들이 하는 대상은 나는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왕과 사대부 지배계급이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는 것들에 대해 쓰겠다는 저항으로서의 글을 쓰겠다는 다짐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천지만물로부터의 깨달음이라는 책의 3장에 수록된 글은 이와같은 이옥의 미물(자연)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세밀하고 예리하게 벼려져 세상을 통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절창들이라 할 것이다. 벼룩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경금자(이옥의 별명)와 벼룩도사의 은유를 통해 자성(自省)과 하찮은 이익을 쫓다 참 된 것을 잃어버리는 권력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흐르고, 가라지(잡초)로부터 얻은 세 가지 깨달음의 변에서는 한나라 동탁과 송나라 왕안석을 비유하며 그 삿된 것들의 뿌리뽑기의 어려움과 해악을 하찮다는 자연물에서 끌어낸다. 한편으로 목화꽃이 무명옷이 되기까지의 그 고된 과정들을 비추며 곤궁한 민초들의 노고와 삶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어쨌든 이옥의 글쓰기는 그가 벌레를 대상으로 이야기했든, 잡초를 이야기했든, 그것은 자기 욕망의 해독과 보잘 것 현실을 통해 삶의 여실함을 세상에, 특히 지배계급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 나는 읽는다. 특히, 1나는 읽고 나는 쓴다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문체반정에 대한 직접적인 항변으로 읽히는데, 그대의 이언(민간의 속된 말)은 무엇 때문에 지은 것인가?”라는 그의 글에 대한 위협과 비난의 물음에 답변하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재자가 한 것이라 말문을 열면서, 짓는 자가 어찌 감히 짓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천지만물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가 다시 나온 것이 자신의 글이며, 이는 짓도록 만든 자가 짓는 자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 바로 천지만물이라고 답한다. 이 비유로 나비와 국화꽃 이야기를 하는데, 지나가던 나비가 국화꽃에 매화, 모란꽃, 자두꽃의 형형색색의 빛깔을 띠지 않고 하필 노랑이냐고 비아냥거리자, 국화꽃은 때가 그러한 것이니 내가 때를 어쩌겠느냐고 쏘아댄다. 그리곤 그대는 어찌 내게 나비처럼 묻는 것인가?“라며, 정조를 향해 한 방 날리는 것만 같다. 세상을 봐라, 그리고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라. 라고 꾸짖는 듯하다. 어찌 네 잣대로 다른 삶을 측정하려느냐고, 그건 전혀 잘못된 측정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또한 그의 글에 여인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에 대해, 분바르고 연지 찍고 치마입은 여자의 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예가 아니기에 말하지 말라 했거늘, 이옥 너의 이언은 이 같은 것 아니냐고 추궁한다. 이옥은 바로 굴복하여 그것을 태워주십시오. 라고 말하곤, 감히 여쭙는다. 그렇다면 고매한 시전(詩傳)이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 그가 몰라서 물었겠는가? 당연히 경전이라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이옥은 지은이, 누가 골라 책을 지었는지, 그 대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효용은 또한 무엇인지 묻는다. 마지막에 말한 바는 무엇이냐고 묻고는 대다수가 여자의 일이라는 답을 얻는다.

 

세상의 가장 참된 것이 남녀의 정을 살피는 것임을 삶의 일상으로부터 건져 올려 논리적 설득에 이르고, 천도(天道)의 자연적 이치에 대한 논증은 무개념이나 하찮디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진실한 일이라는 것, 바로 신개념의 문체임을 보란 듯 설파하는 당당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그가 본래 명칭대로 쓰지 않고 망령되게 제멋대로 토속이름을 따라 문자로 표현하였다는 추궁에 또한 답하고 있는데, 집을 악양루니 취옹정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백성의 삶과 괴리된 표현인지 지적한다.

 

정조가 보기에 석()을 돗자리로, 등경(燈?)을 기름등잔으로, ()을 붓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반고씨가 천자가 되어서부터 칙명으로 내린 이름이 아니거늘, 마땅히 저들이 칭하는 것으로 이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옥은 이를 실제 삶에서 오는 소통 불능사태들을 예시한다. 현령이 아전에게 법유를 사오라 했더니 없다고 사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체를 주제넘고 괴팍하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현실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감상을 끝내기 전에 <가을 타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라는 2내 마음의 풍경들에 수록된 한 편의 글을 빼놓기에는 너무 아까워 간략하게 더해본다.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선비다라는 이옥의 말에 대한 또 하나의 추궁이다. 그는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식견은 애상을 분별하기에 충분하고, 마음은 사물에 잘 감응하고, 고서를 읽으며, 고요히 그것을 살피며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선비들 말고 누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이야기다.

 

천지의 기미와 천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이니 서리 내리는 가을을 슬퍼할 수 있는 자는 선비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이옥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시선이 잘난 양반들의 몽매성에 한 방 갈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당대 선비, 지배층은 이옥의 통찰에 대항할 산지식이 없었을 것이다. 정조가 유독 이옥에게 잔인하게 대한 것은 아마도 그의 앎에 대한 시기와 질시가 아니었을까? 천지만물에 대한 17세기 인물의 생생하고 꼼꼼한 시선과 언어에 매료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문체반정으로 인한 한 사람에 대한 비극이 오히려 독보적인 글을 후대에 남기도록 작용했으니 죄송한 말이지만 다행이라 하고 싶을 정도이다. 사상 통제에 대항해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귀한 정신에 절로 겸허해진다. 시대를 앞서갔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양 마음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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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공을 넘나들며 진실의 순간을 상상한다 | 소설,시 2023-12-0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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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고전환담

윤채근 저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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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본디 크나큰 이야기인 셈 아닌가요? 그 이야기가 덧없이 끝나버릴까 두려워 잠들지 못한답니다. 혹은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질까 불안하여 밤을 지키는 초병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 나는 거지로소이다, 81쪽에서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순간을 되돌려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상황을 전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괜한 짓거리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역사의 주변부로 처리되어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익명의 존재들이 겪어내야 했던 삶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결실을 맺어주고, 실패한 사건을 성취시키며, 사건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주인공이 되어 봄으로써 역사와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혹독함, 안타까움, 무력함에 들러붙었던 것들, 혹은 유무형의 높이 세워진 인위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선한 세계를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현실과 괴리된 망상으로 그치진 않을 것이다. 한문학 교수인 윤채근은 실록과 여타 역사기록물들, 조선조 소설과 민담 등을 상호연결해보고,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시대의 관념으로 상상력을 지펴내어 생생하고 흥미 넘치는 28편의 매혹적 이야기를 탄생시켜 놓았다.

 

책은 커다란 주제의식을 기반으로 전쟁과 혁명, 현장의 미스터리, 시간을 초월한 사랑,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국가의 창업과 흥망의 현장으로, 사건의 현장에서 번뇌하는 인간 존재의 일촉즉발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시공을 초월한 이동 속에서 정서적 충격과 공감을 오가며 새로운 상상의 길을 펼쳐놓는다. 하나의 가공된 이야기마다 그 이야기의 근거가 된 사료와 기록들을 제시하며, 허구화되거나 재해석된 부분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작가적 상상의 구성 속에서 독자는 진실을 추정해보고 그러해야 할 세계의 당위를 생각해 보도록 돕는 역사와 문헌에 대한 간결한 안내 글은 새로운 독서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개인 원찰 혼()묘지 보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이순신의 서명과 낙관까지 갖춘 육필 칠언시에서 비롯된 왜장(倭壯) 와키자카의 목소리를 통해 구술되는 적장에 대한 경외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전쟁과 혁명의 이야기들은 북방의 드넓은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과 그 기원을 알리는 신화가 되어 살육의 덫에 갇힌 전쟁의 수레바퀴 속 연약한 한 인간을 생각게 하기도 한다. 그리곤 1456년 찬탈한 왕위의 부도덕함을 시정하려는 숨 가쁜 반정(反政)모의 사건이 실패하는 시간 속에 내려놓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거사를 미뤄선 안 됩니다. 미루려는 자가 배신자이니 그 자를 먼저 베십시오.(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33) 단종의 유모이자 반정모의의 숨은 역할자인 봉보부인 이씨가 단종의 이모부인 형조정랑 윤영손에게 거사 전에 당부하는 말이다.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갑자기 운검이 폐지되고 거사가 중지되었다. 성삼문인가? 신숙주인가? 누가 배신자인가? 거사는 중지되고 이튿날 성균관 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성승, 유응부, 권자신, 윤영손 등은 척살되었다. 정의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들은 누구일까? 왜 역사의 이 순간을 육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들은 복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실록(實錄)과 남효온의 六臣傳에 근거하여 허구적으로 재구성된 이 날의 이야기에서 발견되어야 할 진실이란 무엇일까? 를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도적? 누가 도적이냐? 백성들의 주린 배도 못 채워주는 임금이 진짜 도적 아니냐?

이 나라를 누가 세웠더냐? [...] 임금은 백성이 필요한 때 만드는 거다.” 

 - 우리들의 위험한 이웃, 51쪽에서

 

동인은 동쪽 문으로, 서인은 서쪽 문으로, 관복의 복색조차 달리하며 입조하던 양반무리들의 당파 싸움은 당대 정치가 백성의 삶과는 완전히 유리된 것이었음을, 한 내금위 무관의 시선으로 1589, 천 명에 가까운 서인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기축옥사의 한 시공 속에 대려다 놓는다. 역성혁명을 주장한 정여립을 빌미로 동인과 전라도 쪽 동인의 씨를 말린 당대의 수구세력은 이렇게 정치적 학살을 자행했다. 가짜 왕이 득실대는 대궐, 백성의 고혈을 빨기위해 공맹(孔孟)을 만사의 법리로 강요하던 서인집단은 임진왜란을 자초했다. 자유로운 광대집단을 부르던 건달바가 백성이 실제 나라의 주인임을 외치던 대동계, 혁명 세력의 이름이 되어야 했던 시대의 언어에 기시감으로 전율하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시공을 마구 널뛰는데, 세상의 마지막 단군에서는 고구려의 창업 신화를 카르하미르(흑룡)강 연원에서 살던 쥬신 종족과 부여 종족의 피를 이어받은 코리족, 코코리 이야기가 환상적으로 전개되며, ‘아침 햇살 앗이 비추는 그 희망이 시작되던 세계를 거닐게 한다. 당골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탕구르, 아침 햇살 드는 곳 아사달, 우리의 기원은 어디일까? 우리 운명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나라와 종족의 근원에서 그 부침의 여정과 미래를 상상케하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도 된다.

 

이 소설집에서 특히 매료된 이야기의 하나는, 기근과 절망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의 출몰로 공권력조차 무력화된 임란 이후, 병자호란 사이의 세태를 배경으로 한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이다. 식인귀를 색출하여 처형하는 데 이골이 난 이충백이란 인물은 한양에 이르러 너무도 많은 식인귀들을 발견하고 몸서리를 친다. 모두 척살하여야 함에 신이 날 지경이지만, 그의 패두는 그에게 말한다.

 

누가 모르나?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기라. 들어봐라, 나라님이 식인귀라믄 믿겠나?

창덕궁에 드나드는 양반들 태반이 식인귀라믄 니는 믿겠나?”

-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128쪽에서

 

이충백의 힘과 패기를 신뢰했던 평안관찰사 박엽, 국경을 강화하고 적의 침략을 대비하여 엄격한 군사대비에 철저했던 이는 간신 김자점에 척살되고, 1627년부터 시작된 여진족의 침입과 병자호란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 우리 역사의 어느 순간에 도착해도 힘없는 민초들은 불의하고 사특한 인간무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 어구의 이야기들은 민초들의 끊임없는 저항과 승리가 감돌지만, 어디 가상의 이야기에 머물며 환상 속을 헤매는 것이 해결책이 되기나 할 텐가?

 

시적 흥취에 빠져들게 한 이야기도 있는데, 고려말 문장가인 이규보의 창작의 고통에 내재된 기이한 시인의 삶이 세상 너머까지 보아야하는 다른 눈을 주는 시마(詩魔)와 민족적 기원에 까지 연결되며, 짧지만 웅장한 한 편의 거대 서사의 물결에 휩쓸리게 하는 시마의 계약이라는 작품이다.

 

시는 머무는 자들의 것이 아니야. 바람을 봐. 우주를 감미롭게 찬미하지만 형체없이 떠돌고 있지.

땅에 집착하는 자에겐 시가 없어. 가질 수 없는 걸 사랑해야 시가 찾아와.”

-시마의 계약, 153쪽에서

 

작가는 이처럼 국가라는 물질적 토대의 경계를 여러 작품에서 넘나드는데, 17세기 변경의 삶을 이해한 자이자 전란(戰亂) 속 고독을 노래한 시인 가수재(賈秀才)란 인물의 실종을 소재로 하여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왜인 후손들의 삶을 조명하거나(가수재의 실종),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화가 최북(崔北)과 유녀 하나오기와의 사랑으로 에도 최고 풍속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로 이어지는 화풍의 관계 등 역사적 상상력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시인의 그것으로 마음껏 나래를 편다.(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

 

조선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모리스 쿠랑을 주인공으로 한 모리스 쿠랑 이야기두 편은 19세기 외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근거지로 당대 세책방과 책쾌들을 배경으로 삼아 정치적 분열과 외세 의존의 지배계급 몰락의 양상을 지켜보게 한다. 백성이 외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계속 피살됨에도 국가는 아무런 것도 행하지 않는다. 외국인의 눈을 통해 쇠멸해가는 조선의 정세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교활하게 정치적 영역을 넓혀가던 일본, 러시아, 프랑스의 시점이 흥미롭게 그려진 소설이다.

 

그런가하면 보물 635호로 지정되어있는 신라 황금 보검에 얽힌 페르시아와 신라의 빈번한 교역의 이야기가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불과 모래의 기억)로 변주되어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페르시아 서사시 모음집인 쿠쉬나메의 한 페이지로 시간여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과 신라 공주 프라랑의 사랑 이야기>, 실재하는 이야기다. 발견된 신라 황금보검은 페르시아 역사학자들로부터 페르시아 왕실 의장용 보검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작가 윤채근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사실에 입각하되, 사실과 사실 사이에 벌어진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며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

 

어쩌면 사실과 환상을 얽어 가공한 이 팩션 세계로부터 새롭게 어떤 무엇을 발견하고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감행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읽어나가며 나 또한 이야기마다에 소개된 관련 문헌들, 특히 한문소설들과 이 세계의 역사들을 찾아 나섰으니 말이다. 풍화되고 변형된 이야기들 속에 일말의 진실들이 숨겨져 누군가로부터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새로운 숨결을 입혀 재탄생한 이 이야기들에 빠져드는 것도 역사의 진실을 향한 한 걸음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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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세이,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출간예정에 즈음해서 | 기본 카테고리 2023-12-04 21:49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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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말 출간예정으로 20세기의 대표 모더니스트인 버지니아 울프의 13 소설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해석, 그리고 작품 속 212개의 문장을 담은 문학에세이가 출간되는 모양이다.

내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보여 준 여성주의 작가이기에 앞서 인간 생의 단독성에 대한 뛰어난 통찰의 작가로 더 마음에 남아있는 문학가이다.

 

문학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의 저자인 북큐레이터 '박예진'의 인문학적 해석과 설명은 내게 같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되어 줄 것 같다. 박예진 작가는 어느 문장에 공감과 여운을 가졌는지, 작가만의 고유한 해석은 어떻게 다르거나 유사한지를 읽으며, 조금은 더 깊이와 폭을 지닌 독서를 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잘 알려진 등대로, 댈러웨이 부인에서 제이콥의 방, 올랜도, 밤과 낮, 막간, 세월에 이르기까지  열세 편의 망라된 작품 해석을 접하는 것은 독자로서 여간한 즐거움이 아니다. 기대감으로 사실 조급함도 느껴진다. 출판사 리텍콘텐츠의 기획출간에 문학애호가로서 고마움을 느낀다. 표지 디자인과 함께 양장 제본도 품격을 더해주는 듯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연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출처: 유튜브 리텍콘텐츠, https://youtu.be/c-FkcLskyOU?si=gf4vMjMJ2_mYOq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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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 글 잘 못쓰면 어때, 내용이 진솔하면 됐지. | My Story 2023-12-0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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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글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잘 쓴 글이란 대체 무엇일까? 누구라도 읽어서 그 글의 의미가 명료하게 전해지는 글, 혹은 새로운 지식으로 가득한 글, 유려한 문체로 막힘없이 문장에서 문장으로 유려하게 흐르는 글, 화려하고 리드미컬하여 절로 즐거워지는 글, 담긴 생각이 재미있고 정신과 사고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글 등등, 아마 헤아릴 수 없는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이 많은 가능한 답변들 중에서 나는 아무리 거칠고 투박한 글이어도 생각(정신과 사고)이 재미있고, 단순하고 열렬한 글이 좋다.  몽테뉴는 모든 번지르르한 채색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진리의 광채 앞에서는 쉽사리 사라져 버린다고 말했다. 문장이 읽기에 거칠고 서툴면 어떤가, 나는 글이 알짜배기 경험들로 꽉 차 있다면 절로 정신을 사로잡는다고 믿는다. 생각이 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글이 생각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해서 시중에 범람하는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책들의 교만이 불편하다. 형식이나 운율이 좋은 글보다는 거기 담긴 생각이 명징성을 꾀하고 있는 글에 나는 보다 더 매혹된다. 사물들이 정신을 사로잡으면 글은 절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앎이 설익어 수태단계를 벗어나지 못해 불완전한 재료를 핥고 있을 때, 글은 수사와 형식과 운율, 논법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뭔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글은 소박함과 명료함이 그냥 드러날 것이다. 그것이 제아무리 서툴고 유려하지 못하더라도 훨씬 감응을 불러 낼 것이라 믿는다.

 

서투름에 상처 입은 손이 내겐 더욱 아름답다.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글의 훈련되지 않은 문장의 거침과 불완전성을 수사(修辭)하느라, 빈번하게 현학으로 가장하거나, 남의 글을 흉내내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본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만을 수시로 범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여전히 사물과 사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의 미천함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불규칙적이더라도 꾸밈이 없으며, 설혹 지루하더라도 투박한 글을 다듬어내고 싶지 않다. 그저 생각과 글이 한 몸이 되어 전하고자 하는 뜻이 기술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수려하게 채색하는 표현기술은 문체로 현혹할지는 몰라도 그 내용까지 살찌워주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이내 그 깊이 없는 바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문장을 울퉁불퉁 난해하게 쓰거나, 부끄럼없이 다듬지 않고 쓰자는 것이 글쓰기의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세련되게 다듬어지지 않았을망정 꾸밈없는 소박한 글, 오랜동안 육신에서 곰삭아져 절로 흘러나오는 글이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글을 잘 쓰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자기 앎의 진솔한 기술이면 그것으로 이미 좋은 글일 것이다. 수사학적 기술을 훈련한 기름기있는 글은 피하고 싶어진다. 잘 쓰는 글이네, 잘 못 쓰는 글이네 라며 기준으로 세우는 그 세련된 테크닉들보다 그저 스스럼없이 우러난 글이 내겐 훨씬 아름답게 다가온다. 문득 서투르고 거칠고 투박한 글들에 격려와 지지를 보내고 싶어서 끄적여 봤다. 아마 내 설익고 세련되지 못함에 대한 자기 옹호인지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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