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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그림자에 묻힌 지고지순한 순애보 | 소설 2016-06-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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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도진기 저
황금가지 | 2016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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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쪼끔 더 들고 보니 인생의 방향을 헝클어뜨리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숫기 없는 성격으로 가장 늦게 결혼할 것 같던 A는 제일 먼저 결혼해 애가 셋인 엄마가 됐고, 그 남자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굴던 B는 바로 그 남자 때문에 생고생을 하며 죽을 둥 살 둥 한다. 그들 모두가 한때는 별다른 걱정 없이 웃고 떠들던 소녀, 처녀였다는 게, 그리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많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 시간의 물결을 타고 불행한 쪽으로 흘러간 이들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아마도 그들의 이전 모습을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 세월의 흐름은 쏜살같고, 덧없으며, 종종 깜짝 놀랄 마술을 부린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김명진은 그 마술에 걸려든 여자이다. 그녀는 티없이 밝은 얼굴로 까르르 웃던 처녀시절에서 불행의 흐름에 밀려 웃음을 잃어버린 중년의 여자가 되었다. 남편을 죽인 죄목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됐으니 그녀만큼 격류에 시달리기도 쉽지 않겠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질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명진을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화면 속 김명진의 큰 눈동자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못 박혔고, 몸은 풀 먹은 종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흰 벽에 토마토 소스를 된통 뿌려 놓고서 엄마의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 김명진 씨는 남편을 목 졸라 살해했지요?

낮고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싸늘하게 들렸다. 대신 흥분한 피고인을 가라앉히는 효과는 컸던 것 같다. 김명진은 가로젓던 머리를 멈추었고, 이내 차분해졌다. 이어 기억 속 김명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며 떨려 나오던 그 목소리. (p. 204)

 

 

두문불출 '어둠의 변호사'로 유명한 고진이 김명진을 변호하기 위해 법정에 나섰다. 머나먼 땅 러시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김명진과 그 남편이었던 죽은 신창순, 그리고 그들의 젊은시절 친구였던 세 남자, 명진의 여동생, 이들을 둘러싼 과거까지 현재로 끌어다 놓는다. 신창순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러시아의 거리 뒷골목이었지만 살해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정황상 의도된 살인이었으므로 거의 밀실 살인과 같은 양상을 띤다. 그래서 살인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꼬인 실타래를 풀어보려 해도 많은 정황과 증거가 김명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고진 또한 그녀의 무죄를 확신할 수 없다. 고진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듣고 고진을 찾아와 남편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하기까지 했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될수록 고진은 그녀에게서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고, 베일에 싸인 밀실의 문을 열어젖힌다.

 

김명진을 제외한 용의자인 옛 친구들과 여동생은 피해자가 죽은 뒤 그 도시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국했고, 살인이 일어난 날 밤 피해자가 살아있을 때 목격한 사람은 그가 김명진과 함께 있었음을 증언한다. 게다가 신창순을 죽인 흉기는 낚싯줄. 신창순은 낚시를 줄곧 즐겼기에 김명진은 남편의 낚싯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던 신창순은 집에선 아내를 마구 때리는 죄질 나쁜 인간이었기에 김명진은 남편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나타난, 과거에 그녀를 좋아했던 남자 친구들이 모두 경제적으로 성공한 독신남들이었기에 그녀는 남편 대신 자신을 다독여줄 남자도 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고진에게 남편을 죽여 달라고 의뢰를 하려고까지 했다. 내가 김명진이라도 신창순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고, 얼핏 보면 그녀가 범인 같다. 하지만 피해자의 물건이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원한을 가진 인물의 살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는 인간들이 없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DNA나 확고한 목격자, 뚜렷한 물증도 없이 정황만으로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데에는 은근히 화가 났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붙잡히길 바라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죄없는 사람이 누명을 뒤집어써서는 안 된다. 범죄자 10명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사람 1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둠 속에서 경주가 시작되었다. 네 쌍의 건장한 다리가 증기기관의 피스톤처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의재가 선두였다. 뒤의 세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임의재의 굵은 허벅지와 통뼈는 장거리에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두 바퀴 만에 임의재가 뒤로 밀려났고, 남궁현이 선두로 나섰다. 잠시 후 신창순이 남궁현을 제쳤다. 그가 선두를 유지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긴 다리의 한연우가 그를 제쳤다. 임의재가 다시 잠시 앞섰다가 신창순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엎치락뒤치락이었다. 팔이 날개를 치듯 움직였고, 벌어진 입에서 때 아닌 하얀 김이 솟았다. 스무 바퀴의 레이스는 생각보다 길었다. 그때 명진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p. 22)

 

 

어쨌거나 고진은 이 해결할 길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사건을 해결해낸다. 의외로 사건의 트릭은 고전적인 방식이었는데, 본격추리소설을 표방하는 작품이었다면 식상했을 것이, 이 소설에서는 꽤나 재미있게 쓰였다. 트릭 자체도 재미있지만 이 친구들의 과거를 둘러싼 속이야기들, 시간이 흘러 달라진 친구들의 모습과 그들의 진짜 속마음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여주인공 격인 김명진이라는 인물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우유부단의 최극단을 달리고 있어 황당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모를 수는 있다. 동시에 몇 명의 사람을 좋아해서 거기서 경중을 제대로 따지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의 결혼이라는 일생 일대의 문제를 고작 오래달리기로 결정한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 저자는 그녀의 결정이 8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과 그녀의 우유부단한 성향이 버무려져 나왔다는 식으로 설정한 모양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같던 시대라고는 하나 어느 누가 배우자를 달리기 1등한 사람으로 정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그야말로 "소설 같다."

 

이 여자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A는 자기마저 교도소에 들어가버리면 누가 그녀를 돌봐주느냐며 걱정한다. 자신의 결혼을 달리기로 결정지은 것도 모자라 남편이 사라진 자유로운 세상에서 김명진이라는 여자는 끝까지 누군가 돌봐줘야만 하는 대상으로 굳어진다. 결혼조차 제 맘대로 정하지 못하고 상황에 이끌려 휘둘린 데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어야만 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 죄 없는 인물이기에 불쌍하기는 했지만 절대로 호감을 가질 수는 없는 인물이다. 그런 여자에게 온 순정을 다 바치는 과거의 남자들이라니, 글쎄, 아름다운 순애보이긴 하지만 저자는 너무 오래되어 먼지 앉은 구시대적 여성상을 '첫사랑의 여자'로 각색해 그려놓은 것이 아닐까?

학창시절엔 친구처럼 지냈으나 사실은 김명진을 질투했던 여자친구 B. 그녀는 과거의 질투를 아직도 못 잊어서 법정에 나와 김명진을 해코지하기 위한 증언을 한다. 아, 2000년대 이전의 소설에서나 볼 법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몇 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까지 그 질투의 감정을 잊지 못한 못생긴 여자.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80~90년대의 일본 소녀만화에서나 등장하는 캐릭터 같았기 때문이다. 말도 못하게 우유부단하고 구시대적 여성적인 면모를 가진 김명진과 예쁘고 인기 있다는 이유로 친구를 질투하고 미워한 여자. 저자의 여성상이 너무 오래 전 옛날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공지능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시대인데 소설가의 눈이 너무 어두운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그런 게 꼭 필요할지는 배심원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십시오."

배심원석을 향해 말했을 뿐, 고진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건 치사한 수법이다. 이유현은 속으로 욕을 했다. 법리적으로는 공소사실의 입증 책임이 검찰에 있으니 고진의 입증 요구는 정당했다. 하지만 검사는 배심원의 판단 사항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정도로 의혹이 입증되었다고 판단해 버릴지 모른다. (p. 254)


 

예전에 존 그리샴의 법정 소설을 아주 재밌게 읽었었다. 우리나라와 법 체계가 다르지만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하다 보니 이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 속의 긴박감과 스릴 등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그런 한편 우리나라는 배심원제도를 이용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 대결 구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배심원들을 어떻게 구워 삶느냐에 따라 무시무시한 죄를 지은 피의자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되고 있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이 국민참여재판에서 다뤄지는 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자연히 일반 법정소설보다 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읽어보니 고진이 굳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배심원들은 어떤 증거와 증언이 나올 때만 한 줄의 글로 등장해 인상을 찌푸리거나 안쓰러워할 뿐이다. 마치 3D 게임 속에서 먼곳의 배경으로 그려지는 납작한 2D 그림판 같았다. 우리나라는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려도 법적 구속력이 없어 영향력이 미미하다. 배심원들의 평결과 재판장들의 평결이 어긋난 적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배심원을 둘러싼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어 하나마나 한 아쉬운 시도가 되었다.

 

제목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지만, 이 악마에 해당하는 신창순은 그리 큰 비중이 없어 보인다. 악마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야기의 포인트가 그에게로 모아지지 않는 느낌이라 아쉽다. 극악한 인물이지만 일단 피해자이기 때문에 시선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과거 친구들 사이의 순애보, 아니면 전면에 나선 변호사 고진을 내세운 제목이었으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지적질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미스테리아>에서 무당이 나온 단편으로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소재가 다소 진부하긴 했지만 꽤 재미있었다. 저자의 장편은 이것이 처음인데 단편보다 더 흥미로웠다. 저자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겼으며, 다음 작품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출간될지 궁금해졌다. 다음 출간작도 법정 소설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존 그리샴의 탄생을 꿈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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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