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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30 개설

역사란 무엇인가?
40년 후 광주 할머니와의 약속 지킨 미국 청년 | 역사란 무엇인가? 2020-05-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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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후 광주 할머니와의 약속 지킨 미국 청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813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5.18 푸른 눈의 목격자>   

20.05.13 11:27l최종 업데이트 20.05.13 11:27l  

소중한(extremes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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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함정 | 역사란 무엇인가? 2018-08-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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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함정 Tuchididdes Trap

 

[요약]  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두려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는 뜻의 용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용어는 아테네 출신의 역사가이자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Thukydides, BC 460?∼BC 400?)가 편찬한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주장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기존 맹주였던 스파르타는 급격히 성장한 아테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양 국가는 지중해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됐다.


투키디데스는 이와 같은 전쟁의 원인이 아테네의 부상과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유래된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급부상한 신흥 강대국이 기존의 세력 판도를 흔들면 결국 양측의 무력충돌로 이어지게 된다는 뜻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투키디데스의 함정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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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을 기록하여 미래를 기약한다 | 역사란 무엇인가? 2018-06-02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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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을 기록하여 미래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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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멀다고 말하면 안되갔구나?" | 역사란 무엇인가? 2018-04-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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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이 정상회담 저녁만찬 메뉴를 소개하며 "멀리서 온 평양냉면"이라고 말하다가 "아, 멀다고 말하면 안되갔구나?"라며 농담을 건네는 모습에는 "김정은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믿기지가 않는다", "분위기 너무 좋다"는 반응이 나왔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961786#csidxeb04c4dfe497a0ca571243a52b2bf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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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간을 짜맞춘다 | 역사란 무엇인가? 2018-01-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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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간을 짜맞춘다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000410/1p7m4a0b.html

 시간을 벗어난 전체사 만들기 위해 출발… 다양한 계열사 일구며 역사학의 지평 확대 

지리학은 어떤 장소, 어떤 공간이 어떠한 기후와 환경을 갖는지, 그러한 공간들간에 어떠한 관계가 만들어지는지, 나아가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며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연구한다.

 

반면 역사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대상으로 시간에 따라 어떻게 그 사회가 변해왔는지, 그 상이한 시간대에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을 연구한다.

 

약간 추상적인 표현을 써서 말한다면, 지리학자는 공간에 대해 연구하고, 역사학은 시간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은 그 모든 사건, 그 모든 사실들을 하나의 전체로 연결하고 하나의 역사로 묶어주는 ‘역사적 시간’ 개념 안에서 사유한다.

 

그렇다면 역사학이 이 ‘역사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그것의 외부에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모든 사실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는 그런 단일한 시간적 좌표없이 역사학이, 아니 역사 자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이 사라진 이후 역사 내지 역사학은 대체 어떤 것일 수 있을까?

 

역사학의 경계 넘으며 근본적 질문 던져

 

 

(사진/아날학파는 미개와 문명이라 불리는 삶의 방식에서 시간적 차이를 지우려 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모습) 

 

최소한 브로델로 대표되는 이른바 ‘2세대’ 이후의 아날학파는 이런 문제와 대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역사학을, 아니 역사 자체를 하나의 극한으로 밀고 간다. 역사 내지 역사적 시간 자체가 소멸하는 지대가 거기서 출현한다. 역사적 시간의 외부. 그들은 역사의 외부로 나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역사 내부에 그 외부를 끌어들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이 20세기에 출현했던 다양한 역사학 중 하나라는 위상을 훌쩍 넘어서게 만든 요인이고, 역사학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는 이유며, 역사학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되는 지점이다.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령 우리는 17세기에 만들어진 가문과 족보를 상기시키는 제사에 참여하고, 그러한 관념의 법적 유산인 호적제도에 묶여 살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사이여도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결혼할 수 없는 세계에 산다. 이는 아직도 법조문에 명시된 현재적 사실들이다. 동시에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그래서 항상 미래적인 세계로 표상되는 그런 세계 속에서 산다. 이 두 가지 세계는 분명히 다른 시간성을 갖는다. 언어도 그렇다. 17세기의 유교적 관념과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극도로 세분화된 경어의 체계와, 반은 속어, 나머지 반은 외래어가 뒤섞인 채 축약되고 생략되어 나이로 표시되는 시간의 차이가 소통의 벽이 되는 그런 언어가 공존한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관념과 모든 사람은 다같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관념이 공존한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상이한 사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종종 원시공산제 사회로 찬양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미개사회, 야만인으로 간주되는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의 삶과, 계몽의 전깃불이 밤마저 쫓아내버린 문명화된 사회가 동시에 존재하며, 척박한 땅에 아직도 호미를 들이대고 있는 전근대적 공간과 거대한 빌딩의 숲이 햇빛마저 가리는 근대적 공간이 하나의 시간대에 공존한다.

 

역사적 시간은 이토록 상이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의 시간 개념을 통해 ‘통일시킨다’. 어떻게? 그것은 그것들을 하나의 단일한 시간(역사적 시간)을 척도로 하여 앞선 것과 뒤처진 것, 미개한 것과 문명화된 것 등을 하나의 직선 위에 배열하는 것이다.

 ‘발전’이란 뒤처진 것이 사라지고 앞선 것에 동화되는 것이며, ‘진보’란 미개한 것이 개명되고 문명화되는 것이며, 전근대적인 것이 근대화되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코르테스와 선교사들이 화약과 성경을 들고 간 것이 그것이며, 아마존의 숲에 위대한 개척농장을 만들어 낡은 노동이 아니라 새로운 노동을 하게 만든 것이 그것이며,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박정희가 이룩한 ‘조국 근대화’ 역시 그것이다. 식민지 사관 분쇄를 외치며 ‘경영형 부농’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고, 실학에서 근대 사상의 맹아를 찾던 우리의 역사가들이 한 것 또한 바로 그것이다.

 

 

제도 중심의 역사에서 인류학적 관심사로

(사진/역사학의 지평을 확대한 아날학파의 대표자들. 마르크 블로크(위)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아래))

 

아날학파의 역사는 이런 역사적 시간 개념의 역설적인, 또한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페브르와 블로크로 대표되는 아날학파 1세대는 왕이나 국가, 민족에 집중되어 있던 역사가의 눈을 민중의 삶이나 무의식적인 심성이 표현되는 세계로 돌리게 만들었고, 제도에 몰두했던 역사로 하여금 인류학적인 상호관계를 다양한 양상으로 연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전체사’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의 꿈은 하나의 역사적 시간이 작동하는 ‘전체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실증적 자료들에 매몰되어 전체를 상실한 역사에 대한 비판가였다. 그들이 지리학과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등에 관심을 갖고 학제적인 연구를 누구보다 적극 수용했던 것은, 어쩌면 그토록 다양한 세계를 ‘역사’라는 하나의 전체로 포섭하고 포괄하려는 학적인 ‘야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브로델로 대표되는 아날 2세대는 전혀 다른 상대자를 갖고 있었다. 역사학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웠던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존에서 문명의 전횡에 파괴된 ‘슬픈 열대’를 발견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와 문명 사이에 거대한 거리를 만들어두고, 그것을 하나의 직선화된 시간의 끈으로 연결하고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전자를 후자에 ‘통일시키는’ 문명의 폭력이 바로 대문자로 쓰여지는 ‘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반대로 문명화된 사유의 모태를 ‘야생적 사유’에서 찾아내려 했고, 미개와 문명으로 불리는 상이한 삶의 방식 사이에서 시간적 차이를 지워버리려 했다. 그러면서 시간과 무관하게 어디나 항존하는 ‘구조’를 양자 모두에서 공통으로 발견했다.

 

브로델은 구조주의의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어쩌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새로운 역사 개념을 제안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처럼 아주 오랜 시간 변함없이 지속되는 역사의 층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장기지속’이라 불렀던 이 역사의 층위는 지질학적 내지 지리학적인 변수들과 관련된 것으로, 모든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보지 못하고 그저 사건에만 매달리는 것을 그는 ‘사건사’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비판했다. 그러나 ‘사건’이라는 순간적이고 항상 변하는 요소를 역사의 영역에서 배제할 수는 없었기에, 그것을 굳이 말하면 단기지속적인 또 하나의 다른 층위로 설정했다. 그리고 장기지속과 사건사의 두 층위 사이에 ‘국면’(콩종튀르)이라는 중기지속적인 층위를 설정했다.

 

역사란 결국 이처럼 세 가지 상이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복합체라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페브르와 블로크의 전체사 개념을 갖고 있던 브로델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장기지속적인 역사, 그 거대한 역사적 시간의 포괄성과 전체성이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반면 가족생활이나 어린이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태도, 공포의 양상, 혹은 연옥과 같은 상상적 세계의 변모 등을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심성(망탈리테)의 변화를 새로운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날의 3세대 학자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변화를 하나의 ‘장기지속적’ 역사나 ‘전체사’로 묶는 것을 거부하거나 포기하게 된다. 그것은 각각 상이한 시간성을 갖고 진행되는 각각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개념을 그들은 종종 ‘계열사’라고 부른다. 즉 전체사로 되돌아가지 않는 각각의 계열들에 고유한 역사가 있으며, 그러한 계열로 포착되는 상이한 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체사나 총체성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사람들이 ‘조각난 역사’라고 비난하는 이러한 새로운 역사 개념을 통해서, 이제 그들은 아날의 선배들이 갖고 있던 ‘전체사’의 꿈에 냉정하게 종지부를 찍는다. 그래, 역사에는 브로델 말대로 상이한 시간의 흐름들, 상이한 시간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브로델 말과는 반대로 그것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는 그런 시간성은 따로 없는 것이다. 이제 대문자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복수의 어미를 항상 달고 다니는 소문자로 시작하는 ‘역사들’이 있을 뿐이다.

 

장기지속적인 역사는 포기했을지라도…

 

따라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척도화된 시간, 하나의 보편 법칙으로 귀착시키려는 그런 태도는, 이질적인 계열들이 분기하면서 때로는 수렴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차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발산하면서 공존하기도 하는 그런 위상학적 공간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렇다면 역사란 이제 ‘과거’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땅덩어리를, 나름의 기울기와 각도를 갖고 절단함으로써 나름의 고유한 단면을 갖는 지층을 발견하고 탐사하는 작업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푸코가 훌륭하게 보여준 것처럼, 새로운 사유의 선을 찾아내고 새로운 삶의 흐름을 발견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저 과거 시제에 머물지 않는 역사, 차라리 미래의 시제를 갖는 역사가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문턱의 이름은 아닐까?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역사학이 있다면, 그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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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보여준 아날학파 | 역사란 무엇인가? 2018-01-2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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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보여준 아날학파   

  • 김응종 사학과 교수
  • 승인 2014.12.04 19:46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4092

 

아날학파란 1929년 프랑스의 역사가인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공동 창간한 <경제사회사 연보>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잡지의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아날. 경제, 사회, 문명>으로 바뀌었다가, 1994년에 다시 <아날. 역사와 사회과학>으로 바뀌었다. 아날학파의 역사가들이란 이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역사가들을 가리킨다.

 

  
 

 

아날학파의 탄생과 전개

아날학파의 역사가들을 제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세대 아날리스트인 페브르와 블로크가 지향한새로운 역사학은 잡지의 제목에 나와 있듯이 사회경제사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역사가들이 세 개의우상(偶像)’- 정치, 개인(개별), 연대(年代) - 을 숭배한다고 비판하였다. 아날학파의 1세대가 지향한 역사학은 영역 차원에서는 정치에서 사회경제로, 역사적 인물의 차원에서는 개인에서 집단으로, 역사적 설명의 차원에서는 이야기체에서 구조적인 설명으로 옮겨갔다고 말할 수 있다.

 

페브르와 블로크가 <아날>의 창간사에서 강조한 것은, 역사가는 사회이론가나 역사철학자들과 달리‘, ()와 사실을 가지고 말한다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페브르는 16세기의 인문주의자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종교를 통해서 개인과 집단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라블레는 무신론자였을까? 무신론자가 될 수 있었을까? 페브르는 라블레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철학, 과학, 언어 등을 검토하여, 그 시대는 무신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심성적 도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라블레 같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시대의 구조를 벗어나 무신론자가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블로크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소생시키기 위해, 사회 구조와 그것의 제반 관계를 분석하고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비교사적인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독일 역사주의의 개별성과 배타성을 극복하고 편협성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농촌사를 유럽의 농촌사라는 넓은 틀 속에서 바라보며 공통점과 특징을 찾아낸 것이다. 블로크는 조국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학문이라는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2세대 역사가는 페르낭 브로델이다. 브로델이 1946년에 발표한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는 현대 역사학을 대표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브로델은 역사에 미치는 힘을 장기지속적인 구조의 힘, 변덕스러운 사건의 힘,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사회와 경제의 주기 순환적인 힘 등으로 나누고, 그 모든 힘을 다 아우르는 전체사를 지향했다. 세 가지 힘 가운데 브로델이 특히 주목한 것은 구조의 힘이었다. 브로델의 유명한 표현에 의하면, 인간은 구조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브로델의 또 다른 대작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이다. 브로델은 전 산업사회의 경제생활을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라는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경제는 시장에서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투명한 영역이다. 그러나 역사가의 시야에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불투명한 영역이다. 이렇게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역사가인 브로델은 인간의 물질생활을 전체사와 구조사라는 테두리에서 다루었다.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 △페르낭 브로델 △르 루아 라뒤리 △로제 샤르티에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전성기를 맞다

3세대 역사가는 조르주 뒤비, 자크 르 고프, 엠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이다.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역사가로 입문한 이들 제3세대 역사가들은 사회경제사에서 기초를 다진 후 인류학적인 영토에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뒤비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라는 세 위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재속교회와 수도원 사이의 권력다툼에서 파생된 담론임을 증명함으로써 지식권력의 역사적 사례를 보여주었다. 르 고프는 사후 세계 가운데 하나인 연옥이 12세기에탄생하게 된 사회적 종교적배경을 분석하였다. 지옥불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 고리대금업자들이 뜻밖에도 천국의 대기공간인 연옥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연옥이탄생하는데 이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며, 연옥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매력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르 루아 라뒤리는 인구와 토지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전근대사회는 토지라는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체념적으로 인구를 줄여나가는 맬서스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몽타이유라는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벌어진 이단재판 기록을 토대로 중세 농민들의 일상생활과 문화를 인류학적으로 복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제3세대 아날리스트들의 역사 세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인류학적 역사와 심성사(心性史)가 있다. 이 두 역사학은 넓은 의미로는 동일한 역사학을 의미하지만, 굳이 구분한다면 인류학적 역사는 물질생활을 다루지만, 심성사는 정신생활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심성사는 집단의 생각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느끼는 방식까지 연구대상으로 포함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페브르는 일찍이역사에서의 감성’‘, 역사에서의 죽음같은 심성사적인 주제를 제시했는데, 이를 구체화한 사람은 필립 아리에스와 미셸보벨이다. 아리에스는 도상(圖像) 자료를 연구하여, 어린이에 대한 감정이 근대에 이르러 변했음을 밝혀냈다. 중세의 어린이는 어린이다움을 인정받지 못한 채 일찍부터 어른들 속에 끼어 있었으나(<축소된 어른>),17세기 부르주아 가정의 어린이들은 어린이다움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아리에스의 심성사 연구는죽음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태도 역시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에스는 친숙한 죽음, 나의 죽음, 너의 죽음, 전도된 죽음이라는 단계로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해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심성사는 페브르가 강조한시대착오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셈이다. 아리에스의 심성사가 인상주의적이라면, 보벨의 심성사는 과학적이다. 보벨은 18천여 개의 유언장을 계량적으로 분석하여 프랑스 혁명 전부터 프랑스인들의죽음에 대한 태도가 서서히 변했음을 증명하였다. 예컨대, 신앙고백의 미사여구가 줄어들고, 성당, 수도원, 종교단체, 병원 등에 대한 기부금이 줄어들며, 장례식이 간소화되는 것 등은 프랑스인들의 신앙심이 혁명전부터 서서히탈 기독교화되어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혁명기에 나타났던 무신론적인 경향을 준비해주었다는 것이다.

 

4세대의 역사학은 신문화사이다. 4세대를 대표하는 로제 샤르티에는책 읽기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사후유산 목록을 통해 책의 소유가 어떻게 분포되었는지를 계량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사회사적으로는 필수적인 단계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과연 책을 읽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었는가 같은 문화사적 물음이 해명되지 않는다. 이 섬세한 문제가 역사적인 물음으로서 가능한 것은 저자의 권위와는 별개로 독자의창조적 오독(誤讀)’이 허용된다는 포스트모던 이론에 의해서이다. 민중 문화의 독자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각 세대는 단절이 아닌 연속이다

아날학파를 이렇게세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아날학파의 역사 세계가 변해왔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세대를 연속이 아니라 단절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페브르가 제시한 심성사와, 블로크가 제시한 인류학적 역사가 제3세대 역사가들에 의해 만개한 것이라든지, 아날의 역사가들이 일관되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고수해온 것이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 이렇게 세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아날학파를 브로델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브로델은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역사가이지만, 그를 아날학파와 동일시할수는 없다. 아날학파의 제3세대 역사가들과 제4세대 역사가들은 브로델의 전체사적이고 구조사적인 역사인식을 계승하면서도 나름대로 인류학적 역사와 문화사에서새로운역사 세계를 개척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29년 정치, 개인, 연대라는 우상 타파를 목표로 시작된 아날학파는 세대를 지나오면서 역사학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종국에는 정치, 개인, 사건 등과 같은 타부 영역도 아날학파의 역사 세계 속에 포함되었다. 정치권력이 역사가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으며, 전기(傳記)가 복권되었고(<() 루이>, 르 고프), 사건이 부활하였다(<부빈의 일요일>, 뒤비). 아날학파가 태어난지 100년이 가까워지는 오늘날, 페브르와 블로크가 제시했던새로운 역사는 더 이상 새롭지 않으며, 아날학파만의 독점물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역사학이 되었다.

아날학파가 현대 역사학을 선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경직성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유연한 역사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그들은 동시대의 강력한 사조였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대조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방법론적인 경직성에 빠져 편협하게 역사를 바라보았으며,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매몰되어 사실성을 경시하는 비역사적인 길로 빠지고 말았다. 아날학파의 역사가들은예와 사실이라는 창간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에, 역사가의 사명은 사실성을 고수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김응종 사학과 교수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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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 | 역사란 무엇인가? 2016-09-16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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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

최근 수정 시각 :


http://www.nndb.com/people/444/000092168/hernando-cortes-1.JPG

Hernán Cortés(1485? ~ 1547.12.2)

1. 개요

2. 아즈텍 진입

3. 슬픔의 밤

4. 말년과 최후

5. 학살자인가?
5.1. 학살자가 아니다

5.2. 학살자가 맞다

6. 기타

 

1. 개요[편집]

스페인콩키스타도르. 후술하겠지만 관점에 따라 인류사에 남은 '정복자'와 근대 이전 최악 '학살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전자는 주로 유럽에서[1], 후자는 주로 중남미에서 받는 평가이기도 하다.


 

2. 아즈텍 진입[편집]

당시 콩키스타도르가 대부분 그랬듯이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한 몫 잡아보고자 남미나 북미로 건너간 사람이다. 스페인의 쿠바 정복 당시 공을 세운 덕에 근무하게 된 쿠바에서 기반을 다져 유카탄 반도 원정에 나섰다. 도중에 그가 뜨는걸 두려워한 쿠바 총독에게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500여 병력을 이끌고 일단 떠난다.

신대륙을 정복해 금을 열심히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코르테스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한 원주민들과 성대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멕시코 정복사의 첫 단원을 시작하며, 협상이 가능한 부족에게서는 금을 뜯어내고, 아닌 부족은 그냥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금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오로지 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 근처를 헤집고 다닌다. 이 와중에 포톤찬에 자리잡은 마야 계열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게 된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의외겠지만, 이 탐욕스러운 이방인들을 중앙아메리카 근방의 모든 부족들이 적대한 건 아니었다. 특히 아즈텍에 핍박받던 마야나 치차멕 계열 부족들은 (이유야 어쨌건)증오스러운 아즈텍 부족들을 탈탈 털어버리는 콩키스타도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금과 각종 자원[2]을 제공하며 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했고, 코르테스는 이 동맹을 존중할 것을 맹세하며[3] 동맹 부족들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된다.[4] 그리고 결국 '황금으로 가득한 제국'인 아즈텍에 대한 이야기가 코르테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백여 명의 뜨내기를 이끄는 안달루시아 촌뜨기는 인구 수백만에 수만의 군대를 가진 대제국을 털어서 황금을 잔뜩 뜯어낸다는 미친발상을 하고 만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금)을 찾아 열심히 서진을 시작하게 되고, 진군 도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부족들은 전부다 때려부순다. 다만 흔히 오해되는 것과 같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 형상은 모조리 과녁으로 간주하며 피로 물든 행군을 해나간 건 아니며, 가능하면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5]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항하는 부족들에게 코르테스에게 협력하라는 전언을 보내두기도 하였다. 또한 아즈텍 동맹 부족들 중에서도 코르테스에 협력하는 부족들들도 많았다. 가령 아즈텍의 동맹이었으나 그 지배를 환멸하던 한 부족장인 치코메코아틀은 코르테스를 환대하며 코르테스가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베라크루즈를 세우는 걸 도와준다. [6]



https://oldcivilizations.files.wordpress.com/2012/01/mc3a9xico-tenochtitlan3.jpg

 

베라크루즈를 건설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던 코르테스에게 몬테수마가 보낸 사절이 와, 금을 선물하며 전쟁을 피하자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 사절들은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원한다며 사신을 모욕적으로 대하며, 콩키스타도르들이 가진 화약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여 쫒아낸다. 두 번째로 온 사절은 더 많은 금을 선물로 건네며, 코르테스를 테노치티틀란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몬테수마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라와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라들은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자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된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던 코르테스는 평소보다 많은 아즈텍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한다. 코르테스는 여기서 물자를 보충할 계획이었지만, 촐룰라가 이상할 정도로 요새화되어있는 것을 경계한 휘하 틀락스칼라인들은 반대한다. 또한 몬테수마의 사절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도시의 지도자는 코르테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사실 스페인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코르테스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 이상 확인같은 건 하지 않고 촐룰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는 촐룰라 학살로 이어진다.[7]

요컨데, '처음 본 백인에 놀란 원주민들은 그들을 신으로 여겼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은 환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서 아즈텍을 멸망시켰다. 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원주민들은 여느 원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이방인에게 적개감을 느꼈으며, 이를 전투로 해결하려 했다. 심지어 코르테스 이전에 이미 원주민들은 백인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콩키스타도르들도 자신들이 금을 약탈하려 여기 왔다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 않았다.

콩키스타도르들이 신으로 환대받으며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는 잘못된 지식은 사실 복합적인 요소와 정보의 왜곡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전설인데, 우선 몬테수마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환대하는 듯한 서신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서신이 코르테스가 아즈텍 부족들을 초개처럼 쪼개면서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중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는 탐욕스러운 신을 환대하는 것이 아닌, 정복자에게 보내는 굴복으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코르테스 자신도, 아즈텍 정복의 정당화와 스페인 내에서의 입지 향상을 위해, 자신의 행적을 필요 이상으로 장식했다.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분명 '우리들을 신으로 여겼다.'라고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코르테스가 몇 번의 군사적 승리를 거둔 뒤의 일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아즈텍에게 압제당하던 부족들은 정말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 피지배 부족 전체를 가축으로 삼고 막대한 공물을 뜯어내는것도 모자라 툭하면 포로를 끌고가 인육으로 먹어대는 아즈텍이다. 이유야 어쨌건 그런 아즈텍을 물리치겠다고 나선 콩키스타도르들은 테오티클란이나 틀락스칼라 같은 피지배 부족들에게는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콩키스타도르와 케찰코아틀을 연관지은 건 그 신격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런 점 때문에 코르테스는 징기스칸 같은 무리들과 엮기는 뭐하다. 흡사 한국인 입장에서는 훨씬 더 사악한 일본을 상대로 미국이 싸우면서 원폭 투하나 무차별 폭격을 좀 한 것에 비교할 수 있는 격이라. 당시 아즈텍은 그냥 지역 깡패였다.

 

3. 슬픔의 밤[편집]

http://mxcity.mx/wp-content/uploads/2016/05/mxcity.mx_hernan-cortes.jpg

 

 

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에게 환대받았다.[8]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낸다. 이때 몬테수마의 딸과도 눈이 낮아 그녀를 애인으로 사귄다. 하지만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당하게 된다.[9]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천 명의 용맹스러운 콩키스타도르와 수천 명의 틀락스칼라 전사들을 지휘해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하나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는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고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처형당했고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삼회나 겪는 대패한('슬픔의 밤', 1520.6/30) 때 천만다행으로, 아즈텍에는 애석하게도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는 로페스는 생존해 후일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핵심인이 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금은보화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그나마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하려는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에게 압수됐다. 안습.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즈까지 이어졌다. 후퇴과정이 고난이었는데 식량부족에 시달린데다 아즈텍의 추격자들뿐만 아니라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이 난관을 코르테스는 부하드과 함께 관우의 기세로 돌파한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 한 적이 수차 있었다. 흠좀무.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도 그렇게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자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정확한 투창 실력이 있었고 의심스럽지만, 그자들은 아즈텍의 유혈이 낭자한 의식인 인신공양을 목도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해 의식을 다 때려엎고서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하고 의식의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였던 1만 명이 넘는 아즈텍인을 살려내 귀가케 했고 얼마 후 아즈텍 원주민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서 피의 의식을 금지케 하는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게끔 명했다. 미화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신뢰를 얻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다[10].



베라크루즈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스페인의 쿠바 식민지 총독 벨라스케스가 보낸 진압군이 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같은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놀랍게도 승리를 거뒀다. 게다가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정복군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현지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11]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싸워야했을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다. 오늘날 코르테스가 남긴 편지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라는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황제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피사로의 무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12]



전열을 재정비한 코르테스에게 슬픔의 밤으로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도착하였다.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공세를 편다. 아즈텍은 무력으로 주위 부족을 식민화하여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인신공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한 오랜 반감에 억눌려 있었다. 코르테스는 그 균열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을 보장)하여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병력을 지원받았다.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다.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오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특히 정복군의 군함에는 대포까지 있어 포격을 당하니 피해가 엄청났다.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가지만 코르테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결국 멸망당하고 만다. 총인구 500만, 수도 20만[13]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참고로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까지 갔던 길이 훗날 멕시코 150번 국도가 되었으며, 1962년에 이를 고속화한 도로인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50번 국도의 선형을 보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갔던 길과 상당히 유사하다.


 

4. 말년과 최후[편집]

1521년, 아즈텍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한동안 떵떵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 본국 에스파냐는 한창 정권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던지라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일까지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야심만만한 젊은 새 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취임하자마자 곧장 독일에서의 내전과 대프랑스 전쟁, 대오스만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신대륙에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522년 코르테스는 공식적으로 테노치티틀란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코르테스는 1526년까지 멕시코와 쿠바에서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 그리고 1519년에서 152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무용담과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서한을 새 국왕에게 송달했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 아즈텍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밝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정복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적받고는 있지만.

하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여념이 없어 그저 코르테스가 보내오는 막대한 공물에 만족했던 카를 5세도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자 슬슬 코르테스의 위치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1526년 코르테스를 월권 혐의로 전격 파면했다.

당연히 코르테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지만, 자신을 파면한 카를 5세는 시시한 쿠바 원정대나 아즈텍인들 따위와는 현격하게 격이 달랐다. 그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은 데다 이탈리아까지 석권 중인, 당대 유럽 최강의 패자였던 것이다. 파면에 대한 항거는 곧 대규모의 스페인 최정예 군대와의 전투, 즉 죽음을 의미했다.

별 수 없이 일단 귀국길에 오른 코르테스는 왕을 접견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왕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코르테스의 호방함과 아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카를 황제는 코르테스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1540년까지 다시 10년 이상 총독으로 군림하며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1540년, 코르테스는 예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 그는 드넓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자신이 당연히 큰 환대를 받으리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카를 5세의 태도는 냉담했다.

더 이상 코르테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카를 5세는 그에게 두번 다시 신대륙으로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그의 성공을 시기한 수많은 정적에게 시달려야 했다. 코르테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황제에게 지위와 연금을 달라고 탄원했지만, 카를 5세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이룬 업적에 부담을 느껴서 줄곧 무시해왔고, 그러다 마지못해 한 번 알현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알현식 와중에서, 절차에 따라 코르테스에 스스로를 소개할 것을 요구한 카를 5세는 이런 답변을 듣는다.


전 한낱 사람입니다. 폐하의 어떤 조상들이 물려준 영토보다도 넓은 영토를 폐하께 남긴.


이 대답이 마음에 든 카를 5세는 이후 독일에서의 신구교 전쟁의 장교로 코르테스를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여기서 성공가도를 걷는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알제리 원정 도중 폭풍을 만난 스페인 대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카를 5세도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남는다. 열이 뻗친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대거 해임한다.

코르테스는 고국의 계속되는 냉대에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세비야에서 설사병에 걸려 1547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누에바에스파냐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기묘하게도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7촌 관계의 친척이다.[14][15]

그는 두 번 결혼했고[16] 6남 6녀를 두었는데, 이중 애인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17]는 역사상 최초의 메스티조이다. 이 메스티조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라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남긴 엄청난 양의 영지를 다른 형제들과 나눠가질 수 있었는데...뉴멕시코의 왕 되겠다고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게 탈탈 털리고 땅을 빼앗긴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의 후광 덕에 목숨만은 건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필리프 2세 휘하의 군인으로 복무하다 스페인에서 죽는다. 스페인 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와는 달리 고국에서 인정받았던 모양.

 

5. 학살자인가?[편집]

코르테스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콩키스타도르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의 정복행위를 제국주의와 결부시켜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며, 전근대의 다른 정복자들(칭기즈칸, 알렉산더 등)과 구분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콩키스타도르들의 행보는 전근대 다른 정복자들의 행위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차이점이라면 이들의 정복이 해당 지역에 식민지를 세워 마침내는 19세기에 절정을 이루는 제국주의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데 있다. 즉, 이들 자체는 제국주의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코르테스의 학살자라는 윤리적 평가 또한 다른 정복자들과 구별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코르테스를 학살자나 식민주의자 등으로 평가하여 비판하려는 이는, 언급된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더 등의 다른 문화권과 시대의 정복자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예외를 둘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5.1. 학살자가 아니다[편집]

학살자라고 까이지만 정작 코르테스에게 책임을 물만한 학살은 없다. 일단 코르테스는 빈약한 수의 사병(혹은 회유된 탈영병)이나 친척들만으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력조차 없었고 딱히 학살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책임이 약간이나마 있는 학살은 초룰라(cholura) 학살이나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초룰라 시민들이 환대하는 척 하고 함정을 파고 있었기에 공격한 것이며, 후자는 코르테스가 아닌, 그가 나르바도와 면담하러 간 동안 지휘권을 받았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현장판단으로 인한 학살이었다.

승자측의 기록으로 인한 역사 왜곡이라 하기도 어려운 게, 코르테스는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처럼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닌, 충분히 위협스러우며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이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이 코르테스를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에 승리를 거두게 해준 요인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코르테스가 아메리카를 공격한 콩키스타도르들 중에서도 가장 온건했던 정복자라는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당장 금 때문에 민간인을 대량학살해서 스페인에서도 비난을 받았던 콜럼버스나, 의도야 어찌됐든 잉카에서 학살을 벌였던 피사로 형제보다는 훨씬 온건했고 말린체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차별의식이 적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제국주의 시절의 모든 정복자를 통털어도 상당히 온건한 축에 속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아즈텍을 계승했다는 멕시코 때문에 상당히 저평가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5.2. 학살자가 맞다[편집]

그러나 원주민을 인간으로 보았다는 것이 학살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초롤라의 경우, 아즈텍이 함정을 팠다는 내용은 당대의 전투기록이 아니라, 이 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다.(다만 코르테스는 카를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의 직접 쓴, 나후아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했다. 물론 말린체나 아구엘라 등, 코르테스의 원주민 친구들이 적당히 사실을 왜곡했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코르테스 나름대로는 객관성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아즈텍의 전투방식이나 아즈텍에 대한 스페인쪽의 지식수준으로 보았을 때, 실제 아즈텍 측이 함정을 팠고, 그 사실을 스페인 측이 미리 알았을지는 의심스럽다.

코르테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같이 간 틀락스칼라인들(통역 담당인 말린체라는 기록도 있다.)이 알려주었다. 틀락스칼라인들이 아즈텍의 동맹인 촐룰라를 어떤 식으로 제거하고 싶어서 음모를 꾸몄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코르테스의 책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작다면 모를까 책임을 물을만 한 학살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이다.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 간 정복자(또는 침략자)인 이상 그에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생겨난 모든 죽음에 대하여 코르테스에게는 명백한 책임이 있다

특히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였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다.

6. 기타[편집]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인 코르테스 백작은 바로 이 코르테스가 모티브다.[18]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이 인간의 행적을 까는 노래다.

근육맨에서는 서양인 특유의 거체로 강철갑옷을 입고 잉카제국 군사들을 아즈텍이 아니라? 죄다 레슬링 기슬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엘도라도에도 출연한다.

[1] 옛날 스페인에서는 지폐 모델로 쓰인 적도 있다.

[2] 개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린체를 역시 이런 식으로 얻었다.[

3]
실제로 지키긴 했다.

[4] 이전에 표류해와서 원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스페인 선원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5] 마주치는 부족마다 족족 몰살한 다음 약탈을 수행하면서 진군하기에는 코르테스가 지닌 인적 자원은 너무 적었고, 코르테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6] 참고로 마을을 굳이 조성한 이유는, 나중에 카를 5세에게 쿠바 총독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왕께 영토를 바치려고 했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베라크루즈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영토를 갖다 바치게 되지만(...)

[7] 여기까지가 코르테스의 기록. 틀락스칼라는 자신들의 사신이 촐룰라에 갔다가 고문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코르테스가 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은 틀락스칼라인들이 코르테스를 부추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에 대한 틀락스칼라인들의 증오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8] 여기서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요'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하하지만 이게 신앙에서 비롯된건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다.

[9] 일설로는, 상황을 진정시케 해 보라고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마저 오히려 아즈텍 시민들이 야유하면서 던진 돌에 맞아 기절했다.

[10]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 의식에 도덕상 분개한 것이 딱히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유럽계 침략자의 상당수는 기독교도로서 도덕 관념이 있어서 기독교리가 금지하는 인신공양 악습에서는 충분히 분개할 만한 처지였지만, (이교도인)원주민을 살해하고 그 재물 약탈은 기독교리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즉, 유럽계 침략자들은 현대인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는게 아니라, 도덕 관념이 현대인과는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유럽인들이 왜 하필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침략에 나섰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종교(당시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당대의 도덕은 오히려 침략 행태를 정당화 해 주는 도구로 작동했던 것. 이 구조가 고도화 되어 탄생한 개념이 바로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 침략을 하는 게 아니라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의 짐이다.

[11] 사실 그 당시는 유럽도 중앙통제식이 아닌 여전히 봉건제와 지방자치가 이루어진 판국인데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중앙통제가 이루어질턱이 없었다. 카를 5세만 해도 걸핏하면 귀족들이 말 안듣고 반란을 일으켜 골머리를 않고 있았다.

[12] 다만 피사로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황제와 황후를 능욕한 사건도 피사로 본인이 아닌 그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가 한 일이었다.

[13] 당시 유럽에도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흑사병의 타격을 받은 직후에도 인구 20만을 유지하던 거대도시 파리가 있다. 그밖에 제노바베네치아 등 인구 10만 이상을 유지하던 이탈리아 대도시들도 많고. 물론 고기로 먹을 수 있는 짐승도 없어서 식인으로 인구를 부양해야 했던 곳에서 저런 인구라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긴 하다.

[14]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이다.

[15] 그런데 딱히 신기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닌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관계로 얽히고 섥힌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16] 첫 번째 부인은 사별했고, 말린체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말린체까지 합하면 실질적 아내는 3명이다.

[17] 첫 부인에게서 얻은 마르틴 코르테스와 동명이인이다.

[18]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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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6 (6) 카를 대제의 문예부흥 | 역사란 무엇인가? 2016-07-3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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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백년지대계’ 서구 학문의 기초를 닦다

 

등록 :2016-07-28 19:21수정 :2016-07-28 20:20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6) 카를 대제의 문예부흥

카를 대제와 앨퀸, 장빅토르 슈네츠(1787~1870), 파리, 루브르박물관. 카를 대제와 앨퀸은 교육 개혁의 진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카를 대제와 앨퀸, 장빅토르 슈네츠(1787~1870), 파리, 루브르박물관. 카를 대제와 앨퀸은 교육 개혁의 진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다.” 수없이 들어서 당연히 여겨지는 이 말이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는 점차 무색해지고 있다. 맞춤형 보육과 학교 무상급식은 차치하고라도 국가의 미래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대학 교육마저 위협받고 있다. ‘링크(LINC) 사업’, ‘프라임(PRIME) 사업’, ‘코어(CORE) 사업’ 등 근시안적인 프로젝트들에 거의 대부분의 대학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이런 사업을 기획하는 이들은 소위 시장의 원리를 그대로 교육 현장에 적용하려 한다. 그래서 막대한 자본만 투자하면 교육의 성과도 짧게는 1~2년, 길어 봤자 3년이면 다 수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이와 같은 교육계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인물을 우리는 중세 시대에 만날 수 있다. 그가 바로 ‘샤를마뉴’라고도 불리는, ‘카를 대제’(Karl der Große, 742~814)이다. 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정복자로 알려진 그가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우리 교육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자, 카를 대제

카를 대제는 742년께,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Pepin the Short. Pippin)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카를 대제의 가장 큰 업적은 물론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일이다.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보병대를 중무장 기병대로 탈바꿈시켜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지역을 손에 넣었다. 또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무역을 부흥시키는 등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가장 강력한 정부를 구성했다.

카를 대제는 군사적 승리와 문화적 업적으로 인해 서유럽인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더욱이 800년에는 로마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때까지 황제라면 으레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황제를 떠올렸고, 그만이 로마 황제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비잔틴 황제는 대부분의 실권을 잃어버렸으면서도 여전히 서유럽을 제국의 변방 정도로만 간주했던 것이다.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은 프랑크 왕국에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으며, 찬란한 서유럽 문화 형성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군사적 승리 하고 문예부흥 일으켜
교육 쇄신 절감…학문적 기초 마련

프랑크 왕국 교육 개혁가 앨퀸 발탁
아헨 궁정학교, 국제적 아카데미로

서적 생산과 도서관 설립 진두지휘
필사본 만들어 성경·주해서 전수

카를 대제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
카를 대제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

카를 대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왕위에 올랐을 때 글을 읽기는 하지만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렇지만 카를 대제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고, 로마 제국의 신화, 언어, 문화 등에 매혹되어 광대한 제국을 문화적으로 쇄신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헨(Aachen)에 있던 자신의 왕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아 고대 문학의 ‘문예부흥’(Renaissance)을 일으켰다. 동시에 카를 대제는 자신을 그리스도교 제국 전체의 황제라고 생각해서 그리스도교의 제도와 신학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이 모든 계획을 실현하려면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 필요했으나 프랑크 왕국 내에서는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카를 대제는 이탈리아 파르마의 회의에 참석했다가 눈에 띄는 학자를 발견했다. 중년에 접어든 그 학자는 모든 분야의 지식이 해박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 능통했다. 카를 대제는 그야말로 프랑크 왕국의 교육을 개혁하기에 최적임자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 학자가 바로 잉글랜드의 요크지역 출신 ‘앨퀸’(Alcuin, 약 735~804)이었다. 요크는 8세기 무렵 그리스 출신 수도자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이래 학교와 도서관이 발전하면서 상당한 학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앨퀸은 782년에 카를 대제의 명으로 아헨의 궁정학교를 새로이 재건하는 일에 착수했다. 과거에는 궁정학교가 왕실이나 귀족 자제들이 기사도를 훈련하는 목적으로만 존속해왔다. 카를 대제와 앨퀸의 개혁은 궁정학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전 유럽에서 훌륭한 학생들이 이 ‘국제적인 아카데미’로 모여들었다. 카를 대제는 궁정학교의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과 함께 온천욕을 하는 동안에도 신학이나 철학 문제에 대해 논쟁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앨퀸이 마련한 스콜라철학의 기초

프랑크 왕국 안에 훌륭한 교사가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교육에 필요한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앨퀸이 왕국 내의 도서관 전체를 조사해 본 결과, 장서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앨퀸이 우선 도서관부터 건립하자고 제안했을 때, 카를 대제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앨퀸은 도서관을 건립하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우선 값비싼 양피지를 확보해 줄 것을 청했다. 결국 카를 대제의 명으로 프랑크 왕국 전체에서 생산된 양피지들은 아헨의 궁정학교와 투르에 있는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필사실로 운반되었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한 앨퀸은 경험이 없는 새내기 필경사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태도로 서적의 생산과 도서관의 설립을 진두지휘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앨퀸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제국을 만드는 데 적임자는 카를 대제라 여겼기 때문에 그의 개혁을 돕는 데 헌신했다. 앨퀸은 교육 개혁에 필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어두운 필사실에서 보냈다. 필사 작업은 추운 겨울에는 손이 동상에 걸릴 정도로 고생스러웠지만, 그리스도교 제국이 완성되는 이상을 꿈꾸면서 펜을 놓지 않았다. 현재 서양 문화가 자랑하는 양피지 필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본 상당수가 그 당시 카를 대제의 명으로 작성된 것이다.

특히 앨퀸은 이 작업을 위해 코르비(Corbie) 수도원에서 개발된 새로운 문자체를 활용했고, 여기서 현재 사용되는 알파벳의 소문자가 유래했다. 카를 대제 이전까지만 해도 대문자만을 주로 사용했고, 각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를 대제는 새로 개발된 글자체의 활용을 적극 장려했다.

카를 대제의 대관식, 프리드리히 카울바흐(1822~1903), 19세기, 뮌헨, 막시밀리안 박물관.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은 프랑크 왕국에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었고, 서유럽 문화 형성의 이정표가 되었다.
카를 대제의 대관식, 프리드리히 카울바흐(1822~1903), 19세기, 뮌헨, 막시밀리안 박물관.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은 프랑크 왕국에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었고, 서유럽 문화 형성의 이정표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 많은 고전 저작들이 사라져서 전수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 대제가 명한 필사작업을 통해 서유럽에 남아 있던 필사본의 숫자는 네 배 이상 증가했고, 그 후에는 전수된 책이 사라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 필사된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은 역시 성경과 그 주해서들이었다. 그런데 카를 대제의 교육 개혁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여전히 문맹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에게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 앞표지를 금과 보석, 또는 상아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게 되었다.

카를 대제와 앨퀸이 함께 이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해 스콜라철학이 태동되었다. 그러나 이 문예부흥은 귀족과 수도자라는 소규모 사회 집단의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에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 교육 개혁의 효과가 유럽 사회 전반에 미치기 위해서는 백년 이상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빠른 시간 안에 변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교육의 진정한 성과는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를 대제는 자신의 대제국이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발전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백년 뒤에야 꽃피게 될 학문적 기초를 마련하여 교육이 ‘백년지대계’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앨퀸은 사심 없이 자신을 희생하여 교육을 쇄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 입안자와 교수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교육자들은 앨퀸과 같이 뚜렷한 사명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편 교육당국과 학부모는 카를 대제와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미래 세대에 희망을 주는 교육이 실현될 것이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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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5) 성화상 논쟁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에 드리운 그림자

등록 :2016-07-14 20:31수정 :2016-07-14 20:51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5) 성화상 논쟁
성 소피아 성당의 금박 모자이크. 중앙에 있는 성모자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성 소피아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금박 모자이크. 중앙에 있는 성모자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성 소피아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다. 중앙 돔의 높이는 55m가 넘고, 직경은 30m가 넘는다. 돔 아래 작은 창문으로는 마법과 같은 빛이 들어와 성당 전체를 가득 채운다.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금빛 모자이크들은 신비스러움마저 자아낸다. 한편 이슬람교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진 8개의 서예 원판은 이와 묘한 대조를 보인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유물이 뒤섞인 성 소피아 성당은 지난 1500년의 세월을 담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몇 차례 재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초기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놀라운 건축물을 건립한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 I, 481~565)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1만명의 인부를 성당 건축에 동원할 수 있는 재력과 더불어 뛰어난 건축 기술도 소유하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 이전의 로마법 전체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 덕분에 비잔틴 제국은 로마 문화의 계승자가 되었는데, 비잔틴이란 단어는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이 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을까?

 

비잔틴 제국 민심이반 원인 ‘성화상 논쟁’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자극받아 군대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군대는 기대를 저버린 채, 그 힘을 정권 찬탈에 남용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죽은 뒤 1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한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에 대한 복수를 빌미로 또 다른 쿠데타가 이어졌다.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인이 국경을 자주 침범했으며, 북쪽에서 침입한 슬라브족은 아예 발칸 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정부는 권력 다툼에 몰두한 나머지, 외세 침략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전혀 보호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이익만 탐하는 지도자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리하여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 제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키려는 국민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오늘날의 시리아와 터키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토를 잃고 급격히 쇠퇴했다.

 

비잔틴 제국, 외세 앞 국민 보호 외면
거대 영토 잃고 급격한 쇠퇴 길 걸어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 잇단 박해
교회 정치참여 차단 위한 정치적 성격

 

멸망 때까지 옛 영화를 회복 못한 제국
돈·권력 추구 행위야말로 ‘우상숭배’

 

비잔틴 제국의 민심 이반을 더욱 부추긴 사건이 바로 ‘성화상(聖?像) 논쟁’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금지한 유대 율법의 영향을 받아서 성상 만드는 일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6~7세기에 이르자 성화가 교회, 수도원, 카타콤바, 가정집을 장식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자들은 특정 성화들이 치유, 외적의 침입 방지, 이교도의 개종 등 주술적인 힘을 지닌다고 믿었다.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성화상 공경을 일부 신학자들이 비판하면서 성화상 논쟁이 시작되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황제 레오 3세는 아랍인들의 침공을 막아낸 뒤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자인 동시에 사제(司祭)이자 왕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던 이교도들까지 포용한다는 명목하에 성화상 파괴를 명령했다.

 

726년 시작된 ‘성화상 파괴운동’(iconoclasm)은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더욱 격렬해졌다. 광적인 성화상 반대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5세는 753년 히에리아(Hieria)에서 338명의 주교를 모아 교회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주교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라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근거로 성인 유해 공경, 성모 마리아께 기도드리는 행위까지 단죄하고 박해했다. 대다수의 주교들은 이에 굴복한 반면, 수도자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으며 반대했다. 그러자 성화상을 공경하던 백성들은 황제와 주교들을 불신하고, 성화상 파괴정책에 맞서 싸우는 수도자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후 황제가 바뀌며 박해는 약화되었고, 어린 아들의 섭정을 맡은 황후 이레네(Irene)는 전임자들의 성화상 파괴정책을 중지시켰다. 황후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로마 교황과 협상한 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자 단죄와 성화상 공경 교리가 확정되었다. 이를 위해 ‘흠숭’(欽崇·latreia)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proskyn?sis)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구별법을 활용했다.

 

814년 레오 5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다시 한 번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는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인 군부가 세운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레오 5세의 뒤를 이어 황후 테오도라(Theodora)가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면서 막을 내렸다.

 

성화상 논쟁에는 민감한 신학적 주제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치적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성화상 파괴운동이 벌어질 당시 비잔틴 제국은 외적에 맞서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황제들은 수도원이 갖고 있던 광대한 토지와 면세권을 빼앗아 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절대군주를 꿈꾸던 레오 3세는 자신의 권위에 예속되지 않는 수도원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정치 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신학적인 논쟁을 이용했다. 성화상 논쟁은 우상숭배 등 교의적인 문제를 떠나, 교회가 전제정치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성화상 파괴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서방 교회와의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방 교회의 로마 교황들은 성화상 파괴 중지 요구와 더불어, 비잔틴 제국 황제가 교의적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비잔틴 제국 황제는 교황들을 체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고, 남부 이탈리아의 교회 재산도 몰수했다. 이로부터 점점 커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입장 차이는 후대에 동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는 계기가 된다.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직경 7.5m의 서예 원판에는 알라, 무함마드, 정통 칼리프들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직경 7.5m의 서예 원판에는 알라, 무함마드, 정통 칼리프들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물관’이 되어버린 비잔틴 제국

 

성화상 논쟁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 황제는 실권을 잃었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 와중에 11세기 말 대규모 셀주크튀르크족이 비잔틴 제국을 침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막아낼 힘이 없었던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보호받기는커녕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십자군의 공격 대상으로 전락하여, 치욕적인 약탈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침입으로 멸망할 때까지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할 뿐 예전의 영화는 결코 되찾지 못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회 세력(Studiti)은 국가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면서 단합된 힘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이 세력은 이후 세속적인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 이성 전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따라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한 서방의 스콜라철학과는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헤시카스트 운동(Hesychasmus)이라는 극단적으로 명상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침체된 분위기를 혁신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제국 자체는 천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6세기에 절정을 이룬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채 과거에 갇혀버린 셈이다.

 

오늘날 성 소피아 성당이 그리스도교의 대성당도 이슬람의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이라는 사실 또한 매우 상징적이다. 이 건물은 성상 공경과 성상 파괴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성화상 파괴론자들은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몇몇 비잔틴 황제는 정치적인 욕심 때문에 성화상 파괴 명령을 내렸으니, 이처럼 돈과 권력만을 숭상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우상숭배에 가깝지 않은가. 현대인들 역시 부(富)나 육체적 쾌락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우상숭배에 빠진 비잔틴 황제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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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2)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 역사란 무엇인가? 2016-07-2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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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통일하고 종교 자유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등록 :2016-05-26 20:58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줄리오 로마노(1520~1524), 바티칸 박물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줄리오 로마노(1520~1524), 바티칸 박물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2)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헬조선을 떠나고 싶다.’ 요즈음 들어 주변에서 자주 듣는 푸념이다. 정치에 대한 환멸, 입시지옥, ‘N포’ 세대를 양산하는 취업 절벽 등이 ‘헬조선’을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우리나라에 대한 실망감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유학 기간을 포함해 10년 넘게 외국 생활을 한 나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과연 자기 국가를 버리고 탈출한 국민을 반겨줄 나라가 있을까?

 

극심하게 박해받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도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매우 컸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피신할 땅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박해의 주범인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 즉 당시 세계 전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00년 가까이 박해가 지속되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평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믿어도 된다”는 복음이 들려온 것이다. 이러한 칙령을 선포한 이는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Magnus, 약 272~337)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불우한 어린 시절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4개 지역으로 나누어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황제가 다스리는, 사분령(四分領) 체제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젊은 장교 시절 소아시아에 주둔했을 때 헬레나라는 여성에게 반했다. 건강하고 발랄한 헬레나는 여관집 딸로, 콘스탄티우스의 열정적인 구애를 받아들였고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콘스탄티누스의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끝이 났다. 당시 서로마의 황제 막시미아누스는 무수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개선한 콘스탄티우스 장군을 자기 딸 테오도라와 결혼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황제는 결혼 조건으로 콘스탄티우스에게 헬레나와의 사실혼 관계를 청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황제의 부마가 되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포함하는 지역의 부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고 나서 동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까지 정치적 볼모로 보냈다. 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상심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울 기회로 삼았다. 그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도와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황궁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암투와 권모술수까지 철저히 파악했다.

 

부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의 원대한 꿈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부황제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그 뒤를 이어 갈리아 지역의 부황제가 되었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인품, 외모, 체력, 키 등 모든 면에서 남들을 압도했다. 더욱이 다양한 경험을 지닌 정예부대를 거느린 그는 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또한 뛰어난 행정력으로 갈리아 지역을 재건함으로써 부하들과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사분령 체제가 혼란에 빠지자, 콘스탄티누스 부황제의 추종자들은 그가 유일한 황제가 되어 서로마 지역 전체를 다스려 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콘스탄티누스와 동고동락했던 부하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무력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막센티우스 황제로부터 ‘로마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예부대 4만명을 이끌고 놀라운 속도로 로마 근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로마 북쪽에 있는 밀비우스 다리 저편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막센티우스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용감한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그날 밤엔 깊이 잠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다. 그러던 중 꿈속에 어떤 표식이 나타났고 “너희 모든 군대가 이 표식을 달고 전쟁터로 나가라.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음성이 생생하게 들렸다. 잠에서 깬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본 표식, ‘라바룸’(Labarum)을 그렸다. 라바룸은 가운데에 글자 같은 것이 있고, 그 주위에 월계관처럼 보이는 것이 둘러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멋진 연설을 통해 부하들에게 신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확신을 주고, 라바룸을 부착하도록 명령했다. 용맹하고 확신에 찬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막센티우스가 강제 동원한 대군을 궤멸시켰다.

 

 

불우한 어린시절 보낸 뒤 황제 추대
분열된 제국 통일하고 새 수도 건설

 

종교자유 허용하고 몰수 토지 반환
교회 부지도 무상제공 ‘관용 정책’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신’
정치적 구상 완성 못하고 337년 사망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밀라노 칙령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리스도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라바룸의 의미를 해석해주었다. ‘팍스’(Pax)의 약자처럼 보였던 ‘라바룸’의 문자는 실제로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XPIΣΤΟΣ)의 처음 두 글자였다. 그 해석을 들은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의 가호를 받아 승리했다고 여겼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로마 사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친숙했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열렬한 그리스도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측면에서도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사분령으로 나뉘어 분쟁이 그치지 않던 로마 제국을 다시 온전히 통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이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려면 전통적 다신교보다는 ‘유일신’을 섬기는 그리스도교가 훨씬 더 적합해 보였다. 그리하여 313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인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각자가 선택한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용”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박해 시대에 몰수한 교회, 토지, 그 밖의 모든 소유물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지체 없이 돌려주었다. 더 나아가 라테란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교회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종교 관용 정책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새 로마 제국의 진정한 통일을 기대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상(4세기),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상(4세기),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콘스탄티노플의 건립과 니케아 공의회

 

그리스도교를 통해 새로운 정신적 기반을 마련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지닌 새로운 이상을 분명하게 보여줄 도시를 계획했다. 그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후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까지 모두 점령했다. 드디어 옛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게 된 ‘대제’ 콘스탄티누스, 그가 보기에 로마는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좀더 동쪽인,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를 새로운 수도로 택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계획도시를 세웠으며, 그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콘스탄티누스 폴리스’, 그 도시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이다.

 

정치 안정과 문화 도약을 이룬 콘스탄티누스 대제였지만, 엄청난 제국을 아우르는 사상적 통일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다. 그는 로마인 전체를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신’이라는 이상으로 일치시키고자 그리스도교를 도입했는데, 그 종교가 자유를 얻자마자 내분에 빠졌던 것이다.

이른바 전통적 그리스도교와 아리우스파의 충돌이었다.

전통적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하느님이라고 믿어온 데 반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파에서는 그리스도를 ‘2급신’으로 보았다. 제국의 이념적 통일을 기대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종교 분쟁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ea)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는 신앙고백(信經)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반발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337년에 사망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밀라노 칙령’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신이 서양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13번째 사도’로 칭송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일했을 뿐 아니라,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 만한 권력과 부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과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인들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역사적으로 놀라운 변화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그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지는 못했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잘 지은 밥처럼 반드시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아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1987년 6월, 군부 독재가 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무렵에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이전에 생각할 수 없던 언론의 자유와 민주적인 투표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또다시 30년이 지났건만 국민들이 꿈꾸었던 국가의 모습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올해 4·13 총선의 놀라운 결과가 없었다면 권력과 언론을 모두 손에 쥐고 있는 오만한 정부가 우리나라를 유신독재 시대로 되돌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비우스 전투 후 로마 제국의 대대적인 혁신을 이루었듯, 우리도 독재 세력을 깨뜨린 6월 민주항쟁과 4·13 총선 체험을 바탕으로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헬조선’을 떠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가장 필요한 시기가 아닐는지.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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