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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30 개설

- 리영희(李泳禧)
아직도 함석헌의 패배주의를 신봉하다니... | - 리영희(李泳禧) 2012-06-0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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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함석헌의 패배주의를 신봉하다니...
<굿소사이어티 칼럼 - '난민촌 대한민국'을 읽는 5가지 코드 ④>
충정은 이해하나 21C 대한민국 지식인들의 역사허무주의는 시대착오
조우석 문화평론가 (2012.04.30 09: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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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해방 전후 등장했던 많은 단행본 중 ‘20세기 한국· 한국인의 책 10권’을 꼽는다고 치자. 10권 안에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넣는 데 많은 분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 책이 젊은 층에 줬던 영향력까지 포함해서 그러하다. 필자 견해를 미리 밝히자면, 그 책은 과대평가된 케이스이다.

함석헌을 지식인의 표상으로 보는 시각부터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는 ‘큰 지식인’보다는, 종교인 내지 문사(文士)의 한 명으로 분류해야 옳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장점인 탁월한 구어체 글 솜씨와 책에 배어있는 충정은 인정하겠다. 젊은 피를 잠시 끓게 했던 역할도 기꺼이 평가한다.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아니다. 함석헌은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아마추어인 그의 고난의 역사관을 아주 선의로 해석하자면, 20세기 고난의 한국사 앞에 걸어본 ‘대역전 한 방의 기대’이리라. 문제는 책 전체에 깔려있는 패배주의 심리이다.

그의 눈에 한국은 “수난의 비렁뱅이”에 다름 아니다. “수난의 여왕이 새날의 임금을 낳으려고 하는 산통의 부르짖음이 6.25이다. 4.19, 5.16이다. 그런데 낳을 힘이 없다. 아기를 낳게 되어가지고도 낳을 힘이 없다는 계집아, 너와 아기가 죽을 것이다”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패배주의 인식은 이 책이 본래는 일제강점기에 저술됐던 한계 탓일까? 아니면 징징대며 우는 걸 고고(孤高)한 태도로 착각했던 함석헌과 ‘작은 지식인들’의 멘탈리티 탓일까? 함석헌은 그 책을 1965년 대폭 개정했다. 하지만 책의 성격은 여전하다.(이런 나의 소수의견 제시가 좀 얼떨떨하시다면, 고정관념을 배체한 채 그 책을 다시 읽어보시길 권유 드린다.)

이번 달 이야기는 지금부터인데, 개정본이 나온 1965년 이후 우리 사회는 천지개벽했다. 20세기 지구촌의 신데렐라 국가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 중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몇 안 되는 국가이며, 더 나아가 근대적 산업경제를 건설하고, 안정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정착시킨 국가”다. 그건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 그렉 브라진스키의 저술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원서 제목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에 등장하는 말이다.

신데렐라 국가로 일어선 한국 현대사는 함석헌 류의 패배주의를 실로 시원하게 넘어선 기적의 역사이다. 누가 감히 그걸 부정하랴?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위상은 생각 그 이상인데, 한국 학계를 지배하는 정서 혹은 패러다임은 또 다르다. 즉 좌파가 주도하는 역사 패배주의 심리, 혹은 역사 허무주의 태도가 압도적 다수이다.

역사 패배주의 혹은 역사 허무주의 심리란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학파(revisionist school) 혹은 신좌파 역사학(New Left history)의 역사관과 일단 비슷하다. 그게 미국에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말 이후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은 소련 탓이라는 전통 학설(traditional school)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즉 서구 68혁명, 즉 대학가를 중심으로 히피문화가 파급되고, 신좌파가 잠시 득세하던 무렵에 등장했던 학문 풍조의 하나였다.

문제는 저들의 움직임이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아주 특별하게 작용했다. 수정주의 시각에 충실하게 쓰여진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폭발적인 현대사 붐을 일으켰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그룹은 그걸 도그마로 삼아 선악사관과 흑백논리로 한국현대사를 전면 재해석했다. 그래서 중-고교 역사 교과서가 그 모양, 그 꼴인데, 그들은 1960~1970년대 개발시기를 회고할 때 습관처럼 “암울했고, 어두웠던 역사”라고 말한다. 이승만의 1950년대 역사 역시 민족의 자생적 꿈이 외세에 의해 깨졌다고 단정한다. 1948년 건국 이후 대한민국 역사를 정통성이 없다고 규정하는 것도 예사이다.

그게 우리 시대 대중정서라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선악 이분법의 논리, 교과서적 의미의 사회정의감에 대한 과도한 신봉, 사회와 역사를 도덕의 잣대로 재는 습관은 실로 안타깝다. 결국은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식의 무력감을 재촉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 즉 함석헌의 명성이 맹위를 떨치던 무렵 사용됐던 엽전의식이란 말도 결국은 같은 범주이다. 엽전의식이란 말은 1920~1930년대 동경유학생들이 자조(自嘲)의 심리로 만들어낸 말이다. 그 말은 이미 사어가 되었다.

그만큼 성공한 산업화의 위력이 컸고 한국인은 자신감을 찾았다. 하지만 학계의 주류는 여전히 역사 패배주의 심리에 물들었고, 그런 지적 유행은 패션이자 큰 흐름으로 변한 상황이라서 출판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좌파연하는 태도는 지식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보호색의 하나이다. 이 기회에 밝히자. 젊은이는 물론 식자께나 들었다는 50~60대까지도 실은 그쪽이다. 멀쩡한 분들, 이 사회의 주류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수두룩하다. 누굴 탓하랴? 패배주의 역사관의 하이라이트가 2003년 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취임사였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

우리의 고질적 대중정서로 굳어진 노무현의 발언은 올해로 10년째를 맞는다. 나는 지금 우리의 상황이 솔직히 무섭다. 해방과 건국 이후의 대하 드라마를 손쉽게 도덕의 잣대로 재고, 울컥 핏대를 내는 태도는 대중의 마음에 이미 분노의 촛불로 켜져 있다. 그게 어떤 계기를 만나 한국 사회를 휩쓸 쓰나미로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그만큼 취약하고, 뼈대가 부실하다.

참고로 지난해 대선 예비주자 중의 한 명인 안철수가 이렇게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은 역사를 거스른다"고…. 그런 식의 인식은 내 눈에는 패배주의 역사관, 역사 허무주의의 아류(亞流)적 레토릭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못난 386의 한 사람”, “철들지 못한 먹물”이라고 본다. 그에 대한 개인적 비난이나 인신공격이 아니다. 그런 한국병이 쌓이고 쌓여 2010년대 초입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는 정체상태이다. 한국적 활력은 여전하다지만, 사회 전체는 우울증에 빠져있다.

이 모든 징후의 뿌리에는 패배주의 역사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실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해결할 방법은 없지 않다. 대한민국 학계의 집단적 자기각성, 그게 최고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작은 지식인’, ‘유사(類似) 지식인’들이 계속 설쳐댈 것이다. 빠른 해결책이 하나 있다. 큰 학자의 큰 저술 한 방이면 된다. 함석헌 정도를 압도할 너른 시야와 명쾌한 글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 명저술의 등장이 실로 기대된다. 염체 없는 고백이지만, 필자인 나도 그 꿈을 키우고 있는데, 남의 탓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언젯적의 함석헌인가? 그가 21세기인 지금도 통한다는 건 지식인의 직무유기에 다름 아닌데, 어쨌거나 큰 지식인의 큰 저술이 통째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최소한 국면 전환은 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뜻있는 좋은 학자-지식인들이 지혜를 모은 진정한 시민 교과서, 국민교양서 시리즈의 연속 등장도 좋다. 야구경기에 비유해보자. 장외 홈런 한 방도 좋지만, 보기 좋은 멋진 안타의 연속에 우리는 지금 목마르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나는 보수다>의 저자(http://www.good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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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패배주의자? "의분강개 주먹이 쥐어 진다" | - 리영희(李泳禧) 2012-06-0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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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패배주의자? "의분강개 주먹이 쥐어 진다"
문화평론가 조우석을 반박하다... 한 시대 지성인의 역할을 아는가
12.06.02 14:37 ㅣ최종 업데이트 12.06.02 15:52 김성수 (wadans)

지난 4월 30일 조우석씨는 한 언론 기고문을 통해 "아직도 함석헌의 패배주의를 신봉하다니..."라며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조씨는 함석헌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 를 '과대평가' 된 책으로 보며 그 이유로는 "책 전체에 깔려있는 패배주의 심리" 때문이라고 적었다.

 

조씨는 함석헌의 "패배주의 인식은 이 책이 본래는 일제강점기에 저술됐던 한계 탓일까? 아니면 징징대며 우는 걸 고고(孤高)한 태도로 착각했던 함석헌과 '작은 지식인들'의 멘탈리티 탓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함석헌, 한국인의 패배주의·맹목적 숙명론의 고정관념 타파하고자 힘써

 

조씨가 언급한 함석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원래 일제강점기인 1933년 12월 31일부터 1934년 1월 4일까지 함석헌이 당시 친구 김교신이 만든 잡지 <성서조선> 독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이다. 그 후 이 강연내용은 독자들의 요청으로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성서조선>에 연재 된다.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

함석헌은 이 <조선역사>(또는 <한국역사>)를 통해 한국인이 역사를 통해서 고난을 받은 것이 단순히 한국이 군사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성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한국이 세계에서의 역할은 "수난의 여왕"이었다고 정의했다. 이어서 세계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우리 사명은 여기 있다.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않고 회피도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데 있다.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세계를 건진다. 불의의 결과는 그것을 지는 자 없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을 위하여, 또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을 져야한다 ---세계의 불의의 결과는 우리가 져야한다, 우리가 그것을 져서 정화하기를 실패할 때 아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불의의 짐을 지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그 짐을 질 수 없다. 그들은 너무 잘났고 너무 높은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해석을 통해,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억눌려 있는 한국인뿐만 이니라, 전 세계 약자와 씨알에게 그들의 사명과 비전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기존 역사관에서 무시되고 격하되었던 '패자'나 씨알의 수난의 대하여 그 정체성과 역할에 역사적 의미 부여를 해주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어둡다는 표현처럼, 한국역사의 굴욕적인 면에도, 함석헌은 역설의 논리로서 한국사의 어두운 면을 통해 그 밝은 면을 부각시킨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은 암울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그 비참한 식민지 상황 가운데에서도, 세계사에 귀중하고 가치 있는 공헌을 해 왔다는 희망과 사명의식을 불러 넣었다.

 

이런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함석헌은 한국인들의 패배주의나 맹목적 숙명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힘썼다. 식민지화된 민족이 가혹한 외적인 조건에도, 그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일은, 민족의 사활, 그리고 미래의 주체적 정신과 직결 되어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위의 조씨 주장대로 함석헌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그 글을 통해 '패배주의'를 주입시켰다면 왜 일제강점기 함석헌이 수감과 고문을 당하고 <성서조선>에 기고한 그의 글이 일제에 의해 검열 받고 발간 금지되는 고초를 겪게 되겠는가?

 

'패배주의'보다는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 진다"

 

  
김교신
ⓒ 함석헌기념사업회
김교신

일제강점기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읽은 <성서조선> 주간 김교신의 반응을 보자.

 

"<성서조선> 본 호 함석헌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1934년 10월 22일)

 

김교신은 함석헌의 "글을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분량이 넘침에도 그대로 실었다고 한다.

 

1935년 3월 31일 <성서조선> 독자가 전남에서 김교신에게 보낸 글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조선역사는 '마침내 어찌 될 것 인고' 하고 호를 기다리던 저에게 <성서조선> 3월호에서 요동 없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아아, 변할 수 없는 섭리를 보여 준 예언입니다." 당시 함석헌의 역사책을 읽은 전남의 한 독자는 조씨가 이야기 한 패배주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요동 없는 희망"을 느꼈다는 편지를 보낸다.

 

또 1935년 4월 5일 김교신은 다른 독자가 보낸 편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천만의외에 소위 위험사상을 가졌다는 청년으로부터. "<성서조선>지를 반갑게 받아 '역사'공부를 합니다. 한국역사 중 「수난의 500년」을 읽고 의인의 피 흔적을 슬퍼하는 동시에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지는 것은 어디다 내 던질는지요."  이 독자 역시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읽고 '패배주의'보다는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 진다"고 그 결의를 드러낸다.

 

1935년 5월 30일 김교신은 함석헌의 <한국역사>가 실릴 <성서조선>을 인쇄소에 가서 교정하는데 그 당시를 이렇게 묘사한다.

 

"함형의 조선역사 수난의 500년 (제4회 임진란부분) 을 교정하면서 자주 눈물을 씻으니, 옆자리에서 교정하는 이들이 나를 기이히 보는 모양이나 할 수 없다....이 망한 백성의 병원(病原)을 깊이 타진하여 그 뇌척수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사하려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의 초판)가있게 된 것이요, 이 강한 빛에 비추어 알고 보니 눈물이다. 출판 허가되는 시각으로 인쇄하기를 부탁하고서 발송하는 날에 지우의 기쁨이 클 것을 상상하면서 활인동으로 향하다."

 

김교신이 <한국역사>를 교정하면서 자주 눈물을 씻는 것도 절망이나 '패배주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정신적 병의 근원을 투사하는 함석헌의 글이 주는 빛이 너무 강해서 나는 눈물이고 그래서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 기쁨, 비분강개, 힘, 용기를 주는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하여 일제는 마침내 검열과 탄압의 칼을 들이 대기 시작한다.

 

1935년 6월 6일 김교신은 "용산경찰서로부터 <성서조선>지에 연재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필자인 함석헌 씨의 주소를 가리키라고 전화가 있었다"고 일기에 적는다.

 

  
상서조선
ⓒ 함석헌기념사업회
성서조선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인 1935년 6월 17일 김교신은 <성서조선> 77호를 다시 편집하여 일제당국에 제출하는데 그 이유를 "<조선역사>는 제목도 둘 수 없이 된 까닭이다"라고 착찹 하게 그 심정을 적는다. 조우석씨 주장 데로라면 한국인의 패배주의를 고무시키는 함석헌의 <한국역사>는 일제가 '권장도서'로 정해서 널리 읽히도록 해야 마땅하지 "제목도 둘 수 없게" 원천봉쇄 하지는 않지 않을까? 최소한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결국 1935년 6월 19일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글월 지금 받자왔습니다. 평강을 빕니다. <조선역사>가 불게재 되는 것 무엇이 불온 하다는지요? 혹 들으셨으면 가급 자세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후 그처럼 어려울 형편이면 <조선역사> 내기를 중지함이 좋겠습니다. 그것을 희생하고라도 <성서조선>지는 서야하겠습니다. 이번 호분도 오늘 발송은 하였는데 보시고 조금이라도 염려되는 점이 있으면 아예 그만두십시오. 금번도 횟수가 너무 길어지고 하여 가급 간단히 쓰려던 것이 임경업에 잡히어 턱없이 길어져서 '500년'은 마칠 예정이던 것이 그리되었습니다. 문구가 문제라면 얼마든지 고치겠으나, 사상이 문제라면 부득이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이기만 하면 하느님은 타 방법으로라도 하게 하시겠지요."

 

당시 <성서조선> 독자가 불과 몇 백 명에 불과 했는데도 일제의 반응이 이렇게 민감한 것을 봐도 함석헌의 <한국역사>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37년 7월 5일 한 독자가 김교신에게 보내 편지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역사다운 역사를 읽지 못한 소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사실같이 생각되나이다. 희망 잃은 조선청년에게도 오히려 내일의 조선을 꿈꿀 수 있음을 느꼈나이다."

 

한 시대 지성인의 역할이란...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

한 시대 지성인의 역할은 민중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함석헌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그 후 권위주의정권 시절 말과 글을 통해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 민중에게 패배주의가 아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지난해 한국조폐공사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을 대표하는 인물 100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로 "비폭력 인권운동으로 민주화 실현에 앞장선 사상가 함석헌"을 선정했다. 평생 돈을 모르고 지내던 함석헌인데 조폐공사에서 한국의 인물로 선정된 것도 참 아이러니다. 생이 아니러니 아닌가?
 
물량주의와 기회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는 이 시대 속에서도, 얼마 전에는 "건국 후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운동가"로 함석헌(77%)이 1위로 선정되었다. 또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20종에도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선정되었다.

 

더욱이 2010년에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아시아출판인들에 의해 아시아 명저 100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심지어 시의 세계와는 멀어 보이는 우리 이명박 대통령조차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애송시라고 답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감히 단언 할 수 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함석헌의 <한국역사>와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씨알의 가슴을 울리고 한국역사와 더불어, 영원한 '씨알의 소리'로 남을 것이다.

 

1938년 10월 7일 김교신은 한 전문학교 학생으로부터 "학우 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차례로 돌려가면서 읽을뿐더러 필사(筆寫)하는 중"이라는 편지를 받는다. 

 

어두운 시절임에도 어떤 이들은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차례로 돌려가면서 밤을 새워서 읽고 필사까지 한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어두운 현실을 이겨낼 강렬한 힘과 무한한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같은 책을 '과대평가'나 '패배주의'로 묘사한다. 참으로 인간은 다양하다.

 

빛이 세상을 비춘다, 그러나 나는 그 찬란한 빛을 눈을 꽉 감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여 줄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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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의 기록 | - 리영희(李泳禧) 2011-12-0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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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의 기록
[서평] <미안해요! 베트남>, 자전거로 돌아본 베트남 민간인 학살지
11.12.02 14:36 ㅣ최종 업데이트 11.12.02 14:36 심규상 (djsim)

  
이규봉 저 <미안해요! 베트남> 겉그림.
ⓒ 푸른역사
미안해요 베트남

"자식들과 임신4개월의 조카며느리를 잃었다. 조카며느리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시신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양쪽 다리를 잡아 당겨 찢어져 있었다."

 

"한국군은 민간인을 학살한 후 노인과 아이들을 잡아 물에 던지기도 했다."

 

이규봉 교수가 최근 펴낸 <미안해요! 베트남>(푸른역사, 350쪽)에 소개된 일부 구절이다.

 

수학을 전공한 이 교수는 2010년 1월 베트남으로 향한다. 이 교수는 다른 일행 3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16일 동안 북베트남 수도였던 하노이에서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지금의 호찌민)까지 장장 1798킬로미터를 종주했다.

 

하루 평균 112킬로미터의 베트남 땅을 달린 이유에 대해 그는 "늘 침략만 당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우리 한민족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잔인해졌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자전거에 몸을 실은 지 오래지 않아 이 교수 일행은 학살의 현장을 접한다.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암 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카인호아성…. 이 교수는 '한국군이 주둔했던 곳마다 어김없이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뒤따랐음을 확인하고 전율한다.

 

생존자들을 만나들은 '기관총을 난사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붙태우고, 아이들이 머리를 짓부수거나 목을 자르고, 여자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고, 땅굴에 몰아넣고 독가스로 질식사시킨' 한국군의 다양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례를 전한다.

 

이 교수 일행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자행한 민간인 학살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일예로 베트남 한 시골마을 여인들이 부르는 자장가 노랫말은 이렇다.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저들이 36명을 죽여 폭탄 구덩이에 시신이 가득 쌓였구나/ 아가야 쭈옹딘 폭탄 구덩이를 기억하거라...'

 

한국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마을은 9개의 학살 장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 교수 일행들은 마을 언덕에서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증오비와 대면하기도 한다.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자전거 일주 (오른쪽이 저자 이규봉)
ⓒ 이규봉
이규봉

이 교수는 베트남 정부가 최근 내놓은 자료를 근거로 베트남전쟁 기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집단학살은 80여 건에 90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 놓치는 것보다는 오인사살이 낫다, 보이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다, 어린이도 첩자다'는 당시 한국군 전술지침을 소개하며 민간인학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데 멈추지 않는다. 그보다는 제주 4.3항쟁을 비롯해 국민보도연맹사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 학살이 베트남 민간인 학살, 광주 민간인학살로 연결돼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 '원전 수주를 핑계로 아랍에미리트 군대 파견'으로 반복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가 베트남 민간인학살지 기행문에 이어  제주 4.3사건 현장 기행문을 비롯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다룬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다룬 여러 책이 출간됐음에도 이 책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기행문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지리와 역사, 베트남 전쟁, 한국의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한국 민간인학살의 공통점을 찾아내 제시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 밖에도 베트남과의 관계를 비롯해 미래를 위한 방향을 깐깐하게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은 박치음 교수가 시를 짓고 곡을 만든 <미안해요! 베트남>의 노랫말로 맺고 있다.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둠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자욱마다/ 어둠속에서 우리가 남긴 부끄러운 흔적마다/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탄텃 씬로이 베트남'

덧붙이는 글 | 저자인 이규봉 교수는 배재대학교 전산수학과에 재직 중이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대전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전국악단 피리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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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뒷모습에서 리영희의 자존심을 느꼈다" | - 리영희(李泳禧) 2011-12-0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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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뒷모습에서 리영희의 자존심을 느꼈다"
[현장] 리영희 선생 '1주기 시민추모의 밤' 행사 열려
11.12.01 10:54 ㅣ최종 업데이트 11.12.01 10:54 구영식 (ysku)

  
11월 30일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관에서 열린 '리영희 선생 1주기 시민추도의 밤' 행사.
ⓒ 구영식
리영희

왼쪽에는 무엇인가를 깊게 응시하는 그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오른쪽에는 그의 저서 <우상과 이성>에 나오는 두 개의 문장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곳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사상의 은사'로 불렸던 리영희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됐다. 11월 마지막 밤, 그를 기억하고 되새기려는 사람들이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관에 모였다. 그가 창간에 참여했고 논설고문을 지냈던 한겨레신문사가 30일 '2011, 나와 리영희'라는 이름으로 '1주기 시민추모의 밤' 행사를 연 것이다. 

 

양상우 <한겨레신문> 사장은 "리영희 선생을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사상, 치열한 삶을 되짚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며 "한미FTA를 강행처리하고 보수언론의 4개 종편이 내일(12월 1일) 출범하는 등 엄중한 시대에 리영희 선생은 우리에게 실천적 함의를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정부에서) 종편 출범 등 말이 안 되는 일이 아주 많이 벌어지고 있다"며 "리영희 선생은 병상에 있을 때도 그런 상황을 질타하는 말씀을 멈추지 않았고, 더 나은 세상이 온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생은 휴머니스트... 이념으로 무장된 분은 아니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보내온 편지를 낭독하는 등의 순서가 끝나고 '리영희가 변화시킨 나와 세계'를 주제로 한 좌담회가 열렸다. 이날 좌담회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백영서 연세대 교수, 김부겸 민주당 의원,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부원장이 참여했다.

 

리영희 선생이 처음 주례를 섰던 유홍준 전 청장은 "저뿐만 아니라 백영서 교수, 유인태 전 의원, 서중석 교수, 김세균 교수 등의 주례를 다 섰다"고 '리영희 주례제자단'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당시 해직상태여서 선생님이 (이렇게) 주례로 생활한 때가 있었다"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유 전 청장은 "리영희 선생은 경직되게 의식화된 분이 아니라 인간적인 분이었다"며 "마티니와 나폴레옹 꼬냑을 좋아하고, 기능성이 좋다며 몽블랑 만년필을 좋아했던 것이 그런 예"라고 말했다. 그는 "리영희 선생은 나폴레옹 꼬냑을 하도 좋아해 그 병에 홈을 내서 전구를 집어넣어 스탠드로 만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유 전 청장은 "리영희 선생은 휴머니스트이고 그분의 이념은 휴머니즘"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는 "선생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얘기했다"며 "이념으로 무장된 분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리영희 선생과 관련된 몇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혼인서약서에는 '나라에 공헌하고'라고 쓰인 대목이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주례사를 할 때 '나라'를 '사회'로 고쳤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선생님이 '거기('나라')엔 파쇼의 냄새가 나서 안돼'라고 했다."

 

"선생님은 유행을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날 사모님이 새로 유행하는 와이셔츠를 사왔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이 못마땅했던지 '당신은 다음부터 옷을 살 때는 10년 전 유행하던 것을 기준으로 사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모님이 '그럼 맞춤으로 하면 될 것 아니에요'라고 응수했다."

 

리영희 선생과의 인연이 깊었던 유 전 청장은 "(좌담회가) 끝나기 전에 선생님 흉을 봐야겠다"고 해서 좌중을 긴장시키더니 이런 일화를 소개해 폭소가 터졌다.

 

어느날 선생님이 "아부도 실력이 있어야지 아무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이런 일화가 있었다.) 80년 강제해직될 때 김연준 한양대 총장이 사직서를 쓰게 하려고 선생님을 불렀다. 김연준 총장이 위대한 작곡가인데 선생님에게 "노래 한 곡 듣고 얘기하자"고 하더니 판을 틀었다.

 

김연준 총장 "노래 좋죠?"

리영희 선생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김연준 총장 "제가 작곡한 겁니다."

 

김연준 총장 "한 곡 더 듣죠. (판을 틀더니) 이 곡은 어때요?"

리영희 선생 "굉장히 좋습니다."

김연준 총장 "이건 베토벤이 작곡한 겁니다."

 

"리영희 선생은 실천적 삶과 공부를 연결시켜주는 균형추"

 

이어 '리영희 주례제자단'의 또다른 일원인 백영서 교수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같은 교도소에 있던) 김지하 시인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며 "그런데 제가 동양사 공부가 지루하다고 하자 '그것은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 감옥에서 나가면 리영희를 만나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백 교수는 "선생님은 정감있고 여린 분"이라며 "군인이었을 때 어머니가 주사맞는 것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로 주사를 엄청 무서워했다"고 전했다. 그는 "하지만 2층 서재에 가보니 신문사 자료실처럼 외국언론기사를 스크랩하는 등 철저하게 조사해서 글을 쓰는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백 교수는 "서울공고를 나온 선생님은 특히 엘리트주의에 반발했다"며 "'우리는 너희 인문계와 다르다'며 자신이 서울공고생인 것을 엄청나게 자랑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내 삶에 리영희 선생은 ◯◯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 삶에 선생님은 균형추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이나 <8억인과의 대화> 등을 두고 '다 아는 얘기'라고 평가한다. 알고도 안 하는 분들이 있는데 선생님은 그처럼 누구나 아는 것을 글로 쓰고 행동한 분이었다. 선생님은 저의 실천적 삶과 공부를 연결시켜주는 균형추다. 오늘 각자 '내 삶에 리영희 선생은 ◯◯이다'에서 '◯◯'를 채워보자."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감옥에 들어가 리영희 선생의 영향력을 실감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김 의원은 "감옥에 갔더니 방장이 인상을 쓰더니 '너 리영희 알아?'라고 물어서 '안다'고 했다"며 "그랬더니 방장이 '그분이 며칠 전까지 이 방에 있었는데 우리가 다 감화됐다'면서 '긴장 풀어'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는 "보안사에 근무하던 친구가 부탁해서 선생님이 주례를 섰는데 '제국주의' 어쩌구 해서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며 "친구들이 '신혼여행도 못가고 신랑이 잡혀가는 것 아니냐'고 농담했다"고 말했다.

 

김병권 새사연 부원장은 "선생님의 따님이 학교 선배여서 그를 졸라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마침 독감에 걸려 누워 계셨다"며 "하지만 1시간 넘게 얘기했는데 '당장 필요하다고 얘기하지 마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2권을 소장한 사연

 

좌담회에 이어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라는 행사가 진행됐다. '리영희 팬클럽' 회원인 김민수(중앙대 4년)씨는 "헌책방에서 선생님의 <대화>를 읽고 역사관과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며 "그런데 청년 중에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선생님을 얘기하면 주위에서 '리영희가 누군데?'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리씨라고 쓰는 걸 보니 황장엽이랑 같이 내려온 사람인가 보다'고 말한다(웃음)."

 

리영희 선생을 중국에서 두 번 가이드했다는 최만원(조선대 강사)씨는 "저는 두 번이나 선생님의 전신을 본 사람"이라며 "사모님을 빼고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어 리영희 선생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두 권이나 소장하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1주일간 중국 가이드를 하면서 엄청나게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것을 현상소로 바로 가져갔으면 괜찮았을 텐데 카메라를 여는 바람에 사진을 쓸 수 없게 됐다. 선생님은 '음…'만 하시며 아무 얘기를 안 하셨다. 그런데 선물로 준 선생님 책에다 '사랑하는 후배 박만원군'이라고 썼다. '아 이렇게 복수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걸 기억했는지 귀국하자마자 저한테 전화가 왔다. '최군 미안해.' 그래서 (나중에) 다시 '사랑하는 후배 최만원군'이라고 써주었다. 그렇게 해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을 2권 소장하게 됐다." 

 

최씨는 "이후 다시 선생님을 가이드하게 됐을 때 제가 '제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달라'고 하자 선생님이 '사회과학하는 사람이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20여분간 엄하게 꾸짖었다"며 "제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거슬렸던 모양"이라고 회고했다.

 

통일운동가 임수경씨가 "선생님은 지식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다"고 회고한 데 이어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던 김선주 전 논설주간은 '자존심'이라는 열쇠말로 리영희 선생의 삶을 풀어나갔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 남편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복수가 차서 배가 불렀다. 내가  배를 만지면서 '언제 만삭이 되셨어요? 이제 해산하세요'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왜 남의 남자 배를 주무르냐'고 농담했다. 이에 사모님이 '당신이 남자에요? 환자지'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북한의 한 몰락한 인물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는 그렇게 자존심 있는 인간이 좋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유언으로 간직하고 있다."

 

김 전 주간은 "선생님은 젊었을 때 까칠했고 여자 후배 언론인들을 높게 치지 않아서 가깝게 가지 못했다"면서 "그런데 4~5년 전 '나 리영희올시다'라며 전화가 왔다"고 회고했다.

 

"그날 아침 신문에 실린 내 칼럼을 칭찬해주기 위한 거였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든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칼럼이었다. '아 선생님과 내가 서로 코드가 맞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조선일보>에서 해직됐을 때 참언론을 하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기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조선일보>를) 나온 것이다."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의 꿈을 얘기했다"

 

이어 김 전 주간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눈물겹게 노력했던 리영희 선생의 일화를 몇가지 더 소개했다.

 

"(해직됐을 때) 선생님은 3남매의 가장이었지만 글을 팔지 않았다. 전집을 들고 책외판원으로 나섰다. 시청 앞 지하도가 가파른데 그것을 들고 다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얼어붙은 지하도를 오르내렸다. 이것이 선생의 자존심이었다. 또 기억나는 게 있다. DJ, 노무현 정부 때였다. 산본에서 전철을 타고 언론재단 앞에서 열리는 집회나 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모임에 끝나면 저녁 9시, 10시였다. 당시 장관들이나 의원들 중에 후배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사가 딸린 차로 모셔갔다. 하지만 선생님은 혼자 절둑절둑 지팡이를 짚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에서 선생님의 자존심을 느꼈다."

 

김 전 주간은 "선생님은 '저 세상'을 소망하거나 기대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이 세상에서 사는 문제를 항상 얘기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 세상'의 꿈을 얘기했지 '저 세상'의 꿈을 얘기하지 않았다."

 

김 전 주간은 "지난 서울시장 선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되찾아가는 것 같다"며 "개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민족으로서 자존심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시대지만 언제든지 (선생님처럼) 자존심 있는 인간들은 태어날 것"이라고 낙관론을 펼쳤다.

 

한편 리영희 선생의 1주기 추도식은 오는 5일 오전 광주광역시 망월동 묘역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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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꿈꾸게 하신 리영희 선생님 | - 리영희(李泳禧) 2011-11-0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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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꿈꾸게 하신 리영희 선생님

갑사동네서 어우렁 더우렁 살기 2011/11/07 21:57 이프

 

단풍이 절정이던 지난 주말에는 집을 바로 몇 백 미터 앞에 두고 차를 길옆에 주차하고 집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도로가 꽉 막혔었다. 전국에서 이렇게 몇 시간 보자고 찾아오는 동네에서 24시간을 살고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가을엔 단풍이 꽃이다.




목조주택을 짓는 건 지난 번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벤쿠버 목수님의 도움으로 한결 진도가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이전에 상의를 드렸던 분은 내가 준비한 돈이 충분치 않아 며칠 고민을 하셨다는데, 벤쿠버 목수님이 캐나다에서 목재를 직접 들여오면 1/3가격에 관세만 물면 된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마침 일이 생겨 내년 봄에 한국에 올 예정이라고. 그러니 그 분이 편하게 일을 보면서 공사도 할 수 있으면 그 분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 뒤에 짓는 도반들을 위해서도 좋은 길이 열리게 되었다. 3~4년 이프 독자셨다니 비단 옷에 꽃까지 얹었고나.  에헤라 디여~



리영희 선생님과 유토피아



리영희 선생님...

선주스쿨(한겨레신문 김선주님 회갑을 맞아 후배들이 만들어 선물한 사이트) 선배들의 주선으로 리영희 선생님 부부와 1박2일 놀기도 하고, 함께 김성녀의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을 보기도 했다. 우리들 ‘오빠부대’와 함께 하실 때마다 선생님은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고 좋아하셨다. 아내 윤영자의 발을 맛사지 해 본 것도 처음이고, 연극을 감동적으로 즐긴 것도 처음이라셨다. 연극이 끝난 뒤에는 뒤편의 숲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들이 마련한 작은 학예회, 오락회도 즐기셨다. 



2008년 추석, 리영희 선생님이 추석을 맞아 여기 저기 안부전화를 하고 있다며 내게 전화를 주셨다. 뭐 재미있는 거 없냐고... 나는 봄에 공동체 오로빌에 다녀왔던 것, 그리고 늦여름에 공동체를 과제의 하나로 여기는 명상모임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 등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꼬치꼬치 이것저것을 물으셨다.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는 40여분이나 이어졌는데 다 들으시고 “오늘 참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흡족해 하셨다.



선생님은 토머스 모어가 500년 전에 쓴 『유토피아』를 꼭 다시 정독해 볼 것을 여러 차례 권하셨다. 다들 그것이 허구이고 공상사회라고 하지만 그렇게 넘겨버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팩스로 『유토피아』 책에 끼워두셨던 신문기사를 보내주셨다.



Utopia Fact of Fiction -by Larainne Stobbart... 로레인이라는 여자가 쓴 책에 대해 <가디언 위클리>의 편집자 리차드 가트가 쓴 기사에는 유토피아가 허구의 사회가 아니라는 견해가 적혀있었다. 로레인은 남편을 따라 멕시코에 살게 되었는데 멕시코에 있었던 유카탄 반도의 마야문명이 바로 유토피아와 같은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위의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재했던 사회였다는 걸 그동안 세상은 왜 극구 부인하려고 했던 것일까?



공동체 연합이었던 유토피아



나는 10월 18일 대학로 민들레영토에서 리영희 선생님 부부를 모시고『유토피아』강독회를 열었다. 참석자는 주부, 학생, 종교개혁가, 방송인, 공동체마을 대표, 여성학자, 소설가 등 다양했다.



대학시절 과제를 위해 『유토피아』를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다시 보니 놀랍게도 『유토피아』는 공동체연합이었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사유재산이 없으면서 필요한 만큼만 노동하는 나라, 금을 천한 것으로 여겨 죄수들의 족쇄 등으로 사용한 나라, 도시와 농촌의 사람들이 2년에 한번씩 교류하며 집을 바꿔 살아가는 나라, 윤리적으로 엄격해 간통을 두번 저지르면 사형에 처하지만 지극한 쾌락을 추구하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오백년이나 흘렀음에도 현재까지 『유토피아』가 이상적 사회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지배하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으며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창의적인 삶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경쟁으로 치닫는 현대는 멈춤이나 공생, 옆을 돌아보는 여유가 없다. 이런 때일수록  시대를  지혜롭게 넘어설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을 길게 보고 스스로를 성숙시키면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라!”



“이렇게 천박한 자본주의가 백년을 넘겨갈 수 있겠는가. 지혜로운 대중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유토피아는 54개의 공동체가 연합한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새삼 놀랐다.(사진 오마이뉴스 이명옥기자)




리영희 선생님은 2010년 12월 우리 곁을 떠나셨다. 떠나시기 석 달 전인 9월 우리는 아드님 자택의 잔디밭 위에서 ‘마지막 학예회’를 열었다. 선생님은 며칠 전부터 이 시간을 기다리셨다고 했다. 복수 때문에 힘들어하실 선생님을 생각해서 딱 한 시간만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선생님이 너무 흥겨워하셔서 해가 저물 때까지 학예회는 진행되었다.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여러 번 묻고 또 물었어요. 내가 정말 바르게 살아왔나. 나의 인생은 과연 무엇이었나. 게으르거나 잘못한 일은 없었나. 그런데 좀체 해답이 잘 나오지 않았어요. 오늘 여러분을 보고 비로소 생각해요. 그다지 잘못 산 것은 아니구나 하고 말이지요.“



▲꽃 중의 꽃, 리영희꽃. 삼천만의 가슴에 피었네, 피었네, 영원히 피었네. (사진/ 선주스쿨 이바닥)


▲배운지 한 달 된 해금솜씨로 부끄럼도 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섬집아기를 켰다. (사진/ 선주스쿨 이바닥)



선생님, 우리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도 부족한 선생님. 탁한 세상의 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자 스스로 고초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천박한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 다른 이들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는 세상, 약삭빠르게 계산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며 사랑을 나누는 세상, 세상 만물에 감사와 축복을 보내는 세상... 우리가 발을 내디뎌 볼게요. 꼬옥요...



                                                                                                           -고은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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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 - 리영희(李泳禧) 2011-04-1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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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저 | 개마고원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니 오히려 한국의 현대사에서는 개인의 불행이 사회의 행복에 기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리영희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60% 저널리스트, 40% 아카데미션”인 리영희는 한국 현대사에 최상급의 증언과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은 곧 그의 무기였다. 언로가 폐쇄되고 사실과 진실의 발설에 보복이 가해지던 상황에서 글은 곧 실천, 그것도 무서운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리영희만큼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더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겪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굽힘 없는 글쓰기를 통해 현실을 고발했고, 그러는 가운데 누구보다 더 넓은 행동반경에서 살아왔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그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아 이상하게 변해가고,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의 치열한 현실 밀착적인 글쓰기가 곧 그의 글에 현실적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어떤이들은 그를 ‘의식화의 은인’이라 불렀고, 병영체제 수호를 위해 애쓰던 사람들은 ‘의식화의 원흉’으로 보았다. 개인적 삶에서는 최소한의 방어조차 거부했던, 시종일관 “흐트러지게 걷지” 않으려 했던 리영희는 아홉 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도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1012일에 이른다.

질곡 많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것은,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실천적 글쓰기의 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이 곧 한국 현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이다.

康俊晩 한국 사회에서 '유별나다'라는 평가를 받는 얼마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한명. 사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에게 '유별나다'는 평가는 흠이 되지는 않을 지는 몰라도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다. 모름지기 지식인이라면 '젊어서는 관직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물러나서는 후학 양성에 힘쓰는' 선비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강준만은 '유별난' 지식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강준만은 그런 소리들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입바른 소리를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세력에게나 퍼부어대며 책을 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별나다'는 사람은 강준만의 입바른 소리가 성가신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이라면 겸손하고 자신의 의견을 직선적이고 감각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지식인 상에서 강준만은 완전히 반대쪽 극에 서있다. 강준만의 문체는 매우 직선적이고 도발적이라는 점에서 읽는 이를 통쾌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리고 강준만에 제기하는 문제 또한 그의 문체를 닮아 있다. 왜냐하면 강준만이 문제삼는 부분은 많은 부분이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준만의 비판은 더욱 전투적이고 신랄할 수 밖에 없다. 지역주의와 연고주의, 학벌 중심 주의, 비합리주의 등의 요소는 현재의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 일종의 행동 규칙으로 정착된 면이 있다. '좋은 것이 좋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강준만의 비판은 바로 그러한 '은밀한 합의'를 불편하게 만드는 면을 가지고있다. 그런 점에서 강준만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그의 문체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강준만의 비판의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너무나 직선적인 문체가 오히려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나아가서는 문제 제기 자체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까지도 동의 의사를 표현하기에 부담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공격적이 방식은 논리와 합리성에서 벗어난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강준만의 대답은?
"매달 원고지 600장 분량의 글쓰기 작업을 한다. 그래서 문장과 논리가 거친 게 사실이다. 그게 내 단점이자 한계다. 그러나 내 글쓰기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교양이나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왕따」당할 각오를 하고 우리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다"

지식인의 역할로 규정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준만은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한 사회과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지식인의 사명이 바로 지식의 대중화에 있다고 여긴다. 굳이 대중이 지식을 생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좀 더 쉽고 간편하게 지식을 유통하고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그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생활문화 사전』,『나의 정치학 사전』,『한국인을 위한 교양사전』,『세계문화 사전』,『선샤인 논술사전』,『대중문화의 겉과 속』(전3권),『한국인 코드』,『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글쓰기의 즐거움』,『대학생 글쓰기 특강』,『인간사색』,『한국 현대사 산책』(전18권) ,『한국 근대사 산책』『지방은 식민지다』, 『고종스타벅스에 가다』, 『입시전쟁 잔혹사』『대한민국 소통법』,『행복코드』『미국사 산책』,『세계문화전쟁』,『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특별한 나라 대한민국』 외 다수가 있다.


머리말

제1장 1940년대: ‘완전한 무질서’ 속에서
제2장 1950년대: 전쟁과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
제3장 1960년대: 기자의 열정으로 ‘신들린’ 세월
제4장 1970년대: 전환시대의 ‘우상과 이성’
제5장 1980년대: ‘광주 학살’의 광기 속에서
제6장 1990년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제7장 2000년대: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맺는말: 북한엔 ‘리영희’가 존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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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김삼웅 | - 리영희(李泳禧) 2011-04-17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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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저 | 책보세(책으로 보는 세상)


야만의 시대, 우상의 칼에 맞선 이성의 펜

“사상의 은사”에서 “의식화의 원흉”까지, 한국현대사 참 지성의 봉우리로 우뚝한 언론인 리영희의 파란곡절로 점철된 생애와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낸 평전이다. 『장준하 평전』,『김대중 평전』등 거목들의 일대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정리해 온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펜을 들었다. "민주와 자유 그리고 오로지 진리에 봉사한 휴머니스트” 리영희의 생애와 사상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조명한 이 평전은 자서전『역정』과『대화』는 물론 십 수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글을 아우르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리영희론’을 수렴하여 정리하고 평했다.

이 평전은 저자와 리영희와의 깊고도 오랜 교감과 저자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잘 익은 된장”이다. 숱한 평전을 써온 저자의 지론대로 “평전은 시비是非를 치우침 없이 다루는 것”이지만 “실명비판으로 악명(?)을 떨친 강준만의 필하筆下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리영희인지라 역시 이 평전에서도 비非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있다면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 엄혹했던 야만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일인분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리영희로서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겠지만 1989년 화갑을 맞아 그 ‘잘못’을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비로소 “가족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리영희의 글은 방황하는 지식인에게 양심을, 주린 민중에게 밥을 주었다. 밥이 되는 양심을 나눠주었다.” 리영희의 그런 진면목을 조목조목 그리고 종합적으로 그려낸 이 평전은 “평생을 우상 타파에 바친 이성의 파수꾼”의 바이러스를 다시 퍼뜨리는 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현대사연구가 및 정치평론가. 1943년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다. 소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 및 하버드대학교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다. 「민주전선」과 「평민신문」의 편집국장 및 「민주당보」 주간을 거쳐 김영삼, 김대중씨와 함께 20여 년간 반독재 야당언론인으로 싸워 왔으며, 1998년에는 「대한매일」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그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독립기념관 이사, 백범 학술원 연구위원,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제7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성균관대학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정치문화를 가르쳤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친일정치 100년사』, 『한국 민주사상의 탐구』, 『해방 후 양민학살사』, 『금서』, 『한국필화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겨레유산 이야기』, 『보는 사람 없어도 달은 거기 있는가』, 『왜곡과 진실의 역사』,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위서』, 『白凡 金九全集』, (12권, 공편)『박은식, 양기탁 전집』, (10권, 공편)『단재 신채호전집』, (9권, 공편)『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 년』, 『박열 평전』,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안중근 평전』, 『장준하 평전』,『김대중 평전』,『리영희 평전』등이 있다.


책머리에_ 우상의 칼에 맞선 이성의 펜

제1장 평생을 우상 타파에 바친 이성의 파수꾼
‘리영희인’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
루쉰을 글쓰기와 생활의 은사로 삼다
권력의 탄압을 무릅쓰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다
지식청년으로 무엇보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다
병마를 딛고 일어나 다시 우상타파에 나서다

제2장 유복한 출생 그러나 고단한 성장
운산에서 태어나 삭주에서 자라다
공무원 아버지와 부잣집 딸 어머니
가족의 ‘민중사’로부터 저항과 비판의 뜻 키우다
서울 유학 중 근로동원으로 학업을 중단하다

제3장 8.15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청년 리영희
고향에서 일제패망과 민족해방을 맞다
혼란기의 서울,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다
해양대학생이 되어 반탁운동을 하다
교사 재임 중 통역장교로 입대하다
전시의 최전방에서 군대의 비리와 모순에 분개하다
청렴으로 일관한 삶, 부친 회갑연도 못 차리다
리영희의 길, 마르크 블로크의 길

제4장 4월 혁명의 격랑에 온몸을 던진 기자의 혼
합동통신 외신기자로 사회 첫발을 딛다
이승만의 폭정을 보며 변혁의 시대정신에 눈뜨다
궁핍을 팔아 기자의 정도를 지키다
《워싱턴포스트》지에 ‘진실’을 기고하고
‘장학생’으로 미국 연수를 가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4.19혁명 일선에 나서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혁명의 실상을 기고하다
대학교수들, 학생들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다
《뉴리퍼블릭》지에 중립화 문제를 기고하다

제5장 기자 리영희와 군인 박정희, 그 숙명의 대결
5.16쿠데타에 분연히 반대하고 나서다
잇따른 ‘특종 사고’로 군정의 탄압이 가중되다
공약을 저버린 박정희, 리영희의 계속되는 ‘특종 사고’
13평짜리 ‘진보의 성지’를 마련하다

제6장 잇따른 필화와 강제해직의 수난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이직, 첫 필화와 회사에서 활극
베트남 취재 거부로 사직을 강요당하다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알리고 참상을 고발하다
외판원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합통통신에 복직하다
본격적인 논문 발표,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다시 해직당하다
줄담배와 배갈 그리고 치열한 글쓰기
중국 근대화 100년사 탐구 그리고 ‘조건반사의 토끼’
‘전환시대의 논리’로 사상의 단비를 뿌리다

제7장 행동의 길로 나선 사상의 은사
대학교수가 되어서 더욱 치열해지다
반이성에 대항하는 글쓰기와 더불어 사회운동에 앞장서다
중국문제연구소 설립으로 지식에 날개를 달다
냉철한 ‘이성’으로 ‘우상’의 심장을 쏘다

제8장 우상들과 투쟁, 감옥에서 한철
D검사와 리 교수의 ‘웃기는’ 논쟁 3막
‘정찰제’ 재판과 상고이유서 감옥에서 보낸 ‘불효’의 나날
‘투사’가 되어가는 아내 감옥에서 들은 ‘우상’의 사망소식

제9장 피로 물든 서울의 봄 그리고 외로운 호랑이와 그 벗들
피로 물든 ‘서울의 봄’ 그리고 조작된 ‘내란음모죄’
루쉰의 글을 통해 5공체제를 비판하다
일제 말기의 친일군상과 일본 교과서 왜곡의 본질을 말하다
한 시대를 지탱하고 지켜낸 ‘양심’들과 교감하다
자서전 집필 중 끌려가 ‘북괴 찬양선동죄’로 구속되다

제10장 뒤늦은 복직 그리고 숱한 간난 끝에 얻은 자유의 날개
‘미문화원 방화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서다
뒤늦은 복직 그리고 친일부역자 비판
23년 만에 얻은 ‘자유의 날개’로 일본에 가다
독일 연구소 초청으로 아내와 유럽 여행을 떠나다
한국이 베트남에 사과부터 해야 하는 이유

제11장 6월 항쟁과《한겨레》그리고 방북취재기획
우파의 ‘부패’와 좌파의 ‘분열’에 일침을 놓다
버클리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편 자서전을 정리하다
국민이 만든《한겨레》창간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다
주한 미국대사에 반론을 제기하고 세기의 논쟁을 제안하다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로 또 하나의 우상을 깨다
방북취재단 ‘사건’으로 정권의 탄압을 받다
곡필 언론인과 기회주의 지식인을 질타하다
파란곡절의 60년 화갑을 맞아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다

제12장 동구권의 변혁과 현실사회주의 패배 선언
세계변혁의 길목에서 ‘역정’을 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다
‘자유인’의 표상, 북한 학자와 심포지엄에서 만나다
‘문민정부’에 좌절, 그래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제13장 꺼지지 않는 이성의 불꽃
결혼 40년 만의 작은 행복, 온수 나오는 집과 유럽여행
리영희가 여전히 비종교인일 수밖에 없는 까닭
‘퇴장선언’에도 불구하고 펜을 내려놓을 수 없는 까닭
‘못다 이룬 귀향’의 슬픔, ‘준법서약’의 굴레를 벗긴 기쁨

제14장 다시 누가 있어 그의 이성을 이을 것인가
반세기의 ‘신화’와 싸워온 ‘동굴 속의 독백’
병상에 누워, 다시 거꾸로 도는 역사의 시계를 보는 슬픔
자서전 출간, 그리고 절필선언에 따른 ‘리영희 생제문’
노령에 터진 상복賞福도 ‘시대의 상심’에 위로가 되지 못했다

제15장 리영희, 마지막 인터뷰

닫는 글_ ‘1인분의 역할’의 의미를 되새기며
편집후기
연보
각주
찾아보기



“사상의 은사”에서 “의식화의 원흉”까지, 한국현대사 참 지성의 봉우리로 우뚝한 언론인 리영희의 파란곡절로 점철된 생애와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낸 ‘최초의 평전’이 그와 오랜 교감을 나눈 후배 언론인 김삼웅에 의해 리영희 생전에 나왔다. “민주와 자유 그리고 오로지 진리에 봉사한 휴머니스트” 리영희의 생애와 사상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조명한 이 평전은 자서전《역정》과《대화》는 물론 십 수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글을 아우르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리영희론’을 수렴하여 정리하고 평한 최초의 책이다.

야만의 시대, 우상의 칼에 맞선 이성의 펜

우선 이 평전의 저자 김삼웅부터가 평생을 언론인으로서 비판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대표적인 비판언론인으로 통한다. 그런 저자에게 선배 언론인 리영희는 일찍이 경외의 대상이자 사숙의 스승이었다. 1996년 삼인출판사 개업식에서 리영희와 저자는 나란히 축사를 했다. 개업식에 나온 막걸리를 서너 잔이나 마신 리영희는 얼굴에 표도 나지 않았고 저자는 한 잔만 했는데도 혼자 다 마신 양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저자는 이를 빗대어 리영희에게 “선생님, 진실이란 뭘까요?” 하는 화두를 꺼내어 한참 ‘진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998년이 저물어갈 무렵《서울신문》주필로 있던 저자는 리영희에게 원고 청탁을 하는데, “《서울신문》에는 안 쓴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저자는 “내년부터 제호를《대한매일》로 바꿔 면모를 일신하려 한다”고 설득하여 이후 1999년 ‘리영희와의 신년 대담’을 성사시키고 그 사회를 보게 되면서 각별한 인연을 쌓아갔다. 저자가 독립기념관장으로 있던 2006년 리영희는 저자의 초청으로 독립기념관에서 강연하는 등 두 사람의 교감이 더욱 깊어졌다. 이듬해 저자는 리영희의 자택을 방문하여 주 2회씩 6개월에 걸쳐 장장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리영희 전문가’가 되고 말았다. 2006년 리영희가 자서전《대화》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하자 저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한 신문에 「리영희 생제문生祭文」을 쓰기도 했다. 리영희는 그동안 저자가 쓴 10여 권의 평전을 모두 꼼꼼히 읽고 잘못된 부분까지 지적하여 편지를 보낼 정도로 자신의 성정을 닮은 이 후배 언론인(저자)을 각별히 아꼈다.

이 평전은 저자와 리영희와의 이런 깊고도 오랜 교감과 저자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잘 익은 된장”이다. 숱한 평전을 써온 저자의 지론대로 “평전은 시비是非를 치우침 없이 다루는 것”이지만 “실명비판으로 악명(?)을 떨친 강준만의 필하筆下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리영희인지라 역시 이 평전에서도 비非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있다면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 엄혹했던 야만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일인분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리영희로서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겠지만 1989년 화갑을 맞아 그 ‘잘못’을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비로소 “가족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김훤주(경남도민일보 기자)가 정의한 대로 “언론인 리영희는 진정한 특종 기자다. 세계 정치의 맥을 잡아 혈을 찔렀다. 그런 특종 기사가 부지기수다. 국내 질서는 휘어잡았으나 국제 질서에서 비루했던 이 땅의 권력자들을 끝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참된 지식을 궁구했고 또한 기꺼이 나누었다. 독서의 넓음과 깊음은 현대사를 통틀어 따를 자가 별로 없고, 그에 바탕을 둔 글쓰기는 비겁한 삶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글은 방황하는 지식인에게 양심을, 주린 민중에게 밥을 주었다. 밥이 되는 양심을 나눠주었다.” 리영희의 그런 진면목을 조목조목 그리고 종합적으로 그려낸 김삼웅의 이 평전은 “평생을 우상 타파에 바친 이성의 파수꾼”의 바이러스를 다시 퍼뜨리는 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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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 ‘1인분의 역할’ 의미를 돼새기며 | - 리영희(李泳禧) 2011-04-17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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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연재를 마치면서] 리영희 선생 ‘1인분의 역할’ 의미를 돼새기며

리영희 평전/리영희 평전 연재를 마치면서 2010/08/28 08:00 김삼웅



저는 <리영희 평전>을 쓰면서 솔직히 후회했습니다.
그의 청렬(淸洌)한 생애와 넓고 깊은 사유, 지식의 세계를 가늠하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인쇄사>)을 쓰면서 나는 자신이 벅찬 일에 손대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처음에 그 능력의 정도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1949년 조세프 애임스가 <인쇄사>를 쓰고 나서 느낀 생각과 비슷했다고 하겠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국토의 변방에서 태어나 군국주의 교육을 받고 해방과 더불어 월남하여 등록금이 없는 해양대학에 들어가 졸업하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지원 입대하여 7년간 ‘통역장교’로 복무했습니다. 이어서 언론사 외신부 기자로 시작된 언론활동과 대학교수 생활은 계속된 강제퇴직과 투옥으로 점철되고, 그런 속에서도 지성과 이성으로 무장한 예리한 필봉은 멈추지 않았고, 행동은 둔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사회에 깊숙이 똬리를 튼 우상들을 격파하는 전사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시대에 저들과 싸운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이 적지 않지만, 리영희 선생처럼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운 지식인도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 비판자들의 싸움의 대상이 국내 정치에 한정되는 1국주의에 멈췄지만 리영희 선생의 경우는 독재의 ‘배후’에도 초점을 맞추고, 반제투쟁에 나선 나라의 인민과 지도자들의 시선에서 거짓을 밝히고 우상의 심장에 비수를 드리대는 국제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관심의 대상과 폭이 그만큼 넓고 깊은 인텔리켄챠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광신적 반공주의와 시대착오적 냉전사상을 비판하면서 분단 체제에서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무리들의 허위의식을 벗기고 그들과 지치지 않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저들에게는 ‘국가폭력’과 진실과 여론을 손쉽게 조작하는 거대 미디어가 있었고, 백을 흑으로 조작하는 검찰권과, 기소장과 판결문을 똑같이 복사해내는 사법권이 있었습니다.

‘의식화의 원흉’, ‘친북좌경’, ‘사회주의자’등 색깔론과 마녀사냥이 계속되고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저자는 감옥에, 저서는 금서처분하는 현대판 분서갱유를 자행했습니다.

4월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이성’의 사회도 결코 만만치 않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상의 은사’, ‘운동권의 대부’, ‘저항지식인의 대명사’, ‘진보지식인의 살아있는 시대정신’ 등 그에게 ‘가시면류관’이 헌정되었습니다. 기회주의, 변절, 곡필, 어용 등 속물지식인, 언론인이 판치는 사회에서 청절과 청렬함을 지켜온 데 대한 헌사였습니다.

당신은 당신 속에 시대의 갈등을 요약하고 있었고
그 갈등을 몸소 살아가려는 열정을 통해
그 갈등을 초극하였습니다.
당신은 가장 복합적이고 가장 풍부한
하나의 체르소나였습니다.


리영희 교수(자료사진).ⓒ 오마이뉴스 권우성

사르트르가 카뮈의 삶을 묘사해서 쓴 헌사를 리영희 선생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리영희 선생은 우상과 그들의 뒷배를 봐주는 제국주의와 싸우면서도 결코 따뜻한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잃지 않았습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역전의 용사’인데도, 그의 표정은 늘 밝고 인성은 맑으며 어눌한 말에서도 유모어가 넘칩니다. 한가할 때는 음악회나 오페라를 구경하고, 아파트 응접실에서는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리영희 평전>을 마치면서 저는 그에 대한 단답식의 평가를 유보하고자 합니다. <일리야드>를 한마디로 규정하거나 <팔만대장경>을 열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것처럼, 리영희 선생을 어떤 형의 인물이라고 규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능력과 연구 부족의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그는 명징한 언론인, 교수, 학자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1인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지식인이란 사실입니다.

아울러 덧붙이고자 한다면, 그의 많은 저작물이 자신의 말대로 시대의 흐름과 함께 결코 ‘시효’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의 글은 여전히 ‘현재성’이 되고, 그의 뜨거운 사회의식과 역사인식은 이어져야 할 이 시대의 가치이고 정신적 자산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 간교하고 표독하고 몰상식한 우상들이 도처에서 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10월(28일), 산본 그의 집에서 뵜을 때 여러 가지 화제 중에 백범 김구 선생 얘기가 나오고, 근년에 고인이 되신 ‘의열 청년’ 곽태영 씨가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테러할 때, 신문사 외신부 부장으로서, 생면부지의 그를 불러 저녁과 술을 사 주었다는 ‘비화’를 소개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그만큼 의열의 남아이고, 불의, 비상식을 참지 못하는 저항인입니다.

지은 글은 키만큼 높았으니
당대의 젊은이에게 물어보라
사숙한 제자 얼마나 많은지
깨우치고 이끌어 동시대 영재들을
격동시켰으니
뒤 이을 인재 그 뉘인가.

著作等身
試問當代英年
有幾多私淑弟子
燈淸攬轡
深慨同時群彦
更唯是繼起人才


중국의 5.4혁명을 이끈 정신적 지도자 양계초의 사망에 여석산(閭錫山)이란 학자가 쓴 조문의 한 구절입니다. 이 글 역시 리영희 선생에게 그대로 바쳐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인용했습니다.

리영희 전 교수가 2010년 4월 9일 오후 병문안을 온 정연주 KBS 전 사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심규상


4월혁명 50주기인 지난 4월 19일부터 연재해온 <리영희 평전>을 마무리하면서, 천안함 침몰사건과 전시작전권의 3년 7개월 연장 등 의문스럽고 부끄러운 일련의 사태를 리영희 선생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지켜봤으면 어떤 분석과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의 조속한 쾌유를 빕니다.

그 동안 앞의 두 사건과 지자제선거, 월드컵축구, 6월 보궐선거, 세종시와 4대강 문제 등 거대한 이슈와 뉴스의 홍수 속에서도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과 <오마이뉴스>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이름은 낯익지만 존재는 낯선”, 해방 뒤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 편입니다.
계속하여 편달과 애독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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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내막 폭로, 파병군 잔학행위 고발 | - 리영희(李泳禧) 2011-04-17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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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회] 베트남전쟁 내막 폭로, 파병군 잔학행위 고발

리영희 평전/[8장] 필화와 강제해직의 수난 2010/06/04 08:00 김삼웅

리영희가 굴러온 ‘호박덩굴’을 거부하고, 자신의 밥줄까지 짤리면서 베트남의 ‘위로출장’을 거부한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훨씬 이전부터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인민들의 식민지 해방과 반제국주의 독립투쟁, 사회혁명 등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나라 인민들의 입장에서 전쟁을 보는 시각에서 기사를 썼다.

한국군이 파병될 무렵에 국내 신문이 ‘반공성전’,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투쟁’으로 묘사할 때도 그는 전쟁과 파병을 반대하는 세계의 양심적 여론을 소개했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의도를 폭로했다.

한국이 한국인에게 손가락질을 한 번 해본 일이 없는 베트남인을 죽이기 위해서 연 몇십만명의 군대를 파병하게 된 계기와 배경을 아세요? (주석 12)

리영희의 물음이다.

외신부에 몸담으면서 여러해 동안 베트남문제에 천착해온 리영희는 1985년 <베트남전쟁>이라는 저서를 낼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먼저 그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몇 부문을 발췌한다.

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스페인전쟁’(1934~1936)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근대에 들어서 동서양에 허구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의 현대에서만도 전체 지구를 덮은 처절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스페인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가르켜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동란’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세력이고 다른 한쪽이 반공주의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동란을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로 획일화했던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바로 그 ‘반공산주의’의 주도자로 그 동란에 뛰어든 미국이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은 베트남 동란의 복잡한 성격과 배경을 지나치게 단색적으로 도식화했던 결과이다.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고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갔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지명(胡志明)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과 대결했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대엔 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또는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다지는 강화조약인 제네바협정으로 국토와 인민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프랑스연합군은 각기 군사분계선의 북쪽과 남쪽으로 철수하여 집결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은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2년 후인 1956년 7월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통일되도록 한다”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약속된 총선거에서 호지명의 승리가 확실한 것을 예상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남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고딘디엠을 들여보내 총선실시의 거부를 선언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거니와, 베트남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제국주의·독립투쟁·식민주의·혁명·반혁명·통일·분열·독립·의존·인권·종교·자유·억압·반색인·황색인·아시아·서양·현대·낙후·공업·농업·초현대식 폭격기·원시적 소총·전자계산기·주판·선입관·고정관념·사랑·증오‥‥, 그리고 그 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의 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주석 13)

이같은 베트남전쟁에 파병하여 베트남 인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한국군을 미화하는 글을 지식인으로써, 언론인으로써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리영희의 베트남전쟁의 음습한 내막 폭로는 이어진다.

1964년 8월 2일에 일어난 소위 ‘통킹만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월맹에 대한 무차별 전면공습을 개시한 건 65년에 들어서예요. 그런데 이 ‘통킹만사건’이라는 것은, 미국 군대가 얼마나 치밀하게 허구를 날조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날조사건이야. 쉽게 말하면, 월맹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공해상에서 어느날 순찰을 하고 있는데, 월맹 어뢰정이 야밤에 그 공해상에서 그 구축함에게 어뢰공격을 했다는 거요.

미국은 이것이 공해상에서 일어난 미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전 세계에 발표해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미국 군부와 전쟁주의 세력은 의회 상하원에서 월맹에 대한 ‘대통령의 무제한의 전쟁수행전’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어. 말하자면 ‘선전포고’격이지. 이 권한을 거머쥔 전쟁주의 세력과 미국 군부가 월맹에 대한 소위 북폭이라는 무제한의 전면폭격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베트남에서만 진행되던 미국의 전쟁을 북베트남까지 확대한거야.
(주석 14)

미국이 베트남 폭격의 배경으로 삼은 ‘통킹만사건’은 미국 전쟁세력이 날조한 것임이 <워싱턴포스트>에도 폭로되었다.

리영희는 베트남 인민해방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지명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1990년대 중반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하노이 소재 ‘호지명박물관’을 비롯하여 전쟁기념관, 호지명 묘소를 두루 둘러봤다.

그가 평생 베트남의 지도자로서 살던 관저, 대통령궁이라는 것이 얼마나 검소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의 대통령 집무실과 침실이라는 것이 야자수 목재를 엮어서 만든 남방 특유의 구조인데, 무슨 자그마한 방갈로 같았어. 베트남 인민들이 호지명을 ‘호지명 대통령’이니 ‘호지명 각하’따위의 경칭으로 부르지 않고, 마치 집안 어른 대하듯 ‘호지명 아저씨’라고 부른 연유를 알 수 있었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어. (주석 15)


주석
12) 리영희, <대화>, 344쪽.
13) 리영희, <베트남전쟁>, 5~6~7쪽, 두레, 1985.
14) 리영희, <대화>, 344~345쪽.
15) 앞의 책, 347~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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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의 역정(歷程), 항심(恒心), 그리고 대화 - 리영희, 사상의 은사 | - 리영희(李泳禧) 2011-04-17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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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의 역정(歷程), 항심(恒心), 그리고 대화 - 리영희, 사상의 은사
게재일 : 2006-02-03  조회수 : 1,665
글 / 최성일(출판평론가) robli@freechal.com

‘메트르 드 팡세’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정권이 대량 학살했던 이른바 ‘광주사태’로 내가 투옥됐을 때, 『르 몽드』 동경 특파원 퐁스 기자가 한국 사태 긴급취재를 와서 『르 몽드』의 파리발 첫 보도에 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큰 은사)’라고 썼어요.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의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가 잡혀갔다고요.”
-『대화』 중에서

리영희(李泳禧, 1929- )의 생애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다니던 언론사에서 두 번 쫓겨나고, 재직 중인 대학에서도 두 번 해직되었다. 모두 당국의 강압에 따른 강제적인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옥고를 다섯 번이나 치르며 3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등 따시고 배부르게 잘 지냈을 텐데 그는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을까?

“난 박정희 정권 말기와 특히 1980년의 전두환 집단의 광주 대학살이 있었던 그 시기에는 수사학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고 질식할 것만 같았어. 그리고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오늘보다 더 암담해질 내일을 견디어야 할 절망적 상태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중압감에 시달렸어요.”

고등학생이던 1980년대 중반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뻘쭘하게’ 앞으론 말을 가려서 해야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1984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가 주관한 ‘각급학교 교과서 반통일적 내용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구속∙기소되었다가 2달 만에 풀려나면서 한 말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의 짧은 인터뷰를 통해 나는 리영희와 간접적인 첫 대면을 하였다. 이어 그의 책읽기가 시작되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스핑크스의 코』까지

리영희는 다작의 저자다. 연구서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나남출판, 2003)에서 김만수가 정리한 “리영희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의 목록은 모두 19권이다. 여기에는 편역서와 공∙편저서가 일부 포함됐으나, 2005년 출간된 『대화』(한길사)는 빠져 있다. 19권 가운데 단독저서는 9권이고, 개인선집에 해당하는 책이 3권이다. 나는 전작(前作)에 실렸던 베트남 관련 논문을 모은 『베트남 전쟁』(두레, 1985)을 개인선집으로 분류한다.

김만수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대기만성형이다.” 리영희는 45세에 첫 책을 펴낸다. 40대 중반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한 세대 전 대개의 저자나 연구자에겐 집필과 연구 의욕이 정점에 이르렀거나 한풀 꺾일 무렵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리영희는 수천 쪽에 달하는 책을 쓴다. 김만수가 셈한 “19권의 전체 쪽수는 7015쪽이다.”

나는 비교적 출간 순서대로 리영희 선생의 저서를 읽었다. 20년 전 무심코 집안에 굴러다닌, 형들이 보던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1974)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은 출간 당시만 해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맨 앞에 놓인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부터 그랬다.

이 글은 『뉴욕 타임즈』의 베트남 정책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 폭로보도를 다룬다. 리영희는 『뉴욕 타임즈』의 용기를 교훈 삼아 당시 우리 언론의 암담한 현실을 일깨우려 했다.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또한 민주정치에서 진실과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반드시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이다. 그러기에 비판을 봉쇄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개선과 향상이 없고 그 결과는 더한층의 타락이며, 타락한 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은 탄압에 호소하는 악순환 속에 침체할 수밖에 없다.”

반지성적인 매카시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어섯눈 뜰 무렵의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민주주의 자체가 ‘적극적 개념’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否定)개념이며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1971년 발표한 이 글에서 리영희는 미국 사회의 “학문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반공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공포정치의 책임”을 당시 대통령 닉슨에게도 지운다.

리영희 선생이 인용한, 미국에서 ‘빨갱이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라넷트 핸드라는 판사의 경고는 갓 스무 살이 된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될 때 그 사회는 벌써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 우리 사회도 그렇게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동아』(1973년 7월호)에 실렸던 「외화와 일본인」은 1970년대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매춘관광을 언급한다. 얼마 전 정부가 “외국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성들에게 통행금지 시간을 면제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이야기의 실마리다. 평범한 여성지에 이런 글이 게재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예의 독자의 둔한 현실감을 일깨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면책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돈으로 국민이 얼마나 부해지며, 국가가 얼마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와 국민의 도덕적 타락, 비인간화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서는 경제발전을 못한다는 말일까. 그렇게 해서까지 외국인을 끌어들이고 외화를 벌어야 하는 것일까.”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베트남 전쟁을 다룬 논문 2편은 왜곡된 그 전쟁의 실체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에도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이 3편 실려 있다. ‘30년 베트남 전쟁의 전개와 종결’을 부제로 하는 『베트남 전쟁』(두레, 1985)은 이 다섯 편의 글을 담은 책이다. 『우상과 이성』은 리영희 대표저서 중 하나다. 초판 서문의 한 대목은 저자의 집필동기와 의도를 함축한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금서다. 제5평론집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두레, 1987)에 수록된 「『우상과 이성』 일대기」에 따르면, 이 책의 초판은 수명이 아주 짧았다. “『우상과 이성』은 정사생(丁巳生)이다. 1977년의 해가 저물어가는 11월 1일을 생일로 하여 세상에 태어나, 11월 23일 사형선고를 받은 단명하고도 단명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 짧은 인생에는 백년의 인생에 해당하는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저자에게 큰 고초를 안긴 것은 그 사연의 하나다. 리영희는 1977년 12월 이 책이 『전환시대의 논리』, 편역서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 1977) 등과 한데 엮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80년 1월 만기 출소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은 1990년대 중후반 우리 사회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전환시대의 논리』 그 후’를 부제로 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의 표제글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의 최초 발설자인 미국의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가 아니라 리영희 선생에게 ‘2차 저작권’을 갖게 하였다.

“인류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정치나 이념적으로 말해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그리고 그 사이는 끝없이 풍부하다. ‘우’의 극단에 서면 우주의 모든 것이 ‘좌’로 보이게 마련이다. 조금 거리가 멀면 모든 것이 ‘극좌’로 보일 수밖에 없다. ‘좌’도 그 극에 서서 보면 모든 것이 ‘우’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극’의 병리학이다.”

『스핑크스의 코』(까치, 1998)에서는 지금 남아 있는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과 왕과 왕비의 석상, 그리고 스핑크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코가 뭉개진 사연이 가슴을 친다. “중세에 이집트를 점령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창조했던 이교도 우상들의 생명의 원천인 ‘숨(호흡)’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석상들의 코를 모조리 깨버리고, 얼굴까지 뭉개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문화와의 공존을 용납하지 않는 반달리즘의 원조가 서구 기독교인이라는 얘기다.

『반세기의 신화』― 진실 드러내기의 ‘항심(恒心)’

나는 리영희 교수의 ‘팬’이다. 리영희 교수의 저서는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동광출판사) 말고는 모두 갖고 있다. 1984년 출판된 이 책은 그가 엮어 지은 거라서 리영희 교수의 단독저서는 거의 다 읽은 셈이다. 그런데 지난 연말 출간된 리영희 교수의 가장 최근 저서인 『동굴 속의 독백』(나남출판)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그 이유는 『동굴 속의 독백』이 ‘선집’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지난해 고희를 맞이한 리영희 교수에게 후학들이 헌정한 기념문집이기도 하다.

『반세기의 신화』(삼인)는 『동굴 속의 독백』보다 한 계절 앞서 작년 가을 출간된 리영희 교수의 근작 평론집이다. 더러 예전의 글이 수록돼 있기도 하지만 리영희 교수의 최근 생각이 담겨 있는 책이다. 내용은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남북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는 『분단을 넘어서』(한길사, 1984)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으나, 리영희 교수의 모든 저작을 관류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까닭에 이 책 역시 또 하나의 『전환시대의 논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반세기의 신화』가 “민족분단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문제에 관해서 우리들이 ‘진실’일 것으로 믿어 왔던 온갖 ‘거짓’들의 정체를” 밝히는 데 진력하고 있어서다.

리영희 교수의 진실 드러내기는 실증적인 자료와 그것에 대한 엄밀한 해석을 통해 이뤄진다. 남북문제 또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작년 여름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남∙북한 해군 사이의 무력충돌과 관련한 글만 해도 그렇다. 이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는 ‘정전협정문’과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 등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한번 우리를 미망의 세계로부터 구출하고 있다.

10여 년 전 발표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가 아니다」라는 글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남한의 극우 반공주의 세력과 개인은 ‘닭똥’을 ‘무릇’이라 우기고 있으니, 이를 어찌 할꼬. (위 글은 국제민주연대가 펴낸 인권과 평화이야기 『사람이 사람에게』 2000년 1∙2 창간호에 실린 『반세기의 신화』를 다룬 리뷰의 일부다.)

리영희 선집과 리영희론

『동굴 속의 독백』(나남출판, 1999)은 리영희의 “30년에 걸친 글 중에서 비교적 부드럽고 짧은, 그리고 가볍고 일상적인, 그런 유형과 주제와 내용의 글들을 대강 추려 모”은 선집이다. 또한 이 고희기념 선집은 글쓰기에서 선생의 엄밀함을 엿보게 한다. 다음은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에서 김만수의 지적이다.

“두 개의 새 글을 제외하면 『독백』의 글은 모두 이전 책에 실린 글을 재수록한 것이다. 그런데 글을 서로 비교해보면,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표현과 서술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해 고친 흔적이 거의 대부분의 글에 보인다. 『독백』의 출판을 위해 리영희가 글을 읽고 일일이 다시 교정을 했다는 말이다.”

‘범우문고’ 101번째인 『인간만사 새옹지마』(범우사, 1991)는 리영희의 산문선집이다. 이 책은 비록 분량은 적어도 문학성 짙은 문체를 만끽하게 한다. 물론 더욱 돋보이는 것은 꼿꼿한 주제의식이다. 「언제부터인지, 어째서인지」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서 질서와 안정의 착종된 의미를 따진다.

“‘높은 사람’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사회의 질서가 아니라 다만 시민이 현존 질서나 체제에 반대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는 것을 ‘질서 있는 사회’라고 부른다. 학생이 길에 나와 데모를 하지 않는 사회, 노동자가 하루 몇 푼의 임금을 받고 상당액을 자본주에게 빼앗겨도 파업을 하지 않거나 꿈쩍 말고 12시간을 일한 뒤에 주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그런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보는 것 같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중에서

리영희가 말하는 ‘질서 있는 사회’는 “소박한 생각의 대다수 시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통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또 “안정된 사회 또는 질서 있는 사회라는 것은, 그리고 어떤 내용이건 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이념과 생존의 유기적 원리를 갖춘 사회라는 것은 국가권력의 작용이 적을수록 건강한 것이다.”

김만수의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는 선생에 대한 사상적 평전이다. 이 책에서 김만수는 리영희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본다. “리영희는 글로 진실을 밝혔고 평생 그 진실대로 실천하였다.” 그런데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동시대적 인물’인데다 ‘시대의 양심’과 ‘의식화의 원흉’으로 엇갈리는 세간의 인식 탓에 조심스럽고 어려움이 따른다. “이 평전은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 그러한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다.”

강준만 편저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개마고원2004)는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거리들을 보게” 하는 책이다. 강준만은 말한다. “리영희만큼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그 누구보다 더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겪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글은 곧 실천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넓은 행동반경에서 살아왔다. 리영희의 삶이 곧 한국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고난의 『역정』과 『대화』

리영희의 『역정』(창작과비평사, 1988)은 아주 뛰어난 자서전이다. 이 책의 아쉬움은 선생의 반생을 담았다는 점뿐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나눈 대담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집대성한 『대화』(한길사, 2005)는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인생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다.” 『역정』과 겹치는 내용이 없지 않지만 흠은 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의 나쁜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신생 독립국 군과 경찰의 태생적 한계를 짚은 대목은 아직도 뼈에 사무친다. 육십갑자가 지났어도 그 유산이 우리의 현실을 옥죄고 있는 듯하여. 그래서일까. 아래와 같은 ‘증언’과 ‘성찰’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한마디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의 극치와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사회였지. 인간의 행동과 생존양식에서 모든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된 것이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였어. 그때의 남한 사회는 오직 폭력, 무질서, 범죄, 사기, 약탈, 부정, 타락이 아무런 절제도 없이 난무하고, 힘없는 자는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는, 그야말로 반인간적인 사회였지.”

“해방 후 남북한 사정의 이런 대조는 한국의 반공주의적∙우익적 개인 또는 세력이 무슨 말을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지. 남한 사람들은 싫건 좋건 이 사실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해야지, 기분 나쁘다고 배격만 해서는 영영 발전할 수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광적인 반공주의자나 극우적 사고방식을 지닌 이해관계의 집단들이 6∙25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북한과의 전쟁 내지 군사적 대립을 국가와 국민의 상시적인 삶의 기본정신으로 고수하고 강조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과 이런 사상의 집단들이야말로 우리 남한사회와 국민들의 염원을 배반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파괴하는 세력인 것을 알 수 있지 않아요?”

군 제대 열흘째 되는 날 리영희 선생을 청중의 일원으로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를 직접 대면한 소감을 독서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사상의 은사, 국보적 자산이라는 평가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역정』, 『역설의 변증』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이영희 선생님의 저서(『자유인, 자유인』)를 독파했다. 먼저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감흥을 적어 보자. 지난 토요일(10.13) ‘90서울도서전이 열리는 올림픽 공원 내의 제1체육관을 찾았다. ‘저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선생님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서였다.

책을 통해서 접한 선생님의 성품으로 (미뤄봤을 때) 이런 자리는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그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인기작가가 스스로 추천한 자신의 책이라는 코너(임)에도 자신은 연예인적 지식인은 아니시라며 인기 앞에 反자를 크게 써놓으셨다. 아까 소설가 고원정 씨의 자리 때보다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선생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위해 멀리서 온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선생님의 첫마디는 이런 자리라면 여러분께는 미안하지만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씀이셨다. 모든 책임은 출판사 측에 있었지만, 나처럼 선생님을 존경하고도 직접 만나 뵐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다. 다음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면 밤을 밝힐 만큼 진지하고 좋은 자리였다. 주최 측의 무례함도 잊으신 듯 소란스런 장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질문마다 성의 있게 대답해주셨다.

(대부분의 내용은) 책을 통해서 익히 알았던 것들인데 다음의 두 가지는 말을 통해 들어서 (그런지) 더욱 쉽게 이해가 가고 공감이 되었다. 뚜렷이 기억에 새기기로 (한다). 첫째가 ‘ Simple Life, High Thinking’(이)라는 생활신조다. 단순한 생활에 고차원적인 생각쯤 될까. 선생님의 소지품을 다 내보이시면서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셨다. 지하철의 정기승차권이 인상적이었다. 이렇다할 물건이 집에는 없지만 책만은 예외라 하셨다.

둘째, 통일이라는 추상적인 목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라셨다. 즉, 최대의 장애물인 군사적인 문제의 해결. ‘역시’ 한 위대한 인간과의 만남이었다.”

「영국의 속담에 ‘A man′s ability to stand noise is in the reverse proportion to one′s intelligence’라는 말이 있어요. ‘소음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지적(정신적) 수준과 반?례한다’는 뜻이지요. 소리와 몸짓의 광란, 이런 것은 교양∙이성∙지성 측면의 결핍을 뜻한다는 말이오. 물론 영국 상층 지식인들의 인간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튼 목적이 뚜렷한 사회적 의사표시이거나 사회정의를 위해 다른 방법이 없는 약자들의 생존의 외침이 아닌, 평상 상황이나 일반 문화적 표현으로서는, 그것이 연극이건 음악이건 길가의 장사이건 학교의 행사이건, 나는 시끄러운 것은 못 견딥니다. 그래서 소란스러운 곳을 피하지요.」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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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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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의 기획리뷰>를 연재하고 있는 최성일 님은 《출판저널》 기자로 출판계에 입문해 출판평론가로 활동 중입니다. 출판평론가라는 직함보다는 서평가라는 명칭이 더 적확한 표현이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명칭이 통용되지 않는 까닭에 출판평론가는 어쩌면 일종의 타협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깐깐한 분이기도 합니다. 주로 출판 전문 매체에 북 리뷰와 출판 시평을 쓰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1,2』『테마가 있는 책읽기』『미국 메모랜덤』『베스트셀러 죽이기』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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