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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무력으로 슬픈 세상 | 나의 리뷰 2007-05-2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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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力(무력)으로 슬픈 세상.


세종로 한 가운데에서 위용있는 모습으로 서있는 충무공 이순신.
세상을 호령할 듯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동상을 세운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고 잘 알려져 있다. 또 예전부터 어린이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으레 '이순신 장군요'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이순신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 앞에 초라한 숫자의 배를 몰고 나가 세계 해전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을 낚아올린 명장이며, 한 국가의 운명을 단신의 몸으로 보전한 당대의 영웅이자, 사심없는 충의(忠義)로 이루어진 교훈적인 생의 화신, 정치 모략에 희생된 비극적인 인생, 영광의 정점에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완결되는 영웅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이순신은 '칼의 노래' 안에서 김훈의 펜 끝에서 다시 탄생하였다. 무모하리만큼 한 가지 목표, 의로운 죽음을 향해 나아간 한 장수의 생이 이 소설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소임을 후임자 원균에게 넘겨주고 의금부로 압송되었던 이순신이 정유년(1597) 4월 초하룻날 풀려나 백의종군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시작된다.
이순신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소설은 그의 전기에서 흔히 보아 온 어떤 영웅에 대한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충효애민의 초월적 심성, 드라마틱한 무훈담의 주인공인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두려움을 참아 내며 울음을 삼키는 한 영혼의 나약한 실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 앞에 스스로를 소멸시켜 가는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지닌 그저 한 인간으로서 존재했던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청동의 모습으로만 보아왔던 그는 소설에서 수없이 울었다.
사직에서 절하며 우는 임금을 걱정하며, 젖비린내 선한 아들의 죽음이 서러워, 적들에게 쫓기어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칼찬 자신이 부끄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며 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책은 그저 이순신이라는 실존 인물이 그 시대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힘은 당시의 왕조 사상, 봉건적인 충성심, 사직에 대한 맹목적 충성 이러한 중세적인 가치에 의했던 것이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궁금해진다. 온 천지간에 가득 찬 적들하고 홀몸으로 싸워 나가는 한 사내의 모습. 일인대 만인의 처절한 싸움. 말하자면 어떤 사람 한 명과 이 세계 전체와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인데 과연 그 사람에게 이런 싸움을 싸워 나갈 수 있는 힘, 그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발현하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서 이런 일인대 만인의 싸움을 인간은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역사책은 이 부분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체제가 요구하는 가치에 의해서 그런 엄청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보았을 때 김훈의 이 소설은 그 사람의 희망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역사를 나름대로 보완해 주고 있다. 절망적이었지만 또 다른 절망으로 그것을 돌파할 수 밖에 없었던 처절했던 한 인간의 싸움, 거기에 설득력있는 정당성을 부여한 것. 그게 김훈이 이 소설에서 이루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김훈이 제시한 이순신에게 있어서의 충도 아니고 효도 아니고 그런 정체적인 가치를 벗어나는 가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김훈은 우선 이 소설의 시점을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나')은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이순신이 아니라 이순신을 둘러 싸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나로서의 이순신이다. 주인공은 '이순신'이 아니라 '나'로 규정지어짐으로써 객관적 역사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주관적인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술되어 있는 객관적 역사가 개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왔는지, 거시역사 안에서 일일이 읊지 못한, 후세가 기억하지 못할 죽음과 서러움들을 낱낱이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김훈이 선택한 방식은 수려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문체의 사용이다. 김훈의 문체는 일단 냉정하고 절망적이다. 소설에서 이순신의 생은 자비와 정의로 포장되지 않고 날로 보여진다. 김훈은 영웅된 자의 비극과 남해 바다의 풍경의 밤과 낮을 집중과 분산된 문체로 엮어 내려간다. 수려한 풍경을 묘사하는 문체에 비해 그의 심리와 내면을 대변하는 문장을 매서우리만치 짧고 날카롭다.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함 조차 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문체 자체로서 그 잔혹함은 잔인하다거나 자애롭다거나 하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게 된다. 단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냉정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적이 아군의 귀를 잘라가니 할 수 없이 이순신도 코를 잘라오라고 명령한 것은 이순신이 잔혹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당시를 살았던 장수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나약한 조정의 수군 장수로서 적들이 그렇게 하듯이 적의 머리통을 베어 소금에 절였다.

다음은 이순신의 일상에 대한 묘사이다.
그는 기록한다.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꼼꼼하게도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소이탈, 정보 유출, 투항 미수, 부녀자 강간, 영내 절도, 군수물자 횡령, 작전명령 불복종, 공문서 변조, 유언비어 유포, 허위 보고와 민간인의 개를 잡아먹은 부하 등 군율을 어긴 부하들을 목베고 가두고 때렸다. 또한 그는 전투에서 달아나 고향에 숨어 있는 자들은 그 은신처까지 형리를 보내서 기어코 목베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이순신은 냉정하게 기술한다. 그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아픔을 비로소 그려 볼 수가 있었다. 왜 백성은, 또 이순신은 그런 삶을 살아야 했나 우리는 미약하게나마 그 시대를 감지해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가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죽음 앞에서 엄숙했다. 그에게는 바다에서 적의 칼을 받아 죽는 것이 가장 의롭고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이순신은 살기 위해 임금에게 아첨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의연하게 나아갔다. 그토록 자연사를 바랐던 그에게 죽음은 절벽처럼 확실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을 종용하는 적은 비단 왜뿐만이 아니었다.
왜군이라는 주적 뿐만 아니라 혈육과 백성, 여자와 부하들을 향한 가여워 하는 마음과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사직이라는 헛것의 무내용 모두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내부의 적, 아니 짐이었다.  그들에 맞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이순신은 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의 가엾음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운명에 대한 전율에 식은땀을 흘리며 죽음을 향해 돌진해 나간다.
헛것과 적들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정치란, 사내란, 운명이란 무엇인가.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숨을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바다에서 이순신은 늘 머물 곳이 없었고, 쉼 없이 영(營)과 진(陣)과 전(戰 )의 길을 찾았다.
그의 관념 속에는 오직 적뿐이었으며 그가 고려해야 할 현실 원칙은 오직 바다뿐이었다. 그리고 물길과 바람, 그리고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만이 그를 평화롭고 의로운 죽음으로 인도해줄 동무였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아들 면의 젖비린내와 여진의 가랑이에서 풍기던 젓국냄새를 기억하는 고통, 그러나 통제된 슬픔, 그러한 내면의 억눌림이 그의 외로운 전쟁을 버티어준 마음의 힘이었다.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는 것만이 아들과 여진과 백성과 장졸들을 잃은 그가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소명이자 목표였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는 이순신의 개인사에 치중하는 반면 충과 효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효가 부정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차이는 충효라는 중세적 가치에 한 인간의 인간성과 존엄한 권리가 매몰되느냐 아니냐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충효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순신이 전쟁을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그를 지탱해 간 의지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기가 의롭게 죽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그 목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은 자신의 자연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임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를 존경하거나 종묘사직을 지켜야겠다는 정의감에 불타오르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의 아들 면을 죽인 자를 직접 처단하는 한 아버지일 뿐이고 그가 바다에서 적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가 남해를 수호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에게 있어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게 있어 적이 적이고, 적에게 있어 내가 또 하나의 적이라면, 반드시 내가 이겨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적은 적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인 죽음과 울음으로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들도 역시 그들 하나 하나가 왜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하는지 모른채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으리라. 거기서 해답을 얻지 못하는 이순신 역시 전쟁에 대한 회의를 품고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전쟁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는 결코 적보다 우월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연사를 위해 그는 전쟁이 멈추어지길 바랐고 그러려면 자신이 적의 피로 바다를 물들여야 했다. 그 외의 의미는 없었다. 내가 적을 쳐야 하는 이유는 내가 적보다 옳고 우월해서가 아니다. 전쟁은 나와 적, 같이 힘을 합쳐 멈춰야 하는 것이고 나는 하나의 정의가 아니라 단지 적에게 있어서 다른 또 하나의 적일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허무주의를 엿볼 수가 있다.

이순신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허용했던 당대의 가치. 그것은 유형만 조금 바뀌었다 뿐이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가 자명하다 생각하는 이 시대의 가치. 그것은 칼이 아닌 또다른 형태의 폭력에게 정당성을 허용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갖가지 형태의 필요악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거기에 이순신의 칼-정당성을 부여받은-로서 비로소 맞설 힘을 갖게 된다. 이순신에게 칼은 그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그를 자연사로 인도할 구원품이었고,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용기였다. 장수의 칼은 목숨을 베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적과 내부단결을 해치는 아를 가릴것 없이 칼은 인간 목을 겨눈다. 상대 칼 또한 내 목을 벤다. 장수는 칼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칼날로 생을 연명한다.
 칼은 우리를 절대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수단으로서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칼은 결코 노래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이순신의 칼은 단 한 번도 노래하지 않는다. 명의 군사들이 취한 노래를 부르고 그들을 위로하는 관기들의 노랫소리가 높아도 칼은 그저 징징징 울 뿐이다.

칼은 슬프다.
무엇이 그리 슬픈가. 그것 칼 역시 또 하나의 武力(무력)이기 때문이다.
무력(武力)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 때에나 지금이나 가엾고 슬프다. 아무리 정당하고 의롭다 해도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하는 힘을 휘두르기 때문에 이순신은 슬펐고 괴로웠으리라.
그러나 작가 김훈이 소설에서 이순신의 손에 쥐어준 칼은 약자에게 절실한 힘이었다. 우리는 약자였기 때문에 우리의 임금은 그리도 많은 날 동안 무릎을 꿇고 울었고, 그래서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적군의 머리통 50개를 가져다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입장에 놓여져 있는 우리에게 폭력적인 악이 지배하는 세계를 돌파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주어진 최소한의 무력. 그게 바로 칼이었다.

김훈은 역사 속 장수를 불러내어 희망 없는 세상을 보여 주었다. 정의는 없고 생존만이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이순신의 내면)속에 독자를 끌어들이고 나서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는다. 충절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다. 단지 무내용과 무의미함으로 가득 찬 세상만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김훈은 흔히 충절의 표상으로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이순신을 둘러싼 모든 역사적 가치를 전복시켰다.
『칼의 노래』는 나라를 구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명의 운명’이 마주 부딪치며 울음을 우는 소설이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충무공은 오늘도 덤덤하게 서 있다.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사계절이 순환하는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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