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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 그니 리뷰 2021-09-1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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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김용택 저
문학과지성사 |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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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 ]


 

이슬 내린 풀밭을 걷다 뒤돌아보았다 이슬길이 나 있다

내 발등이 어제보다 무거워졌다

내가 디딘 발자국을 가만가만 되찾아 디뎌야 집에 닿을 수 있다

 

 

[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잘 왔다

어제와 이어진


이 길 위에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준다

해야 바람아 흰 구름 떼야

내 자리를 찾아온 여러 날이 오늘이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고요에서 태어난 바람이 온다면

가벼이 날아오를 수 있다

기다려라 마음이 간 곳으로 손이 간다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둔다

 

[ 내 눈에 보이는 것들 ]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을 마른 낙엽 같은 슬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새들의 얼굴에 고요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

 

한 번쯤은 강물의 끝까지 따라가봤을 저 무료한 강가의 검은 바위들

 

모은 생각들을 내다 버리고 서쪽 산에 걸린 뜬구름

 

그것들이 오늘 내 눈에 보이던 날이었다


 

[ 눈 오는 강에 나가 서는 날에는 ]

 

눈보라 속에

나무들이 서 있다

등에 눈이 쌓인다

강물 속에 앉아 있는 바위들은 눈을 받아 머리에 쌓고

흰 도화지 같은 눈보라 속을 찾아온 새들이

눈 위로 나온 마른 풀대에 모여들어 풀씨를 쪼아대다 눈 속에 빠진다

그것은 모두 배고픈 하얀 그림

새들을 불러야 할까 말까 주머니 속

쌀을 만지작거리다가
 

눈 속에 발등을 묻으며 눈 오는 강에 가면

눈 날리는 강에 나가 서는 날에는

나는 그것이 번민이어서

휘어지는 등에는 눈이 쌓이고

그것은 또 사랑이어서

눈 오는 강에 나가 서 있는 날에는

그런 날 밤에는

내가 자는 방 처마 끝에서

고드름들이 길어지고

마루에 쌓인 눈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온 새들의 희미한 발자국들이

어지러웠다

 

 

[ 일어설 수 있는 길 ]


 

오래된 길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꿈꾸는 모습

아버지와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녔던 발자국이

햇살 속 바위에 벽화처럼 짐의 무게로 희게 남아 있다

돌들은 자국을 쉽게 지우지 않는다

아버지의 길은 나의 현실이 되어간다

홀로 걷는 산길, 아버지의 외로운 발걸음은 지금 보아도 외수가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는 족제비와 바위 굴 속 다람쥐

낙엽이 쌓여 썩은 바위틈이나 나무 밑동,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들었다가 금새 사라지고, 빗물이 고였다가 마르고,

눈이 쌓여 있다가 녹던 곳


마른 나뭇잎 뒤 축축한 곳이 발 많은 곤충들의 집이다

새들이 날아가는 나뭇가지 사이,

별들이 바스락거리며 지나다니는 그곳

내가 꿈을 꾸는 곳, 보행자의 길

거센 바람에 휘어졌다가 일어서는

힘으로 이기고 선 눈 매운 나뭇가지들처럼

눈을 씻고 다음 발길을 옮긴다

잊은 다음을 잊어야 다음이다

토끼와 노루와 수꿩이 앞서 지나간 길

보폭이 보인다

쓰러진 풀잎을 뛰어넘고 어린나무들 비켜 돌아간 긍정의 길

나뭇가지에 얹혔다가 자유를 누리며 다시 떨어지는 수긍의 눈송이들, 그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내가 꿈꾸는 모습


다람쥐가 바위를 딛고 다음 바위를 딛는 믿음

작은 벌레들이 마른 참나무 잎을 넘어가는 소리

돌들이 없다면 어둠은 어디서 오고

물고기들은 어디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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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찬란.. | ○ 그니 리뷰 2021-09-17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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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찬란

이병률 저
문학과지성사 | 201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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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을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을 두고

술 향을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 기억의 집 ]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 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 ]

 

왼쪽으로 가면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다입니다

마을을 가려면 삼 일이 걸리고 바다로 가려면 이틀이 걸립니다

삼 일은 내 자신이고 이틀은 당신입니다

 

혼자 밥을 먹다 행(行)을 줄이기로 합니다

찬바람에 토하듯

나무가 잎을 떨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스친 것으로 무슨 인연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날아오른다고 하여

과도한 행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인지


물가에 내놓은 나는 날마다 물가에 가 닿지 못하고

풍만한 먼지 타래만 가구 옆에 쌓아갑니다

 

춤을 추겠다고 감히 인생을 밟은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날마다 치명적 오류 속에 있습니까

 

참으로 나는 왼쪽으로 멀리 가다가도

막을 수 없어서 바다로 갑니다

 

[ 절연 ]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라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눈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 눈을 뜨고 봐야 삶은 난해하고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살기를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 달리기 ]


 

- 어디 가?

돌이 돌에게 묻는다

- 멀리로

돌이 돌에게 대답한다

그 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멀리로 가겠다는 돌도 움직이지 않는다

둘 사이 두 척의 거리가 몸살하고 있다

 

- 간다믄서?

십수 년 만에 돌이 돌에게 묻는다

- 가야지

돌은 돌에게 결행을 알리고

돌은 곧 떠나겠다는 돌을 지켜봐준다

그 바라봄이 다시 십수 년을 먹어치운다


 

여전히 둘 사이를 지키는 지척의 거리

늘상 같은 바람이 불고, 평소처럼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어디 먼데서 굴러 온 실뭉치가

기다리는 돌의 가슴 한가운데 길을 낸다

 

오지 않겠냐며 떠나겠다던 돌이 묻는다

기다리던 돌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러마고 대답한다

다시 기다린 세월만큼이나 더 기다리는 날들이 계속되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질기디질긴 두 척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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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오늘 밤은 너랑 소주한잔 하고 싶어.. | ○ 그니 리뷰 2021-08-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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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오늘 밤은 너랑 소주 한잔 하고 싶어

이동진 글/박혜 그림
스노우폭스북스 |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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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지친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나는 누군가와 술 한잔 하고 싶은 그런 따뜻한 밤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이동진 글 / 박혜 그림 『오늘 밤은 너랑 소주 한잔 하고 싶어』 


○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응, 나야 뭐해?" 그러자 친구가 말한다.

"어디로 갈까?"

 

"무슨일 있어?"가 아니라 "어디로 갈까?"라고 단번에 말해주는 친구.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p43)

어디로 갈까라고 말해주는 J시의 친구가 그리운 요즘이다..

 

○ 지하철에서.. 

우리 함께 지하철 탔던 날 기억나? 

네 손을 잡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어. 잠시도 떨어지기 싫었잖아

그치? 그래.. 사랑이었어.(p89) 

매일 집에 바래다 준 그의 차가 고장나서 카센터에 맡긴 날..

택시를 타고 바래다 주었다..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의 손.. 그땐 우리 사랑이었지..

○ 가장 느린 택시.. 

대중 교통이 끊긴 새벽, 탄 택시의 기사님은 나이가 지긋하게 든 어르신이었다.

피곤했고 한시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느린 기사님의 운전에 답답함을 넘어 짜증이 나게 했다.

"아, 택시 잘못 걸렸네.."

 

이제는 약속시간을 어기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디든 몇 분 늦게 도착해도 괜찮아졌다.

열심히 사시는 모든 어른들이 존경스럽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p111)

J시에서 난 좀 친절했나보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데  외지에서 온 차가 택시기사님에게 길을 묻는다.

설명을 해줘도 그 길을 따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택시기사님에게 말했다.

저 좀 돌아가도 되니, 우리가 그길을 안내해주고 가요..

기사님이 J시 홍보대사로 추천해야 한다며..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에서 난 좀 야박해졌다. 처음엔 몰랐던 길이지만, 이제 어느정도 알게 된 길인데..

기사님이 길을 돌아서 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미터기의 요금은 자꾸 올라가고..

아.. 속에서 열이났다..ㅠ.ㅠ

 

○ 장담할 수 없는 이유.. 

그렇게 싫던 게 가장 좋아하게 되는 일도 가능할 걸까싶다.

그렇게 싫어하던 것도 어느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도 한순간에 미움의 대상이 돼 버리기도 하니까! (p123)

 

○ 요즘.. 

모두가 힘을 내서 잘 견뎌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에 위로가 되기도 하는 참 못난 요즘. (p159)  

○ 사연.. 

누구나 사연은 있다. 모든 이는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다.

드넓고 끝없는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만큼 이치와 이유를 갖고 있다,

나의 사연이 있듯, 그의 사연도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연은 특별하고 소중하다. (p183)

 

○ 좋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가운 등을 보이는 사람말고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내밀어주는,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이 좋다 . (p255)

눈인사와 함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고 싶다..


달밤텔러님, 감사합니다..

달님.. 다음에 소주한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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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 | ○ 그니 리뷰 2021-08-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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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김동성 그림
문학동네 |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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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

"우리에겐 밥이 될 이야기, 누군가에겐 동무가 될 이야기,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 부자에게 손바닥만 한 책방을 열어 줄 이야기를 썼지."

 

이영서 글 ·김동성 그림 『책과 노니는 집 』


장이가 꼬깃꼬깃 접힌 편지를 펼쳤다.

어서 쾌차하게, 미안하고 부끄럽네. -서西

 

보름 전, 아버지는 관아에 끌려가 온몸이 짓이겨지도록 매를 맞고 겨우 목숨을 부지해 집에 돌아왔다.

그뒤 장이네 집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오래 누워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누구하나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공연히 죄인의 집 앞을 서성이다가 천주학쟁이로 몰려 문초를 당할까 염려하는 것이다.(p9)

 

"훌륭한 선비님들은 <논어>나 <맹자>가 재미납니까?

전 들여다보면 잠만 오고, 봐도 봐도 뭔소린지 모르겠는데 책방에서는 그책이 가장 많이 나갑니다. "

"어렵고 재미없어도 걱정 마라. 네가 아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어려운 글도 반복해 읽고,

살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아, 그게 이뜻이었구나!' 하며 무릎을 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어려운 책의 깊고 담백한 맛을 알게 되지."(p53)

 

"서유당(書游當)·····. 책과 노니는 집?"

홍 교리 집 사랑채를 나서며 장이는 문 위의 현판을 읽어 내렸다.

'서유당(書游當) '이라는 현판 글자가 장이의 머리속에서 즐겁게 노닐었다.(p55)

 

"책과 노니는 집·····."  장이는 죽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책방을 꾸미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밤새 글씨를 써서 벌게진 눈으로 장이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러면 장이는 잠이 덜깬 눈으로 앉은뱅이책상 곁에 다가가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

"우리에겐 밥이 될 이야기, 누군가에겐 동무가 될 이야기,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부자에게 손바닥만 한 책방을 열어 줄 이야기를 썼지."

 

그런 꿈을 꾸며 필사를 하는 아버지 곁에서 장이는 먹을 갈고,

금방 베껴 쓴 글씨에 부채질을 하며 먹물을 말렸다.

"평생 책 베끼는 일을 하며 책과 이야기 나누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이렇게 호사스런 직업이 어디 있느냐? 앞으로도 장이 너와 작은 책방을 꾸려 이렇게 살고 싶다."(p77)

 

성균관이 있는 숭교방은 아버지와의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장아, 아비가 사고 싶은 집이 바로 저 집이다."

"집주인이 스무 냥을 주면 팔겠다고 했는데 아직 한참 모자라는 구나." 

길가 모퉁이에 작고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오가는 사람 눈에도 잘 띄지 않는 초라한 집이었다.  

몇 해 전 아버지와 왔을 때보다 그 집은 더 추레해져 있었지만,

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이 지나고 있었다.(p94)


 

"네 이름을 써 보거라." "'문장'이라.. 성이 '문'가였느냐?"

"글쟁이라.. 아버지가 진즉에 네 길을 정해 두었구나."

"천천히 하거라. 필사쟁이로 처음 받은 일인데 서두를 것 없다. 다 쓰면 가져오너라."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실없이 웃는 장이를 힐긋힐긋

바라보았다. 장이는 행복했다. 아버지와 살 때만큼 행복했다.(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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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눈사람 여관 | ○ 그니 리뷰 2021-07-27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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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눈사람 여관

이병률 저
문학과지성사 | 2013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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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단련함 ]


 

매일 한 차례씩 같은 시간에 모기에 물린다면

우리는 모기를 힘들어하지 않을뿐더러

그 작은 모기에게 사자처럼 굴지도 않을 것이다

 

꼿꼿하게 앉아도 되는 저녁이므로

지나치게 균형을 잃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일 한 차례씩

알람을 맞춰놓고 같은 시간에 모기에 물린다면

먹고 사는 일에 다짐 따윈 필요 없으지도 모른다

 

남은 저녁은 좀더 단정히 피가 통할 것이며

맨발의 급소들도 순해질 수 있겠다

 

봉합이 필요한 시간에

모기에 물리자고 팔뚝을 내놓는다면

시간의 딱지들은 도톰해질 것이다

 

저녁의 바닥을 향해 서 있는 것 모두를

진창이라 여기지 않아도 되겠다

 

서서히 가려우므로 괜찮아진다

하물며 최선도 지나간다

 

피하느니

제법 지나갈 것이다

 

[ 아파도 가까이 ]


 

나는 냄새만을 맡을 수 있는 씨았이었다

 

나는 나무에 기댄 채 성장하였다

 

어느 번개가 나무를 쳤고 나무가 꺾였다

 

나는 나무의 남은 몸뚱이를 타고 올라 울울히 키를 키웠다

 

죽어가는 나무 냄새를 맡으며 줄기로 기고 꽃을 피우며 몸을 늘렸다

 

신에게 술을 권했다


 

신은 나에게 감정을 나눠주었다

 

신은 아프게 태어난 나를 강으로 데려갈 수 없다며 나를 편애하였다

 

어느 멀리로 달릴 수 없는 발목을 내놓고 비를 맞았다

 

신에게 말을 건넸다

 

신은 아파도 가까이 있으라 하였다

 

돌을 지고 태어난 나의 시(詩)가 씨앗 하나만을 더 가지고 돌아온다면 대신 나는 발목을 잘라 차려 놓겠다

 

이 실컷 울고 난 고래의 날들이 끝나기 전까지 시가 도착한다면 쓰임을 바라지는 않겠다

 

그 불가한 것으로 얼마나 다행인가

 

이 모든 것 다행이다

 

[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 ]


 

잠을 자고 있는데 철썩 뺨을 올려붙이는 무언가

마지막 기적의 양(量)처럼

차가운 폭포를 등줄기에 쏟아붓는 무언가

 

눈이 내릴 것 같다

 

그 무언가 힘으로도 미치지 못하면서

나를 이토록 춤추게 하는 무언가

 

내 몸 위에는 한 번도 꽃잎처럼 쌓이지 않는 눈.

바다에도 비벼지지 않는 청어 떼 같은 눈,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그 무언가 때문은 아닐 텐데 무언가에 의해

아무나 때문도 아닐 텐데 아무개에 의해

 

그러니까 세상 모든 그날들을 닮으면서 내리는 눈,

오늘 내린 눈을 두 눈으로 받아 녹이고서야

울먹울먹 피가 돌았다

 

단 한 번도 순결한 적 없이 마취된 척

한 세계를 가득 채운 냄새나 좇으며

허술한 사랑을 하려는 나여

 

눈이 저 형국으로 닥쳐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란다

 

이 마을에서 조난을 당해서라도

서로에게 붙들려야 한다면

 

그 밤 모두 우리는 눈이 멀어야 한단다

 

[ 눈사람 여관 ]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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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바다는 잘 있습니다.. | ○ 그니 리뷰 2021-07-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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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저
문학과지성사 | 201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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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자리 ]


깊은 밤에

집으로 가는 길에 집 앞에

한 사내가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두손으로 붙들고 서 있다

 

할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

의지하려는 것인지

매달리는 사실은 무겁다


사내가 나의 집 한 층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사내가 몇 번 더 나무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나뭇가지는 손이 닿기 좋게

키를 내려놓기까지 했다

 

어느 밤에

특히 오늘 같은 밤에는

그 가지가 허공에 팔을 뻗어

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새를 날려 보냈는지

아이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는 위층 사내도

나처럼 내어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 가지 손 끝에서 줄을 그어 나에게 잇고

다시 나로부터 줄을 그어 위층의 사내에게 잇다가

더 이을 곳을 찾고 찾아서 별자자리가 되는 밤

 

척척 선을 이을 때마다

척척 허공에 자국이 남으면서

서로 놓치지 말고 자자는 듯

사람 자리하나가 생기는 밤이다

 

[ 새 ]


 

자면서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을 뒤척입니다

 

내가 뒤척일 적마다

누군가는 내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구의 저 가장 안쪽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면서 여러 번 뒤척일 일이 생겼습니다

자다가도 가슴에서 자꾸 새가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가슴팍이 벌어지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앉아야 죽지를 않겠습니다

 

어제는 오늘은 맨밥을 먹는데 입이 썼습니다

 

흐르는 것에 이유 없고

스미는 것에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나는 생겨먹었습니다



 

신(神)에게도 신이 있다면 그 신에게 묻겠습니다

 

지구도 새로 하여금 뒤척입니까

 

자다가도 몇 번을

당신을 생각해야

이 마음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까

 

 

[ 사는 게 미안하고 잘못뿐인 것 같아서 ]


 

거미가 실을 잘못 사용하더라도

 

계절이 한참 지나간 후에도

꽃대가 꽃을 내려놓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그조차도 세상의 많은 조합일지니

나의 잘못이 아니리

 

찬바람이 여름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더라도

그래서 감기로 잠시 아프더라도

 

정녕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당신이 그에게 나머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까지도


 

생각을 만나지 않고 시장에 간 것

나의 잘못은 아니리

 

오후에 붙들려서 길을 따라 나선 것은

조금 맨발이 되자는 것이었으니

 

마음이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 휘감기는 것도

그리곤 구덩이에서 꺼내지는 것도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일 테니

 

애써 모른 체한들

이 모든 것 나의 잘못은 아니리

 

                                                                                                                                                                                                                                                                                                                                                                                                        

[ 새벽의 단편 ]

 

어느 긴 밤

좋아하는 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았던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시절이었다는 말은

오래된 시간을 부를 수도

다시금 사용할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도 편지를 부치지 않는 동안

건물은 헐리고 꽃밭이 줄고

습관은 습관이 되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거나

어딘가에서 분실되지 말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그 새벽에 새들이 울면

두 눈 가득 침이 고이던 시절

 

감히 만나자는 말을 적어넣고 풀칠을 했습니다

많이 미워한다는 말을 읽었을 때는 말을 잃었습니다

편지지라는 말이 사라져버린 세계의 빈 봉투처럼

돌아볼 단편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접지 않았으나

펼쳐야 할 것도

봉하지 않았으니 열어야 할 세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 노년 ]


 

어느 날 모든 비밀번호는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잠긴다

 

풀에 스치고 넘어지고

얼굴들에 밀리고 무너지고

 

감촉이 파이고

문고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오래 빈집을 전전하였으나

빈 창고 하나가 정해지면 무엇을 넣을지도

결심하지 못했다



 

돌아가자는 말은 흐릿하고

가야 할 길도 흐릿하다

 

오래 교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파도가 느꼈으나 그가 허락할 만한 세기는 아니였다

 

서점 이웃으로도 산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이 스칠 이었다

 

오래 붙들고 산 풍경 같은 것은 남아 있었다


 

중생대의 뼈들이 들여다보이는

박물관 창문 앞을 지나는 길

늘 지나는 길인데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을 법한 냄새가 따라붙었다

 

'여기'라는 말에 흘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여기를 떠나 이제 그곳에 도달한 사람

 

[ 여행 ]


 

어느 골목 창틀에서 본 대못 하나

집에 가져다 물잔에 기울여 세워놓았더니

뚝뚝 녹가루를 흘리고 있다

 

식당에서 먹다 버린 키조개 껍데기

뭐라도 담겠다 싶어 집에 가져왔는데

깊은 밤 쩌억쩌억 비명 소리가 들리기에

두리번거리다 안다

물 밖에 오래 나와 있어 조개의 껍데기가 갈라지고 있는 것을


 

나는 털면 녹 한줌 나올는지

공기로 나를 바싹 말린 뒤 내 몸을 쪼개면 쪼개지거나 할는지

 

녹가루를 받거나

갈라지는 소리를 이해하는 며칠을 겨우 보냈을 뿐인데

 

집에 다녀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토록 마음이 어질어질한 것은 나로 인한 것인지

 

기어이는 숙제 같은 것이 있어 산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는 뒤척이면서 존재한다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이토록 나를 옮겨 놓을 수 있다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 다시 태어나거든 ]

 

한 무리는 행복을 숭배하고

한 무리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산다


 

이쪽 줄의 사람들은 아예 감정이 없으며

저쪽 줄의 사람들은 감정을 숨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파도에 휘말릴 준비가 되었다는 듯

산소통을 메고 서 있는 한 청춘

 

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회오리바람을 만날 것이니

피할 수 없을지라도

이내 끝나고 말지라도

 

이번 생에는 한 덩어리의 완전한 혼자가 되어라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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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마음하나, 꽃 한 송이.. | ○ 그니 리뷰 2021-07-0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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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마음 하나, 꽃 한 송이

김이랑 저
미호 | 2018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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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꽃을 닮은 마음이

시들지 않고 오래오래 곁에 머물러줄 거예요..

 

꽃 그리는 이랑님의

『 마음하나, 꽃 한 송이 』

 


 

○ 봄(Spring) 따뜻한 바람이 뺨을 스칠때..

추운겨울을 이겨낸 작고 소중한 꽃을..

 

[ 라일락 ]

길을 걷다가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럼 어느새 쏟아질 듯 피어 있는

라일락을 만날 수 있어요

 

힘겹게 돌아서 가다보면

향기만은 나를 따라오는 듯

여전히 코끝에 남아 있어요..

 

 

○ 여름(Summer) 잎은 더 싱그럽고 파랗게,


꽃은 더 크고 탐스럽게 피어납니다.

 

[ 라벤더 ]

보라색 물결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는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기묘해서

'유니콘을 실제로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잠들기 전 눈을 감고 라벤더 밭을 끝없이

걷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보라색만이 넘실거리는

기묘한 풍경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며 걷다가 잠이 듭니다.

 


○ 가을(Autumn)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는 가을.

길에 피어 있는 들꽃마저도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 코스모스 ]

늘 바람과 함께 춤추듯 나풀거리는 코스모스.

언젠가는 바람에 흔들리다

가루가 되어 반짝이며 흩어질 것 같아요.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내 머리카락도

가을이 잔뜩 묻은 그 바람에 아스라이 흔들립니다.

 

 

○ 겨울(Winter) 추위를 이기는 꽃들은


특유의 차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요.

강한 생명력을 머금은 겨울 꽃은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답니다.

 

[ 안개꽃 ]

아기의 연약하고 따뜻한 숨과 같은 안개꽃이

소매 끝에도 있고, 걸을 때마다 팔랑거리는

옷자락 끝에도 있고,

내 마음 가장 따뜻한 곳에도 닿아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걸을걸음마다 그 따뜻함을 놓치지 않으려고

옷깃을 꼭 여며보았어요.

 

세상의 중심의 예란님덕분에

아름다운 책을 만났습니다..

예란님, 감사해요..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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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 ○ 그니 리뷰 2021-06-2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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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안도현 편
모악 | 2019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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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 대하여 ]

 
                                         -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 이마 ]

                                              - 신미나

장판에 손톱으로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 모란이 피네 ]

 
                                    - 송찬호

 

외로운 홑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런데 애야,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그것의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긴긴 오뉴월 한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주려고,

꽃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은 모란보자기

 

 

 

[ 휘영청이라는 말 ]

                                      -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은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 사이 ]

 
                                          - 김수복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이가 참 좋다

 

나와 나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새들과 새들 사이

지는 해오 뜨는 해 사이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 우물 ]

                                          - 이영광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 더 쨍한 사랑 노래 ]

   
                                     - 황동규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地表에서 휘발하고

저녁 하늘

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

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

황당하게 나는 흐른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 할 곳,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

 

 

[ 노독 ]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그림자 이토록 낯선

둥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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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 그니 리뷰 2021-06-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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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저
달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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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이 시켰다 ]


 

우리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적어도 사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을 두고 상상만으로 그 사람이 이럴 것이다.

저럴것이다 아무리 예상을 해봐도

그 사람의 첫장을 넘기지 않는다면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

"넌 뭐든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널 좋아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경험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네 옆에 있고 싶어 할테니까."

 

***

이제 첫장을 넘기며.. 병률님을 따라 여행을 시작합니다.

바람이 좋고.. 당신도 좋습니다..

 

- 작은 방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나에게 신발을 사주었었다.

당신 혼자 며칠 더 머물러야 했다.

내가 며칠 먼저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신던 신발을 버리고 갈 거냐고 물었다.

가방을 싸면서 낡은 신발을 휴지통에 버리려 하는데

당신이 말했다.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

보고 싶을 때..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너무 보고 싶을 때..

일부러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 언젠가 처음엔..

음악실 열쇠를 맡는 아이가 되었다.

그방으로 들어가 악기들을 하나씩 닦기도 했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한다는 게

제법 나다운 일이란 걸 그때 알았다.

행복은 문지르고 문지르면 광채가 났다.

 

구석에 베낭 하나가 보였다.

베냥 맨 밑에 인조가죽으로 감싸인

딱딱한 뭔가가 만져졌다. 카메라였다.

그 오래된 카메라를 만지고 있자니

한참을 달리고 난 사람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가져가기로 했다. 필름을 사서 며칠동안 학교와 우리집 사잇길 풍경들을 찍었다.

셔터소리를 들을 때마다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두근거렸다.

다 찍은 필름 한 통을 사진관에 맡긴 뒤 다시 카메라를 그 배낭안에 넣았다.

 

다음 날, 사진관 아저씨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는

필름을 현상해놓고 나에게 건넸다.

나중에 작동이 안 되는 고장 난 카메라였던게 아니라

한번도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보지 않을

미숙함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다녀온 아빠가 사온 문구와 카메라.. 

그 카메라에 처음으로 필름을 넣었을 때

살짝 긴장하며 집중해서 필름을 넣는 어린 내가 생각난다.

 

6# 내가 그린 그림..

 

교토에 술집 하나가 있습니다.

이 집의 감동적인 주인공은 정성을 드여 차려준 술과 안주만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사시미를 준비할 때, 할아버지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소 걱정하는 듯이 또 행복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다소곳하면서도 정중한 모습.

 

아, 어떻게 저렇게 고요하고도 벅차게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집에서 평생 가슴에 지닐 그림 한장을 완성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귀한 그림을 얻고 말았습니다.

 

사랑 그거 참 우아하고도 먼길이데요, 라는 생각으로

술을 조금은 많이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7# 뜨겁고 매운 한 그릇..

 

세 달을 예정한 인도 여행이었으므로 짐은 적지 않았다.

그곳은 내가 상상해왔으니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곳이고 했으므로

과감히 다섯 개의 라면을 여행가방에 담았다.

 

라면 다섯 봉지, 그걸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부수어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평소에도 그리하는 것은

라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근처 움막집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불가촉천민이었다.

몇번 그집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사진은 찍은 적도 있었는데

그들이 움막 앞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지어먹던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싸구려 냄비를 산 다음 라면을 들고 그들을 찾았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네명의 어린아이가 그 과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정의 모든 것을 눈동자에 담는다. 그들의 표정은 더 강렬하고 리얼하다.

내가 떠나자 아이들이 라면봉지와 스프 봉지를 차지해 핥으면서 다투기 시작했다.

 

이번엔 라면 두봉지가 필요했다.

그 지역을 여행하던 한국인을 만났는데 라면 끓여 먹은 이야기를 하자

빛을 내기 시작하는 그의 눈빛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제 두개의 라면이 남았다.

그곳을 떠나야겠다다는 마음을 먹고 한개의 라면을 끓이기 위해 움막집을 찾았다.

나에게 뭐라 말을 걸어왔다. 몸짓을 살피니 라면 한 개를 줄 수 있냐는 말이었다.

나에게 라면이 하나 남았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내가 떠난 후, 남은 한국인 여행자는 불이 필요할 때마다 움막을 찾아 신세를 졌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여행이야기를 올려 놓은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 비상식량을 가져간 검을 콩을 들고 움막을 찾아갔다.

며칠 뒤에 그곳앞을 지나는데 세상에나,

형이 버리고 간 다섯개의 라면 봉지에 각각 흙을 담아 식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식물이란 내가 나눠준 콩이었다. -

 

이야기가 아름다워서  마음 한쪽 구석이 자꾸 간질간질 것이다.

 

10 #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생각할 필요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한 장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12 #

 

끌리는 것 말고

반대의 것을 보라는 말.

 

시를 버리고 갔다가

시처럼 돌아오라는 말.

 

선배의 그 말을 듣다가

눈이 또 벌게져서 혼났던 밤.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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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무너지지만 말아.. | ○ 그니 리뷰 2021-06-2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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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무너지지만 말아, 새벽 세시, 새삼스러운 세상 한정판 스페셜 에디션 세트

흔글,새벽 세시,동그라미 공저
경향비피 | 2017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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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일이 있었다면 이제는 이겨낼 차례.

   쓰러져도 괜찮아, 무너지지만 말아.  "

 

[ 이렇게 가는구나 ]

 

이렇게 가는구나.

내 스무 살 시절도

 

취업에 목매던 날들도.

기억에 아파하던 시간도



 

이별에 밤새우던 시간도

그리움을 애써 누르던 새벽도

힘든 날만 오는 줄 알았는데

힘든 날도 지나가는구나.

 

나는 몰랐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었음을.

인생은 되감기가 없어.

일시정지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시간은 흘러가.

그니까 괜찮아.

힘든 시간도 하나씩

흘러갈거야.

 

[ 무너지지 말아 ]


 

요즘 마음이 복잡하지.

어딘가에 위로를 청해도 돌아오는 건

오히려 너를 힘 빠지게 하는 힘내라는 말뿐이고

잠이 안 오는 새벽에 깜깜한 하늘을 쳐다봤을 뿐인데

달이 우는 듯, 너도 울게 되잖아.


 

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원래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그 상황을 아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거든,

그래서 나도 작은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거야.

너처럼 힘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겠지, 괜찮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야만 해.

나는 네가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거든.

그러니 아주 작은 것부터 다짐하자.

내일 뜨는 달이 우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게

마음부터 진정시키는 거야.

오늘은 달이 울었지만

내일은 선명하게 보겠다는 다짐.

그런 마음이라도 가져주면 좋겠어. 무너지지 않고.

 

[ 힘들면 힘 내려놔 ]


 

나는 주변 사람이 힘들다고 말을 하면

간혹 이런 말을 했다.

 

"힘들어? 그럼 힘 내려놔."

 

물론, 우스갯소리다.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이 웃길 바랐으니까

내 딴에는 심심한 위로를 건넨 거다.


 

그런데 내가 힘든 상황일 때

저 말을 떠오려봤더니, 이제 알겠다.

 

정말 힘들면

힘을 내려놓을 힘조차도

없다는 것을.

 

내가 힘들 때

모든 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필요한 건

이겨내겠다는 나의 다짐.

 

내가 내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는 게

힘듦을 이겨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함부로 다정할게 ]


 

만약 네가 충분히 빛날 수 있는 전등이라면

나는 꺼진 너를 켜주는 스위치가 될게.

 

만약 네가 외로움에 떨며 내리는 비를 맞고 있다면

나는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우산이 될게.

 

그래도 여전히 아무도 너의 마음 알아주지 못한다면

기꺼이 너의 고생한 지난날들 내가 기억할게.

 

너의 곁에선 함부로 다정할게.


 

 

[ 더운 바람만 부는 줄도 모르고 ]

 

나는 더울 때 선풍기를 틀기만 하면

무조건 시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선풍기도 날씨가 적당히 시원해야 시원했고

하루 종일 돌린다 해도 날씨가 쪄죽을 듯 더우면

계속해서 더운 바람만 나올 뿐이었다.

 

나는 마음이 식어도 사랑을 하기만 하면

무조건 행복할 줄 알았다.

 

마음속에 더운 바람만 부는 줄도 모르고.

 

[ 기다려 ]


 

세상이 너무 혼내지.

이유도 모른채

넌 당하고만 있고

사람 마음을 흔드는

바람뿐만은 아니지.

마음도 생각보다 아프고

너를 울리는 게

억움함이기도 하잖아.

그럴 때는 기대도 돼.

마음이 걷히면

순간 스치는 황홀이 되어줄 게.


 

 

[ 요즘 ]

 

요즘 따라 네 생각이 많이 난다.

잠에서 깨어나면

하루의 시작이 너였으면 좋겠고

잠이 들면

괜히 꿈을 뒤적거리며 널 찾아.

하루를 너로 채우고 싶어.

일상이 너였으면 좋겠어.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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