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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 그니 리뷰 2023-07-26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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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박광수 편/박광수 그림
걷는나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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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사람의 온기가 그리울 때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외로울 때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울 때..,

 

박광수 엮음 / 박광수 그림         『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


   ○ 당신, 잘 지내나요?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 이 늦은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 보면 / 옆에 앉은 한 고단한 사람

졸면서 나에게 기댈 듯 다가오다가 / 다시 몸을 추스르고, 몸을 추스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올 때 / 되돌아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흔들림

수십 번 제 목이 꺾여야 하는 /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잠든 네가 나에게 온전히 기대올 때 / 기대어 잠시 깊은 잠을 잘 때

 

끝을 향하는 오늘 이 하루의 시간, /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 나 아닌 것을 거쳐 / 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

 

무너질 내가 / 너를 가만히 버텨줄 때, / 순간, 옆구리가 담장처럼 걸려올 때 (p79)

 

   ○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   

 

               아름다움의 비결

                                - 샘 레벤슨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면 / 친절하게 말하십시오.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십시오.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 배고픈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십시오.

아름다운 머리결을 원한다면 / 하루에 한 번 어린아이에게 / 그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도록 하십시오.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싶으면 / 그대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며 걸어가십시오.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인 인간은 / 회복되어야 하고, / 새로워져야 하며,

소생되고, / 교화되며, / 구원받아야 합니다.

결코 그 누구도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대에게 도움의 손길을 필요할 때 / 당신의 팔 끝에 손이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대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 당신은 두개의 손이 있다는 것을 / 알게 될 것입니다.

한 손은 그대 자신을 도와주는 손이고 /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손입니다.(p155)

 

   ○ 내 곁에 네가 있어 참 다행이다..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쫒겨나고 /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증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맛빛 체온 /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 그래도 부둥켜안고 /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p185)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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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조금 쉬었다 다시 만나요.. | ○ 그니 리뷰 2023-06-2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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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엄마, 죽지 마

박광수 글그림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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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리움과 애틋함, 전하지 못한 마음들,

남아 있는 사랑의 기억들.

인생의 가장 큰 버팀목이자 벗인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향한 연서

박광수 쓰고, 그리다..   『 엄마, 죽지마 』

 

○ 첫번째 편지 : 엄마, 조금 쉬었다 다시 만나요..

● 쉼표

당신과 나 사이에  / 놓인 마침표에  / 짤막한 작은 선 하나를  / 덧대어 쉼표로 고쳐본다.

 엄마, / 우리 조금 쉬었다 / 다시 만나요. (p37)

 

● 굳은 살

걷고, 걷고 / 또 걸을께요. / 다리가 아파 / 쩔뚝거리면서도 또 걷고, / 또 걸으면서 닳아질게요.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 내 뒤꿈치처럼 내 슬픔도 / 둥글게 닳아질 거예요.

 날 선 모든 것들이 / 둥글게 닳아질 때까지 / 오랫동안 걸어볼게요.

그러다 보면 슬픔에도/ 굳은  살이 박히겠죠. (p57)

  

○ 두번째 편지 : 사랑을 먹고 자랐다..

● 뼈의 말

엄마에게 / 편지를 쓴다.

 오랜 시간 공들여 / 고민하여 썼던 글을 지우고 / 또 고쳐쓰기를 수십 번,

다 지우고서 단 한 마디 / 말을 적어 넣는다.

 세상의 좋은 말과 멋진 단어가 / 넘친다 해도 당신께는 다 사족이다.

오랜 시간 한 단어만을 푹 고아, / 단단한 뼈의 언어로 / 당신께 바친다.

 사랑해요. (p135)

  

○ 세번째 편지 : 엄마라는 과속방지턱..

● 나의 닻

삶이 평온한 날에는 / 내 삶을 이끄는 것은 / 오직 나뿐이라고 믿었다.

 풍랑으로 내 삶이 / 거칠게 요동치던 날,

심연으로부터 / 흔들리지 말라고, / 떠내려가지 말라고, / 나는 붙드는 힘.

 나의 닻 / 나의 엄마. (p171)


치매란?

자신이 젊은 시절 애쓰며 건너온 징검다리를 되돌아 가는 것.

되돌아 가면서, 자신이 건너온 징검다리를 하나씩 치우는 일.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들.

그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뚝방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일.

밝게 웃어주며 날 천천히 잊어달라고 비는 일안단테, 안단테.....,

 

○ 네번째 편지 : 당신은 비누와 닮았다..

● 엄마의 밤..

동네 뒷산에 올라 / 밤하늘의 별을 본다.

유난히 총총한 별 옆에 / 작고 흐린 별 하나,

클 별에 가려져 / 눈에 잘 안 띄는 작은 별이 / 껌벅이며 울고 있었다.

그 별을 보며 / 문득, / 울다가 지쳐버린

엄마의 밤은 / 몇 밤이나 됐을까를 생각하니 

밤하늘의 별들 모두 / 뿌옇게 흐려졌다.

곁에 서 있던 나무가 / 서러움에 어깨를 움츠린다. (p211)


○ 다섯번째 편지 : 따뜻한 밥 한 끼..

● 당신은 행복한 기억이 있나요?..

가장 좋았던 나이가 언제였냐고 물었다.

"제가 살면서 좋았던 적이 있나요?"라고 되물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까지 행복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그녀에게

힘 빠진 목소리로 명함을 건네며, 기억이 떠오르면 전화나 메일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대화가 희미해질 무렵 그녀에게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아직 주무시겠네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어쩔까 망설이다 메일 보냅니다.

저도 행복했던 적 있어요.

화장장 개원하고 얼마 안 되서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임종은 못 지켰지만, 수시도, 염도, 화장도

제가 직접 해드렸는데 그때 행복했었네요.

좀 늦었지만 그래도 제가 행복했던 적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p265)


 

비가 오는 아침이면.. 엄마가 식사를 준비하냐 분주한 도마를 두드리는 칼 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 소리를 들으며 더 뭉기적거리게 된다..

 

엄마 옆에 누워있으면.. 아이였을 적 생긴 상처까지도 기억해 내며..

얼굴과 머리.. 손과 다리를 스담거리는 엄마의 손길이 좋아서..

난 또 잠에서 깨지 않으려 게으름을 피운다..

 

여름이면 옥상에서 내가 귀가하길 기다리며.. 저 멀리서 조그맣게 보이는 데도..

이름을 불러주었던 엄마..

눈이 많이 내릴 때면.. 늦은 시간 들어가도..

집에 오는 길에 눈에 발이 젖을까 집앞 골목까지 눈을 치우던 엄마..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당신이 그리웠어요..

우리 조금만 쉬었다 다시 만나요..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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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엔딩과 랜딩.. | ○ 그니 리뷰 2022-08-06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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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엔딩과 랜딩

이원석 저
문학동네 |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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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부를 때면 나는

목에 단 종을 흔들며 비뚤어진 웃음을 웃었지

 

나의 치욕은 나의 것일 뿐

파랗게 빛을 내는 질문지에 네 이름을 써

- 시인의 말 中

 

[ 시소 ]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어

겨울은 무장한 채로 슬프거나 힘들었으니까

숨은 듯이 창을 닫고

찬물에 발을 담그는 기분으로 책상에 앉아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여름이 오면 한적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도 될 거야

값싼 티셔츠를 세 개 살 거야

글씨가 없고 사람 얼굴이 없는 것

내가 배운 원칙

검은색, 혹은 더 검은색으로

 

아무도 없는 놀이터 시소 위에

좋이컵에 담긴 커피와 다시 읽은 책을 놓아두고

천천히 기우는 양팔 저울을 생각하며

발을 구를 거야

 

그때는 소서쯤일 거야

받쳐놓은 것들이 모조리 깨져버린 오후에

창을 열고 잔에 순을 채워야지

손을 잡아달라는 게 아니잖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흔적없이 

남아 있자 가끔은


 

고쳐쓴 일기를 바꿔 읽으며

악의 없는 핀잔을 하자

 

기운다는 것은 쏟아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난간 아래를 천천히 내려다본다

처음부터 다시 읽은 책은 각오가 되었다는 듯

흉내낼 수 없는 억양으로 펄럭이며

위치를 가늠하다 돌아눕는다

 

당신이 원하는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했어요

 

네가 일어서버린 순간

내가 낙하하는 순간

 

 

[ 친절한 얼굴 ]

 
                   - 이원석

가는 유리관이 떨어지듯 빗줄기가

사정없이 부서지는 밤낮

유예되고 미루어져 불행한 행복처럼

즐거운 불행인지 불행한 즐거움인지 알 수 없는 때

너는 완전히 섞이지는 않은 자세로 돌아누워 있고

몸을 돌리면 다른 얼굴이 나올까봐 나는

네 어깨를 당기지 않는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

알 수 있었던 일

 

너의 등은 친절한 얼굴을 가졌는데

그게 싫지, 하필 그런 표정이라니

증오의 술잔을 들다가도 미안함으로

미끄러지게 하는 힘이 있지

결국 내려놓게 하는 철저함이 있지

 

하지만 깨진 유릿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가다보면

두통처럼 번지는 실금들이 보여

쳇바퀴 돌듯 되돌아올 어리석음이 마련한 

잔칫상에 앉아서 일생의 술잔을 주고받는 나

가장 나쁜 잔을 주는 아니라

가장 좋은 잔을 보여주고 가져가버리는

지독한 장난 같은 거지, 같은거야


...중략.....

 

문득 겁이 났어

돌아누운 얼굴이 네가 아닐까봐

그래서 자꾸 끌어안았어 작고 볼품없이 쪼그라든 등을 감싸며

말했어 돌아보지 마, 보지 마 사실은

내 얼굴이 어떤지 겁이 나

내 얼굴이 왜 그런지 말할 길이 없어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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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나는 이름이 있었다.. | ○ 그니 리뷰 2022-07-2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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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이름이 있었다

오은 저
아침달 | 201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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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오해했습니다

사람이라 이해하고 사람이라 오해했습니다

사람을, 마침내 사람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시인의 말 中 

 

[ 손을 놓치다 ]


분침이 따라잡지 못한 시침

마음과 따로 노는 몸

체형을 기억하는 데 실패한 티셔츠

 

매듭이 버린 신발 끈

단어가 놓친 시

추신이 잊은 안부

 

그림자가 두고 온 사람

아무도 더듬치 않는 자취

 

한 명의 우리

 

[ 서른 ]

 

뜬구름을 잡다

어느 날 소낙비를 맞았다

생각 없이 걷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생각이 없을 때에도 길은 늘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런데 머리는 왜 안 돌아갈까?

 

너무 슬픈데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몸 전체가 통째로 쏟아졌다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한참 더 자라야 할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소화가 안되는 병에 걸렸다

 

[ 한발 ]

 

이 사람아, 지금 오면 어떡해!

이 사람아, 벌써 가면 어떡해!

 

시침과 분침과 초침

정확히 두번 만나는 동안

 

늦거나 일렀다

 

아무리 간발에 다가가도

감정을 에누리할 수는 없었다

 

[ 사람 ]             
 

이 사람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우리는 길에서 만났다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만났다

 

서로의 이름을 잊은 채

 

어딘가 낯이 익고

익숙한 냄새가 나고

사람임은 분명해서

 

너는 쫙 편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이름 대신

손금이 구불구불했다

 

어떤 길을 따라가도 순탄 할 것 같았다

 

눈이 있는 사람

사람 보는 눈이 있던 사람

 

재물선이 선명해서

나는 네가 큰사람이 될 줄 알았지

 

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손금이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람을 좋아하던 사람

사람 좋은 사람

 

잘못을 해도 쉽게 인정해서

나는 네가 새사람이 될 줄 알았지

 

손금 하나를 무작정 따라가다

갈림길에 섰다

 

등을 댈 것이냐 돌릴 것이냐

 

내가 뱉었던

네가 들었던

모진 말이

등줄기로 흘렀다

 

어딘가 귀에 익고

친근한 말맛이 나고

 

억양마저 확실해서

나는 쫙 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양 볼이 뜨거워서

손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손바닥을 맞추곤 하던 사람이

가차 없이 손바닥을 뒤집어버리듯

 

등을 돌리고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벌써 가면 어떡해!

 

사람이 사람을 불렀다

 

방금 전까지는

사람이었던 사람을

이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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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 ○ 그니 리뷰 2022-07-1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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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송재학 저
문학동네 | 2022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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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애면글면 또 누군가의 외부, 지금 내 눈동자와 눈썹까지 들여다보거나 행구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시인의 말 中 


 

[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

 

아침을 담는 항아리는

천 개의 색을 모으는 중이다

무채색 주동이까지 포함하니까

구부리고 번지는 밀물까지 돌과 함께 물렁해져서

어딘가 스며들어야 하는 해안선이 되었다

 

소년의 표정이 왔다

하늘가에 인기척이 수련거리더니

아침 식탁에 별자리를 펼치는 리넨


 

꽃 사이에 꽃의 생활을 심고

돌 속에 다시 돌을 옮긴다

꽃은 희고 돌은 검다가

둘이 합쳐서 가슴까지 검푸르다

 

비거스렁이 하품과 거춤이

썰물을 부추기며

무시로 글자를 쓰다 지운다 싶은데

동심원이 모였다

물의 관습이라는 결혼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기 흥건한

계절이 아니라며 여기 오래 머물겠지만

이름을 잊었기에 무엇이나 포옹하는

이 아침의 긴 역광을

어디 눈썹 없는 기별만 탓하랴

 

십 년 후를 만날 때까지

물결이 굳어질 때까지

 

[ 달 이야기 ]


 

오래된 마을의 달 이야기는 믿을 수 있지

절반은 적막

절반은 맑음

혹은 절반은 인간, 절반은 비밀

 

얼굴이고 짐승인 것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 내가 모르는 또다른 이야기 ]


 

연잎은 말라가고

새들이 아직 놓지 못하는 연밭

연잎은 하늘에 머물지만 허공과 전혀 다른 사삿일

연잎은 길의 종아리에 쭈뻣 선을 그었다

물 없는 수로와 같은 방향이라지만

연잎은 귓속말에만 쫑긋했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으려는

제 몸과 여기저기가 애처로은

저녁답의 입김

누렇고 헐렁한 갈색을 도려내어도

눈썹 많은 가을에 머물고 싶다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강 ]

 
 
물고기가 사라진

강을 건너는데

폭우가 오기 전에 이미 물풀까지 잠겼다

태풍은 강의 남쪽을 씻어내는 중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흙탕물이 강바닥에 묻힌 뼈를 자꾸 수소문한다

불귀라는 꽃이 피어야 건넌다는 강

물살마다 아귀들이 득시글하다면

소용돌이에는 잎사귀 드뭇한 나무둥치가 떠밀려온다

어디까지 내 피인가

두 손이 강의 아퀴를 겨우 붙잡았고

강물은 목젖을 내놓고 울었다

정을 끊는다는 절정과

정이 없다는 무정이 뒤엉켜 흘러간다

어금니를 앙 다문 검음만

먼저 도착한 강가에서 사레들 때

귓가에 맴도는 되돌아가라는 속삭임

몸이 산산 흩어지려는 서리서리 두려움 때문에

나,

강 중심에서 친친 묶여버렸다

강의 북쪽이자 끝이 천 길 폭포인 것도 알겠다

 

 

[ 물푸레나무 ]

   
면과 명주는 물푸레 염색이 맞춤이라지

면은 색이 썩 듣지 않지만 명주는 할 때마다 짙어진다는 곁눈질이 재빠르다

향기마저 스민다는 군소리

면에 빨랫줄이 닿아서 어롱이 생긴다는 불평도 있다지

철매염을 해볼까, 철이라는 불굴을 입히는 거지

매염을 되풀이하니 물푸레라는 입말처럼

푸르스름한 회색빛에 입맛이 된다나 뭐라나

우기의 득음이


푸르르다 포르스름하다 파르족족하다 푸리다 프르다라는 말로 번진다, 시간의 둠벙이 여기 잔뜩 뭉쳤구나

물푸레만의 경 읽기가 처음부터 생활이었다나 뭐라나

물의 잔울음이 앞날에 있다지

나무를 태운 눈물은 누가 손바닥에 헹궈 담는 걸까

하긴 수청목이라는 이름보다 물푸레가 더 좋다

나무와 물이 함께 푸르르니까

서로 정수리까지 떠받치니까

먹을 갈아 문장을 남길까 눈썹을 그릴까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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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 ○ 그니 리뷰 2022-07-0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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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정현우 저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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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없이 찾아온 사랑과 슬픔을 견디는 마음에 대하여..

정현우 에세이 『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


잠긴 문을 두드리는 날엔 나의 문장이 쓰였다.

슬픔은 지금을 쓰고 사랑은 과거를 쓴다.

 

○ 1부 → 유년의 서(書) :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기대어..

《 엄마 》

세상에서 가장 짧게 부를 수 있는 슬픔..(p34)

《 예의 》

오늘은 내게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아.

....   안도와 적당한 슬픔이 어떻게 너에 대한 예의일 수가 있겠어.

....  아무리 걸어도 그곳으로 건너갈 수 없는 오늘은..(p59)

《 늦은 답장 》

"눈 온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야지,

  아프다고 해서 미안해."

할머니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김치를 꺼내 놓는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본다.(p67)

 

○ 2부 → 사랑의 젠가 : 나의 사랑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한다..

《 그냥 》

빛은 빛에게 약속한 적이 없지, 빛은 빛이듯이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나를 지 않사랑이라 부르는 그대를 사랑할 수 있겠다.  (p77)

《 동주의 눈 》

동주에게 말하고 싶다.

...  지겨울 때까지 살아보라고, 너의 잘못도 들키지 말고 슬픔도 들키지 말라고..(p109)

《 그럼에도 우리를 찾아와 울게 하는 것들 》

할머니의 시간은 질기게 이어져 엄마의 시간을 살아가게 한다..(p133)

 

○ 3부 → 성실한 슬픔 : 살아 있다는 건 결국 울어야 아는 일..

《 버려진 마음 》

버려진 것들이 나를 존재하게 했다. 그런 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버려지지 않았으면 한다.(p147)
 

○ 4부 → 남은 꿈 : 우리는 다시 쓰일 수 없는 기적


 

엄마의 일기.. 친구 수의 죽음.. 묘묘의 죽음..

이 책을 읽고나니 그의 시가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 에서  시.. <소금달> 이 다시한번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 소금달 ]

                                  - 정현우

잠든 엄마의 입안은 폭설을 삼킨 밤하늘,

사람이 그 작은 단지에 담길 수 있다니

엄마는 길게 한번 울었고,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김치를 꺼내지 못했다.

눈물을 소금으로 만들 수  있다면

가장 슬플 때의 맛을 알 수 있을텐데.

둥둥 뜬 반달 모양의 뭇국만

으깨 먹었다.

오늘은 간을 조절할 수 없는 일요일

 

다시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 를 읽어야 겠다..

처음과는 조금 더 다른 마음으로..  아주 조금은 더 시인의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  소/라/향/기  ...

천사시인인.. 정현우시인님.. 선물도.. 선물같은 글도..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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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 ○ 그니 리뷰 2022-06-1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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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심재휘 저
창비 |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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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시가 되기 전의 그저 하현일뿐입니다. 

조금 더 서쪽으로 갔습니다.

- 시인의 말 中 - 

 

[ 서울 ]

 

무엇인가 일요일인데 왠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어서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고 무엇인가

어디론가 걷는다


 

길가에 장미가 필 유월은

나를 데리고 걷는다

장미를 보는 순간은 비행기를

볼 수가 없고 구름 위에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전화기 속의

당신을 들을 수 없어서 무엇인가 일요일인데

왠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고

걷는다 걸으면서 눈앞의 신호등이 

서둘러 푸르게 변하기를 바라보며 나는

쓸쓸하지 않도록 걷는다

 

걷는다

걷는 동안 나는 나를 또

걷게 할 수는 없다

 


[ 행복 ]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 창문의 발견_런던 ]

                                    

다락방의 창문은 내 방에 기대어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로 비가 오지

아니, 그게 아니라 온다니까 내게로

양은 컵을 두드리며

때로는 막대기로 담장을 긁으며

새로 사 신은 구두를 아껴 걸으며

나를 만나러 오지

 

하지만 비는 언제나 창문 밖에 서서

다가오는 시늉을 거느리고서

읽을 수 있도록 흐릿한 표정만 짓지

빗소리를 보내지

첫사랑을 얼굴에 쓴 듯

이별의 날을 흉내 내는 듯


비는 내게 빗소리만 보내지

그런 줄로만 알았지

 

그러나 나는 이제 창문을  말하려네

빗소리는 비가 내는 것이 아니라

창문이 내는 아픈 소리

그러니까 내 방에 기대인 창문은

내 곁의 먼 곳이었네

 


[ 고장난 센서 ]

                      

어릴 때 먹던 고향 멍게보다

서울의 멍게는 잘 생겼다

그래 봤자 멍게는 멍게지만

장을 보고 마트를 나오려는데

출입구의 도난 방지 센서가 울린다

경비가 장바구니를 열어보란다

 

영수증에 적힌 대로

멍게 두알과 소주 한병

그리고 바다 냄새 조금


 

다시 한번 센서를 지나쳐보란다

이번에는 그분이 웬일로 먹통

수산물 코너에서 준 바다 냄새야 덤이지만

고향 봄 바다를 몰래 챙겨 가려는 도둑놈 심보를 

모르는 척해주는 거겠다

 

 


[ 뜻도 모르고 읽는 책 ]

                              

처음 가보는 바닷가였는데

해변의 여관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더니

그곳에는 어두울수록 잘 읽히는 책이 있었다

밑줄을 칠 수도 없고

귀를 접을 수도 없는

사실은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책

 

그 옛날 고향의 순긋 해변에 가면

무허가 소줏집에 가면

레코드판을 따라 돌아가던 노래

아껴 듣던 그 노래를 생각하는 밤이었는데

노래는 시들고 소줏집은 철거되고


그러다가 몸은 누워 잠이 들었는데

뜻도 모른 채 페이지만 절로 넘어가는 책

똑같은 소리가 밤새 계속되는 것 같아도

잘 들으면 매번 다른 소리를 내어서

잠들기 전에 소리를 세는 가련한 밤이었는데

나는 그 책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모양이라

오늘은 그 먼 바닷가가

곁에 와 함께 눕는 밤이다

뜻도 모르고 다만

사전에도 없는 그 순긋한 소리에 빠져

뜻도 모르고

 


[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마루에 오후의 봄볕을 깔고 그 위에 담요 한장을 더 깔고

엎드려 턱 괴고 바깥을 보면서 잠이 든 모양이다

 

흉한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몸이 식은 저녁

돌아가시기 전에 속이 안 좋던 아버지

식은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드셨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해 질 녘에는

내 등을 두툼하게 덮어주다가 기울다가

인사도 없이 떠난 햇살이 너무 멀고

흉한 꿈속의 사람은 노을 진 서편처럼 붉게 피었다 진다

 

삼월의 빈집은 겨울보다 더 추운 계절

동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한 저녁에

차가워진 배를 문지르면 배는 이내

뜨신 물속의 식은 밥처럼 온기가 돌고

배 속 먼 곳은 손이 닿지 않아서 여전히 차고

자다 깬 저녁은 금새 어두워진다

 

 

[ 해변의 밤 ]

 

불을 끄고 누우니

파도는 없고 소리만 있는 거야

 

자꾸만 밀어내도 

바닷가의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파도는 없고 소리만 가득한 이불

덮고 자야 하는 거야


 

잠시 나는 잠이 들기도 하였던 모양이지

잠의 바깥에서 파도는 기다렸던 모양이지

내가 잠 깨기만을 기다렸다가 이내

너는 지금도 캄캄한 해변이라고 어렴풋하게

온몸에 스며드는 소리만 있는 거야

 

꽃이 지던 창밖의 먼 과수원도

그날의 사랑도

이제는 소리만 있는 거야

해변의 밤이야

 

그런데 해변에는 밤낮

파도가 있는 한 걸까?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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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 그니 리뷰 2022-06-03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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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저
문학동네 | 201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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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 시인의 말 中 -

 

 

 

[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눈은 앞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수도 있다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벅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 땅거미가 질 무렵 ]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걷다보면

풍경 속에 또 다른 풍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것만 같은

어스름녘

젖은 하늘의 눈망울

물끄러미 등 뒤에 서서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과


까마득하게 잊었던 시간들

생각날 듯 달아나버리는 생의 비밀들이

그림자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잡히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

만져지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잘못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 밝음과 어둠이 섞이는 삼투압 때문에

뼈가 쑤시는

땅거미가 질 무렵

 

[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

                                      

누가 환생을 하는가보다

봄밤 달에서 떨어지는 꽃향기가

제삿날 피우는 향처럼 가득하다

목이 멘다

내가 알았던 생이었나보다

기우뚱 떠오르려다

사라지는 나뭇가지 위

달이 밀어내는 꽃봉오리가 뜨겁다

이 밤에 당신 무엇으로 오시는가

목이 꺾이도록 달을 바라보다가

저 달 속에 그만 풍덩 몸을 던져

당신이 오고 있는 길

그 생 쫓아 다시 오고 싶다

 


[ 설국(雪國) ]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마다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雪原)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멀어져가는 불빛 한 점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밤의 긴 머리카락

하얗게 사랑해 하얗게

적멸이 되어 돌아오는 말과

꽃봉오리 속에 같혀 지샌

눈의 날들

너무 환해 기억이 나지 않아

밤에도 하얬다

 

 

[ 허공 속 풍경 ]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집

허리둘레가 넓은 어머니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

우뚝 서 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말릴 나물들을 더 얹었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은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버린 집

어른거리는 골목 너머 장독대 너머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느 허공을 살다 간 것일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몰고 오던

씨줄의 공간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저 허공 속

환영(幻影)이야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 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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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 그니 리뷰 2022-05-18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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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류시화 저
수오서재 | 202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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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삶이 시를 잃었을 때

그대가 기억하는 내 시 한 편이

봄을 담고 그대에게 다가가기를

- 류시화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 떨림 ]


 

손가락을 못에 찔리거나 칼에 베이면

그 순간 손가락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존재가 깊이 상처  입어

날개가 부러지거나

심장에 금이 갈 때

너는 비로소

너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울대를 다쳐 바람으로 대신 우는 울새처럼

차갑고 고독한 행성 가장자리에서

별똥별 빗금으로

금 간 곳 꿰매며

다시 삶에 놀라워하며

 

 

[ 곁에 둔다 ]


 

봄이 오니 언 연못 녹았다는 문장보다

언 연못 녹으니 봄이 왔다는 문장을

곁에 둔다

 

절망으로 데려가는 한나절의 희망보다

희망으로 데려가는 반나절의 절망을

곁에 둔다

 

물을 마시는 사람보다 파도를 마시는 사람을

걸어온 길을 신발이 말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곁에 둔다

 

응달에 숨어 겨울을 나는 눈보다

심장이 닿아 흔적 없이 녹는 눈을

곁에 둔다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보다

그 돌에 부디쳐 노래하는 어린 강을 

곁에 둔다

 

가정법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보다

가진 게 희망뿐이어서 어디서든 온몸 던지는 씨앗을

곁에 둔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곁에 둔다

 

[ 흉터의 문장 ]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 겹쳐 읽다 ]

 

새는 어떻게 울대에 쌓인 어둠

그토록 밝게 쏟아 내며

새벽부터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전생의 어둠조차

몸 안쪽에

모아 두고 있는데

 

꽃은 어떻게 가느다란 줄기에

그토록 크고 무거운 꽃송이들

보란 듯이 쳐들고 있을까

나는 작은 번뇌의 무게에도

꺽어진 월하향 꽃대처럼

횡격막에 고개 떨구는데


 

풀잎은 어떻게 야생 기러기처럼

그토록 격렬한 비바람 후에

더 생기 있게 희망의 부리를 내밀까

나는 천랑성 별 아래서

사소한 운명의 몰아침마다

기립근이 끊어지는데

 

비는 어떻게 씻김굿하듯이

그토록 사납게 퍼붓다가

한순간에 멎을 수 있을까

나는 감정의 어휘들 기억에 뒤엉켜

절망의 이편에서 희망의 저편으로 건너가는 데

일생이 걸리는데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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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헌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 그니 리뷰 2022-04-1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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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이어령 저
열림원 | 202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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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 서문 中 -

 

[ 생물 ]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천의 물결로 빛나는 강물이거나

천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수풀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살어서 소리 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천의 지저귀는 새소리거나

천의 갈래로 쏟아지는 빗소리거나

 

소리 나는 것은 모두 다 즐겁다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그리고 이슬에 젖은 포도알을 터뜨리는 

여름 아침

 

살아서 어금니로 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 말 한마디로 ]

 

추운 겨울, 새벽 길거리에서 신문을 배달하는

아이가 떨고 있었지요

 

길을 가던 여인이 물어보았지요

얼마나 추우니

 

신문 배달을 하던 아이는 대답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얼마나 추우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춥지 않아요


 

신물을 배달하던 아이는 그렇게 말했답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추위를 녹이고, 세상을 바꿔요

내 아이가 추위에 떨지 않게 하는 방법은

남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한마디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작은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꿔요.

 

[ 잠은 솔솔 ]

 

사람들은

잠이 솔솔 온다고도 하고

잠이 살살 온다고도 하고

 

눈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리는데

사람들은

눈이 펑펑 내린다고도 하고

눈이 사락사락 내린다고도 하고

 

새는 아무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날고 있는데

사람들은

새가 훨훨 난다고도 하고

새가 씽씽 난다고도 하고


 

그러나 나도 들을 수가 있어요

내가 엄마에게 뽀뽀를 할 때

엄마 가슴이 뛰는 소리를

내가 아빠에게 뽀뽀를 할 때

아빠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잠처럼 솔솔

눈처럼 펑펑

새처럼 훨훨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요

 

[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건 소리를 들 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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