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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저/노지양 역
글항아리 | 2021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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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 의미와 실행의 측면에서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인다. 흩어졌던 삶의 흔적들을 어떻게든 한 곳에 모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하고, 간추리고 덧붙이며, 객관적 사실에 가깝도록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은 글을 쓸 수 있는 아무개가 어느 날 갑자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한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기억을 되살리고, 때로는 생각나는 누군가와 긴 통화를 이어가며, 쓰고자 하는 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동안 어깨가 쑤시고, 때로는 눈이 침침해져 오며,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설 때마다 우두둑우두둑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내야 하는 수고보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더 큰, 소수의 몇몇 사람만이 글로써 자신의 삶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 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침실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작업실로 갈 때마다 우리가 발 들인 이 과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결혼이라는 마법이 통하게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행동들을 점점 더 예리하게 느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의적인 작업에만 집중할 줄 아는 사람들로 보았다."  (p.217)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혹은 에세이스트로서 독보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 비비언 고닉의 회고록 <사나운 애착(Fierce Attachments)>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아, 작가란 천상 타고 태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절망 섞인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읽었던 어느 책에선가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대답하고 있는 듯했다. 뉴욕 브롱크스의 유대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엄마와 긴 세월을 함께 보냈던 브롱크스의 4층짜리 다세대주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것은 지금의 고닉을 만든 정신적 토대인 동시에 그녀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노동계급, 이민자 여성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 순간 나는 그 거리의 여자가 나를 어떤 면에서 감동시켰다고 인식했다. 그의 존재감, 그의 외양 하나하나가 나를 동요시켰다. 그를 낙담한 사람, 망가지고 병든 존재로 상정하고 내가 그를 치유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이미지는 무의식의 장막을 뚫고 들어와 스스로 발전해나갔다. 나는 그를 치유하고 그는 변화한다. 어느덧 여자의 좁았던 어깨는 넓어지고 피부는 깨끗해지며 머리는 단정해진다. 무엇보다 눈빛이 진지해지고 결연한 의지가 생겨난다. 그러나 내가 무슨 상상을 하건 가을은 깊어졌고 밤은 점점 더 추워졌으며 여자는 얇은 드레스와 찢어진 숄 안에서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p.88~p.89)

 

현재 로어 맨해튼에서 서로 1.5km 정도 떨어져 살며 종종 만나 함께 산책도 한다는 고닉 모녀는 그때마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나 애틋함으로 감싸기보다는 할퀴고 물어뜯는 말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주택 안팎에 살았던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시간 여행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고닉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시나브로 자신의 것으로 적용하고 체화해갔던 여자들의 사랑, 시기, 질투, 신의, 성애적 욕망을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과 움직임 등은 사실 고닉 자신의 정체성인 동시에 다시 떠올리기 싫은 희미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다세대주택에 살았던 다른 여자들에 비해 엄마는 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치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비록 엄마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때로는 그 세상을 열렬히 원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고 아빠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엄마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부엌을 떠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엄마는 다른 모든 이의 슬픔을 독차지하려 했고, 아빠의 죽음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않기로 결심한 듯 행동했다. 이때부터 엄마의 고통은 딸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딸이 거주하는 국가, 바짝 엎드려 따라야 하는 법과 규칙이 되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딸은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엄마의 고통에서 기원한 그 다짐은 딸의 새로운 고통이 되어 자신을 겨누고 만다.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 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 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 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p.300)

 

비비언 고닉의 회고록 <사나운 애착>은 여성 작가의 회고록에 마치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진부한 소재이지만,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 대화를 적절히 엮은 기록으로 인해 글이라기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 모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에 담는 전속 촬영기사를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두고 일을 시켰던 것처럼 어쩌면 그렇게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여 글로 옮길 수 있었는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팔순의 노모를 대하는 사십대 후반의 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끌어안은 채 상실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답답한 게 아니라 흐르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과 곧 다가올 자신의 상실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에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아닐지언정 책상이 잠재적 구원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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