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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취중잡설 2020-05-0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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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11.4.)> (김수영 전집 1 (2013(220))

 

가급적이면 화를 내거나 누구를 깎아 내리거나 욕하지 않으려 애쓴다. 늘 그러고 후회하기도 하고, 그 후회가 감정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해법이 아닌 것은 안다. 그럼에도 꾹꾹 눌러 담는다. 터뜨리기 보다는 혼자 삭이며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하루 종일 너무도 힘들고 짜증났다. 머리가 나쁘면 손이 고생하고, 상사가 한 마디 하면 부하는 열 번 움직여야 하는 날이었다. 멍청한 내 머리를 탓하며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떻게든 기를 쓰고 해내려 했다. 속으로 무능한 내 머리를 탓했다. 일하는 내내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삐져나오는 악감정을 부여잡고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집중했다.

 

결국 어느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안까지 이 감정을 가져 오고 싶지 않았다. 무능력에 대한 부끄러움, 내 감정을 표출했다는 민망함은 집 밖에 던져두고자 깊은 숨을 내셨다. 심호흡을 하며 그래도 오늘은 잘 넘겼다. 내일 힘내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긴 시간도 아니었다. 2분 남짓. 그 짧은 시간, 노래 한 곡을 더 들었다면. 기사를 한두 건 더 봤다면. 차라리 계단에 걸터앉아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버리고 갔어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답답한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5층이니 그다지 높은 층도 아니다.

10시쯤인데, 쿵쾅쿵쾅 계단을 걸어 올라갈 필요도 없다.

신경질 적으로 문을 닫을 필요도, 짜증나는 외침을 뱉지 않았어도 되었다.

 

그분들은 전혀 몰랐을 테다. 내가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당황스러웠겠지. 그럼에도 옹졸한 나는 상사에게 하지 못한 짜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쏟아냈다. 이발쟁이에게, 야경꾼에게. 얼마나 옹졸한 반항인가.

 

납작 엎드린 채 꼬리만 흔들고

한 번도 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했다.

비겁하게도 정점에서 백 걸음 비껴선 채

나는 아닌 척 하고 있다.

내 삶에서 한 걸음도 못나가면서

모르는 사람들, 익명의 존재들,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만 욕하고 있다.

 

나는 이처럼 작다. 모래보다, 바람, 먼지, 풀보다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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