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혁신의 뿌리
- 글쓴이
- 이안 블래치포드 외 1명
브론스테인
우리말 제목 ‘혁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봤다. 무엇이 무엇에 대해 혁신의 뿌리인가? 과학과 예술의 소통을 다룬 이 책의 내용으로 보면 결국은 과학이 예술에서 혁신의 뿌리 역할을 하고, 또한 예술이 과학에서 혁신의 뿌리 역할을 한다는 얘기일 텐데, 과연 그 관계가 늘 그렇게 조화로웠을까? 이를테면 웃음가스(아산화질소)를 풍자한 길레이의 그림이라든가, 핵시대를 풍자한 <엣지 오브 다크니스>와 같은 것들은 과학과 예술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고 표현하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예술은 과학에 반응했고, 과학도 예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런데 모든 예술이 과학에 반응했고, 모든 과학이 예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얻고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곤란하다. ‘모든’이라는 이 절대적 한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대부분’으로 낮춰도 그렇다. 과학과 예술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한 사례는 충분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사례는 더욱 충분하다.
그렇다면 예술과 과학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한 사례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훌륭한 성과를 냈을까? ‘훌륭하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며, 예술이나 과학에서 그런 비교가 과연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늘 그렇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망설여진다. 컨스터블이나 터너가 당대 과학의 성과를 그림으로 표현하였고, 그런 그림들이 높게 평가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퍼킨의 모브가 새로운 색감을 인류에게 선사한 것은 분명 과학에서 비롯된 일이고, 마이브리지가 말과 사람의 움직임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사진술이라는 과학의 성과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것들이 과학에 기댔기 때문에, 혹은 과학의 성과를 반영했기에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예술 작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훌륭한 영감을 표현했다는 것이고, 그 방식으로 과학의 성과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 이후의 모든 예술은 과학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가장 간단한 예로는 짜서 쓸 수 있는 튜브 물감으로 인해 인상파 화가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술가들이 어떤 매체를 이용하든 그것은 하는 수 없이 당대 과학의 성과에 힘 입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예술이 과학의 하위 조건으로 규정지어진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여기서 과학은 조건이라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른다. 당대의 과학은 현실 속에서 스며들어 있으며, 그것을 반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민감한 영혼을 지닌 예술가들의 숙명이자 의무일 수 있다.
이 책은 주로 영국의 사례에 집중하고 있지만, 영국이 이 시기에 가지는 위상을 생각해보면 보편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현대로 올수록 그 보편성의 무게는 조금씩 떨어지지만). 근대 이후 낭만의 시대, 열정의 시대를 거쳐 모호함의 시대(저자들은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시대 구분을 하고 있다)까지 과학과 예술은 서로 호응하기도 하고, 서로 비판하면서 왔다. 서로를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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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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