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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경고한다. 글이 좀 장황해질 것 같다.
<즐거운 나의집> 이후로
문학의 힘.
특히
‘진실’
진실은 꾸밈이 없다. 가공되지 않고 덧붙이려 하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본질이기에 포장하고 드러내려 하는 ‘거짓’ 과 구별된다. 따라서 수면 위에 잘 드러나지 않으며 때때로 가슴 쓰린 불편함을 동반하기도 한다. 마치 영화관에 앉아 2시간 동안 불편한 마음을 지닌 채,
김규항의 2004년 어느 날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이 적혀있다.
[글과 음악에 대한 내 모든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면 이렇다. ‘좋은 글은 불편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도가니>는 좋은 글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단지 가슴을 후벼 파는 불편함을 충분히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덮어버리고 싶은, 그래서 불쾌하지 않고 그냥 편하고 즐겁게만 이 시간을 즐기고 싶은, 또는 정신없이 바쁘기만 해서 자연스레 잊고 살아온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비슷한 종류의 불편함을 과감히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찢어 발겨 버리고 싶은 ‘자애학원’의 교장
읽는 이가 불편하지 않으려면 10대의 어린 청각장애, 지적 장애 소년 소녀들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 저 세 명의 피고인들은 당연히 무거운 실형을 선고 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어야 권선징악의 헐리우드식 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예상한 바와 같이 그들은 각각 집행유예와 짧은 실형만을 살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김기덕류의 영화로 자리 잡는다.
나는 이 찢어 발겨 버리고 싶은 인간들에게 그리 분노하지 않는다. 아무리 뻔뻔스러운 법정 진술로 피해자 아이들의 가슴에 이중 삼중의 칼을 꽂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에게는 단지 ‘불쌍한 개’로 대접해 주면 그만이니까… 나는 그들의 천박하고 동물적인 파렴치한 행위보다 그러한 일들을 저지르고도 온갖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로 인해 소위 ‘힘’을 가진 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그들의 견고한 카르텔, 이러한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에 분노한다. 또한 그것이 진실이기에 불편하다.
말 못하고 지적 장애마저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러한 행동을 행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자애 학원에서 벌어진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을 조금 더 일반화 해서 살펴보면 이러한 불편한 진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우리 주변에서 만나 볼 수가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자, 지금 우리가 숨쉬는 사회에는 돈과 권력,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이른바 ‘주류 집단’과 180도 반대편에 서 있는, 빈민, 장애인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 그리고 그 가운데 부단히 주류 집단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대다수의 ‘일반(?) 집단’이 있다. 나날이 삭막해져 가는 사회 현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부분은 ‘양심’이라는 단어를 주머니에서 굳이 꺼내려 하지 않는 현실. 주류가 되기 위해서, 또는 그 중에서도 더 높고 고매한 주류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을…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행되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탄압(?)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양심을 끄집어 내려 하지 않는다. 용산참사가 그랬고, 미디어 악법이 그러했으며, 광우병 촛불집회 또한 마찬가지 이다.
과연 이러한 내 생각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까? 과연 나만의 오바인가?
나는 <도가니>를 통한
한 세대.. 30~40년 전을 생각해 보자. 한강의 기적과 함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그동안(30~40년)을 생각해 보잔 말이다. 보통 사람들, 일반 사람들이 그동안에 평균적으로 못돼졌고, 평균적으로 악해졌다. 그리고 가치관이 많이 바뀐 듯 하다. 많은 이들이 30~40년 전과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돈’을 쫓아 언제나 지치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고, 역시 수없이 많은 새로운 ‘불편함’들이 더해져 갔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속적으로 일관된 논리를 지속하자면, 이는 사회적 구조적인 모순 이외에는 달리 명쾌한 해석이 없을 것 같다. 추악한 인간 개인이야 어느 시대에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나, 한 세대 전 보다 현재에 훨씬 더 많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고, 죄의식이나 양심의 문제보다 부와 명예, 권력을 쫓아 어떠한 수단이라도 서슴지 않으며 목적을 달성하려는 현상 또한 한 세대 전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덜착하고 덜윤리적이고 덜양심적인 사람들로 점차 변화되어 갔고, 이 사회는 이를 하찮음(?), 덜중요함으로 인식하고 방조한 듯하다. 아니, 어쩌면 이를 조장했을지도 모른다.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간에...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인권센터
마지막 선거공판이 있던 날의 법정 풍경을 쓴 어떤 인턴기자의 신문 기사 한 줄…
그 기사 한 줄 때문에 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던
지겹고 장황한 리뷰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글은 굉장히 성의있게 쓰고 싶었다. 또 실제로 허접하나마 많은 정성을 기울여 쓰고 있다.
이젠 ‘왜’에 대한 규명까지는 나름대로 끝낸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떻게’의 문제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어떻게’와 관련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가지만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많은 이들이 함께 읽고 또 나름대로의 ‘어떻게’를 구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서평을 마무리할 시점에서 다시 한번 ‘좋은 글은 불편하다’ 는 김규항의 일기가 생각난다.
나는…
나는 지금 충분히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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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