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1. 2010

이미지

도서명 표기
은교
글쓴이
박범신 저
문학동네
평균
별점9 (281)
당근

‘은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글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그것은 정말 신기하게도 답이 딱 떨어지는 자연수의 사칙연산 문제와 닮아있다. 나는 누군가가 문자를 빌어 그려낸 세상을 대면할 때 마다 꽉 막힌 체증이 풀린 듯 한 시원함을 느낀다.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게 서술된 피사체에는 어떠한 이견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녹색 이라고 쓰여 있다면 하늘은 정말 녹색일 것이며, 바다가 노랗다고 쓰여 있다면 바다는 정말 노랄 것이다. 세상은, 인간은 결코 그렇게 분명하고 명료할 수 없으므로 나는 선명한 ‘글’ 이라는 것을 진실로 사랑한다.


 


그랬는데, 70대 노인과 소녀, 어리석은 중년의 제자가 벌인 불안한 삼각로맨스을 그린 책 한권을 받아들었을 때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 발칙한 내용의 소설은 의뭉스럽게도 문장 속에 현실만큼 애매하고 씁쓸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연애소설인가 하는 가벼운 생각에 집어 들었는데 낭패였다. 마지막 장을 덮고는 은교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싶어졌다.


 


욕망과 욕구는 다르다. 입에서 맴도는 느낌에서부터 다르다! 라고 하면 조금 우스울까. ‘욕구’는 간절하고 조금은 지질한 소리가 난다. ‘욕망’ 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엔 왠지 모를 음침함과 끈적이는 사악함이 있다. 필요와 필요를 떠난 허황된 욕심의 차이다. 충족될 수 있고 절대로 충족 될 수 없는 것의 차이이다. 고로 욕구는 관용할 만하지만 욕망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서지우가 은교에게 갖는 감정도 사랑이고, 이적요가 은교에게 갖는 감정도 사랑이었다.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애달프고 불안정한 감정, 서지우도 이적요도 은교를 사랑했다. 같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흘겨보게 되는 것이다. 서지우가 이적요를 견제하며 자기합리화 했던 사유도, 은교에게 은밀한 감정을 품고 고뇌하는 이적요가 자괴했던 이유도, 노인과 제자의 일기를 번갈아 읽으며 충격에 휩싸였던 변호사Q나 독자인 나 자신도 모두 같은 이유로 이적요의 감정을 불편하게 부적절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적요의 그것이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욕망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덕적인 가치관이나 사회적 통념, 흔히 ‘금기’라고 학습된 것들로 굳어진 머리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70대의 노인이 10대 여고생에게 성적인 자극을 받고 연애감정을 느낀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황당할뿐더러 말도 안 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서지우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지우의 사랑이라는 것도 비틀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적요의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도 극적이기 때문에, 책의 중반부 까지는 서지우의 관점에 동조했었다. 노인네의 사랑은 더러운 욕망에 불구하고 서지우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남성적 욕구라고.


 


하지만 책장을 넘겨 갈수록 그들의 욕망과 욕구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고 나는 너무도 혼란스러워졌다. 글은 명료하게 은교에 대한 서지우와 이적요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말 은교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남성과 여성 간에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까? 이적요의 사랑을 판단하는 잣대로 서지우의 사랑을 본다면 그것은 순수함을 파괴하는 탐욕이었고, 서지우의 잣대에서 이적요의 사랑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이의 노망이었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은 흐릿해지고 욕망만이 선명해졌다. 애초에 이 책에는 사랑이 있던가? 문득 은교의 정체가 너무도 모호해져 버렸다. 은교는, 은교는 실제 했던가? 그들의 사랑인 은교는 혹시 환영은 아니었나?


 


시인이 사랑한 순결한 신부는 애초에 없었다. 존경하던 스승과 함께 있는 모습조차도 질투가 날 정도로 안달하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어린 애인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혈관이 톡톡 하고 튀는 것이 인상적인 새하얀 손을 가진 순결한 아이는 호의를 베푼 연상의 남성에게 원조교제를 이야기 할 정도로 되바라진 아이였고, 깊은 관계를 맺는 애인같은 사람을 무시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만 한 철없는 소녀였다. 늙은 시인이 사랑했던 소녀는 철없는 제자가 사랑했던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이적요와 서지우는 은교에게서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은교에게 투영된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지만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은교를 통해 보고 있었는지도. 시인은 생의 말미에서 날로 쇠약해지는 육신과 점차 무뎌지는 열정이 서글펐을 것이다. 바보 같지만 지독히도 순수하며 싱싱한 육체를 가진 제자가 부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제자는 너무도 뛰어난 스승 아래에서 넘어서기는커녕 근접할 수조차 없는 스승의 천재성을 항상 부러워했다. 재주 없음을 한탄하며 항상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을 한번쯤임 넘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노인과 제자의 해소 될 수 없는 욕심이 공교롭게도 ‘은교’라는 아이를 만나 표출된 거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내막은 두 남자의 욕망, 혹은 욕구라고 불리고 싶었던 욕망이었던 거다.


 


순수와 젊음을 갈망했던 늙은 시인은 은교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취하려 했다. 시인이 얻고자 했던 것은 17살 여자애의 싱싱한 몸뚱이가 아니라 그가 가진 순수와 젊음이었으나 그것은 끝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이 은교를 원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서지우와 은교와의 관계는 남성이 여성을 원하는 단순한 욕구 그 정도로 머물렀을 것이다. 스승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을 자신은 가질 수 있다는 생각, 그 어리석인 생각이 은교에 대한 단순한 욕구를 욕망으로 바꿔놓았고 결국엔 파국을 몰고 왔다.


 


두 남자는 은교를 매개로 욕망을 취하고자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 가운데 진실로 은교는 없었다. 남성과 여성의 로맨스도 없었다. 욕망을 쫓다 좌절한 두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연애소설로, 혹은 막장 드라마식의 설정으로 가려진 이 책의 실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결국은 두 남자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서로를 돌보며 갖게 된 허황된 욕심이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온 거다. 끝내 너무도 허탈해져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대는 은교처럼 나도 울고 싶었다.


 


욕구도 욕망도 그것을 구분하고 한쪽을 옹호하고 또 한쪽은 비난하고 하는 것을 떠나, 그것은 모든 인간이 평생 가지는 감정이기에 진실로 슬펐다. 누구나 평생 동안 가질 수 없는 것을,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게 된다. 주제를 모르고 허황되게 욕망하고 좌절한다. 그럴 줄 알면서도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심내게 될 것이다. 영리한 사람은 ‘포기’나 ‘달관’으로 조금은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인간의 생이란 너무 서글프다.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떤 식으로든 해피엔딩이라면 조금은 위안을 받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인간에게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욱 우울해 졌다.


 


은교라는 이름의 욕망은 숨 막힐 정도로 관능적이고 아름다웠지만, 누구도 얻을 수 없었기에 지독히도 슬펐다. 서지우도 이적요도 불쌍하다. 욕망하는 인간은 애처롭다. 


 



 


 

좋아요
댓글
4
작성일
2023.04.26

댓글 4

  1. 대표사진

    우렁각시

    작성일
    2010. 5. 20.

  2. 대표사진

    당근

    작성일
    2010. 5. 21.

    @우렁각시

  3. 대표사진

    지독한열정

    작성일
    2010. 5. 21.

  4. 대표사진

    당근

    작성일
    2010. 5. 21.

    @지독한열정

당근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4.3.26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4.3.26
    첨부된 사진
    20
  2. 작성일
    2024.3.25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4.3.25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3.11.16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3.11.16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6.2
    좋아요
    댓글
    125
    작성일
    2025.6.2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6.5
    좋아요
    댓글
    74
    작성일
    2025.6.5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6.4
    좋아요
    댓글
    52
    작성일
    2025.6.4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