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리뷰형용사라는 걸쇠"명사는 세상을 이름 짓는다. 동사는 이름을 움직이게 한다. (…) 형용사는 존재의 걸쇠다." 이 문장을 읽고 나면 내가 어떤 명사에 어떤 형용사를 붙일 때, 그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을 얼마나 사물로 굳히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 물음은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가 『종교의 의미와 목적』(1962)에서 던진 비판과 같은 자리에 닿는다. 스미스에 따르면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이름은 근대 서구가 만들어낸 명사다. 이 명사들이 생기면서 사람이 초월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의 과정은 경계가 그어진 체계, 곧 소유하고 비교하고 판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굳어졌다. 카슨이 말한 "명사는 세상을 이름 짓는다"는 스미스에게 "이름 짓는 순간 세상이 굳는다"는 경고가 된다. 형용사는 이 굳어짐을 마무리하는 걸쇠다. "불교적", "기독교적", "종교적"이라는 말은 대상에 본질을 붙인다. 걸쇠가 걸리면 그 대상은 그 속성을 지닌 것으로 고정되고, 동사의 움직임은 멈춘다. 스미스가 내놓은 처방도 결국 동사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라는 명사를 버리고 두 개념으로 풀어 쓰자고 했다. 하나는 역사 속에 쌓인 외적 자료인 축적적 전통(cumulative tradition)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그 전통을 통해 초월과 맺는 살아 있는 관계인 신앙(faith)이다. 『Faith and Belief』에서는 이 추적이 한 단어로 좁혀진다. belief는 본래 "사랑하다, 신뢰하다"에 가까운 동사적 의미였는데, 어느새 "명제에 대한 동의"라는 명사적 의미로 굳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물음, 곧 어떤 형용사가 대상을 얼마나 사물화하는가에는 스미스식 기준으로 답할 수 있다. 형용사가 **과정을 가리키는지, 본질을 가리키는지**를 보면 된다. "신앙적인 삶"은 하나의 운동을 가리키지만, "불교 신자"나 "종교적 인간"은 소속과 본질을 확정한다. 같은 형용사도 문장 안에서 이 둘 사이를 오간다. 결국 문제는 형용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붙이는 순간 내가 움직이는 것을 멈춰 세우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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