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리뷰'말뚝들'을 읽고은행 대출 심사 업무를 하는 장. 납치 되는 장면에서 '범죄에 얽힌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아니어서 좋았다. 함께 했던 문장들 덕분에 내게도 말뚝이 다녀간 느낌이다. p.13 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굉장히 당황했는데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사수가 원하는 게 바로 장의 당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근거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p.23 용서가 보장된 사과는 마음을 가볍게 한다. 용서받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과를 한다. p.28 출발하는 순간에는 거짓된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없는데 달리다 보니 생각지 못한 곳에 도착해 있었던 거라고 말이다. p.29 누구나 모두에게 거짓말을 한다. 시작은 언제나 작은 거짓말이다. p.34 엔진룸에 비둘기라도 들어갔나 싶게 갑자기 푸드득푸드득하더니 액셀을 밟아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치고 가지 못한다. 타인을 해치려는 사람은 자신을 걸어야 하므로. 세계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만만해하지만 생각보다 취약하다. p.39 장은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한 가지 의문에 확실한 답을 얻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죽음 앞에서 기도를 하는가? 그렇다. p.47 금융적 채무 원한적 채무 p.49 큰 부자는 원래 빚이 많고, 분에 너무 큰 빚은 빚이 아니라 권력이어서 새 기회를 받는 것 뿐이었다. 월급을 받아 학자금 대출을 줄여나가는 일이 가장 뿌듯했다. 가끔은 자기 삶에 행복이랄게 너무 부족한 것이 억울했다. 그러다가도 그냥 남들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만족하기도 했다. 트렁크에서 나가 허리를 펴고 다시 회사에 출근하면 진실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새 팀으로 발령받아 전에 없이 분골쇄신할 각오를 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갗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살아갈 가치가 있었다. 삶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임할 준비가 돼 있었다. p.52 롤링 스톤스의 <새티스팩션> 오케스트라 버전 의 <배철수의 음악캠프> 시그널 p.54 짐짝처럼 묶인 채 방치되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지켜내고 싶었다. p58.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주변에 건물이 하나도 없이 탁 트인 하늘이 보기 좋았다. 저 구름, 돛단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p.62 자신이 항변해햐만 하는 상황이 너무나 옳지 않게 느껴졌다. . . 한시라도 빨리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p.68 살면서 어지간해서는 시비를 당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고, 그런 태도가 경찰 일을 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 피해자로 경찰에 왔는데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나는 학생이 된 꼴이었다. p.84 말뚝들이 죽은 사람의 몸인 사실이 확인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말뚝들의 머리는 털 오라기 하나 없이 반지르르했고 얼굴도 방금 세수한 것처럼 매끈했다. 그것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뻘밭에 거꾸로 파묻혀 있었다. 공기는 물론 해수와도 접촉한 적 없는 피부가 일체의 부패 없이 미라가 돼 있었다. 기사를 보며 그런 상태를 '시랍화'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됐다. . . 입을 다문 말뚝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명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반가사유상의 얼굴과도 닮았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어깨의 통증과 공포스러운 기억 속에서 장이 편안해질 수 있는 순간은 그 얼굴을 감상할 때뿐이었다. 그래 봤자 쌍놈이 양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감집 마름 노릇이라도 하려면 개처럼 뛰어야 했다. p.90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생각이란 말이 너무 이상했다. 팔각처럼 요리에 쓰는 향신료의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요즘 젊은것들에 대한 부아가 치밀었다. 세상을 만만히 보고 편하게만 지내려는 문화가 만연했다. 체험형 인턴. 일 시키고, 과제 시키고, 교육까지 시켜가며 쓸 만한 놈인지 아닌지 두고두고 관찰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수고했다며 집에 돌려보내는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장은 이사람들에게 고마울 것이 전혀 없었다. 배려가 아니라 무관심이었다. 그야말로 개새끼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장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장이 겪은 고난은 장의 개인적인 체험일 뿐이었다. 스스로 극복할 문제였다. 체험형 인턴의 체험보다도 회사에 기여하는 바가 적었다. 그에 관해 저들이 짊어져야 할 어떤 종류의 책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타인의 곤란에 인색하기는 장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왜 날이 갈수록 잘못되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고생 많았어 하며 어개를 툭 쳐준다면 전심전력으로 충성을 맹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직의 권력 지형 내에서 한 번도 열세인 적이 없는 파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로 보내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는 손발이 묶인 트렁크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본부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장의 속도는 시속 250킬로미터라는 걸 확신했다. 온몸의 림프샘을 따라 도파민이 마구 분비되는 기분이었다. 양해를 구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이건 또 무슨 청소년 드라마의 대사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고객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실이 장에게 생각지 못한 위로가 됐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말도 안 되게 갑자기 무너지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은행 바깥은 아무 일 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내일의 메뉴를 생각한 장은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불렀다. 신경 쓰고 있지 않던 허기마저 머리를 맑게 해주는 긍정적인 자극처럼 느껴졌다. 장은 생각했다. 친구란......좋은 것이다. 거의 없지만. 오후에도 내내 일했다. 안락했다. 집에 혼자 갇혀 있으면 답답했고, 트렁크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밝은 조명 아래 적당한 온습도가 유지되는 사무실이 세상 어느 장소보다 편한 곳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늘 하던 일을 하는 것의 소중함을 전에는 몰랐다. 지리멸렬하기만 하던 회사 생활이 제법 할 만하게 느껴졌다. p.107 ....................... 오프닝 멘트가 끝나고 첫 곡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손 위에서 전부 녹아버린 느낌이었다. p.130 이제 태이는 어떠한 예감도 소용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저릿한 감각이 장의 손을 훑고 지나갔다. p.131 죽은 자들이 말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재난인가? 재난문자라고 보냈더니 숫제 광화문 초대장이 돼버린 셈이었다. p.137 말뚝들이 퍼뜨린 바이러스가 이미 당신들의 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포와 불합리가 그것입니다. p.138 휴대폰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사진첩에 없는 옛날 사진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흡사 기억의 무덤과도 같았다. 먼지가 쌓이지 않고 썩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보된 무덤이었다. .... 오래 된 파일 속 태이. 요즘 사진에 비해 해상도와 선명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먼지가 쌓이지 않는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듯했다. 지금 찍는 사진도 미래에 보면 희미할 것이었다. p.150 소모품처럼 이용당하는 건 누구에게라도 기분 나쁜 일이었다. 마음 상했을 젊은 친구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지금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모든 기회가 바닥난 건 아니라고.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다 보면 수렁을 멋어나는 때가 올 거라고 말이다. 동기들은 서툴게 위로하느니 차라리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장에게는 그런 반응이 반쯤은 외면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쌍놈인 데는 변함이 없음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체험형 인턴이 자신의 체험을 예정보다 몇 시간 이르게 자체 종료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을 진심을 다해 믿기로 하는 약속이 무서웠다. 정상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다. 장이 생각할 때 그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타인의 태도로 확인받을 수 있는 영향력 따위가 전부일 거다. 누군가는 겨우 그 정도에 영혼을 팔기도 한다. 따져보면 영혼이란 건 대표적으로 과대 계상된 자산이 틀림없엇다. 분식 회계의 첫걸음이었다. p. 136 거침없는 인턴의 욕설에 장은 허를 찔린 듯 웃어버렸다. 인턴도 함께 웃었다. 장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대화도 좋은 마취제였다. 인턴에게 말했다. 그냥 운이 없었던 거죠. 나쁜 사람의 이유 같은 것에 귀 기울여줄 필요 없어요. "어디에 가든 잘할 거예요." "그렇겠죠. 뭐 대단한 회사라고 저에 대해 알겠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우동 맛이 평소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변한 건 우동이 아니라 장이었다. 다시 또 해주의 전화를 받는 날이 있다면 좀 더 밝게 통화할 수 있도록 농담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176 카지노를 이기는 방법은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돈을 전부 잃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 "나도 내가 한심해서 죽을 맛인걸.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를 반겨주는 주님이 계셔. 조용한 방에서 묵상하고 있으면 그분이 무얼 원하시는지 알 것 같아." "아니, 빨리 오래. 카드 한판 치자셔." "앤데르이아는 예언자가 아니라 갬블러잖아요. 당신한테 베팅한 거예요. 가장 높은 확률에." "뱅커로 가. 하지만 뱅커는 못 이겨." p.179 장은 가슴이 조여드는 듯 답답해졌다. ...눈물을 훔치며 간신히 발을 옮겨 데보라에게 갔다. .. 말뚝은 전날 로비에서 마주친 것보다 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의 마음이 전해졌다. 원망이었다. 방향을 모를 원망이 중력처럼 무겁게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설명이 없어도 그냥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집을 나설 때와 같은 자리에 말뚝이 서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창을 등진 채 역광의 윤곽이 윤슬처럼 빛났다. ... 나란히 눈물을 흘렸다. 묘하게도 따뜻한 위로가 됐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거짓말.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없어요. 말하기 곤란한 걸 생각할 때 그렇게들 말하죠." 데보라의 말을 듣고 장은 생각해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과연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울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네요." "신기해요.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이 말뚝들이 나와 관계있을지도 몰라요." "어떤 관계?" "들어볼래요?" "계속 듣고 있잖아요. 나, 그런 거 좋아해요." 눈물은 생각보다 기분을 개운하게 만드는 데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못해 답답할 일이 없었다.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걸로 해소가 됐다. 어쨌든 그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건 분명했다.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장은 떠올렸다. 저 많은 말뚝들이 누군가의 기억으로 서 있던 바다의 풍경을. 파도가 그렇게 시끄러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할 거면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낫죠." p.199 진실이라는 게 별것 없다고 느껴졌다. 공원에 나뒹구는 담배꽁초만도 못했다. 어차피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p.203 사람들이 강처럼 흘러 한자리에 모여든 이유는 울기 위해서였다. 우는 사람은 답답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는 게 정부에겐 비상사태였다. 광장은 원래 생겨난 시절의 모습처럼 소란스러웠다. 말뚝들도 언젠가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떠돌이처럼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그들에게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닐 것이었다. 말뚝 수거자들이 마스크를 벗고 앉아 함께 울었다. 이어 도착한 몇 번의 수거자들도 시민들에게 설득돼 자리를 깔고 앉아 함께 울었다. 계속 모여드는 사람들, 고양이들, 개들, 너구리 족제비들까지 동상 앞에 나타나 낑낑대고 짖고 하울링하고 야옹거리는데 시끄럽다고 쫒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뚝들이 무슨 신호나 낌새도 없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던 것처럼. 기다려도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차 대리와 장은 회사 욕을 하다가 본부장 흉을 보다가 그 밖에 회사 곳곳에 산재하는 험담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각개격파 하듯 욕을 해나갔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맘이 불편해져 좋은 이야기를 해보자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걸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공포도 옅어졌다. 쓸데없이 기억력 좋은 몸이 엄살 부리느라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형. 다음엔 납치당하지 마. 사람들 걱정하니까." 차 대리는 진지한 말투로 당부했다. 휴비트를 만드는 데 가장 걸림돌은? 인간의식' 인간의 잠재력은 삶에 대한 의지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걸 제어해 인간의 모든 활동을 연산으로 치환하면 어덯게 되겠습니까? 휴비트가 되는 겁니다. 재벌 3세다운 아비투스 블로흐 구면 : 양자 역학에서 순수한 상태의 2단계 양자계(큐비트)를 기하학적으로 나타낸 것. 대민의 제련소에서 일하던 노동자 그저 말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전에 없이 따뜻했다. ...타인을 해치려는 사람은 자신을 걸어야 하므로, 아무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 세계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만만해하지만 생각보다 취약하다. 장은 그렇게 세상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에 휩싸였다. 대답 없는, 아니 대답할 수 없는 군인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 즐겁게 떠들다가 갑자기 이야깃거리가 사라진 술자리 같았다. p.247 장이 올린 내용 증명은 이미 저장되어 사람들에 의해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기억할 만한 죽음에 대해 써서 올렸다. 그들 모두에게 잊힐 수 없는 죽음이 말뚝의 모습으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저마다 내용 증명을 보내고 화면을 캡처해 올렸다. 가처분 신청서를 작성해 접수하고, 법원 제출용 탄원서를 쓰기도 했다. 이름 없는 말뚝들의 기록이 쌓여가고 있었다. 라면 한 개를 끓여 엄마와 나눠 먹던 아이, 전복된 선박의 선원, 길에서 죽은 청년,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p.265 마음은 편안했다.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은 이제까지 삶에 대해 너무 큰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이쯤에서 인정하고 싶었다. 희망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기적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명백한 느낌을 믿었다. 그들은 말뚝을 지킬 것이고, 말뚝을 지키려는 장을 지킬 것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로도 내내 장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두려움은 희미해졌다. 테믈렌. 몽골. 12년간 대민 하청 업체 직원으로 일한 제련소 노동자. 카드뮴 중독이 원인이 된 간부전으로 사망. 장을 찾아와 돈을 빌려 가고 삼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근로복지공단에 요양 급여를 신청했지만 심사 결과가 나오기 전 죽었다. 장은 태이가 준 칩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태이와 나누는 영원한 인사 같았다. 이제 태이는 정말로 기억에만 남는다. 가끔 사진이나 꺼내 보겠지. 말뚝의 입술 사이로 칩을 밀어 넣었다. 마음을 다해 명복을 빌었다. 큰 빚이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장작불에서 떨어져 나온 불티가 스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제 몸을 빨갛게 달구듯일 말뚝은 하나의 빛이 되어갔다. 장은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는 게 느껴젔다. 믿고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것이 구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모든 게 괴롭고 슬프고 또 필연적으로 느껴졌으므로 평생 이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서...... 말뚝은 자기가 만든 빛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장의 눈에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순애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그곳에 두고 온 것과 가져온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간 것은 잊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고, 자기 죄도 용서받기를 바랐다. 장이 생각할 때 진희 선배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었다. 안 좋은 병에 걸린 거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자신만의 속도로 타인을 지나쳐버렸다.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p.295 장이 두고 온 SSD에서 나온 자료로 대민이 벌인 산재 은폐와 불법 하도급까지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전방위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대민그룹의 차남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말리부. 차량 원부에 원소유주가 강원랜드 앞 전당포에 넘긴 차였다. 공황 발작이 덮쳐오면 장은 말뚝의 하얀빛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살면서 본 다른 빛이 많지만 그 빛처럼 힘을 주는 빛은 많지 않았다. 그때 생긴 구멍과 그때 생긴 빛이 싸울 때 빛을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빛의 기억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 빛을 본 순애 씨의 존재가 장에게는 특별했다. 장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말뚝을 직접 만나고, 환한 빛을 보고,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됐다. 그 사람들은 다시 찾아온 말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대문 안쪽에 적혀 있는 오래된 손글씨와 전화번호. 아는 사람의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 안다고 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 트렁크에 넣어뒀습니다. 주머니에 넣어뒀습니다. 비상등 켜두었습니다. . 그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 빚으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망해버린다. 테믈린의 아들 김규승을 만난다.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 서로의 마음에 진 빚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그 빚은 변제되지 않은 채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한다. 억울하게, 서글프게, 쓸쓸하게 이름도 없이 죽었던 자들이 죽은 채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 삶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제대로 겪지 못한 슬픔은 모두 어디로 가나. <말뚝들>은 우리 사회가 그간의 무수한 사회적 재난을 충분히 애도하고 통찰하는 대신 은폐하고 소거하기에 급급해왔음을 겨냥한다. 겪어야 할 슬픔은 억누르거나 외면하지 말고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통과해야만 한다. 슬픔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웅크렸다 우리 곁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니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없는 슬픔에 빠져들게 하는 '말뚝'은 슬픔은 슬픔의 방식으로 겪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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