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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안온한 날들
- 글쓴이
- 남궁인 저
문학동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하는 행위가 글쓰기"라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이 글에 가장 맞는 사람이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이 아닐까 싶다. 쓰지 않고 그의 시간들을 견딜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남궁인의 첫 책 『만약은 없다』를 읽었을 때 그는 내게 슬픔의 사람이었다. 슬픔은 그를 휘감고 있었고 자칫하면 삼킬 것만 같았다. 응급실의 한 쪽에서 분초를 다투며 죽음과 싸우는 그의 몸부림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의사가 되기 전 죽음에 이끌리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고 했다.
누구도 내게 그의 안위를 부탁하거나 염려해 달라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걱정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책이 『제법 안온한 날들』이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그러모은 것 같은 느낌은 적잖이 걷히고 섬세하고 조금 예민한 성정의 사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안심이다.
"식당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고 빈 식탁을 보고 있으면 배가 고파지기 시작해. 식사가 나오기 직전에 가장 허기짐을 느끼고 곧 차려질 음식에 안달이 나는 것처럼, 나는 당신과의 약속이 정해졌을 때부터 당신이 보고 싶어지다가 만나기 직전의 순간 가장 견딜 수 없이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 나를 만나러 집에서 출발해 내가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점차 애달아 마음이 간질거리다가 결국 당신이 근처까지 도달했다는 문자를 보내왔을 때 그 칠흙 같은 먹먹함과 연민과 사랑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나는 결국 울 수밖에 없어. 당신이 나를 만나러 왔을 때 한 번도 예외 없이 내가 눈물짓고 있던 것은 그 때문이야. 그건 슬픔도, 애잔함 때문도 아니고,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 견디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이 나타나주어서라고." 눈물의 이유- p 58
이런 결을 타고난 사람이 생과 사의 처절한 갈림길을 그토록 많이 만나고, 씨름하고, 자신의 입으로 죽음을 선언해야 할 때 받게 될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인지 남궁인은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했다.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일 테다.
그에겐 이런 일들은 다반사다. 새벽녘 누군가로부터 회칼을 맞고 온 환자를 맞을 때, 응급실에는 머리를 크게 다친 사람과 식칼을 맞아 복부가 뚫린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말을 하고 있으며, 그 때 남궁인은 치료를 못 받겠다며 욕을 하는 청년의 두 동강 난 종아리 아랫부분을 들어 맞추고 있는 중이다.
과다 출혈로 위태해진 환자는 마취도 충분히 못된 채 시술 받느라 의식이 가물거리는 중에도 소리를 지르고, 피를 뒤집어쓴 채 나온 그를 보고 환자의 어머니는 기절을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하고 난 후 남궁인은 쓰러지듯 퇴근한다. 피범벅이 된 환자는 그를 안았고, 남궁인은 수술을 위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를 잠 재웠다. 그가 죽는다면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을 후회할 것이라며 샤워기를 틀어 놓고 크게 운다. 전에도 이런 글을 읽었다.
"기억이란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글을 남궁인은 자신의 블로그 대문에 올려놓았다. 문신처럼 남은 슬픔의 흔적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어느 한 계절의 공기마저 추억이 되는 섬세함으로 누군가의 어깨를 토닥이며 숙명처럼 자신의 일을 경주하고 있다.
너무나 혹독해 만약은 없다고 할만큼 지독했던 하루는 이제 안온한 날들 속에 편입된 듯하다. 영속하지 못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라지겠고, 아무리 경험해도 슬픔은 무뎌지지 않겠지만, 그처럼 편안하고 조용한 시간 속에 잠겨보라고 남궁인은 우리를 초대한다. 그렇게 잠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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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