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너스에게
현신은 우리를 위해 8인승 승합차를 렌트해왔어. 아이들이 차례로 승차를 하는 동안 양나 씨는 옆에 서 있다가 한 명 한 명 일일이 껴안아주었어. 맨 마지막에 타는 나를 다정히 껴안으면서 양나 씨가 속삭였어. 아이들을 잘 부탁해. 나는 그녀가 나를 믿어준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어. 그녀는 적어도 내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거든. 차 안에 앉아 창을 통해 마당에 있는 하나와 앨리스와 양나 씨와 아이들을 보았어. 부탄과 습자지가 호스로 물을 뿜다가 서로를 향해 발사를 시작했고, 결국은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물을 마구 흩뿌려 마당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어. 하나와 앨리스는 마침 이때다 싶었는지 포플러나무 밑으로 황급히 도망을 쳤지. 부탄이 우리가 탄 차에까지 물을 뿌려대기 시작하자 현신은 황급히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어. 양나 씨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물을 뒤집어쓰며 비명을 질렀어. ‘애미’의 마당을 지나 열려진 문을 나와 길로 들어서도록 아이들과 양나 씨의 높은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왔어.
내 옆자리에는 누룽지가 앉아 있었어. 나는 그애가 불편했으므로 될 수 있으면 떨어져 앉고 싶었지만, 과연 그애는 누룽지라는 별칭답게 좀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어.
“저, 누룽지.”
“응? 왜?”
“춥지 않아?”
나는 차가 흔들릴 때마다 누룽지의 훤히 드러난 넓적다리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것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 그래서 내 재킷을 벗어 덮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
“아니? 하나도 안 추운데?”
이런 제길.
“추울 거야. 여자는 저……, 음, 넓적다리가 추우면 안 된다고 엄마한테 들었던 거 같은데.”
나는 재킷을 벗어 누룽지에게 덮어주며 중얼거렸어.
“넌 정말 친절하구나. 난 너처럼 좋은 애는 만나본 적이 없어.”
나는 어색한 기분에 일주일 동안 잘 지냈느냐고 물어보았어. 그러고는 아차 싶었지. 대체 그따위 걸 물어서 뭘 어쩌자는 거람.
“토마토 때문에 조금 힘들었어. 내가 또 다이어트를 하는 줄 알고 토마토를 먹을 때마다 아빠가 소리를 질러대서.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미안하니까.”
“다이어트를 자주 하는 거야?”
“그렇게 자주는 아닌데…… 가족들은 내가 하는 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렇구나.”
누룽지는 잠시 후에 변명하듯 덧붙였어.
“내가 사고를 많이 쳐서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웃으며 말하자 누룽지의 표정이 겨우 밝아졌어.
나는 누룽지와 계속 이야기를 했어. 그애의 가족은 그애까지 네 명이었고 아래로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었어. 누룽지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돼. 내가 뭔가를 하면 다들 화를 내고 비웃어.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랬어.
하지만 비너스. 누룽지가 더 열심히 화장을 하고, 더 열심히 멋 내는 걸 상상해봐. 문제는 노력이 아닌 거 아닌가…… 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그럴 거야, 라고 말해주었어.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누룽지는 정말 목소리가 좋아. 작고 나직하고, 곱고, 다정하고, 따듯한 느낌의 목소리. 그래서인지 그애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다감하게 들려왔고 나는 그애의 기괴한 화장을 그럭저럭 잊어버릴 수 있었어.
‘애미’에서 에버랜드까지는 사십 분 정도의 거리. 평일 오후여서 진입로도 원활했고 주차장에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어. 현신은 우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각자 하고 싶은 게 있겠지만 오늘은 조금만 참자. 다 함께 왔으니 다 함께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했어.
“촌스러.”
필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어.
“기왕 왔으면서 넌 대체 왜 그러니?”
잡이 참견을 하는 사이 아이들은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동물원에서 풍겨오는 동물들의 냄새가 맡아졌어. 곱게 물들고 있는 붉은 노을 때문인지 나는 오랜만에 와 보는 놀이공원에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외출을 한 게 4개월 만이었고, 그 때문인지 학교를 다니던 평범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 ……물론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누룽지만 아니라면. 나와 누룽지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그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아서 나중에는 그들의 무례함에 염증이 날 지경이었어.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날이 떠오르고 말았어. 그들의 따가운 시선은 따가운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테지. 따듯한 시선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따듯한 생각뿐일지도 모르겠어, 비너스.
아이들은 나와는 달리 줄곧 시시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표를 끊고 출입문을 통과하자 모두들 들뜨는 것 같았어. 현신도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어. 원래 학생 같은 느낌이어서인지, 그는 아는 동생들을 데리고 놀러 온 대학생처럼 보였어. 우리는 약속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기로 했어. 다른 건 아무것도 타지 않고, 도라가 만족할 때까지 오로지 롤러코스터만. 그동안 놀이공원을 꽤 들락거렸어도, 그렇게 무한정으로 롤러코스터만 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도라가 질린다는 듯 말했어. 평일 오후인데도 롤러코스터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어. 나는 도라에게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어.
“끈질기게 버티다보면 결국 우리밖에 남지 않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지는 않아.”
우리는 줄의 맨 끄트머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어. 마는 이어폰을 낀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필과 잡은 계속 수다를 떨었지. 현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도라를 달래주느라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어. 나는 이제 누룽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받아들인 터라 그애에게 이런저런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마음껏 웃겨주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외롭고 답답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누룽지와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제법 즐거웠다고. 그리고 누룽지의 굉장한 차림새 역시 그애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누룽지도 세련돼져서 이때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날이 올까? 아니면 누룽지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퍼포먼스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이러한 차림새를 고수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 되어도 굉장한 일이지 않아, 비너스? 사람은 계속 변화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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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