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방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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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모였다. 물론 예전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풀피리님, 쭈양, 그리고 나...아니 다시 부르자. 혜원샘, 희진양 그리고 지아. 이렇게 셋이 모여 단출하게 다시 토론회를 시작하였다.
장소도 바꾸었다. 신촌 민들레영토에서 세미나실을 빌려 매달 열었던 토론회. 그곳의 기억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다시 예전만큼의 규모가 되면 그때 다시 그곳에서 열고자 하였다. 그래서 다시 모인 장소는 <부천역 근처>.
사실 또 한 명을 꼬시려고 했다. 처음 만나는 자유로 불렸던 현귀샘. 다시 모이자는데 너무 소극적이어서 장소라도 집과 가까우면 나올까 싶었는데 늘 '선약이 있다', '그날은 집안일이 있다' 등등 핑계를 대며 나오지 않았다. 안 놀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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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로 잡은 약속은 점점 당겨져 2시가 되었다가, 1시로 결정을 하더니 정작 시간을 당긴 아가씨들(?)이 늦게 도착하였다. 나 삐침이야~
[벌써 3년]
혜원샘과 희진양을 부천역 앞에서 만나고 헤어진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건 이 글을 다 쓰지 못한 채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얘기와 같은 뜻일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들과 만남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기대가 크면 아쉬움도 큰 법. 난 이들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바랐나 보다.
[내가 바란 것]
난 무척이나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어릴 적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덕분에 늘 혼자 집을 보기 일쑤였다. 또 일곱 살 터울인 여동생이 있으나 서로 성격이나 취향이 너무나도 달라 아웅다웅 다투기 일쑤였지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중학교부터 온통 남자투성이인 곳으로만 적을 두었더니 변변한 여자친구는 사귀지도 못해 보았고, 남자친구라고 해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적인 친구>가 없으니 그야말로 혼자. 외톨이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집에는 TV라는 친구가 있어 매일매일 다양한 프로그램이 나를 반겨주었고, 밖에는 오락실이란 공간이 있어서 동전 하나만 있어도 나랑 1~2시간 정도는 즐겁게 대화와 스킨쉽을 허락하곤 했었다. 정말 고마운 친구였다. 내가 "죽어라~"를 외치며 단추(버튼)을 사정없이 두드려대면 정말로 죽는 시늉뿐만 아니라 죽어주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절친(?)을 멀리하게 된 건 <책>이라는 친구 덕분이었다. 중학시절엔 <추리소설>, 고교시절엔 <무협지>. 대학시절엔 잠시 책을 멀리했지만, 이십대 중반부터 다시 책을 잡기 시작하자 무섭게 읽어댔다. 1년에 100권 읽기에 도전하며 1년에 거의 200여 권씩 읽어대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책을 읽고 나면 <공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을 즐겨 읽은 사람들은 아시리라 믿는다. 나는 이런 느낌을 얻을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그러다 찾게 된 게 <인터넷 책 카페>와 <블로거>들이었다. 이곳에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들과 책을 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만난 이들이 바로 <토론회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혜원샘과 희진양도 시차를 두고서 차례차례 만났다.
이런 내가 이들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이야기>였다. 애정이 듬뿍 담긴 이야기말이다. 정말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가까운 카페로]
시간은 흘러 벌써 1시30분이 넘었다. 조금 늦는다는. 거의 다왔다는 문자메시지가 왔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그닥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다. 불만. 아니 삐침에 더 가깝다. 37분. 혜원샘이 부천역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나오는데도 한 눈에 알아보다니...
희진양은 2시가 넘어서야 도착했으니, 그동안 부천역 앞에서 혜원샘과 나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짝 뾰루퉁한 내 말에 혜원샘은 달래듯이 답을 해준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희진양까지 오고서 우리 셋은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다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까]
예전에 비하면 참 초라한 만남이었다. 한 때는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또 떠들어도 모자라 밤을 지새우지 일쑤였고, 한밤중이라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쉬워했고, 올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였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우리 셋은 바로 이 때를 그리워하며 서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궁리들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실망과 상처 때문에, 혹은 바쁜 일과 덕분에 더이상은 올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젠 더이상 바랄 수 없는 일이라는 얘기가 푸념과 함께 나왔다.
[구드룬 파우제방]
토론회이니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땠어요? 이 책."
"지아님이 선정한 책이니 먼저 말해보아요."
"음..이 책은..."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리 오래 떠들지 못했다. 혜원샘과 나는 선생이니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지만, 희진양(지금은 선생이 되는 공부를 하는 중)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가벼운 이야기만 즐겨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깊은 이야기는 좀처럼 나눌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혜원샘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토론>을 벌이기보다는 각자 세미나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나마 한 명은 질문을 모르는 패널이 되어서...
결국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이야기>를 접어야 했고, 마침맞게 희진양도 성당엘 가보아야 한다며 자리를 떳다.
[다음은 있을까?]
희진양이 가고나서 둘만 남은 우리는 애초에 부르려했던 '처음 만나는 자유'에게 연락을 했다. 결과는 안 나올 수 없다는 얘기. 결국 카페를 나온 혜원샘과 나는 바로 근처에 있는 <이화 주막>으로 갔다.
혜원샘은 소주, 난 막걸리. 안주는 두부김치와 해물파전.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것도 불협화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술 한잔 들어가니 술술 나오는 이야기보따리.
사는 이야기..돈벌이는 괜찮나? 사귀는 사람은 있나? 책 이야기..사실 이번 책은 별로 재미가 없는 책이었다. 다른 책을 선정해보자. 그럼 어떤 장르? <문학?> 이건 내가 잘 모르고, <비문학?> 이건 혜원샘이 잘 모르고..그러다 영화 이야기가 나왔지.
칼 세이건의 <콘택트>. 3년 전에도 오래된 영화였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혜원샘. 주제가 뭐였죠?
"여주인공이 이런 얘기를 해요. '만약 지구에만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그건 정말 큰 공간낭비일거예요' 뭐, 남자주인공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죠. 여주인공은 <과학자>, 남주인공은 <성직자> 둘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죠."
"와~ 지아님, 그걸 다 기억해요?"
"몇 년 전에 다운받아 영화를 봤어요."
"참, 지아님의 기억력은 남다른 것 같아요. 몇 년 전 기억도 다 떠올리는 걸 보면요."
"어쨌든 이 영화의 주제는 '과학적 신념이든 신학적 신념이든 결국 최종결론은 같다'는 거예요. 뭐, 제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죠?"
"음...여주인공은 <과학자>이기에 신의 존재를 믿진 않죠. 그러나 결국 탐사선을 타고서는 <황홀경>을 경험해요. 미지의 존재와 조우한 여주인공이 내린 결론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남주인공은 <성직자>예요. 신의 존재를 믿죠. 그래서 늘 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황홀경>. 즉,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는 경이로운 경험이죠. 그래서 남주인공이 내린 결론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분이 계시다'는 거죠."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경험을 한다."
"칼 세이건은 <과학자>와 <성직자>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은 서로 대립하기 일쑤죠. 미국이란 현실에서는 더욱더요. 사실 요즘 미국에선 <지적설계자>라는 이론이 새롭게 등장하며 이른바 <창조과학>이라는 게 부각되고 있어요. 이게 뭐냐면 간단히 말해서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거예요."
"이걸 지금 미국에선 아이들에게까지 가르치려고 하고 있지요. 과학시간에 말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단다. 우주의 모든 것을 말이지'..예를 든다면 말예요."
이때쯤 혜원샘에게 전화가 왔다. 훈이형이다. 온단다. 와도 되냐고 혜원샘이 묻는데 난 상관없다고 했다. 사실 훈이형과는 껄끄러운 게 있다. 우리 둘 모두 서로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에 한 번 논쟁이 붙으면 서로 언성을 높이기 일쑤였다.
훈이형이 왔다. 오자마자 무슨 막걸리냐며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으이그..그냥 남 쳐묵는 거 그냥 봐주면 안 되나..싶었지만 또 다투고 싶지 않아...훈이형이 질색하는 닭발안주 시키는 걸로 분을 삭였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나누는 데 훈이형만한 사람도 없다. 해박한 지식에, 논리정연한 말솜씨에, 지독한 고집쟁이라서 한 번 논쟁이 불 붙으면 좀처럼 심심해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더이상은 논쟁을 걸고 싶지 않다. 잘난 척도 보기 싫다. 난 이제 지쳤다. 싸우려는 게 아닌데, 그냥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인데...서로 어깃장을 부리기 일쑤고 서로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만다.
이건 아니다. 더이상 아니다. 이젠 헤어질 때가 왔다. 정말 아쉽지만...
[에필로그]
그 뒤로 혜원샘과 희진양과는 몇 차례 더 만났다. 아쉽게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신변잡기를 나누거나 영화를 함께 보거나...벌써 1년도 넘은 일이 되어 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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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